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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기약도 없이 국민들의 숨통을 옥죄고 있는 느낌이다. 참고 견딜만하여 조금 한숨을 돌리고 있으면 불쑥 어디에선가 고개를 쳐들고 날 잡아잡수 하는 식으로 얄밉게 영역을 넓혀 가고 있는 것이 코로나19의 요즘 추세다. 엊그제부터는 신규 확진자가 3백 명을 넘어섰을 뿐만 아니라 지역의 발생자가 361명이라는 데는 경악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시간과 공간의 차이가 없이 모든 지역이 감염 위험지역으로 간주 되고 있다는 사실이 공포스럽다. 이에 수도권은 하루 평균 확진자가 100명을 넘어서자 거리두기 1.5단계를 실시키로 하였다는 소식이다. 안 그래도 요즘 웬만한 사람들은 외출의 자유를 잃고 ‘집콕’ ‘방콕’으로 날 밤을 세우려니 그 답답함이야 형용을 불허한다. 그러자니 자연 가슴이 먹먹해지고 기분은 울분으로 가득차게 되며 이윽고 암울한 우울증으로 근래에 들어 정신신경과를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는 소문이다. 그렇기도 하려니 싶은 생각이 든다. 12월이 되면 하루 평균 확진자가 6백 명이 쏟아질 수 있으며 1~2차 유행을 뛰어넘는 제3차 대유행이 될 수 있다고 방역 당국이 경고를 하고 나선 판이다.
이런 요즘 문득 사람들은 현실을 무슨 낙으로 살아가나 궁금해지게 된다. 사지육신이 병든 나 같은 몸으로야 어디 몸을 나댄다는 것이 언감생심이려니 그렇다 쳐도 건강한 신체에 흠없는 정신을 지닌 하많은 사람들은 요즘 대체 어떻게 시간들을 채워 보내는지 우정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물론 일터가 있고 생계를 위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야 말해서 무엇하랴만 일선에서 은퇴하여 노년을 보내야 한다든지 오랜 실업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전전긍긍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마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마치 지옥에 갇혀 있는 느낌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도 해본다.
나의 경우는 그래도 오랜 습관으로 몸에 익혀진 활동이 있고, 좋아하는 취미생활도 있으려니 하루해를 보내는 것이 그리 고통스럽지는 않다. 시간은 나이에 비례한다고 했던가. 50대는 시속 50키로로, 60대는 시속 60키로로, 70대는 시속 70키로나 된다니 말이다. 저녁노을이 질 때가 되면 어느새 하루해가 다 갔나 싶어 망연해질 때가 있다. 어떻게 하루해를 다 보냈는지 몰라 암담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아침, 잠에서 깨어나면 맨 먼저 TV나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소식이 뭐가 있나를 살피는 일은 이미 굳어진 습관으로 일상에 자리 잡았다. 인터넷신문의 모든 면을 살피는 일이 결코 수월하거나 간단한 일은 아니다. 사설을 비롯한 오피니언 면은 거의 빠짐없이 챙겨 보는 터이기에 사념하고 기억해야 할 일도 많다. 대체로 문자를 대하는 나의 자세는 오랜 독서를 통한 버릇이 굳어져 정독을 하는 편이어 시간이 꽤나 오래 걸린다. 한두 곳 신문사의 뉴스를 훑어보는 데에도 두세 시간은 족히 걸린다. 글자를 읽는 일이 피곤해지면 다음은 CD를 꽂아 음악을 듣거나 TV로 시선을 돌린다. TV에서 주로 자주 보는 프로는 시사프로이고 이따금 건강을 도모하는 프로도 관심 있게 챙겨 보는 셈이다. 물론 오락프로도 드물지 않게 잘 본다. 소문난 드라마도 이따금 씩은 마음에 새겨 챙겨 보는 편이다. 그다음으로는 사다 둔 신간 서적을 찾아 독서에 열중하는 일이다. 그래야 세상이 어떻게 변화돼 가는지를 깨달을 수가 있고 구태의연하게 굳어진 두뇌에 신선한 사고를 주입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가능하면 변화되어 가는 추세에 머리와 가슴을 맞추려 애를 쓴다. 남들이 들으면 황당해 하겠지만 로맨스 그레이로서의 꿈과 낭만도 잃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자신을 가꾸려 한다. 몸은 따르지 못해도 마음만은 청춘이고 싶다는 얘기다. 이것이 곧 반윤리적이거나 반도덕적인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요즘 나는 일곱 살짜리 손주의 생각과 감각을 맞추려 저절로 자신을 유아로 변신 중이다.
그럴 즈음 최근에 나는 자신도 모르게 종전과는 묘하게 변해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흠칫 놀라워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취미이거나 기호(嗜好)에 속하는 일이기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관심 밖에 있던 우리의 대중음악에 흠뻑 빠지게 됐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어찌 보면 영혼의 사치이거나 허영이기도 하겠지만, 자칭 지식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이라면 음악을 언급할 때 냉큼 클래식을 들먹이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그런 사람에게 딴따라로 불리는 대중음악을 좋아한다면 아닌 말로 격조 낮은 현대인으로 비웃음을 당할까 봐 마음속에 갈등이 없을 수 없을 듯이 여겨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지난여름 오랜 장맛비에 기분은 꿀꿀해지고 소일거리는 없는데 기분조차 울적하여 TV를 튼다는 것이 종편 방송인 TV조선의 ‘사랑의 콜센터’라는 프로를 틀게 됐다.
이 프로는 TV조선이 《내일은 미스터트롯》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방송되었던 오디션 프로그램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었다. 《내일은 미스터트롯》은 역대 케이블TV 최고 시청률과 《1박 2일》에 이어 역대 예능 시청률 2위를 가히 폭발적으로 기록한 프로그램으로 널리 국민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었다. 거기에는 최종 경선에 오른 7명의 가수가 있었는데 이들이 재출연한 예능프로가 바로 ‘사랑의 콜센터’였다.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최고 가수(眞)로 뽑힌 임영웅을 비롯, 영탁, 이찬원, 김호중, 김희재, 장민호, 정동원 등이 펼치는 노래의 향연은 그야말로 꿀꿀하게 숨막혀 있던 요즘 일상의 답답함을 한방에 날려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나는 이들을 7공자라 이름 붙였다. 이들이야말로 희미히 식어가는 대한민국의 노래 트롯에 뜨거운 새바람을 불어넣어 제2의 트롯 전성기를 이끌어갈 다음 세대 스타로서의 역할을 유감없이 드러낸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들이 펼친 트롯의 열풍이 얼마나 강렬했으면 나와 인연된 사람들과 카톡이나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에서까지 화제로 등장하기까지 했을까. ‘너는 누구를 좋아해?’ ‘나는 임영웅’, ‘어째서?’ ‘따뜻한 감성이 가슴에 다가와’ ‘나는 영탁’ ‘노래라면 역시 클래식을 전공한 호중이 좋지 않을까?’ ‘동원이는 그 어린 게 어쩌면 어른스럽게 노래를 잘 부르지?’ ‘그 잘생긴 장민호는 왜 그 나이까지 장가를 못 갔을까?’ ‘나는 희재가 군복을 입고 나왔을 때 어쩐지 좀 느끼하게 느껴져 호감이 덜 갔는데 군복을 벗고 나니 사람이 훨씬 나아 보이던데…’ 사람 보는 안목도 천차만별, 자신들 나름으로 이들을 좋아하고 평가하는 기준도 가지각색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나의 아내가 친애하는 가수는 ‘영탁’, ‘왜 걔를 좋아하는데?’ ‘씩씩하고 성격이 좋아 보이잖아?’ ‘내가 봐선 7공자 모두 성격이 좋고 씩씩해 보이던데?’ 내가 잘 아는 어느 교회 권사님은 ‘영탁’과 ‘호중’을 좋아한다고 실토했었다. 성가대에서 찬송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음악을 했던 가수가 눈에 밟혔던 모양이었다. 아무려나 암울한 이 시절에 절망하고 있던 사람들의 콱 막힌 가슴을 뻥 뚫어주고 짙은 우수를 담은 얼굴을 밝은 웃음으로 바꿔주는 매력에 국민들은 열광해 보였다. 그뿐만 아니었다. 신청곡을 통해서 자식을 하늘나라로 보낸 엄마의 슬픔을 다독여 주고, 병석에서 투병하는 사람의 절망과 고통을 위로해 주며, 희망을 노래해 주는 그들이 나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어느 신청인은 효심으로, 어떤 신청인은 사랑과 감사를 담아, 제각각 사연을 담아 듣고 싶은 노래를 신청하면 들려주는 이런 프로그램이야말로 코로나19로 망가진 일상과 시대의 어둠을 밝은 소망으로 대치하는 보람이 있어 실로 너무나 좋았다. 나는 생각지도 못한 어느 순간 트롯의 열렬한 지지자가 되어 있었다. 옹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 문화의 우수함과 거대함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이제사 고백하지만 나는 임영웅이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부를 때는 홀로 뺨에 눈물을 흘리고 있었더랬다. 나의 지나온 삶의 이야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서였다. 소리 나지 않게 나를 울리게 만든 그 노래는 과연 무엇이었나. 그 노래가 어떻게 불려졌기에 나를 눈물짓게끔 감정이입을 이끌어냈을까 의아할 정도였다. 노래도 노래지만, 가사도 가사지만, 그 노래를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여 불러주는 가수의 역량이 그 무엇보다 뛰어나고 훌륭했음이 아닐까 싶었다. 영혼이 담긴 노래, 감정이 녹아있는 노래, 혼신을 다해 불러주는 가수의 열정이 그토록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노래에 흠뻑 몰입하게 한 것이라고 익히 짐작이 되는 터다. 그동안 식자들로부터 하대받고 기껏해야 주정꾼들이 부르는 포장마차 소리로만 여겨왔음이 미안하고 송구했다. 알고 보니 트롯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즐겨 부르는 대중가요가 아니었던가.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외로울 때나 기쁠 때나, 장소가 어디든, 시간이야 어떻든, 밤이든 낮이든 마음이 터질 듯 할 때면 불러대던 우리의 노래가 아니었던가. 우리의 정서에 가장 어울리고, 우리의 신명에 가장 부합하는 노래가 트롯이지 싶었다. 그것이면 족하다. 더도 덜도 말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노래가 무엇인가. 사람이란 슬플 땐 울어야 하고, 기쁠 땐 웃어야 하는 것이 차라리 인간적이어서 좋다. 그러지 못할 때, 분노하면서도 분노를 터뜨리지 못할 때, 억울하지만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을 때 우리는 노래로 감정을 다스릴 수가 있다. 슬플 때의 위로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기쁠 때의 격려가 감동없이 무의미로 전달될 때, 차라리 그때는 노래를 불러 달라고 말하고 싶다. 울고 싶을 땐 울어야 그 슬픔이 치유가 된다. 웃고 싶을 땐 실컷 웃어야 정신위생에 좋다. 그렇지만 우리의 삶은 그 모두를 부정하고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노래로 영혼을 승화시키고 분노로 앓는 가슴을 힐링하게 된다. 그 귀하고 아름다운 존재가 트롯이 아닌가. 이제부터는 나도 자주 우리의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여태 조용히 듣기만을 즐겼지 부를 줄은 몰랐는데 이제부터는 자주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다짐해 보는 것이다. 적어도 흥겹게 흥얼거리기만 해봐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왜? 이 개 같고 지랄 같은 세상을 참고 살으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