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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90회. '궁예' (2000.10.28.)
90회 : 궁예
궁예
방송일: 20001028 조회수 : 7124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궁 예
방송/ 10월 28일 `PD/이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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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 타이틀] 역사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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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달 구름에 가리고 5
#땅 trk 17
-고려사에는 한 인물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산골로 도망쳤으나 이틀밤이 지나자 배가 고파 보리이삭을 훔쳐먹었다. 그후 이 광경을 목격한 농민들에게
살해됐다."
#궁예미륵 12 - 배가 고파 도둑질을 하다 백성들에게 맞아죽은 왕. 그가 바로 '궁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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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 타이틀] 궁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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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1(오프닝)]
#뒤로 궁예도성 보이고
-지금 보시는 곳은 궁예가 강원도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성을 지었던 궁예도성이 있던 자립니다.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이 궁예 도성은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습니다.
-요즘 드라마 태조왕건을 보면 궁예는 대제국의 꿈을 이루기위해 궁예는 철원으로 도읍을 옮길준비를 하는
의욕적인 왕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에 기록된 궁예의 평가는 부정적입니다.
(삼국사기 기록 읽고)
이기록은 삼국사기 궁예전에 나오는 이야긴데 궁예는 신라의 왕자였는데도 신라를 원수로 여기고 국가전복을
기도했다. 심지어 선조의 초상화까지 칼로 베었으니 몹시 어질지 못하다.
-(제왕운기 기록 읽고)
이 글은 고려시대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날로 사악해져서 방자한 왕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궁예는 부인에게 간통죄를 뒤집어씌워서 부인과 두 아들을 아주 잔혹하게 죽인 왕이라고 합니다.
-역사속에 폭군으로 기록돼있는 궁예.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먼저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으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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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1]
#차 trk 8 -(보다가) 궁예의 땅이었던 철원.
#지도 보이면 13 -남한의 최북단, 휴전선이 가로질러 지나가는 이곳에는 궁예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태봉 상호 10 -(보다가) 철원은 궁예가 세운 나라 '태봉'의 수도였다.
#제문 읽고 4 -
#제 지내고 25 -지난 10월 6일 철원에서는 지역축제인 태봉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태봉제례로부터 시작되는데 지난 94년부터 7년째 이어져 오고 있는 이 제례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다.
#궁예 신위 5 -철원에서 궁예는 이 지역을 다스린 왕으로 지금도 추앙받고 있다.
@안승덕(철원향교 전교) 인터뷰...우리 철원에 와서 도읍을 하신 왕이니까 일단 서민들로서는 왕위에 더 높은
사람이 없지않나. 하늘아래는 왕밖에 더 높은 사람이 없다고 해서 잘한 것도 있고 잘못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 철원에 와서 도읍해서 왕이니까
반드시 숭배해야 된다는 뜻이다.(철원서는 궁예왕이라고 하나?) 그렇습니다.
#차 trk 7
#월정역 13 -궁예도성은 월정역 너머에 있다. 그러나 월정역 까지가 일반인들에게 출입이 허용되는 지역이다.
#전망대로 들어가고 5 -궁예가 살았던 궁궐은 비무장지대에 있다.
#바라보고(뒷모습) 5 -비무장 지대에 있는 유적을 10년째 조사하고 있는 이재 교수와 6.25이전까지
궁예도성 터에서 농사를 지었던 최점석 옹이 동행했다.
#망원경으로 보고 8
~현장음 살리고...에이, 안보여.
#도성터 pan 10 -궁예도성은 예로부터 풍천원이라고 불리는 넓은 평야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 도성 한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지나가고 있다.
#도성터 C/G 14 -성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외성이 있고, 그 안에 내성이 있는 이중구조다.
외성의 둘레는 12.7킬로미터로 추정되고 있다.
#도면 보며 이야기 18 -그동안 궁예도성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다.
육군사관학교 이재 교수는 일제시대 조사자료와 군 작전지도, 항공사진, 증언 등을 토대로 궁예도성의 위치를
찾아냈다.
#터 pan 8 -그러나 비무장 지대 내에 위치한 특수성으로 접근이 어려워 정확한 모습은 확인할수 없는 상태다.
#선 그려지고 12 -지금은 성벽이 있던 자리만 간신히 알아볼수 있을 정도다.
#1916년 궁예도성 외벽 8 -조선총독부 조사 자료에 의하면 성벽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다.
#석등 12 -출토된 유물은 당시 국보 118호로 지정돼기도 했던 석등과 석등 대석 등이었다. 이곳이 한때 화려
했던 궁예의 땅이었음을 말해주는 유물들이다.
#팔각석등 대석 4
#석등 입석 5
#거북모양 대석 3
#이재교수와 최옹 이야기하고 -최점석 옹은 당시 궁예도성 터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현장음 살리고...대궐터가 어딘가? 뿌옇게 연기나는 곳이 대궐터다.
#연기나는 곳으로 z.i 10 -천년전 궁예는 바로 이곳에서 포정전이라는 궁궐을 짓고 살았던 것이다.
@최점석 인터뷰...궁예도성 자리는 보전이 안돼있고, 저희 살던 부락 거기만 성이 보전이 돼있고.
궁터는 일본인이 개척하면서 전부 논이 되고 말았다. 옛날 궁터에 기와장이 있어서 가져다 유기그릇 닦아썼다.
지금도 기와는 있다.
#도성 pan 15 -지금 궁예도성은 성벽조차 희미하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탓이기도 하지만 성벽이 토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재 교수 인터뷰...궁예는 이 철원평야 주변에 엄청나게 큰 석성들을 많이 쌓았습니다.
그야말로 규모를 찾아볼수 없는 큰성인데 유독 철원평야의 도성만은 토성입니다.
그렇다면 쌓을 능력이 없어서 토성을 쌓았다고 볼수는 없거든요. 그가 갖고 있는 미륵신앙과 관련해볼 때
그는 늘 평민들과 하나가 되기 원했던 겁니다.
그런점에서 볼 때 평민과 왕궁 사이에 높은 석벽을 쌓길 원하지 않고 토축을 해서 국민과 일체가 되려는 의지가
담겨있다고도 볼수 있는 거겠죠.
#도성터 sk 16(스피커, 김일성 고지, 물새 등)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궁예도성. 천년이 지난 지금도 궁예의 꿈은 그곳에 묻혀 있다.
#차 TRK 5 -철원과 인근지역에는 궁예가 쌓았다는 산성이 산재해 있다.
#산으로 오르고 5 -보개산성에는 궁예가 왕건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기 위해 쌓은 성이라고 전해진다.
#골짜기 PAN 6
#산성 sk 14 -그러나 보개산성은 궁예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외곽지역에 쌓은 10여 개의 성 가운데 하나다.
@이우형 향토연구가 인터뷰...궁예 이전의 산성들은 성벽을 쌓는데 굉장히 정형성을 띄거든요.
장방향으로 다듬어서, 일정한 층으로 계속 쌓는데 보개산성 같은 경우는 돌을 자연석 그대로 가공하지 않고
쌓어요. 그래서 돌이 크면서도 부자연스럽지만 이런 공법이 성을 쌓는데 공기를 단축시키거든요.
궁예시대에 와서 이런 양식이 처음 나타나요.
#이동 10 -이곳에서 발견된 기와는 나말여초의 것이다.
#어골무늬 기와 5 -생선가시 모양의 무늬와 포흔이 남아있는 기와.
#포흔 5 -이 산성이 후삼국시대에 만들어진 산성이라는 사실을 알수 있다.
~현장음 살리고...운악산성이나 명성산성 다 같은 문양의 기와가 나오거든요.7
#산성 pan 10 -보개산성은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는 산성 가운데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성이다.
#수구 t.d 8 -성안에 물이 차지않도록 만든 배수구,
#문지 pan 7 -자연지형을 이용해서 만든 출입구와 성안의 우물까지.
#우물터 5 -장기전에 대비해서 만든 성이었음을 알수 있다.
#명성산 pan 10
#산타고 12 -명성산에는 궁예와 관련해서 또다른 전설이 전해진다.
#바위로 z.i11 -산정상에는 궁예가 앉아서 도성을 짓는 공사를 지휘했다는 바위가 있다.
#궁예바위 10 -도성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이곳에 궁예바위는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다.
#산에서 내려다본 철원 8 -궁예의 이야기가 곳곳에 남아있는 철원. 궁예는 지금도 철원땅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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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2]
#지도 걸려있고
-이 지도는 궁예가 차지한 영토를 표시한 것입니다. 궁예가 차지한 영토를 보면 북쪽으로는 대동강유역,
남쪽으로는 나주까지, 완도를 비롯한 전남일부 섬지역도 궁예의 땅이었습니다.
여기 북방 경계선은 후에 왕건이 세운 고려의 국경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궁예는 한반도의 중심부를 다 차지하면서 후삼국시대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궁예는 신라 헌안왕의 서자이거나 경문왕의 아들이라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에서 쫒겨난 왕자였던 궁예. 왕손이라고는 하지만 버림받고 숨어살던 그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넓은 땅을
차지하고 이런 세력을 끌어모을수 있었을까요?
궁예가 이렇게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많은 세력을 끌어모을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철원땅에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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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2]
#차 지나가고 z.i 10 -열살 무렵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궁예는 세달사라는 절로 들어간다.
#법흥사 6 -세달사의 위치에 대해서는 세가지 설이 있다.
경기도 개풍, 영주 부석사, 영월 세달사 설이 그것이다.
#징효대사 보인탑비 f.s 5 -영월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법흥사 경내에 있다.
#비문 z.i 6 -비문에는 당시 절을 짓는데 시주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세달촌주 나생군 5 -그런데 여기에 '나생군의 세달촌주'라는 기록이 나온다. '나생'은 영월의 옛이름이다.
@이도학 교수 인터뷰...시주자의 명단가운데 세달촌주가 나옵니다. 세달촌이라는 촌락 인근에 세달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봐야만 되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영월설이 타당하다고 볼수 있습니다.
#세달사터 z.i 12 -영월에 있는 것으로 알려진 세달사는 현재 그 터만 남아있다.
#터 sk 12 -지금은 폐교된 흥교분교 자리가 세달사 터다.
조선시대 때 절은 화재로 소실됐고, 최근까지는 학교가 있던 자리다.
#주민과 걸어가고 4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수 있는 유물은 지금도 발견된다.
#장대석 9 -당시 절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장대석이 곳곳에 나뒹군다.
#부도 6 -원형모양의 사리공이 있는 부도.
#돌확 5 -문쩌귀로 쓰였던 돌확.
#출토된 기와 5 -특히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는 이 지역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숫막새 7 -연꽃무늬가 새겨진 수막새와
#암막새 13 -용무늬가 그려진 암막새는 당시 절이 얼마나 큰규모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엄흥용 인터뷰...강원도 영월에서는 삼국시대 기와가 발견되는게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세달사
터에서는 용 두마리가 연주무늬를 하고 있는 암막새가 발견되고 있죠.
#경희대 4
#찾아들어가고 5 -궁예가 절로 들어간 이유는 무엇일까.
#조인성 교수와 이야기 하고 7 -궁예정권에 대한 연구를 해온 조인성 교수는 그 이유가 궁예의 신분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자기가 쫒겨난 왕자출신이라는 신분을 감출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수 있습니다.
또 아마 쫒겨나서 이리저리 숨어다니거나 이랬을테니까 절에 의탁해서 경제적인 어려움을 덜려고도 생각했을
수 있구요. 그다음에 궁예로서 자기를 쫒아낸 경주의 진골 세력들에 반기를 들고 자기가 잃어버린 특권, 권위
이런 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육 이런 것이 필요했을 것인데, 당시 교육기관으로서 사원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삼국사기 17 -궁예는 세달사에서 '선종'이라는 법명을 받고, 그곳에서 성장한다. 그러나 그는 불교 계율에
충실한 일반 승려와 달랐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이재범 교수 연구실 12 -궁예 연구를 해온 이재범 교수. 그는 궁예가 현실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원인을
당시 불안한 정세에서 찾고 있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천년동안 지배해왔던 신라의 여러 가지 제도나 사회구조가 일정한 한계에 달해서 위로
부터는 정치적으로 귀족들간에 왕위쟁탈전이 아주 치열했고, 아래로부터는 중앙의 정쟁이 계속되기 때문에
사회적인 통제가 이완돼서 아래로부터는 많은 민중이라고 할수 있는 사람들이 하극상과 같은 풍조가 계속해서
빈발했던 시깁니다.
이른바 혼란기라고 하는 그런 시기로 볼수 있습니다.
#삼국사기 18 -892년,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궁예는 세달사를 떠나 원주를 거점으로 활동하던 양길 휘하로
들어가 반란군에 가담한다.
#공격 이미지 18 -양길휘하에서 활약하던 궁예는 강릉지역를 점령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강릉을 공격할 당시 6백명이던 병력이 강릉에 들어가서는 3500명으로 늘어나면서 궁예는 독자적인 세력을 확보
하기 시작한다.
#원주서 세력을 넓힌 범위 C/G 6 -초기에 궁예의 병력으로 흡수됐던 사람들은 현실에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었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그 병력의 일부는 궁예가 양길로부터 받은 병력일겁니다. 그 일부는 명주에 이르기까지
점령한 지역에서 끌어들인 부대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아마도 명주일대에 살던 농민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봐서는 궁예의 초기군대는 일종의 농민군 성격이 강한 그런 부대로 생각할수 있겠습니다.
#삼국사기 18 -당시 전쟁터에서 궁예는 병사들과 동고동락하는 인물이었다. 사사로운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공정했던 궁예는 민심을 얻었다. 이런 궁예의 통솔력 뒤에는 미륵신앙이 자리잡고 있었다.
@김두진 교수 인터뷰...현실 사회를 개혁하려는 경향의 미륵신앙, 이것은 신라국가의 반체제 신라국가를 부정
하는 사람들 또는 연고지를 떠나 초적이 됐던 그런 사람 중심으로 수용이 됐습니다. 따라서 궁예하에는 미륵
신앙을 이용해서 서민대중들 초적들 신라국가에 반기를 든 인물들이 모집됐습니다.
#궁예의 길 15 -강릉에서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궁예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있던 강원도 일대를 점령해나간다.
그리고 그가 처음 도읍으로 정한 철원에 이른다.
#도피안사 f.s 5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철조 비로자나불 z.i14 -통일신라말 대표적인 사찰로 알려진 도피안사.
국보 63호로 지정된 철조 비로자나불 조성기에는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유를 알수 있는 단서가 있다.
#글자 불러오고 17
-불상 조성기에는 당시 철원사람들이 말세의식이 잘 나타나 있고, 말세의식은 미륵사상과 연결될 수 있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흔히 석가모니께서 돌아가신지 1500년부터 말세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불상을 만든 사람들이 석가모니께서 돌아가신지 1806년이 됐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슬퍼
했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들이 살고있는 당시가 말세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는 것이 되겠죠.
#글자 불러오고 19 -비로자나불 조성에 참여한 사람은 1500여명.
이들은 일정한 경제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으로 보인다. 이들과 궁예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김두진 교수 인터뷰...이 일대 거사들이 물론 궁예의 미륵신앙과 연결됐다는 흔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극락을 추구한다는 측면에서는 도피안사와 미륵신앙은 연결이 가능합니다.
그것이 만약 연결이 가능하다면 1500명의 거사들은 불교신도 중에서 가장 응집력이 강한 신앙조직이 미륵의
신도조직인 향도인데 그렇다면 1500명의 거사들은 향도조직으로 생각할수 있습니다.
또한 이 1500명은 그보다 조금후에 이지역을 점령해서 그것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설하는 궁예와는 어떤 형태
로든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철원 pan 12 -궁예가 철원을 택한 이유는 철원이 신라의 변방이라는 지정학적인 위치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철원은 신라의 변경에 해당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에 신라의 변경에서는
신라중앙정부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평산의 박씨 세력은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고구려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 그런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평산과 철원은 떨어져 있습니다만 이 두 지역이 다 신라의 북쪽 변방에 떨어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아마 철원에도 이런 움직임이 있었을는지 모르겠고 궁예로서는 철원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데 좋은 장소
라는 생각을 가졌다고 얘기할수 있겠다.
#철원 평야 trk 20 - 골이 깊고 산이 높은 강원도에서 가장 넓고 시원하게 트인 곳이 철원 평야다. 철원 평야의
쌀생산량은 지금도 강원도 전체의 6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풍부하다. 철원평야는 도읍으로 유리한 조건을
갖췄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한해 풍년이 들면 6,7년정도 걱정없이 살수 있다고 했기 때문에 내륙지역에서는 중요한
요충지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죠. 그런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해주는 자료는 고려후기 왜구들이 한반도를 위협할
때 당시 고려조정에서도 개경을 버리고 철원으로 천도하자는 얘기가 많이 나오는 것을 볼 때도 철원은 이미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곳이었기 때문에 선택한 곳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듭니다.
#철원 z.o 12 -궁예의 땅, 철원. 철원은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궁예의 이상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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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3]
#지도 걸려있고
-896년 드디어 궁예는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왕이 됩니다. 그런데 1년만에 지금의 개성 바로 송악으로 도읍을
옮깁니다. 나라를 세우고 궁예가 내건 국호는 '고려'였습니다. 왕건이 국호로 내세운 고려라는 이름을 궁예가
먼저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려라는 국호를 사용한지 3년만에 국호를 '마진'으로 고칩니다.
그리고 다시 도읍을 철원으로 옮깁니다. 그후 911년 궁예는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꿉니다.
-국호나 도읍은 한나라의 정치이념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궁예가 집권기간동안 나라이름과
도읍을 자주 바꾼 것을 보고 후대사람들은 궁예의 변덕스런 성격 탓이라고 합니다.
과연 이런 성격적인 이유만으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바꾼 것일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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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3]
#동주산성 pan 11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궁예가 도성으로 삼았던 곳은 지금의 동주산성이다.
#산성 앞에서 보고 11 -(현장음 듣고) 이곳에 도읍을 정하면서 철원지역의 안정된 경제력과 지방세력의 협조를
얻어 활발히 정복활동을 펼친다. 개국을 염두에 두고 내외관직을 설치한 것도 이때다.
#돌 15
#산성에서 바라본 철원평야 10 -동주산성은 궁예의 첫 거점이었던 것이다.
@이재교수 인터뷰...동주산성으로 지금 알려져 있지만 동주는 고려시대에 붙인겁니다.
원래는 삼국시대에는 철성군이죠. 이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성으로 봅니다. 그러나 이 성의 중요성은 궁예가
895년에 영서지방에서 이리 나오면서 이 산성에 입성하면서 철원에 3년간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 중요한 성입니다.
#이미지(이사하는) 15 -이무렵 궁예는 연천 장단 개풍 등 관내 30여성을 차지한다.
이것은 각지역 호족들이 궁예 휘하로 들어오는 계기가 된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일차적으로는 궁예의 군사가 많고 강했기 때문일겁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호족
들이 싸움도 하지 않고 궁예에게 항복해왔다는 것은 그렇게만 해석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로서는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에서 이제 자기들의 지위를 높일수 있는 그런 지위를 잡을수 있는 것이고,
한편 궁예의 입장에서도 무작정 그들과 싸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을 겁니다.
궁예로서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가 필요했을 것이고, 그다음에 경제적인 부가 필요했을 것이고 나아
가서는 후백제나 신라와 겨룰수 있는 무력적인 힘도 필요했을 겁니다. 바로 그런 것을 어디서 찾을수 있었겠는가
호족들에게서 찾을수 있었을 겁니다.
#태조 영정으로 z.i 13 -송악의 호족이었던 왕건家도 궁예에게 귀부해온 호족 가운데 하나다.
당시 왕건가를 비롯한 송악의 호족은 고구려 계통으로 막강한 군사력과 해상력을 가진 집단이었다.
#차 trk 8 -철원에 도읍을 정한지 1년만인 897년, 궁예는 송악, 지금의 개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개성 남대문 14 -도읍으로서 유리한 조건을 가진 철원을 버리고, 궁예가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범 교수 인터뷰...궁예가 철원이라고 하는 곳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륙에서는 아주 중요한 위칩니다만
철원에만 머물러서는 하나의 수성기지, 나라를 지키는 데는 좋은 도읍이 될수 있지만 바다로 진출하는 데는
약점을 가진 도십니다. 그러나 당시 궁예는 삼한을 통합할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로를 이용한 공격을
하지 않으면 안됐던 것이죠. 송악이라고 하는 해상으로서 유리한 지역을 장악하고 또 그곳을 중심으로 거대한
세력이 돼있던 해상호족들을 장악함으로 해서 양길이나 그밖의 해상세력을 장악하기위해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C/G 송악천도후 점령지 14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후 궁예는 한강유역을 손아귀에 넣는다.
그리고 한강의 수운을 이용해서 청주는 물론 지금의 공주일대까지 빠른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다.
#개성 만월대 터 sk 30 -이에 자신감을 얻은 궁예는 901년, 왕을 자칭하고, 국호를 '고려'라고 한다.
고구려를 계승하는 나라라는 기치를 내건 '고려'. 고려라는 국호는 고구려 계통의 호족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는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고려라고 했을 때는 바로 궁예가 나라를 세운 지역이 고구려의 고토였기 때문에 고구려의
후예라고 할수 있는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면서 또 고구려부흥을 부르짖으면서 쉽게 국가체로 만들 수 있지 않나.
이런데서 고려를 국호로 내세운 것으로 보입니다.
#고려 6 -그러나, 고려라는 국호는 오래가지 못한다. 고려라는 국호를 정한지 3년만에 궁예는 다시 나라이름을
'마진'으로 바꾼다.
#마진 10
@이재범 교수 인터뷰...궁예는 고구려의 고토와는 직접적인 연결이 없던 사람이기 때문에 일정한 기간 그들과
연대는 할수 있지만 영원히 고구려인으로서 궁예가 될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궁예는 미륵을 희구하는 이상세계를 꿈꾸기 때문에 고구려 백제 신라라고 하는 그런 지역주의에 머물
수도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점에서 국호를 그런것에 대한 통합적인 의미를 가진 새로운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되는 필연적인 이유가 있지 않았나. '마진'은 잘 아다시피 '마하진단'의 약자인데,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예전부터 동방국을 뜻하는 칭홉니다. 마진이라는 것은 대동방국의 뜻이 담긴 것이죠.
#개성->철원 14 -대동방국을 뜻하는 마진으로 국호를 바꾼 그 이듬해, 궁예는 도읍을 송악에서 철원으로 다시
옮긴다.
#궁예도성터 14 -철원으로 돌아와 도성을 정한 곳은 현재 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풍천원, 바로 궁예도성이었다.
이곳에서 궁예는 자신의 꿈인 대동방국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처음에 철원에서 송악으로 옮기는 것은 아마도 호족들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위한
목적이 있었던 거 같고, 다시 송악에서 철원으로 돌아가는 것은 호족들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그런 목적이
있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적으로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자신감, 이런 것이 찾아지지 않는가 그렇게
생각한다.
#궁예도성터 기록 14 -호족세력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궁예.
철원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청주사람 천 가구를 철원에 옮겨 살도록 한 것도 왕권 강화의 한 방편이었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청주라고 하는 지역이 삼국시대부터 고구려와 백제, 이런 완충지대이면서 그런 세력이
자주 주인이 번갈아 가는 세력이었어요. 그렇지만 그곳에서도 백제적인 성향이 강한 그런 사람들이어서 아마도
궁예는 그사람들을 철원으로 옮겨서 고구려 호족들과 서로 대립갈등을 통해서 그런 것을 이용해서 정권을 보다
유리하게 이끌려는 그런 것이 작용이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마진 4 -삼한 통일을 꿈꾸며 왕권을 강화해가던 궁예는 911년, 또한번 국호를 '태봉'으로 바꾼다.
#태봉 11
@조인성 교수 인터뷰...나중에 또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그다음에 연호가 여러개 나옵니다.
무태 성책 수덕만세 정개 이런식으로요. 이런 것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는 궁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권자체의 불안정성 이런 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마치 자꾸만 심기일전 해야 된다면 그것이 바로 불안정한 상황을 얘기해주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노을 z.i 15 -강력한 왕권을 추구했던 궁예. 그러나 추진과정에서 그는 호족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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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4]
#성 안으로 들어오고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바꾸면서 궁예는 민심을 하나로 모을수 있는 통치수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미륵이었습니다.
-미륵신앙은 우리가 사는 현실을 극락으로 바꾸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말세가 되고 살기 어려울 때 미륵이
나타나서 현실을 개혁해주고, 모두가 잘 사는이상사회를 만들어준다는게 미륵신앙입니다.
바로 이런 미륵사상을 바탕으로 궁예는 반신라세력을 규합하고 국가를 건설할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궁예미륵이라고 불리는 그런 미륵불이 많이 있습니다.
이 미륵도 궁예미륵인데요. 그런데 궁예는 집권 후반기가 되면서 본인 스스로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자칭합니다.
그리고 두 아들도 청광보살, 신광보살이라고 하면서 신격화 합니다. 그는 왜 갑자기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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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4]
#안성 국사암 z.o 15 -한때 궁예의 점령지였던 안성. 이곳에는 궁예와 관련된 석불이 전해지고 있다.
#궁예미륵 z.i 9 -이 미륵불은 일명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석불이다.
#미륵 sk 12 -세 기의 미륵불 가운데 우측에는 지장보살, 좌측에는 약사여래, 가운데 있는 불상이 미륵보살이다.
#미륵불 앞에 서서 이야기
~현장음 살리고...미륵이다, 미래의 부처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신앙이 숭상하는 분들에 의해서 토속신앙으로
되지 않았나 추측해본다.
#미륵불 t.u 8 -궁예미륵은 신령한 힘을 가진 불상으로 지금도 알려지고 있다.
#하늘서 포천 미륵으로 8 -철원인근에 있는 포천에도 궁예미륵이라 불리는 석불이 있다.
#t.u 10 -궁예미륵은 미륵신앙을 믿는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바라보는 뒷모습 7 -일부 지역 사람들에게 궁예는 지금도 미륵불로 통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30 -실제로 궁예는 정권말기로 접어들면서 스스로 살아있는 미륵이라고 자처했다.
행차할 때는 미륵불과 같은 모습으로 치장을 하고, 대열을 갖추었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미륵신앙을 바탕으로
공평무사한 세상을 바랬던 궁예가 갑자기 미륵을 자처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인성 교수 인터뷰...그러니까 미륵신앙이 궁예에게 있어서는 두가지로 이용된다. 하나는 기존의 질서를 무너
뜨리는데 미륵신앙을 이용했죠. 그래서 가난하고 불만많은 농민들을 끌어들인 것으로 생각하고,
왕이 된 후에는 자기의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방법으로 이용된 것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미륵불을 자처하고 자기자신이 미륵불로서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볼수 있는 그런 신비한 힘을
가졌다, 이렇게 내세우는 것이죠.
#고려사 18 -궁예는 왕권 강화 수단으로 미륵을 자처했다.
당시 궁예의 왕권이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궁예의 왕권이 흔들리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아지태 사건이다.
#이미지(문앞) 24 -아지태 사건은 친궁예세력과 반궁예세력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추정된다.
양측의 첨예한 대립으로 수년간 해결하지 못하고 미궁에 빠져있던 아지태 사건을 처리한 인물은 바로 왕건
이었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아지태 사건은 왕건이 궁예정권하에서 정계의 일인자로 부각되는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
사건이 될 것입니다. 아지태는 청주인으로서 참서를 좋아하고 간사한 그런 인품을 가진 사람으로 등장하는데
같은 청주출신의 사람을 모함해서 상당히 궁예정권하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어려운 사건으로 남아있었던 겁니다.
그것을 바로 왕건이 아지태를 제거해가면서 효과적으로 처리해서 궁예정권하에서 아주 신망을 얻게 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고려사 15 -아지태 사건 이후 왕건을 따르는 세력이 급증한다. 궁예 세력이 대거 왕건세력으로 넘어갔음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그러니까 아지태 사건이후부터 왕건은 궁예로 신임을 받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견재를
받게 돼죠. 그래서 직위상으로는 가장 높은 시중에 오르기도 하고,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신변의 위협을
느껴 본인 스스로 자청해서 해군대장으로 내려가는 그렇게해서 지금의 전남 남부에 있던 궁예정권의 영역에
가서 활동하게 되기도 합니다.
#궁예미륵 이미지 15 -정치적으로 위기를 느낀 궁예가 선택한 방법은 미륵신앙이었다.
궁예는 미륵을 자처하면서 신권을 바탕으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이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아마도 궁예가 추구했던 왕권의 전재화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사람이 마음먹은대로. 이렇게 되니까 뭔가 자꾸 신비한 이런 것을 동원해서 자기가 미륵불이고 이런식으로
왕권의 전제화가 순탄하게 추진됐다면 굳이 미륵불이라고 하고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아요.
#미륵불 이미지 22 -정치적인 위기를 종교의 힘으로 극복하고자 했던 궁예. 그러나
그것은 오히려 궁예의 한계를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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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5]
#서재세트
-미륵불을 자처하며 왕권 강화에 고심하던 궁예는 급기야 부인과 두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 사건으로 궁예는 패륜을 저지른 왕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그래서 궁예는 후손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그런데 이 족보를 한번 보십시오. 이 족보는 궁예의 후손들의 것입니다.
현재 궁예의 후손이라고 알려진 가문은 두군뎁니다. 그중 하나는 시조가 '총'으로 돼있는데 그 아버지가 청광
으로 돼있습니다. 또 그 아버지, 시조의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 궁예라고 돼있습니다.
-또다른 족보는 좀더 직접적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요. 족보 첫머리에 시조는 신라 제 48대 경문왕의 아들,
태봉왕 궁예의 5대손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집안은 더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꺼렸
습니다. 아마 이렇게밖에 할수 없는 데는 궁예에 대한 평가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궁예가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사건은 그가 얼마나 포악한 사람인지 단적으로 말해주는 예로 자주 인용됩니다.
궁예는 부인이 간통했다는 사실을 미륵관심법이라는 신통력으로 알아보고 부인과 두 아들까지 죽였다고 합니다.
정말 이런 치정관계로 부인과 두 아들을 한꺼번에 죽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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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5]
#국립 중앙도서관 외관 4
#이재범 교수와 족보 보고 7 -궁예의 후손으로 알려진 집안의 족보에는 사료에 기록되지 않은 궁예의 아들이
있다.
~현장음 살리고...아버지 경문왕, 아들은 청광 신광 동광 세아들이 있어요.
#동광 글자 10 -이 족보는 궁예에게 '청광' '신광'외에 '동광'이라는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자료보는 14 -궁예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궁예에게는 강씨외에 또다른 부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수 있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아마도 실제로 궁예에게 있어서도 사서에 있는대로 부인이 하나만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부인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이 가능한데 실제 지금까지 보면 궁예에게는 부인이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돼있거든요.
#삼국사기 18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부인 강씨의 부정한 행동을 신통력으로 알아보고 부인과 두 아들을
잔인하게 죽였다고 되어있다. 궁예의 포악함을 드러내는 사건으로 기록돼 있는 것이다.
#부인 이미지 15 -만일 궁예의 부인이 여럿이었고, 궁예가 포악한 사람이었다고 가정한다면 왜 유독 강씨 부인
만이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조인성 교수 인터뷰...부인 강씨가 궁예가 행한 비법에 대해 정색으로 간쟁했다고 나오건든요.
비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아마도 궁예가 미륵불을 자처하면서 행했던 여러 가지 정치행태를 말하는 것 같습
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궁예에게 있어서는 중대한 도전이었던 셈이죠.
그리고 이런 강씨의 간쟁이 강씨 독단으로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깝게는 신천강씨, 더 나아가서는 신천강씨와 연결돼있는 패서호족이 연관이 돼있었을 같구요.
#고민하는 궁예 이미지 15 -궁예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추정되는 부인 강씨.
그렇다면 궁예가 두 아들까지 죽여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재범 교수 인터뷰...궁예가 자기는 미륵불이고 두 아들은 보살이라고 끔찍히 아끼던 두 아들까지 죽일 정도
였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적인 치정관계로만 볼수는 없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됩니다.
그렇게 두 아들을 죽일 정도였다면 그보다 훨씬 더한 국가전복이라든지 대역모라든지 하는 국가적인 것과 관련
을 시켜야하지 않을까, 따라서 신천강씨와 두 아들을 통한 어떤 일종의 고구려 호족들의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바로 그런 정치적인 움직임에 의해서 궁예는 자신이 역모에 의해 쫒겨날지 모른다는 위협에서 그런
특단의 조치를 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는해 z.i 15 -이 사건이후 궁예는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대거 숙청하기 시작한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호족
세력들은 더욱 반발하면서 왕건을 중심으로 결속력을 다지게 된다.
#고려사 13 -또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궁예는 6년동안 도성을 지으면서 과다한 노역으로 민심을 잃는 등
실정을 저지르게 된다.
@이재범 교수 인터뷰...결국 궁예는 자신이 중앙집권국가를 꾀해가면서 호족들을 하나의 일사불란한 관료체계로
흡수하려고 했고 선종이라고 하는 지방에 뿌리를 내린 사상체계를 탄압했다든가 이런게 궁예 실정의 하나로
볼수 있을 것 같고, 또 하나는 그런 어떤 왕실의 존엄을 나타내기 위해 많은 세금을 걷어들이다보니까 자연스럽게
백성들로부터 가렴주구가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나. 이런 것이 궁예가 상하층으로부터 일정한 비판
받을수 있는 실정의 소지라고 볼수 있을 것입니다.
#달 구름에 가려지고 10 -918년 궁예도성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한다.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반란이었다.
#도망 10 -결국 궁예는 왕이 된지 18년만에 종말을 고한 것이다.
@조인성 교수 인터뷰...궁예는 경주중심의 천년동안 내려온 진골중심의 세상을 부수는데 기여했던 사람이라는
측면도 고려가 돼야할 것 같고, 그런 점에서는 역사의 진전이랄까 하는데 나름대로는 기여한 사람이죠.
@이재범 교수 인터뷰...궁예가 걸어온 인생경로는 아주 하층민 생활이었기 때문에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신라
라는 질곡에서 해방시켜주고 그들과 함께 공존해보려고 했던 그런 이상을 가진 사람으로 보여지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런 고대 신분한계를 벗어났고, 새시대에 대한 이상을 제공했던 인물로 평가됩니다.
#명성산 pan 8 -궁예 최후의 은거지로 알려진 명성산./
#절벽 내려오고 30 -명성산은 기암절벽이 많은 산세 때문에 접근이 어렵다. / 그러나 궁예는 이곳에 산성을
쌓고 유사시에 대비했다. 험준한 산 곳곳에는 궁예의 최후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한다. / 특히 이곳은 궁예가
왕건과의 싸움에서 밀려난후 최후의 보루로 저항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명성산성 성벽 18 -
@이우형 인터뷰...궁예를 신봉했던 친위세력하고, 여기서 왕건군과 항전하다 군대를 궁예가 해산시키고,
후삼국의 가장틈 패권을 차지했던 궁예가 원대한 꿈을 가지고 태봉국을 움직였는데 마지막 왕건의 어떤
쿠데타로 인해 자기 운명이 여기서 끝나니까 목놓아울었다고 해서
그때부터 산이름을 울음산이라고 했고, 성이름을 울음성이라고 그렇게 전해오고 있습니다.
#철원서 궁예바위로 z.o 17 후삼국 혼란기에 자신의 꿈을 채 이루지 못하고 역사속으로 사라진 궁예.
궁예의 꿈은 아직도 그의 땅 철원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black
왕건즉위 5일만에 환선길은 모반을 꾀하다 참수됐다. 514일째 되던 날 이흔암은 반란을 꾀하다 극형에 처해
졌다. 5
그해 9월과 10월에는 청주인에 의한 모반사건이 연이었다. 7
또 공주 운주 등 10여개 주 현이 자발적으로 후백제에 투항했다 7
강릉의 호족 왕순식은 5년간이나 왕건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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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6(클로징)]
#기본세트
-한 나라를 18년동안이나 통치했던 궁예의 최후는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후삼국시대는 혼란기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혼란의 시대였기 때문에 누구나 민심을 얻을수만 있다면 세력을
잡을수 있었던 그런 기회의 시대기도 했습니다. 궁예는 이런 혼란했던 난세에 세력을 잡았던 후삼국시대 영웅
가운데 한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족과 대립했던 궁예는 역사에 패지로 남았고, 대신 호족을 포용했던 왕건이 삼국통일을 이룬 역사의
승자가 된것입니다.
-왕건이 세운 고려의 기반을 마련해준 궁예. 통치자로서 궁예의 면모는 패자라는 이유로 그늘에 가려졌고
미치광이라는 극단적인 평가만이 남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정치가로서 궁예의 모습, 그리고 후삼국 시대 역사
의 주역으로서 궁예를 재평가 해야할 것입니다.
-비무장지대에 있는 궁예도성은 천년전 궁예의 꿈이 서려있는 땅입니다.
남북화해분위기를 맞아 비무장지대에 있는 문화유적 가운데 남북공동조사 1번지로 떠오르고 있는 궁예도성.
이 궁예도성을 조사발굴하는 작업은 역사속에 묻힌 풍운아 궁예의 실체에 한걸음 더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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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탭 스크롤
끝타이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