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최초의 자생 교회
제주 금성교회
돌, 바람, 여자가 많아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도는 지리적으로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며 면적
1,848.5㎢에 인구는 57만 명을 조금 넘는다.
행정구역은 제주특별자치도이며 남한에서 가장 높은 1950미터의 휴화산인 한라산이 섬 중앙에
자리잡고 수 백 개의 제주특별자치도이며 남한에서 가장 높은 1950미터의 휴화산인 한라산이
섬 중앙에 자리잡고 수 백 개의 기생화산인 오름이 산재한 아름다운 섬이다.
제주도는 신생대 제4기(약 250만년 전)동안 연속적인 분화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약 100만년 전후 서귀포층이 퇴적된 이후 본격적인 화산활동으로 70-80만년 전의 산방산 분출기
와 50만년 전후에 표선리 현무암과 서귀포 조면암질 암산암 분출기에 제주도의 해안저지대 지형이
만들어졌다. 30-10만년 전에 한라산 고지대와 백록담 정상부가 형성되었고 수많은 기생화산 분출을
끝으로 화산 활동이 끝났다. '동국여지승람'과 '이조열성실록'에 1002년과 1007년의 화산활동 기록이
있고, 1455년과 1570년의 지진 기록이 남아있어 휴화산으로 분류되고 있다.
제주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남제주군 안덕면 사계리 퇴적
층에서 발견된 사람 발자국 화석의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 결과 플라이스토세 말기(약 1만 9000~
2만 5000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으리라 추정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도는 탐라국이라 불리며 일종의 국가형태를 유지하기도 했던 지역
이다. 해상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기에 육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도는 고립된 지역으로 생활
관습과 언어 등 많은 부분에서 육지와 다른 데 지금까지도 전통 관습이 많이 남아있다.
제주도에 처음으로 복음이 들어온 것은 1908년이다. 190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한국 최초의 목사
7인중 한명인 이기풍 목사가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1908년 산지포(현재 제주항)에 도착했다.
이기풍 목사는 메마른 불모지에 씨앗을 뿌리듯 복음을 전했으나 전통적인 무속 신앙을 믿던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오히려 1907년 천주교인들과 제주도민 간에 벌어진 이재수의 난
영향으로 목숨을 위협받는 등 심한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반기는 사람 없는 제주도 이 마을 저 마을을
구석구석 돌면서 복음을 전하던 이기풍 목사는 결국 제주도 서북단 애월읍 금성리 인근 바닷가에서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다행히 마을 해녀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했는데 기력을 되찾은 이기풍
목사는 이곳에서 뜻밖에 반가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이기풍 목사가 쓰러졌던 금성리 마을에서는 1907년부터 양석봉의 집에서 조봉호, 이동종, 김진실 등
8명이 모여 기도모임을 하고 있었다. (조선 야소교장로회 금성교회 당회록)
이기풍 목사는 이곳에서 기도모임을 인도하던 조봉호를 만난 것이다. 이기풍 목사를 구해준 해녀가
기도모임에 참석하던 사람이었거나 기도모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만남을 주선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기풍 목사에게 조봉호와의 만남은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처럼 제주 선교의 불씨를
지필 희망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조봉호를 비롯한 기도모임 참석자들도 이기풍 목사를 통해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음은 물론이다.
제주도 최초의 기독교인 조봉호는 1884년 금성리 이웃마을인 귀덕리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제주에 살았지만 선각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19세 때 서울로 유학하여 언더우드가 설립한 기독교계
경신학교와 숭실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1904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제주도로
돌아와 친척과 마을 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지만 뿌리깊은 무속신앙과, 괸당문화(괸당은 친.인척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연고주의에 따른 혈연, 지연, 학연에 뿌리를 둔 폐쇄적 관습)때문에 친척들로
부터 배척을 받고 결국 마을에서 쫓겨났다.
이웃마을 금성리의 양석봉 집을 처소로 정한 조봉호는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서 직접 말씀을 전하는 등
제주도 최초의 토착교회 형태로 기도모임을 이끌어 갔다.
조봉호와 기도모임 동역자를 만난 이기풍 목사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같이 힘이 났고 그들과 함께
제주도 최초의 교회인 금성교회의 기틀을 세우게 되었다. 조봉호는 금성교회 조사(전도사)로 교회를
섬기면서 이기풍 목사와 함께 제주도 복음전파의 토대를 다지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시대적 상황에서 조봉호는 복음 전파와 더불어 독립운동에도 헌신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제주도민 4,450명으로부터 1만원의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
모금단체인 '독립희생회'를 통해 송금하는 일을 주도하였다가 1919년 7월, 60여 명이 함께 검거되었다.
이때 조봉호는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징역 1년형을 받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20년 4월 28일
3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금성교회 출신의이도종은 제주도 최초의 목사가 되었고, 대정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4.3사건의 와중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하여 금성교회는 제주도 최초의 순교자를 배출한 교회가 되었다.
금성교회는 1907년 3월부터 1909년 9월까지 양석봉의 집에서 모이다가 이후 3군데 더 예배처소를 옮긴
후 1924년 최초의 교회 건물을 신축했다. 교회 건물을 처음 지으면서 그때까지의 교회 역사를 상세하게
기록한 '성전건축안'을 작성하여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다. 최초의 교회 건물은 이도종 목사의 부친
이덕연이 사재를 털어 지은 초가집이었다가 1930년 함석지붕으로 교체 하였고, 1973년 벽돌로 신축
하였다. 1994년 교회 건물을 신축 이전하면서 지금은 쇠락한 모습으로 방치되어 있어 안타깝다.
금성교회는 한때 100여명의 장년이 출석하기도 했지만 주변에 다른 교회들이 생기고 토박이 주민들이
드러내놓고 교회를 나오기 어려운 형편 때문에 1954년 이후 전도사가 시무하는 작은 교회가 되고
말았다. 1994년 현재 위치에 5억 2천만 원을 들여 교회건물을 이전 신축하였는데 어려운 형편의 금성
교회가 교회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던 것은 제주도와 제주도민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귀덕리에 살면서 금성교회로 주일학교를 다니다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친척과 주민들로
부터 배척을 받고 멀리 미국으로 이민을 간 김동민씨가 주인공이다.
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그는 금성교회가 제주도 최초의 교회임에도 작은 건물에서 적은 인원이 예배를
드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교회가 커야 교인들도 늘어날 것이라는 믿음으로 건축자금 전액을 헌금
한 것이다.
현재 금성교회 담임 태종호 목사는 1998년 7개월 동안 교역자 없이 교인 7명만이 지키고 있던 금성교회
에 부임했다. 도시와 떨어진 시골마을에 자리한 교회의 특성상 외지인의 전입은 바랄 수 없으므로
제주도 토박이 주민들에게 꾸준히 전도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부임 이후 매년 1~2명의 새신자가 등록
하여 현재 80여명(어린이 포함)의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하였고 재정자립도 이룬 상태라고 한다.
수수한 차림에 선한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태종호 담임목사의 목회 철학은 의외로 독특했다.
"제주도 사람들은 육지에 나가서 교회를 다니더라도 고향에 와서는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다. 괸당문화
때문에 교회를 다니면 가족이나 친척들로부터 배척을 당할 뿐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사람에게만
재산을 물려주는 제주도의 오랜 관습 때문이지요. 제주도의 복음화율이 10%정도라지만 외지인을 뺀
순수 제주 토박이의 복음화율은 이에 훨씬 못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물론 제주도의 젊은이들이
가급적 육지로 많이 나가기를 바랍니다. 육지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늘어나면 교향에 돌아
와서도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도 나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제주도만의 독특한 문화적 배경에서 태목사가 터득한 미래를 대비하는 선교적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주도 일주 도로변에 위치한 금성교회는 마을 언덕위에 자리잡아 눈에 잘 띄는 위치에 있어 제주도
여행을 왔다가 돈이 떨어지거나 어려움을 당한 젊은이들이 자주 찾아오곤 한다. 금성교회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있고 목사님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한다.
고아와 과부 돌아보기를 즐겨하던 초대교회의 전통처럼 누구든지 환영받고 대접받는 따뜻한 안식처
금성교회.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이웃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제주 토박이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기도와
전도를 쉬지 않는 교회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436-3/태종호 담임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