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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미술사 시간에는 진경시대를 공부할까 합니다.
내용이 길지만, 진경시대는 조선 후기 문화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므로 미술 뿐 아니라
조선 후기 문화 전부를 조감하기 땜분입니다.
진경시대
1. 정조시대 까지
인조반정(1627)을 일으킨 반정 훈척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반정을 주도한 공훈 세족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사림인사들은 정권에서 밀려났다. 16세기에 등장했던 이이, 이황, 조식, 서경덕 등의 사림 세력은 주춤했다.
효종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서 학문에 전념하더 처사(處士)인사들을(讀書之人) 대거 등용했다. 서인계의 송시열(1607-1689), 송준길(1606-1672)과 남인계열의 허목(1595-1682), 권시(1604-1674) 등이다. 이들은 산림처사들이다.
산림처사는 함깨 공부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된 학파의 영수가 붕당을 이루어 지도자 역할을 했다. 말하자면 지식인 집단을 대표하여 왕으로부터 권력을 위임 받아 세상을 다스리는 도리를 펼치려 했다. 그들은 여론(淸議)을 기반으로 정치를했다.
인조 반정 이후에 사림이 정권을 잡는 과정에서 혈연보다는 학문적인 동지가 뭉쳐서 붕당을 만들었다. 16세기 이후로는 사림이 득세했다. 이런 현상이 인조 반정 이후로는 더욱 심했다. 지식인인 사대부가 과거를 통하여 출사하는 것이 사림의 기본 자세였다.
학문을 함께 공부한 사람이 모여서 정파를 만드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들은 산림에 은거하여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면서 국가의 기본 정책 방향을 설정했다. 학파가 붕당을 만들어서 서로 견제함으로 정치계를 정화해 나갔다. 산림에 은거한 인물이 현실 정치와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국가의 정책에 큰 구도를 그리면서 훈수를 하는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붕당 정치의 구도에서 최후의 결제자는 왕이었다. 이런 구도를 만들면서 신권과 왕권이 조화를 이룬 것이 17세기 정치였다. 이처럼 왕권과 신권이 서로 견제하는 붕당 정치야말로 이상적인 구도이다. 그러나 ‘이상’이라는 말은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뜻이 있다.
결과로 오히려 붕당 정치의 폐해가 나타타자 왕이 제동을 걸고 강력한 왕권을 지향했다. 왕의 정책은 탕평책이었다. 탕평책은 인사권을 위시한 모든 권력을 왕이 장악함으로 붕당을 무력화 했다. 탕평책은 왕의 권한으로 사색 붕당에 골고루 기회를 부여했다.
탕평책이 실효를 거두면서 나라는 안정을 찾고 문화도 꽃필 수 있었다. 왕에게 권력이 모이자 왕을 둘러싸고 있는 권신이 권력을 행사하는 부작용이 나타났다. 특히 왕실과 혼인을 한 외척이 근신으로 다가갔고, 명문가로 태어났다. 대표적인 가문이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이다.
안동 김씨의 세도의 뿌리는 병자호란 때에 반청주의자로서 척화 정책을 강력하게 주장한 김상용(1561-1637)과 김상헌(1570-1653) 형제이다. 이들이 국정을 이끌면서 반청 대명의리론을 내세웠다. 보수세력인 노론을 형성하여 조선 청치를 농단했다.
영, 정조의 탕평 정책은 붕당의 파벌을 약화시켰지만 서울 경화 세족과 지방의 향촌 사회와 분열이 일어났다. 지방 향족은 세력이 약해지고 경화세족(京華世族)은 외척이 중심이 되어서 세도정치로 나아갔다.
요약하면 붕당 정치의 폐해를 줄이려 탕평책을 쓰면서 왕권을 강화했다. 사회가 통합되고 나라는 안정되었지만 선비의 사기가 떨어지고 사림의 정체성이 훼손되었다. 경화세족은 권력이 강화되고 향반 세력은 쇠퇴했다.
2. 정조의 왕권 강화
인조 반정 후에 권력을 잡은 서인은 다시 공서(功西)와 청서(淸西)로 나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서인이 권력을 잡고 공서가 되었다. 서인 중에도 집권 세력을 견제하면서 공서파의 월권에 시비를 분명히 하려는 서인은 청서가 되었다. 청서의 후원 세력은 산림처사들이었다.
효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청서를 등용했다. 청서의 핵심인 산림처사들에게 세도를 맡겼다. 산림처사라는 면에서 서인과 남인을 모두 등용했다. 붕당의 폐해는 1683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정쟁이 가열되면서 잦은 정권 교체가 일어나서 붕당 정치의 한계점에 도달했다. 산림처사 출신들의 폐해에 왕실과 연결된 척신들이 다시 세도를 맡아서 권력 행사를 함으로 어떻게든 개혁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외척을 배척하고 사대부를 정치 주체로 삼으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왕위에 오르자 규장각을 만들어서 규장각 중심의 각신들이 근신이 되어서 또다시 귀근지폐(貴近之弊-귀족화한 근신의 폐해)가 나타났다. 이런 현상은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의 과정에서 생겨났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이어받아 정치의 기본으로 삼았다. 한편으로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과 근신 참모의 집합지인 규장각을 설치했다. 화성에 신도시를 건설하여 정치기반으로 삼았다.
(1) 탕평책 계승
문화정책을 펼치면서 규장각을 설치했다.
처음 한 일이 문체를 표면화하여 전통적인 문체를 사용할 것을 요구했다. 노론 벽파의 박지원일파가 신체문(新體文)을 사용하고, 북학파 계열이 중국의 패관소설을 받아들이면서 문체에서 순수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다. 이것을 정조의 문체 반정이라고 한다.
정조의 문체 반정은 탕평책을 사용하면서 노론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말한다.
(2) 규장각 설치
학문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규장각을 통하여 정조는 근친 세력을 만들어냈다. 초계문신(抄啓文臣)이라 하여 37세 이하의 문신을 규장각에 모아서 교육을 시켰다. ‘위로는 선왕을 받들고 아래로는 인재을 양성한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근신을 만들어냈다. 초계문신은 정조의 문화 정책 수행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 결국 규장각은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기관의 역할을 했다.
(3) 장용영 설치
장용영은 정조를 호위하는 친위부대 이었다.
(4) 화성 신도시 신설
화성 신도시 건설은 정조의 정치 기반을 만든 도시계획이라고 말한다.
3. 조선 중화사상
임진, 병자의 양란은 우리가 오랑케라면서 멸시했던 종족과 침략 당하고, 패배를 하자 민족 자존심에 대단한 상처를 받았다. 이에 자존심을 회복시키는 방법은 우리나라를 문화국가라는 자부심과 청에 대한 복수심, 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로 나타났다.
(1) 존주론(尊周論)
유교에서 존중해야 하는 나라를 주나라라고 했다.(공자와 주자) 이때의 주나라는 명나라의 상징적인 나라였다. 1644년에 명이 망하고, 1660년 대에는 양즈강 유역에서 저항하던 명의 잔존세력마저 소멸되자 새로운 이론 전개가 필요했다. 존중해야 할 나라를 주-> 명을 거쳐 우리나라 자신을 존중의 나라로 전환했다. 이로서 中華사상은 조선으로 바뀌어 小中華思想은 朝鮮中華思想으로 전환했다.
청에 대한 복수심은 정벌론(北伐論)으로 발전했다.
명에 대한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사상은 조선을 폐쇄시켰지만 조선문화 수호 내지 발전 논리가 되어서 조선 문화를 꽃피우는 역할도 했다.
임진, 병자 양란 때 목숨을 바친 사람을 충신 열사로 추존하는 운동도 이런 맥락에서 나타났다.
(2) 대명의리론
정치 실권을 장악한 서인은 성리학을 이론 근거로 삼았다. 성리학은 이이, 이황이 조선의 현실에 맞게 조선성리학을 만들었다.
성리학의 윤리의식과 의식은 다시 북벌론의 대안으로 대명의리론을 내세우는 데 일조를 했다. 북벌론의 실현이 어려워지자 존주론이 힘을 얻으면서 조선중화사상으로 발전했다.
명이 망한지 60년이 되는 1704년에 대보단이라는 단을 만들어서 명 황제의 제사를 지내는 행사를 추진했다. 송시열 제자들인 노론 계얼이 적극적이었고, 소론을 소극적이었다.
4. 새로운 이념의 정립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양란이 준 정신적인 피해를 서서히 극복해가기 시작했다. 조선중화사상인 존주론이 발전하여 국가 체제를 재정비 했다. 문화적으로도 조선 문화를 존숭하는 ‘진경 문화’를 펼쳤다.
정조시대에 이르면 조선중심 문화 만으로는 변화하는 시대에 적응할 수 없었다. 외부에서 새로운 이념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더욱이 젊은이를 중심으로 청나라의 발전된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운동을 전개했다.
(1) 북학론
청의 문명을 받아들이자는 운동은 노론계의 핵심 가문 출신인 홍대용과 박지원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노론 자제들은 연행사를 수행하여 연경으로 가서 청의 발전상을 목격한다.
북학론은 박지원의 서얼 출신 제자들인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와 서이수 등, 박지원에 양반가 출신 제자 이서구, 남공철에 의하여 규장각에서 먼저 수용했다.
(2) 서얼 허통 정책
영, 정조의 탕평책에 힘입어서 서얼들의 인권 신장 청원 운동이 있었고, 정조는 수용했다.
(3) 신해통공정책
조선의 상업정책은 일종의 사회주의 정책으로 정부가 관장했다. 육의전을 위시한 시전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정부의 정치 자금줄 역할을 했다.
정조는 이 제도를 폐지하고 자유롭게 장사를 하도록 했다. 배오개 시장, 남대문 밖의 칠패 시장, 종로 부근의 종루 시장 등 3대 민간인 시장이 생겼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육의전이나 시전 이외에 일반 상인과 장꾼이 상업의 한 축을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5일 장이 형성되면서 18세기 말에는(정조시대) 전국적으로 시장이 1000여 개가 넘었다., 전업 상인인 등짐장수(부상)과 봇짐장사(보상)이 나타나서 소금, 해산물, 놋쇠, 도자기, 무명, 비단, 장신구 등등을 팔러 다녔다.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도매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을 여각, 객주라고 했다. 도매상인의 힘이 거세지면서 상권도 서서히 육의전이나 시전에서 이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정조 때 신분제도의 붕괴와 일반 상인들의 활약이 커지면서 부의 분포에 변화가 나타났다. 사회의 변화는 시민사회를 형성해갔다. 존주론은 북학파의 등장으로 변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변화들이 진경문화를 펼쳐 냈고, 다시 몰아내는 역할을 했다.
진경문화
율곡 이래의 주자학 이른바 조선성리학과 조선중화의식은 숙종 대 이후에 나타나는 진경문화의 배경이 되었다.
이들 중 일부의 경화사족은 서울에 나타난 새로운 변화를 바라보면서 조선 사회가 직면한 여러 문제에 해법을 찾아 나섰다. 이로서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과 더불어 문화예술에도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다. 조선사람들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그를 시서화에 사실적으로 표현했다.
동국진경이라고 불리는 겸재 정선과 관아제 조영석, 공재 윤두서 등이 산수화와 풍속화를 그렸다. 삼흡 김창연과 사천 이병연의 진경시, 옥동 이서, 백하 윤순 등이 쓴 동국진체의 서예는 조선의 개성을 드러냈다.
이처럼 조선의 특징들을 사실적으로 드러낸 문화를 진경문화라고 하고, 이 시대를 진경시대라고 말한다.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朝鮮) 고유색(固有色)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문화절정기(文化絶頂期)를 일컫는 문화사적(文化史的)인 시대구분(時代區分) 명칭(名稱)이다.
그 기간은 숙종(1675-1720)대에서 정조(1777-1800)대에 걸치는 125년간이라 할 수 있는데, 숙종 46년과 경종 4년의 50년 동안은 진경문화의 초창기라 할 수 있고 영조 51년의 재위 기간이 그 절정기이며 정조 24년은 쇠퇴기라 할 수 있다.
진경문화가 이 시대에 이르러 이처럼 난만한 꽃을 피워 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문화의 뿌리가 되는 조선성리학(朝鮮性理學)이라는 고유 이념이 이 시대에 이르러 완벽하게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었다.
율곡과 율곡의 학설을 지지하는 우계(牛溪) 성혼(成渾, 1535-1598),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 송강(松江) 정철(鄭澈, 1536-1593), 백록(白麓) 신응시(辛應時, 1532-1585) 등 율곡 사우(師友)들의 문하에는 이 학설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구름 모이 듯하여 거대한 학파를 형성해 가게 되니, 이들이 장차 서인(西人)으로 지목되는 조선성리학파들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경복궁의 서북쪽인 백악산(북악산)과 인왕산 기슭에 터잡아 살고 있었다. 율곡학파의 양 날개라 할 수 있는 우계와 구봉이 각각 백악산의 서쪽 기슭과 남쪽 기슭에서 나서 자라나 살았고 백록 역시 그 사이의 백악산 기슭에서 나서 자랐으며 송강은 인왕산 동쪽 기슭 옥인동에 터잡아 살았기 때문이다.
조선성리학파의 급속 성장은 여타 보수계열의 학자들을 결속시키는 동인(動因)을 제공하여 퇴계학설을 묵수하는 퇴계 직제자들과 비순정주자학자(非純正朱子學者)들인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남명(南冥) 조식(曹植, 1501-1572)의 제자들이 연합하여 동인(東人)을 형성한다.
그러나 곧 순정주자학파인 퇴계계가 분리되어 남인(南人)을 표방하자 화담계와 남명계는 북인(北人)을 자처하는데 북인은 다시 분열하여 화담계는 소북(小北)이 되고 남명계는 대북(大北)이 된다.
전기 2백여년 동안을 주도해 온 생경한 외래이념을 청산하고자 하는 문화적 자존심이 상하에 팽배하고 있어서 그 도도한 흐름은 이미 시류(時流)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성리학파는 보수적 순정성리학파인 퇴계계의 묵시적 동조아래 혁명을 일으켜 성공하니 이것이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이다.
우선 문학에서 율곡의 평생지기인 송강 정철이 한글 가사문학으로 국문학 발전의 서막을 장식하였고 율곡학파인 간이(簡易) 최립(崔笠, 1539-1612)은 독특한 문장 형식으로 조선 한문학의 선구를 이루었으며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는 조선 고유 서체인 석봉체(石峯體)를 이루어 내었다.
문장과 필법은 선비들의 일상사이니 율곡의 사우(師友)와 문생(門生) 중에서 얼마든지 이에 능한 이들이 배출될 수 있는 일이라서 이와 같이 신속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만 하여도 선비의 일상사가 아닌 만큼, 선구적인 이념에 공감하는 선비 중에서 그림 재주를 타고 난 이가 출현해야만 고유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화풍을 창안해 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조선고유 화풍의 출현은 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그런 선비화가의 출현을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에 약관 29세로 참여하였던 창강(滄江) 조속(趙涑, 1595-1668)이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곧 그림도 조선고유색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창강은 우계 성혼의 제자인 풍옥헌(風玉軒) 조수륜(趙守倫, 1555-1612)의 자제로 광해군 4년(1612) 김직재(金直哉)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옥사한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인조반정에 참여하였었다.
그러나 그는 명리(名利)에 뜻이 없어 반정 성공 후에는 일체 벼슬길에서 물러나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시화(詩畵)로 이를 사생(寫生)해 내는 일에만 몰두하게 되니, 이때 사생해 낸 시(詩)를 진경시(眞景詩), 그림을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로 부르게 되었다.
진(眞)짜 있는 경치(景致)를 사생해 낸 시와 그림이라는 의미도 되고 실제 있는 경치를 그 정신까지 묘사(描寫)해 내는 사진(寫眞) 기법 즉 초상 기법으로 사생(寫眞景致)해 낸 시와 그림이라는 의미도 된다.
한편 인조반정 성공 후에 조선의 사림들이 성리학적 이상사회 건설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국제 정세는 조선에게 매우 불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었다. 우리 국토의 북쪽 변방에 터 잡아 살면서 우리에게 복속(服屬)해 오던 여진족(女眞族)이, 명(明)이 임진왜란에 우리를 돕느라 피폐해진 틈을 타고 강성해져서 청(淸)나라를 건국하고 중원(中原)을 넘보면서 성리학적 국제질서를 파괴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명의 종주권을 인정치 않았다.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조선성리학파들은 군사력이 열세인 줄 알면서도 일전불사의 투지를 보이다가 결국 여진족에게 양차에 걸쳐 침략을 당하게 된다. 바로 정묘(丁卯, 1627), 병자(丙子, 1636)의 두 차례 호란이 그것이다. 특히 병자호란에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던 인조가 청군에게 포위 당하여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치욕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 지식층들은 심각한 좌절감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지식인들은 자기 회복의 방법을 놓고 성리학의 절대 신봉이냐 이의 탈피냐 하는 두 가지 노선으로 갈라지게 된다.
율곡학파의 적통(嫡統)을 이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789)과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 1606-1672) 등은 주자성리학의 절대 신봉을 주장하고, 비순정주자학적인 요소가 강하였던 소북계(小北系) 출신 기호(畿湖) 남인(南人)인 백호(白湖) 윤휴(1617-1680)와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등은 성리학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반정의 원훈(元勳)이었던 율곡(栗谷) 제자 묵재 이귀(李貴, 1557-1633)가 세도(世道)를 율곡의 수제자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에게 위임한 이래 주자 성리학의 절대 신봉은 변함없이 이어져 온 전통이었다.
사계가 서거하고 나자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이 세도를 담당하여 주전파(主戰派)들을 이끌고 대청강경(對淸强硬) 자세를 끝까지 고수해 나가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게 되었고, 청음 사후에는 사계의 의발(衣鉢)을 전수 받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세도(世道)를 담당하여 효종(孝宗)과 함께 복수를 부르짖으며 북벌(北伐)을 도모하고 예치(禮治)의 기틀을 마련해 놓는다.
이와 같이 인조반정 이후에 비록 사림종장(士林宗匠)이 계속 세도(世道)를 담당해왔다 해도 우암처럼 국왕의 사부(師父) 자격으로 국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정사를 직접 천단한 예는 아직까지 없었다.
여진족이 무력으로 중국을 차지했다 해도 중화의 계승자가 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야만 풍속인 변발호복을 한민족(漢民族)에게 강요하여 중화문화 전체를 야만적으로 변질시켜 놓았으니 중국에서는 이미 중화문화 전통이 단절되었다는 판단이었다. 중화문화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주자성리학의 적통(嫡統)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조선만이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할 자격을 갖추었으므로 이제는 조선이 중화(中華)가 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생각은 당시 우리보다 열등한 여진족에게 치욕을 당하고 그 힘에 눌려 살아야 한다는 민족적 자괴감을 보상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어서 상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이 곧 중화(中華)라는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가 조선 사회 전반에 점차 팽배해 가기 시작하였다.
Ⅱ. 고유색(固有色) 발현(發顯)
문학에서는 서포(西浦)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나와 『구운몽(九雲夢)』,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등 한글소설을 써내기 시작하였고 한글로 쓰는 시조(時調)는 국왕으로부터 일반 사대부는 물론 내방(內房)과 중서(中庶), 기녀(妓女)에 이르기까지 이를 애호 제작하였으며 송강(松江) 정철(鄭澈)로부터 비롯된 한글가사는 내방(內房)가사로 자리를 굳혀 가게 되었다.
한문문학 분야에서도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1653-1722)이 나와 우리 국토의 아름다움을 소재로 하여 이를 시문(詩文)으로 표현(表現)하되 우리 어감(語感)에 맞도록 어순(語順)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독특한 진경시문학(眞景詩文學)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를 점차 후학들에게 전파해 간다.
서포와 삼연은 모두 우암의 제자들로 서포는 사계의 증손자이고 삼연은 청음의 증손자였으니 이들이 문학으로 조선 고유색을 현양하는 일에 앞장서서 진경문화를 선도하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우암은 사계와 청음의 학통을 모두 이어 받고 있었는데 이 양가는 병자호란 당시 순국충신(殉國忠臣)을 배출한 명문가로 대청(對淸) 적개심이 골수에 박힌 집안이었다. 서포의 부친인 김익겸(金益兼, 1614-1636)과 청음의 백씨(伯氏)인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 1561-1637)은 강화도를 지키다가 강화도가 청군에게 함락될 때 함께 자결하였었다.
삼연의 문하에서는 진경시(眞景詩)의 대가인 사천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의 대가인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이 배출되어 이들이 진경문화를 절정에 올려놓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낸다.
겸재는 스승 삼연과 집우 사천이 진경시로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거침없이 사생해 내고 있었으므로 이를 그림으로 바꿔 표현하고자 하는 뜻을 세우고 이에 노력을 기울이는데, 이는 창강 조속으로부터 비롯되었으나 아직 이루어내지 못한 조선성리학파들의 숙제이기도하였다. 마침내 겸재는 그 숙제를 풀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우리 산천을 표현하기에 알맞는 새로운 그림 기법을 창안한 것이다. 이는 중국 북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선묘(線描)와 남방화법의 특징적 기법인 묵법(墨法)을 이상적으로 조화시키는 방법이었다.
우리나라 산이 금강산이나 설악산처럼 화강암 암봉이 서릿발처럼 모여 있는 것과 오대산이나 지리산처럼 흙으로 덮여 있어 수목이 울창한 것으로 나뉘는 것에 착안하여 화강암봉으로 이루어진 골산(骨山)인 경우는 북방화법인 선묘로 이를 표현하고 수목 우거진 토산(土山)인 경우는 남방화법인 묵묘로 이를 표현하면서 한 화면에 이 두 가지 산 모습을 조화롭게 배치하는 것을 화면구성의 기본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골산을 양(陽)으로 보고 토산을 음(陰)으로 보아 성리학의 기본 경전인 주역(周易)의 음양조화 원리에 맞춘 화면구성법이었다. 이는 중국회화사에서 항상 시도하면서도 이루어 내지 못하였던 남북방화법의 이상적 조화의 성공이기도 하였으며 조선에만 있는 조선 고유화법의 창안이기도 하였다. 이런 화법은 겸재가 벌써 36세(숙종 37년, 1711)에 금강산을 그려내면서 시도하기 시작하여 60세(영조 11년, 1735) 이후에 완성해 낸 독자기법이었던 것이다.
골산은 서릿발 준법을 주로 쓰고 때로는 도끼발 준법을 아울러 쓰기도 하나 모두 절벽을 나타내기 위해 수직선을 길게 내리긋는 것이 특징이며, 흙산은 이른바 미가운산법(米家雲山法)을 주로 써서 비구름과 안개가 숲이 우거진 산봉우리를 휘감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는데 나무숲은 굵은 먹점(米點)을 몇 번이고 덧찍어 푸르름이 뚝뚝 흘러내릴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런 진경산수화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당시를 살던 조선인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전 중국풍의 산수화 틀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등장하던 인물들이 중국의복을 벗지 못하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조선풍속화가 출현하게 되는데 겸재가 시작한 이런 인물 풍속화는 겸재보다 10년 후배로 다같이 율곡학맥을 잇고 있던 관아재(觀我齋) 조영석(1686-1761)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기틀을 잡아가게 된다.
이렇게 진경산수화와 풍속화가 출현하여 그 화법을 완성시켜 나감으로써 그림에서 조선고유색을 현양해 내고 있을 때, 도자기도 분원(分院)이 광주(廣州) 경안리(慶安川) 하구(河口) 한강과 합수(合水)되는 지점 부근의 금사리(金沙里)와 분원리(分院里)에 차례로 정착되면서 달항아리나 술병, 각종 제기(祭器) 및 연적(硯滴), 필통(筆筒) 등 문방구(文房具)에서 조선 특유의 기형과 깊이 있는 순백색을 자랑하며 조선 고유의 백자 문화를 한껏 고양해 간다.
이는 진경문화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영조(英祖, 1694-1776)가 왕자 시절 사옹원도제거(司饔院都提擧)가 되어(1711) 그 후원 대책을 확립하고 나서 진행된 급속한 발전이었다.
영조는 서포 김만중의 종손(從孫)이자 숙종의 첫째 왕비 인경(仁敬)왕후 김씨(1661-1680)의 친정조카인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 1670-1717)이 주선하여 숙종의 후궁이 되게 하였던 숙빈(淑嬪) 최씨(崔氏, 1670-1718)의 소생으로 삼연 김창흡의 당질녀인 영빈(寧嬪) 김씨(金氏, 1669-1735)의 양자가 되어 서포가인 광산김문(光山金門)과 삼연가인 안동김문(安東金門)의 비호(庇護)로 왕위에 등극한 임금이었다.
따라서 그는 13세에 안동김씨(安東金氏)들이 터잡아 살아올 뿐만 아니라 율곡학파가 율곡 당시부터 터전으로 삼고 살아온 북악산과 인왕산 사이의 창의동(彰義洞; 莊洞)에 별궁(別宮)을 마련하고 삼연학파로부터 학문과 예술을 전수받게 되는데 겸재는 그의 그림 스승이었다.
글씨는 한석봉체가 기본틀을 형성하면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로 이어져서 이 양송체(兩宋體)가 율곡학파의 기본서체로 자리를 잡아간다. 그런데 겸재와 거의 동시에 남인 쪽에서는 옥동(玉洞) 이서(1662-1723)가 출현하여 동진(東晋) 왕희지(王羲之)의 <악의론(樂毅論)> 에서 필력을 얻었다고 표방하면서 조선화된 송설체와 한석봉체에다 북송(北宋) 미불의 서법을 부분적으로 가미하여 새로운 서체를 창안해 내고 이를 동국진체(東國眞體)라 이름하고 「필결(筆訣)」을 지어 『주역(周易)』의 이치로 서론(書論)을 전개한다.
이 역시 조선성리학이 주도해 나가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진경문화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바, 그래서 그랬던지 이 서체는 남인 쪽에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서인과 가까웠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에게 전해져서 공재의 이질(姨姪)로 서인이던 백하(白下) 윤순(尹淳, 1680-1741)에게 전해진다.
주자성리학과 함께 도입되어 조선전기를 풍미하던 원(元) 조맹부의 송설체(松雪體)도 철저하게 조선화 되어 촉체(蜀體)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잔영(殘影)을 끌던 것도 진경시대 문화의 한 단면이었다.
Ⅲ. 명·청문화의 영향과 화려한 종말
이렇게 영조시대 초반을 고비로 조선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가 절정에 이르자, 지식층 일각에서는 ‘조선 중화를 부르짖으며 명(明)의 계승자를 자처한다면 마땅히 명문화(明文化)를 제대로 계승해야 하는데 명문화와는 상관없는 조선 독자문화를 창안해 내고 있으니 이는 명실(名實)이 부합치 않는 일이라 올바르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하기 시작한다.
주로 진경시대를 주도해 가던 집권층에서 소외된 소론(少論)과 남인(南人)계 출신 인사들의 주장이었다. 소론은 조선성리학파가 남인이 몰락하는 것을 계기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리될 때 생긴 당파로 학맥 연원은 노론과 동일하였으나 우암 송시열이 세도를 행사하며 성리학적인 의리명분(義理名分)을 가혹할 정도로 분명히 내세워 그 기준에 저촉되는 인사들을 용납치 않는 과정에서 이에 불만을 품고 이탈한 부류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병자호란 당시 주화론을 주장했던지 난중에 실절한 인사들의 후손이거나 아니면 다른 흠집이 있어 명의(名義)의 죄인이 된 사람들의 후손이었는데, 이들과 학맥(學脈)으로나 혈통으로 연루된 인사들도 이에 가담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우암을 중심으로한 율곡학파의 정통을 잇는 핵심세력인 노론들이 고원한 이상주의로 현실을 무시한 채 공연히 대청적개심을 불태우며 가능치도 않은 북벌론(北伐論)을 내세워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는데 이는 조선성리학파로서 그 이념 구현 현장에서 주도권을 상실한 울분의 표출일 뿐이었다.
그러니 그들이 자기를 합리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명(明) 문화(文化)의 명실상부한 계승을 주장하는 길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명의 계승자를 자처하여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를 부르짖은 전배(前輩)들의 의도가 조선 고유문화의 창달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명 문화의 명실상부한 계승을 주장하게 되
었던 것이었다. 그런 일에 앞장섰던 대표적인 인물로는 글씨에서 백하(白下) 윤순(尹淳)과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있고 그림에서 현재(玄齋) 심사정(沈師正, 1707-1769)과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꼽을 수 있다.
백하는 그의 고조부 백사(白沙) 윤훤(尹暄)(1573-1627)이 정묘호란 당시 평양감사로 있다가 청군에게 패배당한 죄로 사형당한 흠집이 있어 소론이 되었고 원교는 그의 고조부가 석문(石門) 이경직(李景稷, 1577-1640)이고 종고조(從高祖)가 백헌(白軒)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인데 석문은 인조의 항복 시에 청태종에게서 칙서를 받아 온 흠이 있으며 백헌은 청태종의 기공비(紀功碑)인 삼전도비문(三田渡碑文)을 찬진(撰進)한 허물이 있어 소론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는 그 조부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이 과거부정 사건(1699)과 영조 모해 사건(1722)에 연루된 대역죄인이라서 소론이 되었다. 표암도 본래 소북계 남인이나 그 역시 그의 형 강세윤(姜世胤, 1684-1741)이 과거부정을(1710) 저지른 가문의 허물이 있었다.
어떻든 윤백하는 공재 윤두서로부터 옥동의 동국진체 서맥을 이어 받은 다음 명(明) 문화(文化)를 계승해야 한다는 주장대로 명대 서화의 대가이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의 서법을 수용해서 동국진체의 조선고유색에 명조풍(明朝風)을 가미해 가게 된다.
이 서법은 다시 동색(同色)의 원교에게 전수되는데 원교는 도리어 북송대에 왕착(王著)이 위조한 왕희지 글씨인 <악의론(樂毅論)>, <동방삭화상찬(東方朔畵像贊)> 등을 진본(眞本)으로 믿어 이 서법을 해서(楷書)의 근본으로 삼아 이에 첨가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원교에 이르러서는 한석봉풍의 조선 고유색이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을 보이면서 동국진체가 완비된다.
한편 그림은 심현재가 본격적으로 명대(明代) 오파계(吳派系) 남송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받아 들이면서 현재(玄宰) 동기창(董其昌, 1555-1623)이 「화선실수필(畵禪室隨筆)」에서 피력한 남북이종론(南北二宗論)에 입각하여 중국 역대 남종화를 총체적으로 임모해 내는 노력을 보이는데, 대체로 『당시화보(唐詩畵譜)』나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등 화보를 모본으로 하였기 때문에 정밀치 못한 화본의 한계가 그대로 노정된다.
그런데 도리어 이런 화법이 완벽성을 추구하지 않는 우리 미감과 일치되어 조선화(朝鮮化)에 박차를 가하는 의외의 효과를 나타내니 조선 남종화풍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유색의 출현은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이런 화풍은 기법 수련이 겸재의 진경산수화풍보다 용이하기 때문에 많은 추종자들을 배출하게 되었으니 사대부 화가로는 표암 강세황, 연객(煙客) 허필( 1709-1761) 등이 있고 화원화가로는 호생관(豪生館) 최북(崔北, 1738-1786), 연농(硏農) 원명유(元命維, 740-1774) 등을 꼽을 수 있다.
조선고유색 발현에 앞장서서 진경문화를 선도하던 겸재세대가 숙종 초년(1675)을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세대인데 반해 명문화의 계승을 주장하며 중국풍으로의 환원을 시도한 세대는 숙종 35년(1709)경에 출생한 세대들이었다. 30여년이라는 한 세대 차이의 세대간의 갈등과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이런 문화적 대립 현상은 오히려 진경문화를 다양하고 폭넓게 발전시켜 나가게 되었다.
그래서 자칫 독자적인 고유문화가 빠지기 쉬운 고루성(固陋性)이나 편벽성(偏僻性)으로부터 벗어나서 보편성을 갖추게 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진경문화는 대미(大尾)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막을 내릴 수가 있었다.
진경문화가 절정에 이르러 고유문화가 명문화 계승론자들에게 도전을 받을 당시인 영조 20년(1744) 전후한 시기에 출생한 제3세대들은 역시 제2세대들이 제1세대들을 부정하듯이 제2세대를 부정한다. 제2세대들이 주장한 명문화의 계승논리는 조선성리학파가 지향하던 문화 성향의 본질이 조선고유색의 현양이었다는 목적성을 부정한 피상적 형식논리였으므로 당연히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명 문화 계승논리의 불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하며, 조선 고유색 현양에 주력하던 겸재세대의 문화성향을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이는 물론 학계에서 그 이념기반이 되는 조선성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며 시의적절(時宜適切)한 합리성을 제공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겸재를 키워냈던 안동김씨 집안에서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468-1722)의 손자인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22)이 나와 종조부인 농암(農岩) 김창협(金昌協)의 사손(嗣孫)으로 출계(出系)하여 농암과 삼연 김창흡 형제로부터 이어지는 가학(家學)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줄기차게 서울학계를 주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호 문하에서 만포(晩圃) 심환지(沈煥之, 1730-1802), 즉지헌(則止軒) 유언호(兪彦鎬, 1730-1796), 근재(近齋) 박윤원(朴胤源, 1734-1799), 노주(老洲) 오희상(吳熙常, 1763-1833) 같은 인물들이 배출되어 학계와 정계를 주도하게 되니 자연 시대분위기가 그와 같은 양상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회화분야에서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와 고송유수관(古松流水館) 이인문(李寅文, 1745-1824),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64-1822), 초원(蕉園) 김석신등이 출현하여 겸재세대를 계승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이들은 모두 화원화가들이었다.
이들이 화원화가라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 진경시대 초기문화를 주도하면서 조선고유색 짙은 화풍을 창안해 내던 인물들이 한결같이 조선성리학 이념에 투철한 사대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과 대조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진경산수화풍을 창안해 낸 겸재와 풍속화풍의 시조인 관아재가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다.
새로운 양식의 창안이라는 것은 그 뿌리가 되는 바탕이념에 대한 선구적 이해를 전제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념집단 중에서도 선두주자만이 그 일을 감당해 낼 수 있다. 그러나 화원화가들은 왕실 전속 전문화가이니 왕실이나 궁척들의 주문에 따라 기존의 화풍을 활용하여 보다 훌륭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그들의 몫이었으므로 항상 그들은 회화사에서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이 현재화풍을 계승하지 않은 것은 현재세대의 겸재세대에 대한 도전이 실패한 사실을 비교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현재세대의 업적을 도외시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를 참고하여 제일세대의 화풍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해 나가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
단원 그림에서 보이는 다양한 구도감각이 음양대비와 음양조화로 일관하던 겸재의 단조로운 구도감각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풍속화에서도 그 인물묘사를 초상화처럼 정확히 해내서 어진도사(御眞圖寫)가 본업이었음을 과시하게 되는데 조선 고유색을 드러내는 진경ㆍ풍속 양대 화풍 중 특히 풍속화가 이들의 손에서 최고의 발전을 보이면서 대미를 장식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화재(和齋) 변상벽같은 화원화가는 초상화 그리는 기법을 영모화(翎毛畵)에 적용하여 짐승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핍진(逼眞)하게 그려내기도 하였다.
한편 이들이 이처럼 진경풍속화풍의 계승 발전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절대적인 후원자이던 영조와 정조가 진경문화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들의 양성에 앞장섰던 같은 세대의 정조대왕(1752-1800)은 비록 국왕이지만 당대를 대표할 만한 최고의 학자이자 예술가로 『홍재전서(弘齋全書)』184권 100책이라는 방대한 문집을 남기고 <파초>나 <국화> 같은 그림을 남긴 분이었다.
그래서 정조는 진경문화의 바탕 사상인 조선성리학이 이미 백여년 동안 그 절정을 구가하며 사회를 주도해 왔으므로 이제는 노쇠하여 그 기능에 더이상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도 간파하게 된다. 이에 정조는 연경사행(燕京使行)의 자제군관(子弟軍官) 출신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6), 연암(燕岩) 박지원(朴趾源, 1737-1805) 등 당시 최고집권층 연소자제들을 중심으로 청조고증학(淸朝考證學)을 받아들이려는 북학(北學)운동이 일어나자 규장각(奎章閣)의 제도를 개편하여 이들의 학문활동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등 적극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그 결과 연암의 제자들인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냉재(冷齋) 유득공(柳得恭, 1749-1807), 초정(楚亭) 박제가(朴齊家, 1750-1805) 등이 규장각 검서(檢書)가 되어 규장각을 실제 운영하며 청조문화(淸朝文化)를 수용해 들이니 이제부터는 진경문화에 서서히 청조문화의 영향이 배어들기 시작한다.
이는 곧 북학을 이념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건설을 예고하는 변화의 조짐이었는데 이런 개혁의 움직임이 온건하게 진행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은 신구이념에 정통하였던 문예군주인 정조가 개혁의 속도를 적절하게 조정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선의 고유색 짙은 진경문화는 정조의 치세 하에서 대미(大尾)를 찬란하게 장식하면서 북학문화로 연결되어 갈 수 있었던 것이니, 단원이나 혜원의 풍속화나 화성행궁, 수원성곽 등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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