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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명-허기진 인생, 맛있는 문학
저- 유승준
출- 소담출판사(2012. 9.20. 351)
독정-2019. 10. 25
· 일본 대지진을 보며 우리가 만들고 이루어냈다고 뻐기는 뫃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자연앞에서의 겸손시 새삼 무겁고 뼈 아프다.
· 바다는 맺힌 것을 풀어낸다. 인생의 뼈아픈 상처를 입었을 땐 바다를 찾는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확 풀어준다.
· 쓰레기장은 쿠가 싸하고 구역질나고 낯설고 오래전부터 잘 알고 있던 물건들이었는데 떨여져 나온 아기 인형의 다리처럼 어쩐지 무섭다.
· 양아치라는 말은 동냥아치라는 말에서 왔고 움직일 동자에 방울 령자를 쓴 동령(動鈴)에서 온 말로 동령은 번뇌를 깨트리고 불심을 강하게 일으키기 위해 흔드는 도구인데 구걸인이 이 동녕을 흔들어 방웃 로리를 내며 다녔다. 동냥아치에서 동 자가 떨어져 양아치가 되었다.
· 새벽 수산 시장에서 버려진 엄청난 내장들과 생선 대가리 꼬리, 팔다 남은 멀쩡한 것들이 꽃섬 사람들에게 밤마다 잔칫날이 된다.
조화를 배달하려고 갔는데 지인이 아직 운명하지 않아 인근 식당에 들어가 우동음 먹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기다리며 자기 배를 채우는 우동 먹는 장면에서 인생의 산 자와 죽은 자를 구분 짓는 건 결구 우동 한 그릇 차이다. 통조림이야말로 지진 간ㅌ은 위기 상황 속에서 먹는 음식이다. 주인공이 도시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동안 해야 할 일은 본능적인 생존과 관련된 우동 먹는 일이나 통조림 먹는 일로 이해시키고 싶었다.
· 별의 별 것을 다 담을 수 있다. 소설 속의 그들은 하루하루 통조림 공장에서 반복된 일을 하며 동일한 ㅌ통조림ㄴ을 만들고 맛도 느낄 새 없이 그걸로 식사를 해결하는 사람들이지만, 한 편으로 저마다 자기만의 비밀을 통조림 속에 숨겨놓고 산다. <통조림 공장>은 바로 그들의 이야기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언제든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ㅇ벗었다. 지진 안내문을 보기 전과 안내문을 본 이후 내 삶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 냉커피를 맛있게 다 마셨다. 리필해서 더 마셨다.
<이슬 털기>
· 소설<폭식>-김재영-여
을 본다. 바로 이 장몀부터 주인공을 둘러싼 복잡 내면세계가 풀려난다. 작품 속 ‘숲속의 빈터’와 ‘린도우인’이 상징하는 것은? 캘트족은 BC 약 200년경부터 1세기경까지 유럽 대분의 지역에 살던 ㄹ인도유럽어를 사용하던 종족의 일파다. 이 켈트족에게 전해오는 전설에 ‘숲속 빈터’라는 공간이 있다. 숲을 신성하게 여겨 아주 깊은 숙에 가면 나무가 쓰러지거나 자연으로 만들어진 비터가 있다. 그 빈터가 캘트족에게 제의라든가 축제 같은 행사를 벌이는 장소인데 린도우인도 그 숲 속의 빈터에서 벌어지는 제의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다양한 열매와 식물을ㄹ 잔득 먹고 늪에 버려져 수장되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그 린도우인을 희생 제물로 초목의 신을 달래기 위한 제사를 지냈단다. 이 소설 주인공은 자신을 공동체의 어떤 위기 속에서 버려진 한 개인으로 생각한다. 마치 린도우인의 죽음처럼. 갑자기 IMF 사태가 발생, 정리 해고 과정에서 회사에서 해고된 대상에게 국가에서도 개인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치명적 상처를 받은 개인. 린도우인과 마찬가지로 캘트족의 얀녕을 위해 재의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1984년 8월, 영국 멘체스터 공항에서 상업용 토탕를 캐던 광부가 한 덩어리의 토탄을 분쇄기에 넣으려하다 토탄에 붙어있던 이끼가 떨어져 사람의 발이 나타났다. 고고학자가 보니 이 고대인의 인체는 보존 상태가 매우 좋은 것이라 린도우인이라 불린 이 남성은 켈트족이며 지배 계급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남성은 제비뽑기으 결과 종교 의식으로 처형되었는데 얼굴은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가 스스로 원해서 맞이한 죽음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란 구체 개인의 경험을 재료로 삼아 허구 세계를 구축해나가지만 그 개인의 경험 역시 동시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경험이다. 따라서 시대 애정과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작가로서 불구의 모습을 띤다. 주인공은 어떤 문제 상황을 드러내는 인물이지만 개인 감정이나 생활 정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그것과 맞닿아 있고 재 개인의 경험과도 많이 결합되어 있다. 그냥 꿈꾸듯이 제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보다는 저와 함께 살아가느 살마들과 동시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드러내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세계화가 재빠르게 진행될수록 전 세계 대도시들은 다인종, 다문화 사회가 될 거라고 본다. 자본주의 체재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공간이 멘하튼이다. 중산층 이상의 백인들은 쾌적. 풍요로운 생활을 하고 흑진 중심의 하층만은 열악, 지저분하고 마약과 총기로 얼룩져있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서로 다른 두 세계가 동시에 병존하는 곳이다.
“네가 좋아하는 고들빼기김치 잘 삭혀놨는데...”라며 다음 말을 잊지 못하는 누나, 갑자기 민지환의 눈에도 눈물이 맺힌다. 먹고사는 일 때문에 떠나려 해도 떠날 수 없는 것, 먹고 살기 위해 머물고 싶어도 머물 수 없는 자, 남매라는 이름으로 얽힌 유일한 피붙이들 간의 마지막 대화는 이렇게 끝난다. 도대체 먹고 사는 일의 끝은 어디일까? 주인공 남자는 그 끝이 어딘지 모른다. 자신도 언젠가는 숲속의 빈터로 끌려가 린도우인처럼 위를 가득 채운 채 서서히 죽어갈 거라는 걸 알지만, 배를 채우기 위해 폭식을 멈출 수는 없다. 어차피 인생이란 배가 터지도록 먹고 도저히 견딜 수 없는 허기를 채워가는 여정이니까.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손미나
· 내 안에서 더 이상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부글부글 끓고 있는 이런 이야기들이 더 이 상 갇혀 있지 않고 자유롭게 분되도록 해주고 싶었다. 에세이처럼 머릿속에서 생각의 흐름을 따라 잔잔하게 써 내려가는 그런 글이 아니라, 꽉 차서 곧 넘쳐버릴 그런 글의 물꼬를 터줘야겠다고 손미나만의 확신, 운명, 어떤 본능적 직감 같은 걸 거기서 느꼈다.
· 작은 가게가 하나씩 문을 닫는다는 건 골목이 없어진다는 거다. 도시에 거대한 쇼핑몰 하나가 생기면 수백 개의 골목이 사라져버린다. 유년 시절 골목에서 뛰놀며 갖게 된 추어ᅟᅡᆨ들이 골목의 파괴와 더불어 점점 없어진다.
아이어트의 왕국 대한민국에서 무시당지 않고 살려면 여자는 이효리, 남자느 권상우처럼 얼ㅉ빵과 몸짱이 되어야 한다. 아름달움이 지식보다 앞선다는 송준희의 궤변에 선뜻 반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이어트가 신흥종교로서의 입지를 튼튼하게 굳힌다면 요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 나는 하느님이 계시다면 배교자들도 다 끌어안아야한다는 생각이다. 매 맞고 너무 아파서 어쩔 수 없이 배교를 했는데 그것 때문에 지옥에 가라고 하면 너무 잔인하다. 다 천당으로 ㄷ레기고 가야지. 아마도 그랬을 거다. 그 사람들을 다 지옥에다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삼국유사><삼국사기><고려사>를 보면 해마다 굶어 죽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다. 구석기때부터 내 어린 시절 때까지 그랬다.
· 과부 오동희의 기도문
주여, 매 맞아 죽은 우리 아비의 육신을 우리 아들이 거두옵니다
주여, 당신이 십자가에서 죽었을 때
당신의 주검을 거두신 모친의 마음이 어떠했으리까.
하오니 주여, 우리를 매 맞지 않게 하옵서서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옵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세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을에 주님의 나라르 세우소서.
주여, 우리 죄를 묻지 마시옵고 다만 사하여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 김훈을 취재하러 간 기자가 물었다.
“중국 음식 시켜 드셨나요?”
“여긴 배달 안 와요.”
“그럼, 이 철가방은 뭡니까?”
“산책 나갔다가 주어온 건데. 내 서류 가방이에요.”
들여다보니 문짝이 떨어져나간 철가방 안에 노란색 메모지와 흰 종이 주홍색 파일 나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누군가의 한끼 식사를 실어 나르던 철가방이 이제는 시인의 서류 가방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삶이란 따뜻한 한 끼 밥 같은 게 아닐까.
· 시장은 말 그대로 인생 전시장이다. 온갖 삶의 군상과 악다구니들이 첨예하게 부딪치고 깨지고 뒹글면서 하루가 가고 1년이 가고 인생이 지나갔다. 그 연옥 같은 시장 한 귀퉁이에 자리한 삼오식당은 엄마의 인생 그 자체였다. 가난 앞에 주먹질 한번 할 수 없었던 세월의 막막함을 견뎌온 엄마는 “여자가 돈 버는 거. 이것처럼 슬픈 인생이 어딨어.” 했지만 삼시 새 끼 밥 굶지 않고, 세 딸 번듯하게 시집보내고, 허기진 살마들에게 고봉밥 한 그릇 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더 이상 욕심이 없었던 엄마의 삶은 멋진 인생이었다. 정말 슬픈 인생은 아직도 이리 떼처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시장 밖 사람들이었다. 시장 안 아줌마들은 저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삼삼오오 모여서 파 다듬고 생선 토막 내면서 왜 깔깔깔 웃고 저럴까.
<이슬람 정육점> 손홍규 저
동네에 사는 새끼 고릴라처럼 생긴 김유정은 말더듬이였지만 동물의 말을 알아듣는 신기한 재주가 있고 소설가가 되는 꿈이 있다. 불치의 병을 앓는 맹랑한 녀석은 동화 같은 이야기를 사실이라 믿으며 쉬지 않고 주절거린다. “죽을 건데 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 어디서 배웠는지 철학 화술로 해결사 역할까지 한다.
작품을 통해 알았던 작가를 여행길에서 만나거나 그 자취를 찾아보면 웃음이 있으면 그 뒤에 눈물이 있고 눈물이 있으면 그 뒤에 웃음이 있는 복합적 상황들을 이해한다.
하산 아저씨는 쿠란을 외울 정도로 신앙심이 깊은데 왜 모스크 근처에는 얼씬하지 않고 이슬람교에서 철저히 금하는 돼지고기를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것일까? 그는 종교를 내면화한 살마이다 .교회나 절에 나가지 않지만 자기 종교를 자기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모스크를 완강히 거부하며 그만큼의 부조리를 암시한다. 아모스 아저씨의 트라우마는 그리스 내전에서 생겨난 건데 왕국 군대와 공화국 군대가 싸울 때 실수로 자기 가족들과 친척들을 죽였다는 것에 트라우마가 있어 벗어나기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는데 또 거대한 다른 공포를 목격하면서 자기와 같은 처지에 놓인 사람에 대해 점점 친근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을 묘사했다.
연애 할 때 생각하면 사랑은 다 까먹고 우정으로 산다. 사랑은 유지가 안 된다. 죽을 때까지 사랑의 완성을 꿈꾸지만 절대 불가능하다. 행복해지고 싶다고 때로 이게 행복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지만 하룻밤만 자고 나도 어제 행복ㅎ하고 느꼈던 것들이 다 없어지고 남아 있질 않아도 갈망을 품고 살아간다. 품위 있게 살려면 갈망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내면에 욕망만 가득하다면 제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이라 해도 천박한 삶을 살고 있다. 이룰 수 없는 것에 대한 꿈이 많다는 건 어쩌면 우리 인생에게 주어진 진정한 아름다움이라 생각한다. 연수갈 때 옛교장들은 점심값을 줄이려고 다스한 국밥 한 그릇 대신 막걸리 한 잔 사마셨다. 그래야 연수 기간 동안 묵을 여관집 숙박료를 내고 주머니에 돈이 좀 떨어질 수 있어 집에 돌아갈 때 자식들에게 풀빵 한 상자라도 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신 시가지로 상징되는 그곳에 무엇이 있는가. 보다 넓은 집, 빠른 자동차. 보다 큰 텔레비전이 놓인 그곳은 생떡쥐배리의 표현대로 한다면 재화의 감옥일 뿐이다. 그곳에서 소중한 영혼의 가치를 대부분 잃어버린다. 타인의 슬픔을 이해하는 방법을 잊고 사랑의 완성이라는 꿈을 버리고 삶의 더 큰 비전인 내면으로 가는 길을 상실한다. 남는 것은 불모지와 같은 ;도시의 황야‘에서 느끼는 고독과 갈망뿐이다. 나는 이것을 자본주의적 슬픔이라 부른다. 잔설이 덮인 산 빛깔과 모처럼 청명한 겨울 하늘빛이 눈부시다. 그 아래 거대한 도시가 자리하고 있다. 이글거리는 욕망을 끌어안고 거리를 해메고 있을 또 다른 나와 타잔이 눙에 들어올 것만 같다. 뜨거운 삶의 현장인 저잣거리르 배회하는 노작가도 보인다. 노작가는 청년작가를 넘어 현역작가로 불리고 싶었다.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의 저자-박범신
<1인용 식탁>유고은 소설
혼자 밥 먹는 방법과 요령을 가르치는 학원에 등록하면 신상 카드 뒷장에 한 줄 각오를 적는다. 혼자 먹는 식사는 ?(지겹다)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혼자 밥 먹어도 매일 점심시간을 꼬박꼬박 다가온다. 나름 자유로운 시간이지만 그런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다. 단지 밥 한 끼를 혼자 먹어야 하기 때문에 지겹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기를 둘러싼 전체 상황들이 지겹다는 의미이다. 혼자 먹어도 되는 음식과 혼자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이 구분되어 있다.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혼자 밥 먹는 방법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거다, 무시하는느 거다. 신경 쓰지 않고 밥 먹는 것에 몰두하는 것이 최고다. 혼자 밥 먹는 살마에게 혼자 밥 먹는 살마이 볻이면 굉장히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이 된다. 갑자기 닺체 손님이 우르르 몰려와 왁자지껄해지면 불안하고 초조애지ᅟᅢᆫ다. 사방에 같은 제복을 입은 살마이 앉아 밥을 먹고 있으면 외촐이가 된 것 같다. 우리 사회에는 ㅇ리ᅟᅥᇂ게 무리 짓고 소속감 갖ㅂ고 안심하며 산다. 거기서 떨어져 나와 소외되었을 때 불한해하는 집단의식이 분명히 있다.경영 컨설팅 호지사 CEO 카이스 페라지가 쓴 <혼자 밥 먹지 마라> 책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세계적 기업을 일군 저자가 성공비결로 원만한 대인관계를 꼽았는데 그 비밀 하나가 밥 먹는 시간에 폭 넚은 대인관계로 유능하게 활동한단다. 휴가 나 온 군인이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는데 수업을 ㅁ나친 여고생들이 와하고 들이닥치면 제아무리 씩싹한 군인이라도 얼굴이 빨개져 제대로 식사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꿋꿋하게 식사를 다 마치는 게 5단계다. <기쁜 우리 젊은 날>이라는 영화에서 안성시 싸랑 황신혜 씨가 헤어져 다시 만나는 장소가 바로 라면집이었다. 라면을 시키다가 옛 애인 안성기를 만난다. 이런 민망스런 상황에서도 트레이닝 복을 입고 혼자 끝까지 식사 할 수 있다면 최고 경지다. 학원에서는 식사법 중 음식 먹는 장면에서 메뉴에 따라 4분의 2박자. 3박자 구분해서 강약 강약약 식으로 밥을 먹는데 실제로 이렇게 먹었다간 금방 체할 것 같다. 주입식 교육이지만 이렇게 박자에 맞춰 밥 먹으면 주위 사람들 시선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혼자 밥 먹다가 학원을 수료한 달인은 합석을 요구한다.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다. 자기처럼 이런 고민의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든 거다. 혼자 먹는 식사가 즐거워서가 아니라 자기 다짐, 주문, 스스로를 향한 새뇌를 하지만 결국 혼자 밥 먹는 걸 두려워하거나 함께 어울려 먹어도 두렵다.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은 채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로서 늘 새로운 길을 찾는다. 혼자 밥 먹다가 한 마디 했다.
세 명이 되어서 상석 중의 상석을 찾아앉는데 큰 힘이 되었다.
<안도현>
평양을 자구 가는데 북한에 사과나무를 심어주는 일이다. 남쪽에서는 좋은 묘목을 가지고 가서 우리 기술로 나무를 심고 북쪽에서는 다을 내어주어 과수원을 만들어 그들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짓는다 과이릉ㄹ 수확하면 북쪽 아이들이 먼저 먹을 수 있게 하자는 취지에서다, 작년 4월에는 평양 주변에 사고나무 만 그루를 심었다. 북한 어린이들이 눈에 밟힌다. 가만 보니 북한 아이들은 많이 걸었다. 어떤 아이느 소나무 가지 몇 개를 들고 걷고 어떤 어른은 보다리 하나 들고 걷고. 남쪽 사람들은 살을 빼기 위해 걷는데 북쪽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걷늗다. <멸치볶음>
프라이팬은 뜨거워!
고추장은 메워!
팔짝팔짝 뛰던 멸치들
얌전해졌네
냠냠!“
안도현의 시에는 유독 연탄이 많이 나오고 <바닷가 우체국>시에는 한 모금의 다듯한 국물 시를 그리워했다.
이 시간대 햇살은 별나라 살마들이 먹다 흘린 빵 부수러기처럼 느껴진다. 빵을 만드느라 정신없는 곳은 이 모던한 서양식 빵집만이 아니다. 방집 바깥쪽 인도 한 귀퉁이에서는 남루한 차림의 어떤 아주머니가 바쁘게 비단잉어 빵을 구워내고 있다. 그냥 잉어 빵과 비단 잉어 빵맛은 어떨까? 비단잉어 빵은 바다에서 물고기가 튀어 오르듯 쇠로 만든 붕어빵 기계 속에서 쉼 없이 튀어 올랐다. 빵 굽는 속도로만 보면 빵집 안에 있는 서양 요리사들 전부 합쳐도 이 붕어방 장사 아주머니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어려운 이름표가 붙어 있는 빵을 하나씩 골랐다, 오래된 자전거 뒷자리에 놓인 바구니에 빵을 싣고 우리는 안국동 그녀 집으로 갔다.
세 명이 되어서 상석 중의 상석을 찾아앉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예전에는 비밀스럽고 감추어진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드러나고 밝혀지는 걸 좋아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 이러면서 죿을 거 같다. 그 ‘아’는 나 ‘아“자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죽음을 보고 참 맣이 깨달았다. 세례명은 로사(장미를 뜻하는 로즈에서 온 이름이다.) 카잔차키스가 <영혼의 자서전> 책에서 ’신은 부드러운 눈물이고 떨림‘이라 했다. 나의 글과 나의 죽음이 누군가에게 이로움을 주는 , 영적 성장에 도움 되는 그런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 육신을 위해 빵 먹듯이 영혼을 위해서도 그에 걸맞은 빵을 먹어 여성을 살찌워야지
<방은 유쾌하다>신현림
· 누룩을 넣어 빵이 부푸는 모습은 꿈이 부푼 아이의 모습을 닮았다. 어쩌면 여인네의 하얀 젖가슴을 닮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기원전 2600년경에 최초로 누룩을 넣어 만든 이후로 빵은 지치지 않고 식사의 주 손님으로 등장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온기. 식사 시간은 축복받은 시간이다, 살면 얼마나 살겠나. 하루하루 감사하며 맛있게 살자.
· 사랑은
식탁이나 소파 간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자리에서 시작된다. 결국 먹는 것과 사는 것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웬지 서먹서먹하다가도 밥이라는 게 중간에 끼면 아주 평온한 자리를 만들어준다. 쌀독에서 인심 나듯 밥상에서 정든다.
<누구에게나 아무것도 아닌 햄버거의 역사>-조현
맥도날드 매장에 시라는 갑옷미늘을 입힌 이후 마이클 버거는 대박을 낸다. 시느 그 어느 증정품보다 소비자들의 감동과 만족을 준다. 시인들은 현기증이 날 만큼 기대 이상으로 받게 된 돈에 만족하며 맥도날드가 요구하느 시를 써서 독점적으로 공급한다. 마이클 버거의 “책갈피 히‘는 소비자 시리학 과정을 이수한 문학 비평가들의 청저한 품질관리르 거쳐 생산되고 이렇게 버거느 인류가 고안해낸 보든 발명품 중 가장 기형에 가까운 음식일지도 모르는 정크푸드의 역사를 새로 쓴다.
자본주의라고 너무 안 좋은 쪽으로만 몰아가도 안 되겠다. 자본주의의 순기능도 많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 사실은 이익의 추구라든가 욕망의 실현때문에 의학 기술이 발전하고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고 삶이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진 것 또한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부작용에 대한 성찰은 필요하지만 그 중간에 시로 상징되는 문학이나 예술이 중요 작용을 할 수 있다. 자본주의가 추구한ㄴ 이노베이녓이나 효율성과 예술이 지향하느 자기반성이나 성찰이 조화롭게 결합되는 것이 현대인이 지향해햐 할 이상이다. 햄버거를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이라칭송한 이유는 풍자다. 스페인에는 느긋하게 대화하다 여유 있게 나가는 문화가 식사문화인데 우리나라 빨리빨리 문화에는 독특한 배달 시스템이 있다. 빨리빨리 문화가 전파되어 스페인 문ㅁ화를 많이 짐식시켰다. 배달 분화가 들어간 곳의 레스토랑이 많이 망해ㄸ다. 사무직 노동자나 빨리 먹고 일해야 하는 사람도 패스트 푸드 문화가 맞겠다. 초국적 기업의 주력 상품인 햄버거를 만드는 일에 시인이 유용한 도구로 등장. 시인들의 시를 넣어 판매하는 빵에 시인들이 앞장서 협조하모 시의 주문 생산이라느 초유의 사태가 벌이진다. 돈 앞에 여지없이 무너지느 시닝들의 모습은 비참. 슬프다. 풍자가 너무 극단적인데 시 같은 경우 인간의 이익 추구 본능을 무시하고 자꾸 공존이나 화해만 이야기하니까 그런 것들을 이제 좀 인간의 본질적 부분과 결함해서 해석해줘야 한다. 그래서 맥도널드가 추구하는 영리적 측면과 시인이 가진 성찰적 측면이 결합되면 자본주의에 내포된 공격적 측면이 조금 상쇄된다.
조현 작<종이 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
· 치과의사인 그 앞에서 내가 환자였다면 입을 크게 벌리게 한 다음 구강 구조를 낱낱이 살폈을 것이다. 그에게 질문의 메스를 내 앞에서 그는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구강 구조를 들여다보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말은 느렸고 말수는 적었다.
·부자로 태어나도 불평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가난하게 태어나도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누가 더 행복한가는 타고난 환경과 조건보다 각자 살아가는 태도와 자세에 달렸다. 인근ㅁ 노점상들과 쌓아온 끈끈한 인간관계는 참으로 놀랍다. 어디서 저렇게 따뜻한 이웃들을 만날 수 있을까.
·엄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밥상이다. 오감으로 느끼는 이미지로서의 엄마ᅟᅳᆫ 늘 자식에세 먹을 걸 주는 존재다. 개/덕, 국밥, 짜장면, 홍시 등 먹은 것을 떠올리면 특정한 시공간이 겸쳐지면서 엄마라느 존재가 공감각적으로 살아난다. 은서는 풀빵만 보면 엄마 생각니 난다.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니들이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숟가락 부딪치며 밥 먹고 있는 거 보믄 세상이 부러울 게 뭬 있나 싶었재.” 풀빵 엄ㄴ마도 “너희들 먹는 거 보기만 해도 엄마는 배가 부르네.” 예나 즈금이나 이런 엄나의 마음은 다 똑같다.
우둥 줄기를 뽑을 때 “아, 비가 막 내리는 느낌이야.”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히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행복한 우동 가게> 강순희-문예사조에 <이발사는 가위로 가지치기를 한다>로 등단. 충주시 연수동에서 “행복항 누동 가게‘를 하는 강순희씨는 우도을 끓이느 가게 주인이자 주부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고 간 많은 글과 이야기들을 긴 우동가락으로 뽑아내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살고 있다. 한 그릇의 우동과 한 잔의 술, 한 편의 시가 있는 이곳은 음식을 파고 돈을 받은 단순한 식당이 아니다. 사랑을 잃은 사람들과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늘 울고 싶은 사람들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이 꽁꽁 언 몸과 마음을 잠시 녹였다 가는 삶의 위안처이자 인생의 아늑한 쉼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