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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사설 제9권 / 인사문(人事門) / 퇴계ㆍ남명(退溪南冥)
황금계(黃錦溪 황준량(黃俊良))가 퇴계(退溪)에게 상서하여, 남명(南冥)이 의리에 통달하지 못한 점이 어디에 있느냐고 논하자, 퇴계는 답하기를 “이 사람들은 흔히 노ㆍ장(老莊)에 병들어 우리 유학에 대해서는 으레 깊지 못한데, 어찌 그 통달하지 못함을 괴이히 여기겠는가? 요는 그 장점만을 취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부제학 개암(開岩) 김우굉(金宇宏)이 이 서한을 얻어 보고 크게 놀라서 마침내 퇴계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남명 선생은 우도(右道)에서, 선생은 좌도에서, 해와 달 같은 존재로 다 사문(斯文)을 흥기시키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삼고 계시니, 선비의 기습이 일변하여 도(道)에 이를 수 있음이 마치 하(河)에서 물 마시고 배를 채우는 것과 같아, 비록 경경(硜硜)한 소인일지라도 말이 미덥고 행실이 과감합니다. 조 선생으로 말하오면 더욱이 아래서부터 배워 올라가는 것을 주로 삼아서, 항상 말씀하기를 ‘학(學)이라 하면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데 벗어나지 않는다. 만약 이를 힘쓰지 않는다면 바로 인사상(人事上)에서 천리(天理)를 구하지 않는 것이니 끝내 소득이 없을 것이다.’ 하여 한 마디 말도 허무(虛無)에 가까운 점이 없었는데 지금 말씀하기를 ‘노ㆍ장이 병이 되어 학문이 깊지 못하다.’ 하시니, 문하의 소자(小子)는 망령되이 생각하기를, 학문이란 인륜(人倫)의 일용행사에서 벗어나지 아니하므로 마음을 보존하여 살피고 또 살펴서 그 일에 익숙한 뒤라야 실지 소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감히 여쭈노니 우리의 학문이 이 밖에 어디 있사옵니까? 지금 선생께서 거리낌없이 저척(詆斥)하시어, 심지어는 이단(異端)에 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시니, 아마도 선생의 크신 도량에 손상될 듯합니다. 원컨대 개유를 주시어 심한 의혹을 풀어주소서.” 하자, 퇴계는 답하기를 “나는 모(某)를 너무도 앙모하는 처지인데 어찌 감히 기탄없이 비난할 이치가 있겠는가? 다만 입에 넘치는 예찬을 잘 못하는 까닭으로 하유(下惟)의 평(評)과 미순(未醇)의 논이 있게 된 것이다.” 하였다.
경오년에 남명이 퇴계가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슬픔을 못이겨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나기도 같은 해에 났고 살기도 같은 도(道)에 살면서 70년을 두고 서로 만나보지 못했으니 어찌 명(命)이 아니랴? 이 사람이 가버렸다 하니 나도 아마 가게 될 게다.” 하였는데, 그 후 두 해가 지나서 임신년에 남명이 돌아갔다.
대개 퇴계가 남명에 대하여 허여(許與)를 아낀 것이 한 마디 말만이 아닌데 남명은 한 구절도 퇴계에 언급한 바가 없었으니, 비단 퇴계만 덕이 순수하여 하자(瑕疵)가 없을 뿐 아니라 남명도 한 점의 시기나 혐오가 없었다는 것을 볼 수 있으니 족히 법을 삼을 만하다. 정한강(鄭寒岡)은 말하기를 “남명이 어찌 동방에 재생할 인걸(人傑)이겠는가?” 하였고, 이율곡(李栗谷)은 말하기를 “세도(世道)를 만회한 공은 아마도 동방 제자(諸子)의 아래에 있지 않을 것이다.” 하였거니와, 그 천 길의 벽(壁)이 우뚝이 서 있는 기상 같은 것은 탐욕한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일어서게 하니 이른바 백세의 스승이라 하겠다. 혹자는 퇴계의 평으로 인하여 마침내 이르기를 “유가(儒家)의 유(流)가 아니요 바로 처사(處士) 중에 협기(俠氣)가 있는 자이다.” 하였으니, 역시 가소로운 일이라 하겠다.
《대학(大學)》에는 “뜻이 진실한 뒤에 마음이 바르다.” 하였지만 뜻은 비록 진실했을지라도 마음은 혹시 정당성을 벗어나는 곳이 있으므로 주자(朱子)는 이르기를 “비록 십분(十分)이 다 맑다 할지라도 그 맑은 이면에는 파랑(波浪)이 움직이고 흔들리는 곳이 있다.” 하였다. 남명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 지나쳐서 음부(淫婦)의 집을 훼철(毁撤)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음부는 비록 가증하지만 집을 훼철하는 일은 자기 임무가 아니라는 점을 자못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그 뇌룡(雷龍)ㆍ계복(鷄伏) 등의 문자를 살펴보면 그 공력을 들임이 각려(刻厲)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일찍이 학자들에게 말하기를 “다만 그 혼수(昏睡)를 깨우치는 데 있을 따름이니 이미 눈을 떴을 경우에는 저절로 천지와 일월을 보게 된다.” 하였으니 이 한 마디 말은 초학의 정침(頂針)이 될 만하다.
[주-D001] 퇴계ㆍ남명(退溪南冥) : 《類選》 卷10上 經史篇9 聖賢門.[주-D002] 뇌룡(雷龍) : 조식(曹植)의 서실(書室) 이름. 곧 뇌룡사(雷龍舍). 《노자(老子)》의 “송장처럼 거하거나 용처럼 나타나고, 못처럼 침묵하다가 우레처럼 소리난다[尸居龍見 淵黙雷聲].”는 말에서 취한 것인데, 조식은 그 곁에 “뇌성이 나면 깜깜하고 용이 보이면 깊다[雷則晦冥 龍則淵晦].”고 써 놓았었다 한다. 《燃黎室記述 卷11》[주-D003] 계복(鷄伏) : 조식(曹植)이 거처하던 정사(精舍) 이름. 자신을 수양(修養)함이 닭이 알을 품는 것과 같다는 뜻이라 한다. 《燃黎室記述 卷11》
ⓒ 한국고전번역원 | 신호열 (역) | 1978
退溪南冥
黃錦溪上退溪書論南冥義理未透退溪荅曰此䓁人多是老莊為祟扵吾學例不深邃何恠其未透也要當取其所長耳
開岩金副學宇宏得見其書大驚乃上退溪書曰
南冥先生之扵右道先生之扵左道如日月然皆以興起斯文為任己士習一變可以至道如飮河充腹雖硜硜小人言行信果曹先生則尤以下學為主曰為學不出事親従兄若不務此是不扵人事上求天理終無所得無一言近扵虚無今乃曰老莊為祟學不深邃小子妄以為學問不出人倫日用間存心省察習扵其事然後為實得敢問吾學此外安在今先生肆然詆斥至比扵異端恐有損扵先生大度願賜開釋以觧滋甚之惑退溪荅曰吾扵某慕用之甚安敢肆然詆斥但不能溢口稱譽故有下帷之評未醇之論耳庚午南冥聞退溪之卒悲悼流涕曰生同年居同道七十年未相見豈非命也斯人云亾吾其逝矣夫越二年壬申南冥卒盖退溪靳許南冥不止一言而南冥無一句及退溪不但退溪純徳無瑕亦可見南冥之無一㸃猜嫌可以為法鄭寒岡有言南冥夫豈東方再生之傑也李栗谷有言挽回世道之功恐不在東方諸子之下若其壁立千仞氣像可以廉頑立懦則所謂百世之師也近世儒者或因退溪之評乃謂非儒家者流即處士中有俠氣者亦可咍耳大學意誠然後心正意雖已誠心或有過當處朱子謂雖十分淸了淸裡面有波浪動盪處南冥惡惡之過而至扵毁撤淫婦家淫婦雖可惡殊不覺毁撤非己任也然觀其雷龍鷄伏䓁文字其用功刻厲可見甞語學者曰只得儆其昏睡而已既開了目自能見天地日月矣此一轉語可為初學頂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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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암집(開巖集) 김우굉(金宇宏)생년1524년(중종 19)몰년1590년(선조 23)자경부(敬夫)호개암(開巖)본관의성(義城)특기사항이황(李滉), 조식(曺植)의 문인. 정복현(鄭復顯), 유성룡(柳成龍) 등과 교유
開巖先生文集卷之三 / 書 / 上退溪先生問目 己巳
선조 | 1 | 1568 | 무진 | 隆慶 | 2 | 45 | 5월, 모친상을 당하다. |
선조 | 2 | 1569 | 기사 | 隆慶 | 3 | 46 | 李滉에게 상서하다. |
宇宏等。考禮謬誤。題奉祀於寫者之右。今悟其非。欲改正。而未知因練祭與大祥之日。孰爲得宜。
答。題奉祀名。朱子家禮。其下左旁。本謂寫者左旁。非有可疑。而後賢又有題神主左旁者。今人多主後出之說。必欲不用朱子說。尋常所未喩也。今若欲改。固當於練祭改之。何必更俟大祥而後爲之。葢大祥改題主時。新主尙在几筳。雖俟其日改題。亦與先世改題。別一節次。均是別一節次。先事而爲之。恐無妨也。
小祥別製服古也。據家禮雖云陳練服。而無別製衣裳之文。又據禮記檀弓練服黃裏註曰。正服不可變。以練爲中衣。承衰而已。今擬不製服。但作練冠去首絰以下。又以練布製承衰之中衣。庶幾從簡而不失存古。
答。小祥不別製服。朱子所以斟酌損益。得時宜之禮。如所示爲之甚當。
朱子云斬衰草鞋。齊衰麻鞋。宇宏等考禮未悉。成服時用藁草鞋。今似不可中改。但按檀弓練有繩屨之文。註云麻繩屨也。欲據此小祥改作麻鞋。
答。小祥改作麻鞋。禮有所未合宜者。中而覺之。據禮而改之。豈有所不可者乎。滉懵於禮學。承問之及。卛爾奉報。汰哉之誚。無所逃免。惶恐惶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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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巖先生文集卷之三 / 書 / 上退溪先生書 庚午
선조 | 3 | 1570 | 경오 | 隆慶 | 4 | 47 | 가을, 대교, 봉교가 되다. ○ 12월, 李滉을 곡하다. |
宇宏等。稽顙再拜言。近日未審台候起居何如。哀苦中仰慕無已。宇宏等罪積不滅。已迫大祥。伏蒙台慈。祗奉几筳。苟存視息。就中仰達惶悚。祥儀有疑處。敢以仰質門下。伏乞一一鑑察。商量折衷而去取之。使迷矇不昧所行。不勝哀幸。餘伏祝爲道崇珍。
問目
家禮祭饌有醋楪。弊家三年之中。只象平目用醬代之。後日家廟常祭當何如。又饌有塩楪而不言設處。丘氏儀節則塩醋二楪。並設於前一行。而亦不設醬。醬者食之主也。於祭不設。抑有何義。
答。只一依禮文塩醋俱設。其設豦。且當從丘氏。然凡飮食之類。古今有殊。不能必其盡同。以今所宜言之。塩不必楪設。各就其器而用之。醬則恐不可不設也。所謂象平日用醬代之者得之。
禫冠用草玄笠。是玄冠極未安。五禮儀用白笠。俗用草笠。不知何据。今欲黲布裏笠如何。
答。草玄笠固未安。五禮儀白笠之制。不知自何時變而爲玄冠也。若此等事。何也皆不能據禮變俗。今不敢硬說。
告祭時。果一大盤。只一器否。盞盤是盞臺否。
答。一大盤。盤中所設。恐不止一器而已。盞盤。應是盞臺。
祝文云㓗牲。無牲云庶羞。今或買肉則從無牲例否。如或殺牛則曰一元大武。鷄則曰翰音可否。家禮祭圖牲無設處。如用之。不知設於何所。
答。牲不特殺則不可用㓗牲等語。士大夫廟祭。不聞以一元大武爲祝詞。假使一時因事殺牛。非平日每祭輒殺牛。則一用此辭而後不用。尤恐不可也。
禮云斷杖而無焚衰之文。今人焚衰。不知何據。曲禮云祭服敝則焚之。衰亦祭服也。焚之似得。或有據禮不當焚云者。其說如何。
答。滉所疑亦如來喩。但若當焚之。家禮何故不言。是未知耳。
禫日變服之節 與下問穌齋者。必大同而本目逸。
答。過詢禫日變服之節。所疑果似有之。然變服禮之大節目。若果祭而後始變吉服。家禮當明言以曉人。豈宜泛然云皆如大祥之儀。其無陳服之文。豈不以喪服之漸變者當陳。吉服之卽常者不當陳也耶。且旣祭之後。改服之節。又當何如而可。納主而後變則是不告神以喪畢之故。抑未納主而吉則吉後都無所爲於告神喪畢之節。恐皆未安也。甞觀禮經自禫卽吉。其間服變之節。殆有五六。周禮文繁乃如此。後世固未可一一而從之。故家禮只如此。今若以尙有哭泣之文。純吉未安。只得依丘氏素服而祭。何如何如。至如上丁國忌之避不避。無所考據。尤不敢輕說。只在僉加商度之宜。竊恐禫古卜日以祭。其無恒定之日可知。退行亥日。甚或可乎。滉不學昧禮。每於誤訪。妄有陳獻。極知愚僭。不加斥外。復此咨問。跼蹐尤深。
雜記曰父母之喪將祭。而昆弟死。旣殯而祭。同宮則葬而後祭。祭謂大小祥之祭也。喪服傳曰有死於宮中則三月不擧祭。今妹歸夫家有年。以喪來此。死於是而殯於是則是同宮也。先妣禫事。爲之三月不擧乎。又卒哭之前。四時吉祭。似不可行。如朔望參謁。薦以時食之類。可以行之無礙否。
答。右禮益所難處。從古禮則葬前未可擧行審矣。但此等事。人家比比有之。練祥等祭。必依古禮葬後而行。或葬不得以時。因此而廢大祭。似甚爲難。竟不知當如何。亦在僉議善處幸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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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집(謙齋集) 하홍도(河弘度)생년 1593년(선조 26)몰년 1666년(현종 7)자 중원(重遠)호 겸재(謙齋)본관 진주(晉州)
謙齋先生文集卷之八 / 行狀 / 松亭先生河公行狀
公諱受一。字太易。號松亭。晉州人。始祖諱拱辰。仕高麗爲左司郞中。奉使契丹。不辱君命。死節。贈侍郞。其後相繼昌顯。爲晉陽大姓之一。七世祖諱游。漢城判尹。是生諱之溟。草溪郡守。生諱現。進士。司醞署直長。生諱應千。進士。生諱瀅。黃澗縣監。妣淑人高靈申氏。生諱希瑞。成均生員。妣宜人漢陽趙氏。生諱沔。戶曹正郞。妣恭人金羅趙氏。寔公之高曾祖考也。王父生員公。從南冥先生遊。交契甚篤。其葬也。先生爲挽曰。八十年非乏。相知一夢如。頭承章甫道。口喫漢江魚。若考塗丹雘。諸孫好禮書。未將携手手。慘執子之裾。又曰。詩書家業上庠生。筐篚朱陽織不成。晧首黃冠推長座。紫花蒼樹認高荊。又曰。當谷於菟非一少。秀庭蘭茁是三多。囷囷釜庾兼僮指。友友常華又蓼莪。曺先生見善如不及。見惡如探湯。視不善若浼。故不善者不敢干謁。而見稱如是。其爲人可想。配趙氏。乃府使瑺之女。乙巳。以直筆見殺璞之從女也。能誦女史內則。通小學家禮四書及詩書史記。非苟知之。亦允蹈之。閨門有法。雖晩生一子。而不專於慈愛。訓諸孫以義。生員公之登龍門見許者。蓋以有宜人之助也。其弟進士諱麟瑞有二子。長諱洛。號喚醒齋。次諱沆。號覺齋。俱受業於曺先生。先生嘗和風月軒韻曰。畫閣東邊鎭一頭。灝風翻了桂宮秋。請看老蛤藏明月。爭似高堂有莫愁。詩意蓋指二子也。喚醒齋以文鳴。爲王子師傅。與栗谷相善。覺齋以問學操身。見重於師門。與德溪,守愚堂,寒岡,東岡,趙大笑軒宗道柳潮溪宗智等諸賢。爲同門友。如速肖之服先聖焉。公以嘉靖癸丑正月廿五日生。五歲始學。七歲受庸學。八九歲讀小學。習灑掃應對進退之節。講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稍長。修弟子之職。餘力學文。日就月將。與二弟及妹壻李公惟諴。同爲擧子業。公尙古爲散文。不脣脣於時體焉。初仲弟諱天一質魯。文不易就。公勸讀論語。旣讀。果疏明精切。先中己卯生員及具慶。庚辰。丁嚴君憂。方其疾革。侍湯劑積日累月。衣不解帶。至以刀刺指出血。灌口得蘇。臨喪。雖極哀毀。而親身之物。必誠必愼。勿之有悔焉。葬之以禮。廬于本居村洞外數百步山麓名曰孝道洞居焉。至終制。除覲親外。一不入私室。越七載己丑。與季諱鏡輝妹壻李公。俱中生員。而公居第二。李公居二等。季氏居喪等。如一家倫次焉。辛卯。公登第。李公繼登別科壯元。卽拜典籍。一家四人。俱侍慈親設慶宴。頭戴天花。手執象笏。紅白牌交列。倡優呈技。樂工奏音。極其榮恩焉。當初筵。先生未至。是宴不可無先生。二公相爭。公曰。吾爲先榜。必當爲首。李公曰。吾爲六品官。必當爲之。久不決。稟于大夫人。夫人曰。吾兒才不及。郞君先升六品。先升者當爲先生。公遂不敢爭。就新進門生之列。人皆歎公爲親屈。而亦以爲稀世之盛事也。旣而先生到。李公同就新進列。公笑謂曰。果孰爲先生。李公亦笑。戊戌。除昌樂察訪。庚子。拜成均典籍。夏初爲靈山縣。以事罷。乙巳。除尙州提督。適柳巡察永詢以公攝都事事。聽其言觀其行。異於凡人。禮遇之。及祭南冥先生。令製祭文。立操筆製進。大加稱賞。不點一字曰。有文如此。而不用於朝廷。置諸閒散可惜。遂與觀海。至河東沂蟾江。八雙溪至靑鶴洞。公有詩。其一聯曰。洞中景物雲兼鶴。座上風流柳與河。蓋指巡相及河綾城應圖也。又令述遠遊錄以進。巡相還朝力薦之。戊申五月。爲慶尙都事。及瓜而遞。不求仕進。家食數年。壬子正月十三日終。其年月日。祔葬于先塋。公娶進士尹彥禮女。乃判尹銑之姊也。生一女歿。後娶參奉孫天齎女。生七子。女四人男三人。女長適贈吏判趙大笑軒宗道之孫徵宋。次適士人李誠勛之子堉。生四男三女。次適府使鄭彥忠之子墀。生三男。次適府使趙英混之子徵杞。生一男。男長曰琬。娶權瀹之女。乃參議濤之從女。而大笑軒之外孫女也。生一男。曰自溫。次曰瓚。娶敎授陳克誠子士人惇之女。生三男四女。長曰自澂。次曰自灝。次曰自渾。女長適鄭世模。次適姜埈。次適李蘤。次適尹思正。季曰瓘。娶掌令權潗女。生一男一女。男曰自濂。女適盧洤。噫。公生長積善之門。旣胚胎擩染。兒時學於祖妣夫人。成童。受敎覺齋。遵行家訓已熟。及聞性理之說。刃迎縷解。如石投水。有聞卽悟。推之於行。已成三分。鷄鳴而起。不撤盥櫛。整衣冠束帶。省問旣畢。身與二弟及家僮。灑掃堂庭。拂床開卷。心眼與口俱到。非父母命召及家有句當之事。必讀書終日。鄕里人來過。必迎接對坐。敍話知寒暄休咎之外。還讀書不及閑語。其人不耐久起去。則必下階及門。拜揖以送。朝夕進飯。退後必在視。而與兄弟聚食一處。食後必與逍遙門庭。昏必定其枕席。退與二弟明燈讀書。夜久乃寢。非祖父母父母有疾。逐日無不皆然。或以差失見責慈堂。則不見於色。輒下階拜伏良久。辭色旣解。然後退私深自責。兄弟日夜同處。鮮入私室。公或有警責。二弟皆俯伏聽受。無一言辨難也。先世所傳家計頗饒。而全不留心產業。衣食所需。一以儉素爲規。其視歌吹鍾鼓鷹犬裘馬。有如土梗然。只於歲時俗節獻壽尊親而已。動靜有節。交遊不雜。奸聲亂色。不入於心。戲謔言笑。不出於口。明窓淨几。讀書著文。爲平生事業。如育妻子御僮僕睦隣族。各盡其道。口不言是邦大夫之是非。耳不聞鄕黨族世之長短。蓋自少學於覺齋。聞道義之說。其虛靈先覺於義理而不覺於人慾。故養拙田園。長於自守而短於行世。誠端雅純儒。而非未世人物也。是以一谷一門中兄弟親屬。連墻接屋諸婦皆和。了無間言。文敎之風。禮讓之和。幾於鄒魯。人皆稱美也。至分家產。極其均平。故李公拜曰。持身正臨財平。眞儒者也。吾豈但視以妻兄耶。中年。連喪祖妣與先妣。廬于孝洞。一如前喪。不脫經帶。足不出洞。喪盡其禮。尤嚴於祭。致其誠敬。雖有大風雨與嚴雪。床卓器皿。必親自滌濯。廟宇亦手自淨埽焉。通前後三喪。居于孝洞松亭下者六十年。故因寓以松亭之號。收錄前後著述詩文。名曰松亭歲課。季氏初諱成一。旣長。出繼喚醒齋。故改以今諱。喚醒齋於壬辰在尙州。聞牧使守城。將入城中。遭賊將遇害。繼子以身翼蔽死之。俱不免。事聞旌閭。喚醒齋於廢朝。以師傅。贈左承旨焉。蓋先世自侍郞以後。忠孝節義有自來。至生員公兄弟。從曺先生遊。覺齋兄弟受業於先生。爲世名人。公之兄弟學於覺齋。篤學力行。成就一箇是。故公嘗有一絶曰。知是不如行是是。已非尤甚彼非非。去非須向已非去。爲是當從行是爲。公其得之於家庭而發之以元祐之風者歟。嗚呼。以如是學行。可以名世。而不幸命途多舛。登第未久。而遭喪亂。不求聞達。不參黨論。位不滿德。仁不大耋以終。可勝歎哉。覺齋嘗遘癘疾於山房。甚危。曺先生奔救藥之。有再生之恩。故最切於親炙。非覲親與疾病憂患。常侍側。凡先生一言一動輒記之。其名言法行純德誼行。足以範俗而師世者甚多。又推師友源淵所及者錄一秩。合爲三卷。傳付于公。故公之祭覺齋文及之。而不保於兵火。可勝惜哉。覺齋捃摭言行錄中作遺事。略曰。天品絶倫。文之以學問。遭世罔極。乃能迓續絶道。以命脈于人。雖曰功不在禹下可也。英氣義氣。凝成爲一軀殼。慈詳惻怛。尤爲軀殼中長物。嗚呼。與恁地才器。而俾不效於世。無所補於民國。豈不惜哉。小子出入門下。受恩蓋深。旣記言行一錄。又述此篇。以廣羹墻。乃作銘云。生際不辰。魚目爲珠。束我黃矢。未血三狐。一筇古道。踽踽無徒。手中明月。傳自唐虞。明月空輝。行人守株。血逬箕垣。愧我亂朱云云。公傳受覺齋指敎。自曺先生門下諸賢沒。知先生者。莫如公也。丁酉。公避亂向左道。適李公惟諴爲榮川郡守。往依焉。未幾。公又爲昌樂丞。謁退溪先生祠下。從趙月川穆遊者久。討論曺先生之與李先生兩間事頗詳。趙月川知其非常人。相與開懷。公曰。曺先生之於李先生。眞可謂神交。非外人所能間也。何以言之。
東岡金副學之弟
開巖金副學宇宏。以曺先生門下。爲靑松府使。又得見於李先生。先生深加禮遇。其上李先生書略曰。
南冥先生之於右道之鳳城。先生之於左道之禮安。如日月然。皆以興起斯文爲己任。倡明道學。士習一變。可以至道。曺先生常以下學爲主。深警之曰。爲學不出事親從兄。若不務此。是不於人事上求天理。終無所得。宜深戒之。小子以爲學問不出人倫日用間。
敬以直內義以方外爲坤道。
忠信進德修業爲乾道。以極於無極太極之妙。又聞此道理。全在日用處熟。動靜語默之間。存心省察。習於其事。然後不知爲實得。此乃實學問也。又聞達道。於博學審問愼思明辨篤行五者。廢其一非學也云云。
庚午歲。曺先生聞李先生卒。悲悼不已。因以流涕曰。同年生居同道。生幷七十。一未相見。豈非命也。斯人云亡。吾其逝矣夫。及明年春。於冊子。精寫士喪禮節要。自初終至終制節目詳明。酌古參今。令人易知易行。以授門人河應圖曰。吾於退翁之終。固知之矣。吾之歿決矣。以此治喪足矣。然則曺先生之於李先生。其神交心契。非人所能問矣。
趙月川多聞其所未聞。深奇之。留連積日。多與唱酬。月川所吟。亦載松亭歲課文集中矣。
[주-D001] 經 : 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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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집(松亭集) 하수일(河受一)생년1553년(명종 8)몰년1612년(광해군 4)자태역(太易)호송정(松亭)본관진주(晉州)특기사항조식(曺植)의 문인
松亭先生續集卷之三 / 附錄 / 年譜
三十一年戊戌 先生四十六歲
登金烏山。過吉先生書院舊址。詩見文集
訪梧月李公於榮川
梧月時爲榮川守。先生往依焉。留止數月。有唱酬諸作。
贈詩尹佐郞 安國
先時。郭存齋 䞭 趙大笑軒共守黃石山城。城䧟。同時死義。朝廷遣尹佐郞致祭其廟。將行。訪先生於逆旅。先生作詩贈行。見文集
四月。
訪月川趙先生 詩見文集
謁陶山書院。贈詩月川先生。仍論退溪南冥兩先生學問。
先生同月川至陶山書院。瞻拜宮墻。深致生晩之感。有十年不見宮墻恨之句。是夜宿巖棲軒。先生語月川曰。曺先生之於李先生。眞可謂神交。非外人所能間也。近日門生後進。互相短長。以致氣象乖裂。此難於二先生無損益。而斯文之禍。恐自此未已也。吾實痛之。月川曰。何以言之。先生曰。李先生答黃錦溪書。有曰。此等人多是老莊爲崇。於吾學例不深透。金開庵適見其書。大驚。上書李先生。略曰。南冥之於右道之鳳城。先生之於左道之禮安。如日月然。倡明道學。士習一變。曺先生尤以下學爲主。無一言近於虛無寂滅。而先生肆然斥之以異端。曺先生聞之。必不爲意。於先生安乎。李先生答曰。吾於曺某。慕用之甚。安敢肆然詆斥。辛未歲。曺先生聞李先生歿。悲悼不已曰。生同年居同道。生竝七十。一未相見。豈非命也。斯人云亡。吾其逝矣。及明年春。精寫士喪禮以授門人曰。吾於退溪之終。已知之矣。然則二先生神交心契。豈外人所能測哉。月川聞之。深以爲然。詳見先生日記及謙齋所撰先生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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嶺南人物考 卷一 / 安東一 / 金宇宏
金宇宏字敬夫, 號開巖, 義城人。 府使希參子。 中宗甲申生。 明宗壬子司馬魁, 丙寅文科。 歷翰林、三司、舍人、大司諫、大司成、監司, 至副提學。 宣祖庚寅卒。 享尙州涑水書院。
乙丑, 文定王后陟遐, 公通告于道內, 倡疏請斬妖僧普雨, 伏閤一月, 疏凡二十二上, 而疏本多出公手。
退溪李先生答公書曰: “往年在京, 得見盛策, 信知名下無虛士。 玆承手札, 理趣詞彩, 粲然動人, 不勝珍服。”
宣廟將移奉安嬪之祠於大院君之廟, 使河原君主之。 公時爲應敎, 與同僚上箚陳違禮經、壞宗法之失。
嘗於筵中進曰: “殿下聖量未弘。” 上怒詰問: “量未弘何事?” 對曰: “卽此下敎, 亦其一也。” 天威少霽, 命賜醞。
公爲忠淸監司, 行部時, 有一賈人乘馬犯轎, 從者欲治之。 公曰: “此必狂易, 不久當死。 吾不欲殺人, 置之。” 其人果墮馬死。
癸未, 拜副提學, 時公論李栗谷珥更張無漸, 見忤外補。 時公弟東岡及他被斥者四十餘人。
早遊退陶、南冥之門, 又有賢季, 相與切磋, 道學文章, 師表一世, 淵源之正, 有自來矣。 權相一撰行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