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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바람이나 알 테지/ 남재호
은하수 추천 0 조회 60 15.01.24 02: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람이나 알 테지/ 남재호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금세 명문의 묘비명은 버나드쇼가 남겼고

중광은 ‘괜히 왔다 간다’는 묘비명을 남겼다지

 

엮어놓은 꿈을 좇아 말처럼 달렸어도

겹겹의 멍든 사연 헤아려보는 이즈음

한 마디 남기는 일도 내 몫은 아닌가보다

 

비바람에 모를 깎고 물살에 몸을 풀어

유유자적 자유로이 남은 생을 살다 가면

누군가 비석을 세워 몇 자라도 새길까

 

헤설픈 욕심으로 지난날을 회상해보고

자서전 말머리에 근사한 말도 얹어보다

아니다. 그마저 놓는 거다 바람이나 알 테지

 

- 시조집『바람이나 알 테지』(2014)

.....................................................

 

 묘비명의 의미는 당사자가 죽고 난 뒤 남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생애를 요약해서 표현하는데 있다. 이 땅에서는 ‘평범한’ 사람이 죽으면 그저 ‘고인’일 따름이지만 ‘출세’한 사람들은 본인의 관직을 새겨 넣는 것으로 묘비명을 대신한다. 이런 관습은 지금껏 남아있어 사무관 이상의 공무원인 경우 묘비에 직급을 표기하는 사례를 지금도 더러 본다. 그래서 정년을 앞둔 6급 주사들은 묘비명 때문에라도 기를 쓰고 승진하려는 풍조마저 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전해지듯이 그 욕망은 오래된 인류의 습속이라 하겠다. 비명에 글을 남기고자 하는 속뜻은 산 자의 기억 속에 영원히 존재하고픈 욕망 때문이다. 묘비명을 나무가 아닌 돌에다 새기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한편 서구에서는 고인이 죽기 전에 당부했던 말이나 고인을 기리는 좋은 말을 산 사람이 새겨 넣는 게 일반적이다. 대개 심오한 의미나 생애를 함축한 재치 있는 비문들이다. 그런데 ‘버나드쇼’의 비문은 지나치게 의역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실은 “오래 살다보니 이런 일을 당할 줄 알았다”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견해들이 많다. 어쨌든 어영부영 하지 말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만은 일맥상통한다. 근년에는 우리도 서양의 비문 형식을 본받아 짧은 시적 수사로 비명을 새기기도 하고, 삶의 성찰 수단으로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써서 남기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지난 삶을 반추하고 앞날을 새롭게 설계하는 묘비명 써보기 강좌도 개설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는 자서전 쓰기, 유언장 작성처럼 수필 강좌에 연계해 유행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함축적으로 기록해 남기고, 알찬 삶의 마무리를 위한 준비과정으로 인식한다면 나쁘지 않은 문화 현상이다. 다만 남은 삶을 더욱 알차게 꾸려가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허명을 남기려는 욕망이 개입되었다면 그 의미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한 마디 남기는 일도 내 몫은 아닌’ 경우가 많다. 얼마 전 일부 퇴임 시장군수들이 송덕비를 세워 자신의 업적을 기리려다 세간의 입방아에 오른 일이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돌에 새겨 자손만대에 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훌륭한 사람으로 오랫동안 존경 받고 기억되는 것이 훨씬 명예롭고 자랑스러운 길일 텐데 말이다. 이름은 남기려 한다고 남겨지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해 잘 살다보면 남들이 자연스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새겨주기도 하는 것이다. 군자는 무릇 세속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고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스스로 묵묵히 길을 가는 모습이라야 아름다운 법이다. 노자도 무위가 자연스러운 도라고 가르쳤다. 우스개로 ‘도’ 가운데 으뜸인 도는 ‘내비도(그냥 내버려 둔다는 뜻의 경상도 사투리)’라는 말도 있다.

 

 시인 역시 ‘헤설픈 욕심으로 지난날을 회상’하며 깊은 성찰을 거친 연후에야 비로소 명욕을 놓았다. 사람의 입(口)이 돌(碑)보다 더 낫다(勝)는 뜻의 ‘구승비’가 있다. 사람들의 입에서 칭찬과 존경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돌에다 새겨 넣은 명성보다 훨씬 의미가 크다는 뜻이다. 시인의 ‘바람이나 알 테지’라며 바람에 맡겨두는 태도가 바로 그 ‘내비도’이며, 뭇사람들에 의해 ‘구승비’를 세우도록 하는 일일 것이다. 부와 권력이란 독점과 경쟁을 통해 성취되는 속성이 있으므로 돈 있고 권세를 가진 사람의 허명까지 버젓이 허용한다면, 그건 동시대의 사람들로서는 굴욕의 다름 아니다. 그러나 폭넓은 지지와 존경을 받는 인물의 문학이나 사상의 산물을 남겨 기리는 사업까지 말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권순진

 

The Evening Bell(저녁종) / Sheila Ry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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