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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의 축복 / 눅 2:8-14
미켈란젤로 이후 최고의 조각가로 평가받고 있는 현대조각의 아버지 오귀스트 로댕의 작품 중 우리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은 무릎에 오른손을 괸 남자 조각인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청동으로 만든 조각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유명란 로댕의 조각작품은 ‘지옥의 문’이라는 조각이다. 높이는 6.5m, 기간은 30년이란 긴 세월을 투자하여 만든 대작인데 말 그대로 지옥의 문이다. 이 지옥의 문만 열면 곧 바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로댕은 그 지옥의 문 바로 안쪽에 무엇을 조각해 놓았는가 하면 고통당하는 200여명의 사람들을 조각해 놓았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 지옥의 문 바로 앞에서 모두 다 아둥바둥 거리면서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들이다. 그런데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우리들에게 잘 알려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어느 위치에 있는가 하면, 조금이라도 더 깊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이 아비규환의 현장인 지옥의 문 입구 바로 위쪽에 걸터앉아서, 무릎에 오른손을 괴고 이런 비참한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렇다면 왜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을 지옥의 문 위에 만들었을까? 물론 정답은 없고, 정답이 있다면 그것은 로댕만이 알겠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때 이 조각은 더 깊은 지옥으로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유심히 내려다보면서, 아마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해 볼 수 있다. ‘죄 지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저렇게 지옥으로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나?’
제가 왜 오늘같이 기쁘고 좋은 성탄절에 지옥의 문이라는 조각부터 설명드리는가 하면 바로 이와 같은 죄인 된 인간들을 위하여 예수께서 이 땅에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금 메리 크리스마스 논쟁 중에 있다.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할러데이라고 쓰자고 한다. 거의 모든 공중파 방송의 진행자들은 ‘Happy Holidays’를 사용하고 있고, 대부분의 광고방송은 ‘Holiday Sale’이라는 문구를 사용하고 있다. 여러 종교를 가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미국에서 특정 종교의 교주 이름을 사용하는 인사말은 더 이상 사용돼서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일은 이미 10여년 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영국에서는 성탄절의 이름을 ‘Christmas’에서 ‘winterval’로 바꾸자는 말이 나왔다. ‘winterval’이란 겨울을 뜻하는 ‘winter’와 축제를 뜻하는 ‘festival’의 합성어로, 곧 이제 성탄절은 더 이상 아기 예수님의 오심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축하하는 때가 아니라 연말연시를 맞아 흥겹게 춤추며 술마시며 노는 축제의 계절로 삼자는 말이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벌써부터 예수님에서 산타클로스로 바뀌었다. 제럴드스미스라는 사람은 ‘유대인들이 신약성서의 주인공인 예수를 대체하기 위해서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를 도입했다’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지금 유럽에서는 反 산타 운동이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회사가 장삿속에서 만들어낸 캐릭터여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 시청 앞 크리스마스 시장에는 요즘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모든 제품이 전시돼 있지만 유독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한다. 아예 전시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산타는 가끔씩 눈에 띄는 ‘反산타’ 스티커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비엔나시 대변인은 ‘산타클로스는 영어에서 나온 것이니 산타가 보고 싶은 사람은 코카콜라의 나라 미국으로 가라’고 말했다. 反산타 움직임은 독일로도 확산이 됐다. 독일 성 니콜라스재단의 베티나 스케드는 ‘우리는 여기저기서 붉은 옷을 입고 수염 기른 사람이 크리스마스의 참 뜻을 손상하는 것에 반대한다’라고 말하면서 ‘예수의 탄생이라는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이제 선물과 상술만 남은 축제로 전락했다‘라고 비판했다. 호주에서도 反산타 운동은 불이 붙었다. 호주의 한 목사님은 산타는 어린이들에게 탐욕과 이기심을 가르치는 ‘거짓된 신’이라고 신문에 기고했다. 빅토리아주 와남불의 새생명교회 스티브 맥닐리 목사는 산타가 하나님의 불경스러운 대역으로 부모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어림이들에게 혼란을 야기한다고 비판했다. 맥닐리 목사는 산타 이야기가 상업적인 경쟁심을 조장하고 어린이들의 마음에 물질주의와 이기심을 심어준다면서 ‘산타가 어린 꼬마들의 사랑과 헌신과 신앙심을 빼앗아갔다’라고 주장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反산타 운동을 거세게 벌여야 할 때이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산타 복장, 산타 트리, 산타 카드, 산타 캐럴, 눈썰매, 루돌프 사슴 등 이 모든 것을 교회에서 추방해야 한다.
산타클로스는 270년 소아시아 지방 리키아의 파타라시에서 출생한 성 니콜라우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일생에 많은 선생을 베풀었다. 예수의 이름으로, 그래서 성 니콜라우스 성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다. 여기까지는 좋다. 참 훌륭한 신앙인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선행을 누군가가 이용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주어야 하겠는데, 누가 줄 것인가? 그래서 선물을 주는 이로 많은 선행을 베풀었던 니콜라우스로 대체시켰다. 라틴어로 그의 이름은 ‘상투스 니콜라우스’인데, 이를 ‘산 니콜라우스’라 발음하던 네덜란드인들이 신대륙 아메리카에 건너가 영어와 섞이면서 ‘산테 클라스’가 됐고, 전 세계로 크리스마스가 전파된 19세기에 ‘산타클로스’로 굳어졌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성탄절에 산타가 예수님 대신 주인공 노릇을 하게 된 데에는 코카콜라의 상술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김병도씨가 쓴 ‘코카콜라는 어떻게 산타에게 빨간 옷을 입혔는가?’라는 책에 보면, 1822년 치과의사 클레멘트 무어가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라는 시를 발표할 때만해도 산타는 왜소한 몸짓을 갖고 있었다. 왜요? 굴뚝을 드나들며 선물을 나눠주려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러나 1920년 코카콜라는 항상 웃는 모습의 뚱뚱한 할아버지로 이를 재창조했다. 거기에 코카콜라를 연상시키는 흰털(하얀 거품) 달린 빨간색(콜라 색깔이 빨갛게 보이지요?) 외투를 입히고 커다란 벨트를 채웠다. 겨울 판매량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던 코카콜라는 광고를 통해 선물 배달 후 코카콜라를 마시는 산타를 보여줬는데, 이때 화가 하든 선드블롬이 자신을 모델로 그린 것이 현재의 산타의 모습이다. 이런 코카콜라의 상술로 인해 산타클로스는 전 세계인의 마음에 성탄절의 주인공은 산타클로스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오늘날의 성탄절은 세상 기업의 교묘한 상술에 의해 주인공이 아닌 가짜 주인공이 주인공 노릇을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교회부터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잘못된 성탄 문화를 속히 교회로부터 추방해야 된다. 오늘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성탄 문화를 바라보면서, 다시 한번 성탄절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이 날이 왜 의미있는 날인지, 왜 우리는 성탄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는지를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자세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겠다.
1. 먼저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의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보라. 목자들에게 일러주신 천사의 메시지가 무엇인가? 10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그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이 무엇이었나? 11절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구주 예수님의 탄생, 이것이 바로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이다. 그러니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요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물었다. ‘성탄절이 무슨 날이지요?’ ‘산타클로스의 생일입니다’라고 대답한 학생이 64%나 되었다. ‘그러면 성탄절에는 산타클로스 할자버지로부터 무슨 선물을 받고 싶지요?’라고 물었다. 초등학생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선물은 신형 핸드폰이었다. 또 물었다. ‘선탄절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지요?‘ 가장 많은 대답이 크리스마스 트리 꾸미기였다. 두 번째가 영화보러 가기였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어른들도 성탄절이면 호텔 예약이 제일 많은 때이다. 콘도 예약률이 가장 많은 날이다. 상탄 이브는 모두 술마시고 노는 날이다. 성탄절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날인데 주인공 예수님은 없다.
아들딸을 잘 기르고 결혼을 시켜서 손자, 손녀까지 둔 홀로 사는 어머니가 있었다. 생신이 되었다. 자녀들이 모여서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겠다고 다 모였다. 어머니는 아들딸, 손자, 손녀가 다 온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시장에 가서 장을 보고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었다. 저녁이 되자 자녀들이 와서 어머니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TV를 보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식사가 끝났는데도 그 많은 아들딸, 며느리, 사위 가운데 상을 치우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70이 가까운 어머니 혼자 부엌에서 덜거덕거리며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으면서도, 어머니가 만들어 놓은 음식을 먹고 어머니에게 설거지가지 시켰다. 누구 생신인가? 누가 누구를 축하해 주었나? 오늘날 성탄절이 그렇다. 성탄절의 주인공은 예수님이다. 성탄절에는 오직 예수를 생각하고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 빼놓고 무슨 성탄절이겠나? 그런데 혹 우리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유가 쉬는 날이기에, 선물을 받는 날이기에, 가족끼리 놀러가는 날이기에, 애인과 데이트하는 날이기에, 성탄절 행사 대문에, 흥청망청 재미있는 성탄절 분위기 때문에 기다려진다면, 이미 예수님 없는 성탄절을 맞이 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언젠가 미국의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작은 도시 스머빌에서 성탄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시청 광장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 장면을 재현해 놓은 적이 있었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퍼지고 시청 앞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에서는 오색등이 깜빡거렸다. 그야말로 아주 성탄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그런 장면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았던 사고가 발생하였다. 누군가가 아기 예수를 몰래 훔쳐가 버리고 말았다. 예수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멀리서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달려온 동방박사들, 아기 예수를 싸 놓았던 포대기, 누워있던 말구유도 모두 다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꼭 있어야 할 아기 예수, 성탄절의 주인공인 아기 예수가 없어져 버렸다. 이로 인해 모든 시민들이 안타까워 하였고,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던 주위의 모든 장식물들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당황한 시 당국은 급기야는 방송을 통하여 호소하기에 이르렀다. 시민들과 각 기관 단체에서도 거리로 나와 전단지를 나누어주면서 아기 예수를 제자리에 갖다 놓기를 호소했다. 그러자 며칠 후 아기 예수를 훔친 사람은 다시 예수를 그 자리에 갖다 놓았다. 여러분,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절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아무리 아름다운 장식으로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고, 선물들이 오고가고, 성탄 축하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우리의 마음이 그것들로 인해 기쁨이 넘칠지라도, 아기 예수가 없는 성탄절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탄절의 주인공이 예수님이심을 새롭게 깨닫는 그런 기쁨의 성탄절을 맞이해야 겠다.
오늘 우리 시대의 성탄 문화를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지 착각하는 것 같다. 성탄 행사나 성탄 문화를 가만히 보면 주인이 객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어느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성탄 이브 때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교회에서 성탄축하 연극을 하는데, 산타 복장을 한 사람이 슬퍼하고 있는 아이에게 와서 선물을 주고는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말한다. 교회에세 크리스마스를 꾸미는데 보니 완전 산타판이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이 입으로 부르는 캐럴송이 ‘징글벨, 루돌프 사슴코’이고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엔 선물을 안 주신데’를 부르면서 율동을 하고, 그야말로 제 정신이 아니었다. 여러분, 도대체 누가 주인공인가? 산타인가, 예수님이신가? 이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특히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우리의 성탄 문화를 바로 가르치고 올바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회에서나 성도의 가정에서 산타가 주인공처럼 등장하는 모든 문화를 추방해야 한다. 성탄절 행사의 모든 면에서 오직 예수님만이 주인공이 되고, 예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 오직 예수님 때문에 이 성탄절이 있고, 예수님 때문에 기쁨의 성탄이 되도록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이를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할 줄로 믿는다. 이제 우리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자. 우리부터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성탄 문화를 만들어 가자.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손님이 되지 않도록 하자. 이번 성탄을 맞는 우리는 진정 성탄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새롭게 깨닫는 날이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만이 이 날의 주인공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잔치, 예수님만을 높이고 찬양하는 그런 성탄이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2. 성탄절은 구주가 나신 날임을 새롭게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본문 11절에서 천사가 전하여 준 기쁨의 좋은 소식의 핵심도 ‘구주의 나심’이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주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나신 날이 바로 성탄이다. 예수님이 오신 주목적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것’이다. 바로 여러분을 죄에서 구속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날이 바로 성탄이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소망이 없었다. 우리를 살리려면, 우리를 구원하려면 누군가 죄 없는 분이 와서 우리 대신 피를 흘려주어야 한다. 히 9:22절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라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만들러 놓으신 구속의 원리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원하셔서 ‘내가 가마. 내가 사람이 되마. 내가 피를 흘리마. 내가 죽어주마. 내가 너희를 살려주마.’ 하시고는 이 땅에 구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에게 성탄이 그토록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베들레헴의 예수 탄생은 하나님의 아들을 갈보리의 십자가로 이끌어 가는 길목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베들레헴은 십자가로 가는 길목에 놓여 있다. 베들레헴의 말구유는 십자가로 통하는 길목에 있다. 그러므로 배들레헴의 말규유, 예수님의 탄생을 볼 때마다 우리는 그 배경에 십자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모르는 크리스마스는 복음도, 은혜도 아니다. 예수님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 대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기 때문이다. 여러분, 오늘날 성탄이 우리에게 왜 의미있는 날이 되나?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마다 왜 우리 마음이 감동을 받나? 허물과 죄로 죽은 여러분을 살리기 위해 그분이 오셨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감동을 받는 것 아닌가? 이 사실을 알고 성탄을 맞이하기에, 우리에게는 성탄절이 감격스러운 날이 된다. 날 위해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사하고, 믿으면 믿을수록 가슴이 벅차오르고, 그 이름을 부르면 부를수록 나의 전 인격이 가만있지 못하고 흥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연합신문에 한 유명한 목사가 글을 실었는데, 그분의 이야기가 자기는 59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냈지만 작년 크리스마스까지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세월이 흘러가니까 크리스마스도 맞이하게 되는 그런 삶을 살아왔다고 고백했다. 크리스마스, 분명히 무슨 날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25일 성탄축하예배를 마치고 집에 들아와 앉아있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성탄절의 찬송을 불렀고, 왜 그 예배를 인도했는지 깊은 의미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냥 허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분도 작년 크리스마스 직전 어느 밤에 홀로 고독하게 집에 앉아 창가를 보며 크리스마스가 과연 무슨 날인가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부르는 찬송소리가 들려왔다. ‘오 거룩한 밤, 별들 반짝일 때 거룩한 주 탄생한 밤일세’ 이 찬송을 들을 때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깊이 찾아와 주셨고, 예수님의모든 생애가 새롭게 깨달아졌고, 왜 인간으로 오셔야 했고, 왜 죽으셔야 했는지, 이 모든 것이 아주 새롭게 깊이 깨달아지고 묵상이 되어 아주 눈물겨운 성탄절이 되었다고 한다. 무슨 이야기인가? 나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새롭게 깊이 깨달았을 때 그분에겐 가장 기쁘고 감동적인 크리스마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주로 오신 예수님, 이미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사실을 새롭게 깊이 깨닫는 그런 감격적인 성타절이 되기를 바란다.
3.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10-11절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여기서 천사가 전하여준 그 소식의 성격을 세가지로 말씀하여 주고 있다.
첫째,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이스라엘 민족을 뛰어넘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소식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부분적이거나 제한적이어서는 안된다.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소식이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토지주택공사가 경남 진주로 가게 되었다고 발표되었는데, 우리 전주시민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반면에 이전해 갈 예정지의 사람들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이처럼 누구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안 좋은 소식은 ‘온 백성에게 미칠 소식’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은 세상 모든 사람, 어떤 계층, 남녀노소 누구에게든지, 그리고 어떤 시대이든지 모두 통하는 소식이다. 미국 사람에게도, 중국 사람에게도, 흑인들에게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여러분들에게도, 옛날이나 현대인들이나 미래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소식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새상에 탄생하셨다는 소식이다. 이 세상의 뉴스는 한가지 특징이 있다. 그것은 오래 갈 수가 없고 언제나 변한다는 사실이다. 지속적으로, 변하지 않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구주 탄생의 소식은 오랜 세월이 흐른다고 퇴색되어질 소식도 아닌, 시대를 초월하여 오고가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미칠, 영원토록 미칠 소식이다.
둘째, ‘큰 소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큰’이란 말은 헬라어 의미로 ‘큰, 중대한, 위대한, 굉장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아주 굉장한 소식, 놀라운 소식을 말한다. 태초에 사람이 창조되어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 있었던 수많은 소식들 중에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보다 더 크고 굉장하고 중대한 소식은 없었다. 제일 크고 놀라운 소식이 바로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소식이다.
셋째,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했다.
우리가 살면서 기쁜 소식은 많이 듣는다. 누가 칠순을 맞아서 기뻐하고, 수능시험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기뻐하고, 자식이 이번에 사업에 크게 성공했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이 소식은 그 정도 기쁘고 좋은 소식이 아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불 심판을 받아야 하는 우리에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실 구주가 나셨다는 이 소식은 한마디로 이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구주가 나셨다는 이 소식은 그야말로 나의 인생 전부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는 그런 놀라운 기쁨의 소식이 된다. 여러분, 사형수에게 1년 그 사형집행 날짜가 연장되는 것은 기쁨의 소식이다. 10년 연장은 정말 기쁜 소식이다. 그러나 사형 면제가 된다는 것은 말로 할 수 없는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이 땅에 구주로 탄생하셨다는 것은 죄악으로 멸망받아야 하는 우리 인간에게는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이번 성탄절은 바로 이 큰 기쁨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
여러분, 인도의 성자 썬다싱을 알지요? 그도 한 때 죄 문제 때문에 고민하다가 몸이 수척하여 쓰러질 지경에 이르었다. 돈으로 해결이 불가능했고, 감옥에서 죄의 대가를 치른다고 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도 괴로워 라호라로 가는 기차길 옆에서 밤 10시에 결사적인 기도에 들어갔다. 만일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일 아침 5시에 지나가는 첫 열차에 투신자살할 비장한 각오였다. ‘하나님! 정말 당신은 계십니까? 계시다면 증거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라고 심정이 찢어질듯이 절규하였다. 그러나 4시 45분, 거의 7시간 가까이 절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허탈해진 그는 죽기로 결심하고 기차길로 가려고 하였다. 이때 갑자기 환한 빛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다. 에수님은 썬다싱에게 속삭이고 계셨다. ‘너는 언제까지 나를 원망하려느냐?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다. 너는 구원의 길을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고 있구나. 나는 네게 바른 길을 가르쳐 주겠다. 내가 바로 그 길이다.’ 썬다싱은 비로소 죄의 문제 해결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 그의 마음 속에 기쁨이 강물같이 흘러 넘쳐 죄사함의 큰 기쁨을 만끽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죄의 문제로 고통받고 괴로워하던 그가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 느낀 그 기쁨, 그 감격, 그건 말로 설명이 안된다. 이는 체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여러분, 오늘 나에게는 이 기쁨이 있는가?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이 있는가? 우리가 성탄을 맞이하여 즐겨 쓰는 인사가 ‘Merry Christmas!’이다. 즐거운 성탄, 기쁨의 성탄이라는 의미이다. 올해도 우리가 ‘메리 크리스마스’를 수없이 외치게 될 것인데, 혹 내 마음에는 진정한 큰 기쁨이 없이 형식적으로 ‘메리 크리스마스’를 외치지는 않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정말 이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기쁨을 간직한 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성탄을 맞이해야 된다. 진정 이 세상에 구주가 나신 이 차원이 다른 기쁨, 이 기쁨을 새롭게 회복하는 그런 성탄절이 되어야 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의 소식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다. 오늘 성탄절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축복 받는 성도 여러분들이 다 되기를 바란다. 축복도 한두 가지가 아니라 셀 수도 없이 많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죄악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의 축복, 우리를 만나주시는 만남의 축복,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축복, 기쁨의 축복, 평화의 축복을 주셨다. 여러분, 오늘 성탄절을 맞이하여 우리 주님이 주시는 성탄의 크신 은헤와 축복을 다 받아 누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0 성탄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