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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불교로 읽는 과학, 과학으로 읽는 불교
처음 지구과학으로 본 불교에 관한 내용으로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많이 난감했다. 불교는 인간의 네 가지 괴로움인 생로병사(生老病死)를 해결하기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이고, 지구과학은 그야말로 그것과는 많이 동떨어진 우주와 지구 탄생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한 대기와 해양 그리고 지질에 관한 전혀 논점이 다른 이야기라, 이 둘을 연결하기는 아무래도 억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내가 학교에서 전공으로 가르치고 연구하는 지구 환경을 중심으로 불교와 연결해도 된다는 편집장의 말씀에 매우 안도하며 감사를 드린다. 지금부터 불교와 지구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생태학(生態學):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
서구 학문 중에 생태학(Ecology)이라는 학문이 있다. 생태학은 생물학의 한 분야로 원래 영어 명칭은 집을 뜻하는 ‘oikos’와 학문을 뜻하는 ‘logos’의 합성어이다. 재미있게도 ‘oikos’를 찾아보니 신약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말로 ‘성도로 구성된 거룩한 공동체’를 뜻한다고 한다. Ecology라는 단어는 생물학자 해켈(Ernest Haeckel)에 의해 1866년에 처음 만들어졌는데 마치 생태계의 이치가 집안 살림을 하는 것과 비슷한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Ecology는 서구 인문학의 꽃인 경제학(Economics)과 같은 ‘oikos’ 어원을 지니고 있다. 경제학에서 흐름을 주도하는 재화가 ‘돈’이라면 생태학에서는 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에너지(energy)’라면 쉽게 유사성이 이해가 간다.
생태학은 보통 생물과 그를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여기에서 환경은 지구의 물, 흙, 공기와 같은 죽어 있는 무생물 환경도 있지만 다른 생물과 상호작용을 하는 살아 있는 동물과 식물, 미생물을 포함하는 생물환경도 포함이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생태학의 정의를 이렇게 내리면 사실 생물학의 범주에는 생태학이 아닌 것이 없다. 소위 생물학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연구하는 분자생물학도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분자 수준에서 연구하는 학문이고 신경생물학도 생물과 환경의 상호작용을 신경 수준에서 연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불살생(不殺生)-생명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환경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사실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물리학자 슈뢰딩거가 쓴 책도 있고, 이 주제만을 놓고도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이야기는 이 글의 범주를 넘어선다고 생각하고 짧게 요약하고자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물과 생물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다음의 두 가지 명제를 만족하면 생물이라 한다. ①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유전물질을 지니고 있다. ② 스스로 대사를 할 수 있다. 가장 명쾌한 기준이다. 이 기준으로 보면 얼마 전까지도 우리를 괴롭혔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속한 바이러스는 유전물질인 DNA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 숙주가 있어야만 번식을 할 수 있기에 엄밀한 의미의 생물에 해당하지 않는다.
지금 지구상에 살아 있는 생명체는 오랜 환경의 변화 속에 적응하고 진화하여 살아남은 생명체들이다. 그중 인간도 한 구성원이다. 여기서 우리 인간이 타 생명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야생의 생물학에서 분류학은 가장 기본이 되는 학문이다. 이 분류학의 시작은 한 생물과 다른 생물의 생김새를 구분하는 것이며 거기에 이름을 다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름 달기는 그들과 친숙해지고자 하는 목적보다 그들을 이용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분류학은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아서 위험한 것들을 다루어 온 선사시대 우리 조상들의 습관에서부터 출발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돼지라는 생명체를 생각해 보자. 돼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대부분 그들을 인간과 함께 생태계를 이루는 구성원이라는 생각보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단백질 에너지원을 공급해 주는 가축 또는 사유물로 인식한다. 구제역이나 아프리카돼지열병이 발발하면 축산농가에서는 그야말로 난리가 나며 질병에 걸린 돼지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있는 돼지 역시 가차 없이 살처분한다. 이미 가축이 되어 오랜 기간 인간이 사육을 해온 생명체의 동물권은 거의 없다.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동물 해방론자나 채식주의자들에 불과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영화화한 봉준호 감독의 〈옥자〉는 이 문제를 화두로 꺼낸 훌륭한 영화이다.
다른 예를 하나 더 생각해 보자.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그 지역의 특산물이나 상징과 관련된 축제를 한다. 이들 대부분은 동물이 많다. 그러나 그 축제에 가면 상징인 동물은 먹이나 유희의 대상이다. 이를테면 고래 축제에서는 고래고기를 먹으며, 오징어 축제, 빙어 축제 등 동물 축제에서는 그들을 가두어 놓고 사냥 또는 어획을 하며 유희를 즐긴다. 이때 동물은 식용의 대상일 뿐 그들이 인간이 느끼는 만큼의 고통을 느낄 것이라고 전제하지 않는다.
불교의 계율 중 가장 첫 번째는 ‘불살생’ 즉 살아 있는 것을 함부로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른 종교와는 달리 불교에서는 살인뿐만 아니라 인간이 아닌 다른 생물을 함부로 죽이는 것까지도 금지하고 있다. 이는 생명에 대한 부처님의 인식이 다른 종교의 교주들에 비해 남다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분명 인간이 자신에게 상처가 나는 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것만큼 다른 인간과 생명체도 고통을 느낄 수 있으며, 죽음을 싫어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과거 인간은 식용으로 하는 대상 생명체의 고통에 대해 중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증거도 빈약했다. 그러나 오늘날 과학적 연구의 결과는 다른 동물도 생존과 번식을 위해 포식자를 회피하며 이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보존하려 하며, 상처가 났을 때 고통을 느끼는 과정이 인간과 흡사한 부분이 많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사피엔스》에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지적했듯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가축들을 가장 잔혹하게 학대하고 죽이는 일들을 저지르지만, 돼지를 포함한 많은 가축은 가장 번식적으로 성공한 동물이다. 아직까지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가축화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한 동물 중 상당수는 이미 많은 경우 화산 폭발, 지진, 홍수 등의 천재지변이나 인간의 사냥으로 멸종되었다. 이 대목에서 공중파 방송에서 가장 장수하는 프로그램인 〈동물의 왕국〉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는 해석이 맞는지 의심해 볼 만하다.(사실 종족 보존의 본능은 틀렸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이야기했듯 모든 생명체는 종의 이익이 아니라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
제행무상(諸行無常)-변화하는 환경
이제 환경에 관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하고자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환경은 무생물과 생물을 모두 포함한다. 환경의 변화에 대해 적응한 개체들이 오늘날 현존하는 생명체이다. 지구의 환경은 생명의 존재 여부에 무관하게 늘 변해 왔다. 그야말로 제행무상의 원리가 가장 잘 적용이 된 곳이 환경의 변화이다. 일반적으로 생태계에서는 천이(遷移, succession)라는 과정이 있다. 지각변동 등에 의해 새로운 환경이 생겨나면 초창기에는 1년생 풀이 먼저 와서 자란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다년생 풀이 자라서 그 생태계를 유지하다가, 관목이 빽빽하게 자라고 어느덧 극상(climax)에 도달하게 되면 그 상태가 상당히 오래 유지된다. 그러다 다시 산불이나 천재지변에 의해 그 지역의 생태계는 거의 원점으로 돌아간다. 새롭게 그 지역에 정착하는 개체군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이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개입이 없으면 지구의 환경은 자연적으로 이러한 천이 과정을 겪으면서 변화하는데, 요즘 과학자들이 가장 걱정하는 지구의 변화 중 하나는 인간에 의해 유발된 기후변화이다. 기후변화는 산업혁명 이후로 인간이 발생시킨 이산화탄소가 급증해서 대기 중 온실효과를 나타내면서 생긴 것이라는 데 대부분의 과학자는 동의한다. 과거에도 이러한 기후변화는 있었다. 한때 지구를 지배했던 공룡이 멸종한 이유도 이 가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는데, 화산의 폭발로 대기조성이 바뀌면서 온난화 때문에 멸종한 것이라는 학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기후변화 속도가 그때보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효신세(Paleocene)에서 시신세(Eocene)까지 몇백만 년이 지나는 동안 지구의 온도가 섭씨 2~3도 높아짐으로 많은 생물이 멸종했다면 지금은 단 몇백 년 만에 그 기록을 깰 정도이다.
지구의 역사는 약 50억 년이고 이 중 생명체가 처음으로 탄생한 것은 대략 35억 년 전으로 추산되며, 이 역사 중 인류의 공통 조상은 약 500만 년 전에 다른 영장류와 갈라져서 진화해 왔다. 500만 년이 매우 긴 것 같지만 50억 년에 비하면 0.1퍼센트에 불과하다. 지구 나이 전체를 24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인류가 태어난 시간은 기껏해야 저녁 11시 58분 40초인데, 태어난 지 단 1분 20초 만에 지구의 환경을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이 시간에 관한 비유는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동안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환경에 대한 사유
최진석 교수의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보면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들의 삶의 높이라는 말이 있다. 개인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시선의 높이는 어디에 머물러 있는가를 생각해 보니 우리나라에서 매우 많이 지어진 아파트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한다. 아파트는 1960년대 이후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큰 욕망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아주 오랜 시간 인류가 숲에서 사는 데 적응했다면 지금은 숲속에 살고 싶은 욕구를 숲세권 아파트로 대치하며 빠른 속도로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있다.
현재 바닷가도 빠른 속도로 갯벌 매립이나 공사, 골재 채취 등으로 파괴되어 가는 상황이다. 가장 먼저 생물의 서식처 파괴가 가장 심각한 문제이겠지만 나는 여기서 또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바닷가 갯벌에 사는 생물 중에 흰발농게(fiddler crab, Austruca lactea)라는 갑각류가 있다. 흰발농게는 현재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종 2급이며 해양수산부 지정 해양보호생물이다. 이들이 사는 곳은 인간에 의해 가장 영향받기 쉬운 조간대 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보통 의사소통을 위해 공기를 매질로 전달되는 소리를 사용하지만, 이들은 우리와 다른 의사소통 체계를 갖추고 있다. 먼저 이들은 시각적인 신호를 사용해서 구애한다. 이들은 사람처럼 공기 중의 소리를 감지할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갯벌의 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진동을 인지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필자가 이끄는 연구실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흰발농게 수컷이 다른 암컷에게 구애하거나 다른 적이 와서 위협을 할 때 다리를 땅에 떨어서 ‘북 치기(drumming)’를 하는데 이 북 치기 리듬이 구애할 때와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생각보다 이들의 의사소통은 복잡 미묘한 듯하다.
그런데 왜 이것이 문제가 되는가? 바다에는 다양한 소음이 존재한다. 파도 소리와 같은 물리적 음향도 있지만 고래부터 시작해서 새우처럼 작은 생명체에 이르기까지 여럿이 의사소통을 위해 소리를 낸다. 그리고 이 소리는 동물마다 주파수가 달라서 의사소통하는 채널이 다르다. 최근 들어 사람의 활동이 많아지면서 선박 소음이나 소나(sonar)와 같은 바다의 소음이 증가하고 이들이 내는 소음의 주파수가 동물들의 내는 소리와 겹치게 되면 의사소통에 방해가 될 수 있다. 인간이 활발하게 개발하는 갯벌이나 연안은 말할 것도 없다. 인간에게 층간소음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듯 동물에게도 층간소음이 문제가 될 수 있다.
다시 흰발농게로 돌아와 이야기하자면, 최근 우리 연구팀의 연구 결과 실내에서 파일 항타(pile driving)를 모사하는 다양한 주파수의 진동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실험해 본 결과 특정 저주파 파장대에서 움직임이 가팔라지고 스트레스를 받는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인간이 낸 지반 진동 소음 역시 여러 생물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음을 말해주는 중요한 단서다.
미래학자 후안 엔리케스(Juan Enriquez)는 자신의 저서 《무엇이 옳은가》에서 기술의 발달이 윤리의 발달을 가져온다고 주장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동물과 인간이 정신적 신체적으로 가까워질 때 동물권리와 관련된 인간의 윤리는 한층 더 가까워질 것이다.
부처님께서 계셨을 때는 벌어지지 않은 일들
지구상에 현존하는 한 생명체의 모습에서 우리의 문제를 돌이켜 보고자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큰 새 ‘앨버트로스(albatross)’이다. 앨버트로스 중 큰 것은 날개를 펼쳤을 때 그 너비가 2m에 달할 정도로 위엄을 자랑하는데, 이들의 덩치만큼이나 그 여정은 굉장히 험난하다. 보통 앨버트로스는 사람이 없는 외딴 무인도의 집단 서식지에서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운다. 이 새끼를 먹이기 위해 바다 위 수천 km나 되는 아주 먼 거리를 여행해서 물속의 먹이를 사냥해 온다. 최근 원래 변호사였던 작가 크리스 조던(Chris Jordan)에 의해 충격적인 사건이 목격되었다. 어미가 힘들게 물어온 먹이가 진짜 먹이가 아니라 플라스틱이었던 것이다. 어린 새끼는 어미가 주는 플라스틱을 먹고 영양실조 등으로 죽어버렸다. 미드웨이섬에는 뱃속이 쓰레기로 꽉 차서 죽은 앨버트로스의 사체가 가득하다. 이처럼 앨버트로스는 현재 인간이 버린 쓰레기로 멸종 위기에 직면해 있다.
앨버트로스가 플라스틱이 먹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먹는 것이 어리석다고 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 앨버트로스의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다. 조상으로부터 수백만 년 동안 대대로 전해져 온 먹이를 찾는 습관에서 플라스틱이 먹이가 아니라고 알아차리도록 진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앨버트로스의 진화 시간은 길지만 지구의 역사상 플라스틱이 나온 역사는 매우 짧았기 때문이다.
플라스틱은 1894년 미국의 하이엇(Hyatt)이라는 회사에서 코끼리의 상아로 만드는 당구공의 재료를 대체하기 위해 셀룰로스로 개발한 것이 시초로, 역사는 고작 100년이 조금 넘었다. 대량생산을 할 수 있고 가격도 싸서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나게 사용되었다. 당시의 의도는 선량했지만, 현재 플라스틱은 전혀 환경에 이롭지 못한 재앙이 되어 버렸다. 자연적으로 분해가 잘되어야 생태계가 순환하는데, 몇백 년이 지나도 분해가 잘되지 않으니 말이다.
미래에 인류가 멸망하고 난 후 외계인이 지구를 탐사하는 상황을 가정해 보자. 지구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지층을 살펴볼 것이다. 플라스틱이 파묻힌 것이 뚜렷한 흔적으로 남을 것이 확실하다. 요즘 인류학자와 지질학자들은 우리 인간이 사는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현재 태평양 한가운데는 해류를 타고 흘러온 플라스틱이 쌓인 거대한 플라스틱 섬 두 개가 존재한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플라스틱은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플라스틱은 잘게 부서져서 미세플라스틱이 되어 작은 생물에서부터 큰 생물까지 먹이원에 섞여서 섭취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좌초된 돌고래, 상괭이, 참고래, 바다거북 등 대형 해양동물을 부검한 결과 장내에서 미세플라스틱이 상당히 검출되었다. 대형 해양동물은 인간과 비슷한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이 플라스틱으로 입게 될 피해를 예상할 수 있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이다.
대부분의 플라스틱은 체내에서 분해되지 않고 몸 밖으로 배출된다. 그러나 일부가 남아서 신체에 다양한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플라스틱 자체보다 플라스틱에 함유된 독성물질이다. 예를 들면 비스페놀 A(BPA)는 플라스틱 제품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첨가되는 첨가제인데, 이는 인간에게는 호르몬 교란 등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진 독성물질이다. 과연 우리는 플라스틱에 함유된 독성물질로부터 안전할 수 있을까?
여기서 20세기의 세상을 바꾼 여성 과학자 레이첼 카슨(Rachael Carson)을 소환하고자 한다. 레이첼 카슨은 해양생물 학자이다. 당시 펠리컨이 집단 폐사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과학자들의 추적 결과 물속에는 적은 양으로 존재하는 농약 DDT가 먹이사슬을 따라 고농도로 농축이 되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이를 생물농축(bioconcentration) 또는 생물확대(biomagnification)라고 한다. 레이첼 카슨은 이 사실을 《침묵의 봄》이라는 저서에 자세히 다루었고, 미국의 대중이 이 책을 읽으면서 엄청난 여론을 형성하여 마침내 DDT는 미국의 의회를 통해 사용 금지 농약으로 의결되었다. 현재 DDT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여러 국가에서 사용 금지 농약이다.
그렇다면 현재 문제가 되는 플라스틱은 어떠할까? 이전까지의 연구들은 여러 논란이 있었는데 미세플라스틱이 생물의 먹이사슬을 따라 전이될 수 있다는 몇몇 연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최근에 필자의 인하대학교 해양동물학 연구실 팀이 심해 열수공의 독립된 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을 따라 플라스틱이 농축되고 확대되는 사실을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앞으로 이러한 현상이 다른 생태계에서도 일어나는지 좀 더 확인되어야 하겠지만 이는 매우 충격적인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불교의 대안
제레드 다이아몬드(Jared Diamond) 교수는 그 유명한 저서 《총, 균, 쇠》에서 인류의 문명이 발달하게 된 원동력을 총기와 병균, 그리고 무기를 만드는 쇠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이 책은 너무나도 유명한 명저의 반열에 올라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책의 후속으로 《문명의 붕괴(Collapse)》라는 책을 쓴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총, 균, 쇠》가 인류 문명의 탄생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면 《문명의 붕괴》는 인류의 문명이 멸망하는 과정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한때 융성했던 문명이 하루아침에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이아몬드 교수는 뜻밖의 결론을 내린다. 환경을 이용하고 파괴한 문명이 자기 문명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도시 시애틀(Seattle)은 원래 이곳에 살던 아메리칸 인디언 추장의 이름이다. 한때 북미대륙을 점령하기 위해 온 백인들은 인디언들을 몰아내기 위해서 무력뿐만 아니라 회유책을 쓰기도 했다. 1854년 미국의 프랭클린 피어스 대통령은 시애틀 추장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땅을 파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그러자 시애틀 추장은 이렇게 답했다. 원래 땅에 주인이 없는데 무엇을 사고판다는 말인가? 그리고 일장 연설을 한다. 이 연설문을 《시애틀 추장》이라는 어린이책에 잘 담고 있어서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전략) 언젠가 내 아버지가 내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나는 나무들 몸속에 흐르는 수액을 내 혈관을 흐르는 피처럼 잘 알고 있노라고. 우리는 이 땅의 일부이고 이 땅은 우리의 일부라고. 대지 위에 피어나는 꽃들은 우리의 누이들이라고. 곰과 사슴과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라고. 바위산 꼭대기, 널따란 들판 그 위를 달리는 말들 그 모두가 한 가족이라고.
……
우리는 알지. 세상 만물은 우리를 하나로 엮는 핏줄처럼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우리 사람이 이 생명의 그물을 엮은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단지 그 그물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그물코일 뿐. 우리가 이 그물을 향해 무슨 일을 하든 그것은 곧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하는 일. (후략)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에 담긴 내용은 부처님의 주요한 가르침인 삼법인의 ‘제법무아’ 또는 예불문에도 나오는 ‘제망찰해(帝網刹海)’와 맥을 같이한다. 우리는 주변의 것들과 연기적으로 그물망처럼 얽혀 있으며 타 개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그물 속의 그물코와 같은 존재이다. 이것을 시애틀 추장은 이미 몸소 깨닫고 있었으며 그 사상은 앞선 레이첼 카슨,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같은 수많은 생태학자가 줄곧 주장해 왔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한 종이 늘어나거나 줄어들게 되면 그 영향으로 다른 종들이 순차적으로 줄거나 늘어나게 되는데 이를 생태학에서는 도미노와 같은 영양단계 연쇄효과(trophic cascade)라 부른다. 그 예를 하나만 들어보자. 북태평양에서 인간의 어류 남획으로 인해 범고래들이 먹이가 부족해지자 남쪽 캘리포니아 몬터레이(Monterey) 해안의 해달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해달의 수가 줄어들자 해달이 먹는 성게의 수가 늘어났다. 성게의 수가 늘자 그 먹이가 되는 해조류 숲이 심각하게 파괴가 되었다. 이런 비슷한 사례는 여러 생태계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 생물학 교과서에서는 인간을 뺀 사례를 다루고 있지만 사실상 여기서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최종 포식자인 인간이다. 어쩌면 우리가 자연을 파괴하는 결과가 우리 자신에게 부메랑처럼 영향을 미치는 단계가 서서히 찾아오는지 모른다.
따지고 보면 현재 환경을 바라보는 관점은 생태계의 보전이나 동물권의 보호가 주된 관점이 아니다. 북극의 얼음이 녹아서 멸종 위기에 처한 불쌍한 북극곰을 돕고자 환경단체에서 모금하는 것은 소수의 타 종에 대한 공감의 확장일 뿐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인간이며 인간의 멸종 위기가 목전에 도달했다는 자각이 서서히 주류 지구 환경학자, 생태학자들 사이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는 여기서 불교가 환경문제에 대해 대안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우공양은 우리가 음식 쓰레기를 남김으로 인해 환경이 파괴되는 것을 미리부터 차단하는 좋은 식습관을 지향한다. 불교 사회를 중심으로 한 채식문화의 확장은 생태학적으로 매우 바람직하다. 앞서 동물에 대한 잔인한 학대나 사육 방식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외에도 육식은 지구 생태계와 생명 다양성 유지를 위해 지양되어야 함은 이미 과학적으로 밝혀졌다. 이를테면 참치 100g을 먹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1차 생산자가 필요한지 계산해 보자. 영양단계의 한 단계가 높아지면 그 효율이 10%로 떨어진다. 참치 100g을 먹이기 위해 그 먹이가 되는 물고기를 1kg이 필요하고, 이 물고기를 먹이기 위해 더 작은 물고기 10kg이 필요하다. 이들이 먹는 먹이로 100kg이 필요하고, 궁극적으로는 1,000kg이라는 어마어마한 식물플랑크톤이 필요하다. 만약 채식을 못하더라도 낮은 영양단계의 생물을 섭취하는 게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위해서는 더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어쩌면 육식에 관한 논란도 얼마 안 가서 종식될지도 모른다. 최근 빠른 속도로 개발이 되는 대체육과 배양육이 시장을 점유할 날도 머지않아 다가올 것이라 예상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설법에는 중도(中道)가 많이 강조되었다. 나는 중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다면 밸런스, 곧 균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오늘날 환경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에도 적용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가끔 극단적인 환경 이용주의자들과 환경 보전주의자들은 마치 부족주의의 후신인 양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첨예하게 대립한다. 과거에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환경 보전론이 기후변화 패러다임과 맞물려 이전보다 위상이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많은 환경 규제가 만들어졌고, 기업을 운영하려고 해도 환경에 대한 책임이 많이 강조된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ESG, RE100과 같은 이슈들이 경제계에도 작동하기 시작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전기자동차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친환경 패러다임은 한쪽 면만 보는 것일 수 있다. 전기자동차는 친환경인가? 내연기관이 아니므로 배기가스가 나오지 않아서 깨끗한 이미지로 포장하고 있지만, 전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화력발전소가 필요하며 이 역시 환경을 오염시킨다. 나아가 배터리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배터리를 생산할 때는 리튬, 니켈 등의 주재료뿐만 아니라 적은 양이라도 필요한 희토류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광물자원은 주로 중국이나 남미와 같은 곳에 위치한 광산에서 공급이 되며 제련을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을 사용하고 오염시킨다. 어쩌면 우리는 깨끗한 공기를 마시기 위해 우리가 마시는 물을 더럽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친환경 제품이라는 광고를 볼 때 이것이 정말 친환경인지에 대한 의심이 필요하다.
지행합일(知行合一)-알면 행동한다.
인류가 처음으로 달에 땅을 내딛는 데 성공한 우주선은 아폴로 11호다. 그런데 이전에 아폴로 8호는 1968년 달의 뒷면에서 우리가 사는 행성인 지구의 사진을 찍어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전송했다. 이 사진의 제목은 지구돋이(Earthrise). 우리가 해돋이를 보는 것처럼 마치 우주에서 작고 푸른 지구가 떠오르는 광경이 찍혀서 전송되었을 때 사람들의 기분이 어땠을까? 그전까지 지구인들은 그런 지구의 모습을 어디서 본 적이 없었다. “저 작고 푸른 달같이 생긴 게 우리가 사는 지구라고?” 몹시 충격을 받았을 수 있다.
그다음을 미국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Archibald MacLeish)는 〈뉴욕 타임스〉에 이런 글을 남겼다.
영원한 고요를 떠다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진정으로 보는 길은 우리 자신을 지구의 탑승자로 인식할 때부터다. 지구를 밝은 사랑스러움 위에 함께 선 진실한 형제로 영원한 냉혹을 함께 항해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밀린다왕문경》에는 밀린다왕이 나가세나 존자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스님, 알면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과 모르고 하는 사람 중 누가 더 화를 입습니까?”
“몰라서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 더 화를 입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왕자나 대신들이 모르고 잘못을 범한다면 그들에게 갑절의 벌을 내려야 하겠습니까?”
“임금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글이글 단 쇠붙이를 한 사람은 모르고 잡았고 한 사람은 알고 잡았다고 하면 어느 사람이 더 심하게 데겠습니까?”
“모르고 잡은 사람이 더 심하게 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모르고 악행을 하는 사람이 더 큰 화를 입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나가세나 스님.”
대부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알고서 저지르는 악행이 더 나쁘다고 한다. 그러나 나가세나 존자의 말처럼 환경에서는 모르고 저지르는 악행이 본인에게 더 치명적일 수 있다. 우리는 환경과 나의 관계에 대해 매우 무지한 상태이며 그러기에 하나씩 더 알아차려 가는 과학적인 검증과 그 지식의 확산, 그리고 실천이 매우 중요하다.
"알면 행동한다." ■
김태원 ktwon@inha.ac.kr 서울대학교 해양학과를 졸업하고 생명과학부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스탠퍼드대학교 방문연구원, Monterey Bay Aquarium Research Institute의 박사후연구원을 거쳐 한국해양과학기술원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해양동물학 연구실’을 이끌고 학생들을 지도, 연구하며, 해양생태계를 보전하기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현재 인하대학교 해양과학과 부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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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佛敎와 科學 - 地球 環境과(地球科學) 佛敎 (김태원 敎授)
건강하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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