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어쩌겠어 / 곽주현
잘 달려가던 앞차가 갑자기 속도를 줄인다. 길게 늘어서며 차량 정체가 이어진다. 갈 길이 바쁜데 이러면 짜증이 난다. 혹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걱정도 된다. 그러다가 곧 자동차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다 보니 짐작대로 도로 한가운데에 승용차 두 대가 멈춰 있다. 두 운전자가 서로 삿대질하며 무어라 고성이 오간다. 다친 사람은 없나 보다. 운전하다 보면 이런저런 사고를 겪게 된다.
10월 어느 날 고향 친구들이 마을 어귀에 모였다. 부부동반으로 여행 가는 날이다. 그날따라 하늘은 더 높고 푸르러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터라 서로 안부를 묻고 웃고 떠들며 반가워한다. 빌린 차가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그렇게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승합차가 오고 오지랖이 넓은 친구 만석이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15인승인데 한눈에 봐도 많이 낡아 보였다. 바퀴도 닳고 닳아서 홈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나서서 이런 차를 어떻게 타고 가냐며 바꾸어 오라고 했다. 그는 이것도 겨우 빌려 왔다며 지금이 관광 철이라 차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내들까지 왔는데 안 갈 수도 없어 일곱 쌍이 모두 차에 올랐다. 불안했지만, ‘설마 어쩌겠어.’ 하며 의자에 앉았다.
섬진강 망덕포구-지리산 정령치-남원 광한루까지 가는 여행이다. 망덕포구에서 싱싱한 생선회에 소주도 한잔 걸치고 기분 좋게 정령치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길이 험해서 조마조마하며 가고 있는데 고무 타는 냄새가 났다. 가파르게 오르내리는 구간이 많아 브레이크를 자주 밟아 그런 것 같았다. 경사가 완만한 곳이 있어 좀 쉬어가자며 멈췄다. 30 여분을 정차해 있다가 남원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운전석 옆자리에 앉아 가던 친구가 갑자기 ‘저곳에다 차를 박아, 박아.’ 하는 소리가 들려서 농담하는 줄 알고 말조심하라고 입을 여는 바로 그때 몸이 붕 떴다.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아 일부러 왼쪽 산모퉁이에 부딪혀 버린 것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오른쪽은 수십 길 낭떠러지다.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고, 허리를 붙잡고 엉금엉금 기고, 다리를 절뚝거리는 친구 등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앓은 소리가 골짜기를 덮었다. 그래도 다들 차에서 어떻게든 빠져나왔는데 아내만 일어서지를 못하고 바닥에 누워 꼼짝 못했다. 얼굴에 핏기가 없고 눈을 감은 채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고통스러워했다. 덜 다친 친구들이 아내를 들어 내리려고 하기에 그대로 가만두라고 소리쳤다. 척추가 어떻게 된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119 구급차로 가까운 남원 병원으로 실려 갔다. 모두 많이 다쳤지만, 아내는 매우 심각했다. 골반 전체가 금이 갔다는 의사의 소견이다. 환자가 움직였으며 더 큰 부상으로 이어졌을 거라며 초기 조치를 잘했다고 말한다. 이튿날 광주 큰 병원으로 옮겼다. 최소한 20주 정도는 입원해야 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겉으로는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멀쩡했다. 지루하고 힘든 병원 생활이 시작되었다. 움직이면 안 된다고 반듯하게 누워만 있으라고 해서 환자나 돌보는 사람이나 모두 고통이었다. 뼈가 금이 가서 별다른 약이 없고 붙을 때까지 그대로 있는 게 가장 효과적인 치료 방법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갈비뼈 세 개가 금이 가서 8주 진단을 받았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렇지 않은데 움직이면 가슴 통증이 심해서 나도 모르게 ‘아, 아’하는 비명이 나왔다. 그렇다고 나까지 병원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아내가 워낙 크게 다쳐서 내 부상은 작은 생채기쯤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한, 학교 수업 때문에 더욱 그러지 못했다. 나 역시 특별한 치료가 없고 시간이 약이라고 하기에 의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3일만 입원하고 출근했다. 몸통을 압박붕대로 감고 오른손으로만 운전하며 다녔다. 양손으로 운전대를 잡으면 통증이 심해서 그랬다. 지금 생각하니 참 무모한 짓을 했다.
내가 출근하고 나니 아내의 병시중이 문제였다. 하루 내내 누워만 있어야 해서 누군가가 꼭 붙어있어야 한다. 아들딸들은 직장, 군대, 학교에 있어 시간 내기가 어려웠다. 고심하고 있는데 아내 자매들이 자기네가 간호하겠다고 나섰다. 서울, 대구, 인천 등 먼 곳에 살고 있으면서도 직장에 휴가 내고 달려와서 며칠씩 돌아가며 병원에 머물렀다. 지극한 형제애를 드러내는 나날이었다. 어려움이 닥치면 누가 뭐라 해도 핏줄밖에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때는 고마워서 완쾌되면 별것이라도 다 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것 같다.
얼마쯤 치료가 되어 가자 이번에는 보험 처리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사고 원인이 운전 미숙으로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보상이 어렵다는 것이다. 또 보험사가 자금난으로 파산 직전이어서 더 힘들게 했다. 교통사고 처리 전문가를 만나 상담도 했지만, 운전자 잘못이 크면 보상이 힘들다는 대답이다. 다른 친구들은 이미 완치되어 퇴원했고 아내만 남아 이런 곤란을 겪으니 몸도 마음도 지쳐서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른 피해 보상 없이 보험사가 치료비를 내주는 것으로 합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낡은 차를 내치지 않고 ‘설마, 무슨 일 있겠어’라는 생각으로 쉽게 행동한 것이 발등을 찍고 싶도록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보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친구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 운전자에게 운전 미숙의 책임을 물어 피해 금액을 받아내야 한다고 몇 사람이 주장해서다. 우리가 누구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 마을에서 나고 자란 불알친구들인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장 크게 다친 사람이 우리 부부지만 결코 그럴 수는 없는 거라고도 단호하게 말했다. 소위 죽마고우라는 절친들도 곤경에 처하게 되니 이렇게 가려진 민낯이 드러나 보여 무척 서글펐다. 운전한 친구는 누가 하라고 부탁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모두에게 도움을 주려고 차를 빌려왔고 핸들을 잡았다. 그러다가 사고가 났다. 운전하면서 무리하게 브레이크을 조작한 것은 맞다. 그러나 나는 차량 자체가 오래되고 정비가 잘 안 된 것이 사고의 더 큰 원인이라 생각했다. 그 친구도 크게 다쳤지만 사고 처리 때문에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경찰서를 드나들었다. 그러면서도 미안해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네 잘 못이 아니라고 다독거렸지만 끝내 그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 교통사고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 가까이 지났다. 아내는 지금도 그 후유증으로 가끔 힘들어하지만, 이겨내려고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친구들은 그때의 일들은 다 묻고 가끔 만나서 막걸리를 마신다. 운전한 친구는 안타깝게도 그 술자리에 올 수 없는 먼 나라로 갔다.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그것은 인재였다.
첫댓글 아찔한 사고였네요. 곽 선생님, 마음이 제일 아프셨겠어요.
큰 사고였네요.
그런 큰 일을 겪으셨네요.
아픕니다.
오른쪽은 수십 길 낭떠러지,,, 읽기만 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한데 겪으신 분들은 얼마나 놀랐을까요? 가장 큰 피해를 보고도 운전한 친구를 감싸 주신 선생님의 인품에 한 번, 사모님 자매 분들의 사랑에 또 한 번 감동 받았습니다.
운전자도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지도 않았을 텐데 서로 운수 나쁜 날이었네요. 사모님이 일어났기 망정이지 큰일날뻔 했습니다.
큰일을 겪으셨네요. 다른 사람을 태우면 그런 일이 생길 때 제일 난감할 것 같아요.
긴장하며 읽었습니다. 건강하시다니 다행입니다.
(한정숙)사고 현장이 피부로 느껴집니다. 생생한 글 고맙습니다.
제 친구 시아버지도 골프 치러 가던 길에 사고가 나서 오랫동안 고생했답니다.
30년이 지났는 데도 여즉 후유증에 시달린 걸 보니 얼마나 큰 사고였는지가 느껴집니다.
선생님의 너른 인품에 감동합니다.
맘 좋으신 두분께서 몸 고생 마음 고생 했을 걸 생각하니 애잔한 마음이 듭니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교통 사고를 생생하게 그린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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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이 실감나네요. 교통 사고를 생생하게 그린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아찔합니다. 천만타행이고요. 사고 후 선생님의 침착함이 돋보입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