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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옛날 꿈 점치는 법
꿈에는 스스로 현묘한 기미가 있다
소설《삼국연의三國演義》2)가운데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간사스런 영웅’ 조조曹操(155~220)는 누군가 자기를 암살할 것을 두려워했다. 항상 좌우 시종들에게 ‘너희들 조심하거라. 내가 꿈속에서 사람을 살해하기 좋아한다. 내가 잠들었을 때 누구도 나를 접근하지 말거라.’라고 분부하였다. 언제 한 번 군장軍場에서 휴식을 취하려는데 몸에 덮었던 이불이 땅으로 내려왔다. 가까이서 모시던 시종이 급히 달려와 이불을 다시 덮어주었다. 그리고 그 시종이 막 돌아서려고 할 때, 조조가 갑자기 침대에서 일어나 그를 찔러 죽였다. 그리고 다시 눕자마자 잠을 잤다. 얼마 있다가 조조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 칼에 찔려죽은 시종을 보고, 급히 다른 시종에게 어떻게 된 일인가를 묻었다. 많은 시종들이 사실의 자초지종을 그대로 알렸다. 그러자 조조는 후회하며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다. 그리고 수하들에게 분부하여 이 시종을 잘 모시어 매장하라고 했다. 조조의 위인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정말로 꿈속에서 사람을 죽인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조의 이 시종은 정말로 억울하게 죽었다. 소설 속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은 이 ‘간웅奸雄’이 간사하여 남을 잘 속이고 악독한 것을 형상화하기 위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가령 어느 누가 이 시종을 위해 불평을 늘어놓고 조조와 대결하겠는가. 또한 조조는 분명히 당당하게 ‘누가 그에게 조심하지 않도록 했는가? 내가 꿈속에서 살해한다고 이미 말하지 않았는가? 나도 꿈속에서 나의 행동을 제어할 수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비록 ‘꿈夢’이 조조 자신을 변호하는 유력한 무기로 되었지만, 무엇 때문에 ‘꿈’이 이렇게 큰 위력을 갖는 것인가? 여기부터 옛날 사람들의 ‘꿈’에 대한 인식과 신앙을 언급하게 된다. 그 가운데 수술과 관계되는 내용을 둘러싸고 즉 고대 점몽술占夢術에 대해 그 일부를 소개하려고 한다.
1. 꿈점의 연기緣起
-신령적인 계시
모든 사람은 꿈을 꾼 경력이 있을 것이다. 비록 꾼 꿈이 기괴하고 황당무계하게 보일 수 있겠지만, 우리들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방도는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대다수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고 더욱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로 흥분하고 두려워하며 놀라거나 하는 일도 거의 없다. 물론, 만약 장기간 매우 괴상한 꿈을 꾸면 그것은 다르다. 휴식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여 정신분석학자 혹은 의사에게 물어볼 수도 있다. 보통 생리 혹은 심리상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꿈에 발생한 일은 우리에게 영향을 가한다는 것을 예상치 못한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은 그 상황이 크게 다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꿈은 원시생활 가운데 일종 보편적인 통과의례였다고 한다. 레비 브률列維 布留爾의 견해에 의하면, 원시인은 꿈을 일종의 실제적인 지각으로 보았다. 이런 지각이 확실하고 믿을 만하여 의외로 깨어있을 때의 지각과 같다고 했다. 예를 들면, 아무개 전사가 만약 전쟁터에서 포로가 된 꿈을 꾸면 인하여 벌벌 떨며 불안하게 된다. 만약 이런 꿈을 연속 몇 번 꾸게 되면,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이 꿈을 정말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는 아래와 같은 일련의 행동을 취했다. 깨어난 후 그는 친구들을 불러 자기의 재난과 어려움을 도와달라고 정중히 부탁할 것이다. 그가 간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너희들이 나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다면 절대로 마음을 여리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다. 그의 친구들이 정말로 친구답다면, 그들은 전력을 다해 그의 의견을 좇을 것이다. 친구들은 사납게 그에게 달려들어 강제로 옷을 벗기고 묶어 놓을 것이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그를 욕하고 때리며 거리로 끌고 다닐 것이다…… 이렇게 한 반나절 고생시킨다면, 그는 정중하게 친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기가 포로가 되는 것을 피면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류학자들은 충분한 자료로 의사를 표명하였다. 이와 흡사한 일을 처리하는 행동 가운데에 원시인의 마음 상태는 그렇게 성실하고 자연스러워, 마치 오늘날 우리가 괴몽怪夢으로 우울할 때 의사에서 가서 조언을 구하는 것과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우리는 몽경夢境과 현실現實을 구분할 수 있고 양자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또 전자가 후자와 관계될 뿐만 아니라 수면시의 생리 ‧ 심리 정황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원시인들은 몽경이 즉 현실이고 양자가 모두 일부의 신비한 인소와 그 관련에 삼투滲透되었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의 관건은 우리가 전에 제기한 원시사유의 ‘호삼互滲’과 무술巫術의 ‘교감交感’이다.
원시인들은 몽경의 현실성 ‧ 믿음성에 대해 진정으로 동일시했고 몽롱한 자아의식도 분화를 산생하게 했다. 그들은 어떤 때 자기가 분명히 동굴에서 잠을 자면서 동시에 또 몽경 가운데 사냥 ‧ 전쟁 혹은 기타 일에 참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나 동반자들도 잠을 자는 동안 동굴을 떠나지 않았음을 확인할 것이다. 그럼, 몽경에서 각종 일을 처리한 ‘자기自己’는 또 어떻게 된 것일까......이런 생각들은 순식간에 가까워진 것에 불과하겠지만, 오랫동안 원시인들에게 점차적으로 이런 인상을 준 것이다. 사람의 신체 가운데에서 신체를 지배하는 것과 더불어 동서로 떨어진 신체로 같지 않은 것이 있다. 평상시 그것들은 신체가 합하여 하나로 존재한다. 그러나 잠을 잘 때는 오히려 그것이 신체를 떠나 활동한다. 이것이 몽경 가운데 ‘자기自己’ 또는 ‘영혼靈魂’인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지배자는 즉 ‘귀신鬼神’, 사실 바로 원시인의 생활 세계 가운데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신비인소神秘因素와 그와 관련된 대상화對象化 ‧ 인격화人格化인 것이다.
‘영혼靈魂’과 ‘귀신鬼神’ 관념의 산생은 인류역사상 하나의 중대한 사건이다. 일반 인류학과 종교학 의의를 중단하고 그것들의 꿈에 대한 관념에만 한정한다고 해도 그 영향은 극히 심각하고 거대하다. ‘영혼靈魂’이 있게 되면, 사람들은 꿈을 영혼이 돌아다니는 것으로 볼 수 있고, ‘신령神靈’이 있게 되면, 진일보하여 영혼이 가출하는 동인動因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꿈도 신령의지神靈意志의 현현顯現으로 보기 때문에 길흉을 예시하는 능력이 있게 된다. 이렇게 영혼과 귀신 관념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꿈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대한 의의가 있어서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몽상夢象에 대한 해석을 통하여 신령의 계시를 얻을 수 있고 자신의 행위로 하여금 길함을 재촉하고 흉함을 피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고대의 점몽술의 산생을 초래하였다.
2. 꿈점의 탁고托古와 이론화
-‘주공이 꿈풀이를 하다’
고대의 몽점이 도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그 연대는 멀고 오래이나 자료의 결핍으로 인해 그 상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다.《제왕세기帝王世紀》따위 옛날 서적의 기록에 의하면, 일찍이 황제黃帝와 요堯 ‧ 순舜 ‧ 우禹 시대에 몽점이 이미 유행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면,《제왕세기》에서 이르기를
황제는 꿈에 거센 바람이 불어 천하의 먼지가 모두 날리는 것을 보았다. 또한 꿈에 한 사람이 큰 활을 들고 양치기하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잠을 깨어난 후 스스로 분석했다. 바람을 호령해야 정권을 잡고, ‘후垢’에서 ‘토土’를 없애야 ‘후’가 된다. 천하에 성씨가 ‘풍風’이고 이름이 ‘후后’인 사람이 있겠는가? 천 근 되는 큰 활을 들 수 있는 자는 장사일 것이다. 수만 마리의 양을 모는 것은 목민관이 능히 착함을 말한다. 천하에 성씨가 ‘역力’이고 이름이 ‘목牧’인 사람이 있겠는가? 그리하여 황제는 자기의 추단대로 과연 바닷가에서 풍후를 찾아 제상으로 삼고 큰 연못 가운데 역목을 찾아 장군으로 삼았다.3)
라고 했다. 황제는《점몽경占夢經》11권을 지었다.
여기서 황제는 해몽을 하고 있는 동시에 측자測字를 하고 있음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하면 여기에 문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국내외의 많은 인류학 자료를 참고하여 추단한다면, 황제 시대에 이미 해몽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매우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황제 시대에 문자文字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또 어떻게 석문해자析文解字를 통하여 점몽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기록은 먼 옛날 전설로밖에 볼 수 없고 다만 참고로 할 수 있지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런 해몽을 통하여 얻은 장상將相과 몽서夢書를 고성선현古聖先賢에 받치는 관념은 후세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문자를 말하면, 갑골문甲骨文이 몽점에 관한 확실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고문자 학자의 분석에 의하면, 은상殷商 갑골문 가운데 ‘꿈夢’자는 기본상 하나의 회의會意4)자이다. 자의 왼쪽 변은 일장一張으로 받침대가 있는 침대이고, 오른쪽 상방은 긴 속눈썹이 있는 한 쪽 눈이고, 오른쪽 하방은 즉 사람의 신체와 한 쪽 손을 의미한다. 전체 글자형의 원초 함의는 사람이 침대에 누워 손으로 눈을 가리키는 것은 수면 중에 눈이 보는 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람이 깨어있을 때 눈이 보는 것은 다른 글자 형으로 표시하는데 즉 오늘에 사용하고 있는 견見자이다. 이 두 글자 형을 대비하면, 여전히 초기 인류가 몽경夢境에 대한 현실성을 동일시하는 것을 대략 엿볼 수 있다.
그밖에 갑골 복사卜辭 가운데 은왕殷王이 점몽한 데에 관한 기록도 많이 있다. 고문자 학자들의 귀납에 의하면, 은왕의 복사 가운데 점문占問한 몽상夢象에 이미 죽은 조선祖先, 신변의 처자妻子 ‧ 사관史官 ‧ 귀괴鬼怪 ‧ 천상天象 ‧ 주구走獸, 그리고 전렵田獵 ‧ 제사祭祀 따위가 있다고 한다. 언급한 범위가 매우 넓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적해야 하는 것은 전체 상주商周(BC 1500년경~BC 256년) 시기, 점몽은 여전히 귀복龜卜5)에 해당했으나 그 자체 독립성이 부족했다.
서주西周 이후 몽점夢占에 관한 기록이 더욱 많아졌다. 비단《상서尙書》‧《좌전左傳》가운데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시경詩經》<소아小雅> <정월正月> 편에서 ‘召彼古老, 訊之占夢’이라 말하였다. 이 말은 주왕周王이 노인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점몽에 일에 대한 것이다.<소아小雅 ‧ 사간斯干> 편에서도 ‘大人占之: 維熊維羆, 男子之祥: 維虺維蛇, 女子之祥.’이라 말하였다. 여기에서는 점몽관占夢官이 천자에게 점몽하는 것을 말한다. 소위 ‘대인大人’은 즉 점몽관이다. 그것은 왕비가 꿈에서 큰 곰을 보면 아들을 낳을 길조이고, 독사를 보면 딸을 낳을 길조라는 것을 의미한다.<소아小雅 ‧ 무양無羊>에서는 ‘牧人乃夢; 旐維旟矣. 衆維魚矣, 實維豐年, 旐維旟矣, 家家蓁蓁.’이라 말하였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인 즉 목축업자들이 점몽관을 청하여 그들을 위해 점몽하게 하였다. 그것은 꿈속에서 호수 중에 많은 고기가 있는 것을 보면 풍족함을 상징하고, 거북이 ‧ 뱀과 새 ‧ 매가 그려진 깃발을 보면 가정 중의 인구가 흥성할 징조이다. 이로부터 보면 위로는 천자로부터 아래로는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점몽에 대해 매우 열중하고 또 신뢰하였다.
그밖에《주례周禮》<춘관春官> <송백宋伯>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점몽에 소위 ‘삼몽지법三夢之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또 꿈을 ‘일왈정몽一曰正夢, 이왈악몽二曰噩夢, 삼왈사몽三曰思夢, 사왈오몽四曰寤夢, 오왈희몽五曰喜夢, 육왈구몽六曰俱夢.’ 따위 6가지로 나누었다. 이로부터 주인周人이 몽상夢象과 꿈夢의 심리 상태에 대해 이미 뚜렷한 인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에《황제장유점몽黃帝長柳占夢》6)제11권과《감덕장유점몽甘德長柳占夢》12권이 기록되었다. 두 책은 서한西漢 시기에 이미 잃어버렸기에 구체적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미루어 짐작하면, 그것들은 응당 한漢 이전의 점몽실천占夢實踐에 대한 이론 총결임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역대 점몽가占夢家와 점몽占夢 서적을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점몽술占夢術과 점몽에 관계되는 저술을 고대 제왕 혹은 성현의 이름 아래에 귀결하기를 즐겼다. 그중 특히 주공周公에 귀결하는 자들이 많았고 민간에서도 그 영향이 매우 컸다. 때문에 몽점夢占이 제기되기만 하면 설령 잠부(양잠을 하는 여자)나 마을의 건달들 이라하더라도 ‘주공이 꿈을 풀다周公解夢’의 설을 안다.
3. 꿈점의 정치화와 세속화
한 나라 이후 몽점은 점차 정치화와 세속화 두 개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정치화는 한 나라 이전의 몽점 전통에 대한 계승이었으나 세속화도 몽점 자체 발전의 필연적인 추세였다.
앞에서 황제가 점몽을 통하여 장상을 얻은 이야기를 제기하였다. 이런 흡사한 이야기가 고대에는 매우 많았다. 예를 들면, 은나라 고종 무정殷高宗武丁도 꿈속의 형상에 근거하여 노예 출신 명상名相을 얻은 전설이 있다. 또 예를 들면, 주나라 사람이 은을 멸하는 과정 가운데 중요하게 작용한 강태공姜太公 이야기이다. 그는 이전에 꿈속에서 성신星神을 봤다. 강태공에게 주나라 사람들을 도와 주왕紂王7)을 공격하는 대업을 완수하라고 하였다고 한다. 더구나 주문왕周文王도 꿈속에서 신인의 인도를 받았다. 그 때문에 후에 강변에서 낚시질하는 강태공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인이 보기에는 통치자들이 사람을 쓰는 전례를 깨기 위해 지어낸 것杜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꿈을 통하여 이런 사람들을 신격화되었다.
통치자들은 몽점을 이용하여 인재를 구하고 선발하는 동시에 자기의 통치 지위에 ‘도금鍍金’하는 것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출신이 낮은 개국의 군왕開國之君은 특히 그러했다. 본래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文 ‧ 무武가 꿈 때문에 제왕 천자帝王天子가 된 이야기에 관하여 이미 오래전부터 유전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의 어떤 것은 오래된 민간 소설에서 나온 것이고 어떤 것은 후인이 부회한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회의 바람이 한나라에서 시작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에서 여러 번 제기했던 유방劉邦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모친이 꿈에 신과 교합하여 난 아이라 한다. 그럼 무슨 신일까? 그것은 하늘天上의 교룡蛟龍인데 전에 유방의 부친이 직접 눈으로 보았다고 한다. 이와 같은 꿈은 그 속뜻이 거의 말하지 않아도 알고 점을 치지 않아도 안다. 단지 유방이 ‘하늘의 아들天子’ ‧ ‘용의 자손龍種’임을 설명하려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예를 들면, 동한東漢의 光武帝 유수劉秀(6~57 재위 25~57)도 ‘하늘의 아들天子’ 꿈을 매우 직백直白하게 꾸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부하들에게 자기가 용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점잖하지 못한 말을 들려주었다. 부하들은 당연히 마음속으로 이해하고 모두들 존호尊號를 논하여 정하고 그를 정식으로 기재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물론 또 어떤 군주들은 쑥스러워 해서 조작해낸 ‘하늘의 아들天子’이란 꿈이 대략적이고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삼국三國 시기 위문제魏文帝 조비曹丕(187~226 재위 220~226)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양이 땅에 떨어져 하나가 셋으로 나누어져 자기가 하나를 주어 품에 넣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것은 물론 천하를 삼등분三等分한8) 것의 하나라는 것이다. 또 예를 들면, 오나라吳主 손권孫權(182~252 재위 222~252)은,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의 모친이 임신했을 때 ‘꿈에 해를 품었다夢日入懷’고 한다. 이것도 물론 손권이 동오東吳에서 개국을 열어 왕위에 오를 징조이다.
많은 ‘하늘의 아들天子’의 꿈 중에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1328~ 1398 재위 1368~1398)이 편집한 것이 아마 정밀하다고 할 수 있다. 주원장은 일찍부터 가정 형편이 빈곤하여 할 수 없이 출가하여 중和尙이 되었다. 아마 이 경력에 의해 주원장이 하층민중들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한다. 주원장이 서북西北 하늘의 빨간 고대高臺에 서 있었다. 고대의 네 주위에는 난간이 있고 누대 위에 금강과 흡사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다. 누대의 남쪽에는 의복을 단정히 입은 사람들이 대열을 짓고 정연히 앉아 있고 가운데는 삼존신상三尊神像 세워져 있어 도교에서 숭상하는 삼청三淸과 흡사했다. 몇 명의 적색 의복을 입은 선인仙人들이 한견지의 적홍색 의복을 그에게 수여하였다. 열어 보니 안에는 오색이 영롱히 빛나고 있었다. 선인들은 그에게 이것이 ‘문리진인복文理眞人服’이라 알려주었다. 꿈을 이렇게 세밀하게 꾸는 것은 단지 자기가 ‘진명천자眞命天子’임을 표명하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뜻밖이었던 것은 주원장에게 하늘의 명天命을 전달했던 것이 선仙이 아니라 불佛이라는 것이다. 그가 전에 중으로 있을 때, 어떻게 일했는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역사상에 아마 어느 조대朝代의 황제나 용龍 ‧ 해日 ‧ 하늘天 따위의 꿈을 꾸지 않은 사람은 매우 적을 것이다. 그 가운데 정치적 속뜻含意는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황제가 어느 조대에 자기의 강산을 잃지 않고 영원히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진명천자眞命天子’ 꿈의 의의가 도대체 어디에 있고 또 얼마나 클 것인가 하는 답안은 아마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꿈점이 정치화가 될 동시에 또 하나의 변화가 부지불식간에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꿈점의 세속화이다. 이 점은 우선 전장제도典章制度의 변천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일종의 하늘과 사람을 통하는 ‘술術’로서 초기의 꿈점 활동은 일반 사람들이 묻을 수가 없었다. 꿈자리의 해설권은 전인專人, 초기의 무사巫師 혹은 무사巫師 신분을 겸한 마을의 수령에게 장악되었다. 문명시대 이후 태복太卜 혹은 태사太史 부류의 꿈몽관을 설치하였다. 몽점 활동을 진행하는 동시에 일반적으로 모두 일정한 절차와 의식을 보좌하여 몽점의 신성성神聖性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한대漢代 이후 비록 통치자들이 여전히 몽점을 이용하거나 혹은 몽점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나 역대의 직관체계職官體系 가운데 전직專職인 점몽관占夢官을 두지는 아니했다. 그러므로 몽점 활동이 이미 고상한 자리에 오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점몽관을 치환한 것은 점점 많아졌던 세속점몽가世俗占夢家 혹은 술사術士였다. 그 가운데 위진魏晋 시기의 주선周宣과 索진(糸+冘)이 가장 유명하였다. 이런 세속의 점몽가들은 평생을 점몽을 업으로 하거나(예를 들면 주선周宣), 혹은 학문이 넓은 대학자나 수술數術을 겸한 자를 위해 점후占候했다다(예를 들면 索진). 어떤 이는 점몽 실천에 대해서도 총결과 연구를 하여 점몽 이론 저작을 남겼다. 주선이 저작한《점몽서占夢書》1권이 있다. 대부분이 역대 점몽가를 인용하여 매우 심각하고 거대한 영향을 주었다. 세속점몽가의 출현은 몽점세속화의 하나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또 반대로 몽점의 세속화 과정을 촉진하였다. 이는 그들 점몽 방법이 민첩하고 변덕스러운 것과 관계가 있다.
몽점세속화의 원인을 고찰하고 연구하면, 물론 통치자들이 꿈의 신비성에 대한 남용濫用이지만, 가장 근본적인 것은 꿈 자신의 특징인 까닭이다. 어떠한 사람도 모두 꿈을 꿀 수 있고 어떠한 사람도 모두 꿈에 대한 자기의 사고가 있을 수 있다. 특히 자기의 꿈에 대해 가장 발언권이 있는 자는 꿈을 꾼 본인인 것이다. 이러한 즉 몽점의 권위성이 절대적이 아니라는 것이 근본 상에서 이미 정해진 셈이다.
사상사의 각도로 보면, 몽점세속화의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몽점 활동과 기타 종교 활동의 상호침투이다.
양한 시기 음양오행 사상과 도참학설이 성행하였다. 그 영향은 당시 사람이 천도인사天道人事의 해석 가운데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점몽술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당시 일종 매우 유행되는 설법이 있는데 ‘인몽견화人夢見火, 점위구설占爲口舌’이라고 생각된다.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오행의 2가 불火이고 오행과 서로 어울리는 오사五事9)의 2가 말言이며 ‘언어言語’ 즉 ‘구설口舌’이기 때문이다. 또《수서隋書 ‧ 경적지經籍志》의 기록에 의하면, 한대漢代의 역학대사易學大師인 경방京房(BC 77~BC 37)도《점몽서占夢書》3권을 저작하였다. 이 책은 비록 오래전에 벌써 잃어버렸지만, 경방京房은 음양오행에 근거하기를 좋아했다. 말로써 재난을 좋은 일로 바꾸는 것은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다. 두 가지 사이에 가능한 연계가 있던 것이다.
이 밖에 도참학설의 영향에 의하여, 참언은어讖言隱語로 해몽했고, 한 나라 이후에는 당시 일종의 풍조가 되었다. 예를 들면, 정주丁周라고 하는 사람은 소나무가 자기의 배에서 자라는 꿈을 꾸었다. ‘송松’을 ‘십팔공十八公’으로 분해할 수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사람은 18년 후에 과연 삼공三公10)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한다. 앞에서 이끌어낸《제왕세기》에 기술한 황제가 점몽으로 인해 풍후風后 ‧ 역목力牧을 얻은 이야기도 이와 흡사하다. 이 책의 작자 황보밀皇甫謐(215~282)11)이 한위漢魏 때 기록한 점몽 방법도 이런 당시의 풍조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동한東漢 시기 도교가 창립되고 인도에서 불교도 중국에 들어왔다. 이 두개의 종교는 전에 모두 꿈夢과 몽점夢占의 신비성을 이용하여 자기들 교의敎義를 선양하고 객관성을 부여하여 몽점의 세속화를 가중시켰다.
4. 꿈점의 내용과 방법
원시 꿈점은 생산과 생활수준의 제한으로 인하여 언급되는 범위도 상대적으로 협소해져서 일부 특정된 내용이 해당되었다. 또한 일상의 생산 생활과 밀접히 관계되는 꿈만을 대상으로 제한되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과 생활 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 범위도 점점 넓어지고 인사 내용도 날로 복잡해졌으모 꿈의 대상과 언급된 사물과 부류도 점점 풍부해졌다.
역대 꿈풀이 책에 대한 기록과 각종 관련 자료를 보면, 중국 고대 꿈점에서 언급되는 꿈의 대상은 거의 모든 것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전통적인 분류에 의하면, 꿈점의 중요한 내용은 하늘의 현상에 관한 꿈점 ‧ 땅의 모양에 관한 꿈점 ‧ 풀과 나무, 새와 짐승에 관한 꿈점 ‧ 각종 일상 생활과 활동에 관한 꿈점 · 신과 부처와 귀신에 관한 꿈점 따위가 포함되고 있다. 한 가지 부류가 언급되는 구체적 항목도 매우 많아졌다.
꿈점의 일반 방법과 기교가 결합된 것을 대략적으로 관찰하여 그 신비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기괴하고 허황된 내용의 자료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점풀이 방법은 세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가 ‘직접 풀이하기’이고 둘째가 ‘돌려서 풀이하기’, 셋째가 ‘뒤집어서 말하기’ 따위이다.
사실상 꿈풀이 전문가 혹은 술객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은 돌려서 풀이하는 방법이었다. 소위 ‘돌려서 풀이하는 방법’이란 먼저 꿈의 현상에 대해 일정한 형식의 전환을 한 다음, 그 전환에 의하여 얻은 생각과 현상으로 일상생활 조짐을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전환하는 방법도 매우 많이 있었다. 비교적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상징象徵 ‧ 유비類比 ‧ 해자解字 ‧ 해음諧音 따위가 있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든 《시경》<소아> 가운데 점에 대한 보기가 나온다. 꿈에 큰 곰을 본 것은 남자 아이를 낳을 징조이고, 독사를 본 것은 여자 아이를 낳을 징조이며, 고기 무리를 본 것은 풍족의 징조 따위이다. 여기에서의 전환은 상징의 수법을 채용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상징으로 쓰는 사물과 원래의 사물 사이의 관계는 민족문화 심리가 장기간 쌓인 결과물이다.
유비도 돌려서 풀이하기에서 흔히 사용되는 하나의 방법이다. 예를 들면, 꿈에 바둑을 두면 분쟁이 있을 수 있고, 높은 곳에 오르면 곧 현귀한 사람이 되며, 관을 보면 관운이 있다는 따위이다. 물론 ‘관棺’을 봄으로써 ‘관官’을 얻는 점은 해음에 의한 출이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고기’를 봄으로써 풍년의 ‘말미’가 된다는 점도 해음에 의한 풀이이다. 글자를 풀이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해음의 풀이를 흔히 볼 수 있다. 앞에서 제기했던 황제黃帝가 꿈 때문에 ‘풍후’와‧ ‘역목’을 얻었던 보기가 있다. 또한‘소나무松’을 ‘십팔공十八公’으로 푼 점법도 해자를 통한 돌려서 풀이하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상징 ‧ 유비 ‧ 해자 ‧ 해음 따위 수단을 통해 돌려서 풀이하기를 함으로써 꿈풀이 전문가 혹은 술객이 선회할 여지가 많아졌다. 그들은 자기의 수요에 근거해 생각대로 부회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꿈을 완벽하게 풀이하기 위해 일종의 특수한 점단占斷 방법을 사용했다. 즉 ‘뒤집어서 말하기’인 것이다. 소위 ‘뒤집어서 말하기’란 꿈의 현상을 거꾸로 뒤집고 그 반대의 의의로 일상생활의 조짐을 풀이했던 것이다. 예를 들면, 꿈에 죽거나 다친 사람을 본 사람은 비단 죽거나 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재물을 얻고 장수할 수 있다. 우는 것을 본 사람은 재앙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경사스러운 일의 조짐이다. 더럽고 불결한 물건을 본 사람도 재물을 얻을 조짐이라는 따위이다.《좌전》노희공魯僖公 28년 가운데 기술된 하나의 구체적인 점의 보기를 들어도 무방하리라.
진후晋侯는 꿈에 초 나라 성왕과 육박전을 벌였다. 초 나라 자기를 넘어뜨리고 자기의 뇌를 꺼내어 소금에 절였다. 이 장면은 무서웠다. 자범子犯은 말했다. ‘길합니다. 나가 하늘을 얻었으니 초 나라는 그 죄로 엎드리고 나는 또한 유연해질 것입니다.12)
이 이야기는 춘추 시기 성복城濮 전쟁의 전야가 무대이다. 진나라 문공文公[BC 638~628]이 꿈에 초 나라 성왕成王[BC 672 ~ 626]과 육박전을 벌렸다. 그 결과 진문공이 땅에 넘어지자 초 성왕이 진 문공의 뇌수를 빨아 먹었다. 그 장면은 정말로 무서웠다. 때문에 진문공은 깨어난 후 매우 근심하였다. 그런데 대신 자법子氾은 오히려 길조라고 말하였다. 무엇 때문인가? 진 문공이 비록 땅에 넘어졌으나 얼굴이 하늘을 향했고, 땅에 누운 것은 즉 ‘하늘을 얻은’의 형상이다. 초왕이 비록 진 문공 몸 위에 눌러 앉았지만 머리를 숙인 것은 죄를 인정하는 상태이다. 또한 치아가 비록 단단하지만 뇌수는 반대로 여린 물건이기에 여린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기는 격이 된다. 이런 돌려서 풀이한 결과 진 나라는 승리하고 초 나라가 패했던 것이다. 진 문공도 이 때문에 자신의 패업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이 점의 보기는 동한東漢의 왕부王符13)《잠부론潛夫論》<꿈의 사례> 가운데 ‘반몽反夢’의 전형이 되었다. 사실 이런 뒤집어서 말하기의 억지성은 매우 선명하다. 역사적 사실을 조금 알고 있는 사람은 이 뒤집어 풀이하기가 당시 ‘국제’ 환경 ‧ 쌍방의 실력 대비와 전략 전술의 운용 관계라는 것을 알 것이다. 자범 본인도 전문적인 꿈풀이꾼이 아니라 훌륭한 장교일 뿐이다. 다시 말하면, 자범은 전쟁 국면 ‧ 전략 ‧ 전술에 대해 아는 정도가 꿈점을 아는 정도보다 훨씬 깊었다. 그 때문에 소위 ‘반몽’은 이에서 ‘반’이 된 것이다. 소위 꿈점의 ‘풀이 기술’이 가진 비밀을 여기서 대략 엿볼 것이다.
꿈풀이 전문가 혹은 술객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이나‧ 기교의 하나로 크게는 문장을 썼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활동에 대하여도 많은 부가 조건이 붙었다. 예를 들면, 꿈점은 비단 꿈의 현상을 분석할 뿐만 아니라 꿈풀이 전문가의 신분과 지위도 보아야 한다. 같은 꿈이라도, 귀족과 평민 ‧ 제왕과 신하 ‧ 군자와 소인, 그들 간의 꿈의 의의는 모두 같지 않다. 이밖에 또한 꿈꾼 사람의 꿈점을 보는 마음이 성실한가 그렇지 아니한가도 보아야 한다. 마음이 성실하면 효력이 있고, 성실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의 꿈을 점친 후 효력이 없다면, 그것은 꿈풀이 전문가의 잘못이 아니라 당신 마음이 성실하지 않음을 탓해야 할 것이다. 이런 부가 조건을 배경으로 꿈풀이 전문가 혹은 술객들은 믿는 데가 있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좌우로 꿈풀이 근원을 제공받아 확고한 기초를 세운 것이다.
꿈풀이 술이 고대부터 그 역사가 유구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꿈의 혼夢魂이란 관념에서 연변된 후, 또 철학사의 정신인 불멸의 이론과 관련을 맺음으로써 광범하고 또한 사상과 군중의 기초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 사회 영향도 극히 심각하고 거대하였다. 일종의 수술 활동으로 말하면, 꿈풀이 술의 신비 색채는 뚜렷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수술 활동과 비교하면, 꿈풀이 술의 신비성은 사실 선명하지 않다. 이 점은 앞에서 소개한 가운데서 알았을 것이다. 만약 어떤 신비한 것이 있다면, 그것도 꿈 자체이지 꿈풀이 술이 아닌 것이다. 비록 중국 고대인 대다수가 꿈과 꿈점을 높이 보았지만, 꿈점을 의심하고 또 꿈을 대담하게 탐색하는 자들도 얼마든지 있다. 또 꿈점 활동 자체도 사람들을 위해 정확히 꿈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독특한 생리—심리형상에 대량의 자료를 제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