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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제국 로마
'로마' 라는 나라는 제국이라고 불릴까? 그것은 엄청난 영토를 소유했기 때문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희랍의 헬레니즘 문화를 국가적으로 발전으며 여러나라로 흩어진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데 있다.
로마제국의 역사를 알아보자. 로마의 건국은 전설상의 로물로스형제가 최초의 왕이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설상의 형제 로물로스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고 전해진다. 건국신화와 같은 것이다. 이 지식은 세계사시간때 배운 것인데 매우 특이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한다.) 로마는 초기에 왕정으로 시작하나 타 민족의 에투리아인의 지배를 받는다. 라틴족은 이들을 물리친 후 왕정을 세운다. 하지만 이 왕정은 오래가지 못하고 공화정이 성립된다. (공화정이란 귀족과 평민의 계급투쟁으로서 갖추어진 정치의 조직체제이다.) 공화정은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룬 시대이며, 후자는 지중해를 지배한 큰 나라를 형성한 시대이다. 공화정 몰락 이후 로마는 옥타비아누스가 제정을 성립한 이후에 서양 고대사의 중심적인 문화로 크게 발전된다. 이것이이것이 로마의 제정의 변해온 순서이다.
로마 제정의 변화와 기독교는 중요한 관련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와 로마의 관계를 더욱 쉽게 살펴보기위해 역사적 실체인 로마의 정치제도 변화를 더욱 상세히 알아본다
로마는 여러 종족의 변천으로 부족국가라는 형태를 이루었다. 그 부족국가에는 귀족, 평민, 거유외인, 노예로 구성되어 있다. 이 부족국가는 정치제도의 발전을 가져오는 원동력이 되었다.(정치제도를 줄어 정체라고 하겠다.) 정체들은 그 시대의 경향성에 따라 변화를 거듭한다. 이 정체는 역사발전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첫 번째로 대표되는 정체는 왕정(王政)이다. 이 시대는 로물로스 왕조 시기와 에투루리아의 이태리반도 지배 시기가 동시에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에투루리아인은 이태리반도에 이주한 것으로 추측되어 큰 발전을 하였다. 이들은 라틴인을 1세기동안 지배하며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로마왕정은 7대로 유지되었으며 끝의 몇몇 왕은 에투루리아인이었다. 따라서 로마에는 에투루리아인의 영향이 작용하여 국가 종교적 행동 양식이 여기에서 근원하고 있다. 6세기 말 라틴족이 에투루리아 왕을 몰아내고 왕정을 폐지하였다.
두 번째로 대표되는 정체는 공화정(公和政)이었다. 에투루리아 왕을 몰아낸 라틴족은 공화정로마를 세우게 되었다. 당시 왕정 축출의 주축이 되었던 계급은 토지 귀족이었다. 정치적 실권은 귀족대표에 의해 구성되는 원로원이었다. 공화정 시대는 전기와 후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 공화정은 초기에 귀족정치의 형태를 지녔다. 그러나 평민의 지위향상 요규로 공화정의 형태가 점차 발전한다. 이후로 전기공화정은 귀족과 평민의 화합으로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을 가져온다. 이탈리아 반도가 통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공화정의 정치구조 효율성 때문이다. 이 정치구조는 정치적 명분과 귀족과 평민간의 상호견제였다. 그리고 평민과 귀족의 타협과 투쟁이다. 이러한 신분 변화의 현실적 투쟁으로 공화주의라는 민주주의 결과가 탄생한다. 이 사상은 로마제국의 원동력이 된다.
후기 공화정은 포에니전쟁을 전부 승리함으로 대제국을 건설한다. 그러나 광대한 영토로 인해 통치의 비효율성이 나타나 정치와 사회적 불안이 생겨난다. 이 사회적 혼란은 양극화를 가져왔다. 이말은 빈부격차가 심해졌다는 것이다. 정치의 불안은 군인의 정치참여를 가져왔다. 사회적·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경향이 두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하층민의 종교귀향이다. 두 번째는 평민들의 정치 개혁운동이다. 정치 개혁이 일어나던 중 제 1차 삼두정치와 제 2차 삼두정치가 형성된다.
세 번째로 대표되는 정체는 제정이다. 제 2차 삼두정치가 끝나고 로마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제정시대를 맞게 된다. 제정시대는 3시기로 구분한다. 제 1시기는 원수정시기로 황제와 원로원이 권력을 양분한 시기이다. 이 시대는 최대전성기였으며 평화로운 시대였다. 제 2시기는 군인황제 시기로 정치적 혼란기였다. 제 3시기는 전제 군주정시기였다. 이 시기는 황제가 동방의 군주와 같은 권력을 독점하는 시기였다. 이때 로마제국은 기독교를 가장 혹독하게 박해하였고 그 결과 지하예배당인 카타콤이 많이 등장한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다. 그리고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제국을 두 아들에게 양분함으로 제국의 동서분열이 나타났다.
지금까지 로마의 정체들을 살펴 보았다. 이 정체들 중에서 기독교와 가장 상관성이 깊은 것은 바로 제정이다. 그럼 제정로마와 기독교에 대해 자세히 조명해본다.
원수정시대에 옥타비아누스의 세계화와 보편화는 세계동포주의라는 시대적 경향성을 만들었다. 다시말해 그는 각 민족들의 고유한 문화, 종교, 사상 등에 관해 관용정책을 펼쳤다. 이로인해 유대교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팍스로마시대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우호적으로 대했다. 그 이유는 유대 전쟁동안 로마의 군병력이 많은 손실을 입었고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종파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는 원수정의 지배 이념이 변질되면서 제위가 군인에 의해 좌우되는 군인황제시대를 맞게 되었다. 이 시기엔 로마가 정치, 사회등 모든 면에서 혼란한 상태였다. 국민들은 이러한 혼란을 기독교를 통해 극복하려했다. 그래서 많은 수의 저층민들이 기독교를 믿었다. 이것은 로마의 당국자들이 기독교를 거대한 정치집단으로 간주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인황제시대이후 전제 군주정이 시작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 전제 군주정을 시작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황제 중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를 가한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는 또 다시 혼란기를 겪는다.
콘스탄티누스가 4명의 적대적 황제를 제거하고 황제로 즉위한다. 황제는 제국 통일의 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허용하였고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기독교는 국가적 종교로 발전했다. 그 이유는 콘스탄티누스대제가 기독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후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정식 국교로 선포한다.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동·서 로마로 이분하여 두 아들에게 상속했다. 이 사건으로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서로마는 476년에 멸망하였다. 서로마 멸망이후 기독교는 서방교회(로마교회)와 동방교회의 형태로 유지되었다. 동방교회는 동로마제국의 국가종교 범위안에 있었다. 하지만 서방교회는 감독제도의 강화를 통해 스스로 교권을 유지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제정로마와 깊은 연관성이 있다.
*독교의 발흥
기독교는 어떻게 발생하여 커질 수 있었을까? 여기서 그것을 밝히고자 한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독교는 시작된다. 기독교는 1세기 초기에 새로운 사상 체계를 만들었다. 바로 메시아 부활사상과 성경화를 정립한 것이다. 메시야라는 것은 '기름부은자'라는 뜻으로 영적인 의미에서 온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대행자라는 것이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이 메시아 부활사상이다. 이 두가지 사상체계는 기독교 성장의 원천이 된다.
기독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욱 부흥하여 안디옥,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 유럽에 까지 부흥하여 세계화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을까? 첫째는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둘째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으로 전파되고 그곳에서 자라나 성장하고 시련을 거쳐 국교화가 된 것이다.
그럼 첫째로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본다. 솔로몬이 죽은 후 이스라엘 왕국은 분열되었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호세아 왕때에 멸망한다. 남왕국인 유다는 약 250년이 지난후 멸망한다. 이때 유다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후 잡혀잔 포로들은 귀환한다. 하지만 귀환하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 불리며 이들은 유럽각지에 흩어지면서 회당형태의 예배를 드렸다. 이 시대의 중요한 특색은 구약의 선지자 시대가 끝이 났다는 것이다. 이는 유대주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은 기독교가 생겨나기위한 것이 되었다.
여기서 잠깐 기독교의 세계화에 도움이 된 것을 보자. 그럴려면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을 보아야 한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지방경제를 세계경제로 확대하여 하나의 문화권을 성립시켰다. 한 문화권의 형성을 위한 절대적인 도구는 코이네라는 언어였다. 이러한 언어의 형성은 기독교의 세계화를 위한 배양분이었다. 또한 헬레니즘의 발전은 폐쇄적인 유대주의를 잠식시켰다.
기독교 발생과 부흥의 또 다른 배경은 두가지 면에서 보여지는 로마의 종교사상이다. 하나는 당시(황제숭배같은 것, 기독교가 공인되기전) 로마 종교의 종교성이 대중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황제 숭배와 같은 전통적 종교행위가 시대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반해 기독교는 인간의 분명한 목적을 제공하는 실용적인 종교였으므로 로마의 대중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로마종교는 타종교에 관용을 취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당시 로마종교와는 다른 점이 있었지만, 자신들의 종교와 같은 부분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들이다.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에 대해 설명한다. 로마는 유대인의 전통적인 성전 제사 의식에는 간섭하지 않았다. 로마인들은 피정복민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관용정책을 취했으나 지배자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유대인을 멸시하였다. 유대교는 로마 공화정 말기와 제정 초기에 크게 성장하였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너무 율법적이었으며 배타적이어서 로마인들은 유대교에 대한 매력을 상실하였으며 유대인에 대하여 악의와 증오감까지 가지게 되었다. 사도시대 초기 유대교에 대한 박해시기가 지나면서 기독교는 크게 성장하여 로마정부가 주목할 정도가 되었다.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이후 급성장 했으나 그 시야를 예루살렘 밖으로는 향하지 못했다. 그러나 스데반의 순교와 계속적인 유대교의 박해로 인해 예루살렘 교회는 큰 타격을 받았고 밖으로 향하는 시야를 만들게 되었다.
기독교는 순조롭게 성장할 수는 없었다. 그 이유는 종교관의 대립때문이었다. 상세히 설명하면 이렇다. 로마의 보편주의 종교사상과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의 절대적대립이다. 이것은 로마제국과 기독교간의 제일차적 갈등의 요소가 되었다. 나아가 기독교의 박해라는 무서운 시련을 예고하는 결과를 낳았다.
*기독교와 로마의 갈등
기독교는 로마제국안에서 엄청난 박해와 시련을 겪는다. 이러한 시련은 서양 역사에 필연적인 결과로 나타났던 것이다. 난 처음에 그저 종교적인 관점 때문에 이러한 박해와 시련을 겪은 것이 다가 아니다 그속에는 다른 이유가 있다 그럼 로마의기독교 박해의 역사성을 본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를 보다 쉽게 알아보기위해 박해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보기로 한다.
첫 번째 시기는 네로황제 박해하기 이전이다. 이때에는 로마의 정책적인 박해는 없었고 대체로 유대인들의 적개심의 결과로 소규모의 박해가 일어났다. 이 시기의 대표적 순교자는 스데반과 야고보이다. 난 이 중 스데반에 대해 굉장히 생각을 많이 했다. 유대인에게 돌에 맞으면서도 결코 그들에게 욕하거나 대적하지 않고 천사같은 얼굴로 그들을 위해 기도한 스데반이 나에겐 너무나 도전으로 다가 왔다. 나도 이런 사람이 되고 싶지만 실제론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다.
두 번째 시기는 네로 황제의 박해로부터 주후 250년 데키우스의 박해까지이다. 이때에는 황제들이 직·간접으로 간여하기는 했으나 비조직적이고 지방적이며 소규모적인 박해였다. 때로는 희생자가 많이 생겼으나 대체로 단기간내에 끝났다.
세 번째 시기는 데키우스의 박해로부터 주후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때에 일어났던 대박해까지의 기간이다. 이때에는 로마제국의 적극적이고 조직적인 대박해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시기이다. 박해기간은 비교적 짧은 편이었으며 데키우스의 박해가 1년간, 발레리아누스의 박해가 3년 미만,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그의 황제들에 의한 박해가 약 2년간 계속되었다. 이 시기의 박해 중간기는 대체로 평화기로서 기독교가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는 기간이었다.
로마제국의 기복교박해의 요인을 교회역사가들은 대체로 종교적 입장에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 황제 예배로 상징되는 국가 권력과 기독교 신앙, 다신교와 유일신교의 관계에서 보는 것이다. 필립 사프는 로마의 종교적 관용과 불관용이라는 도식에서 박해의 요인을 말하고 있다. 라토우렛트는 이교주의와 기독교의 혁명적이고 비타협적인 주장간의 대립으로 보았다. 교회사가들이 박해의 원인을 종교적 측면에서 파악하려는 데 반해 고전주의적 역사가들은 정치적 입장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기본은 "로마 제국흥망사"에서 기독교가 민족이 아닌 종파라는 사실과 기독교의 배타성에 주목하면서 박해의 책임이 기독교측에 있는 듯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현대의 많은 역사가들도 여러측면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였다. 드 쌩크라와는 박해의 법적 근거에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톰프슨은 기독교 박해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 밖에도 프랜드 등은 로마의 외국종교에 대한 관계와 유대교의 기독교 박해에 관해 통찰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로마제국과 기독교회와의 관계를 규명한 연구논문들이 다수가 있다.
이책의 필자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배경을 역사적 관점이라는 좁은 차원을 뛰어 넘어 보다 다각적인 요인이있다. 바로 사회 경제적 측면과 정치적 측면, 그리고 종교적 측면으로 그 요인들이다.
먼저 사회·경제적 측면에서 보자. 기독교 전파 당시 로마제국의 사회·문화·사상 등을 살펴보면 로마 세계의 중산층과 상층계급들은 희랍종교의 사상과 철학의 영향을 받았던 전통적 종교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로마사회의 하층계급을 이루고 있던 대중들도 생활의 모든 영역과 공간이 다신교적 분위기를 형성한 기존의 사회 구조 내의 혈통과 신앙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다신교적 종교사상을 가지고 있는 로마인들이 옛 로마의 신을 버린다는 것은 곧 로마사회에서의 격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신앙과 종교 생활을 고수해 오던 로마사회는 기독교도가 로마의 전통종교를 우상숭배라고 보는 인식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로마 대중들이 기독교를 혐오하게 된 것은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직접 작용한 것으로 도시에서 살고 있던 많은 소매상인들이 실직 위기에 놓인 것이었다. 즉 그들의 생계를 위협하는 문제에서 발단된 것이다.
극장이나 운동경기도 우상숭배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배우나 검투사가 되는 것과 극장을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사치도 엄격히 배격되었다. 그들의 사회적 고립은 이교도 대중에게 크게 돋보였으며 혐오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관이 로마사회에 잘못 전해져서 오해를 사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기독교는 당시 세계국가를 형성한 로마제국 세계에 기존구조 내의 혈통과 신앙, 그리고 피부색들의 차별없는 기독교회를 이룩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로마제국 신분제도를 타파한다는 의도로 로마제국의 당국자들은 박해를 가하게 된 것이다.
두번째는 정치적 측면으로 보자. 처음에 로마는 다른 이민족들의 문화나 종교에 대해서 관용적이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와 같은 이와 같은 로마의 관용을 환영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주후 66년에서 136년 기간, 로마정부에 대해서 세 번의 격렬한 폭동과 봉기를 일으켰다. 두 번의 봉기는 그들의 본국에서였고 또 한번은 키프러스, 구레네, 이집트 동부 속주의 유대인 정주자들에 의한 봉기였다. 이러한 유대인의 반란으로 로마정부는 유대인을 구가적 배신자로서 극도로 혐오하였고 반로마적 정치 집단으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즉 로마제국은 이방민족의 통치 정책으로 종교적 관용을 최대한 베풀어 제국의 이익과 평화를 도모하고자 했었으나 유대인의 철저한 분리주의와 배타적인 신앙은 제국에 대한 정치적 독립의 결과로 빚어진 것이다. 기독교를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한 종파라고 생각한 로마당국과 로마대중들은 기독교에 대해서도 적개심을 가지게 되었다.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관한 정치적 배경의 또 다른 측면은 기독교도의 제국에 대한 반국가적이다. 로마제국은 유대전쟁 이후 유대적 요소라는 연속성에서 기독교가 주목을 끄는 대상이었으며 관심의 영역이었다. 즉 로마의 법과 질서, 그리고 전통적인 국가 체제로 제국을 유지해 온 황제들과 권력집단은 기독교의 반국가관에 대한 정책적인 인식이다.
세 번째로 종교적 측면으로 보도록 한다. 로마인들은 매우 많은 종교성을 지니고 있다. 희랍인과 같이 로마인들도 자연 종교적인 전통을 갖고 자연의 힘을 신격화 한 다신교적인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종교개념은 본질적으로 신비적인 것보다 언제나 실제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신비성을 지닌 로마 종교도 언제나 실제적 필요에 따라 구체적으로 대응해 나갔다.
기독교의 유일신관이라는 배타성은 이교도의 감정을 자극시켰다. 감정은 분노로 변하여 가장 경건한 사람들이 가장 불의하고 불경건한 자의 비난과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 배타성 말고도 또 다른 박해의 요인은 로마의 종교 정책과 일부 황제들의 전통적인 제종교에 대한 귀착적인 종교관이 박해의 충분한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다음 장에는 이러한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기독교인들이 이겨냈는지에 대해 알아본다.
*기독교의 시련과 신앙생활
박해 기간 동안 기독교도들은 지하묘지인 카타콤 교회를 중심으로 로마제국의 모든 지역과 사회 계층에 확장 침투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조들의 신앙을 기억하면서 신에 대한 사랑과 신앙으로 로마제국의 박해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카타콤은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다. 이 장에서는 카타콤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카타콤의 어원적 기원과 구조에 대해 알아보자. 카타콤은 크나큰 지하 갱으로 이루어진 고대 로마의 전형적인 묘소이다. 이러한 지하묘는 에투루리아인들이 독자적인 가족의 매장지로 또는 사자와 산자가 함께 만나는 장소로 사용해왔다. 로마시를 둘러싼 대평원은 화산 폭발에 의해 생긴 축적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카타쿰을 만들기에 적합하다. 즉 묘역으로 쓰일 수 있는 토질은 응회암이다. 그 응회암은 굴착이 쉽고 기둥도 필요없어 지하도를 만들기에 적합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묘역을 묘굴인부들이 카타콤을 시추했던 것이다.
카타콤에 나타난 기독교인의 생활과 신앙을 알아보자. 카타콤에서의 지하생활은 암울하고 고달픈 생활이었으나 소망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그 소망은 비록 지상 세계와 같은 쾌락적 가치관이나 물질적 소유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향한 신앙의 열정이었다. 카타콤의 내부는 암흑이 짙게 드리운 곳이며 습기가 대단히 많은 곳이다. 통로의 입구로부터 바람이 불면 공기가 미로를 통과할 때 벽과 천장의 찬 습기의 더러운 침전물이 작용하여 탁한 공기를 사람들에게 가져다 준다. 또 사람들이 뿜어내는 독소가 들어 있는 가스는 배출이 잘 되지 못하고, 타는 횃불로부터 나오는 짙은 연기는 상호 혼합이 되어서 사람들의 호흡기와 눈을 상하게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카타콤 내에서 낮에는 모여서 권고와 위로의 말을 서로 나누고 순교자를 위한 애도의 집회를 열기도 하였다. 카타콤에서 어떤 기독교도들은 그들의 자질을 발휘하여 당시의 생활을 회화로 표현하기도 했다.
그럼 카타콤이 미친 영향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로마의 기독교 박해로 인하여 기독교도들은 피난처로 카타콤을 찾았고, 그곳에서 로마제국을 장차 기독교제국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저력을 키웠던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겪는 빈곤, 고통, 억압에 대한 보상으로 내세에 구원을 얻게 된다고 믿었다. 기독교의 내세적인 구원관은 몰락되어 가는 로마제국의 무신론자들의 마음을 끌었다. 카타콤의 신앙속에 성장한 기독교도가 로마의 여러 계층과 종교에 미친 영향은 교회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로마 복음화의 과정을 살펴보자. 첫째, 기독교에로의 개종은 카타콤의 기독교도들에게서 나타나는 금욕주의와 당시 로마 귀족층의 가정과 여성들이 취했던 금욕주의와의 상관성이다. 두 번째로 복음화의 원동력은 전 로마제국으로의 선교와 박애신앙이었다. 세 번째는 로마 박해자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가 승리하게 되고 전 제국을 복음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카타콤 기독교도의 순교관이다.
*기독교의 승리
여태까지 기독교의 박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기독교의 승리에 대해서 알아 보도록 한다.
로마제국은 통일제국의 평화를 구현하면서도 팔레스타인 변방 조그만 종교집단인 기독교에대해 약 300년간에 걸쳐 잔인한 박해와 시련을 가하였다. 이 박해로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화형이나 십자가형으로 죽어갔고 맹수들의 희생 제물이 되었으며 온갖 형벌로 인하여 많은 순교자가 생겼다. 기독교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굳건한 신앙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지하도시 카타콤에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다. 카타콤 공동체는 지하의 열악한 환경에서도 신앙과 선교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하층계급인 노예들에게 접근하여 기독교의 진리를 전파하였다.
4세기 초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는 기독교를 우호적인 종교로 간주했다. 그리고 주후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반포함으로써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이는 역사적인 대사건이었다. 전통적인 종교와 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로마제국은 이교도 국가에서 기독교 국가로 전환되는 역사성을 맞이 했고 아울러 유럽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기독교 공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황제가 된 것도 국가 안정을 위한 통치술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4인체제에서 이뤄진 기독교 박해(AD 303) 이후다.
아버지가 영국에서 죽은 뒤 로마로 돌아온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된다(306).그 다음해에는 공동 황제이던 막시미아누스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게 하고 그의 딸 파우스타를 아내로 얻는다. 그러나 자신의 승진 문제로 장인과 다툼이 생기면서 장인에게 자살을 강요하기도 했다.311년 동방의 황제요 기독교 박해의 원흉이던 갈레리우스가 죽자 처남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치우스와 전쟁을 벌인다.
로마로 진격한 콘스탄티누스는 플라미니아 가도에서 막센치우스에 승리, 수석황제가 된다.313년초에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칙령을 선포한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게 기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한 밀라노 칙령이다.
콘스탄티누스는 그러나 리키니우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제거한 뒤 동방의 황제로 등극하자 또 다시 전쟁을 벌인다. 두 곳의 전쟁에서 패한 리키니우스는 사형당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4인 통치를 종식시키고 유일 황제가 된다.
유일 황제가 되는 도정에서 정치적 술수와 배신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항상 차디찬 이성으로 영민한 판단력을 발휘했다.
그의 균형 감각과 통일성은 기독교를 공인하는 힘이 되기도 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과연 참된 기독교 개종자인지에 대해서는 많은 점에서 의심된다. 그는 원래 태양종교인 미트라교를 믿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인이 된 직접적인 이유는 막센치우스와의 전쟁중 하늘에 나타난 십자가를 목격한 것이지만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전에도 갈레리우스 황제의 기독교 관용령이 있었고 그의 주위에도 적지 않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밀라노 칙령은 모든 사람들이 마음에 드는 형태로 신을 숭배할 수 있도록 하는 관용령이었다. 기독교도 그 가운데서 배제되지 않았던 것이다. 종교간 평화를 통해 국가가 균형과 통일성을 갖도록 하려는 조치였다.
칙령 이후의 행적도 기독교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지 않았다. 기독교인들을 위한 법으로 이교사당을 부수기도 했지만 아테네인들의 이집트 왕릉 순례를 국비로 지원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한 마을에서는 이교도 풍습이었던 검투사의 싸움을 벌이고 사당 건립을 허가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초기 법령은 가정내에서의 주술행위를 금지했지만 궁전이나 공공건물이 벼락에 맞았을 때는 고대의 종교적 수행방법을 따르도록 했다. 내적으로 이교와 연관되어있던 고전문화와 교육은 여전히 큰 영향력과 권위를 향유했다. 지방도시에서 이교 사제 직위는 콘스탄티누스 대제 통치하에서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의 균형감각은 신학에도 등장 한다. 그 당시 신학은 두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하나는 범죄한 성직자의 성례를 거부하고 교회를 이탈한 도나투스파와 아리우스파의 문제였다.325년 동·서방의 교부들을 소집한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개회사를 통해 “교회내에서의 투쟁은 전쟁이나 침략 행위보다도 더 큰 불행”이라고 한탄하면서 논쟁을 이끌었다.
그는 아리우스파 중 강경그룹을 제외하고는 모두를 포괄하는 통일적인 신앙고백을 확보하기위해 노력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을 교회 밖에서 선출한 13번째의 사도로 보고 334년 팔레스티나 시자리아공의회,335년 두로공의회,336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 등을 잇따라 개최, 정통파와 아리우스파를 포괄하는 평화와 균형을 이뤄냈다.
그러나 황제가 교회에 간섭하는 콘스탄티누스적 정치형태(Constantinisme)는 정교와 정치의 결탁 및 갈등의 원인이 됐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로 돌리는 원리가 붕괴되었던 것이다. 콘스탄티누스식 정치는 비잔틴제국으로 흘러들어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이후의 제국(527-1453)에 영향을 미쳤다. 서방에서는 위조문서인 콘스탄티누스의 증여문서를 통하여 카롤링거 왕조에서 그 통치 형태의 모델을 받아들인 후 서임권자가 일반 신도인가 아니면 성직자인가의 투쟁이 중세기내내 계속되었다(오토대제 시대:936∼973).
그 여파는 아비뇽유수기(1309∼1377),서방의 분열사건(1378∼1415),콘스탄츠공의회(1414∼18),바젤공의회(1431∼1449)에까지 이른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국가와 교회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질문하게 만든다. 정교분리와 유기적 협조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는 그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처럼 산술적 균형감각을 위해 진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와 교회가 서로 진리에 대한 순종 안에서 겸허함과 존경으로 서로 봉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