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베덴보리 저서에서 참고 글 4 / 주님의 응답으로 오는 계시와 지각,
그리고 신성한 진리의 입류와 인간의 깨달음에 대하여
- 외면적 기억과 내면적 기억
천비 5212
기억의 지식은 세상과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에서
끌어낸 단어로 형성된 관념들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거나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내면적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천국의 빛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천국과 천국의 빛에서 끌어낸 단어로 형성된 관념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표현할 수 없다.
.. 일반적으로 모든 진리는 선의 그릇이고
기억의 지식들도 마찬가지인데
왜냐하면 이것들이 가장 낮은 진리이기 때문이다.
가장 낮은 진리, 즉 외면적 자연적인 진리는
기억의 지식(알려진 사실)이라고 불리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의 자연적 또는 외적인 기억 속에 있으며
그것들 대부분은 세상의 빛에 의존하고 있는 까닭에
따라서 세상과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에서
끌어낸 단어로 형성된 관념들을 사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거나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면적인 기억 속에 있는 것들은
천국의 빛에 참여하는 한
기억의 지식이라고 불리지 않고 진리라고 불린다.
그것들은 이 천국의 빛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고
단어, 즉 천국과 천국의 빛에서 끌어낸 단어로 형성된 관념들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표현할 수 없다..
.. 내면적 자연적인 진리를 자연적인 진리라고 부르고(5198)
외면적 자연적인 진리를 기억의 지식이라고 부른다..
천비 2471
외면적 기억에는
지상 언어의 모든 표현, 또한 외적 감각의 모든 대상,
그리고 세상에 속한 지식이 포함되고
내면적 기억에는
영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된 관념과
그 관념에서 사고 자체가 형성되는 모든 합리적인 것이 포함된다.
.. 내면적 기억과 외면적 기억 이 두 기억은
완전히 별개이며 서로 분리되어 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래 소유한 외면적 기억에는
지상 언어의 모든 표현, 또한 외적 감각의 모든 대상,
그리고 세상에 속한 지식이 포함된다.
내면적 기억에는
영이 사용하는 언어로 표현된 관념과
그 관념에서 사고 자체가 형성되는 모든 합리적인 것이 포함된다.
그리고 그 관념은 내면적 시각에 속한다.
사람은 이 두 가지 기억의 차이를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그것에 대해 성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육체적 사물 속에 있는 한 그때 그는 마음을 육체적인 것에서
그렇게 멀리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다.
천비 2474
내면적 기억에는
우리가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각인되어 있다.
비록 우리에게 모호하고 희미하게 보였던 것조차도 새겨져 있다.
.. 사람이 보고 듣고 애정을 느끼는 모든 것에 대한 생각과 목적이
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내면적 기억에 심어지고,
설령 외면적 기억에서 지워지더라도
아무것도 잃지 않고 그대로 그에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내면적 기억이란
우리가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 모든 것이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우리에게
모호하고 희미하게 보였던 것조차도 새겨져 있다.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기억은 다음 생에 들어갈 때 사람이 간직하고
그는 점차적으로 그것들을 완전히 기억하게 된다.
이것은 다음 생에서 열리고 그에 따라 그는 판단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그의 생명책이다.
이것은 사람이 거의 믿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사실이다.
그가 모호하게 여겼던 모든 목적과 그의 모든 생각,
그리고 그에 따른 모든 발언과 행위는 가장 작은 요점까지
그 책, 즉 그의 내면적 기억 속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한,
그것들은 마치 대낮처럼 천사들 앞에 공개적으로 제시된다.
천비 5510
자연적인 것에는
교회의 진리(교회에 알려진 신앙의 진리, 종교적 진리)와
기억의 지식(알려진 사실) 이 두 가지가 있는데
기억의 지식이 교회의 진리보다
먼저 자연적인 것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되어야 한다.
이는 신앙의 진리라고 불리는 교회의 모든 진리가
사람의 기억의 지식에 기초하고
자신 안에 있는 기억의 지식으로 구성된 생각을 통해
그 진리를 이해하고 기억에 간직하며 기억에서 불러내기 때문이다.
.. 이것은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 속에서 통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신성에서 나온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신성에서 나온 선은 천적인 것이다..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에 속한 교회의 진리와 기억의 지식
이 두 부분을 모두 통치한다..
자연적인 것에는
교회의 진리(교회에 알려진 진리, 종교적 진리)와
기억의 지식(알려진 사실) 이 두 가지가 있다.
기억의 지식들에 관해서는
영적인 것에 속한 천적인 것, 또는 신성으로부터 온 진리가
그 지식들을 자연적인 것 안에
질서 있게 배치했다는 것이 앞에서 다루어졌고
이제 야곱의 열 아들로 표징된 교회의 진리가 다루어진다.
기억의 지식은 교회의 진리보다
먼저 자연적인 것 안에 질서 있게 배치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진리는 지식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기억의 지식에서 형성된 생각 없이는
아무것도 사람의 이해에 들어올 수 없다.
(교회에 알려진 진리가 자연적인 것 안에 정리되기 전에
기억의 지식이 먼저 자연적인 것 안에 정리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지식이 그 진리를 파악하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부터 습득한 기억의 지식에서 형성된 생각 없이는
아무것도 사람의 이해에, 또는 지성에 들어올 수 없다.)
사람은 신앙의 진리라고 불리는 교회의 모든 진리가
자신의 기억의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과
자신 안에 있는 기억의 지식으로 구성된 생각을 통해
그것을 이해하고 기억 속에 간직하고
기억에서 불러낸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교회에 알려진 모든 진리,
즉 신앙의 진리라고 불리는 모든 진리가
사실 자신이 아는 사실적 지식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즉 그가 파악하고, 기억에 간직하고,
알고 있는 지식에서 형성된 생각의 도움으로
거기서 그 진리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른다.)
천비 5881
기억의 지식과 진리는 오직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만
묶음 형태로 배열된다.
즉, 자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는 지옥의 형태로 배열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는
천국의 형태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고
속사람의 선과 겉 사람의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동안
진리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그때 진리들은 다른 배열을 겪기 때문이다.
‘창 45:3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나는 요셉이라
내 아버지께서 아직 살아 계시니이까
형들이 그 앞에서 놀라서 대답하지 못하더라)
.. 형들이 그 앞에서 당황했기(놀람) 때문이다.’
이것이 그들 사이에 소동을 의미한다는 것은 "당황함"이
소동을 의미하는 것 외 다른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분명하다.
소동은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진리를
새롭게 배치하고 재 정렬 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질서에 관하여, ‘기억의 지식과 진리’가 사람의 기억 속에
배열되는 순서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주님을 기쁘시게 할 때는 천사에게 알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하다.
이는 그것이 놀라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작은 묶음처럼 결합하고,
또 작은 묶음 자체가 서로 결합하며,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마음으로 파악한 사물의 상호 연결과 일치한다.
사실 지식과 진리의 이러한 묶음 방식의 결합은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놀랍다.
다음 생에서는 그들이 때때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 영적인 빛인 천국의 빛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세상의 빛에서는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억의 지식과 진리는 오직 사람의 사랑에 의해서만
이러한 묶음 형태로 배열된다.
즉, 자기와 세상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는 지옥의 형태로 배열되고,
이웃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에 의해서는
천국의 형태로 배열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거듭나고
속사람의 선과 겉 사람의 진리의 결합이 이루어지는 동안
진리들 사이에는 동요가 일어나는데
왜냐하면 그때 진리들은 다른 배열을 겪기 때문이다.
이 혼란이 여기서 묘사되고 있으며,
그들이 당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한다.
그때 일어난 동요는 이전 상태의 변화,
즉 그 상태에 있었던 기쁨의 상실에서 생기는 불안으로 나타난다.
이 동요는 또한 지난 삶에 대한 불안으로 나타난다.
즉, 그들은 내적 선과 내적인 것 그 자체를
그들의 마음의 가장 낮은 부분으로 밀어냈기 때문이다..
- 주님의 직, 간접 입류
천비 9683
외적인 것에 승계되는 내적인 선들의
질서에 맞는 정렬이나 배치는(arrangement and setting)
개개의 모든 대상들 안에서 그 수용에 따라 다양하고,
또 그 수용은 모든 이들의
이 세상에서의 영적인 삶이나 도덕적인 삶에 따른다.
주님은 또한 각 개인에게 직접 입류하시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직접적인 입류가 없다면
간접적인 입류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 천국적 생명을 이루는,
따라서 사람이나 천사에게 있는 영원한 생명을 이루는
모든 선에 있어서의 상황은 이러하다.
선에 속한 가장 안쪽 중심은 주님 그분 자신이시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직접 나온 사랑의 선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선은 상호적인 사랑에 속한 선이고
그 다음에는 이웃을 향한 인애에 속한 선이고
그 마지막이 신앙에 속한 선이다.
이것이 곧 가장 안쪽 중심에서 시작되는 선의 형태들이
서로를 승계하는(succeed) 순서다.
이렇게 볼 때 직접적인 입류와 간접적인 입류의 경우가
어떠한지 잘 알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순서에 따라 승계되는 선은
그 자체 안에 내적인 선을 더 많이 지니고 있을수록
그만큼 더 외적인 선이라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가장 안쪽 중심의 선이신 주님으로부터
그 정도만큼의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적인 것에 승계되는 내적인 선들의
질서에 맞는 정렬이나 배치는(arrangement and setting)
개개의 모든 대상들 안에서 그 수용에 따라 다양하고,
또 그 수용은 모든 이들의
이 세상에서의 영적인 삶이나 도덕적인 삶에 따른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은
모든 이들에게 영원히 남기 때문이다.
주님은 또한 각 개인에게 직접 입류하시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직접적인 입류가 없다면
간접적인 입류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주님의)직접적인 입류는
사람이나 천사에게 있는 질서에 의해,
따라서 신성에서 비롯된 신성한 진리에 의해 수용되는데
이는 신성한 진리가 그 질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에 속한 삶을 사는 것,
다시 말해 주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다.
이 입류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의지에 속한 모든 개개의 충동 속으로 들어가
가능한 한 그것을 참된 질서의 방향으로 전환시킨다.
왜냐하면 사람의 고유한 의지는
그 사람을 계속 질서에서 떼어놓으려 하기 때문이다..
천비 5147
사람의 극내적인 것에 자리하고 있는 사랑의 선은
주님으로부터 직접 입류한 선이고
이를 승계하는 내면적인 선들은
등차들(degrees, 단계들)을 거친 간접 입류의 선들이다.
.. 주님으로부터 온 선은
사람의 극내적인(inmost) 것을 통하여,
그리고 거기서부터 마치 사다리의 계단에 의하듯
등차들(degrees, 단계들)을 거쳐 내면적인 것들에 입류한다.
이는 극내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가장 완전한 상태 안에 존재하고
그러므로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선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나 보다 낮은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선을 받으려 할 경우
그것들은 그것을 불영명하게 만들든지
왜곡해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상대적으로 보다 더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 297
주님은 사람의 가장 내적인 면을 통해 가장 외적인 면을,
또 동시에 가장 외적인 면을 통해 가장 내적인 면을 다스리신다.
주님의 이러한 입류를 직접 입류라고 하고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입류를 간접 입류라고 한다.
간접 입류는 직접 입류에 의해 유지된다.
.. 천사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의 모든 것들이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듯
사람에게 있는 생명의 모든 것들도 역시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특별하게는(in particular, 개별적으로는)
주님에 의해 ‘천사들이나 영들’을 통하여 다스려지고,
그리고 일반적으로는(in general, 보편적으로는)
주님에 의해 ‘천국’을 통하여 다스려지기 때문이다. (천비 6466)
.. 내가 보아서 알게 된,
보다 높고 또 보다 낮은 천국의 천사들의 애정과 사고의 차이
그러므로 언어의 차이는
서로 공통된 것이 하나도 없는 정도였다.
그리고 오가는 것은 상응(correspondences)을 거처서만 되고
상응은 모든 천국으로 들어가는 주의 직접적 입류(direct inflow)와
또 가장 높은 천국을 거쳐 가장 낮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간접적 입류(indirect inflow)로 있는 것이다.. (사랑과 지혜 202)
..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영혼(soul)을 통해 입류하고
또 이것을 통해 그의 마음(mind),
즉 그것의 애정(affections)과 생각(thoughts)에 입류하고
또 이것들을 통해 육체의 감각, 언어, 행동으로 입류한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영혼에
그리고 육체는 마음에 예속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은 두 생명을 갖는데
하나는 의지에 속한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해에 속한 것이다.
사람의 의지에 속한 생명을 사랑에 속한 선이라고 하고
거기서 파생된 것은 애정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사람의 이해에 속한 생명을 지혜에 속한 진리라고 하고
거기서 파생된 것을 생각이라 불리운다.
마음은 이 양자를 통해 살아간다.
그리고 감각, 언어, 행동 따위는 육체에 속한 생명들이다.
이러한 모든 것은
영혼에 의해, 마음을 통하여 존재한다. ..
사람의 영혼은
보다 높은 영적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입류를 받고
사람의 마음은
보다 낮은 영적 실체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영계를 통해 간접적인 입류를 받는다.
이에 반해 육체는
그것이 물질이라 부르는 자연에 속한 실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자연계를 통해 간접적인 입류를 받는다.
(영혼과 육체의 교류 8항)
천국과 인류와의 결합에 대해 더 설명하는데 있어
특기할 것이 있다.
주님 자신은 각 사람에게 천국의 질서에 따라 유입하시는데
이때 사람의 가장 내적인 차원과 가장 외적인 차원,
둘 다로 유입하신다.
주님은 사람의 가장 내적인 면을 통해 가장 외적인 면을,
또 동시에 가장 외적인 면을 통해 가장 내적인 면을 다스리시며
그렇게 사람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게 하여
사람이 천국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조처하신다.
주님의 이러한 입류를 직접 입류라고 하고,
천사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입류를 간접 입류라고 한다.
간접 입류는 직접 입류에 의해 유지된다.
직접 입류, 즉 주님 자신의 입류는
주의 신적 인성에서 나와 사람의 의지 안으로 들어가고
의지를 통해 사고 안으로 들어간다.
즉, 선으로 들어가고 선을 통해 진리로 들어간다.
사랑으로 들어가고
사랑을 통해 신앙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 반대방향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사랑 없는 신앙이나 선 없는 진리,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은 사고 속으로는 더더욱 들어가지 않는다.
이 신적 입류는 그침이 없지만,
선한 사람에게는 선으로 받아들여지나
악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악인은 신적 입류를 거부하거나 질식시키거나 변질시킨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악하다.
악한 삶은 영적으로는 죽음을 의미한다.
천비 8701
신성한 진리의 유입은
사람이 거듭날 때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두 번째 상태, 즉 사람이 거듭났을 때는
직접적이고 동시에 간접적이다.
그 입류가 직접적일 때
사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와 함께 입류하시지만
그럼에도 그때 선은 지각되지 않고 다만 진리만 지각된다.
그러므로 그때 그 사람은 진리의 인도를 받고
결코 선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입류가 직접적이며 동시에 간접적이라면
그때는 선을 지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간접적인 입류는
사람의 외적이고 감각적인 곳까지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얻는 결론은
그때 주님은 선에 의해 사람을 이끄신다는 것이다.
출 18:18 “이 일을 자네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이 말씀은 다른 원천으로부터 유입되는
‘선에서 비롯된 진리(truth from good)’가 없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모세가 표징하는 ‘신성에 속한 진리’에 관해 언급할 때
오직 그것(신성에 속한 진리)으로부터 비롯된 진리의 입류만 있고
그것과 동시에 어떤 다른 원천에서 비롯된
진리의 입류가 없다는 의미로 ‘혼자서 그 일을 한다.’ 라는
말의 뜻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의 경우가 어떠한지는 위에 언급한 것에서(8685항),
곧 신성에 속한 진리의 직접적인 입류,
그리고 그것의 직접적인 입류와 동시에 간접적인 입류에 관해
언급된 내용에서 잘 알 수 있다.
신성한 진리의 입류는
사람이 거듭날 때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직접적이지만
두 번째 상태, 즉 사람이 거듭났을 때는
직접적이고 동시에 간접적이다.
그 입류가 직접적일 때
사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와 함께 입류하시지만
그럼에도 그때 선은 지각되지 않고 다만 진리만 지각된다.
그러므로 그때 그 사람은
진리의 인도를 받고 결코 선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입류가 직접적이며 동시에 간접적이라면
그때는 선을 지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간접적인 입류는
사람의 외적이고 감각적인 곳까지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얻는 결론은
그때 주님은 선에 의해 사람을 이끄신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이 선에 속한 애정으로 인해 행동할 때까지는
중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그는 선을 원하고
그 선을 행하는 그에게는 그것이 기쁨이요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상태에 있을 때
그의 생명은 선에 속한 생명이고 그는 천계에 있다.
왜냐하면 천계에서 보편적으로 다스리는 것은
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에 속한 진리는
사람을 선으로 인도하고 따라서 천계로 인도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천계에 두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저 세상에서는
모두 의지에 속한 생명에 일치하여 결합하고
이해에 속한 생명에 따라서는 결합하지 않기 때문인데
이는 의지가 존재하는 곳에는 당연히 이해가 존재하지만
그러나 그 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천계에 있지만
다른 것은 지옥에 있는 것과 같다.
악한 자들은
그들이 그들의 생명에 속한 악 안에 있을 때까지
지옥으로 보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런 것 안에 있을 때
그들은 역시 그들의 악에 속한 거짓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 안에 있는 자들은 천계 안에 있고
그리고 그들의 선에 속한 진리 안에 있다.
저 세상에서는 모두 종국에
하나의 마음 상태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이 원한 것은
그들이 생각한 것이어서
그들은 원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다르다.
왜냐하면 거기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실제로 그는 이것을 그의 이해에서 보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의도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개혁되기 위해서다.
다시 말해 그가 악을 원한다고 해도
선을 이해하고 그리하여
그 이해에 의해 선으로 인도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저 세상의 모두는
그가 이 세상에 있을 때 얻은 의지에 따라 인도된다.
천비 6472
주님은 천국을 통해서는 간접적으로 입류하시고
주님 자신으로부터는 직접적으로 입류하시는데
주님 자신으로부터는
사람의 내면적인 것들, 곧 사람 마음의 합리적인 것들(차원들)
그리고 사람의 외면적인 것들, 곧 사람 마음의 자연적인 것들
양쪽 모두에 입류하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두 부류의 생명의 입류,
즉 생각에 속한 생명과
의지에 속한 생명의 입류의 성질이 어떠한지가
계시(revelation)를 통해 나에게 알려졌다.
주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입류하시는데
천국을 통해서는 간접적으로 입류하시고
주님 자신으로부터는 직접적으로 입류하신다.
그리고 주님 자신으로부터는
사람의 내면적인 것들, 곧 사람 마음의 합리적인 것들에,
(rational levels, 합리적 차원들에)
그리고 사람의 외면적인 것들,
곧 사람 마음의 자연적인 것들(natural levels, 자연적 차원들)
양쪽 모두에 입류하신다.
주님으로부터 비롯되는 입류는
사랑에 속한 선과 신앙에 속한 진리이다..
천비 5150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 자체는
주로 내면적 합리적인(interior rational) 것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형태는
보다 완벽하고 수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은
외면적 합리적인(exterior rational) 것이나 자연적인 것에도
직접적인 방법이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입류하는데
주님의 신성 자체로부터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내면적 합리적인 것을 통해서는 간접적으로 입류한다.
..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천국에 입류하는 것,
즉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 자체는
주로 내면적 합리적인(interior rational) 것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는 형태는
보다 완벽하고 수용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의 신성으로부터 비롯된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은
외면적 합리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에도
직접적인 방법이나 간접적인 방법으로 입류하는데
주님의 신성 자체로부터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내면적 합리적인 것을 통해서는 간접적으로 입류하고
직접적으로 입류하는 것은 스스로 질서를 갖지만
간접적으로 입류하는 것은 질서에로 두어져야 한다.
이것이 외면적 합리적인 것 안에 일어나는 현상이고
마찬가지로 자연적인 것에서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천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천적인 것은 신성한 선에서 비롯되고
영적인 것은 신성한 진리에서 비롯되는데
이들 양측 모두 주님에게서 비롯된다.
이들이 합리적인 것 안에 있을 때 그것들은
합리적인 것 안에 있는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들이 자연적인 것 안에 있을 때에는
자연적인 것 안에 있는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합리적인 것이나 자연적인 것은
사람이 천적인 것이나 영적인 것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에 한해서
그 사람 자신을 의미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합리적인 것은 그의 내적인 것을 뜻하는 것에,
그리고 자연적인 것은 그의 외적인 것을 뜻하는 것에 사용된다.
입류를 통해서 그리고 그 수용에 따라
사람은 천적 또는 영적이라고 부르는데
만일 주님의 신성한 선이 의지의 영역에 영접되었으면
천적인 사람이라고 부르고
그것이 사람의 이해(또는 지성)의 영역에 수용되었으면
영적인 사람이라고 부른다.
천비 6240
참된 합리적인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 사람은 선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이 없고
다만 어떤 것이 진리라는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인식의 결과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참된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연적(interior natural)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하겠다.
속사람의 지성은 "합리적"이고,
겉 사람의 지성은 "자연적"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합리적인 것은 내적이고 자연적인 것은 외적이며,
그들은 서로 완벽하게 구별된다.
그러나 참으로 합리적인 사람은 천적인 사람이라고 불린다.
그 사람은 선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에 대한 지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각이 없고
다만 어떤 것이 진리라는 지식만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렇게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한 인식의 결과로 양심을 가진 사람은
참된 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라
내면적인 자연적(interior natural)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이 주님의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람이 많은 주제에 대해
능숙하게 추론하고 한 추론을 다른 추론과 연결하여
그가 도출한 결론이 진리인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사악한 사람들에게서도 발견되는데
그들은 악이 선이고 거짓이 진리라고 능숙하게
추론하고 설득할 수 있으며, 또 선한 것은 악하고 참된 생각은
거짓이라는 추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찰하는 사람은 이것이 사악한 상상력이며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합리적인 것은(합리성은) 선한 것이 실제로 선하고
이것으로부터 참된 것이 실제로 참되다는 것을
내적으로 보고 지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의 시각과 지각은 천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주님의 영적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내면적으로 자연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들이 부모와 스승으로부터 배우고
나중에 스스로 확고히 세운 것만을 진리로 인정할 뿐
그들이 스스로 확고히 세운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이 진리인지
내적으로 보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천적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후자가 합리적인 사람이고
전자가 내면적인 자연적 사람인 이유다..
- 주님의 유입은 속사람으로부터 합리적 사람을 거쳐
겉 사람에 작용함으로 겉 사람의 외관적인 선과 진리를 속사람,
즉 신성한 사람과 결합된 진정한 선과 진리로 바꾼다.
천비 1707
모든 사람 안에서의 속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사람에게 부여하신 선과 진리가 거기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주님은 속사람으로부터
내면적인 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에 유입(작용)하시고,
또 이를 통해 겉 사람에 유입(작용)하심으로
겉 사람의 외관적인 선과 진리를 속사람, 즉 신성한 사람과
결합된 진정한 선과 진리로 바꾸신다.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창 14:14)
.. "아브람의 조카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다" 는 것은
겉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지각하는 것,
즉 12절에서 말했듯이 외관상의(apparent) 선과 진리가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분명하다.
.. 속사람이 내면적인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유입되는 것은
비밀한 일이며, 특히 지금과 같이
내면적인 사람이 무엇인지, 더욱이 속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나 이 유입의 본질을 여기서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모든 사람 안에서의 속사람은 오직 주님께만 속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린 시절부터
사람에게 부여하신 선과 진리가 거기 저장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 주님은 속사람으로부터
내면적인 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으로 유입(작용)하시고,
또 이를 통해 겉 사람으로 유입(작용)하신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인간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러나 속사람에게서 그 중간의 내면적인 사람으로,
그리고 다시 겉 사람으로 흘러드는 유입은 두 가지가 있다.
천적인 것들과 영적인 것들,
같은 말로 선이나 진리에 의해 유입하신다.
천적인 것들 또는 선에 의한 유입은
지각이나 양심을 부여받은 거듭난 사람에게만 일어남으로
그러한 유입은 지각이나 양심을 통해 이루어지고
따라서 천적인 것들에 의한 유입은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존재한다.
그러나 주님은 영적인 것들, 즉 진리를 통해서는
모든 사람 안으로 유입하시며, 그러한 유입이 없었다면
아무도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선과 진리를 왜곡하고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에 전혀 관심이 없을 때
천적인 것들, 즉 선의 유입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천적인 것들과 선의 길이 닫혀 있더라도
영적인 것들, 즉 진리의 유입은 여전히 일어나고
(진리의 영향력은 여전히 미치고) 그 길은 항상 열려 있다.
이것은 내면적인 사람, 즉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위치한
합리적인 사람의 본성을 명확히 보여준다.
여기서 '아브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에 위치한
내면적인 사람 안에 있는 속사람을 의미한다.
천적인 것들, 즉 선들이
속사람으로부터 내면적인 사람으로 흘러들(작용할) 때,
속사람은 내면적인 사람을 자기 자신에게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내면적인 사람은
여전히 속사람과 구별되는 상태를 유지한다.
이는 속사람이 내면적인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흘러들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때 속사람은
겉 사람 역시 자기 자신에게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겉 사람은 여전히 내면적인 사람과
구별되는 상태를 유지한다.
이것이 바로 겉 사람의 상태가 어떠하다는 것을
주님의 속사람이 내면적인 사람 안에서
지각하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분의 속사람은 겉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즉 겉 사람이 진정한 선과 진리가 아닌
외관상의 선과 진리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은 그의 겉 사람이 수많은 적들과 싸우는데 사용한 무기였다.
그분의 속사람이 이것을 지각했을 때,
즉 그분의 겉 사람이 진정한 선과 진리가 아닌
외관상의 선과 진리에 사로잡혀 그것을 무기로 수많은 적들과
싸우는 상태였다는 것을 지각했을 때
속사람이 유입하여(영향력을 행사하여) 모든 것을 질서 있게
회복시키고 겉 사람을 괴롭히는 것들로부터 그를 해방시켰다.
이런 식으로 그의 속사람은 외관상의 선과 진리를 정화했는데
그는 그들을 외관적인 선과 진리에서 진정한 선과 진리로 바꾸고
따라서 그분의 속사람, 즉 신성한 사람과 결합된
선과 진리로 바꾸었다.
이러한 결합은 앞서 언급했듯이 내면적인 사람을 통해 이루어졌다.
천비 1732
내면적인 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은 속사람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게 하여 천적, 영적인 것들의 소통이 이루어지게 한다.
.. "아브람"은 앞서 말했듯이 속사람, 즉 여호와와
결합해야할 내면적인 사람 또는 합리적인 사람을 뜻하며
이와 같은 결합은 시험에 속한 싸움과 그것의 승리로 성취된다.
사실 내면적인 사람은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 중간에 위치하여
속사람이 겉 사람에게 흘러들 수 있게 한다.
이 내면적인 사람이 없으면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 아무런 소통도 없다.
소통이 있다면 그것은 천적, 영적인 것들과의 소통이다..
- 지성적인 진리는 주님 것이고
사람에 속한 것은 진리의 외현인 신앙의 진리뿐이다.
주님은 구원을 위해 양심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
지성에 속한 것을 의지에서 분리하셨다.
천비 1904
각 사람 안,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성적인 진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것이다.
이 지성적인 진리로부터 주님은 합리적인 것에 입류하시는데
여기서 진리는 처음 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그 사람의 것인 양) 나타난다.
그리고 주님은 합리적인 것을 통해 기억의 지식 안으로 입류하신다.
사람은 지성적인 진리로부터는
자기 스스로 하듯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다만 합리적인 진리와 기억의 진리로부터는
자기 스스로 하듯 생각할 수 있다.
.. 서로 다른 두 가지 애정이 있다.
선에 대한 애정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다.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주도권을 잡는다.
(진리에 대한 애정이 앞선다.)
왜냐하면 그는 선을 위해 진리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선을 위해 진리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거듭난 후에는 선에 대한 애정이 주도권을 잡고,
이제는 선에서 비롯된 진리에 대한 애정이 그를 움직인다.
(주도권을 잡은 선이 그에게 진리에 대한 애정을 준다.)
선에 대한 애정은 의지에 속하고, 진리에 대한 애정은 이해에 속한다..
선과 진리는 그 자체로 보면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고
사랑이나 애정에서 생명을 얻는다.
그것들은 단순히 생명이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다.
따라서 사랑이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을 생산하는 것처럼
생명도 그러한데 왜냐하면 생명의 모든 것이
사랑이나 애정의 모든 것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지성적인(Intellectual, 직관적-Intuitive) 진리는
합리적인 진리와 구별되고, 합리적인 진리는 사실적인 진리
(기억에 속한 지식의 형태로 된 진리)와 구별된다.
이는 내적인 것, 중간적인 것, 외적인 것이 구별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성적인 진리는 내적이고 합리적인 진리는 중간이며
사실적인 진리는 외적이다.
이들은 이편이 저편보다 더 내적이기 때문에 서로 확연히 구별된다.
각 사람 안,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지성적인 진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고 그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것이다.
이 지성적인 진리로부터 주님은 합리적인 것에 입류하시는데
여기서 진리는 처음 그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그 사람의 것인 양) 나타난다.
그리고 주님은 합리적인 것을 통해 기억의 지식 안으로 입류하신다.
이것에서 명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은 지성적인 진리로부터는
자기 스스로 하듯 생각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고
다만 합리적인 진리와 기억의 진리로부터는
자기 스스로 하듯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하듯 생각할 때
우리는 지성적인 진리에 근거해서는 생각할 수 없고
오직 합리적이고 사실적인 진리에 근거해서만 그처럼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마치 그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천비 1914 (글 4에 있음)
천비 2053, 863
사람에게는 순수한 지성적인 진리, 즉 신성한 진리는 없다.
사람에게 속한 신앙의 진리는 감각의 오류가 붙어 있는
진리의 외현(appearances)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이러한 불순한 진리들 안에서
사람과 자신을 결합시키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들을 순수함과 사랑으로 살리고,
활력을 불어넣어 양심을 형성하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양심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
지성에 속한 것을 그의 의지에서 분리하셨고
양심에 인애를 불어넣으셨다.
이 기적적인 섭리의 행위가 없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창 17:13 “내 언약이 너희 육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 이 말은 주님이 사람의 불순함 속에서
그와 결합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 경우는 다음과 같다.
사람에게는 순수한 지성적인 진리, 즉 신성한 진리가 없다.
사람에게 속한 신앙의 진리는 진리의 외현(appearances)일 뿐이고
감각의 오류가 이에 붙어 있으며
이 오류에 자아와 세상 사랑의 탐욕에 속한 허위가 붙어 있다.
사람에게 속한 진리는 이와 같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이러한 불순한 진리들 안에서
사람과 자신을 결합시키신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것들을 순수함과 사랑으로 살리고,
활력을 불어넣어 양심을 형성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양심을 형성하는 진리들은
종교적 신념에 따라 사람마다 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들이 신앙의 선에 어긋나지 않는 한
주님은 그것들을 침해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그것들을 자신에게 받아들이고
거룩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에 주님은 아무도 꺾지 않으시고 다만 굽게 만드신다.
(The Lord breaks nobody, but bends him.)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종교적 사상마다
양심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그 진리들이 신앙의 순수한 진리에 더 가까워질수록
그 양심은 더 나은 양심이다.
양심이 이런 유형의 신앙의 진리들로부터 형성되기 때문에
그것은 인간의 지성적인 부분에서 형성되었다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진리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지성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부분을 의지 부분으로부터
기적적으로 분리하셨다. (천비 2053)
.. 어떠한 신앙의 진리도 사랑이나 인애에 있는 선에서
비롯되지 않는 한 그것은 존재할 수 없다.
이는 마치 의지에서 비롯되지 않고는
참된 지성이 있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의지를 제거하면 이해도 없고 마찬가지로
인애를 제거하면 신앙도 없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는 단지 탐욕일 뿐이므로 주님은
그의 지성에 속한 것, 즉 신앙의 진리가
의지에 의해 이기적인 욕망에 빠지지 않도록
기적적인 조치를 취하셨다.
주님은 양심이라는 특별한 수단을 통해
지성에 속한 것을 그의 의지에서 분리하셨고
양심에 인애를 불어넣으셨다.
이 기적적인 섭리의 행위가 없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천비 863)
- 영적인 마음이 닫히면 악이 거주하는 자연적인 마음은
천국에서 오는 모든 것에 저항한다.
신적사랑과 신적지혜 270
악은 자연적인 마음에 거주하며
악 그 자체로 영적인 마음에 저항한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모든 악들과 그에 따른 거짓들은
자연적인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이유는 자연적 마음은 그 형태가 자연계의 이미지인 반면
영적인 마음은 그 형태가 천국의 이미지이며 악은 천국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적인 마음은 출생 시부터 열려 있는 것이 아니고
열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날 뿐이다.
더욱이 자연적인 마음은
자연계의 실체로부터 그 형태의 일부를 취하지만
영적인 마음은 오직 영계의 실체로부터 그것들을 얻는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게 하기 위하여
이 영적인 마음을 흠이 없도록 잘 간수하여 주신다.
왜냐하면 사람은 동물과 비슷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그러나 사람은 온전한 하나의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자연적인 마음은 그것에 속한 것들과 더불어
오른쪽으로부터 왼쪽으로 선회하지만
영적인 마음은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선회한다.
따라서 이 둘은 서로 상반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악은 자연적인 마음에 거주하며
악 그 자체로 영적인 마음에 저항한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이다.
더욱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의 선회는
아래로 내려가는 즉 지옥으로 향하는 것이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의 선회는 위로 올라가는 즉 천국을 향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다음의 관찰에서 나에게 분명해졌다.
악령은 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릴 수 없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만 돌릴 수 있지만,
선한 영은 몸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릴 때는 힘들지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릴 때는 쉽다.
그들의 돌림은 그들의 마음에 속한 내면의 흐름과 일치한다.
신적사랑과 신적지혜 261
영적인 마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천국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마음은 그 형태가 곧 하나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연적인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마음은 그 형태가 곧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마음이 닫혀 있을 때 자연적인 마음은
천국에서 오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영적인 마음이 닫혀 있으면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인 마음으로부터 오는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 방향으로 행동하며 그것으로부터 무언가가 흘러들어와
자신의 상태를 방해할까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영적인 마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천국에서 온 것이다.
왜냐하면 영적인 마음은 그 형태가 곧 하나의 천국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자연적인 마음에 흘러들어오는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적인 마음은 그 형태가 곧 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적인 마음이 닫혀 있을 때 자연적인 마음은
천국에서 오는 모든 것에 저항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세상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경우에 한해서만은 예외다.
천국에 속한 것들이
자연적인 마음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될 때
그 수단들이 천국적인 것처럼 보이더라도 여전히 자연적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의 품질을 좌우하는 것은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것들은 실제로 자연적인 사람에 속한 지식들처럼 되어
그 안에 생명이 전혀 없다.
그러나 천국적인 것들은 이런 식으로 자연적인 것들과 결합되어
하나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고
따라서 자연적인 사람들 안에 있는 천국적인 것들은
단지 그 안에 있는 자연적 사물을 둘러싼 주변에 자리 잡는다.
그 결과 자연적인 사람들은 내적으로는 반대로 생각하면서도
천국에 속한 것들을 말하고 선포하며
또 행동으로 그것들을 모방할 수도 있다.
그들은 혼자 있을 때는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대중 앞에서는 다른 식으로 행동한다.
신적사랑과 신적지혜 263
개혁 이전의 자연적 마음의 상태는
나선형이 아래로 비틀거나 구부러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개혁 후에는 나선형이
위로 비틀거나 구부러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 전에는 사람이 지옥을 향해 아래로 바라보지만
개혁 후에는 천국을 향해 위로 바라본다.
그러나 영적인 마음이 열렸을 때
자연적인 마음의 상태는 전혀 다르다.
영적인 마음이 열리면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인 마음에 복종하는 쪽으로 기울어지고 그것에 종속된다.
영적인 마음은 자연적인 마음 위 또는 내부에서 작용하여
자연적 마음 안에 있는 반대 요소를 제거하고
자신과 조화를 이루는 요소를 자신에게 적응시킨다.
이런 식으로 매우 심하던 저항이 차츰 제거된다.
.. 자연적인 마음이 그 자체로 악하고 거짓된
사랑의 기쁨과 생각의 만족에 의해 자극을 받을 때
자연적 마음의 반응은 영적 마음에 속한 요소들을 제거하고
그것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걸어 잠근다.
그 결과, 모든 행동은 반응과 일치하는 것에 의해 통제된다.
따라서 영적 마음의 행동과 반응에 반대되는
자연적 마음의 행동과 반응이 생긴다.
이것은 영적인 마음이 다시 닫히게 하는데 마치 나선이 반대
방향으로 휘는 것과 같다.
반면에 영적인 마음이 열리면
자연적인 마음의 작용과 반작용이 역전된다.
왜냐하면 영적인 마음은 위에서 또는 내부에서 작용하고
동시에 자연적인 마음속에 있는 내부 또는 외부에서
그것에 복종하도록 배치된 요소들을 통해 작용하며
자연적인 마음이 작용하고 반응하는 나선을
반대 방향으로 비틀기 때문이다.
이 자연적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영적 마음에 속한 것들과 반대되는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러한 반대는 부모로부터 유전으로 유래한다.
이러한 본성의 변화가 개혁과 거듭남이라고 불리는 상태의 변화다.
개혁 이전의 자연적 마음의 상태는
나선형이 아래로 비틀거나 구부러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개혁 후에는 나선형이
위로 비틀거나 구부러지는 것과 비교될 수 있다.
그러므로 개혁 전에는 사람이 지옥을 향해 아래로 바라보지만
개혁 후에는 천국을 향해 위로 바라본다.
- 매개적인 선
천비 4063
사람의 생명의 상태들이
아주 크게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 필수적인 것은
사람은 일종의 매개적인 선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속한 정욕들과 천국에 속한 애정들
양측과 함께 어울리는 선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선이 선용을 위해 종사하기까지만
이 매개적인 선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이 선이 그 임무를 다하면 그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 사람이 중생과정에 있으면 그는 주님에 의해
일종의 '매개적인(mediate, 중간적인) 선' 안에 머물 수 있다.
이 선은 순수한 선들과 진리들의 도입을 위해 헌신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도입된 후에는
이 선은 그것들로부터 분리된다.
중생에 관해, 또는 새 사람에 관해 무엇인가를 배운 사람은
그 새 사람, 즉 중생한 사람이
그 전 사람, 즉 중생하기 전 사람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새 사람은
천국적인 기쁨이나 즐거움을 낳는
영적인 것들이나 천적인 것들에 속한 애정 안에 있지만
이에 반해 중생 이전의 옛사람은
쾌락이나 향락을 낳는
세속적이거나 세상적인 것들에 속한 정욕 안에 있기 때문이다. ..
한 사람이 옛사람의 상태에서
새 사람의 상태로 옮겨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속한 탐욕이나 욕망들은 훌훌 털어버리고
천국에 속한 애정을 반드시 새로 입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만이 아시는 수많은 수단을 통해 이루어지며
그 중 일부는 주님이 천사들에게도 알리셨지만
지상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은 거의 없거나 전혀 없다.
그럼에도 일반적이든(general) 개별적이든(particular)
그것들 대부분은 성경의 속뜻 안에 명료히 드러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옛사람에서 새사람이 될 때, 즉 거듭날 때
어떤 사람들이 믿는 것처럼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진다.
아니, 그 사람의 평생 동안, 심지어 죽을 때까지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사람의 탐욕이나 정욕들이 반드시 제거되어야만
천국의 애정들은 심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에게는 그가 전에 가지지 못했던 한 생명이 부여되지만
그 사람은 그것에 대해 사실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상태들이
아주 크게 변화되어야만 한다는 관점에서 보아 필수적인 것은
사람은 일종의 매개적인 선 안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속한 정욕들과 천국에 속한 애정들
양측과 함께 어울리는 선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사람이 이 매개적인 선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천국적인 선과 진리들을
자신에 받아들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 매개적인, 또는 중간적인 선이
라반과 그의 가축이 뜻하는 선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선이 선용을 위해 종사하기까지만
이 매개적인 선에 머물러 있어야 하고
이 선이 그 임무를 다하면 그것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 분리가 이 장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다.
중간적인, 또는 매개적인 선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선이 자신의 선용의 임무를 수행한 뒤 분리된다는 것 등은
어느 누구나 유아기에서부터 심지어 노년기에까지 겪는
수많은 상태의 변화들에 의해 설명될 수 있겠다.
잘 알려진 바, 한 사람의 상태는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장년기, 노년기에 따라 서로 다르다.
사람은 그가 소년기의 상태에 들어가면
유아기의 상태를 장난감처럼 벗고
그가 청년기의 상태에 들어가면 소년기의 상태를 벗고,
그리고 다시 완숙기의 상태에 들어가면 청년기의 상태를 벗고
종국에 노년기의 상태에 들어가면 그 상태도 역시 벗는다.
만일 어느 누가 이런 사실에 관해 깊이 생각하기를 원할 경우
그가 또한 잘 알게 될 것들은
각각의 시기는
그것의 기쁨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기쁨을 통해 그 사람은
계속 그 뒤에 이어지는 시기의 기쁨들에 인도된다는 것,
그리고 이런 기쁨들은 그 사람을 거기까지 옮기며
종국에는 노년기의 총명(intelligence)이나 지혜에 속한 기쁨에까지
옮긴다는 사실이다.
이상에서 볼 때 명확한 사실은
이전 기쁨들은 사람이 삶의 새로운 상태를 입게 될 때
언제나 잊혀진다(left behind)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교는
다만 기쁨들이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사람이 다음에 이어지는
어떤 상태에 들어가든지 잊혀진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이에 반해 사람이 중생하는 동안 그의 상태는
그 전 상태와 전적으로 다르게 된다.
그리고 그는 어떤 자연적인 방법이 아니라
주님에 의한 초자연적 방법에 의해 그것에 인도된다.
어느 누구도 주님께서 홀로 장만하시는
중생의 방법들에 의하지 않고는, 즉 중생의 매개자를 제외하고는
따라서 우리가 지금 설명하고 있는 매개적인 선에 의하지 않으면
이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리고 사람이 더 이상
세속적이고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들 대신
천국에 속한 것들을 마음속 목적들로 가지는 이런 상태로 옮겨지면
그때 이 매개적인 선은 모두 분리된다.
목적으로 어떤 것을 소유한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