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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원저 ; 12연기 강론 -모곡 사야도 / 강의 ; BBS불교방송 -상좌 불교 한국 명상원 원장 묘원 |
오늘은 제가 수행하고 있는 상좌 불교 한국명상원에서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방법 네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마음은 조건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나타나며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도 다양합니다.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고 해도
아는 마음과 모르는 마음 두 가지 뿐입니다.
마음은 상황에 따라서 알맞은 방법으로 알아차려야만
성공적으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네 가지이며
이런 방법을 통해서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있는 마음 알아차리기입니다.
둘째,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셋째,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넷째,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기입니다.
있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지금 내 마음가짐이 어떤가?’ 하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화가 났거나 미워하거나 좋아할 때 새로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하려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행위를 하려고 하는 의도를 아는 것으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고 일어나려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아는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고
현재의 일하고 있는 마음을 다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 방법은
제가 수행하는 한국 명상원의 수행 방법이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은 제 17장, 사견(邪見)을 어떻게 제거하는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견(邪見)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사견(邪見)은 나라고 하는 자아가 없는데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유신견과,
모든 것은 변하고 항상 하지 않은데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항상하고 영원하다고 하는
상견(常見)이 있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하는 단견(斷見)이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없애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합니다.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 집중력을 키운 뒤에 지혜가 나야
이러한 잘못된 사견이 제거됩니다.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한 사물을 바르게 볼 수가 없습니다.
사물을 바르게 보지 않고서는 세상사의 번뇌로부터 영원히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사견으로 대표되는 유신견은 무아(無我)의 반대입니다.
무아는 윤회를 끝내게 하는 진리이지만
유신견은 윤회를 계속하게 하는 범인입니다.
그런데 이 유신견은 단순한 윤회를 만들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뿐인 비참한 세계에 떨어져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문제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비참한 존재계인 지옥에 떨어지게 하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근본원인이 바로 사견(邪見)입니다.
사견(邪見)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살아있는 것들의 생명을 빼앗고, 훔치고,
삿된 음행을 하고, 부모를 살해하거나 심지어 부처님의 몸에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하는 큰 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이렇듯 모든 잘못된 행위와 악행은 사견(邪見)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금도 괴로운데 미래에도 괴롭고 싶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은 지옥에 떨어진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옥은 무엇일까요? 지옥을 빨리어로 아빠야라고 하는데
생명이 사는 31개의 세계 중에서 가장 낮은 세계로 비참한 존재계에 속합니다.
지옥은 고통만 있고 행복이 없으며 수명은 업에 의해서 결정됩니다.
지옥에서 업의 과보가 끝나면 다음 업에 의해 다른 생으로 윤회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다음 업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실재하지 않는 세계로 알고 있으나
부처님에 의해 분명하게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로 밝혀졌습니다.
인간은 다른 생명에 비하여 유일하게 살고 있으면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옥을 체험하기도 하고
죽은 뒤에 바로 이렇게 체험한 지옥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하는 근본원인을 제거하고
뿌리 뽑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참한 지옥으로 떨어지는 원인을 불선업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자세히 살펴보면 실제로 범인은 사견(邪見)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사형수를 처형하는 것은 집행관이지만, 결국 죽음의 형을 선고하는 진정한 힘이
판사에게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존재하는 근본 원인은 무명과 갈애이고,
무명과 갈애는 바로 사견에 의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사견(邪見)은 잘못된 견해이고 잘못된 견해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사형수의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무명과 갈애이지만,
결국 사형을 선고하는 것은 유신견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범인은 무명과 갈애이지만, 진짜 범인은 유신견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지각이 있는 존재를 지옥으로 보내는 것이 바로 사견(邪見)입니다.
밖으로 나타난 업은 실제 범인이 아닙니다. 이렇듯 사견은 위험하고도 해로운 것입니다.
사견(邪見)이 왜 근본 원인이 되는지에 관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행동은 범인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잘못된 마음이 범인인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싶고, 자고 싶고, 말하고 싶다는 온갖 종류의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내가 먹고 싶다, 내가 자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다, 등등 내가 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은 각각의 정신적 현상이 일어날 때마다
개아로서의 나, 자아로서의 나, 진아로서의 나를 아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생각, 혹은 의식은 인식의 대상과 감각 기관의 문이 접촉하여 일어납니다.
이런 방식으로 개아, 나, 자아,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 비롯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는 것을 내가 본다라고, 듣는 것을 내가 듣는다라고
잘못 여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조건에 의한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인식의 대상은 감각 대상의 소연이라고 합니다.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는 반드시 감각 대상인 색성향미촉법과 접촉하게 됩니다.
이것을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이 부딪힌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접촉에 의해 육식(六識)이 일어납니다.
육근과 육경이 부딪히는 것을 12처(處)라고 하며
다시 육식을 하는 것을 18계(界)라고 합니다.
18계란 살아있는 생명의 세계관입니다.
수행자는 18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므로 그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처럼 18계를 벗어난 것은
초월적인 것으로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또 감각 기관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말합니다.
감각 기관이 감각 대상과 부딪혀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때의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을 상좌 불교에서는 상징적으로 육문(六門)이라고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림을 감각 기관의 문에 둡니다.
이렇게 알아차렸을 때 알아차림이란 문지기가 지키기 때문에
탐, 진, 치라는 도둑이 들어 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감각 대상에 마음이 부딪히면 대상에 대해 차별이 일어나서
탐, 진, 치에 빠져서 몸과 마음을 도둑이 지배하게 됩니다.
이처럼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은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같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상좌 불교의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육근(六根)을 육문(六門)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보는 자, 듣는 자, 행위를 하는 자는 없습니다.
이것은 단지 원인으로 인한 결과일 뿐입니다.
성내는 마음과 탐욕의 마음이 일어날 때,
이것들은 단지 성내는 마음과 탐욕의 마음뿐이라고 이해하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또한 이런 마음들이 그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수행이 일정단계에 이르면 수행자는 오직 의식만 있는 것이라고 알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정신적 상태의 일어남이 단지 현상일 뿐이고, 그 순간의 의식만 있을 뿐,
거기에 나, 자아, 나의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기분이 좋고, 내가 성을 내고, 내가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순간의 마음이 그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정신적 상태란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을 말합니다.
정신이라고 하는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있습니다.
마음은 의식하는 것, 아는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의 작용은 수, 상, 행을 말합니다.
이때 정신적 상태는 느낌, 지각, 또는 마음에 의해서 일어난 모든 행위를 일컫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위해서 수행을 해야 하며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만이 이러한 것들을 바르게 알 수 있습니다.
한 편 질투심이나 보시에 대한 생각 등,
어떤 생각이나 의식이 떠오를 때에도 그것은 단지 정신적 상태일 뿐이라고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이는 단지 생각이나 의식일 뿐이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사람이 내가 아니라는 점을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이 생각들은 그 자체의 기능과 역할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여기에 나 또는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의식은 두 현상들 즉,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의 결과로써 연속적으로
무리지어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만 하겠습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모두 감각 기관과 감각 대상의 부딪침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일 뿐이지,
그 외에 어떤 것도 개입될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제 수행자는 몸에 관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그것들을 단지 하나의 물질적 현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몸이 아플 때에도 마음까지 아프지 말고,
단지 하나의 물질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도 배가 고프다고 괴로워하지 말고,
단지 이것이 하나의 물질적 현상이라고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몸에 대하여 몸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무엇이 어떻다는 상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단순하게 ‘이것은 물질적 현상이네.’ 하고 하나의 물질적 현상으로 지켜보아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에 관해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하여,
그것들을 단지 하나의 정신적 현상으로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에도 괴로움 때문에 고통을 겪지 말고
단지 하나의 정신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 슬플 때에도 슬픔 때문에 비탄에 빠지지 말고,
이것이 단지 하나의 정신적 현상이라고 분리해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지금 괴로워하고 있네! 지금 슬퍼하고 있네! 이것은 정신적 현상이네! 하고
괴로워하는 마음과 슬퍼하는 마음을 정신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마음에 대하여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정신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지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무엇이 어떻다고 상상을 하거나
다른 것과 결부시켜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하나의 정신적 현상으로 지켜보아야 비로소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대상이나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야 대상에 개입하지 않고
대상을 분리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개입하지 않고 봐야 새로운 업을 만들지 않습니다.
업을 만들면 연기가 회전하여 끝없는 윤회를 거듭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물질과 정신을 단지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괴로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나타난 것을 나타난 상태 그대로
알아차릴 때만이 본질적 해결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만약 나타난 대상을 어떻게 하려고 의도하면 이미 갈애가 생긴 것입니다.
이것은 무관심이 아니고 무대응입니다.
무관심은 무기력한 상태의 게으름이지만,
무대응은 대상을 정확히 파악하고 단지 갈애를 일으키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만이 바른 견해를 가지고 사견을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사견은 제거하려고 해서는 제거되지 않습니다.
단지 개입하지 않고 지켜봄으로써 지혜가 성숙되어
스스로 소멸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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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初期佛敎 - 12緣起와 위빠싸나 125. 邪見의 除去 方法(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