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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 삼국유사 기행
호원사와 염불사, 장수사, 홍효사
◆ 일시: 2021년 5월 22일 토 오전 10시~
◆ 장소: 황룡사역사문화관 주차장 출발
◆ 코스: 호원사지, 홍효사, 염불사, 장수사
◆ 해설: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장
◆ 기타: 점심은 도시락 제공합니다.
*코로나19 접촉자 참석 금지. 마스크 필착 부탁드립니다.
*연락처: 010-2819-3338 강시일
김현이 호랑이에 의해 감동되다
신라 풍속에 해마다 2월이 되면 초여드렛날부터 보름까지 서울의 남자와 여자들이 다투어 흥륜사의 전각과 탑을 돌며 복을 비는 모임을 행했다.
원성왕 대에 김현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다. 그는 밤이 깊도록 홀로 쉬지 않고 탑돌이를 했는데 한 처녀도 염불을 하면서 따라 돌다가 서로 마음이 맞아 눈길을 주고받았다. 탑돌이가 끝나자 으슥한 곳으로 처녀를 데리고 가 정을 통했다. 처녀가 돌아가려 하자 김현이 따라나서니 처녀는 사양하고 거절했으나 김현은 억지로 따라갔다.
서산 기슭에 와서 한 초가집으로 들어가니 늙은 할머니가 “따라온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처녀가 그간의 사정을 다 이야기하니 할머니가 “비록 좋은 일이기는 하나 없었던 것만 못하다. 그러나 이미 저질러진 일이므로 말릴 수도 없구나. 은밀한 곳에 숨기기야 하겠지만 네 형제들이 나쁜 짓을 할까 염려된다”고 했다.
처녀는 김현을 이끌어 깊숙한 곳에 숨겼다. 얼마 후 범 세마리가 으르렁거리며 들어오더니 사람과 같이 말하기를 “집에 누린내가 나는구나.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고 했다. 할머니와 처녀가 꾸짖으며 “너희 코가 썩었느냐? 무슨 미친 소리냐”고 나무랐다.
이때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기를 “너희 놈들이 생물 해치기를 좋아함이 너무 심하니 마땅히 한 놈을 죽여 악행을 징계해야겠다”라 하자 세 마리 짐승이 이를 듣고 모두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처녀가 말하기를 “만약 세 분 오빠들이 멀리 피하여 스스로 자숙하신다면 제가 대신 그 벌을 받겠습니다”라 하니 모두 기뻐하며 고개를 숙이고 꼬리를 늘어뜨리면서 달아나버렸다.
처녀가 들어와 김현에게 “처음에 저는 낭군이 저의 족속에게 욕스럽게 오시는 것이 부끄러워 사양하고 거절하였으나 이제는 더 감출 것이 없으니 감히 속에 품은 마음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또 천첩이 낭군과 비록 같은 종족은 아니지만 하루저녁의 즐거움을 함께했으니 그 의리가 부부의 정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세 오빠의 악행을 하늘이 이미 미워하니 온 가족의 재앙을 제가 지려고 합니다만 다른 사람의 손에 죽는 것이 어찌 낭군의 칼날에 죽어 은덕을 갚는 것만 하겠습니까? 제가 내일 저자에 들어가 심하게 사람을 해치면 사람들이 저를 어찌할 수 없으므로 대왕께서 반드시 높은 벼슬을 걸고 저를 잡을 사람을 모집할 것입니다. 당신은 겁내지 말고 저를 쫓아 성의 북쪽 숲 속까지 오시면 제가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라 했다.
김현이 "사람과 사람의 사귐은 떳떳한 인륜의 이치이지만 다른 류와의 사귐은 대체로 떳떳한 일이 아닙니다. 일이 이렇게 무난하게 된 것만으로도 진실로 하늘이 준 다행함인데 어찌 차마 배필의 죽음을 팔아 요행으로 한때의 벼슬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라 했다.
처녀가 “낭군님 그런 말씀하지 마오. 이제 저의 목숨이 짧은 것은 바로 하늘의 명령이며 또한 제 소원이기도 합니다. 낭군께는 경사요, 저희 족속의 복이며 나라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한 번 죽어 다섯가지 이득이 있게 되는 것이니 그것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저를 위하여 절을 세우고 불도를 강론하여 좋은 과보를 얻는데 도움이 되어 주신다면 낭군의 은혜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을 것이옵니다” 하고는 마침내 그들은 서로 울면서 작별했다.
다음날 과연 사나운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와 매우 심하게 날뛰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원성왕이 이를 듣고 명을 내리기를 “호랑이를 잡는 자는 2급의 벼슬을 주겠다”라 했다. 김현이 대궐로 나아가 “소신이 호랑이를 잡을 수 있습니다”라 하니 왕은 즉시 벼슬부터 먼저 주면서 그를 격려했다.
김현이 짧은 칼을 들고 숲 속으로 들어가자 호랑이가 낭자로 변하여 반가이 웃으면서 “어젯밤에 낭군과 함께 정으로 하나된 일을 절대로 가벼이 여기지 마소서. 오늘 내 발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모두 흥륜사의 장을 바르고 그 절의 나발 소리를 들으면 나을 것이옵니다” 하고는 즉시 김현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넘어지니 곧 호랑이로 변했다.
김현이 숲에서 나가 거짓으로 말하기를 “지금 여기서 호랑이를 쉽게 잡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유는 숨긴 채 말하지 않고 다만 그가 일러 준 대로 채료했더니 상처가 다 나았다. 지금도 세간에서는 이 방법을 쓰고 있다.
김현이 벼슬길에 오르자 서천가에 절을 세우고 호원사라 하였으며 항상 범망경을 강론하여 호랑이의 저승길을 인도함으로써 호랑이의 저승길을 인도함으로써 호랑이가 제 몸을 희생하여 자기를 성공하게 한 은혜에 보답하였다.
김현이 죽음을 앞두고 지난날의 신이함에 깊이 감동하여 붓을 들어 그 전기를 써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글 이름을 '논호림'이라 했는데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
정원 9년(793)에 신도징이 평민으로 있다가 한주의 십방현이라는 곳에 위의 벼슬을 임명받고, 진부현의 동쪽 10리 가량 되는 곳까지 갔을 때 눈보라와 지독한 추위를 만나 말이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길옆에 초가집이 있고 그 안에는 불을 피워 매우 따뜻한지라 등잔불이 비치는 데로 가보니 늙은 부모와 처녀가 화롯가에 둘러앉아 있었다.
그 처녀는 나이가 바야흐로 열 네댓 살쯤 되었다. 비록 머리는 헝클어지고 때묻은 옷을 입었지만 눈같이 흰 살결에 꽃 같은 얼굴로 몸가짐이 곱고 아름다웠다. 늙은 부부는 신도징이 오는 것을 보고 급히 일어나 “손님께서는 추위와 눈을 무릅쓰고 오셨으니 불 앞으로 오시지요”라 하였다.
신도징이 한참 앉아 있으니 날은 이미 저물었으나 눈보라는 그치지 않았다. 신도징이 "서쪽의 현까지 가기에는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으니 부디 여기서 묵도록 해주십시오"라 하니 노부부가 "오막살이 집이라도 누추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감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라 했다. 신도징이 드디어 말안장을 풀고 이부자리를 폈다.
그 처녀는 손님이 바야흐로 유숙하려는 것을 보자 얼굴을 다듬고 곱게 단장하여 장막 사이로 나오는데 얌전한 자태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좋았다. 신도징이 “어린 낭자의 총명함과 슬기로움이 다른 사람보다 아주 뛰어납니다. 다행히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감히 제 스스로 결혼을 청하오니 어떠하신지요”라 하자 그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뜻밖에 귀한 손님께서 거두어 주신다 하니 어찌 천생연분이 아니겠습니까”라 했다.
드디어 신도징은 사위로서의 예절을 치르고 타고 온 말에 즉시 부인을 태우고 갔다. 임지로 가보니 봉록이 너무 적었으나 아내가 힘써 집안일을 돌보았으므로 모든 것이 마음에 즐거움이 아닌 것이 없었다. 그후 임기가 끝나 돌아가려 할 때는 이미 1남1녀를 두었다. 그들 또한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워 신도징은 더욱더 그의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언젠가 그의 아내에게 주는 시를 지었는데 이러하다.
한번 벼슬하니 매복에게 면목 없고/ 3년을 살고 나니 맹광에게 부끄럽네/ 이내 정을 더디에나 비유할꼬/ 시내 위에 원앙새라 할까나.
그의 아내는 하루종일 시를 읊으면서 묵묵히 화답하는 듯하였으나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신도징이 벼슬을 그만두고 모든 살림살이를 가지고 본가로 돌아가려 하자 그의 아내가 갑자기 슬픈 기색으로 신도징에게 말하기를 "전번에 주신 시 한 편에 뒤따라 화답한 것이 있습니다"라 하면서 시를 읊었다.
금실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에 뜻이 저절로 깊어지네/ 시절이 변할까 언제나 근심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걱정만 드네.
드디어 함께 아내의 옛집을 방문하였더니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그의 아내는 몹시 그리운 생각에 하루종일 울다가 별안간 벽 모서리에 있는 호랑이 가죽을 보고는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물건이 아직도 여기에 있는 것을 몰랐구나” 하더니 이내 뒤집어쓰자 즉시 호랑이로 변하여 으르렁거리며 할퀴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신도징이 놀라 피했다가 두 아이를 데리고 아내가 간 길을 찾아 산림을 바라보며 여러 날 동안을 울었으나 끝내 간 곳을 알지 못했다.
오호라, 신도징과 김현이 사람과 다른 종을 접했을 때 사람으로 변하여 사람의 아내가 된 것은 같으나, 신도징의 호랑이가 사람을 배반하는 시를 준 후에 으르렁거리며 할퀴다가 달아난 점이 김현의 호랑이와 다르다. 김현의 호랑이는 마지못해 사람을 상하게 했으나 좋은 처방을 일러주어 사람들을 구했다. 짐승도 어질기가 저와 같은데 지금 사람으로서 짐승만도 못한 자가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이 사건의 처음과 끝을 자세히 살펴보면 절을 돌 때 사람을 감동시켰고, 하늘이 악을 징벌하겠다고 외치자 자신이 대신 벌을 받겠다 했다. 용한 처방을 주어 사람을 구했으며 절을 세우게 하고 불법의 계율을 강론하게 했다. 이는 짐승의 본질이 어진 탓에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 대개 부처가 사물에 감응함이 여러 방면이기 때문일 것이다. 김현이 온 정성을 다하여 탑을 돌자 이에 감응하여 몰래 이로움을 주고자 한 것뿐이다. 그 당시에 복을 받음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산골 집의 세 오라비 악행이 너무 많지만/ 고운 입에 한 번 맺은 백년가약 어이하리/ 겹쳐진 의로움에 만 번 죽음 가벼우니/ 숲 속에 몸 던져 낙화마냥 져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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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순이 자식을 땅에 묻다(흥덕왕대)
손순은 모량리 사람으로 아버지는 학산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처와 함께 남의 집에 품을 팔아 양식을 얻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어머니의 이름은 운오였다. 손순에게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언제나 어머니가 잡숫는 것을 빼앗아 먹었다. 손순이 이를 민망히 여겨 그의 아내에게 “아이는 다시 얻을 수 있으나 어머니는 다시 모시기 어려운데 애가 어머니 드시는 것을 빼앗으니 어머님의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겠소. 그러니 이 아이를 묻어서 어머니를 배부르게 해 드려야겠소”라 했다.
이어 아이를 업고 취산 북쪽 들로 가서 땅을 파다가 난데없이 돌로 된 종을 얻었는데 너무나 신기했다. 부부는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잠시 나무 위에 걸고 두드려 보았더니 그 소리가 은은하여 들을 만하였다. 아내가 “신이한 물건을 얻은 것은 아마도 이 아이의 복인 듯합니다. 아이를 묻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라 했다. 아버지 또한 그렇게 여겨 아이를 업고 그 종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종을 대들보에 매달고 쳤더니 그 소리가 대궐까지 들렸다. 흥덕왕이 이를 듣고 주위의 신하들에게 “서쪽 들판에서 이상한 종소리가 나는데 멀리서 들려오는 맑은 소리가 보통 종소리와는 비길 바가 아니다. 속히 조사해 보라”고 했다.
임금의 명을 받은 사람이 그 집에 와서 조사하여 모든 사실을 왕에게 보고드리니 왕이 “옛날에 곽거가 아들을 묻자 하늘이 금으로 된 솥을 내렸고 지금 손순이 아이를 묻으니 땅에서 석종이 솟았구나. 전대의 효와 후대의 효가 천지에서 같은 본보기가 되었도다” 하고는 집 한 채를 주고 해마다 메벼 50석을 주어 지극한 효를 숭상하게 했다.
손순이 살던 옛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홍효사라 하였으며 석종을 모셔두었다. 진성왕 시대에 후백제의 사나운 도적들이 그 마을에 쳐들어와 종은 없어지고 절만 남았다. 그 종을 얻은 곳의 지명이 완호평이라 했는데 지금은 잘못 전달되어 지량평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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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사
남산 동쪽 기슭에 피리촌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에는 절이 잇어 마을 이름을 따서 피리사라고 이름지었다. 절에는 신이한 승려가 있었는데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고 항상 아미타불을 염불하였다. 그 소리가 성안에까지 들려 360방 17만 호에서 염불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소리는 높고 낮음이 없으며 한결같이 낭랑하였다. 이것을 신이하게 여겨 공경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 그를 염불사라고 이름지었다.
그가 죽은 후에 진흙으로 그의 형상을 빚어 민장사 안에 모셨다. 그가 본래 머물렀던 피리사는 염불사로 이름을 고쳤다. 이 절 옆에 또 절이 있었는데 이름을 양피사라 했으니 마을이름에서 취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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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이 전생과 현세의 부모에게 효도하다(신문왕대)
모량리의 가난한 여인 경조에게 아이가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평평한 것이 마치 성과 같아서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생활할 수가 없어서 부자인 복안의 집에 품팔이를 하였는데 그 집에서 나누어 준 약간의 밭으로 옷과 먹을 것을 마련했다.
이때 덕망 있는 승려 점개가 흥륜사에서 육륜회를 베풀고자 복안의 집에 와서 시주를 권하니 복안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점개가 주문으로 축원하기를 "신도께서 보시를 좋아하시니 천신이 항상 보호하고 지키시라.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으리라. 편안함과 즐거움을 누리고 오래도록 사시라"고 했다.
대성이 이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들어가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제가 문간에서 스님이 외우는 소리를 들으니 한번 보시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말씀하더이다. 생각해보니 저에겐 전생에 좋은 일을 하지 않아서 지금 이렇게 곤궁한데 지금 또 보시하지 않는다면 내세에는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제가 고용살이로 얻은 밭을 법회에 시주해서 후일의 과보를 도모함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자 그의 어머니가 좋다고 하여 점개에게 밭을 보시하였다.
얼마 안 되어 대성이 죽었다. 이날 밤 나라의 재상 김문량의 집에 하늘의 외침이 들리기를 "모량리의 대성이란 아이를 네 집에 맡기겠다"고 했다. 집안 사람들이 깜짝 놀라 사람을 모량리에 보내 알아보니 대성이 과연 죽었는데 죽은 그날이 하늘에서 외치던 날과 같은 때였다. 그때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왼손을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야 폈는데 대성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진 금간자가 있어서 이름을 또 대성이라 짓고 그의 예전 어머니를 이 집에 모셔와 함께 봉양하였다.
다 자라서는 사냥을 좋아했다. 어느 날 토함산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아서 산 아래 마을에서 유숙하게 되었다.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시비를 걸어 말하기를 "너는 어찌하여 나를 죽였느냐? 내가 도리어 너를 잡아 먹으리라"고 했다. 대성이 두려워 떨면서 용서를 빌었다. 귀신이 말하기를 "나를 위하여 절을 지어 줄 수 있느냐" 하자 대성이 그러하겠다고 맹세했다. 꿈에서 깨어보니 땀이 흘러 이부자리를 적셨다. 이로부터 사냥을 하지 않고 곰을 잡았던 자리에 곰을 위하여 장수사를 세웠다.
이로 인해 마음에 감동되는 바가 있어 자비로운 발원이 더욱 독실해졌다. 이에 현생의 양친을 위해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를 창건하여 신림과 표훈 두 성사를 청해서 머무르게 했다. 아름답고 큰 불상을 세워 부모가 길러 준 노고에 보답했으니 한 몸으로 현생과 전생의 부모에 효도한 것은 옛날에도 또한 듣기 힘든 것이었다. 착한 보시의 영험을 어찌 믿지 않겠는가.
장차 석불을 조각하고 하나의 큰 돌을 다듬어 감실의 뚜껑을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조각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분하게 여기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 다 만들어 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남쪽 고개로 급히 올라가서 향나무를 사르면서 천신을 공양하였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향고개라 하였다. 그 불국사의 운제와 석탑 그리고 돌과 나무에 조각한 솜씨는 경주의 여러 절 중에서 이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
옛 향전에 실린 것은 이상과 같으나 절 안의 기록에 의하면 경덕왕대에 대상 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짓기 시작했다. 혜공대왕인 대력 9년 갑인(774) 12월2일에 대성이 세상을 뜨자 나라에서 이를 완공시켰다. 처음에 유가대덕 항마를 청해 이절에 머무르게 하니 이를 계승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전과는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다음과 같이 찬미한다.
모량에 봄 지나 3묘 전답 시주하니/ 향고개 가을 와 만금이 얻어지네/ 어머님 한평생에 가난과 부괴 겪고/ 대성은 한 꿈에 전생 이승 오고갔네.
첫댓글 불국사를 지었다는 김대성, 전생과 현생이 나타나고
장수사와 석굴사, 불국사를 창건한 것으로 소개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