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보평론>은 55호에서 ‘한국사회 시민운동 평가와 새로운 사회운동’이라는 주제로 시민운동(정병기), 생협운동(권오범), 민중의 집(정경섭), 인권운동(박래군), 로컬거버넌스운동(이창언)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다루었다. 시민사회운동이라는 말이 소개된 지도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고, 그 의미와 시각, 효과에 대한 포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취지였다. 물론 특집란에서 모든 영역을 충분히 담고 있지는 못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은 그 긍정성과 부정성에도 불구하고 평가되어야 하고, 그 평가의 기반 위에서 새롭게 자기 발전을 모색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토론을 위한 최소한의 근거는 제공한 듯 하다. <진보평론>과 <레디앙>은 한국 시민운동과 사회운동의 치열하고 전투적인 토론과 논쟁과 평가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공유하고 진보평론 55호의 특집 논문들을 게재한다. 글 형식이 논문이다보니 다소 길고 건조하다. 양해를 구한다. 각주와 참고문헌은 생략한다. 관심있는 독자들은 진보평론 55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특집 글의 순서대로 게재하고 다소 길더라도 나누지 않고 싣는다. 전투적인 비판과 비평을 바라며 반론이 있다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당연히 게재하도록 하겠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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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럽 민중의 집의 탄생
100년 전부터 유럽에는 이런 운동이 있다고 한다. 한 마을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진보정당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지역 시민단체들이 공간하나를 마련했다. 그들은 그 공간을 민중의 집이라고 불렀다.
민중의 집에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진보정당의 구성원은 서로 뒤섞이게 됐고,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리를 그 공간에서 구현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좌파의 생활문화 양식을 만들어가면서 서로를 결속시켰다.
“특정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연대를 구축하는 과정과 긴밀히 연관되며, 나아가 특정 종류의 공간은 그곳으로부터의 배제와 포함을 전제하기 때문에 정치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어려운 말처럼 느껴지지만 우리의 실생활에 적용해 보면 금세 이해가 간다. 최근 극장의 대부분이 멀티플렉스 형태로 바뀌면서 극장에서 노년층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다. 멀티플렉스는 구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노년층을 위한 공간 배치가 아니라 젊은 층을 위한 공간 디자인을 추구한다. 노년층은 자연스럽게 멀티플렉스 영화관에서 배제됐다. 마치 홍대 앞 휘황찬란한 카페에서 특정 연령에 대한 배제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처럼.
유럽에서 민중의 집이 만들어질 당시 노동자들은 카페에 출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고급스러운 카페는 부르주아만 출입할 수 있었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먹고 마시고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협동조합 조합원들 역시 교류하며 공동체를 실현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신들만의 공간을 마련하고자 하는 욕구로 나타났고 그것이 민중의 집 탄생 배경이 되었다. 플로리다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마가렛 콘의 지적처럼 “특정 공간은 인간이 정체성을 형성하고 연대를 구축하는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공간을 소유하고 있다는 인식, 즉 일종의 특권 의식을 갖게 했다. 이러한 특권의식은 규율의 전제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규율이란 딱딱한 의미, 부정적인 통제의 의미가 내포된 규율이 아니라, 자본주의 원리와는 다른, 공동체적인 규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우리들끼리라는 특권의식은 가난한 하층 노동자들 스스로의 새로운 생활문화 양식, 즉 규율을 창출하는데 중요한 조건이 될 수 있었다.
프랑스 사회주의자 Adéodat Constant Adolphe Compère-Morel는 1912년 <사회주의 대백과 Encyclopédie Socialiste>에서 민중의 집(Maison du Peuple)을 “사회주의자, 노동조합 활동가, 협동조합 조직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로, 회의 장소, 레스토랑, 상점 등으로 자신들의 회원에 의해 사용되던 건물”이라고 정의했다.
민중의 집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럽 전역에서 사회주의 운동, 노동자 운동이 결합된 하나의 현상이었다. 이탈리아의 Casa del Popolo, 포르투갈의 Casa do Povo, 독일의 Gewerkschaftshaus, 스위스의 Volkshaus, 스위스와 프랑스의 Maison du Peuple(또는 Bourse du Travail), 영국의 People’s Palace, 오스트리아의 Volksbildungshaus, 네덜란드의 Volksgebouw 등 모두 ‘민중의 집’이라고 해석되는 동일한 명칭의 공간들이 존재했다.
민중의 집은 유럽 전역에서 진보주의자들이 일으킨 지역운동의 상징체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민중의 집이 각 나라별로 어떻게 변천했는지에 대한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이탈리아와 스웨덴, 터키, 벨기에, 덴마크 등에 현존한다는 것은 필자의 2010년 현지 취재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유럽 민중의 집의 가장 큰 특징은 노동자 민중의 일상생활과 정치·경제·사회적 활동이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장소였다는 점이다.
1차적으로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노동조합, 정당 등 다양한 조직이 공식·비공식 회합을 개최하는 장소였다. 또한 노동조합과 사회주의 정당이 막 생겨날 당시, 탄압을 피해 결사를 도모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민중의 집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리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협동조합의 공간이기도 했고 여기서 판매하는 값싼 빵과 와인은 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요구를 충족시켰다.
나아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위한 병원과 약국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스포츠, 연극, 음악회, 영화 상영 등 다양한 문화 활동도 이루어졌다. 노동자의 사회참여를 위한 첫 단계인 문맹 퇴치 교육을 비롯하여 다양한 정치교육과 직업훈련이 진행됐음은 물론이다.
민중의 집은 정치 문제와 먹고 사는 문제가 노동자들의 생활 속에서 분리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운동에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물론 모든 민중의 집에서 위와 같은 다양한 활동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민중의 집이 이런 복합적인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건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노동자조직, 정치조직, 협동조합, 문화예술단체, 교육단체 등의 네트워킹 구조였기 때문이었다.
민중의 집은 공간이기 이전에 개인과 개인, 개인과 조직, 조직과 조직을 연결하는 메커니즘에 가까웠고, 이곳은 결과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의 주요한 센터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이념과 지식을 전달하기 위해 위로부터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오히려 민중의 집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풀뿌리 지역 차원의 지식과 자원을 모아 조금씩 확대해 나간 공간이었다.
유럽 사회주의 세력은 당시 민중의 집을 정치운동과 노동운동을 조직해 나가는 대중적 토대로 삼았다. 이를 통해 노동자의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고 사회주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생산과 소비, 일과 여가, 정치와 문화가 어우러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대안적인 생활양식을 만들어내고자 했던 노력이 노동자민중의 삶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 민중의 집으로 구현된 것이다.
2. 유럽 좌파의 거점, 민중의 집
유럽 민중의 집은 지역 네트워크의 허브이다.
동네의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진보정당이 주축이 되어 하나의 공간을 얻고, 1층에는 술집을 겸한 바(bar), 2층은 강의실과 세미나실, 3층은 노동조합, 협동조합, 진보정당, 시민단체의 사무실로 이뤄진 곳, 바로 민중의 집이다. 이런 민중의 집이 이탈리아에는 2천개가 넘는다. 오늘날 복지국가 스웨덴을 만든 주춧돌도 민중의 집이다.
10년 전 위와 같은 내용이 담긴 민중의 집이란 자료를 처음 접했을 때, 어떤 흥분과 함께 민중의 집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왔다.
지역 진보정당에서 사무국장을 거쳐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단체들을 만났었다. 노동조합은 가장 손쉬운 방문 대상이었지만 거꾸로 노동조합은 지역에서 가장 보이지 않는 단체였다. 생협은 정치단체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눈치였지만 지역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게다가 노동조합과 생협은 아예 소통이 없었고, 진보정당은 그들을 연결시켜 줄 수 있는 실력이나 권위를 갖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사회 지역의 문제점은 진보적인 단체가 없어서가 아니라, 지역 단체끼리 소통을 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닐까란 의문이 일기 시작했다.
진부한 말이지만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는 열사람의 한걸음이 좋다는 얘기를 한다. 혼자만 앞서나가지 말고 주위를 둘러보며 같이 가자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진보적인 단체들끼리는 서로를 돌아보지 않고 각개 약진한다. 각자의 일이 너무 바빠서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는 건, 사람이나 단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사안이 생기면 지역에서 공대위가 꾸려지고 한두 차례 회의를 하고 공동으로 행동을 한다. 하지만 그 뿐이다. 일상적으로 함께 연대하고 사업을 나누며 서로를 북돋을 수 있는 구조는 전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이탈리아, 스웨덴 민중의 집처럼 지역의 진보적인 단체들이 함께 사무실을 쓰고 지역 대중들을 위한 다채로운 사업을 함께 펼치는 문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는 지역 내 흩어져 있는 단체들을 연결하고 소통시킬 수 있는 지역 네트워크의 허브, 민중의 집이 필요한 이유였다.
민중의 집 운동은 이런 점에서 기존 운동 및 조직과 전혀 별개의 운동은 아니지만 기존 운동의 양적인 연장인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운동의 대의기구라고 할 기존의 사회운동을 유비쿼터스 공간과 같은 제3의 공간 창출 방식으로 지역의 생활공간과 대중의 일상생활이 마주치게 하려는 운동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대중의 일상과 분리된 기존의 사회운동을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생존·재생산의 위기에 맞서 스스로의 삶을 재건하려는 지역 대중들과 새롭게 연결하여 지역대중들의 새로운 삶의 양식을 만들어간다. 아울러 기존 운동들 역시 새롭게 활력을 얻고 다시 운동하도록 추동하는 운동이라는 뜻에서 “운동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민중의 집 운동”은 한편으로는 기존의 사회운동이 새롭게 대중적 토대와 정당성을 얻는 ‘프로세스’이자, 다른 한편으로 조합원과 회원, 당원 등 기존 사회운동의 구성원들이 민중의 집을 통해 지역 대중들을 만나고 또 스스로에게 능동적인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사회운동 자체가 다시 활력을 얻게 되는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 전반을 혁신하고 개조하는 공동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3. 우리나라 민중의 집의 탄생: 정치와 이념이 살아있는 지역운동의 필요
1990년 초부터 국내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지역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 시민운동, 지역 공동체 운동은 정치 중립적이거나 정치를 외면하고 있었다. 진보정당의 활동가로 지역에서 뼈아프게 느낀 점이다.
정당이 개입하면 진보적인 시민단체나 보수적인 단체나 환영은커녕 거부감을 보였다.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개입하는 집단으로 취급했다. 파업 사업장 정도여야 그마나 ‘대우’ 아닌 대우를 받았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사실 지역운동과 정치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했다.
87년 민주화 대투쟁으로 인해 여권은 6.29 선언을 통해 지방자치제 실시를 약속했다. 91년 기초의회 선거를 시작으로 박정희 5.16쿠데타로 인해 중단된 지방자치제가 30년 만에 부활을 하게 됐다. 반면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 냈지만 결과는 노태우 당선이라는 참혹한 결과가 있었다.
지방선거의 부활과 중앙정치의 실패, 이 두 가지가 맞물린 상태에서 90년 초중반 많은 활동가들이 지역으로 들어갔다. 중앙정치를 바꾸지는 못해도 지방자치 시대에 지역 권력은 장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 혹은 지역 권력부터 장악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작용했다.
따라서 지역 시민운동, 공동체 운동, 주민운동은 지역 정치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물론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의미의 소극적 정치가 아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정치적으로 해석하고 그에 대한 해법을 강구하는 것과 스스로 정치주체로 나설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를 모두 포괄하는 정치이다.
그런 면에서 민중의 집은 초창기부터 정치가 있는 지역운동을 표방했다. 사회현안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현안을 진보정치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이를 개선하는 ‘지역운동’이 필요했다.
2010년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민중의 집을 찾아 길을 떠났을 때, 이탈리아의 북쪽 끝, 토리노 부근의 작은 도시 작은 아스티에서 새롭게 민중의 집을 만들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대학생들이 전하는 말이다. 우리의 고민과도 맞닿고 있어 반갑다.
우리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지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주민들에게 알리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지역 정치에 참여하길 원한다. 우리의 주요 목적은 지역운동 단체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그 속에서 각각의 조직들이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정당이 추진하는 정치 프로젝트를 신뢰하지만 정당 정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정당 정치와 지역운동 둘 다 필요하다. 정당만의 힘으로 지역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거꾸로 정당 없이 지역운동만 가지고 지역을 바꾸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정당이 아닌 다른 정치활동, 즉 지역 주민들이 직접 나서서 스스로를 조직하는 활동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지역 정치와 더불어 이념을 명확히 하는 것도 민중의 집의 중요한 과제 중에 하나였다. 우리가 건드리고 싶었던 것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였다. 물론 지역운동을 하는 단체치고는 너무 거창할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중앙에서 활동하는 단체의 경우 상대적으로 선명한 이념지향성을 가지는 반면, 지역에서 일반 대중들과 호흡하는 단체는 모호한 공동체적 개념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현장에서 대중과 직접 만나는 지역운동이야말로 좀 더 급진적일 필요가 있지 않은가.
민중의 집 이념은 비자본주의이다. 돈이 주인인 사회에서 인간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돈이라는 것을 빼고 인간과 인간이, 인간과 자연이 관계를 맺을 때, 우리의 삶은 얼마나 풍요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기타 하나를 배우려고 해도, 그림을 배우려고 해도 돈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은 세상이다. 한 인간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돈을 통하지 않고는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기 어렵다.
비자본주의적 방식이란 결국 서로가 가진 것을 돈을 매개하지 않고 주고받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누군가에게 부담 없이 무엇을 받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지 않고서는 부담을 가지기 마련이다.
준다는 행위 역시 평범한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의 세상은 돈 있는 사람, 지위가 있는 사람, 학벌이 좋은 사람만 누구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줄 수 있는 사람은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등식이 성립하는 사회다. 그래서 주는 행위는, 누군가에게 부담 없이 받는 행위만큼 어렵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눠 줄 수 있는 곳, 거리낌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 곳, 그리고 그 안에 ‘돈’이라는 것이 매개되지 않아도 되는 곳, 그것이 민중의 집이 추구하려는 활동방식이다.
4. 마포 민중의 집 출발과 현주소
2008년 11월 1일. 이탈리아, 스웨덴 민중의 집을 모델로 1년여의 준비 끝에 드디어 마포에 민중의 집을 열었다. 민중의 집을 설립하기 위해서 마포 지역 노동조합을 찾아다니고 수차례에 걸쳐 설명회를 했다. 민중의 집을 접하게 된 노동조합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과연 실제로 민중의 집이 창립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했다.
이탈리아와 스웨덴 민중의 집에서 노동조합 참여가 핵심적인 사안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노동조합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몇 차례 모임을 가지며 회원단체로 참여하길 권했다.
결국 가든호텔노조, 공무원노조 마포지부 등 6개 노동조합과 지역단체가 민중의 집 회원단체가 되었다. 개인회원은 민중의 집 준비과정부터 함께 했던 문화연대와 진보신당의 구성원들이 주축이 되었다.
2층 단독주택 공간을 얻어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본격적으로 지역 활동을 시작했지만 좌충우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거기다 매달 250만원에 달하는 월세를 내야 하는 상황에서 공간을 비워둔다는 것이 죄악처럼 생각되었다.
이로 인해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아침부터 밤까지 프로그램을 채워나갔다. 이때까지만 해도 ‘공간전략’에 대해서는 깊이 있게 고민하지 못했던 거 같다. 민중의 집을 통해 지역 운동을 강화하고, 지역 내 부문운동을 성장시키겠다는 애초의 구상은 문서에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프로그램에 치여 점점 역량에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고, 지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지역 활동가가 민중의 집이 프로그램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어 오히려 이용할 수가 없다는 말을 했다.
바로 그거였다. 아마 그 무렵부터 민중의 집의 공간을 비워나갔던 걸로 기억한다. 역량의 부족했던 측면도 있지만, 민중의 집이 기획하는 자체 프로그램이 최소화되면서 빈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빈 공간을 지역단체들이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지역의 단체들은 대부분 사무실과 회의실만을 갖추고 있었기에 먹고 마시며 쉴 수 있는 공간이 절실했다. 돈만 내는 회원이 아닌 참여하는 회원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지역 시민단체는 민중의 집 같은 공간이 필요했다. 공간 대여료는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 결정됐다.
2010년 한해에만 마포 지역 내 67개 단체가 233번이나 민중의 집을 이용했을 정도로 민중의 집 공간의 의미는 지역에서 컸다. 유럽 민중의 집처럼 단체들이 같은 건물에 입주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지역단체들이 공간을 나눠쓴다는 건 분명 의미 있는 일이었다.
현재 민중의 집은 공덕시장상인회, 홍대걷고싶은거리상인회 등 6곳의 상인회와 6개 노동조합 등이 함께 회원단체로 참여하고 있고 개인회원은 450여명에 이른다. 목표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정체되지 않고 서서히 성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다만 민중의 집 설립 초기 가졌던 이념적인 공동체, 정치가 있는 지역운동, 노동조합과 함께 하는 지역운동은 아직 미흡하기만 하다.
이미 언급했다시피 민중의 집의 설립 비전 중에서 노동조합의 참여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였다. 초기에는 가든호텔 노동조합에서 요리교실을 열기도 했고 지역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민중의 집과 네트워크 되어 있는 병의원 이용에도 노동조합은 적극적이었다. 대부분 50대 여성 비정규직들로 이뤄져 있는 상암동 홈플러스 테스코 노동조합의 모임 장소도 민중의 집이었다.
사회현안에 대한 눈높이 강좌도 지속적으로 기획됐다. 지역 주민 뿐 아니라 진보를 지향하는 젊은 층도 민중의 집에 모였다. 지역 단체들과의 네트워크도 활발하게 이뤄냈다. 그 사이 마포지역 신년회를 민중의 집이 제안했고, 매해 80-100여명의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지방선거도 있었고 민중의 집 운영위원 중 한명은 진보정당 후보로 구의회에 입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민중의 집이 추구하는 가치에 대해 구성원들이 깊이 있는 이해를 하고 있어야 했다. 문화센터와 차별성이 없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념적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지만 각 프로그램 사이에 비자본주의라는 이념이 관통하고 있지 못했다.
당위적 수준에서의 노동조합의 지역 활동, 소수가 기획하는 정치강좌 프로그램이 가진 한계도 드러났다. 민중의 집을 바라보는 관점이 제각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민중의 집이 추구하는 운동성에 대해 부담감을 토로하는 회원도 있었고, 좀 더 급진적인 지역운동을 원하는 회원도 있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400여명이 넘는 민중의 집 회원들과 민중의 집이 추구하는 이념에 대해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이 꾸준하게 진행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지역 시민단체들과의 네트워크는 성공적이었지만, 노동조합은 소외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위한 맞춤형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있었지만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문제의식들이 겹쳐 결국 2010년 민중의 집의 본고장인 유럽으로 떠나게 됐다.
5.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
2010년 8월. 스페인부터 시작해서 이탈리아, 스웨덴 민중의 집을 45일간의 일정으로 다녀왔다.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진보정당이 주축이 되어 만든 세 나라 민중의 집의 100년 역사를 짧은 기간에 다 보고 올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마포 민중의 집의 새로운 길 찾기에 충분한 영감을 받았다.
여전히 활발하게 활동하는 민중의 집도 있었고, 문화센터 식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었고, 식당에 불과한 민중의 집도 있었다. 과거의 가치를 고스란히 지니며 지역에서 고군분투하는 스웨덴 작은 마을의 민중의 집도 볼 수 있었다.
45일간 직접 보고 온 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 민중의 집의 역사와 특성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 민중의 집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에밀리아·로마냐 주, 삐에몬떼 주를 중심으로 하여 이탈리아 전체에 1,500개 이상 존재한다는 민중의 집(Casa del Popolo)이 시작된 것은 1850년대부터이다. 이탈리아 민중의 집의 전신은 약 130여년의 전통을 갖는 이탈리아의 독특한 민주적 지역 조직인 상호부조조합이다. 때문에 각 지역의 민중의 집은 이름은 같더라도 그 지역 노동운동, 농민운동,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운동 등의 서로 다른 역사적 경험과 생활양식에 따라 다양한 활동 형태를 띠며 발전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이탈리아 민중의 집은 (1)시민, 노동자의 모금과 자발적 노동 봉사로 건설되었고 (2)정당(특히 사회당, 공산당), 노동조합, 협동조합, 청년 조직, 부인 조직, 문화·레크리에이션·스포츠 조직 등이 협력하여 공동으로 운영하거나 지원하고 (3)바를 비롯하여 레스토랑, 카드실, 당구장이 있고 업무가 끝난 후에 노동자와 시민들이 와인을 마시거나 레크리에이션을 즐길 수 있는 ‘휴식의 장’이고 (4)지역의 문화, 레크리에이션, 학습 활동의 센터로서 소위 지역의 민주적 문화 센터적인 기능을 하는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
이탈리아에 산재해 있는 지역 민중의 집은 이탈리아 민주당(PD), 재건공산당(PRC), 노총(CGIL) 및 ASCI(문화·레크리에이션연합조직)의 지역 조직 및 활동가들의 네트워킹을 통해 운영되고 있었지만 이 또한 지역에 따라 편차가 있다. 정치적 지향이 강한 곳, 혹은 청년 사회주의자, 문화 그룹 등이 운영하는 복합적 문화 공간의 성격이 강한 곳도 있다.
*스웨덴 민중의 집
스웨덴 민중의 집(Folkets hus)은 대부분의 도시에 위치한 노동자계급 커뮤니티 센터이다. 19세기 후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내 정치 진영이 조직 활동을 시작했을 때 지주나 자본가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회합을 할 수 있는 노동자 자신들 스스로의 건물의 필요에 의해 자주적인 건물을 짓기 시작한 데 기원한다.
스웨덴에서는 최초로 남부의 노동자들이 방해받지 않고 회합을 하기 위한 자신들만의 건물을 짓기 위해 땅 구입을 결정했다. 이러한 아이디어는 전국으로 퍼져 나가 빠르게 현실화되었다. 민중의 집 공사는 협조적인 벤처, 은행 대출, 다양한 형태의 기부, 자선 조직, 자원 노동 등을 통해 이루어졌고 스톡홀름에서 1897년 첫 번째 민중의 집 공사가 시작되어 1901년에 문을 열었다.
현재 전국에 533개 민중의 집 등 커뮤니티 센터가 이러한 취지를 계승하며 운영되고 있다. 이들 기관은 한해 연인원 5천만 명이 방문하여 스웨덴 사회 경제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 기관은 모두에게 열린 장소로, 서로에 대한 그리고 커뮤니티에 대한 이해를 증대시킨다.
특히 이민자, 여성, 실업자 등 소수자 집단이 지지를 받으며 함께 일할 수 있는 장소로, 이러한 회합을 열 수 있는 장소는 결국 민주주의를 강화한다는 가치에 기반하여 운영되고 있다. 놀이 공원, 동물원, 옥외 극장, 식당, 콘서트 홀, 댄스장, 컨퍼런스 센터와 아트 갤러리 등 광범위한 스펙트럼의 조직과 활동들을 포함하고 있다.
풀뿌리 지역 조직에서 시작한 이런 기관들은 20세기 초반 이후 전국적 연합 기관을 형성해 왔으며, 2000년 1월에 출범한 전국 민중 공원 및 커뮤니티 센터 협의회(Folkets Hus och Parker organisation, FHP)가 각 기관에 대한 지원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 민중의 집
스페인 민중의 집(Casa del Pueblo)은 스페인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PSOE)과 스페인 노총(UGT)의 조직화 정책에 의해 시작된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노동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장소였다. 민중의 집은 1908년 마드리드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되었다. 당시 PSOE와 스페인 일반노조(UGT)는 귀족의 땅이었던 곳을 마드리드 노동자 공동소유로 구입하여 민중의 집을 세웠고 이곳은 사회주의 운동의 본부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 민중의 집에는 다양한 사무실과 기관은 물론, 극장, 회합 장소, 도서관 등이 운영되었다. 또한 사회 안전망이 생기기 이전 노동자와 가족을 보호할 수 있는 마드리드 노동자 건강보험도 최초로 실시하고 회원들에게 무료 의료서비스도 제공했다. 이러한 마드리드 민중의 집 사례는 스페인 전체로 퍼져나갔고, 아스투리아스와 바스카 지역(스페인 북부)에서는 독서와 글쓰기 등의 학습과 모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스페인 노총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이 갈라지면서 스페인 민중의 집은 급격히 약화되었지만 2008년 스페인 민중의 집 탄생 100주년을 계기로 민중의 집을 복원하려는 시도가 스페인 노총을 중심으로 진행 중에 있다.
한국의 경우 노동운동, 진보정치 운동, 협동조합 운동이 별개의 과정으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대립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에 비해 세 나라 민중의 집은 지역을 기반으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협동조합 등이 결합해서 시작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6. 민중의 집의 지향: 노동자, 노동조합과 민중의 집
노동자, 노동조합 조합원은 일터를 벗어나면 시민이고, 동네에서는 주민이자 이웃이다. 노동조합 조합원이 곧바로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학자들은 작업장을 기반으로 한 노동자의 정체성은 이웃 간에 연대로 재강화할 때만 노동자 의식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렇다. 노동자 의식의 형성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이 지역을 기반으로 서로 이웃이 되어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생활을 함께 하며 그 일상 활동에 정치, 사회,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는 공통의 경험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먹을거리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기까지 얽혀 있는 자본주의 생산, 유통 시스템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고 그와 다른 대안적인 시스템을 공동체적 방식으로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활동이 노동자들의 긴밀한 연대의 기반이 되고 나아가 교조적인 원칙으로서가 아닌 경제적 전환과 노동자의 정치참여를 위한 대중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를 상상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오늘 우리 활동가들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유럽 민중의 집이 노동자, 노동조합에게 제공한 것은 바로 이런 점이었다. 일터 외에 지역에서도 이웃 간 연대를 통해 노동자로서의 계급의식을 한 단계 더 고양시킬 수 있었던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다양한 사안에 대해서 정치, 경제적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바로 민중의 집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없는, 그러나 노동운동에서 반드시 채워 넣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정부와 자본이 비정규직 문제의 해법으로 종종 들고 나오는 것이 바로 정규직 노동조합 양보론이다. 비정규직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정규직 노조의 양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도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도 정규직 노조 양보론이 있었다.
진보진영 내에서도 종종 정규직 노조의 양보론이 거론된다. 하지만 비정규직이 900만을 육박하고 정규직 노동조합의 조합원 수가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다 합쳐봐야 150만도 되지 않는 상황임을 직시한다면 정규직 노조 양보론은 허상이다. 150만명이 양보해서 900만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동일한 사업장 내에서는 정규직 노조가 양보해서 비정규직문제를 풀 수 있겠지만 사회 전반적으로는 정규직 노조의 양보를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래서 민중의 집은 정규직 노조 양보론이 아닌 정규직 노조 역할론을 적극적으로 제시한다.
과거 유럽에서는 노동조합이 주도해서 민중의 집이 탄생되었다. 이후에는 노동조합의 조합원 뿐 아니라 사회 저소득층이나 노동조합으로 포괄되지 못했던 주변부 노동자들이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오늘날 국내 상황에 빗대어 말하자면 노동조합이 만든 공간이 비정규직 노동자와 사회 저소득층의 공간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포 민중의 집도 학교 급식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임 뿐 아니라 홈플러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모임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민중의 집이란 공간을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개인과 개인, 단체와 단체 사이의 관계의 발전을 촉진한다. 민중의 집은 값싼 음식, 유흥, 와인 등 전통적인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다양한 노동자들 간의 만남을 활성화했다. 이를 오늘날의 한국적인 상황에 대입하면,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사회적 약자들의 만남을 촉진하고 이를 통해서 공통의 노동자 의식을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특정한 공간의 사용은 의사소통, 조정, 통제를 촉진하는 사람과 자원을 종합한다. 분산을 극복함으로써 서로에 대해 납득하게 되고 동맹을 촉진할 수 있으며 정치적 훈련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7. 진보정당과 민중의 집
2012년 겨울, 뜨거웠던 대선이 막을 내렸다. 주변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대선 결과에 실망했다. 그러나 골목정치, 동네정치가 대선 만큼 뜨거워지지 않는 한 이런 실망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라고 본다.
진보정당, 진보정치가 지역에서 무언가 활동을 해보려고 움직였던 것은 아마도 민주노동당 창당 2년 후에 실시한 2002년 지방선거부터일 것이다. 이제 겨우 10년, 동네 진보정치는 부침을 거듭하며 성장과 쇠퇴를 오가고 있다. 지방의원 수는 양적으로 늘어났지만 지역에서 새로운 진보정치의 상을 찾았다는 얘기는 많지 않다.
지역 정치조직은 고군분투하였으나 지역 내 노동자대중과 결합하거나 주민들에게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대중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지도 못하였다. 또한 다양한 부문운동단위와 연대하지도 못했다.
지역정당활동은 대부분 당내활동에 머물렀고 이것조차도 허약했다. 당연히 주민운동, 지역시민사회운동과도 연대하지 못했다. 당원들의 참여도와 활동당원들이 가진 역량의 문제도 크게 작용했지만 지역정당조직이 지역의 시민사회진영과 어떠한 관계를 맺을 것인지, 당이 지역운동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형성해 나갈 것인지에 대한 프로그램이 없었다.
마가렛 콘 교수의 지적처럼 일상의 정치는 재생산, 자연, 비생산 노동의 사적 영역과 지속적인 실천, 인지가 이루어지는 공적 영역을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지역에서의 동네 정치는 공적영역보다는 사적 영역을 정치적으로 만드는데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진보정치의 방향은 사적 영역을 정치화하지 못했다.
마가렛 콘은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분리가 거짓임을 민중의 집과 협동조합이 보여준다고 말했다. 생활세계는 노동, 기쁨, 창조, 재생산 등 일상생활의 지극히 평범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고 민중의 집이나 협동조합은 노동과 일, 더 나아가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의 구분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한다.
진보정치에서 사람 만나는 전략이 없다면 정치라고 할 수 없다. 민중의 집을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세계에서 정치, 경제, 사회적인 의미를 복합적으로 이끌어내고, 행동으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공적영역 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 노동자의 정치와 사회, 경제적인 문제가 어떻게 연결되고 이해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유럽의 세 나라(이탈리아, 스웨덴, 스페인)들은 민중의 집을 통해 지역의 다양한 진보세력이 연대할 수 있었고, 회원들과 단체들은 동질적인 정치적 주체로 형성될 수 있었다. 같은 공간을 점유하고 운영하면서 노동조합과 협동조합, 진보정당의 구성원들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물론, 서로간의 차이를 넘어서 공통의 제도적인 과제를 돌출해 낼 수 있었고, 이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
지역 내 다양한 세력이 민중의 집을 통해 공간을 공유하고, 이 만남의 공간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만남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 이들은 연대의식을 가질 수 있었고, 이러한 연대의식을 통해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결국 제도적 개선요구, 정치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었다.
8. 진보의 모델 하우스, 민중의 집
로도스는 이솝우화에 나오는 유명한 이야기이다. 허풍이 심한 한 사람이 동네 사람들에게 큰 소리쳤다. 로도스 섬에서 자신의 키보다 몇 배 높이로 뛸 수 있다. 믿기지 않는다면 로도스 섬에서 증인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이 말했다. 로도스 섬에서 증인까지 불러올 것 없이 여기가 로도스 섬이라고 생각하고 당장 한번 뛰어오르라고. 그러자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보진영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평등한 세상, 누구나 차별받지 않는 세상, 노동착취가 없는 세상, 돈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세상.
진보진영이 집권하면 평등한 세상, 착취 없는 세상이 온다고 외치는 것은 마치 로도스 섬에서는 붕붕 날아다닐 수 있다는 허풍쟁이의 말처럼 들린다.
민중의 집이 로도스 섬이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민중의 집에서 우리가 꿈꾸는 세상의 모습이 반영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배우지 못한 사람,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평등할 수 있는 곳, 비자본주의 방식으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눌 수 있는 곳, 돈이 없어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고, 주변사람들과 함께 연극,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무대가 바로 민중의 집이다.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세상의 모습, 그것을 보려면 민중의 집을 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가 연대하는 곳, 서로를 이해하는 곳, 가난한 사람이 자신의 생활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정치, 사회, 경제 문제와 연관시켜 사색하고 해법을 찾을 수 있는 곳, 그런 토론이 이루어지는 곳이 바로 민중의 집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