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원동 성당
간략설명: 원주 지역 선교의 요람이자 7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
도로주소강원도 원주시 원일로 27
천주교 원주교구 주교좌 본당. 본래 명칭은 원주(原州) 본당이었으나 1957년 6월 1일 원주시 학성동에 본당을 분할하면서 원동으로 개칭하였다. 1896년 8월 17일 풍수원(豊水院) 본당에서 분리 · 신설되었으며, 주보는 천주 은총의 모친.
본당의 설립과 발전 부엉골 본당의 부이용(Bouillon, 任加彌) 신부는 1895년에 본당을 장호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우면서, 그렇게 되면 풍수원과의 거리가 멀어져 서로 방문하기가 어려워지므로 그때 풍수원 본당의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와 의논하여 원주에 본당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르 메르 신부는 1896년에 원주 군청에서 가까운 원주읍 상동리(현 가톨릭 센터 자리)에 소재한 대지 350평과 기와집 16칸을 매입한 뒤 그해 8월 17일 풍수원 본당을 정규하(鄭圭夏, 아우구스티노) 신부에게 맡기고 원주(현 원동 주교좌) 본당의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당시 관할 공소는 20개였으며, 교우 총수는 1,137명이었다. 원주 읍내에는 몇몇 신자들만이 있었고, 대부분의 교우들은 공소에 있었기 때문에 르 메르 신부는 주로 공소를 순방하면서 사목하였다. 이와 같이 공소를 순방하는 데는 보통 한 달이 걸렸다.
중앙 종탑에 돔을 얹은 성당 외관. 2004년 등록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2대 주임으로 부임한 리굴로(Rigoulot, 睦) 안토니오 신부는 원주 군수가 전임 신부 때와 달리 돌연 천주교를 악의적으로 대한 데다가 읍내 사람 가운데 입교하는 사람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음에 따라 본당을 시골로 옮기려고 하였으나 1900년 3월 장티푸스에 걸려 선종하고 말았다. 3대 주임으로 부임한 드브레(E. Devred, 兪世竣) 에밀리오 신부는 해마다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여 주일이면 성당이 좁아 신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게 되자, 1902년 사제관 부근의 가옥 열두 채와 그 부지 2,000평을 매입하여 오늘의 성당 터전을 마련하였다. 아울러 이웃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와 협의하여 1904년 4월 용소막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하여 분리하였다.
4대 주임으로 부임한 시잘레(Chizallet, 池士元) 베드로 신부는 성당을 신축하기 위해 목재를 비축하는 등 사목 활동을 하다가 1908년 8월에 다시 신학교로 돌아가고 조제(Jaugey, 楊秀春) 요셉 신부가 5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조제 신부는 문맹 퇴치를 위해 성당 부속 건물에 야학을 설치하고 교우들로 하여금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나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과 함께 일제에 의해 폐쇄되어 학교 설립의 꿈이 무산되었다. 조제 신부는 1913년 건평 70평의 고딕식 성당을 완공하여 뮈텔 주교의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조제 신부가 이듬해 8월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귀국함에 따라 용소막 본당의 시잘레 신부가 원주 본당과 원주 근처의 공소를 관할하고 퇴침이 본당의 손성재 신부와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가 그 나머지 공소를 나누어 관할하였다. 조제 신부는 1919년 10월에 무사히 본당에 귀환하여 다시 본당을 관할하다가 1923년 3월에 서울교구청 경리 신부로 전임하였다.
성당 옆 창문 유리화와 십자가의 길.8대 주임으로 부임한 폴리(Polly, 沈應榮) 데지레 신부는 엄격한 인품과 유창한 강론으로 교우들뿐 아니라 일반 사회인들에게도 많은 감명을 주었으며, 교회 토지를 많이 확보하는 등 교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9대 주임으로 부임한 한국인 사제인 정규량(鄭圭良) 신부는 풍수원 본당 관할의 횡성 공소를 1930년 3월에 본당으로 승격 · 분리시켰으며, 1931년 1월과 1936년 12월에는 봉산동 임야를 매입하여 교회 묘지를 조성하였다. 또한 1931년에는 4년제 과정의 강습소인 소화학원을 설립하였고, 1934년에는 소화유치원을 설립했다. 아울러 같은 해 9월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마련하여 사목 활동을 도우면서 소화학원과 유치원을 맡아 운영하게 하였다. 이 소화학원은 1937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폐쇄되었다. 본당 청년들에게 본당 활동뿐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참여의 폭을 넓히도록 자주 권하던 정규량 신부는 1937년 12월 24일 가톨릭 청년회를 조직하였으며, 1938년에는 문막 공소를 설립하였다.
1939년 4월에 춘천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리 · 설정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사목은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맡게 되었다. 이에 따라 원주 본당에는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버넌(P. Bannan, 安) 파트리치오 신부가 1939년 7월에 11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버넌 신부는,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미국과 아일랜드 출신의 사제들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1941년 12월 감옥에 갇혔다가 곧 미국으로 추방되었다. 이로 인해 공석이 된 원주 본당에는 서울교구 소속의 김교명(金敎明) 베네딕토 신부와 박일규(朴一圭) 안드레아 신부가 각각 12 · 13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 활동을 하였다. 박일규 신부는 1941년에 최양업 신부의 묘비를 세우려고 추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가 광복된 뒤인 1945년 9월에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또한 일본군이 성당 종을 가져가려 하자 성당 문을 가로막고 일본군을 꾸짖어 이를 저지하기도 하였다.
성당 제대.성장과 변모 광복이 되자 다시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디어리(P. Deery, 李) 파트리치오 신부가 14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사목 활동을 하였다. 디어리 신부가 다시 17대 주임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6.25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성당과 유치원이 전소하였다. 이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는 머물 곳이 없어 분원을 1950년 9월에 철수하였다. 부산으로 피난한 뒤 본국으로 갔다가 1951년 10월에 본당으로 돌아온 디어리 신부는 교우들과 함께 불에 탄 벽돌들을 수습하여 소성당을 짓고 창고와 사택을 건립하는 등 폐허가 된 성당을 복구하고자 노력하였으며, 3개월 뒤에 50평의 아담한 성당을 완공하여 300여 명의 교우들과 함께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디어리 신부는 1952년 교우 유지들과 의논하여 중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교구장 승인을 얻지 못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파괴된 성전을 재건하려고 노력한 디어리 신부와 교우들은 마침내 1954년 9월 120평의 시멘트 벽돌 성당을 완공하였으며, 그해 10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디어리 신부는 공소를 돌보는 데도 많은 정성을 쏟아 1952년 가을에 조상준(베드나르도)이 기증한 대지(121평) 위에 후리사 공소 강당(31평)을 지어 축복식을 거행하였으며, 1953년에는 교우들이 감소한 사제리 공소를 폐쇄하여 대안리 공소로 합친 데 이어 매지리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1954년 3월에는 대안리 공소를 분리하여 술미 공소를 설립하였고, 그해 말에는 흥업 공소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활발한 사목 활동에 힘입어 1954년 말에 강원도 16개 본당 중 교세가 제일 높은 본당으로 성장하였다.
돔형 종탑과 십자가.1955년 2월 18대 주임으로 부임한 양대석(梁大錫) 알로이시오 신부는 학성동 872번지의 877평을 학성동 성당 부지로 매입하였으며, 이듬해 1월에는 문막 공소의 강당과 사제관을 건립하였다. 아울러 교우들의 신심 활동을 더욱 강화하고자 1956년 3월에 레지오 마리애를 원주 본당에 최초로 도입하였고, 극빈 가정 어린이들을 위해 주일학교 유치부를 설치하였다. 4월에는 봉산동 교회 묘지를 정비하고 그곳에 대형 십자가를 건립했으며, 신자들에게 교회 서적 읽기를 권유함과 더불어 그 구입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2평 정도의 간이 건물을 지어 성서와 성물 보급소를 설립하였고, 성당 뜰에 화단을 만들고 그 중앙에 약 2m의 성모상을 안치하여 성모성월인 5월에 봉헌하였다. 6월에는 학성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는데, 이때 본당 명칭을 원주에서 원동으로 변경하였다. 1958년에는 매지리 공소를 회촌에서 미촌으로 옮기고 강당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하였으며, 1960년 12월에는 단구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고, 술미 공소를 대안 3리 대수 마을로 이전하고 대수리 공소로 명칭을 바꾸었다.
1965년 3월에 춘천교구로부터 원주교구가 분리 · 설정됨에 따라 원동 본당은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었고, 그해 6월 주교좌성당이 되었다. 양대석 신부는 최초의 본당 주보를 1966년 2월에 발행하였는데, 이 원동 본당의 주보는 오늘날 교구 주보인 “들빛”의 밑거름이 되었다. 19대 주임으로 부임한 최창규(崔昌奎)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교구의 사목 방침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라 라틴어로 된 교적과 각종 성사 대장을 모두 한글로 바꾸었으며, 제대를 향하여 미사를 봉헌하던 것을 교우들을 향하여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성당 내부 시설을 바꾸었고, 11월에는 본당 교우 35명이 출자한 자본금 64,100원을 토대로 원주 신용협동조합을 창립하였으며, 사제관을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리고 1967년 2월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분원을 다시 마련한 뒤 소화유치원 인가를 정식으로 받아 소성당에서 운영하게 되었다.
1990년 축복식을 가진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교육관(소화유치원).이학근(李學根) 베네딕토 신부는 1969년 9월에 21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1970년 1월에는 본당 관할 구역을 조정하여 매지리 공소를 단구동 본당으로 이관하고 금대리 공소를 폐쇄하였다. 2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영섭(李永燮) 신부는 1972년 5월에 봉산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고, 1976년 4월에는 일산동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다. 이영섭 신부가 재임하고 있을 때인 1971년 10월 5일부터 7일까지 원주 문화 방송국의 부정으로 야기된 원주교구의 부정부패 규탄대회가 원동 본당에서 열리고, 또한 1974년 7월 6일 지학순 주교 구속 이후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결성되어 첫 기도회를 갖는 등 시국과 관련한 많은 기도회가 이곳에서 개최됨으로써 원동 본당은 1970년대에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26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규영(李揆榮) 마르코 신부는 1989년 3월에 “원동 가족”지 창간호를 발행하였으며, 7월에는 5층 규모(연건평 600평)의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 교육관’ 기공식을 가졌다. 이 교육관은 착공된 지 1년여 만에 완공되어 1990년 8월에 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축복식을 가졌다.
28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무학(朴武學) 요한 신부는 1995년 7월부터 성당과 수녀원, 교육관을 수리하고 성당 안에 에어컨을 설치하는 등 성당의 면모를 일신시켰고, 10월에는 본당 100년사 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자료 수집과 집필 작업에 박차를 가하였다. 1996년 10월에는 교구장 김지석 주교와 교황대사 블라이티스(Bulaitis) 대주교,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신부, 교구 사제단 공동집전으로 본당 설립 100주년 기념미사를 장엄하게 봉헌하였다. 또한 1998년 2월에 구곡 본당을 분리 · 설정하였고, 1999년 1월에는 “원동 백년사”를 간행하였다. [출처 : 서종태, 한국가톨릭대사전 제9권, 원동 주교좌 본당에서 발췌]
한편 원동 성당은 건축사적으로 돔형 종탑의 독특성과 양호한 보존상태 그리고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의 관련성 등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 12월 31일 대안리 공소(등록 문화재 제140호)와 함께 근대문화유산 등록 문화재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2016년 8월 17일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재청과 원주시청의 지원을 받아 성당 내외부 복원 공사를 시행했다. 원동 주교좌성당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신앙과 양심을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하느님의 섭리를 되새기게 해주는 뜻깊은 순례지이다. [최종수정 2019년 12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