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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 신부의 생애와 교회사적 몇 가지 쟁점 고찰
한국천주교회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신앙의 증거자’로서 교황청에 시복시성 청원을 하고, 다양한 연구 작업과 심포지엄을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교회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다양한 쟁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첨예하게 쟁점화 되고 있는 부분은 첫째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순방 경로와 사목중심지 문제이고, 둘째는 최초 신학교 설립과 최 신부의 관련성 문제이며, 셋째는 사목서한의 작성 장소 및 선종 장소와 가매장지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연보(年 譜)에 기반하면서 최 신부의 서한들과 동시대 선교사들의 편지, 그리고 제1세대 후손들의 증언들에만 의거했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에 관한 문제는 명확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지 않은 사목서한보다는 후손들이 전하는 구전전승을 1차 사료로 받아들여, ‘문경 선종설’과 ‘진천 선종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최 신부가 문경에서 병을 얻어 15, 6일간 진천이나 배티로 가서 선종하였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최 신부는 문경 어느 주막집에서 병을 얻었고, 그곳에서 문경 읍내에 있는 평창이씨 약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선종하였다고 밖에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사목중심지와 신학교, 그리고 사목행로와 서한작성 장소 문제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서한들과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사목서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서한내용에 따르면, 그는 어떤 교우촌에서 장기간 머물러서 신학생들과 함께 한다든지 혹은 교우촌 안에 자신의 사제관을 짓고 거기에서 사목활동계획을 세우거나 신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고 본다.
최 신부는 교우들로만 이루어진 ‘순수 교우촌’이 아니라 교우들과 외교인들이 공존하고 있는 지대와 길 위에서 신자들이나 신학생들을 만났고, 길 위에서 서한들을 작성하였으며, 길 위에서 박해와 마주하였고, 마침내 길 위에서 병을 얻어 몸져누웠으며, 몸져누운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성사를 받았고, 거기에서 선종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Ⅰ. 들어가는 말
“1861년 6월 15일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사제가 선종하셨다.” 이로부터 선종 150주년을 맞는 해가 바로 올해다. 그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신앙의 증거자’로서 교황청에 시복시성 청원을 하고, 다양한 연구 작업과 심포지엄을 통하여 여러 각도에서 조명을 시도하였다.
그러한 시도들은 그분의 신앙을 이어받고 있는 우리 신앙후손들에게 새로운 신앙적 자각을 일깨워주기에 충분한 계기(동기)를 제공해 주었다. 특히 그 동안 최 신부가 순방 중에 작성한 열아홉 통이나 되는 라틴어본 사목서한들이 번역되어 새롭게 조명됨에 따라, 우리는 이를 통하여 교회공동체가 당시 박해시대에 복음적 삶을 수호하기 위한 처절했던 신앙인들의 신앙적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또 현재의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의 사목자들과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할 지를 미리 조망해 볼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은 그간 전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삶과 영성을 재조명하려고 투신하였던 연구자들의 헌신적 노력의 결과이자, 성실하신 하느님의 도우심(은총)이라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천주교회의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둘러싸고 풀리지 않는 다양한 쟁점들이 존재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첨예하게 쟁점화 되고 있는 부분을 꼽으라면 당연히 다음의 세 가지를 우선적으로 제시할 수 있겠다.
첫째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순방 경로와 사목중심지 문제이고, 둘째는 최초 신학교 설립과 최 신부의 관련성 문제이며, 셋째는 사목서한의 작성 장소에 관한 문제이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쟁점들 보다 더욱 예민한 문제가 있다면 곧 ‘선종(善終) 장소’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견해에도 불구하고, 논자는 최 신부의 선종 장소 문제에 대하여, 현재로서 ‘문경 선종설’로 비정되었다고 보고 있다.1) 왜냐하면 최양업 신부의 제1세대 후손들이 선종지에 관한 결정적인 증언2)을 보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 쟁점이 되는 위 세 가지 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선종지 문제에 관한 해결이 선행되어야 하고, 선종지 문제가 선행적으로 해결되기 위해서는 불가분 세 가지 쟁점들이 또한 일정 정도 해결되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위 세 가지 논제와 선종지 문제는 최양업 신부의 생애를 연구하는 있어서 별개의 사안이 아니라 동일한 선상 위에서 풀어야 할 중차대한 과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논자로서는 비록 선종지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가 풀렸다 할지라도, 논제들을 해결하려는 맥락 안에서 볼 때, 여전히 지속적으로 쟁점화 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기에, 이들을 선종지 문제와 동일한 사안으로 연계하여 본론을 전개시켜 나갈 작정이다.
따지고 보면 최양업 신부의 생애는 너무나 간명하다. 1849년에 사제로 서품되어 조선에 입국하였고, 12년 동안 사목활동을 하다가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의 한 주막 촌에서 병을 얻어 선종하셨고, 같은 해 11월 초에 제천 배론 성지에 안장되었다.3)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면서도 현실적 이해와 맞물려 얽혀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쟁점화 하여 풀어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한편으로 두렵기까지 하다. 어쩌면 오해와 사실, 왜곡과 진실이 서로 부딪혀 거대한 태풍의 눈을 형성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론에서는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서로 다른 다양한 견해들을 뒤로 미루고, 우선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연보(年譜)에만 충실하도록 하여 기술할 것이다. 연보에 따라 최 신부의 삶을 조명하는 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어 보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그 방법만이 유일한 해법으로 여겨진다.
연보를 살펴보는 방식으로는 기존에 미루어 비정한 것들을 잠정적으로 보류하고, 오로지 최 신부의 서한들과 동시대 선교사들의 편지, 그리고 제1세대 후손들의 증언들에만 의존할 생각이다. 이것들을 제외하면, 다른 많은 후대의 구전이나 구술, 그리고 학자들의 의견들은 그만큼 구체적이지 못하여 신빙성과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후자의 전승들은 전자의 것들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타당성이 약하기 때문에 그것들을 비교적 가볍게 여기면서, 본고가 목적하는 바에 도달해 볼 생각이다.
Ⅱ. 연보(年譜)
연보는 최양업 신부의 생애, 특히 사제서품 이후 1849년 말에 귀국하여 1861년 6월 15일 선종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에 가장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고 생각한다. 사실 연보를 작성할 때에는 추정도 가능하겠지만, 가능한 한 기록에 충실하여 보도하는 것이 사실에 가깝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1821년 3월 ‘다리골(Taticol)’4)에서 출생
1836년 2월 동료 2명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
1836년 12월 모방신부에게 순명서약, 모방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출국
1840년 9월 마카오에서 베르뇌 신부의 강의를 듣다5)
1842년 4월 26일 마카오에서 제1서한 작성
- 김대건이 프랑스 군함을 타고 메스트르 신부와 조선으로 떠나다
1844년 5월 19일 팔가자에서 제2서한 작성
- Belline 명의주교(페레올)와 메스트르 신부, 그리고 김대건과 함께 있음
1846년 12월 22일 심양에서 제3서한 작성
1847년 4월 20일 홍콩에서 제4서한 작성
-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순교소식
- 페레올 주교가 보내 준 순교자들의 행적을 읽고 라틴어로 번역착수
- 1846년 9월에 순교한 9명의 순교자는 메스트르 신부가 번역함
1847년 9월 20일 상하이에서 제5서한 작성
- 7월에 황푸에서 출발, 조선근해 첫 섬 발견
- 돌풍으로 어떤 섬에서 한 달 이상 피신
- 세실함장의 서한에 대하여 조선 대신들의 묵묵부답
- 고군산도에 남아 있기를 함장에게 요청함, 함장의 거절
- 상하이로 되돌아옴
1849년 5월 12일 상하이에서 제6서한 작성
- 두 번째 해로(海路) 원정 시도
- 이종사촌이 고군산도에서 지난 1년 내내 기다림
- 마카오 선박으로 백령도로 향함. 김대건 신부가 체포 된 곳
- 어떤 섬에 나타난 표시 - ‘Kiaotao’
- 사백주일(?白主日)에 예수회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1850년 10월 1일 ‘Tooangcol’에서 제7서한 작성
- 5월에 함선을 타고 상하이를 떠나 요동으로 이동함
- 7개월 동안 교구장 직무대행 베르뇌 신부의 명령에 따라 병자방문, 주일과 축일에 신자들에게 짧은 강론, 어린이 교리지도, 대축일에 고해성사 집전
- 12월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을 통한 조선입국 준비
- 단독 입국, 서울에서 다블뤼 신부에게 병자성사 집전6)
- 다음 날, 충청도에 머물러 계신 페레올 주교 예방, 열병을 앓고 있는 주교
- 다음 날, 전라도에서부터 공소순방 시작 (6개월 동안 5개 도 순방)
- 3명의 여교우가 있는 마을
- 200여명의 신자들이 있는 마을
- 1850년 9월 23일 18세의 바르바라 선종
- 중국에서 서울까지 1개월을 제외하고 7월 한 달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 거의 5천리를 걸어서 순방함
- 페레올 주교와 최 신부 두 명만이 공소순방, 다블뤼 신부는 여전히 병중임.
1851년 10월 15일 ‘Tselcol’에서 제8서한 작성
- 다블뤼 신부는 병환 중이다
- 르그레즈와 신부의 1850년 5월 10일자 서한을 2월에 받다
- 최양업 신부의 담당 교우촌은 127개
- 화재로 불타버린 멍에목 교우촌의 조 바오로
- 상복(喪服) 전교와 한글 교리공부에 대한 장점을 밝히다
- 경상도 언양 고을의 오 안드레아
- 순교자들의 자세한 행적조사 결의 및 집안의 신앙내력 상세기술7)
1853년 10월 23일 제9서한 작성(장소미상)
9월 초순경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피정하다8)
1854년 11월 4일 ‘Tongcol’에서 제10서한 작성
- Jansou 양(楊) 신부의 선종 소식
- Jansou 양(楊) 신부로부터 1853년 8월 12일자 리브와 신부의 서한을 받다
- 페레올 주교의 선종과 Jansou 양(楊) 신부의 입국
- 지난봄에 3명의 학생을 강남의 거룻배를 태워 상하이로 보내다
- 김 요한 학생에 대한 평가
1855년 10월 8일 ‘Pairon’에서 제11서한 작성
- 거룻배로 상하이로 향한 연락원을 기다리다. 연락원들을 상하이에서 베르뇌 새 주교와 다른 선교사들을 모셔오는 역할을 수행한다.
-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부모의 순교행적 및 또 다른 순교자들과 그 밖의 주목할 만한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명받다
1856년 9월 13일 ‘Soriout’에서 제12서한 작성
- 베르뇌 주교를 영접하다9)
- 1854년 9월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의 내용을 기술하다
- 사목순방을 순조롭게 마치다
- 전라도 진밭들이라는 마을(pago nomine Tsinpattel provinciae Tsenla)에 대한 상황보고
- 순교자(최해성) 행적보고
- 700리 떨어진 새 교우촌(귀양 간 신자가 형성한 곳)으로 출발할 예정
1857년 3월 31일 페롱 신부 입국10)
1857년 3월 25일 다블뤼 주교 성성식에 메스트르, 프티니콜라 신부와 함께 참석하고 이어서 조선최초의 ‘성직자 회의’에 참여하다11)
1857년 9월 14일 ‘Poulmoucol’에서 제13서한 작성
- 페롱(Feron) 신부의 입국과 다블뤼 신부의 부주교 서임소식
- 두 번이나 페롱 신부의 숙소에 여러 날 머무르다
- 1856년 조선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여 다블뤼 주교에게 주고, 다블뤼 주교는 전반적 역사를 편찬하다
- 700리 떨어진 새 교우촌 이야기(귀양간 여인과 가족들)
- 새 교우촌에서 사흘 길을 걸어 ‘Mansani’에 도착하다12)
- ‘Mansani’에서 가까운 읍내에서 여러 날 걸리는 ‘Kanouel’ 마을에 가다
- 1856년 배교자들이 포졸들과 함께 습격하고, 다양한 음모와 방법을 연구하여 천주교의 이름을 조선에 완전히 뿌리 뽑으려하다13)
1857년 9월 15일 ‘Poulmoucol’에서 제14서한 작성
- 리브와 신부로부터 1856년 8월에 서한을 받다
- 베르뇌 주교는 병환 중이고, 다블뤼 주교는 조선교회의 역 사, 특히 순교자들의 역사편찬에 주력, 푸르티에 신부는 신학교 교장, 페롱 신부는 조선어 공부 중이고, 메스트르와 프티니콜라와 함께 사목에 종사하다.
- 폐낭에 있는 조선신학생들에게 해마다 서한을 보낸 사실을 기술하다
1858년 관할구역에 8개의 공소가 설립되다14)
1858년 10월 3일 “Otoutsai’에서 제15서한 작성
- 메스트르 신부의 선종 소식15)
- ‘Kanouel’ 근처에서 입교한 청년이 새운 공소를 방문하다
-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7월 26일자 서한을 받다
- 페롱 신부의 소식을 전하다
1858년 10월 4일 ‘Otoutsai’에서 제16서한 작성
- ‘바울리노’가 전해준 서한과 정보를 가지고 어떤 교우촌을 거쳐 찾아 온 난파선에서 생환한 제주도 사람을 페롱 신부의 거처에서 함께 만나다
1858년 11월 7일 다블뤼 주교가 〈한국 주요 순교자 선정(Choix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ee)〉를 완성하여 파리로 보내다16)
1859년 10월 11일 ‘Ancock’에서 제17서한 작성17)
- 르그레즈와 신부로부터 1858 7월 22일자 서한을 받다
- 약속장소에서 동료 선교사를 싣고 올 강남 배를 기다리다
- 주막집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고발당하다18)
- ‘Canouel’ 공소가 외교인에 의해 지어지다
- 다블뤼 주교가 멀리 있는 일부 공소들을 맡아주다19)
- 성영회(聖?會)와 교우들의 실정을 알리다
1859년 10월 12일 ‘Ancock’에서 제18서한 작성
- 리브와 신부가 1858년 5월 28일-8월 29일에 작성하여 보낸 서한을 받다
- 베르뇌 주교의 건강을 걱정하다
- 관할구역이 5개도에 걸쳐 있다
- ‘Ancock’은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이다
- 난파선에서 구출된 제주도 사람이 ‘in urbem regiam’(서울)20)에 와서 판공성사를 받다
1860년 9월 3일 ‘Tsouklim’에서 제19서한 작성
- 경신박해(1859-1860)로 동료선교사들과 연락이 두절되다
- 관할구역 신자들이 ‘in urbem regiam’과 ‘in civitate Taicou’로 압송되다
- 10명이 ‘in civitate Kiengtsou’ 감옥에 수감되다
- 동정녀 아가다의 이야기
- 조씨 성을 가진 양반, 학자, 부자 이야기
- 척사론(斥邪論)의 일부를 소개하다
- 좁혀드는 포위망과 하직인사
1861년 4월 7일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신부가 입국하다
1861년 6월 선종하다
위 최양업 신부의 연보를 작성해 본 것은 우리가 그의 행적을 연구하는데 대단히 소중한 단서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이외에도 최 신부의 연보를 작성하는 데 다른 많은 보충자료들이 수반된다는 것을 인지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당시 외국선교사들의 서한이나 기타 자료들을 빠짐없이 수집하고 참고하여 면밀히 검토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절감해야 했다. 그 한계로서 첫째는 자료들을 빠짐없이 수집할 수 없었다는 것이고, 설령 자료들을 어느 정도 수집하였다 하더라도 근대외래 언어, 특히 박해시대 선교사들이 사용한 필기체에 대한 사용능력에 다소 장해가 발생하게 된다. 그러므로 차후 자료가 수집되는 대로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보충할 생각이다.
Ⅲ. 예민한 교회사적 쟁점 몇 가지
위에 기술한 최양업 신부의 연보에 따르면, 기존의 연구자들이 다양하게 제시한 연보와는 일정정도 차이가 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위 연보에 나타나지 않는 최양업 신부의 다양한 행보에 대해서는 다른 많은 연구자들의 연구물들을 참조하여 유추해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렇더라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사항들을 단순히 추정만으로 유추하여 임의대로 성급히 결론지어 내어놓는 것도 결코 연구자로서 타당한 자세는 아닐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가능한 한 최양업 신부가 직접 기술한 서한 등의 기록에 충실하여 예민한 사안들의 진정성을 따져보도록 할 것이다.
1. 사목순방 경로와 사목중심지
사제서품을 받은 직후인 1849년 말에 최양업 신부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과 관련하여 현대 연구자들에 의해 새롭게 제기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사목중심지와 관할구역’, 즉 ‘본당(本堂)과 그 관할 구역’이 어디인가? 이다. 그동안 최 신부의 사목중심지와 사목순방 경로에 대해서는 주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으려는 일부 학자들(예컨대 양업교회사연구소 측)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하였다. 그들은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는 과연 어디인가?”라는 자문자답(自問自答)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배티를 제외한 다른 어떤 곳에 대한 그 이론(異論)적 타당성의 여지를 없애버리려는데 주력해 왔다.28) 그러나 주지하듯이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12년 동안 계속 되었고, 그 관할범위도 6개월 동안 무려 5개도를29) 두루 순방할 정도로 광범히 하다. 더욱이 연보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가 특별히 중점을 두고 머물렀고, 거기에서 사목계획을 세웠다고 판단되는 곳은 단 한 곳도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목 중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드러나지 않는 것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여기다”, “저기다”라고 규정하는 것도 자칫하면 사실(史實) 자체를 왜곡하거나 훼손시켜버릴 위험성이 크다.
교회법적 의미에서 ‘사목중심지’ 즉 ‘본당사목구(본당)’는 교구장 주교에 의하여 설립되고 교구장 주교의 권한 아래에서 본당사목구 주임에게 맡겨진 개별 교회 내에 고정적으로 설정된 일정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공동체이다(교회법 제515조). 따라서 사목중심지(본당)의 주임사제는 자기에게 맡겨진 본당 사목구의 고유한 목자로서 교구장 주교의 권위 아래 자기에게 맡겨진 공동체의 사목을 수행하는 자이다(교회법 제519조). 여기서 말하는 본당사목구 주임이란 본당 주임신부를 말한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의 소재(所在)를 논증할 때, 반드시 실제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사목적인 중심장소가 제시되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학자들은 단순히 교우촌 형성유무와 관련지어 충북 진천지방의 동골(연곡리 혹은 용덕리)이나 절골(용덕리)로30) 성급하게 결정하고 동시에 대내외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공인받으려 하고 있다. 이는 최 신부의 생애에 관하여 연구하려는 다른 많은 연구자들로 하여금 혼란스럽게 만들거나 혹은 이에 대하여는 더 이상 연구할 필요조차 없다는 강한 일종의 경고성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들어, 라틴어로 작성된 최양업 신부의 사목서한들이 새롭게 번역됨으로써 불거져 나온 문제가 있다면, 바로 서한들의 작성 장소다. 종전까지만 해도 이 문제는 문제꺼리에도 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프랑스인 달레(Dallet, Claude Charles) 신부가 저술하고, 안응렬(安應烈)과 최석우(崔奭祐)가 번역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 책속에 들어있던 최양업 신부의 서한들도 함께 드러났고, 따라서 서한 속에 나타난 지명(地名)들도 함께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명들은 특별한 고증(考證)을 거치지 않은 채, 일방적인 추정만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그 이후로 많은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걸고31) 논쟁에 뛰어들었지만, 그 논쟁의 주류는 최근까지도 한국천주교회사연구소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최석우-안응렬이 번역한 《한국천주교회사》가 최근까지도 신학교와 교회사 연구자들에게 필독서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래 들어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의 서한들이 발굴되고, 또 주류학자들의 견해에 의문을 가진 많은 연구자들의 활발한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 위 두 학자가 《한국천주교회사》를 번역하면서 각주로 처리한 그들의 일부 견해들이 점차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나 사목행로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계속되고 있다. 그 이유로서는 첫째는 최양업 신부가 활동하던 당시 최 신부의 기록(서한)들이나 혹은 선교사들의 기록 속에서 사목중심지나 사목행로에 대한 뚜렷한 근거들이 없고, 둘째는 우리나라 옛 지명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이다. 한국의 옛 지명들은 어딜 가나 대체로 대동소이(大同小 異)한 부분이 많다. 가령 ‘절골’(제8신)이라고 할 때, ‘절골’이라는 명칭은 한국 땅 어디에서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절골’과 그 주변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는 곳도 부지기수다. 그러므로 누가, 언제, 어떠한 방법으로 가장 먼저 이 옛 지명을 현대식 지명으로 대체하여 사용하고, 또 거기에 따른 이유를 그럴듯하게 붙여 설명하여 발표하였는지 아닌지에 따라서 결정된 경우들이 많다. 이 때문에 숱한 오해와 왜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러한 오해와 왜곡 그리고 진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오늘도 계속되는 것이다.
최양업 신부의 서한 작성 장소에 대한 쟁점들을 풀기 위한 접근방법에는 두 가지 관건(關鍵)이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하나는 서한작성 시기다. 즉 서한이 작성된 시기를 순방과 동일한 시기로 보아야 하는가 아닌가? 아니라면 휴가기간으로 보아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휴가기간’이라는 데에 특별한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다른 하나는 서한작성 장소가 교우촌인가 아닌가? 이다.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그 주장이 크게 엇갈린다. 먼저 양업교회사연구소 측의 학자들은 ‘안곡’의 예를 들면서 “열심한 신자들이 거주하던 안전한 교우촌이었을 것”32)이라고 하여 휴식처를 ‘교우촌’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이 경우, 서신의 원문을 살펴보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허가가 있어도 쉴만한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33)라고 하여 “페롱 신부님의 관할구역으로 가서 안곡이라는 교우촌에서 여름휴가를 지냈습니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다. 최양업 신부는 서한에서 ‘교우촌’ 혹은 ‘공소’로 사용하는 라틴어 단어는 대체로 ‘Christianitates’이다. 그러나 ‘안곡’은 ‘Christianitates’가 아니라 ‘Pagus’이다. ‘Pagus’는 ‘외교인들이 사는 마을이나 촌락’ 등을 가리킨다.34) 그러므로 제18신에 나타는 “안곡이라는 교우촌”은 “안곡이라는 외교인 마을이나 촌락”으로 보아야 하고, 따라서 ‘교우촌’이라는 번역은 오역일 수 있다. 동시에 또 ‘안곡’ 마을이 교우촌이라고 주장하는 차기진 박사의 연구는 그 방향설정부터 문제점을 안고 있다. 즉 그는 안곡을 역촌이 아니라 교우촌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안곡’이 충청지역일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선뜻 수긍하기가 힘들다.
이 밖에도 차기진의 연구논문에는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을 충청도 내포지역과 부여지방으로 잡으면서 프티니콜라 신부의 관할구역인 내대(안골) 교우촌이 “1857년 8월 이후 페롱 신부의 사목 관할구역이 되었다.”35)고 기술하였다. 하지만 페롱 신부의 서한을 살펴보면, 그가 페롱 신부의 서한을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왜곡되어 표현하였음을 금방 알 수 있다.
페롱 신부는 자신의 서한이 작성된 1857년 9월 16일까지는 적어도 ‘손골’에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었다. 이는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5일자 서한(제14신)의 내용 “페롱 신부님은 아직 말 배우는데 열중하고 있다”36)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더 나아가서 말하면, 이는 최양업 신부가 휴가를 ‘교우촌’에서 결코 보내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실제로 최양업 신부는 그의 1857년 9월 14일자 서한 속에서 “두 번이나 페롱 신부의 숙소에서 여러 날 머물렀다.”고 진술한다. 그렇다면 당시 페롱 신부는 ‘손골’에 있었을 것이다.
손골은 ‘교우촌’이더라도 일반 교우촌과는 달리, 페롱 신부 등 서양선교사들이 입국한 뒤 은밀히 조선말을 공부해야 하는 곳이므로, 외교인은 물론이고 일반신자들의 눈에도 잘 띄는 곳은 아닐 것이기 때문에 오로지 서양선교사들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고 보좌할 수 있는 핵심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매우 작은 규모의 교우촌일 것이라 판단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손골’처럼 은밀한 곳을 제외하면, 최 신부가 제8신에서 술회하고 있는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공소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37)라는 언급은 여전히 ‘교우촌’ 밖에서 숙박하였다는 사실이 유효하게 지켜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가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를 연구하려면, 먼저 그의 사목관할 구역을 알아내야 하고, 그의 사목관할 구역을 알아내려면 그의 사목서한에 나타나는 서한작성 장소나 혹은 순방장소의 정확한 소재를 알아내야 한다. 그것들의 정확한 장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최 신부가 직접 라틴어로 표기한 지명을 먼저 고려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컨대 ‘풀무골’은 그대로 ‘풀무골’이어야 하고, ‘안곡’은 그대로 ‘안곡’이어야 하며, ‘죽림’ 또한 마찬가지로 ‘죽림’이어야 한다. 즉 ‘풀무골’이 ‘불무골’이나 ‘불밋골’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안곡’이 ‘안실’이나 ‘대내’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림’이 ‘죽전’이나 ‘대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정리한 다음이라야 비로소 그의 순방행로에 접근할 수 있고, 그런 다음에라야 비로소 사목중심지가 어디냐에 대한 언급을 진행할 수 있다고 본다.
2. 최초 신학교는 어디인가?
최 신부의 사목서한에 따르면, 1849년 말에서 1850년 초 최양업 신부가 귀국할 당시, 서울(한양)과 경기 지방은 다블뤼 신부의 관할구역이고, 페레올 주교는 충청도에 머물고 있었다고 추정된다.38) 1850년 당시 충청도에 머물러 있던 페레올 주교는 중한 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신부가 사목활동(순방)하기가 어려워졌으므로 사목활동을 그만두고 신학교를 설립하여 그에게 신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토록 명령하였다.39)
신학교는 먼저 제1차 신학교가 설립되고 그해 겨울 준비단계로 그곳에서 “2백 리쯤” 떨어진 곳에 다시 제2차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제1차 신학교는 다블뤼 신부가 순전히 개인적으로 가르치다가 교구장에 의해 공식화된 학교40)이고, 제2차 신학교는 거기에서 2백 리 정도 떨어진 곳41)이다. 다블뤼 신부는 계절에 맞추어서 제1차와 제2차 신학교를 번갈아 사용하였다. 하지만 제1차 신학교의 소재나 제2차 신학교의 소재가 어디인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드러난 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양업교회사연구소 측은 1858년 페롱 권(權) 신부의 서한의 내용을 들어 ‘배티’를 제1차 신학교 장소로 확신하고42) 있는 듯하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제14신에 따르면, 유감스럽게도 1857년 3월에 입국한 뒤, 페롱 신부는 같은 해 9월 15일까지 적어도 ‘손골’에서 조선말을 배우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블뤼 신부는 이미 주교서품을 받은 부주교로서 베르뇌 주교의 명을 받아 계속하여 순교자들의 역사편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고, 푸르티에 신(申) 신부가 신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메스트르 이(李)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 및 최양업 신부만이 베르뇌 주교를 도와 사목에 종사하고 있었다.43)
이러한 서한 속에 나타나는 일련의 사실들에 비추어보면, 다블뤼 신부가 ‘배티’에 최초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최양업 신부가 그곳을 사목중심지로 정하면서 신학교 운영에 관여했을 것44)이라는 차기진의 추정은 설득력이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차기진은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지가 “대략 1856년 여름까지 동골과 배티를 오가면서 전국을 순방하였다.”45)는 주장도 임의적으로 추측한 픽션에 해당될 수 있다. 왜냐하면 ‘배티’가 사목중심지였다는 근거를 제공해 주는 사료들은 현재 아무 데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고, 더욱이 그곳이 최초 신학교였다는 근거 또한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기진을 포함한 양업교회사연구소 측이 지속적으로 ‘진천’ 혹은 ‘배티’에 최초의 신학교가 존재했었다고 주장하게 된 배경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을까?
3. 사목서한 작성 장소를 찾아서
현재 최양업 신부와 관련하여 제기되는 쟁점 중에 가장 예민한 문제가 바로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그의 ‘사목중심지’와 ‘최초 신학교의 소재’ 및 ‘서한작성 장소’와 더불어 마치 실타래처럼 대단히 첨예하게 얽혀있다. 어쩌면 선종 장소를 비정하는 순간 최 신부의 사목행로의 윤곽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고, 사목행로를 파악하는 순간 그의 사목중심지가 드러나게 되며, 사목중심지가 드러나게 되면, 그가 신학교의 사정에 대하여 얼마만큼 관여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사안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의 서한작성 장소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먼저 선종 장소가 어디인지를 비정해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할 것이다.
대체로 최양업 신부의 선종일자, 즉 “1861년 6월 15일에 최양업 토마스 신부가 선종하셨다.”46)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異見)이 없어 보인다. 문제는 당시 배론 신학교의 교장이면서 최양업 신부에게 종부성사(병자성사)를 주었던 푸르티에 신(申) 신부가 1861년 10월 20일자 서한에서 “그가 누워있는 집은 나의 거처에서 170리 내지 180리 떨어져 있습니다.”47)라고 한 내용과 같은 해 11월 2일자 서한에서 “그는 중병에 걸려 저의 산에서 170리나 떨어진 어느 한 교우의 집에 간신히 도착했다.”라는 표현과 더불어 페롱 신부가 1861년 7월 26일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배론 신학교에서 약 120리 떨어진 한 작은 교우 공동체(Une Petite Chretiente)”48)라고 언급한 대목이다. 이 외에는 그 당시 최양업 신부의 구체적인 선종 장소를 밝힌 선교사의 서한이나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종 장소와 관련하여 유추해 볼 수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다면, 곧 경신박해일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경신박해가 끝나고 베르뇌 주교에게 사목현장에 대한 상황보고를 하려고 상경하던 중이었다. 위 서한들에서 나타나는 “어느 한 교우의 집”이나 “한 작은 교우공동체”는 적어도 유명한 공소나 경신박해의 직접적인 피해를 받아 초토화 되었던 배티 공소와 같은 지역일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본다.49) 왜냐하면 최상종 빈첸시오가 작성한 〈최 신부 이력서〉나 〈최 바시리오 이력서〉에 나타난 ‘문경’에서의 와병설(臥病說)을 인정하더라도, 거기에서 경신박해로 폐허가 된 ‘진천(배티)’ 지역 공소까지 모셔갔고, 동시에 배론에 있는 푸르티에 신부가 그러한 위험상황을 인식하면서 종부성사를 집전하러 그곳까지 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푸르티에 신부나 페롱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한 작은 공동체” 혹은 “한 교우의 집”이라고 했으니, 최양업 신부가 진천과 같은 커다란 교우촌이 있는 곳으로 아픈 몸을 이끌고 그 먼 곳까지 걸어가거나 말을 타고 이동해갔다는 사실은 더더욱 생각하기 힘든 주장이다.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최양업 신부의 선종 당시 페롱 신부의 관할 구역을 경상도 서북부 지방이 아니라 아예 충청도 서천 지방을 뛰어넘어 진천을 담당하였다고까지 주장한다. “1858년 10월 이후 프티니콜라 신부의 사목관할 구역에 속해 있다가 경신박해가 계속되던 1860년 5월 경 프티니콜라 신부가 서울로 피신하면서 담당 사제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 1862년 10월에는 페롱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 1862년 가을에는 페롱 신부가 배티 교우촌에 거처한 사실이 나타난다.”50)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선종 전후로 하여 페롱 신부의 관할 구역은 여전히 경상도 서북부 지방이었고, 진천(배티) 지역은 프티니콜라 신부 대신에 오히려 리델 신부가 담당하였다.51)
뿐만 아니라 차기진 박사는 비록 최상종 빈첸시오가 기록한 구전 〈최 신부 이력서〉 등이 정규량 신부가 1929년 당시 용소막 본당 아래에 살고 있었던 최경신 바르바라의 증언을 듣고 기록한 것보다 후대이기 때문에 와전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52) 그러나 정규량 신부의 기록이 비록 최 빈첸시오의 것보다 앞선다 할지라도, 최 빈첸시오는 최양업 신부의 셋째 아우 최우정 바실리오의 맏아들로서 그의 부친으로부터 직접들은 것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정규량 신부가 제3자로부터 들은 것보다 신빙성이 더욱 크다 할 것이다. 만일 최 빈첸시오의 기록이 후대의 것이라고 하여 외면해버린다면, 유사한 이유로 정규량 신부의 기록도 결국 외면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양업 신부의 형제와 조카의 증언을 무시한 채 멀리 떨어진 타지인의 증언만을 취재하여 보다 앞서 기록하였다는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그 신빙성과 타당성을 논하기란 어딘가 모르게 모순과 무리가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두 선교사가 작성한 서한 가운데 “170리나 180리” 혹은 “120리”라는 거리에 주목해야 한다. 배론에서 위 거리에 위치한 곳에 최양업 신부는 몸져누웠으며, 종부성사를 받고, 마침내 선종하였으며, 그해 11월 초에 신학교가 있는 배론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문경와병설’과 ‘진천 선종설’ 사이에는 다양한 구전들에도 불구하고 ‘거리문제’를 풀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긴장감이 존재한다. 만약 이 긴장감이 존재한다면, 정양모 신부가 제기한 “최 신부 사망 장소에 관한 최 신부 가문의 기록들은 과연 신빙성이 있는가?”는 질문이 적극적인 타당성을 띠게 된다.53)
최양업 신부의 선종 장소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원재연의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와 류한영 신부의 〈동료 선교사들의 서한을 중심으로 한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 연구〉54)라는 논문이 특별히 눈에 띤다.
이 두 논문이 사실 ‘문경 선종설’과 ‘진천 선종설’을 대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55) 하지만 이 두 논문에서도 여전히 남은 문제가 있다. 즉 ‘문경 선종설’을 주장하게 되면, 최양업 신부의 사목행로 상에서 숙박이나 휴식장소는 교우촌이 아니라 역촌이나 주막촌, 혹은 원촌이나 사찰(외진 곳) 등지가 될 것이고, ‘진천 선종설’을 주장하게 되면 곧 최 신부의 숙박이나 휴식공간은 교우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최 신부의 숙박이나 휴식장소를 이른바 “길거리 마을이나 외딴 집”으로 잡을 경우에는 그의 서한들 속에 나타나는 사목행로와 어느 정도 일치하게 되지만, ‘교우촌’으로 잡을 경우에는 적어도 그의 사목서한 속에 나타나는 숙박이나 휴식공간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최 신부의 사목행로 상에 나타나는 순방장소인 ‘교우촌들’ 예컨대 멍에목, 진밭들, 만산(만사니) 등을 제외하면, 숙박이나 휴식공간은 대체로 교우촌이 아닌 역촌이나 주막촌 등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이 곧 19통의 서한작성이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에서 행해졌다기보다는 적어도 교우촌이 아닌 별도의 이방인들과 교우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가는 곳이나 외딴 교우의 집이나 사찰 혹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택하였을 가능성에 대한 이유다. 실제로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서한작성 장소를 차기진의 〈최양업 신부의 사목관할 구역과 관련지명연구〉라는 논문과 비교해보면56) 그 이유가 보다 명확해질 것이라 믿는다.57)
위의 도표에서 ‘죽림굴’은, 최양업 신부의 1860년 9월 3일자 서한(제19신)에 따르면, 경신박해의 피해자 ‘(김) 아가타’의 죽음과 관련된다. 이 서한에서 최 신부는 “저는 아가타에게 비록 기적이 없이는 굶어 죽을 것이 뻔하지만, 어떤 동굴에 가 숨어서 하느님의 섭리에 온전히 의탁하라고 허락하였습니다.”58)라고 기술한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죽림굴’은 교우촌이 아니라 자연동굴로서 피난처이기 때문에, 그곳에서 최 신부가 서한을 작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타당성이 떨어진다고 보겠다. 그렇다면 제19신 서두에 나오는 “저는 지금 조선의 맨 구석 한 모퉁이에 갇혀서 교우들과 아무런 연락도 못하고 있습니다. 벌써 여러 달 전부터 주교님과 다른 선교사 신부님들과도 소식이 끊어져, 그분들이 아직 살아계신 지 아닌지조차도 모릅니다.”라고 한 대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대목만 보면, 당시 최양업 신부의 소재는 틀림없이 경상도 남부지방 바닷가 가까운 곳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림’이 상주의 은척면 지역일 것이라고 보는 단서의 한 가지는, 곧 최 신부가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상당한 부자인 가족이 자지 가문의 여러 후손들과 더불어 입교하기로 결심하고, 가옥과 모든 것을 팔고 나서 고향을 떠나 십 여일 전에 교우촌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59)라고 한 대목이다. “조씨 성을 가진 양반이요 학자”는, 풍양 조씨이면서 경북 상주시 구두실(화개동 서곡마을) 사람으로 1860년경 문중박해를 피해 가족들(부인 최 발바라와 조 아기, 조영학 토마)과 함께 대구 한티로 피난 갔다가 1868년 순교한 조 가롤로가 아닐까60)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죽림’은 상주지방일 수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 진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의 단서는 김해 지역에서 1868년에 순교한 창령 조씨 조석빈과 조석중 형제들 아닐까61) 추정할 수 있다. 만일 최양업 신부가 말한 조씨가 창령 조씨라면 ‘죽림’은 김해지방의 한 지역일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어찌되었든, 결론적으로 최양업 신부가 국내에서 서한을 작성한 장소는, 사목서한의 내용으로 보거나 사목행로 상의 숙박시설(여관 등)을 이용한 사례들을 보거나 혹은 선종 당시 주막집에서 병을 얻고 선종한 증언들을 보더라도, ‘교우촌’이라기 보다는 교우촌을 벗어난 익명성이 보장될 수 있는 곳이거나 아니면 절골 등 인적이 드문 산촌일 가능성이 높다 할 것이다.
Ⅵ. 쟁점들에 대한 논변(論辯)
1. 사목순방 경로와 사목중심지
차기진 박사는 ‘배티 교우촌’이 사목중심지로 자리 잡게 된 배경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배티 교우촌은 1850년 9월 이전에 다블뤼 신부가 동계용 신학교를 마을 안에 마련하면서 박해기의 중요한 사목(본당)중심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또 다블뤼 신부가 1851년 11월부터 배티의 조선교구 소신학교 전담 교장신부로 재임하면서 1853년 여름까지 이곳은 그의 중요한 거처가 되었다. 이어 최양업 신부가 배티 신학교 교사 겸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그곳 사제관 겸 성당에 거처하는데, 그는 다음해 3월 신학생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떠나자 대략 1856년 여름까지 첫 사목지인 동골과 배티를 오가면서 전국을 순방하였다.”62)
하지만 위 논증에는 얼핏 보아도 수긍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한다. 첫째, 최양업 신부가 1849년 12월말 귀국 당시, 다블뤼 신부는 서울과 경기지방을 관할하고 있었다(제7신). 따라서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신학교 설립명령을 하달 받았을 때, 배티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울이나 그 인근 지방 어디에서 와병 가운데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나아가 최양업 신부 또한 1850년 10월 1일 ‘Tooangcol’에서 제7신을 작성하였고, 1851년 10월 15일에는 ‘Tselcol’에서 제8신을 작성하였으니, 최양업 신부 역시 한가하게 배티에 머물러 신학교 교사 겸 지도신부로 일하고 있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적다.
위 최양업 신부의 두 가지 서한에 따르면, 이 시기는 거의 5천 리를 순방하였으며, 멍에목이나 언양 등의 교우촌이 거론되는 것으로 보아 주로 경상도 남부지방을 순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둘째, 1850년 9월은 물론이고 최 신부가 1851년 제8신을 작성하던 무렵까지 다블뤼 신부는 자신의 포교지를 벗어난 적이 없었고, 여전히 와병 중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다블뤼 신부가 소신학교를 맡은 이유는 먼저 자신이 학교를 개설하여 어린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사목활동을 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과정 안에서 중병이 들었고, 따라서 충청도에 있던 페레올 주교의 명을 받아 사목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정식으로 신학교를 맡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셋째, 1850년 9월, 다블뤼 신부는 이곳(신학교)에서 때마침 상경해 있던 페레올 주교를 만나러 가게 되었으며63), 그해 11월 서울64)을 떠나 다시 신학교로 돌아와서 적어도 1852년 10월까지 계속 교장직분을 수행하였다.65) 넷째, 1853년 2월 3일 페레올 주교가 서울에서 선종할 무렵에도 여전히 다블뤼 신부는 서울 근교(경기지방)에 머물렀다. 선종 당시 페레올 주교는 다블뤼 신부를 곁에 두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가 선종한 뒤, 1856년에 입국한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 장(張) 주교로부터 1857년 3월 25일에 서울에서 부주교로 서임되었다.66) 다섯째,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최 신부의 사목중심지는 별도로 정해진 바가 없었다. 전국 5개도를 순방하는 것이 그의 우선적인 사목활동이었다(제7신). 이는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 재직 때와 마찬가지로 베르뇌 주교 재직 때에도 유일한 방인(邦人) 신부로서 전국을 관할지역으로 하는 특별보좌 직분을 수행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시사 해준다 하겠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 범위는 그야말로 전국적이었다. 그의 서한에 따르면, 5도에 걸쳐 사목순방을 수행하였고, 특히 ‘언양’, ‘멍에목’, ‘진밭들’, ‘간월’, ‘만사니’67) 등의 남부지명이 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충청도 이북 지역보다는 충청도 이남지역, 특별히 호남과 영남 지방을 주 소임지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차기진 박사가 말한 “이어 최양업 신부가 배티 신학교 교사 겸 지도 신부로 임명되어 그곳 사제관 겸 성당에 거처하는데, 그는 다음해 3월 신학생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떠나자 대략 1856년 여름까지 첫 사목지인 동골과 배티를 오가면서 전국을 순방하였다.”고 한 주장과는 일정정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최 신부의 서한을 살펴보면, 최 신부 자신이 배티 신학교 교사 겸 지도신부로 임명 되었다는 흔적을 남기지 않았으며, 그곳에서 공부하던 신학생들이 페낭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이야기도 없고,68) 더구나 1856년 여름까지 그곳에서 보냈다는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차기진 박사가 지나치게 최양업 신부의 사목 서한작성 장소를 진천의 ‘배티’나 그 인근 교우촌으로만 한정시키려는 열정에 기인한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와는 별도로, 차기진 박사는 다블뤼 주교의 서한에 대한 최석우 신부의 견해를 인용하면서, 최양업 신부가 귀국한 뒤 2년 동안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고 주장한다. 뿐만 아니라 이 2년(1850-1851) 동안 진천 ‘동골’을 여름 휴식처 겸 사목중심지로 삼고 전국을 순방했다고 주장한다.69) 하지만 그 견해에 따르면, 2년 동안 가족들과의 동거한 사실을 적은 것이 아니다. 다만 최석우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기해박해’ 때 순교한 최양업 신부의 모친 이성례 마리아의 신앙적 삶을 채록한 부분에 대해, 실제로 검증되지 않은 견해를 피력한 것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더욱이 1850-1851년에 최양업 신부는 두 통의 사목서한을 작성하게 되는데, 그 작성 장소는 각각 ‘도앙골’(Tooungcol)(제7신, 1850년)과 ‘절골’(Tselcol, 1851년)(제8신)로서 ‘동골’(Tongcol)(제11신, 1854년)과는 시간적으로나 내용상으로 보아 지역 간의 거리가 다소 멀어 보인다. 말하자면 최 신부 서한에 따르면, ‘Tooungcol’의 서한에서는 조선에 입국하여 공소순방을 시작하였고, ‘Tselcol’에서는 다블뤼 신부의 병환이 여전하다는 것과 상주의 멍에목이며 언양 고을에까지 순방하였다는 사실을 언급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를 ‘배티’나 ‘동골’ 등 진천지역으로 한정시켜 보려는 일부학자들의 견해는 연대기나 사목행로 상으로나 타당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러므로 최양업 신부에게 있어서 ‘사목중심지(본당)’는 귀국 이후, 처음부터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최 신부에게 있어서 별도로 특별히 지정된 ‘사목중심지’가 없어야만 페레올 교구장이 맡긴 특별한 사목적 임무를 보다 충실히 수행할 수 있게 된다.70)
2. 최초 신학교의 소재(所在)
종전까지만 해도 논자는 최초의 신학교의 소재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어디에 위치하든 페레올 주교로 말미암아 조선에 신학교가 본격적으로 생겨나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최초의 신학교가 최양업 신부와 관련 되어 있고, 더욱이 ‘사목중심지’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는 주장들이 제기되면서, 이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하여 부득불 살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사목서한 장소=최초 신학교=선종 장소가 모두 ‘배티’나 혹은 인근 진천 지방이라고 주장하는 일부학자들의 견해가 있었기 때문이다.71)
1849년 말에서 1850년 초는 최양업 신부가 귀국하던 당시,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다블뤼 신부의 거처는 서울이나 혹은 인근 경기지방이었다라고 보아야 한다. 최양업 신부는 사목서한 제7신에서 “서울에서 하루를 묵고, 그때 충청도에 머물러 계시던 주교님을 뵈러 길을 계속 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먼저 중병을 앓고 계시는 다블뤼 신부님께 가서 병자성사를 집전해드려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주교님께 가보니 주교님도 열병을 앓고 계셨습니다.”라고 진술한다. 당시가 이미 페레올 주교 자신도 열병을 앓고 있으면서 그보다 더 중병을 앓고 있는 다블뤼 신부에게 사목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신학생을 양성하라는 지시를 내린 때였다.72) 이 사실은 다블뤼 신부 자신이 1850년 9월말과 1851년 10월에 부모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있다.
<1850년 9월말 서한> : “… 주교님께서는 성무활동으로 제 몸이 상한 게 아닐까 걱정하시어, 휴식을 가지라는 뜻에서 제게 몇몇 어린 소년들에게 라틴어를 맡기셨는데, 이 학생들은 배우는 속도가 더딥니다.… 어쨌거나 저는 지금 이들 학생들 중 몇몇과 함께 지내고 있으며, 조만간 그들에게 돌아가야 하는데, 그곳에 저는 겨울 동안 사용할 집 한 채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매우 큰 집으로 방이 두 칸 있는데, 이웃한 집들 때문에 다소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 이처럼 부모님께서는 제가 조선 최초의 가톨릭 학교이자 문과(文科) 학교의 책임자에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직책입니까? …]”73)
<1851년 10월 서한> : “ … 저는 여전히 한동안은 주교님과 함께 지내겠지만, 조만간 저의 담당지로 떠날 것이고, 올해 역시 예년처럼 똑같은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 … 이렇게 해서 저는 작년 10월에 신학교(College)로 쓸 집 한 채를 구입하러 갔었고, 올 5월 이전에 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곳을 떠나 약 200리(20lieues) 떨어진 곳으로 떠나야 했으며, 이런 일들은 매년 되풀이해야 할 위험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74)
위 두 서한에 따르면, 적어도 1850년 이전에는 신학교다운 신학교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미 신학교를 설립하기 이전에, 다블뤼 신부는 바쁜 성무활동 가운데 틈틈이 몇몇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라틴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특별히 유념해야 할 사항 한 가지는,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에게 전적으로 신학교를 맡도록 소임을 부여한 뒤, 자신은 충청도와 더불어 다블뤼 신부의 관할구역인 서울-경기지방까지 도맡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오로지 다블뤼 신부를 위한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배려로 볼 수 있다.
1851년 다블뤼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페레올 주교가 상경하였을 때, 병약한 다블뤼 신부의 거처(신학교)에서 함께 지내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즉 페레올 주교의 관할구역이 원래 충청도였는데, 다블뤼 신부가 중병에 걸린 관계로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의 관할 구역까지 겸하여 담당할 수밖에 없었음을 시사해주면서 동시에 자신도 중병을 앓고 있었으므로 상경하여 치료할 목적도 함께 가졌을 것이라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기진은 다블뤼 신부가 교구장의 명을 받아 설립한 제1차와 제2차 신학교를 ‘이동형 신학교’75)로 보고, 1850년 9월 이전에 ‘정주형 신학교’를 진천의 배티 교우촌에 설립한 것으로76) 간주하였다. 말하자면 제2차 신학교를 ‘정주형’으로 본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블뤼 신부가 1951년 10월 서한에서 “조만간 저의 담당지로 떠날 것이고, 올해 역시 예년처럼 똑같은 일을 맡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 대목을 두고, 그는 다블뤼 주교가 신학교와 사목활동을 병행했다는77) 판단을 내리고 있다.
차기진 박사는 “이후 다블뤼 신부는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1850년에 조선 신학교를 설립한 뒤, 같은 해 9월 이전에는 배티 교우촌에 신학교 교사를 마련했고, 동시에 신학교 교장과 교우촌 순방을 겸하다가 1851년 11월부터는 신학교만을 전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1852년 5월 이후에는 페레올 주교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신학교와 함께 서울 인근의 경기도 지역을 담당해야만 했다.”78)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일정정도 오류가 있어 보인다. 오히려 다블뤼 신부가 주교의 명에 따라 자신의 관할구역인 서울-경기지방에 신학교를 설립하고 전담하였으며, 충청도에 머물러 있던 페레올 주교가 다블뤼 신부의 관할구역까지 관장하다가 건강이 더욱 악화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건강이 호전되어가던 다블뤼 신부가 서울에서 요양하던 페레올 주교를 가끔씩 만나러 가곤 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장동하 신부는 1851년 10월의 서한에 나타나는 다블뤼 신부와 페레올 주교가 함께 있었던 기간을 달레 신부의 진술에 근거하여 “며칠 동안의 피정”을79) 하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반드시 피정기간으로 삼았다기보다는 두 선교사가 서로 조선의 상황에 대해서 논의하거나 혹은 관할구역에 대한 인수인계 또는 신학교 설립에 관한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다블뤼 신부가 언급한 “조만간 저의 담당지로 떠날 것”이라는 표현은 ‘사목구역’으로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페레올 주교가 머물렀던 서울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신학교’로 향한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의미가 분명해질 수 있다.
아울러 1850년 9월말 서한에 나오는 제1차와 2차 신학교는 동일한 지역이거나 상당히 서로 인접한 지역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블뤼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제1차 신학교는 너무 협소하고 또 허술하여 많은 학생들과 협조자들이 겨울을 보내기에는 어려운 형편이어서 부득불 제2차 신학교를 구입하여 거기에서 겨울을 났기 때문이다. 다블뤼 신부가 1851년 10월에 작성한 서한 가운데 “작년 10월에 신학교로 쓸 집 한 채를 구입하러” 간 곳은 최초 신학교에서 “200리 떨어진 곳”이며, “올해 5월 이전에 제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그 집을 떠나야 한다.”는 기록은 제3의 신학교를 말해주는 대목이라 추정할 수 있다.
제3차 신학교는 곧 ‘정주형 신학교’일 것이다. 더욱이 제3의 신학교는 배티에서 200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제1차와 제2차 신학교가 있던 곳(아마도 서울근교 경기지방)에서 200리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따라서 최초 신학교는 배티가 아니라 ‘손골’이나 ‘수리골’ 혹은 ‘부엉이골’ 등의 장소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제3의 장소는 ‘부엉이골’이나 아니면 그보다 훨씬 떨어진 ‘배론’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겠다. 혹 1885년 10월에 개교하였다는 ‘예수성심신학교’의 자리인 ‘부엉이골’(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부평리 581번지)이 제3의 신학교라면, 제4의 신학교는 ‘배론’을 지목한다 해도 무방할 것이라 여겨진다.
다블뤼 신부가 신학교를 맡은 기간은 1849년 말부터 최소한 1855년 2월까지 계속되었다. 1852년 8월에 입국한 메스트르 신부는 1855년 2월 4일 파리외방선교회 신학교장 바랑(Barran) 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낸다.
<1855년 2월 4일자서한> : “우리 신학교는 여느 때처럼 잘 되어갑니다. 학생들을 숨겨두기가 어려워서 6명밖에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블뤼 신부가 다른 곳에 학교를 하나 세워 제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그 학교에도 같은 수효의 학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80)
메스트르 신부의 서한에 따르면, 다블뤼 신부는 제1,2 신학교에서 200리나 떨어진 제3의 신학교의 운영을 이미 메스트르 신부에게 넘겼으며, 자신은 제4의 신학교 자리를 찾아 설립하고 메스트르 신부에게 운영권을 넘기려했다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장동하 신부는 그의 논문 〈1850년, 조선교구 신학교 설립에 관한 연구〉에서 “1855년은 메스트르 신부가 장주기 요셉의 도움을 받아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했다고 거론되는 해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는 것은 메스트르 신부의 서한과 달레의 《한국교회사》, 푸레의 《조선 : 순교자들과 선교사들》, 로네의 《파리외방전교회 비망록》 등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했다는 기록과 관련한 정확한 1차 사료는 국내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 따라서 메스트르 신부가 배론에 신학교를 설립했다는 보다 정확한 사료를 발견되기를 바라면서…”81)라고 메스트르 신부의 ‘배론신학교 설립설’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855년 이후 조선교구에는 신학교가 최소한 두 개 이상이었다.”82)는 장동하 신부의 말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다.
한편, 귀국 이후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에 대해서 대체로 그가 남겨놓은 19통의 사목서한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1차적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순전히 구전 등의 전승 자료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최양업 신부의 사목서한에 따르면, 당시 신학교나 신학생들에 관해서, 그가 직접 언급한 대목은 세 군데다. 하나는 1854년 11월 4일 ‘동골’(Tongcol)에서 보낸 제10신이다.
위 서한들의 내용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는 평소에 신학생들의 성소에 관해 열정적이었음을 엿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동시에 신학교 업무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증거는 확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하나 특이한 사실은, 1857년 3월에 입국한 페롱 신부가 조선말 공부를 한 곳은 실제로 ‘손골’이었다는 것이다.86) 따라서 적어도 1850년 9월말에 작성한 서한에 근거해서 볼 때, 다블뤼 신부가 제1차와 제2차 신학교는 ‘손골’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51년 10월의 서한에 따르자면, 제3차 신학교는 거기에서 200리 정도 떨어진 경기도의 ‘부엉이골’ 등일 가능성이 크다. 제3의 신학교가 잦은 박해로 말미암아 불안하자, 다블뤼 신부는 1854년 전후로 하여 제4의 신학교를 설립하고 메스트르 신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조선 최초의 신학교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결코 충북 진천의 ‘배티’나 그 인근일 가능성은 적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신학교 설립과 운영은 그 특성상, 교우촌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박해의 손길이 덜 미치는 지역을 택해야하기 때문에, 진천 ‘배티’처럼 교우촌들이 산재해 있어서 언제든지 박해의 손길이 뻗쳐 올 수 있는 곳에 조선교구의 미래를 위해 신학교를 설립하기란 힘들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진천 ‘배티’와 그 인근 지방을 “다블뤼 신부와 최양업 신부가 담당한 지역”이라고 보는 시각은 그 출발점부터 일정정도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최양업 신부가 작성한 1850년(제7신)과 1851년(제8신) 뒤에 당연히 따라와야 할 사목서한이 1851년10월-1853년 10월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호남교회사연구소의 서종태 박사는, 당시 최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건강상태가 나빠져서 그 두 분의 관할구역까지 담당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87) 그 뒤 1853년에 와서는 다블뤼 신부의 건강상태도 호전되는 동시에 또 메스트르 신부가 입국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그의 사목순방에 다소 여유가 생겨 휴가가 끝나는 1853년 10월에 사목서한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사목서한 작성 장소는 교우촌이어야만 하는가?
(1) 사목행로 상에서
1849년 말에 귀국하여 1861년 6월 선종하기까지 12년 동안에 대한 최양업 신부의 사목행로는, 그의 사목 관할구역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동시에 또 그의 사목순방 방식 및 태도와도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사목순방에 대한 최양업 신부만의 독특한 방식을 모르고서는 그의 선종 장소가 “문경의 한 주막촌” 또는 ‘문경지역’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란 더더욱 힘들 것이다.
사목서한에 따라,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은 대체로 5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1850년초~1852년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과 사목활동 이전까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조선교회의 성직자로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최양업 신부만이 활동하던 시기였다. 당시 페레올 주교는 충청도를 맡고 있었고, 다블뤼 신부는 서울-경기지방을 담당하였으며, 최양업 신부는 “전라도 지역에서부터 시작하여 6개월 동안 5개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 신자들을 찾아 순방할 정도로(제7신)” 두 서양 선교사가 감히 하지 못했던 빈자리를 메우는 역할을 맡게 된다. 그 후 다블뤼 신부가 중병으로 사목순방을 할 수 없어서 신학교만 담당하게 되자, 페레올 주교가 경기-서울까지 맡게 되었을 때도 최양업 신부는 여전히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들을 순방하였다. 이 경우 최양업 신부의 사목구역은 서울-경기지역과 일부 충청지역을 제외하고, 이전보다 더 확대되었음은88) 자명하다 할 것이다. 이 시기 최양업 신부는 ‘도앙골’(Toouangcol)(제7신)과 ‘절골’(Tselcol)(제8신)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사목서한을 작성하였다.
제2기는 1852년 메스트르 신부가 사목활동을 시작하여 1856년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장(張) 주교의 입국 전까지다. 이 시기 메스트르 신부의 입국으로 최양업 신부의 활동구역은 메스트르 신부가 서울을 제외한 경기지역과 충청도 일부지역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다소 줄어들긴 하였다. 1853년 2월에 페레올 주교가 선종하고, 1854년 3월에 입국한 장수 양(楊, F. Jansou) 신부도 3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그해 6월에 선종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은 크게 변화되지는 않았다. 다만 같은 해 후반에 이르러, 다블뤼 신부가 건강이 호전되어 신학교 및 페레올 주교가 맡고 있었던 충청도 일부지역을 맡을 수 있게 되고, 그보다 장상인 메스트르 신부가 서울-경기지역을 담당하게 되는 변화 정도만이89) 있었을 뿐이다. 이 시기에 최양업 신부는 분실되어버렸다는 ‘아홉 번째 서한’(1853년 10월 23일)과 ‘동골’(Tongcol)(제10신) 에서 각각 사목서한을 작성하게 된다. 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6일자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교장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서한 제9신을 작성할 무렵, 9월 초순경에 최양업 신부는 다블뤼 신부와 함께 “피정을 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피정을 마친 최양업 신부가 농번기가 시작된 9월-10월에 휴식기를 가진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제3기는 1856년 3월에 제4대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푸르티에 신(申) 신부, 프티니콜라 박(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후부터 1857년 3월 페롱 권(權) 신부가 입국하여 그해 9월 중순 이후 본격적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하기 전까지다. 이 시기는 페레올 주교의 후임으로 베르뇌 주교가 착좌하게 되고, 함께 입국한 신부들이 조선말을 배워 사목일선에 나서게 된다. 또 1857년 3월에는 다블뤼 신부가 부주교로 서임되었다. 이 시기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은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베르뇌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가 맡고 있었던 서울-경기지방을 담당하고, 다블뤼 부주교는 충청도 내포지방에 머물면서 순교자들에 대한 역사편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며, 메스트르 신부는 다블뤼 주교가 머물고 있는 충청도 내포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하게 되고,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 신학교 교장직무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프티니콜라 신부는 나머지 충청도 일부와 경상도 북부지방(칼레 신부가 입국하기 전까지)과 경기도 이남지방을 주로 담당하였다. 따라서 자연히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이 줄어들게 되어 서양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방, 즉 경상도 남부와 전라도 및 경기도 동부와 일부 강원도 지방을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에 최양업 신부는 ‘배론’(Pairon)(제11신), ‘소리웃’(Soriout)(제12신), ‘풀무골’(Poulmoucol)(제13신, 제14신)을 작성하였다. 특히 ‘풀무골’(Poulmoucol)에서 쓴 편지(제13신)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는 “두 번씩이나 페롱 신부의 숙소에서 함께 여러 날 함께 머물렀다”고 술회한다. 당시 페롱 신부는 조선에 입국하여 모처(아마도 손골?)에서 조선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었던 때다.90)
제4기는 페롱 신부가 조선어 공부를 끝내고 1857년 9월 후반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여 경신박해가 일어나기 시작한 1859년 후반까지다. 이 시기 페롱 신부는 경기도 ‘손골’(Soncol)에서 조선말 공부를 무려 6개월 가량하다가 그해 9월 중순이후부터는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맡아 ‘산막골’91)에 은신처를 정하고 사목활동을 전개하였다. 1857년 12월 당시, 충청도 내포지역을 맡고 있었던 메스트르 신부가 선종함에 따라 그곳은 다블뤼 부주교가 담당하게 되고, 이무렵 최양업 신부는 경기도 이북지역(황해도 포함)과 전라도와 경상도 남부지방을 담당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 사이 교우촌들에 대해서는 서양선교사들이 속속 입국하여 어느 정도 사목적 공백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최양업 신부는 주로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에서 휴가를 보냈으며, 휴가 끝에 사목서한을 작성한 장소들로서 곧 ‘오도재’(Otousai)(제15신과 제16신)와 ‘안곡’(Ancok)(제17신과 제18신)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 지명들이 바로 페롱 신부의 관할 구역에 소재하는 지역으로 보아야 한다. 최 신부의 ‘오도재’에서 보내 서한에 따르면, ‘간월’ 근처에 사는 입교한 청년이 새로운 공소를 찾아오게 되고, 페롱 신부의 근황도 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난파선에서 생환한 제주도 사람(아마도 김 펠릭스 베드로?)을 페롱 신부와 함께 만난 사실에 대하여 장황하게 소개한다. 1858년 11월 7일 당시 다블뤼 주교는 〈한국 주요자 순교자 선정〉을 완성하여 파리로 보낸다.
제5기 경신박해가 한창이던 1859년 말부터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1861년 6월까지다. 이때 다블뤼 주교가 서울에 머물고 있는 베르뇌 주교의 병환을 간병코자 상경하였기 때문에, 페롱 신부는 다블뤼 주교의 관할구역까지 담당하게 되었고,92)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던 프티니콜라 신부는 이 무렵 건강이 호전되어 진천지역을 포함한 충청도와 강원도 일부를 맡았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의 관할구역은 더욱 줄어들어 주로 경상도 남부지방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경신박해가 일어나기 직전인 1859년 최 신부는 10월 11일과 12일 ‘안곡’에서 서한 두 통을 작성하여 각기 르그레즈와 신부와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다. 이때 그는 “읍내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다가” 곤혹을 치룬 이야기와 함께 그곳이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인 ‘안곡’이라는 사실을 보도한다. 뿐만 아니라 이때 다블뤼 주교가 최 신부의 일부 관할 공소를 맡아 주었더라는 이야기도 전해주고 있다. 그 후 경신박해를 만나 경상도의 ‘죽림’(Tsouklim)(제19신)93)이라는 곳에 숨어 지내면서 그의 마지막 서한을 작성하게 된다.
지금까지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서한에 따른 사목행로를 점검하였다. 그가 여름철 더위를 피하거나 혹은 농번기를 피해 정기적인 휴식을 취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사목활동은 하루라도 여유 있었던 날이 없이 오로지 사목순방에 투신하여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어느 한 곳을 ‘사목중심지’로 정하여 활동했다거나 신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신학교 교수’로 생활했던 것도 아니고, 더욱이 이미 외국인 선교사들이 자리 잡고 있는 꽤 유명한 교우촌들을 순방한 것도 아니다.
그는 서양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열악한 곳을 택하여 그곳을 ‘우선적 사목순방 대상지역’으로 삼았다. 따라서 자연히 영남, 특히 경상도 남부 지방, 전라도 지방, 그리고 경기도 이북 지역을 담당했을 것(특히 경상도 남부 지방에 꽤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또 최양업 신부의 사목적인 순방방식은 매우 간단하다 하겠다. “저는 밤에만 외교인들 모르게 교우촌에 도착하여야 하고, 공소 순방이 끝나면 한밤중에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녘 동이 트기 전에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제8신) 이러한 순방태도를 견지하면서, 그는 교우촌에 얻은 여러 가지 사안들, 즉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들, 교우들의 신앙생활, 조선사회의 흐름 등등을 수집하고, 판별해내었을 것이다.
또한 순방과 휴식기를 포함하여 볼 때, 그는 몇 날 며칠을 교우촌(공소)에 머무르게 된다면, 그 자신은 물론이고 교우들마저도 박해자들에 노출이 되어 더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그는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따라서 특히 휴가기간이 돌아오면, 그는 적어도 교우촌과 얼마 간 떨어진 역촌이나 주막촌, 원촌 등지나 조용한 곳(사찰)이나 교우들이 없거나 출입이 쉽지 않는 산간마을 등에서 지냈을 것이다.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숙소에서의 상황에 대해서 진술하기를, “ … 하마터면 공소 순방을 중단할 뻔 했습니다. 어떤 여관집의 주인 내외가 부부싸움을 하였습니다. 그 여인이 자기 남편을 골탕 먹이려는 증오심에서 그 여관에 12명의 서양 사람들을 유숙시켰다고 떠벌렸습니다. 즉시 그 여인과 남편이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 이러한 돌발사태 때문에 저는 어쩔 수 없이 공소 순방을 중단하고 더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였습니다. 다행히 얼마 후 그 소문은 거짓으로 판명되었고, 큰 공포도 사라졌습니다.”(제8신)라고 하였다.
(2) 지명(地名) 상에서
최양업 신부가 작성한 19통의 사목서한에는 서한작성 장소와 순방한 지명들이 적잖게 나타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설명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알 길이 없다. 특히 예나 지금이나 조선 땅에는 동일한 땅이름들이나 혹은 유사한 땅이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더더욱 서한에 나타난 지명들의 소재를 구체적으로 파악해보기란 그리 쉽지만은 않다.94) 다만 그의 관할구역의 사목순방행로 상에 비추어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개략적인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 몇 가지 가정(假定)들을 별도로 설정해 볼 수 있다.
첫째, 서한작성 장소에 나타나는 지명의 라틴어식 표기는 최소한 별도의 유사한 지역 이름을 불식시키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최 신부는 제17-18신의 ‘안곡’(Ancok)을 ‘안골’(Ancol) 또는 ‘안실’(Ansil)로 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최 신부가 ‘안곡’을 ‘안골’로 표기하지 않았다면, ‘안곡’이 ‘내대’(Naidai)일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95) 또 ‘풀무골’(Poulmoucol)을 발음이나 혹은 의미상 동일하거나 유사하다고 하여 ‘불무골’(Boumoucol) 혹은 ‘불미골’로 단정하거나 추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죽림’(Tsouklim)을 ‘죽림굴’96)이나 ‘대밭’이나 ‘죽전’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한다. 예외가 있다면, ‘만사니’(Mansani)를 ‘만 산’ 혹은 ‘만사개’와 동일시하지 말아야 하지만, 다만 이런 경우 ‘망상’을 ‘망사이’ 혹은 ‘만사이’ 혹은 ‘만산’이라고 지역어투로 불렸을 개연성만은 인정해야 한다.
둘째, 많은 경우에 있어서, 최양업 신부가 어려운 라틴어 편지를 어떻게 순방기간 동안에 작성할 수 있었겠는가? 혹은 사람들이 오가는 역촌이나 주막촌 등지에서 작성할 수 있었겠는가? 교우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양업 신부가 서한을 작성할 때, 반드시 휴가기간에만 작성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장소가 틀림없이 ‘교우촌’이어야만 한다는 고정관념도 또한 버려야 할 것이다. 예컨대 ‘안곡’ 마을은 라틴어 표기상 “in Ancok dicto pago” 즉 “안곡이라 부르는 일반적인 자연부락”을 가리킨다. 하지만, 양업교회사연구소가 편찬한 《서한집》에는 “안곡이라는 교우촌”으로 번역하고 있다. 즉 안곡이라는 마을 안에 몇몇 소수의 교우들이 살고 있을 수는 있겠지만, 라틴어 표기상으로 볼 때, 안곡은 ‘교우촌’이 될 수 없고, 그저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자연마을’(부락)로 보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최양업 신부가 날마다 순방을 다니고 마친 다음, 숙박할 때는 ‘여관집’(제8신)을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한다. 차기진 박사는 “무을의 안곡은 조선시대 안곡역이 있던 큰 마을인데다가 사람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므로 최양업 신부의 휴식처요 서한 작성지로 볼 수 없을 것 같다”97)고 하였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의 《서한집》의 내용들을 살펴보면, 오히려 최양업 신부는 역촌이나 주막촌을 교우촌보다 더 선호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풀무골’이나 ‘절골’ ‘죽림’ ‘오도재’ ‘동골’ ‘도앙골’ 등은 대체로 사람들의 내왕이 비교적 잦은 지역, 즉 험준하고 사람들이 잘 모여들지 않는 외딴지역을 대표하는 땅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서한의 작성 장소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위에서 우리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활동을 그 연대기적 측면을 고려하여 제5기로 나누어보았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가 서한을 작성할 때, 반드시 충청도나 충청도와 인접해 있는 전라도의 어느 교우촌에 숨어서 작성해야 할 근거나 조건(이유)을 발견하지 못했다. 오히려 “비교적 안전한 곳을 찾아”(제8신) 머물렀으며, 그 ‘안전한 곳’은 당시 시대상황에 비추어 볼 때, ‘교우촌’이라고 보기에는 어색한 점이 많다. 실제로 그가 선종할 당시 머물렀던 곳은 ‘교우촌’이 아니라 문경의 한 주막촌(문경읍 진안 리)98)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넷째, 라틴어표기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다.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번역할 때, 최석우 신부는 문경의 ‘한실’(Hansil)을 ‘하우실’(Hausil)로 이해하였다.99) ‘n’을 ‘u’ 잘못 읽었거나 아니면, 표기상에서 잘못되었거나, 둘 중에 하나가 왜곡되어졌다는 뜻이다. ‘소리웃’(Soriout)(제12신)이 바로 그런 경우다. 연구자들은 ‘소리웃’을 ‘손골’이나 ‘송골’ 혹은 ‘소리울’ 또는 ‘수리울’이라고 주장하기도100) 하였다. 그러나 ‘Soriout’에서 ‘-out’를 ‘col’로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소리웃’은 ‘소리골’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한편, 《상주지명총람》의 저자로 유명한 안동교회사연구소의 조희열은 최근에 새로운 견해를 내놓았다. 즉 ‘소리웃’을 ‘소리웃마’ 혹은 ‘소리윗마을’에서 ‘마을’을 탈락시켜 단순히 발음대로 ‘소리웃’이라고 표기하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최양업 신부의 서한 속에 나타나는 작성소재에 관한 지명들이 반드시 ‘교우촌’이어야 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조정당국의 박해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고, 또 언제 어느 때 관군들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 하에서, 설령 서한을 작성하였더라도 그것을 관군들에게 강탈당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교우촌의 소재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장소’를 서한에다 노골적으로 밝히는 것은 곧 현재는 물론이고 장래 조선교회의 존립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을 최양업 신부가 모르고 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Ⅴ. 오해와 사실(事實) 사이에서 바뀔 수 없는 사실(史實)
역사는 인간이 걸어 온 발자취 혹은 흔적이지만, 그 흔적이 모호하거나 혹은 증거가 불충분할 경우, 더러는 벌어진 사실(事實)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거나 또는 왜곡시킬 우려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행위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심하면 심할수록 역사적 진실(史實)은 그만큼 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크고, 동시에 후대연구자들은 오해나 왜곡된 것에 마치 진실처럼 천착(穿鑿)하고 말 것이다.
최근 차기진 박사는 그의 논문 〈최양업 신부의 행적에 대한 재검토-유학로와 선종지를 중심으로〉라는 글에서 “사실 진천 교우촌들은 1857년 12월에서 다음해 10월까지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이었고, 그는 이때 장 시몬을 공소회장으로 임명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1858년 9월 25일자 페롱 신부의 서한을 제시한다. 그 서한의 내용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가 (1858년 10월 배티로 부임한) 프티니콜라 신부에게 (페롱 신부의) 구역을 나누어 맡도록 하였다”는101) 것이다. 그러나 그 서한 가운데는 ‘장 시몬 회장’을 제외하면, 1757년 경 진천지역의 교우촌들이 페롱 신부의 관할구역이었다던가 혹은 프티니콜라 신부와 나누어 맡도록 한 지역이 ‘배티’였다는 구절은 보이질 않는다.
주지하듯이, 페롱 신부는 적어도 최양업 신부가 1857년 9월 15일 ‘풀무골’에서 작성한 서한(제14신)에 따르면, 모처(아마도 손골)에서 조선말을 공부하고 있었다. 마침내 조선말을 끝낸 페롱 신부는 교구장으로부터 경상도 서북부 지방을 관할할 것을 명받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진천지역’이 페롱 신부의 관할 구역이 아니라 자신의 관할지로 가는 길에 휴식기를 가졌고, 그 기간에 잠시 진천지방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크다. 그로부터 1년 뒤 다시 휴식기를 가질 때, 페롱 신부는 익히 눈여겨 보아두었던 진천 지방을 다시 찾았을 것이다. 만일 이러한 논자의 추측이 터무니없는 것이라 한다면, 달레 신부가 편찬한 《한국천주교회사》를 번역하고 관할 구역에 대해 각주를 단 안응렬, 최석우 두 학자의 견해는102) 한국천주교회사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한 셈이 된다.
둘째로, 차기진은 《한국천주교회사》 하권의 각주 54에 대하여, 논문 〈최양업 신부의 사목중심지에 대한 연구〉에서, 페롱 신부의 관할지 ‘성모승천구역’을 “충청도 북부에서 경상도 서북부”라 하고, 칼레 신부의 관할지 ‘성모취결례구역’을 “경기도, 충청도 일부와 경상도 일부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특별히 페롱 신부의 거처를 ‘서천 산막골’로 비정하였다.103) 그러나 최양업 신부의 서한 제 18신 ‘안곡’에서 작성한 편지에 따르면, 페롱 신부의 거처는 상주지방의 ‘산막골’이며, 그의 관할지는 경상도 서북부 지역이 분명하다 할 것이다. 페롱 신부는 상주지방의 산막골에 거처를 두면서 경상도 서북부지역을 관할하고 있으면서, 다블뤼 주교의 빈자 리(1861년 7월 26일자 서한 참조) 등 선교사들의 유고시에 그 빈자리를 보충해주는 역할을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지 않다면 페롱 신부가 어떻게 충청도 서천에 있는 산막골에서 경상도 서북부지방을 관할할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칼레 신부가 1866년 6월 10일 서한과 1867년 2월 13일자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교님께서는 언제고 일꾼들을 살피시는 가장(家長) 같으신 분이시라, 그동안 제가 돌보던 고(故) 조안노 신부님의 지역으로 페롱 신부님을 보냈습니다. 사실 이 지역의 길들은 훨씬 짧고 다니기도 더 쉽습니다. 대신 저는 페롱 신부님께서 물러나신 험난한 지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꾸어야 할 지역으로 말하면 4개도에 걸쳐 있으니 충청도, 경상도, 남으로는 경남, 중부로는 경기도입니다.”104)
이로 미루어 볼 때, 페롱 신부의 관할지는 1864년 조안노 신부의 선종으로 말미암아 조안노 신부가 관할하던 곳으로 이동되었고, 대신에 칼레 신부는 페롱 신부가 관할하던 경상도 서북부와 최양업 신부가 공을 들이던 경남, 그리고 충청도와 경기도 일부까지 맡았다고 보아야 한다. 1864년 당시 조안노 신부는 ‘성모영보구역’, 즉 충남 공주와 그 인근지방을 맡고 있었다.105)
셋째로, 당시 성직자들의 어떤 장소에 오래도록 머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촌을 ‘사목중심지’랄지 ‘휴식 장소’ 등으로 규정하려는 일부학자들의 견해에는 분명히 어느 정도 오해가 있어 보인다. 설령 서양 선교사들일지라도 아마도 그들의 거주지는 교우촌과 일정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였을 가능성이 짙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최양업 신부는 자신의 서한 ‘풀무골’에서 보낸 제17신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모든 사업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으로 하는 것뿐입니다. 가한 것과 불가한 것을 거스르지 않도록 공포에 떨면서 은밀히 몰래 행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영구적으로나 항구적으로나 정규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신자들이 잘 지내던 교우촌이 내일 불시에 쑥밭으로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동료 사제들이 어느 곳에 거주한다든가, 무슨 성물이나 물건을 맡긴다든가 할 때, 1개월 동안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자리를 잡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나그네 모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106)
넷째, 최양업 신부의 선종지와 가매장지 문제를 기록에 의한 ‘원형근접설’로 설명하려는 태도는 다소 오해가 있어 보인다. 역사비평에 있어서, 사실에 대한 ‘원형’ 또는 ‘근접’은 기록시기가 다른 것과 비교하여 빠름과 늦음에 따른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기록은 ‘직접 들음’과 ‘간접 들음’을 구별하여야 하고, 또 ‘직접 들음’이라 하더라도 사건과 동시대의 것이냐? 사건을 목격한 이의 증언이냐? 혹은 직접적인 제1대 후손의 것이냐 아니냐를 분명히 변별해내야 한다.
차기진 박사는 최양업 선종지와 가매장지107)에 관한 자신의 논문에서 서양선교사들이나 최 신부의 동생 혹은 제수가 증언하고 동생의 아들인 최상종이 기록한 ‘문경 선종설’ 배제하고, 배론에 살고 있었다는 최경신의 증언을 듣고 정규량 신부가 기록한 ‘진천 선종설’을 받아들이고 있다.108) 하지만 이는 명백한 역사오해 또는 왜곡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차기진의 주장대로 설령 최상종이 선종 가매장지와 베르뇌 주교의 장례미사 집전을 잘 몰랐고, 또 선종의 직접적 원인을 “황육에 의한 체증”이라고 기록함으로써 선교사들이 기록한 ‘장티푸스’와 다소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러나 최상종의 삼촌인 최 신부에 대한 기록은 그의 부모로부터 직접들은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문경 선종설’은 변할 수 없는 진실한 증언으로 보아야 한다. 만일 이러한 최상종의 사실적(史實的) 기록을 무시해버린다면, 우리는 최 신부의 선종을 둘러싼 증언들에 대해 그 어느 것도 그 타당성과 신빙성을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다.
사실상 역사연구는 오해와 사실, 왜곡과 진실 사이를 따져서 가려내어 사실과 진실만을 추구하려는 후대인들의 노력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노력의 열매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삶의 잣대가 되고, 나아가 미래에 보다 진실함이 풍부한 인간의 삶, 즉 보다 참된 행복에로 나아가는 밑거름이 된다.
Ⅵ. 나오는 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탄생에서부터 선종에 이르기까지, 즉 그의 생애에 대한 연구는 수많은 연구자들의 연구노력과 그 결과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에 놓여 있다. 그러한 결과물들 가운데 규명하기 어려운 크고도 중대한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최 신부의 사목순방경로, 사목중심지, 최초신학교와 그의 신학교에서의 행적, 그리고 사목서한 작성 장소 및 선종 장소와 가매장지일 것이다. 이 일련의 문제들이 연구자들에 의해 저마다 달리 이해되고 있는 것은 이 방면에 대한 사료들의 부족함도 있겠지만, 그보다 더 큰 관건은 연구자들마다 각기 현재까지 발굴된 사료들을 바라보는 관점 혹은 태도라 할 것이다. 특히 일부 연구자들은 그가 추정하는 결론을 미리 설정한 후, 그 결론을 위해서 여러 가지 사료들이나 가설들을 짜 맞추어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사목중심지와 신학교, 그리고 사목행로와 서한작성 장소 문제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서한들과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사목서한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 외의 전승(구전 포함)들은 역사적 정황을 판단하여 유추하는데 있어서 다만 참고자료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나 반대로 최양업 신부의 선종에 관한 문제는 이들 사목서한 보다는 오히려 구전전승을 1차 사료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역시 어려운 숙제가 존재한다. 수많은 구전전승들 가운데 어떠한 전승에 대해 그 타당성과 신빙성을 부여할 것인가? 여기에서 파생된 문제가 곧 ‘문경 선종설’과 ‘진천 선종설’이다. ‘문경 선종설’은 최양업 신부의 당대 직계 후손들에 의해 증언된 구전이고, ‘진천 선종설’은 당시 배론에 살고 있는 한 교우에 의해 증언된 전승이다. 양자는 기록연도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동시대에 작성되었다. 그렇다면 그러한 구전들이 몇 년에 문자로 기록되었는가?를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최초 증언자가 누구인가?를 따지는 것이 더욱 원형에 충실하는 것이리라 판단된다. 왜냐하면 최초 증언자들이 모두 최양업 신부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면 기록상의 연대기를 수용할 수밖에 없겠지만, 반대로 최양업 신부와 매우 밀접한, 그것도 최 신부의 직접적 형제들이나 조카들이라면 문제는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선종문제에 있어서, 1861년 6월 15일 당시 페롱 신부는, ‘조선’(Coree)에서 작성한 1861년 7월 26일자 그의 서한에 따르면, 베르뇌 주교의 병환을 간호코자 상경한 다블뤼 부주교의 관할구역에서 자신의 관할구역과 병행하여 사목활동을 수행하였다. 이틀 뒤 그는 다블뤼 부주교의 관할구역에서 7월 26일 서한을 발송한 직후 그곳을 떠나 ‘산막골’로 향하였고, 산막골에 도착한 뒤 곧바로 7월 28일자 서한을 작성하여 발송하였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페롱 신부는 최양업 신부 선종 당시 정확한 선종 장소를 알지 못했으며, 다만 “어떤 작은 교우의 집(혹은 작은 교우촌)”이라고만 기록한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109) 뿐만 아니라 최 신부의 임종을 직접 지켜 본 푸르티에 신부는 1861년 10월 20일자 서한에서 “이 해의 주요한 사건은 본방인 도마 신부의 사망이었습니다. 그는 급작히 티푸스에 걸려 15, 6일 간의 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가 누워있는 집은 나의 거처에서 170리 내지 180리 떨어져 있었습니다.”110)라고 증언하였다. 이 증언으로 미루어 볼 때, 최양업 신부가 문경에서 병을 얻어 15, 6일간 진천이나 배티로 가서 선종하였다는 일부 학자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최 신부는 문경 어느 주막집에서 병을 얻었고, 그곳에서 문경 읍내에 있는 평창이씨 약국에서 치료를 받다가 선종하였다고 밖에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만일 정확한 그의 선종 장소가 어디냐고 굳이 따진다면 문경의 ‘주막집’이나 또는 문경읍내의 “평창 이씨가 경영하던 약국”으로 추정해야 옳다고 본다.
최양업 신부의 생애에 대하여, 특히 그의 사목행로와 서한작성 장소 및 그의 선종지역과 가매장 장소 등 몇 가지 문제가 되는 쟁점들을 “교우촌 거기에 존재했었다”는 단순추정논리와 아전인수적인 태도로만 바라보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사실 다른 많은 서양 선교사들의 서한들이나 신변잡기들이 아직까지 번역되지 않았고, 더 많은 기록물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속단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최 신부 서한들의 내용과 그의 제1대 후손들의 증언을 놓고 볼 때, 그는 조선에 입국한 이후 열정적으로 끊임없이 교우촌들을 방문한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더불어 그의 서한내용에 따르면, 그는 어떤 교우촌에서 장기간 머물러서 신학생들과 함께 한다든지 혹은 교우촌 안에 자신의 사제관을 짓고 거기에서 사목활동계획을 세우거나 신자들을 만나지도 않았다고 본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살펴본 여러 가지 정황을 종합해 볼 때, 결국 최 신부는 길 위에서 신자들이나 신학생들을 만났고, 길 위에서 서한들을 작성하였으며, 길 위에서 박해와 마주하였고, 마침내 길 위에서 병을 얻어 몸져누웠으며, 몸져누운 바로 그곳에서 마지막 성사를 받았고, 거기에서 선종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바 ‘길 위’라는 말은 교우들로만 이루어진 ‘순수 교우촌’이 아니라 교우들과 외교인들이 공존하고 있는 지대, 곧 ‘경계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최양업 신부는 “경계선상에 서 있는 사람” 곧 ‘경계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