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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에서
이삭빛
그대 앞에 있어도
그대가 보고 싶어
그대 옆에 있어도
그대가 그리워져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눈앞이 캄캄하도록
‘오로지’
홀로 서서 부서져 내리는 일
한 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사람은 몰라
그 아픔이 얼마나 찬란한지
죽도록 사랑한다는 것은
아찔한 외로움 끝에서도
별처럼 소금 꽃이 되는 일이지.
고통의 파도를 사랑이라고 부르는 일이지.
♠詩포인트
사랑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는 것이다.
- 에리히 프롬-
사랑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은 아무리 이를 막아도 모든 것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사랑은 영원히 그 날개를 퍼득이고 있다.
-마티아스 크라우디우스-
사랑은 위대하다. 그 작은 물방울하나로도 찬란한 바다를 다 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삭빛-
/투데이안
『슬픈 목가』
식민지 시대에 ‘부역’이라는 오욕은 피할 길 없는 통과 의례와 같았다. 그러나 신석정(辛夕汀, 1907~1974)은 그 오욕으로부터 자신을 꿋꿋하게 지켜낸다. 신석정은 식민지 시대 막바지의 암흑기에 자신의 시들을 발표하지 않고 서랍 속에 처박아두었다가 해방이 되자 비로소 묶어 한 권의 시집을 펴낸다.
목가 시인 신석정
1907년 전북 부안의 한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신석정은 읍내의 보통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한다. 그는 결혼 뒤 고향의 전원 속에 파묻혀 시인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투르게네프와 하이네, 타고르와 노장(老莊) 등의 문학과 철학 서적을 탐독하며 시를 쓰기 시작한다. 1924년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그러나 신석정은 글쓰기를 포기할 생각으로 써놓은 시들을 불사르는 등 한동안 심한 좌절에 빠진다. 일찍 결혼한 까닭에 가난 또한 큰 짐이 되어 그의 발길을 무겁게 한다. 1930년 그는 박한영이 주재하던 조선불교중앙강원에 들어가 불전을 공부한다. 박한영이라면 최남선과 이광수를 비롯해 서정주와 조지훈 등에게도 영향을 미친 불교계의 거목이다. 신석정은 강원에서 불교 공부를 하는 한편 30여 명의 젊은 학도들을 규합해 회람지 『원선』을 만들기도 하나 종교 자체에는 깊이 빠져들지 않는다. 그는 금강산으로 입산 수도를 떠나자는 동료들의 청을 뿌리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
신석정의 육필
박용철의 권유로 잠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김영랑과 함께 ‘시문학’ 동인으로 가담하게 된다. 1931년 그는 『시문학』에 시 「선물」을, 『동광』에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를 발표하며, 이를 계기로 정지용 · 이광수 · 한용운 등과도 교유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낙향한 그는 부안읍 변두리에 뒤뜰이 넓은 초가를 한 채 사서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짓고 이 곳에 거주한다. 이 무렵 아직 등단하지 않은 서정주가 그를 찾아온다. 두 사람은 달맞이꽃이 핀 달밤에 석류를 까먹으며 노장과 도연명, 그리고 19세기 미국의 삼림 시인이자 철인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와 스피노자, 프랑스의 폴 클로델과 레미 구르몽에 대한 얘기를 이슥토록 이어간다.
낮에는 고구마밭을 일구고 밤에는 독서와 시작에 매진한 신석정은 1932년 『문예월간』에 「나의 꿈을 엿보시겠읍니까?」, 『삼천리』에 「봄이여! 당신은 나의 침실을 지킬 수 있읍니까?」 등 청정하고 애수가 담긴 전원시를 꾸준히 발표해 주목받는다. 신석정과 대조적인 시관을 갖고 있던 모더니스트 김기림조차 「1933년도 시단의 회고와 전망」이라는 글에서 그의 시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정지용 씨처럼 현대 문명 그 속에서 그 주위와 자아의 내부를 향하여 특이하고 세련된 시안(詩眼)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현대 문명의 잡답을 멀리 피한 곳에 한 개의 ‘유토피아를 음모하는 목가시적인 신석정’을 잊을 수는 없다.
그 뒤 신석정은 1936년 『신동아』에 「돌」, 『중앙』에 「송하 논고(松下論告)」, 『조선문학』에 「눈오는 밤」, 1939년 『조선문학』에 「월견초(月見草) 필 무렵」 등을 발표하고 같은 해 ‘인문평론사’에서 첫 시집 『촛불』을 펴낸다. 이어 1940년 『조광』 3월호에 시 「명상」과 「황혼」, 9월호에 「애가(哀歌)」, 1941년 『삼천리』 4월호에 시 「변산 일기 ― 중계, 사지 목재, 능가봉, 청림」 등을 발표한다. 일제 말기에도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글쓰기를 하는 그의 생활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암흑기에 이르러 작품을 발표하지는 않던 그는 얼마 뒤 꿈에 그리던 해방의 날이 오자, 그 감격과 회한을 이렇게 노래한다.
태양을 의논하는 거룩한 이야기는 / 항상 태양을 등진 곳에서만 비롯하였다. //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에도 /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 언제 참으로 그 언제 우리 하늘에 / 오롯한 태양을 모시겠느냐고 / 가슴을 쥐어 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 가슴을 쥐어 뜯지 않았느냐?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그러는 동안에 드디어 서른여섯 해가 지나갔다. // 다시 우럴어보는 이 하늘에 /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차거니 / 오는 봄엔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 그 어느 언덕 꽃덤풀에 아늑히 안겨보리라.
신석정, 「꽃덤풀」, 『신문학』 2호
1939년에 발표된 신석정의 첫 시집 〈촛불〉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거나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보려던 꿈은 문단의 이데올로기 싸움과 혼란상으로 여지없이 망그러진다. 해방 뒤 문우이자 동서인 장만영은 여전히 궁핍을 껴안고 사는 그에게 서울로 올라올 것을 권한다. 그러나 신석정은 고향을 지키며 1946년 『신문예』에 「비의 서정시」, 1947년 『신천지』에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을 발표한다. 1947년 마흔 살이 되던 해, 그는 일제 말기에 겉으로 침묵한 채 은밀히 써둔 시들을 엮어 두 번째 시집 『슬픈 목가(牧歌)』를 내놓는다. 『슬픈 목가』는 제목이 말해주듯이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낭만주의 색채 위에 해방 직전의 암담한 현실과 고향 상실에 따른 슬픔이 짙게 묻어 있는 시집이다.
성근 대숲이 하늘보다 맑어 / 대잎마다 젖어드는 햇볕이 분수처럼 사뭇 푸르고 // ‘아라사’의 숲에서 ‘인도’에서 / ‘조선’의 하늘에서 ‘알라스카’에서 // 찬란하게도 슬픈 노래를 배워낸 바람이 대숲에 돌아들어 / 돌아드는 바람에 슬픈 바람에 나도 젖어 왼 몸이 젖어······ / ······ //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와 나는 /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내 심장을 삼으리라
신석정,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일부, 『슬픈 목가』(19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