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니스 휴양지
2024. 7. 16
바룩 1장~6장 끝
(바룩 4,20)
나는 평화로울 때
입던 옷을 벗고,
기도할때 입는
자루옷을 둘렀다.
(바룩 6,69)
나무로 만들어 금과
은을 입힌 그들의
신들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오이
밭의 허수아비와 같다.
묵상ㅡ
바룩서엔 옷에 대한
단상이 자주 언급된다.
나무로 만든 금과 은을
아무 구실도 못하는
옷으로 비유하여
'거짓이고 가짜'임을
증명한다.
어떤 옷이기에
이렇듯 힘주어
강조하며 예언을
하는지 봐야겠다.
(바룩 2,18)
그러나 주님,
크게 슬퍼하는 이,
허리를 구부리고
힘없이 걷는 이,
눈이 풀린 이와
배고픈 이는 당신께
영광과 의로움을
돌려 드릴것입니다.
영락없는 나의 상태였다.
20년전, 모든것을 잃고
곤두박칠 친 밑바닥
거기에서 나는 병마와
먹고 살 걱정과 원망과
억울함, 두려움과 같은
감정의 폭풍에 휩싸여
차라리 죽는게 나을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데 그 기구한 상황이
'당신께 영광과 의로움을
돌려 드릴것입니다.'
라는 문장과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는
알 턱이 없었다.
동네 수도원 경당에
들어가 앉아서 기도
할라치면, 성모님께서
'얘야, 네가 입고 있는
옷들을 벗어서 나한테
주렴. 무겁지 않니?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서 아기처럼
안기려무나'라고
하시는것 같은 울림이
나를 휘감던 그날,
나는 불안한 환경에서
살아남고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덧입고
껴입은 옷들이 겹겹이였음을
깨달았다.거짓의 옷을 입은
가짜의 나를 본거다.
(바룩 4,20)
나는 평화로울때 입던
옷을 벗고 기도할 때
입은 자루옷을 둘렀다.
그랬다.
내가 순풍의 닻을 달고
잘 나가던 평화의 때에
입었던 옷을 이제는
진실하게 기도하는
이의 격에 맞게
자루옷을 입으라고
하셨던 것 같았다.
그땐 기력이 하나도
없을때라서 자루옷을
입으면 그대로 엎어질
것같아 살기위해,
포장하기 위해 덧입은
옷들을 벗어서 성모님께
맡겨드리는 걸로
합의를 봤었다.
성경말씀이 어찌
이리 나를 두고
쓰인 것처럼 절묘하게
들어맞을수가 있을까.
'예루살렘아, 슬픔과
재앙의 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광의 아름다움을
영원히 입어라 .
의로움의 옷을 걸치고..'
(바룩 5,1)
그렇게 해야 살것 같아
뭔뜻인지도 모르고,
남만 잘못한게 아니라
내가 자초한 삶일수도
있겠다는 여지를 두고
기도했었다.
하다보니 나는 어찌
되었을까요.
나를 압도하던 온갖
걱정과 근심, 불안과
공포, 억울함과 분노,
슬픔과 우울감 등,
그리고 상처와
콤플렉스와 트라우마가
무섭기만 한 어둠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협하는 허상,
즉 허수아비였음을
알게 된거다.
내가 만들어 입었던
거짓의 옷, 가짜의 옷들은
바빌론 사람들이 은과 금,
나무로 만든 것들과 같은
허수아비 옷인데,
가짜라서 제 구실을
못하는 생명과 숨결
없는 나무토막이었던
것이다.
나의 불안과 수치감을
방어하기 위해
내가 다 책임지고
해야만 하는 착한사람
옷을 입은거고,
알콜릭 아빠를 무시하지
못하게 나라도 잘해서
집안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는 완벽주의 옷을,
자식을 보란듯이
키워서 내보이고 싶은
허영의 옷 등,
뭔가 있어보이는 것처럼
나를 부풀리게 해준
거짓의 옷들이다.
바룩서 6장,
예레미야의 편지에서
나열된 내용 역시
하느님에게서 온
의로움과 영광이 아닌
사람이 지들 욕심에
만들어 덧칠한 가짜
신들이기에 두려워
말라고 하신다.
그것들은 금으로
보기좋게 입혀 놓아도
누군가 때를 닦아 내지
않으면 결코 빛나지 않는다.
(바룩 6,23)
이거봐, 완전 내얘기라니까.
그래서 그때 나는, 자루옷을
입고 기도한것이 아닌
몇겹씩 껴입은 거짓의
옷들을 하나씩
벗어내면서 주님과 소통했다.
그랬으니 나는,
알몸이었던 거다.
어찌나 가볍고 자유롭던지.
내 상처와 질병, 어둠의
상태가 깊었지만,
하느님에게서 오는
그분의 의로움과 영광의
빛은 상상초월이었다.
나의 한계마저 문제가
되지 않는 그 강력한
치유의 빛으로 서서히
물들어 갔던 거다.
그리고 지금,
내가 두려워하고
무서워 떨면서
섬겨왔던 신념들이,
결국엔 나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한 우상이었고,
그것들은
'나무로 만들어 금과 은을
입힌 그들의 신들은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는
오이 밭의 허수아비와
같다.'(바룩 6,69)는 것이
명료하게 깨달아졌다.
이렇듯 지나온 여정에서
정화되고 치유되어
회복된 나의 존재가,
주님에게서 온
의로움의 옷으로
갈아 입고, 그분 앞에
나아갈 태세가 된거다.
네 주님, 여기있습니다.
라고 다정하게 대답하며
말이다.
(바룩 3, 35)
그분께서 별들을 부르시니
"여기있습니다."하며
자기들을 만드신 분을
위해 즐겁게 빛을 낸다.
주님,
이제 바룩서는 저에게
새로운 의미로 새겨질
것 같습니다.
누가 제 얘기를 듣고
써놓은것 마냥,
생생하고 적나라합니다.
자루옷보다 무거운
옷들을 칭칭 감고
주님께 들어가던
제가, 주님의 살가운
사랑과 인도하심으로
거짓의 옷을 벗고,
한결 가볍게 당신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찬미와 영광받으소서.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부르셨듯이
'요세피나야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부르시면 어떤 모습이든
진실한 알몸으로
나아가겠나이다.
저를 도우소서.
첫댓글 요셉피나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