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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潭陽)
의암서원(義巖書院) 만력(萬曆) 계축년에 세웠다. 숙종 신유년에 사액하였다. : 유희춘(柳希春) 을사년의 명신(名臣)이다.
귀산서원(龜山書院) 갑신년에 세웠다. : 송순(宋純)ㆍ송정순(宋廷筍) 호는 물염(勿染), 벼슬은 예조 정랑(禮曹正郞)이다. ㆍ김언욱(金彦勗) 호는 서석(瑞石), 벼슬은 사평(司評)을 지냈다. ㆍ김응회(金應會) 호는 청계(淸溪), 벼슬은 별제(別提)를 지냈다. ㆍ이안눌(李安訥)ㆍ나무춘(羅茂春) 호는 구봉(九峯),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ㆍ송희경(宋希璟) 호는 노송(老松)이며 벼슬은 판결사(判決事)이다. ㆍ송징(宋徵) 호는 율옹(栗翁), 진사이다. ㆍ김대기(金大器) 호는 만덕(晩德), 처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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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39권 / 전라도(全羅道) / 담양도호부(潭陽都護府)
《대동지지(大東地志)》
【사원】
의암서원(義巖書院) 선조(宣祖) 정미년에 세웠으며, 현종(顯宗)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유희춘(柳希春) 자는 인충(仁冲) 호는 미암(眉巖)이며, 선산(善山) 사람이다. 벼슬은 행 대사헌(行大司憲)이고, 좌찬성(左贊成)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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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遜齋集) 박광일(朴光一)생년1655년(효종 6)몰년1723년(경종 3)자사원(士元)호손재(遜齋)본관순천(順天)특기사항송시열(宋時烈)의 문인.
遜齋先生文集卷之八 / 祭文
龜山祠東岳奉安祭文 *崇奉四賢 一堂幷享
龜山祠瑞石奉安祭文 *四賢有祠
春秋祭享祝文 *東岳 瑞石 淸溪 九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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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앙집(俛仰集) 송순(宋純)생년1493년(성종 24)몰년1582년(선조 15)자수초(守初)ㆍ성지(誠之)호면앙정(俛仰亭)ㆍ기촌(企村)본관신평(新平)시호숙정(肅定)
俛仰集卷之五 / 附錄 / 有明朝鮮國。故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春秋館事。企村先生宋公家狀。
又五十年肅宗甲申。士林始建
龜山祠于府西南木山面藍山里古餘溪上東距亭二里許。
旣又以老松及李東岳,安訥與夫鄕宋勿染亭廷筍,金淸溪應會,金晩德大器,金瑞石彥勖,羅九華茂春,宋栗翁徵。次第追享。東岳。本府名宦也。栗翁公。伯父白圭堂礪曾孫也。
公少而孝于考。老白首。事妣益匪懈。其喪也。在墓廬惟謹。其祀也。幷朔望不缺。以至祖先忌辰。雖八九十。猶必誠虔。而待子弟以和。御奴僕以寬。或有過。不喜笞朴。亦不深探其情原。其天性忠厚而正直。弘大而確質。自鄕里應接。曾不以貴賤有所親疏。故上下老少。咸得其歡心。推而及於親民按部。用人論事之際。所急者化俗而不流於弛緩。所嚴者斥姦而不偏於刻訐。雖其始危於世節。中困於安老。終忤於元衡及芑。有事則必見斥。有斥則猶不屈。宜若不止一竄。而卒之身與名俱享。卓然爲己卯乙巳前後慘禍以外完人者。詎無以哉。古云。能柔能剛。又云。不激不隨。視履考祥。公蓋其人。而由古迄今。歷選不與倫擬。則▣謂之無多可矣。乃世之君子。觀公逶迤治亂之間。不暇舒究其然。而遽有以責備。何也。若忍齋與其從弟判書曇。在明宣授受之交。致士類新舊之岐。此自洪氏一邊之得失耳。公以舊人。重以故交。以憲長宿硏。一爲其所引。亦何至於攻新進謀偕。有如栗谷李文成先生珥經筵日記之云乎。若果然也。卽當日新進在所謀攻之中者。莫松江先也。而松江于公有祭文。無怨可知。意者栗谷論公。亦猶其論吳公謙者。而尺度所存。非後學可窺。抑日記所載。往往出於傳聞。而附春秋疑信之例歟。今公詩文遺藁。或當日手編。或後人續裒者。參諸公私評議。誠鑿鑿可徵。尙論之士。其庶有釋然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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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徵 1564 1643 新平 信之 栗翁
면앙집(俛仰集) 송순(宋純)생년1493년(성종 24)몰년1582년(선조 15)자수초(守初)ㆍ성지(誠之)호면앙정(俛仰亭)ㆍ기촌(企村)본관신평(新平)시호숙정(肅定)
俛仰集卷之五 / 附錄 / 議政府右參贊俛仰亭先生年譜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 사림들이 담양 木山面에 龜山祠를 세우고 제향하다.
甲申崇禎紀元之七十七年。肅宗三十年 先生卒後一百二十三年。士林刱龜山祠于府西南十里木山面藍山里。卽古稱餘溪之水上也。 以老松公及故府使東岳李文惠公安訥與夫鄕賢宋勿染廷筍,金瑞石彥勖,金晩德大器。先後享之。
미암집(眉巖集) 유희춘(柳希春)생년1513년(중종 8)몰년1577년(선조 10)자인중(仁仲)호미암(眉巖), 연계(漣溪)본관선산(善山)시호문절(文節)특기사항최산두(崔山斗), 김안국(金安國)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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眉巖先生集附錄卷之二十 / 義巖書院丁享文 金大器
伏以學際天人。道接關閩。宗匠士林。儀表搢紳。玆値中丁。宜我精禋。謹以牲幣醴齊。式陳明薦。尙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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眉巖先生集附錄卷之二十 / 義巖書院禮成祝文 晩德金大器
伏以神姿嶽峙。理竅天通。訓詁秦餘。師範魯蒙。關西夫子。海東晦翁。王者之傅。士林之宗。一代高山。萬古淸風。仁祠有光。香火無窮。玆値仲丁。用伸卑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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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 제47권 / 부록(附錄) / 문인록(門人錄)
김대기(金大器)
자는 옥성(玉成)이고 호는 만덕재(晩德齋)이며, 정사년(1557, 명종12)생으로, 광산인이다. 혼조(昏朝) 때 과거 공부를 폐하였다. 반정 뒤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담양(潭陽)의 구산사(龜山祠)에 향사되었다. -담양에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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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독재전서 제18권 / 부록(附錄) / 문인록(門人錄)
김성영(金聲永) 호는 송헌(松軒)이고, 관향은 광산이며, 만덕(晚德) 김대기(金大器)의 손자이다. - 담양(潭陽)에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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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구산사에 동악을 봉안하는 제문〔龜山祠東岳奉安祭文〕
공손히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우리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 箕國名宗
안으로는 연로 계승하고 / 內承蓮老
밖으로는 취옹 접하셨네 / 外接翠翁
천품이 중후하고 / 天資厚重
도량이 커서 / 氣宇恢弘
어려서 나라의 인재에 비견되며 / 幼擬國器
이름이 향안에 오르셨지 / 名登香案
경서 읽고 역사서 섭렵하여 / 閱經涉史
막힘없이 꿰뚫었고 / 該洽融貫
천번 만번 읽으며 / 千周萬遍
노력을 백배로 기울이셨네 / 百倍其功
두텁게 쌓고 넓게 발하여 / 厚積博發
울림과 소리 컸으니 / 響大聲宏
벼슬길에 나아가 / 致身雲路
세상의 거장 되셨다오 / 爲世鴻工
연성공에게 한번 읍하자 / 一揖衍聖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였고 / 聲動中華
바탕과 문식 갖춰져 / 有質有文
명실상부하였네 / 名實不差
혼란한 시대 만나 / 時丁昏亂
진심으로 비분강개하였고 / 慷慨由衷
서궁을 바라보며 / 瞻望西宮
더욱 슬퍼하여 / 益增悲惋
문 닫고 일을 제쳐 둔 채 / 杜門謝事
한밤중 길게 탄식하셨네 / 中夜永歎
소리와 기운에 드러내지 않고 / 不動聲氣
인륜을 부지하시는 가운데 / 扶樹人紀
하늘의 태양 거듭 밝아져 / 天日重明
다행히 태평성세 만났지요 / 幸遇盛際
나라 위해 온 힘 다해 헌신하고 / 鞠躬盡悴
험하고 어려운 일 피하지 않았는데 / 不避危難
북쪽으로 귀양 가고 남쪽으로 옮기면서 / 北謫南遷
험난함 많이도 경험하셨습니다 / 飽經險艱
망극한 시대 만나 / 遭時罔極
남한산성으로 어가 호종하여 / 扈駕南牒
통곡하며 하늘을 부르짖었으나 / 痛哭號天
하늘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았지요 / 天不我卹
돌아와 동강에 누워 / 歸卧東岡
초복으로 돌아오셨고 / 乃反初服
척화해야 한다고 남긴 경계 / 斥和遺戒
가을 햇살처럼 늠름합니다 / 凜若秋日
충효의 큰 절개는 / 忠孝大節
사람들 이목에 가득한데 / 照人耳目
정려문은 / 旌表門閭
위대한 사업에 비해 부족하고 / 事偉報嗇
여전히 향사하는 전례에 대해 / 尙厥祀典
사림은 답답해하였습니다 / 士林抑鬱
돌아보건대 우리 추성은 / 顧我秋城
공이 은혜를 끼친 고을인데 / 遺惠之邑
사람들 입에 성대히 오르내려 / 豐碑在口
지난일이 어제인 듯합니다 / 往事如昨
부임하신 초기에 / 下車之初
도덕적 교화 우선시하여 / 德敎爲首
효자 충신으로부터 / 孝子忠臣
열부에 이르기까지 / 爰曁烈婦
공무의 여가에 손수 뇌사 지어 / 公餘親誄
윤리 붙드시니 / 培埴彝倫
백 리 고을이 태고시대가 된 듯하고 / 百里太古
겨울 뒤에 봄이 찾아온 듯했습니다 / 寒後陽春
학교 재정 넉넉히 하여 가르치고 / 贍學設敎
부단히 강학을 권면하니 / 勸講不解
무성의 현가가 / 武城絃歌
여기에 있었나이다 / 於是乎在
문옹이 실행했던 유학의 교화가 / 文翁儒化
어찌 홀로 훌륭하겠습니까 / 奚獨全美
지금까지 향인들이 / 至今鄕人
주신 은혜 잊지 못하는데 / 未忘寄惠
지난번 시호 맞이하기를 / 曩延恩諡
또 이 지역에서 했으니 / 又於此地
선생과 담양이 / 先生於潭
어찌 우연한 관계겠습니까 / 夫豈偶爾
우물 파서 샘을 얻는다고 / 掘井得泉
파로는 말씀하였고 / 坡老有言
자취 남긴 지방에 사우 세운다고 / 遺方建宇
회옹도 말씀하였네 / 晦翁亦云
구산의 남쪽에 / 龜山之陽
높다란 사당 있어 / 有祠翼然
봄가을로 제향 올려 / 春秋揭虔
네 현인 받드나니 / 崇奉四賢
한방에 함께 배향함이 / 一堂幷享
의리상 편안합니다 / 揆義卽便
이에 중정일 맞아 / 玆値中丁
신위를 봉안하고 / 於焉妥神
공경히 희생과 술 받들어 / 敬奉牲齊
정성스레 제사 올립니다 / 式陳明禋
[주-D001] 구산사(龜山祠)에 동악(東岳)을 봉안 : ‘구산사’는 전라도 담양군 수북면 남산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1704년(숙종30)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송순(宋純)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 1710년에 송정순(宋庭筍)과 김언욱(金彦勗)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1713년에 송희경(宋希璟)ㆍ김응회(金應會)ㆍ이안눌(李安訥)ㆍ송징(宋徵)ㆍ김대기(金大器), 1717년에 나무춘(羅茂春), 1765년에 임광필(林光弼)을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맡아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이전에 화재로 전소되어 복원하지 못하였다. ‘동악’은 이안눌(李安訥, 1571~1637)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이다.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32) 문과에 급제했고, 1610년에 담양 부사가 됐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주-D002] 연로(蓮老) 계승 : 이의무(李宜茂, 1449~1507)로,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형지(馨之), 호는 연헌(蓮軒), 이안눌의 고조(高祖)이다. 1477년(성종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ㆍ사헌부 집의ㆍ홍주 목사 등을 지냈다. 1510년(중종5)에 예조 참판에 추증되고, 1516년 예조 판서에 가증되었다. 기품과 도량이 활달하고 시문에 능했으며, 조정에 들어간 지 30여 년 동안 저축이 조금도 없어 가세가 늘 청빈했다 한다.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東嶽) 이공(李公)의 행장〉에 “공은 나이 12세 되던 해에 재종부(再從父)인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휘 필(泌)의 후계자로 입양(入養)되었는데, 이는 연헌(蓮軒)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기 위함이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03] 취옹(翠翁) : 박은(朴誾, 1479~1504)으로, 본관은 고령(高嶺), 자는 중열(仲說),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박은의 딸이 이안눌의 조모(祖母)이다. 1495년(연산군1)에 17세로 진사가 되었고, 이듬해에는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04년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동래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의금부에 투옥되어 사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였다. 박은은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의 대표적 시인이며 절친한 친구인 이행(李荇)이 그의 시를 모아 《읍취헌유고》를 냈다.[주-D004] 어려서 …… 오르셨지 :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東嶽) 이공(李公)의 행장〉에 “16세에 소부(騷賦 시문(詩文))를 가지고 성균관의 시험에서 여러 차례나 장원(壯元)을 차지하였다. 선묘(宣廟)가 하루는 대사성(大司成) 김공 응남(金公應南)에게, 제생(諸生) 가운데 뒷날 문형(文衡)을 맡기기에 합당한 인물이 있는지 하문(下問)하였다. 이에 김공(金公)이 유독 공 한 사람만을 거론하며 답변하자, 선묘가 공의 가계(家系)와 연령(年齡) 등을 물어보고는 대단히 기특하게 여긴 나머지, 공의 성명을 탑상(榻上)에 기록해 두도록까지 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05] 경서 …… 기울이셨네 :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 이공의 행장〉에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랐다. 말을 배울 때부터 바로 문자를 깨우쳤는가 하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글 읽는 소리가 끊어지지 않았으며,……10세 무렵에는 벌써 경사(經史)에 널리 통하게 되었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06] 연성공(衍聖公)에게 …… 진동하였고 :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東嶽) 이공(李公)의 행장〉에 “공은 과거 신축년(1601, 선조34)에 중국에 조회하러 왔을 적에 하례(賀禮)하는 반열 가운데 연성공(衍聖公)인 모씨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노국(魯國)의 공문표(孔聞謤)라는 사람이 관소(館所)의 제독(提督)을 맡고 있었으므로, 공이 전에 들었던 일을 글로 써서 술회하며 제독의 계보(系譜)를 물으니, 제독이 기뻐하며 공과 왕복하였다. 그리고 당시에 연성공의 봉호(封號)를 받고 있던 공윤식(孔胤植) 역시 이 말을 듣고는 서첩(書帖)을 보내 교유하기를 청하였으므로 빈주(賓主)의 예를 갖추어 서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두 분 공(公)도 문장에 자못 능했기 때문에 공의 시문(詩文)을 얻고서는 매우 정답게 창수(唱酬)하곤 하였다. 그래서 제독을 통해 예부 상서(禮部尙書)를 소개받은 덕분에 아무 막힘없이 주복(奏覆)이 행해져 봉전(封典)이 원만하게 이루어졌으니, 이것은 모두가 공이 그렇게 유도하였기 때문이라고 하겠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연성공’은 공자(孔子)의 직계 후예에게 내려 준 봉호(封號)이다. 송 인종(宋仁宗) 지화(至和) 2년(1055)에 공자의 후예들이 선조의 시호(諡號)를 이어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하여 연성공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 시작한 때로부터 1935년까지 그대로 이 칭호가 폐지되지 않고 쓰여졌다.[주-D007] 서궁(西宮) : 1618년(광해군10)에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에 유폐된 것을 가리킨다. 인목대비는 선조(宣祖)의 계비인데, 1608년에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대신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던 소북(小北)의 유영경(柳永慶) 일파가 몰락하고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 등이 득세하였다. 정인홍을 중심으로 인목대비의 폐모론이 주창되었고 이이첨, 허균 등이 적극 주장하였다. 1613년(광해군5) 대북파의 모략으로 어린 영창대군이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며,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 등이 사사(賜死)되고, 1618년 서궁에 유폐되었던 것이다.[주-D008] 하늘의 …… 만났지요 :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仁祖反正)을 가리킨 것이다.[주-D009] 북쪽으로 …… 옮기면서 : 이안눌은 1624(인조2) 4월에 경성(鏡城)으로 유배를 떠났다가, 1625년 봄에 홍천(洪川)으로 양이(量移)되었다. 《澤堂先生別集 卷9 禮曹判書贈左贊成東嶽李公行狀》
《국역 청음집》 제27권 〈예조 판서 동악(東岳) 이공 안눌(李公安訥)의 신도비명〉에, “계해년(1623)에……겨울에 황조(皇朝)에서 관원을 보내어 광해군을 폐치(廢置)한 상황에 대해 조사하고자 하였다. 조사하러 나오는 관원이 철산(鐵山)에 주둔하고 있는 모문룡(毛文龍)의 진영에 도착하였으므로 공을 차임하여 문서를 싸들고 접반사(接伴使) 김덕함(金德諴)과 함께 가서 조사에 응하게 하였다. 그때 마침 이괄(李适)이 영변(寧邊)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공이 있는 곳은 역적들이 있는 곳보다 뒤에 있어 경성(京城)으로 가는 길이 막혀 끊어졌다. 이에 일을 조처하는 즈음에 단지 김덕함 및 모문룡 진영의 접반사로 가 있는 윤의립(尹毅立)과 상의하게 하였다. 그런데 조사받는 일이 끝나고 역적들도 패하게 되어서는, 공이 마땅히 해서는 안 될 말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이에 체포되어 의금부로 끌려와 일이 장차 헤아릴 수 없게 되었다. 공은 대질심문을 받게 되자 아주 분명하게 변론하면서 윤의립을 끌어들여 증인으로 삼았다. 윤의립이 ‘이안눌은 걱정스러워서 한 말이지 다른 뜻이 없었다.’라고 말해서 일이 드디어 정지되고, 단지 북쪽 변방으로 유배되는 데 그쳤다. 그 뒤에 근신(近臣) 및 유생들 가운데 계속해서 공을 위해 해명해 주는 자가 있었다. 2년 뒤에 홍천으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하였다.[주-D010] 망극한 시대 만나 : 1636년(인조14)에 일어난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가리킨다.[주-D011]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어가(御駕) 호종하여 :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 이공의 행장[禮曹判書贈左贊成東嶽李公行狀]〉에, “겨울에 서쪽 변방에서 급보(急報)가 전해지자, 상이 조정 신하 가운데 늙고 병든 자들을 먼저 강도(江都)로 들어가도록 유시하였다. 그러나 공만은 홀로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호종(扈從)이라고 하는 것은 임금의 뒤를 따른다는 말이다. 내가 비록 병이 들었더라도 먼저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하였다. 그러고는 이튿날 대가(大駕)가 방향을 바꾸어 남한산성으로 행행(行幸)하게 되자, 공이 가마에 몸을 싣고 뒤따라 들어갔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12] 동강(東岡) : 동쪽 산비탈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물러나 있는 곳을 뜻한다. 《후한서(後漢書)》 권83 〈주섭열전(周燮列傳)〉의 “선세(先世)로부터 훈총(勳寵)이 줄을 이었는데 그대만 어찌 유독 동강의 비탈을 지키는가?”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주-D013] 초복(初服)으로 돌아오셨고 : ‘초복’은 입사(入仕)하기 전에 입는 옷으로, 여기서는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거했다는 뜻이다.[주-D014] 충효의 큰 절개 : 김상일(金相日)은 이안눌이 충ㆍ효ㆍ공경의 유가(儒家) 윤리적 행위를 그의 삶의 행동 원칙의 중심에 놓으면서도 실천을 중시하며, 이러한 실천 중시는 명분보다는 실제를 중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고 하였다. 《김상일, 동악 이안눌 시세계 연구, 동국대 박사학위논문, 1998》[주-D015] 추성(秋城) : 전라남도 담양(潭陽)의 옛 이름이다. 《국역 택당선생별집》 제9권 〈예조판서 증 좌찬성 동악(東嶽) 이공(李公)의 행장〉에, “경술년(1610) 봄에 다시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1년 만에 또 관찰사와 절도사(節度使)가 공의 치적(治績)을 위에 아뢰자, 위에서 모두 이에 대해 표리를 하사하고 표창하는 유지를 내린 것이 전례(前例)와 같았다. 공은 사납게 위세를 부리는 담양의 풍속을 염려하여 법의 집행을 강화해서 엄하게 단속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주-D016] 무성(武城)의 현가(絃歌) : ‘현가’는 금슬(琴瑟)을 연주하며 노래하는 것으로, 예악(禮樂)의 교화를 뜻한다. 공자의 제자 자유(子遊)가 무성이란 고을의 읍재(邑宰)로 있으면서 현가로 백성을 교화하는 수단을 삼았다. 《論語 陽貨》 여기서는 이안눌이 자유처럼 담양을 예악의 교화로 잘 다스렸다는 의미이다.[주-D017] 문옹(文翁)이 …… 교화 : 문옹은 서한(西漢) 경제(景帝) 때의 인물로, 촉(蜀)의 군수가 되어 교화를 펼치고 학교를 일으켜 문풍(文風)을 크게 떨쳤다. 이를 계기로 무제(武帝) 때에 와서 온 천하에 학교를 설립하게 하였다. 《漢書 卷89 循吏傳 文翁》[주-D018] 우물 …… 말씀하였고 : ‘파로’는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식(蘇軾)을 가리킨다. 이 말은 이안눌의 혼령은 어느 곳이든 존재한다는 말이다. 소식의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에 “공의 신(神)이 천하에 있는 것은 물이 땅속에 있는 것과 같아서 가는 곳마다 있지 않은 곳이 없는데, 조주(潮州) 사람들이 특히 믿기를 깊이 하고 생각을 지극히 하여 쑥을 태위 올리면서 서글픈 마음을 품어 혹시라도 뵙는 듯이 여기니, 비유하면 우물을 파서 샘물을 얻고서 물이 오로지 이곳에만 있다고 한다면 이 어찌 이치이겠는가?”라는 말에서 온 것이다. 《東坡全集 卷86 潮州韓文公廟碑》[주-D019] 자취 …… 말씀하였네 : ‘회옹’은 주희(朱熹)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나, ‘유방건우(遺方建宇)’의 출전은 미상이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오항녕 유영봉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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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구산사에 서석을 봉안하는 제문〔龜山祠瑞石奉安祭文〕
공손히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문정의 후손으로 / 文靖之後
기상이 맑고 바탕은 순수하며 / 氣淸質粹
총명하고 영리하셨네 / 聦明穎悟
스승에게 배우면서부터 / 爰自就傅
스스로 학문에 힘썼는데 / 不勞勤敎
일찌감치 과거 공부 내던지고 / 早拋學業
바른길로 나아가셨지 / 發軔正路
성인의 학문 전공하고 / 專精聖學
오묘한 도 깊이 연구하여 / 潛心妙道
신중히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며 / 愼思明辨
몸소 힘껏 실천하셨네 / 躬行力踐
의리를 들으면 즉시 복종하고 / 聞義卽服
선을 즐겨 게을리하지 않으니 / 樂善不倦
마음에 얻은 바 있어 / 有得於心
외물을 사모하지 않으셨다오 / 無慕乎外
효성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데다 / 孝出天性
예법대로 어버이 섬기니 / 事親以禮
생전 봉양과 장례 제례에 / 生養葬祭
내용과 형식 모두 갖춰져 / 情文備至
향당에선 칭송하고 / 鄕黨稱善
조정에선 표창하였네 / 朝廷褒美
어버이께 한 효도를 / 旣孝於親
임금에게 옮겨 충성하니 / 移忠於君
임진년에 / 時當壬辰
팔도가 전란에 휩싸여 / 八路蕩焚
어가가 파천할 적에 / 玉輦播越
분문하는 사람 없었는데 / 奔問無人
초가집에서 몸을 일으켜 / 起自草廬
서쪽 변방까지 호종하니 / 扈駕西塞
군신간 의리가 중한 법 / 義重君臣
어찌 생사를 따졌으랴 / 曷計生死
중요 직책에 특별히 제수하여 / 特除右職
충절을 장려했는데 / 迺奬忠節
개선하던 날 / 凱還之日
초야로 돌아오셨지 / 歸卧林壑
상서로운 기운 자욱하고 / 瑞藹涳濛
기암절벽으로 둘러친 곳에 / 奇巖壁立
자취 감추고 재능 숨기고서 / 晦迹含光
수신하며 덕을 기르셨네 / 修身養德
밝은 창가 깨끗한 책상에서 / 明窓淨几
경적을 깊이 연구하니 / 沈潛經籍
독락원의 한가한 정취요 / 樂園閑情
안락와의 참된 취미셨지 / 安窩眞趣
후학을 계도하여 / 啓發後蒙
부지런히 가르쳤고 / 勤懇不怠
바른 학문 권면하고 / 勖以正學
사악한 이단 물리치셨네 / 闢其邪異
돌아보건대 우리 향인들 / 顧我鄕人
아직도 남은 향기 입어서 / 猶被餘芬
세대가 멀다 하지 않고 / 莫謂世遠
덕을 형용한 문장 있습니다 / 狀德有文
향선생 별세하면 / 惟先生歿
향사에 제사 지낼 수 있나니 / 可祭於社
정성 올려 제향함을 / 薦誠揭虔
누가 안 된다고 하겠습니까마는 / 誰曰不可
시대가 바뀌고 일이 변하여 / 時移事遷
지금까지 쓸쓸하였으나 / 汔今寂寂
성대한 덕에 무슨 손상 있겠습니까 / 何損盛德
책임은 후학에게 있습니다 / 責在後學
네 현인의 사당 있어 / 四賢有祠
예의상 함께 배향함이 마땅한데 / 禮合竝享
중론이 이미 허락하였으니 / 衆議旣允
더욱 앙모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 益切景仰
이번 중정일 맞아 / 値此中丁
이에 신위 봉안하고 / 於玆妥神
삼가 희생과 술 써서 / 謹用牲齊
공경히 제사 올립니다 / 敬薦明禋
춘추제향 축문
효성과 우애는 타고났고 / 出天孝友
문장은 나라를 빛내시니 / 華國文章
명성이 중국에 알려지고 / 聲聞中夏
은택이 담양에 두루 미쳤네 - 동악 - / 澤遍潭鄕
학문은 염락을 연구하고 / 學究濂洛
충효를 온전히 실행하셨네 / 行全忠孝
자신 없다는 한 말씀 / 未信一言
천고를 격려시킵니다 _서석 / 激勵千古
연원이 있는 학문이요 / 淵源之學
충효의 절개로다 / 忠孝之節
백대에 전하는 고상한 풍도 / 百世高風
우뚝한 추월산에 있어라 _청계 / 有屹秋嶽
흉악한 이들 배척하고 / 排擯群兇
인륜을 부지하셨네 / 扶樹彝常
의로운 기운 열렬하여 / 義氣烈烈
오래될수록 더욱 빛난다오 _구화 / 愈久彌章
[주-D001] 서석(瑞石) : 김언욱(金彦勗, 1509~?)의 호로, 자는 여강(汝强)이다.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으나, 학문에만 뜻을 두어 정진하고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播遷)하자, 초야에서 달려 나가 어가(御駕)를 모셨다. 선조(宣祖)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기어 정6품 장례원 사평(掌隷院司評)을 제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난이 끝나자 고향인 임향(林養) 덕구원(德丘園)에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와 교유하며 지냈다.[주-D002] 문정(文靖) : 김태현(金台鉉, 1261~1330)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이다. 1275년(충렬왕1) 감시(監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6년 도첨의사지사(都僉議司知事)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는 충렬왕의 아들과 왕을 이간시키려는 도당들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와서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가 되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한 뒤 삼사 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충숙왕(忠肅王) 때 평리(評理) 등을 거쳐 중찬(中贊)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온화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저서에 《동국문감(東國文鑑)》이 있다. 김태현의 시호에 대해서는 저본과 다르게 《매호유고(梅湖遺稿)》 〈춘만제산사(春晚題山寺)〉에는 ‘문정(文貞)’으로,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7 〈송당선생 김공 묘지명(松堂先生金公墓誌銘)〉에서는 ‘문정(文正)’으로 표기하고 있어 일치하지 않음을 밝혀 둔다.[주-D003] 스승에게 배우면서부터 : 원문의 ‘취부(就傅)’는 《소학(小學)》 〈입교(立敎)〉에 “여덟 살이 되면 문호를 출입하고 자리에 나아가고 음식을 먹음에 있어서 반드시 장자(長者)보다 뒤에 하여 비로소 겸양(謙讓)을 가르친다. 열 살이 되면 바깥 스승에게 나아가 바깥에서 거처하고 잠잔다.” 하였다.[주-D004] 분문(奔問) : 난리를 당한 임금에게 달려가서 문후(問候)하는 것을 말한다. 주(周)나라 양왕(襄王)이 난리를 피해 정(鄭)나라 시골 마을인 범(氾)에 머물면서 노(魯)나라에 그 사실을 알리자, 장문중(臧文仲)이 “천자께서 도성 밖의 땅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계시니, 어찌 감히 달려가서 관수에게 문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天子蒙塵于外, 敢不奔問官守?]”라고 대답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春秋左氏傳 僖公24年》[주-D005] 독락원(獨樂園) : 송나라 문신 학자인 사마광(司馬光)의 정원이다. 사마광이 일찍이 낙양(洛陽)에 살면서 국자감(國子監) 곁에 땅을 얻어 이 정원을 마련하고, 〈독락원기(獨樂園記)〉를 지어 스스로 한가로이 물러나 지내는 즐거움을 말했다. 《宋史 卷336 司馬光列傳》[주-D006] 안락와(安樂窩) : 송(宋)나라 소강절(邵康節)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생활을 즐겼던 안락와를 말한다. 그가 처음 낙양(洛陽)에 왔을 적에 비바람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오두막을 하나 지어 놓고는 가끔 쌀독이 비어 굶는 생활[屢空]을 하면서도 유유자적하며 스스로 안락선생(安樂先生)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있다. 《宋史 卷427 邵雍列傳》[주-D007] 동악(東岳) :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이며, 좌의정 이행(李荇)의 증손이다. 29세 되던 해인 1599년(선조32) 문과에 급제했고, 1610년에 담양 부사(潭陽府使)가 됐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이안눌의 행장에 기록된 담양 부사 시절의 정사를 보면, “경술년(1610) 봄에 다시 담양 부사로 나갔는데, 부임한 지 1년 만에 또 관찰사와 절도사(節度使)가 공의 치적을 위에 아뢰자, 위에서 모두 이에 대해 표리를 하사하고 표창하는 유지를 내린 것이 전례(前例)와 같았다. 공은 사납게 위세를 부리는 담양의 풍속을 염려하여 법의 집행을 강화해서 엄하게 단속하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澤堂先生別集 卷9 禮曹判書贈左贊成東嶽李公行狀》[주-D008] 자신 …… 말씀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공자가 칠조개(漆雕開)에게 벼슬을 하도록 권하자,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벼슬에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공자가 기뻐하였다는 말이 보인다. 김언욱이 벼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칠조개에 비유한 것이다.[주-D009] 청계(淸溪) : 김응회(金應會, 1555~1597)의 호이다.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시극(時極)이다. 담양부(潭陽府)에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기개가 넘쳐 세간의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1585년(선조18) 을유식년사마시(乙酉式年司馬試)에 진사 3등으로 합격하여 귀후서별좌(歸厚署別座)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부인은 광산 김씨(光山金氏)인데,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이 그의 처남이 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창의장(倡義將)으로 추대되었으나, 처남인 김덕령 부대에 합류하여 공을 세웠다. 이후 김덕령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반역죄로 연루되었을 때 김응회도 함께 붙잡혔는데, 그는 혹독한 고문을 겪으면서도 처남 김덕령의 충성스러움을 주장하며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1597년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에서 왜적을 막다가 순국하였다. 이때 어머니와 김덕령의 부인도 함께 순절하였다.[주-D010] 구화(九華) : 나무춘(羅茂春, 1580~1619)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대년(大年), 호는 구봉(九峯)ㆍ구화ㆍ기지(耆之)이다. 1612년(광해군4)에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의 학유(學諭)ㆍ학록(學錄)ㆍ학정(學正)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이이첨(李爾瞻)이 유생 이위경(李偉卿)을 시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폐출소(廢黜疏)를 올리자, 한림(翰林) 엄성(嚴惺)과 함께 이위경을 탄핵하였는데, 양사(兩司)의 반발로 말미암아 관직을 삭탈당하고 나주의 향리로 돌아갔다. 3년 뒤 복직되어 감찰을 지냈으나, 다시 파직되었다.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으며, 담양의 구산사(龜山祠)에 제향되었다.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황교은 오항녕 유영봉 (공역) |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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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욱(金彦勗, 1509~?)의 호로, 자는 여강(汝强)이다.->김언욱(金彦勖) (1545~1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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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욱(金彦勖) (1545~1596)
조선 선조(宣祖) 때의 문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주(義州)로 파천(播遷)하는 선조(宣祖)를 호종하였음. 정철(鄭澈)ㆍ조헌(趙憲) 등과 교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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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욱(金彦勗)
자(字) 여강(汝强)
호(號) 서석(瑞石)
호(號) 서석산인(瑞石山人)
생년 1545(인종 1)
졸년 1596(선조 29)
시대 조선전기
활동분야 학자 > 유생
1545년(인종 1)∼1596년(선조 29). 조선 전기 유학자. 자는 여강(汝江), 호는 서석(瑞石)이며 서석산인(瑞石山人)으로도 불렸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열 살의 나이에 글을 지었다.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집안이 무척 가난하였으나, 학문에만 뜻을 두어 정진하고, 벼슬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부친이 죽자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죽으로 끼니를 때우며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 사실을 알고 찰방(察訪)을 제수(除授)하였으나 “거짓으로 고을을 다스림은 세상을 어지럽게 하는 근원이 된다.”하며 사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이 파천(播遷)하자, 초야에서 달려 나가 어가(御駕)를 모셨다. 선조가 그 충절을 가상히 여기어 정6품 장례원사평(掌隷院司評)을 제수(除授)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난이 끝나자 고향인 임향(林養) 덕구원(德丘園)에 돌아와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만덕(晩德) 김대기(金大器)와 교유하며 지냈다.
조정에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하고, 구산사우(龜山祠宇)와 오산창의사(鰲山倡義祠)에 배향하였다.
[참고문헌]
輿地圖書補遺篇-全羅道 潭陽
담양삼강록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db.history.go.kr/)
[집필자]
전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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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재집 제8권 / 제문(祭文) / 구산사에 서석을 봉안하는 제문〔龜山祠瑞石奉安祭文〕
공손히 생각건대 선생은 / 恭惟先生
문정의 후손으로 / 文靖之後
[주-D002] 문정(文靖) : 김태현(金台鉉, 1261~1330)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불기(不器), 호는 쾌헌(快軒)이다. 1275년(충렬왕1) 감시(監試)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06년 도첨의사지사(都僉議司知事)가 되어 원나라로 가서 그곳에 머물고 있는 충렬왕의 아들과 왕을 이간시키려는 도당들의 흉계를 밝히고 돌아와서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가 되고, 충선왕(忠宣王)이 복위한 뒤 삼사 판사(三司判事)를 지냈다. 충숙왕(忠肅王) 때 평리(評理) 등을 거쳐 중찬(中贊)에 이르러 벼슬에서 물러났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람을 접대할 때에는 온화하였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저서에 《동국문감(東國文鑑)》이 있다. 김태현의 시호에 대해서는 저본과 다르게 《매호유고(梅湖遺稿)》 〈춘만제산사(春晚題山寺)〉에는 ‘문정(文貞)’으로, 《목은문고(牧隱文藁)》 권17 〈송당선생 김공 묘지명(松堂先生金公墓誌銘)〉에서는 ‘문정(文正)’으로 표기하고 있어 일치하지 않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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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계연보보유 제1권 / 답문(答問)
병술년(1586, 선조19) 7월에 나주(羅州)의 선비인 양산숙(梁山璹)이 찾아와서 5, 6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다. 나는 서로 말해 보고서 그가 학문에 뜻을 둔 선비인 줄 알았는데 그는 공부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친구 중에 훌륭한 자를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김광운(金光運)은 학문에 대한 의지가 대단하고, 담양(潭陽)의 김언욱(金彦勖)은 학문에 전일하게 정진하는 것이 가장 뛰어나며, 송제민(宋濟民)은 지기(志氣)가 맑고 높은데, 이토정(李土亭 이지함(李之菡))에게 배우려고 서당을 세우고 벗들을 모아 그곳에서 독서한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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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암집 제14권 / 일기(日記) 축약함 ○정축년(1577) 만력(萬曆) 5년 우리 선조대왕 10년 / 4월
【14일】 문삼성(文三省)이 자세히 진술하기를,
“이 부서의 유생(儒生)으로서 감시(監試)에 출입하거나 감시에 합격할 만한 사람이 모두 16인이라고 하는데, 박희달(朴希達)ㆍ서후적(徐厚積)ㆍ양홍의(梁弘毅)ㆍ양대의(梁大毅)ㆍ김광택(金光澤)ㆍ최상겸(崔尙謙)ㆍ윤원린(尹元麟)ㆍ김삼달(金三達)ㆍ전대이(全大彛)ㆍ김언욱(金彦勗)ㆍ송진(宋震)ㆍ송방(宋芳)ㆍ김응회(金應會)ㆍ문삼성(文三省)ㆍ김득소(金得紹)ㆍ김용협(金龍協)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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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봉집(霽峯集) 고경명(高敬命)생년1533년(중종 28)몰년1592년(선조 25)자이순(而順)호제봉(霽峯), 태헌(苔軒)본관장흥(長興)시호충렬(忠烈)
霽峯集卷之二 / 詩 / 金彦勗,蔡光門,梁千尋,梁得遇,金百鎰,金礪諸君。來棲環碧堂。其還。以短律一篇。寫懷。
我是逃空者。君爲悅臭人。半生攻篆刻。於道蔑涓塵。旋見垂歸橐。無端濕別巾。荒詞出肝肺。應記老夫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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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甲申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무군사(撫軍司)가 치계하기를,
"광주(光州) 사람 김덕령(金德齡)은 용맹이 절륜하고 지혜가 뛰어납니다. 지금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모집한 의병(義兵)이 이미 1천 인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모두 곡식을 바치고 징병(徵兵)에 누락되었던 사람들입니다. 동궁께서 불러보고 시재(試才)한 뒤로는 원근의 의도(義徒)들이 날마다 더욱 모여들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습니다.
해남 현감(海南縣監) 위대기(魏大器)는 백성을 다스리는 데는 부족하지만 적을 죽이는 데는 능한데 덕령을 따라가 공 세우기를 바라고, 군산 만호(群山萬戶) 이세침(李世琛)도 따라가려 하니, 이 두 사람의 본직(本職)을 체차시켜 들여보내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그리고 전 별좌(別坐) 김응회(金應會)와 전 찰방(察訪) 김언욱(金彦勖)은 모두 덕령과 절친한 사람들로 당초 의병을 모집할 적에도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덕령이 동궁에게 익호장(翼虎將)이라는 호칭을 받아 관군이 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두 물러가려고 하여 사세에 지장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에게 모두 처음 입사(入仕)하는 자의 직을 제수하고 막하에서 종사(從事)하게 하는 것이 온편하겠습니다."
하였는데,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모두 이 장계대로 시행하게 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撫軍司馳啓曰: "光州人金德齡, 驍勇絶倫, 智慮過人。 今在喪中, 募聚義軍, 已至千人, 皆是納米漏落之輩。 自東宮召見試才之後, 遠近義徒, 日益多聚, 此其機會不可失也。 海南縣監魏大器, 短於治民, 長於殺賊, 願從德齡以立功, 群山萬戶李世琛, 亦從往。 兩人本職遞差, 入送便當。 且前別坐金應會, 前察訪金彦勗, 皆德齡切近之親, 當初聚軍, 亦賴此兩人以起事。 今則德齡, 自東宮賜號爲翼虎將, 卽爲官兵, 故兩人皆欲退去, 事勢阻礙。 兩人皆除初入仕之職, 從事於幕下便當。" 備邊司回啓, "皆依此狀啓施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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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14일 己酉 4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김덕령의 참모들을 먼저 지체없이 추국하되 내통 여부를 살펴 회계하도록 전교하다
전교하기를,
"김덕령(金德齡)의 일을 추국(推鞫)하려면 반드시 먼저 막하(幕下)의 부류를 추국하여 실정을 알아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 사람들은 곧 소위 참모(參謀)로서 모두가 족속(族屬)들인데, 다같이 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먼저 추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곧 종사(宗社)와 관계가 있는 것이니 심상한 옥사처럼 시일을 끌며 지체해서는 더욱 안될 것이다. 오래 끌게 되면 간사한 꾀를 서로 내통하여 딱잡아떼고 은휘(隱諱)하여 자복하지 않게 될 염려가 있을 듯싶다. 또 이 사람들이 공초한 말을 보면 추국하는 동안의 은비(隱秘)한 말들을 모두 알고 있으니 자못 의아스럽다. 살펴 보고 회계(回啓)하라."
하니, 아뢰기를,
"역적들의 옥사는 종사에 관계가 있는 것이므로 시일을 지체하거나 끌어서는 안된다고 하신 상의 하교는 지당하십니다. 다만 단서가 드러나지 않았을 적에는 부득이 갖가지로 캐물어 기어코 실정을 얻어내야 하는 것으로 이것 또한 큰 옥사를 신중하게 다룬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큰 옥사를 추국할 때는 반드시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으로써 증거를 삼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번 역적들의 공초에는 단지 ‘김 종사(金從事)’라고만 했으니, 가리킨 것은 반드시 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욱(彦勖)과 응회(應會)가 다같이 성이 김(金)이고 같은 족속(族屬)이므로 구분하여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들이 난처하게 되었기에 이렇게 취품(取稟)합니다.
만일 다같이 막하(幕下)였다는 것을 이유로 모두 먼저 추국하는 것은 역적의 옥사를 추국하는 체례가 아닐 듯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실정을 얻어내게 된다면 그만이지만 자복하지 않은 상황에서 먼저 죽어버린다면 김덕령의 일을 추국할 때 더욱 단서를 얻어내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대저 역적들의 입에서 이런 말 저런 말이 잡다하게 나온 사람으로는 김덕령이 제일이니, 이렇게 드러난 것에 의거하여 먼저 김덕령을 추국하는 것도 안될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반복해서 헤아려보고 의논해 보아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겠기에, 감히 성상께서 재량하시기를 품합니다. 또 죄인들이 공초한 내용을 보면 추국하는 사이의 비밀스런 말들이 많이 누설되고 있으니, 과연 놀랍습니다. 옥사가 이미 오래되어 전파되었을 염려도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반드시 누구에게 들은 데가 있을 것이니, 이 한 조목을 가지고 다시 추국하여 끝까지 힐문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김덕령의 일은 이미 뭇역적들의 공초에 나왔으니 이를 고찰하여 엄하게 추국해야지 전혀 단서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된다. 다만 이번의 큰 옥사에서 물어볼 만한 수종인(隨從人)들을 먼저 추국해야 하는 이유는, 실정과 행적을 모조리 얻어내어 이를 증거로 삼아 괴수를 추국할 바탕을 만들고자 하는 까닭에서이다. 옛적에도 이와 같은 옥사는 그 집의 노복(奴僕)과 비첩(婢妾)들까지도 모두 심문했다. 어찌 단지 공초한 말에 드러난 것만을 증거로 삼겠는가.
내 생각에 이 사건은 처리하기 어려운 것이 아닐 듯하다. 설사 먼저 추국받는 사람이 자복하지 않은 채 먼저 죽어버리게 된다 하더라도, 어찌 이 때문에 주저하면서 그 괴수를 추국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먼저 김덕령을 추국하는 것이 너무 서두르는 일인 듯하기는 하나 만일 김덕령이 속으로는 그의 죄를 인정하면서도 끝까지 숨기고 자복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실정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김언욱(金彦勖)을 먼저 형추하여 끝까지 심문해야 한다고 여겨지는데, 다시 의논하여 아뢰라. 다시 추국하여 끝까지 힐문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傳曰: "欲推鞫德齡之事, 則必須先鞫幕下之類, 以得其情。 況此人等, 乃是所稱參謀之人, 而俱爲族屬, 同出賊招, 不可不先鞫。 此乃係關宗社, 尤不可留時引日, 有若尋常獄事者然。 久則恐有奸謀相應, 固諱不服之慮。 且此人等招辭, 推鞫中隱秘之語, 無不知之, 殊爲可疑。 察而回啓。" 啓曰: "逆賊之獄, 係干宗社, 不可留時引日事, 上敎允當。 但端緖未現, 則不得已多般盤詰, 期於得情者, 亦是大獄審重之意。 且大獄推鞫, 必以招辭現出爲據。 今此賊招, 但言金從事, 則所指必是一人, 而彦勗、應會, 俱是姓金, 同爲族屬, 不可分辨, 故臣等以爲難處, 而有此取稟也。 若以同在幕下之故, 而幷爲先鞫, 似非逆獄推鞫之體。 且如此而得情則已矣, 不服而徑斃, 則推鞫德齡之事, 尤難得其端緖。 大抵狼藉雜出於賊口者, 德齡爲最, 據此現出之處, 而先鞫德齡, 亦無不可。 臣等反覆商議, 未有的見, 敢稟上裁。 且罪人等招辭, 多洩推鞫中隱秘之語, 果爲可駭。 雖獄事已久, 不無傳播之慮, 而必有所聞於人者。 此一款更推窮詰何如?" 答曰: "德齡之事, 已出於衆賊之招, 自當按此嚴鞫, 不可謂全無端緖。 但此大獄, 必須先鞫隨從可問之人, 所以欲盡得其情跡, 以爲憑鞫魁首之地也。 古者如此之獄, 如一家奴僕、婢妾, 無不訊問。 豈但以招辭現出, 爲據而已乎? 予意此辭, 似非難處。 設使先問者, 不服而徑斃, 則豈可因此有所左右, 而不鞫其魁乎? 先鞫德齡, 似爲太遽, 德齡若自知其罪, 固諱不服, 則亦何能得其情乎? 予意金彦勗爲先刑推窮問, 更議以啓。 更推窮詰事, 則依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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肅宗甲申。士林始建龜山祠于府西南木山面藍山里古餘溪上東距亭二里許。旣又以老松及李東岳,安訥與夫鄕宋勿染亭廷筍,金淸溪應會,金晩德大器,金瑞石彥勖,羅九華茂春,宋栗翁徵。次第追享。東岳。本府名宦也。栗翁公。伯父白圭堂礪曾孫也。
崇禎三辛丑我
聖上五年五月日。禦侮將軍前行世子翊衛司翊贊越松黃胤錫。狀。
甲申崇禎紀元之七十七年。肅宗三十年 先生卒後一百二十三年。士林刱龜山祠于府西南十里木山面藍山里。卽古稱餘溪之水上也。 以老松公及故府使東岳李文惠公安訥與夫鄕賢宋勿染廷筍,金瑞石彥勖,金晩德大器。先後享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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俛仰集卷之六 / 附錄 / 同門錄
孝憲公以講討經術自娛。取重當世師表儒林。從游於門下者甚多。安久叔詩曰。南國有賢師。規模後學資云云。
參贊宋純。字守初。潭陽人。號企村。鄕立賢祠揭處。
校理梁彭孫。字大春。綾城人。號學圃。己卯名賢。
修撰安處諴。字久叔。順興人。己卯名賢。
生員金孟碩。字▣▣。長城人。儒行傳家。
生員宋錫賢。字國老。靈光人。名見己卯錄。
右五賢名字。錄在知止堂遺稿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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鄕立賢祠揭處처->揭虔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