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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예수님의 사람들 칼럼(674호)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고전 15:12-20)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19-2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신앙에 대한 확신을 가진 자들에게는 부활 전과 후가 놀랍게도 비교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성경에 나타나는 주님의 부활사건을 중심하여 그 전과 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씀을 보면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다.
1. 무덤 문 앞에서 슬피 울던 막달라 마리아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요 20:14).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이른 새벽 무덤을 찾아 갔으나, 빈 무덤인 것을 발견하고는 빈 무덤 앞에 엎드려서 슬피 울고 있었다.
그때, 주께서 마리아야 평안하뇨 하시매, 그때서야 주께서 다시 사신 줄을 믿고 슬픈 눈물을 거두고 기뻐하며, 분부대로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떠났다. 우리는 빈 무덤만 바라보고 엎드려 슬피 울지 말고, 빈 무덤을 통하여 영원을 바라보고 승리의 주님을 붙들고,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찾아야 하겠다.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눅 24:13-14). 이때에 부활의 주님이 그들과 함께 동행하며 말씀하고 계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예수이신 줄을 몰랐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와서 예수께서 떡을 떼어 축사하시자 그들의 눈이 밝아지면서 예수이신 줄 보게 되었을 때,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승리의 발걸음을 옮겨 제자들과 합세하며 부활의 주님을 증거 하였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만 본 발걸음은 절망의 하향 길이었으나, 부활의 주님을 확신한 저들의 발걸음은 승리의 상향 길이었다.
3. 공포 속에서 떨고 있던 제자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3-4).
다시 사신 부활의 주님을 봤지만 예수께서 승천하시자, 박해에 겁에 질린 제자들은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두려움 속에서 떨며
비겁하게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마가의 다락방에서 전혀 기도에 힘쓰다가 성령체험을 한 후 사망권세를 이기고, 불의를 누르고 승리의 주님이 자신들과 함께함을 확신하자,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게 복음의 화신이 되어 순교하는 자리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4. 교회를 진멸하려고 했던 사울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행 9:4-5).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청년 사울은 유대교에 지나치게 열심하면서 이단으로 여겼는 예수를 박해하였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그는 예수를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다. 사도가 된 이후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 20:13) 단언하더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꺼이 순교의 잔을 마셨다.
결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전 15:57-58).
부활절 [復活節, Easter]
교회력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일(祝日). 그리스어(語)로는 파스카(Pascha)라고 한다. 교회력에서 가장 오래된 축일이다. 역사적인 기원을 분명하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리스어(語)나 프랑스어(語)의 호칭은 헤브라이어(語) 유월절인 '페샤'(Pesah)에 기초하고 있고 영어의 이스터(Easter)와 독일어의 오스테른(Ostern)은 튜턴족(族)의 봄 여신인 에오스트레(Eostre)에서 파생된 것 같다.
초기에는 유월절에 따라 유대력(曆) 니산월(태양력의 3∼4월) 14일을 부활절로 정하고 축하하는 교회와 그 다음의 일요일을 부활절로 지키는 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부활절을 해마다 지켜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오늘날 지키고 있는 부활절은 제1회 니케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것으로 춘분(春分: 3월 21일경) 후의 최초의 만월 다음에 오는 첫째 일요일이다. 그러므로 보통 3월 22일부터 4월 26일까지 지켜진다. 부활절에는 주로, 세례·학습, 참회자의 위로, 죄수의 석방, 가난한 자의 구제, 교역자 위안 등의 행사를 가진다.
부활주일 유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여 지키는 부활절은 영어로 'Easter'라고 명칭하는데 이는 'Eastre' 라는 이교도적인 이름을 고대 영어에 맞추어 바꾼 말로써 튜튼족의 신(神) 중 봄과 새벽의 여신의 이름이기도 하다. 이 여신의 축제는 해마다 춘분에 열렸다고 한다. 교회에서 지켜지는 부활 주일은 춘분 다음 첫 만월 후 첫째주일이 되도록 하였기에 매년 날짜에 차이가 있다.
부활절의 원래 명칭은 유월절을 뜻하는 히브리 말인 파스카(Pascha)였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유대인의 절기인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자연스러운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새로운 유윌절, 즉 죽음의 노예 상태로부터의 해방을 이루었다는 뜻을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 2023 부활절 예화 모음 *
▶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 -로잘린
십자군 전쟁때의 일이다. 로잘린부인은 전쟁터에 나간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문을 듣고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 틈을 이용해 재산을 가로챈 후 로잘린을 마을에서 내쫓았다. 그녀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안착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마을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준비했다. 얘들아 너희들의 나무를 하나씩 정하렴. 그리고 나무 밑에 둥지를 만들어 놓아라. 그러면 둥지에 예쁜 알이 들어있을 것이다 로잘린은 둥지에 형형색색의 그림과 `네 이웃을 네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글이 적힌 달걀을 놓아두었다. 어린이들은 신기한 표정으로 색달걀을 받았다. 그런데 한 소년이 달걀을 들고 친척집을 가던중 길가에 쓰러진 부상병을 만났다. 소년은 부상병에게 달걀을 주었는데 부상병은 그곳에 적힌 글씨와 그림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것은 내 아내 로잘린의 그림인데, 그리고 이것은 가훈이 아닌가? 부활절 달걀이 부부를 만나게 해준 것이다. 그때부터 부활절 달걀은 `사랑'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 톨스토이의 부활은 유명한 작품.
귀족 청년 '네풀류도프'는 '나타샤'라는 그의 하녀를 유혹하여 임신까지 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하녀는 주인집으로부터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하녀는 그 후 이리 저리 방황하면서 지독한 고생을 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눈물나는 고생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견디다 못해 창녀가 되어 몸을 팔아먹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를 괴롭히는 남자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살인범이 되었습니다. 법정에 섰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게 했던 그 남자 '네풀류도프'는 그 동안 법을 공부하고 판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그가 그 재판을 맡게 되었습니다. 기구한 운명이었습니다.
자기가 한 때 불장난하여 그렇게 만든 여자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양심에 가책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돕게 되었습니다. 차마 사형을 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사형을 면하여 주는 대신에 시베리아 먼 땅으로 유형살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여자를 시베리아로 유배시키며 그녀를 따라 가게 됩니다.
시베리아로 가는 길에 한 여인숙 방에서 밤중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젊은 날의 방탕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후부터는 사람을 사랑하고 돕는 일에 자신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하며 나머지 생을 그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톨스토이의 '부활'의 줄거리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새로운 인생이 됩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부활의 개념을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는 개념으로 부활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그런 부활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이 선해졌다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생명의 근원을 찾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영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어도 다시 사는 생명' 이제 우리는 죽어도 우리를 다시 살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 스탠포드 대학 설립한 스탠포드
스탠포드 대학은 은 우리나라 서울대 연 고대처럼 명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스탠포드'입니다. 스탠포드가 스탠포드 대학을 설립한 동기가 있습니다.
스탠포드는 부자였습니다.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잘 생기고 수재였던 외아들이었습니다. 극도의 슬픔에 잠긴 아버지는 장례식에서 말을 잃었습니다. 슬픔 속에 잠을 자지 못 하고 있는 데 그 날 밤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셔요.' 스탠포드는 이 환상을 보고 인생관이 확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다!' 스탠포드는 이런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아들의 소원을 들어 주기고 하고 청년 교육에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 거액인 2천만 달러 약 200억 원을 바쳐서 오늘의 명문인 스탠포드대학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죽을 때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10원짜리 동전 하나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라'
부활이 없으면 예수님도 부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분명히 부활은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부활합니다.
▶ 부활절 계란 주고받는 풍습은?
부활절 계란을 주고받는 풍습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된 것일까?
부활절 이전, 즉 이스터 축제일의 상징은 계란이 아니라 토끼였다. 이스터 여신의 상징이 토끼였기 때문이다. 이 부활절 토끼 풍습은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함께 들여갔다. 그러나 18세기 당시 미국의 기독교는 청교도를 위시해서 엄격한 기독교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부활절 토끼는 전혀 발붙일 수 없었다. 부활절 역시 미국에서 자리 잡게 된 것은 남북전쟁 이후였다.부활절을 축하하기 위해서 계란을 사용하게 된 것은 "모든 생명은 알에서부터 나온다"라는 로마의 속담은 차치하더라도 어느 정도 기독교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까지 갈 때 잠시 십자가를 대신 져준 구레네 시몬의 직업이 계란장수였다고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뒤에 그가 집으로 돌아가 보니 암탉들이 낳은 계란이 모두 무지개 빛으로 변해 있었다. 이후로 교회에서는 자연스럽게 계란을 부활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 전해오는 재미있는 설화 한 토막
유대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저를 통하여 하나님께 크게 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큰배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온 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을 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아서 높이 자라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 주겠다'는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고 싶어했던 첫 번째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의 작은 구유가 되어 나귀가 핥아먹는 먹이통이 되어 마구간 한 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배가 되어 큰 바다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꾀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나는 생선이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일 없을 때에는 쓸모 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 한 그의 소원과는 달리 어느 날인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인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예수께서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 왕의 왕으로 오시는 날, 베들레헴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 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 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에 밤이 맞도록 수고했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실패자 베드로에게 오셔서 그의 배를 빌려 복음을 전하신 뒤에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자 만선의 복이 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께서 못 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답니다.
매주 12,000여 명의 회원님들에게 한 번씩 보내는 칼럼입니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문지기) 드림
양천구 신정로 11길 63 강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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