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유발 하라라.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감영사
돈이 목적이 아니라, 생존이 목적이기에 난 늘 피곤하다. 몇 푼 벌기 위한 직장 생활이 점점 나를 고갈시킨다. 인생의 목표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일이다. 이 치사한 돈을 벌기 위해 늘 조마조마하다. 고작 하루를 무사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내게 인류 역사 전체를 되짚어 볼만 한 열정이 있기나 할까. 개체로서 인간이란 체 백년도 살지 못하는데 수십만 년의 인류사를 굳이 뒤적거릴 이유가 있을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2020년 한국 사회를 한 단어로 제시해 보라고 한다면, 난 단연코 개체의 시대라고 하고 싶다. 개인들의 시대다. 그것도 역사나 사회속의 개인이 아니라, 지금 여기, 그리고 오직 ‘나’들의
시대라고 하고 싶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내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세상은 오직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신화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닐까 싶다. 유발 하라리에게는 인간의 가치체계란 분명 신화이리라.
개체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전체 역사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식을 흔히 ‘빅 히스토리’ 라 하는 모양이다. 우리 식으로 하면 거시사 정도가 아닐까 싶다. 미시사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이런 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개인으로서 내 자신이 한 없이 초라하고 작게 보이기 마련이다. 나의 특징, 개성,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 등, 내가 지키려고 그렇게 부단히 노력하는 것들이 사실은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한 톨의 먼지 같다. 인류라는 종의 일원으로서 개인이란 이렇구나 싶다. 이런 거시사의 폭력과 일방성에 대한 반성으로 ‘미시사’가 역사의 새로운 서술 방식으로 등장 했다. 거시사에서는 누구도 주인공이 아니지만, 미시사에서는 모두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많아도 문제고, 주인공이 없어도 문제다. 역사의 어느 때는 큰 이야기에 개체가 사라졌다. 지금은 개체의 역사를 과도하게 강조하지 않나 싶다. 종족과 국가의 싸움이 이제는 개인과 개인의 전쟁의 시대가 된 듯한 느낌이다. 공식적인 전쟁은 줄었고, 그 규모도 작아졌다. 대신 개체들은 일상이 매일 전쟁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개체가 자유롭고 독립적이게 됨과 동시에 개체는 그 압력을 혼자서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근대’ 이전에는 사실 ‘개인’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한다. 근대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는 ‘개인’의 발명 혹은 발견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런 현상을 발전이나 진보의 당연한 귀결로 보다는 새로운 신화의 탄생이라 질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다른 이유도 많이 있다. 물질적으로 풍족해지면 개체의 생존을 더 이상 군집 생활에 의존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난 변화만을 보고 인간에게 ‘역사’의 불필요성을 속단하지 않아야 한다. 군집의 시대에는 역사가 중요하고, 개체의 시대에는 ‘심리학’이 중요하다. 이렇게 질문해 보면 어떨까? 개체나 개인의 시대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새로운 기후나, 환경, 물질 생활에 집단적으로 적응해 가는 방식이 단지 변했을 뿐이라고. 아직도 호모 사피엔스는 사회적 동물이다.
유발 하라리는 인류 역사를 세 가지 혁명의 키워드로 설명한다. 인지 혁명, 농업 혁명, 과학 혁명이다.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 이 세 가지 과정을 거쳐 지금 여기 존재한다. 한 종의 짐승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뇌에 어떤 기능이 생겼다. 단지 우연적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인지혁명이다. 이 혁명이 없었다면 호모 사피엔스는 지금 존재할 수 없다. 인지혁명의 가장 큰 혜택은 ‘협력’ 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한다. 이 ‘협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비교적 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강자들과의 생존 경쟁에서 성공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략 1만년 전에 호모 사피엔스는 농업을 시작 하였다. 저자는 이를 농업 혁명이라 한다. 유발 하라리는 농업 혁명을 여타의 평가와는 다르게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고 하였다. “ 더욱 많은 사람들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있게 만드는 능력” 저자의 농업 혁명에 대한 평이다. 농업 혁명은 사피엔스 DNA 개수를 늘리는데(즉 인구의 증가)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지만, 삶의 질을 추락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농업 혁명을 통해 호모 사피엔스는 문명, 즉 위계 질서나, 국가, 제도 등을 만들어 호모 사피엔스 DNA를 보존하고 늘리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DNA가 호모 사피엔스를 조정하여 그들의 유전자 개수를 늘린 꼴이다. 이로서 호모 사피엔스는 지구상의 결정적 종으로 등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마치 야생에서 자유롭고 행복했던 돼지를 양돈장에 쳐넣고 매일 새끼를 치게 하는 사육 방식 같기도 하다.
‘과학혁명은 지식 혁명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무지의 혁명이었다’ 오백 년 전쯤 호모 사피엔스는 오늘날을 잉태한 과학혁명의 시대에 들어선다. 농업 시대는 종교의 시대이기도 했다. 신들은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여겨졌다. 과학혁명은 신의 전지전능함을 의심하고, 인간의 집단적 무지를 인정하면서 시작 되었다고 한다. 특이한 발상이다. 현재 우리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농업 혁명이 자연을 길들이고 이용하였다면, 과학은 이제 개조하고 창조한다고 하는 듯하다.
저자는 이제 과학이 인간을 신으로 승격시키고 있다고 한다. 즉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창조자인 신이 되고자 한다는 주장이다. 신과 인간의 차이는 무수히 많겠지만, 내 생각에는 신은 아무런 제약이 없고 스스로 창조하고, 인간은 무수한 제약의 지배를 받고 스스로 창조하지 못하는 점이리라. 호모 사피엔스는 이제 과학의 힘으로 그 모든 제약. 호모 사피엔스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저자의 노골적 표현에 의하면 자신의 종을 스스로 멸종시키려고 한다. 즉 나약하고 생물적 한계에 제약 받고, 죽음의 공포에 불안해 하고, 감정이라는 거추장스런 주머니를 가진 호모 사피엔스를 페기하고 새로운 종을 창조하려고 한다. 사이보그. 스스로 신이 되어 호모 사피엔스를 절멸시키려는 호모 사피엔스.
저자는 질문한다. 우리는 무엇이 되려고 하는가? 지금까지 인간은 ‘어떻게 살 것인가’ 혹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따위의 질문을 했다. 모두 다 호모 사피엔스 안에서의 질문들이지 않았을까? 저자는 이제 모든 사피엔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호모 사피엔스 말고 무엇이 되려 하는가?
이 책은 대단한 판매 부수를 기록했다고 한다. 극단적인 개인주의 시대에 사람들은 왜 이런 책을 읽을까? 자신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경향은 인간이라는 종의 DNA 특징이다. 개체로서 죽기까지는 인간은 이런 고질병을 고칠 수 없다. 왜, 호모 사피엔스니까. ‘역사’가 사라진 시대에 이 책을 권해보고 싶다. 인간은 심리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배추 숨을 죽이기 위해 소금을 뿌리듯이 이 거대한 개체의 시대의 열기를 식힐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은 이야기 하고 있다. 당신만의 유일한 독자적인 문제는 없다.
저자는 ‘상상의 질서’라는 개념을 무수히 사용하고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화폐’에 우리는 목메달까? 사령관의 공격 명령에 개체의 생명을 걸고 적진으로 달려갈까? 왜, 인류의 대다수가 비슷한 궤도를 따를까? ‘사랑’이라는 신화에 메달릴까? 어쩌면 이 모두가 우리가 ‘상상의 질서’에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우리가 이 ‘상상의 질서’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이 책은 ‘질문’을 한다. 세부적이고 전문적으로 들여다보면 많은 허점과 오류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물론 나는 모른다) 모든 책의 운명이다. 모든 책은 질문이다. 모두가 답을 찾아 미친 듯이 내달릴 때 잠시 머뭇거리거나 멈춰서서 질문의 고통에 전율해 보자.
첫댓글 백년도 살지 못하는니까,
개인 스스로 신이 돼야 하니까, 수십만 년의 인류사를 뒤적거릴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군집 생활의 필요가 약해진다면 사회성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겠네요. 젊은 친구들의 개인플레이가 강한것처럼 느껴진 이유군요.
우린 무조건 협력이었는데....
집단의 사육, 과학적 해결, 사피엔스의 진화? 화폐, 사랑.....
유명한데는 이유가 있네요 이 책, 안읽었는데..... ''무용''이 유익합니다.
이거 엉터리입니다 ㅎ
유발하라리 전에 읽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