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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5.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시23)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2 He lets me rest in fields of green grass
and leads me to quiet pools of fresh water.
3 He gives me new strength.
He guides me in the right paths,
as he has promised.
4 Even if I go through the deepest darkness,
I will not be afraid, Lord,
for you are with me.
Your shepherd's rod and staff protect me.
5 You prepare a banquet for me,
where all my enemies can see me;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and fill my cup to the brim.
6 I know that your goodness and love will be with me all my life;
and your house will be my home as long as I live.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탈북자들은 배 고파서 두만강을 넘은 것입니다.
4,5개의 국경을 넘다가 몇 번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이 땅에 온 것입니다.
그렇게 탈북에 성공해서 국정원에서 식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감수하며 찾아왔던 밥그릇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을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굶어 죽은 우리 여동생 때문에.......
북에 남겨진 아버지 때문에.......
그들의 눈앞에 불고기 잡채 명란젓 김치 된장국.......
그들은 그 자리에서 정말 결정적인 결핍을 경험한 것입니다.
가족들이 함께 배 타고 온 탈북민은 김치와 밥만 있어도 풍성했을 것입니다.(I have everything I need)
사람들이 이 시편의 말씀을 착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짜장면 곰탕 육개장 비빔밥......을 보장해 주시는 것으로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다.
땅.
믿습니다.
지위.
1절의 말씀을 유심히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그가 지금 자신에게 부족함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잘 믿었더니 하나님께서 빌딩 한 채를 주셔서 부족함이 없게 해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목자로써 함께 하실 때 그 관계를 인해서 물질적인 결핍이 문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목자이시니 초가삼간도 아쉬울 것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셨으니 혹은 내가 죽을 노력을 다해서 얻은 것이니 국정원 식탁에서 비벼 먹고 말아 먹고 또 트림을 꾸역하고 나오는 사람은 어디 모질란 사람입니다.
가족 생각에 밥 한 술도 뜨지 못하는 사람이 정상입니다.
1.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아쉬움 없어라.
1 The Lord is my shepherd;
I have everything I need.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본인을 사자나 곰이나 표범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양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양이란 참으로 무력한 동물입니다.
그것은 들이받을 뿔도 없고 먹이를 만나면 목덜미를 물어뜯을 송곳니도 없습니다.
더욱이 표범이 나타나도 잽싸게 도망조차 못 하는 것입니다.
그냥 잡아먹히는 수밖에.......
그 뿐 아니었습니다.
한 번은 여름 휴가철에 양을 치는 제 친구가 제주도에 놀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와 이시돌 목장을 들렀는데 친구 막내아들이 양을 향해서 갑자기 달려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양이 뒤집어져서 바둥거리고 있었습니다.
그 양이 이 어린이를 의지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양들은 뒤집어지면 거북이처럼 제 몸도 바로 일으키지 못하는 바보들이었습니다.
마스크 벗고 밖에 나가면 코로나 걸려서 드러누울지 아무도 모릅니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실은 자신이 양과 같이 나약한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하룻강아지가 범에게 달라들면 뻔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인식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전에는 입으로만 내가 양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정말입니다.
저는 양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우리를 보고 한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의지박약이라고 비웃습니다.
어느 불교 강의에서 강사의 멋진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을 죽기로 정해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죽음을 극복하는 것은 되지도 않을 소리라는 것입니다.
되지도 않을 것을 되기 원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소위 도가 튼 사람이니까 죽음이 와도 끄떡없는 사자 흉내를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죽음도 수용할 수 있는 담대한 사자를 만드신 적이 없습니다.
양치기가 필요한 양을 만드셨던 것입니다.
절대왕들의 무덤을 보십시오.
살아있는 사람까지 생매장해서 엄청난 크기의 제 무덤에 묻었던 것입니다.
그것들은 죽음이 두려운 나머지 죽는 순간에도 폭력을 행사했던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 종교가 아닙니다.
태초에 정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를 지으셨던 것입니다.
죽음의 문제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면서 사람에게 풀라고 주신 과제였습니다.
태초의 과제!
그 문제를 푸는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하신 양치기로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입니다.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2 He lets me rest in fields of green grass
and leads me to quiet pools of fresh water.
그렇게 주님을 양치기로 모셨을 때 그 사람이 틀림없이 경험하게 되는 일입니다.
그는 푸른 초장과 물가에 누워서 쉬고 있을 것입니다.
풀이나 물은 양에게는 마시면 좋고 안 마셔도 되는 커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침에 점심에 저녁에 빠짐없이 챙겨 먹어야 할 주식입니다.
즉 양치기는 우리를 물가와 풀밭으로 인도해서 생명을 보장해 주실 것입니다.
이 때 풍요한 물과 풀이라는 물리적인 현실이 생명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하시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양치기 되시는 그 관계가 우리의 생명을 보장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인도하심에 우리를 맡겼을 때 우리는 생명의 풀밭과 물가에 누워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종말의 때에 생명을 죽이려 드는 사탄이 하는 일은 양치기를 혼돈하게 하는 일입니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에게도 속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6.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는 '내가 그리스도다' 하면서, 많은 사람을 속일 것이다.(막13:5,6)
그들은 이만희가 그리스도라고 하고 또 문선명이 양치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가짜들이 물과 풀은 가져다주면서 양치기를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종말에 망하는 사람은 양치기를 잘못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마귀를 그리스도로 잘못 알아보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양치기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1.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2.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의 목자다.(요10:1)
예수님 대신에 자신이 목자라고 하는 사람은 모조리 도둑이나 강도입니다.
종말에 도둑과 강도에게 제 생명을 맡기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한 목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지 그 여부입니다.
15.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요10:15)
그래서 양들이 조심할 것은
5.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그런 사람을 보면 도리어 달아난다.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10:5)
첫째로 제 정신이 박힌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볼 것입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하면 도망가야 합니다.
대신에 참 목자를 제대로 알아챘을 경우 그 사람은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할 것입니다.
그 음성에 절대복종하는 것입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3 He gives me new strength.
He guides me in the right paths,
as he has promised.
우리는 어디에서 왔으며 또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태초에 사람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보리수 밑에서 도를 닦아봐야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 길을 알려주실 하나님의 영을 사람의 구성요소로 삼으셨습니다.
그 영마저 거두어 가신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을 받은 사람이나 태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것과 또 종말로 우리가 영생의 나라에 갈 것을 믿을 뿐입니다.
우리의 시작과 우리의 끝은 모르는 우리는 우리의 현재 갈 길도 모르는 셈입니다.
현재를 제대로 알고 있다면 누가 주식 투자로 망하겠습니까?
길 가다가 꼬꾸라져서 팔에 기브스하고 다니겠습니까?
돌멩이를 피해 가지.......
사고 날 차를 차비 내고 타지도 않을 것이고.......
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사람에게 유용한 지식은 유일합니다.
나는 양치기가 필요한 양이라는 인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태초에 우리를 만드셨다는 것은 대단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첫째 의미는 그 분에게는 엄청난 능력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 한마디에 한라산이 생기고 한강이 흘렀던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하나님이 못하실 일이 없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그로부터 탄생했다는 것은 우리가 그 분과 특별한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태껏 살면서 나의 변화를 가장 크게 경험했던 두 가지의 사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결혼입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갖게 된 일입니다.
아이를 갖게 된 후,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내 쓸 돈을 줄이고, 안 할 고생도 아이들 때문에 찾아서 하고 있었습니다.
잠도 못 자고 아이를 껴안고 응급실을 향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나에게만 쓰던 신경을 아내에게 쓰고 아이들에게 쓰게 된 것입니다.
아이들을 향한 희생을 두고 남의 일이라고 억울해 한 적이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변할 줄이야!
우리가 그 분의 손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그 분에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는 희생을 본인의 일로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는 끊을 수 없는 그 분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지으셨다.!”
그렇게 태초에 그 분을 통해서 만들어진 우리의 현재도 그 분이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시는 것입니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3 He gives me new strength.
자동차도 한 400Km 혹은 500Km 가면 주유해야 합니다.
전기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충전해야 합니다.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새 힘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3 He guides me in the right paths,
as he has promised.
하나님께서 우리 갈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당장 우리 길을 이해도 못 합니다.
한국이 잘하는 쇼트트랙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여자 릴레이 준결승 경기였습니다.
이 경기에서도 1등 쯤이야 했는데 경기 도중에 한국 선수가 빙판에서 그대로 넘어진 것입니다.
다음 주자가 달리기는 했지만 벌써 반 바퀴는 뒤 쳐져 있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망한 길로 갔다고 생각했습니다.
선두에 선 캐나다는 기회를 잡았다고 전력 질주했습니다.
강력한 일등 후보인 한국이 따라올 생각도 못 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선두가 마구 뛰니 뒤따르던 선수들이 모두 뛰었습니다.
그 때는 작전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모든 팀이 사력을 다하는 것이 당시의 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그들을 다 따돌리고 일등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 아나운서가 세계 신기록이라고 흥분했습니다.
처음에 한국 선수가 넘어지지 않았다면 작전을 따라서 경기했을 것입니다.
잠시 쉬엄쉬엄 달렸다가.......
그런데 작전도 꼬꾸라지고 사력을 다해서 달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넘어진 것의 뜻도 또 몇 분 후 결승점에서 일어날 일을 상상도 못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한 40년 뒤 죽고 그 후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누리게 될지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천국 길을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한국 선수가 넘어졌을 때 그것이 세계 신기록의 길이라고 좋아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모르는 그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현실에 대한 우리와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서, 제자들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21. 너희 지금 굶주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너희 지금 슬피 우는 사람은 복이 있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고, 인자 때문에 너희를 배척하고, 욕하고, 누명을 씌울 때에 너희는 복이 있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아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다. 그들의 조상이 예언자들에게 이와 같이 행하였다.
24. 그러나 너희 부요한 사람은 화가 있다. 너희가 너희의 위안을 이미 받았기 때문이다.
25.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은 화가 있다. 너희가 굶주릴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 지금 웃는 사람은 화가 있다. 너희가 슬퍼하며 울 것이기 때문이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할 때에, 너희는 화가 있다. 그들의 조상이 거짓 예언자들에게 그와 같이 행하였다."(눅6:20-26)
가난한 것, 굶주린 것, 슬피 우는 것, 미움을 받는 것, 배척당하는 누명을 쓰는 것을 누가 원하는가?
하지만 바로 그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부요한 것, 배부른 것, 웃는 것, 좋은 대우를 받는 것, 그것들이 우리 소원 아닌가!
그 자들에게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복을 화로 알고 피해 가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어거지로 하나님의 나라까지 끌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끌려가는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편의 의지에 의해서
3.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3 as he has promised.
우리는 타자의 뜻에 따라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가는 길입니다.
아주 수동적이 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자신을 사자라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갈 수 없습니다.
4.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위로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4 Even if I go through the deepest darkness,
I will not be afraid, Lord,
for you are with me.
Your shepherd's rod and staff protect me.
IMF를 아실 것입니다.
지금 우리 정부가 IMF로 갈 그 짓거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 때 저 같은 시민은 전혀 그것을 눈치도 못 채고 있었습니다.
날벼락이었습니다.
당시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양복 입고 출근 시간에 남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퇴근 시간에 맞추어서 집에 돌아간 것입니다.
차마 가족에게 직장을 잃었다는 소리를 못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자살했습니다.
그런데 이 때 교회 다니던 사람들에게는 IMF가 피해 갔습니까?
가소로운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만사형통은 없었습니다.
제 친구도 저보고 같은 교회 집사님이 자살했다고 말했습니다.
그 분이 그런 결정했던 이유는 IMF로 본인의 회사가 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IMF를 맞았을 때 전혀 다른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정말로 억울하게 매를 맞고 착고에 채여 옥에 갇혔는데 거기서 정말로 찬송하고 정말로 기도했습니다.
박수까지 치면서!
바울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다른 것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이 그와 함께 하심이 그의 눈에 보였던 것입니다.
4. 주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4 for you are with me.
그 친구 교회 집사님은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강대상 앞에서 두 손을 들고 앞뒤로 몸을 흔들면서 입으로 무슨 고백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의 눈에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불행의 원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IMF를 여지없이 내리치실 것입니다.
그것으로 양의 길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IMF라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가 똑같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알기로 그 만사형통이라는 종교 전문 용어는 무속 종교 용어입니다.
목사가 아닌 무당이 주로 쓰는 용어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세상과 같은 죽음의 그늘의 골짜기 현실이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그늘 골짜기가 그에게 없다니 그 반대입니다.
놀이공원의 롤러코스터는 가장 위험해 보이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도록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양치기가 계시니 안전하다는 것을 신뢰하므로 돈 내고 그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죽음의 위험이 그와 같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는지 없는지 아시기 위해 그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에 우리를 수시로 태우시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가짜를 진짜에서 골라내시는 것입니다.
5. 주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5 You prepare a banquet for me,
where all my enemies can see me;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and fill my cup to the brim.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반드시 원수가 있습니다.
그 원수놈의 파괴력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과 맞짱 뜰 생각조차 못 하게 되는 원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급에서 종살이했습니다.
물론 그 때의 원수들은 바로와 독재를 돕는 하수인들이었습니다.
검찰과 권력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원수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대로 당하고만 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그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수의 군대를 수장시키시고 홍해는 말리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바다 앞에서 잔치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보다 더 끈질기고 지독한 원수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탕자는 제 상속받을 것을 아버지께 미리 챙겨서 먼 나라로 갔습니다.
거기서 아버지의 간섭을 떠나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밥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돼지 사료를 훔쳐 먹다가 돼지 주인의 발에 걷어차였습니다.
이것은 모조리 자신이 한 결정의 결과였습니다.
그 때 아버지 집에 돌아가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원수 때문이었습니다.
나라는 원수입니다.
나라는 원수는 나를 망하게 하는 꼭 그 일을 골라서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서 집을 향했습니다.
마을 입구에 왔을 때 멀리서 아버지가 달려와서 그를 껴안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자신이 행했던 원수 짓을 아버지는 문제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가장 귀한 손님으로 대접하신 것입니다.
5.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5 you welcome me as an honored guest
탕자는 자신의 존재를 아버지의 자비 안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그가 돼지우리에서 고백한 자신은 아버지 집의 종에도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아버지가 껴안으셨을 때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의 코로는 돼지똥 냄새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하나님 나라의 잔치 자리에 환대를 받는 존재였습니다.
똥냄새가 나는 여전한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우리의 그리스도로 그 관계를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과의 그리스도 관계를 인정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형식적으로 잔치를 베푸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에게 베푼 그 잔치는 충만했던 것입니다.
5. 내 잔이 넘칩니다.
5 and fill my cup to the brim.
6.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6 I know that your goodness and love will be with me all my life;
주님 때문에 푸른 풀밭에서 잔잔한 물가에서 편히 쉬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의 그늘 골짜기에서 지팡이와 막대기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죽음의 그늘 골짜기도 푸른 풀밭이나 잔잔한 물가와 다름없게 하신 것입니다.
IMF 때에도 주님이 옆에 계셨고
그래서 매맞고 착고에 차여 감옥에 들어가도 거기가 찬양할 장소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싫어서 먼 나라에 갔다가 돼지 똥에 구르고 왔는데 그 분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는 자신의 삶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의 인도가 보장되었다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이 그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6. 나는 주의 집에서 영원토록 살겠습니다.
6 and your house will be my home as long as I live.
교회 식당에서 교회 점심으로 짬뽕 끓일 것인가 짜장면 비빌 것인가
된장국에 소금은 얼마나 더 쳐야 하나
그러다가 뒷담화하고 삐지고
알토 할지 소프라노 할지
교회에 그랜드 피아노를 바칠지 강대상의 커텐을 헌납할지 그런 복잡한 것들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알아주는 주인공이 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매서운 추위가 갔으니 봄볕 따스히 드는 공원의 의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에 앉아서 졸기 위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했으니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는 교회의 장의자에 자신을 앉혀두기를 원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서 봄볕을 쬐면서 졸 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입니다.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알아주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들리는 교회의 장의자에 앉아 영혼이 쉬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양치기를 내 안에 모시며 그 양치기 앞에서 전적으로 수동적 태도를 취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적극적으로 일하는 마르다에게 이 마리아가 더 좋은 것을 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입니다.
마리아는 교회 봉사는 않고 강대상에서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마르다보다 훨씬 좋은 것을 택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