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주의 춘천 이야기28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달래주는 오항리 무후제
<참사랑 이웃공동체의 실현>
춘천시 북산면 오항리에는 무후제(無後祭)가 행해진다. 무후제는 후손이 없는 사람을 마을이나 읍면동사무소에서 추모해 주는 제사이다. 오항리는 매년 음력 10월 15일 낮 10시 30분경 노인회관에서 마을 사람들이 모여 김영순과 김연수 부자(父子)의 제사를 지낸다. 춘천에서는 필자가 조사한 바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무후제이다. 참고로 필자가 조사한 강원도 무후제 조사연구에 따르면 강원도에는 무후제가 약 50군데 넘게 치러지는데, 그만큼 강원도는 참사랑 이웃공동체가 잘 이뤄졌다는 증거이다. 얼마나 훈훈한 일인가. 오항리의 무후제도 참사랑 이웃공동체의 실현으로 볼 수 있다.
오항리 무후제의 대상은 6.25한국전쟁 때 전사한 아들과 피란하다가 죽은 아버지이다. 김영순에게는 김연수가 외아들이었고, 김연수는 총각으로 전사했다. 그래서 자손이 없어 대가 끊어졌다. 참 슬픈 현실이 벌어진 것이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그의 제사를 지내주니 다행이다. 김연수는 국립묘지에 묻힐 수 있었으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곁에 묻어달라고 이웃에 부탁했다. 그 후 그의 어머니는 개인 사정으로 마을을 떠났다.
<참살이 인생의 기림>
김영순은 어려서 남의 머슴을 살면서 열심히 일했고, 새경으로 받은 돈을 모아 땅 3,000평을 샀다. 그리고 마을 일은 뭐든 돕는 참 일꾼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아주 좋아했다. 김영순이 죽은 후 그의 아내가 마을을 떠나면서 땅 3,000평을 모두 마을에 희사했다. 마을 기금으로 좋은 곳에 써 달라는 뜻이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입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다.
강원도 무후제를 조사하면서 보면, 무후제의 대상이 된 사람은 “생이근업 사후여재희사(生而勤業 死後餘財喜捨)”라는 조건이 있었다. 아무나 마을에서 무후제를 지내주지는 않는다. 곧, 살아서는 생업에 부지런히 해야 하고, 죽어서는 남은 재산을 마을에 기부해야 한다.
김영순과 김연수 부자는 무후제의 조건을 모두 이행했다. 그 때문에 오항리에서 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 부자의 묘소를 보살피고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러니 무후제는 참살이 인생을 기리는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모범이 되는 삶의 표본이기에 무후제를 받는다. 막살면 아무리 돈이 많아도 무후제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그들이 내놓은 기금은 마을 공동의 소유가 되어서 꼭 필요한 곳에 쓰인다.
<출산의 중요성 인식>
오항리에서 무후제를 받는 대상은 전쟁이라는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조건 때문에 이승을 떠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신체적인 문제로 인해 자식을 낳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경우 가장 큰 불효라고 맹자에서는 말했다. 곧 “불효유삼 무후위대(不孝有三 無後爲大)”라 해서 불효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불효가 후손을 잇지 못하는 것이라 했다. 조선조 시대에는 자식을 낳지 못하면 나라에서 나서서 양자를 들였고, 그래도 안 되면 무후제를 지내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무후한 대군, 왕자, 공주, 후궁을 위해서 수진궁(壽進宮)에서 제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거리제와 여제의 대상에도 무자귀신이 있다. 이처럼 옛날에는 자손에 대한 인식을 지금보다는 크게 가졌다. 자식을 낳아서 부모의 제사를 지냄을 최고의 미풍양속으로 봤다. 출산에 대한 인식이 컸음을 나타낸다. 사람이 태어나면 혼인을 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이루어 사는 모습을 사람들은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하였다. 물론 억지로는 안 되지만, 자식을 낳아 살아보면 그 재미를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