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유연하게 더 유연하게
(김00 선생님께 / 정임표 22.10.17. 21:05 )
제가 글 수신인을 김00 선생님께 라고 썼다고 오직 김00 선생님과 대화하려는 것은 아님을 독자님들은 이미 아실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균형 감각이 무엇인지를 탐색해 가는 과정에서 생각을 나누는 대화의 한 방편으로 글 제목을 그렇게 쓴 것일 뿐임을 양해 바랍니다. 수필이 내 개인사를 소재로 쓴 것이지만 영양가 없는 개인사를 시시콜콜 홍보하려고 쓰는 것이 아니라 개인사를 소재로 삼아서 더 많은 다중에게 유익한 의미를 전하려는 것과 같은 이치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저는 그제 토요일(10월 15일) 청남대를 다녀왔습니다. 관광철을 맞아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청남대를 만들 그때는 그 어느 누구도 아무 소리도 못했는데, 지금은 용산에다 대통령 집무실 옮긴 것을 두고 왈가왈부 하는 것을 보니 그때 그 시절에 비하면 정말 우리 대한민국이 자유가 보장되었고 발전되었다는 하나의 큰 징표가 아닌가 합니다. 신임 대통령의 청와대 포기는 권부를 버린다는 “탈권위주의적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진보의 상징” 중 하나로 보는 게 옳습니다.
지금까지 청와대 관광을 다녀간 국민들이 수 백 만 명은 될 것입니다.(정확한 기사: 개방 5개월을 맞은 10월 10일 현재 기준 누적 관람객 수는 212만 9713명을 기록. 지난해 경복궁의 연간 관람객 수가 약 108만 명). 수도 서울에 북촌마을과 함께 새로운 관광명소가 하나 생겼고 세계인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는 관광 자원이 되었으니 아주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로마 베드로 대성당이나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도 개방되어 있는데 전 세계인으로부터 벌어들이는 입장료 수입이 어마할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거나 앞이 보이지 않아 마음이 답답하면 그걸 털어 놓을 상대가 필요합니다. 그 상대로는 친구가 가장 좋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을 만나 수다라도 실컷 떨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편해집니다. 마음이 편해지면 길이 보입니다. 친구 다음으로 우리 민족이 많이 찾는 곳은 심리상담사나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무속인이나 점술가를 찾습니다. (저처럼 단 한 번도 찾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그들의 예언적 사주풀이가 맞던 맞지 않던 내 삶에 관심을 기울여준다는 그 것 하나 만으로도 살아갈 용기를 줍니다. 특히 과거에 대한 액풀이(살풀이) 굿은 사람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恨, 트라우마)를 풀어주는 효과가 대단합니다.
무속을 미신이라고 하지만 인지가 발달하기 전에 형성된 원시신앙이자 정신치료 행위 입니다. 신앙은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참회하게 하고 다시금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가지게 합니다. 가끔씩 기성 종교에서도 인간의 영혼을 이상한 곳으로 집단적으로 이끌어 가는 자들이 나타나기도 함으로 원시신앙이라고 해서 전부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황당무계한 신앙에 모든 것을 몰입해버리도록 만들 때 생명이 생명으로서 살아가는 데 이롭지 못한 문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산속에서 길을 잃었는데 지도(독도법)에 근거해서 길을 찾으려는 노력은 않고 점을 쳐보니 동남방으로 가라고 했다고 해서 동남방으로만 계속 달려가는 그게 문제가 된다는 뜻입니다. 대통령도 주변에 좋은 친구가 있어야 하고 사장도 휘하에 좋은 참모가 있어야 하는 일이 성공을 거둡니다. 수필가협회도 회장 옆에 좋은 조언자들이 있어야 성공합니다. 모든 조직이 다 그렇습니다.
특히 우리문인들이 이해하실 일은 종교나 정치 뿐만 아니라 문학예술 음악무용이 원시 샤먼에서 분화되어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인지가 미개한 (개명되지 못한) 고인돌 시대의 원시 샤먼은 형이상학의 세계가 총 망라된 정신영역이었다는 뜻입니다. 현대에서도 광인 기질을 가진 분이 예술가들에게서 많이 나오고 종교나 정치인 중에서도 많이 나오는데 광인이 거대 조직을 지배하고 물리력을 가지게 되면 마성을 띠면서 인류가 위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마성을 통제할 수가 있어야 문학예술이 창달되고 행복한 세상이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 마비된 세계를 암흑세계라하고 이성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세계를 빛의 세계라고 합니다. 제가 쓰는 이런 류의 글쓰기 방식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한 이성의 작용을 통하여 우리의 생각을 빛의 세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이 인문학입니다. 인간은 신성과 마성(이성이 명철하면 신성을 띠고, 감성이 폭발하여 폭력화되면 마성을 띠는 것이 인간 입니다)을 동시에 지닌 생각하는 동물입니다.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질인 이 생각이 유연해야, 마성이 통제되고 신성이 회복되면서 우리의 삶이 행복해 지는 데, 인간만큼 자기 생각에 집착하는 동물 또한 없다고 생각 합니다. 생각을 자기 자신(정체성)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좌 편향적 생각이든 우 편향적 생각이든 내게 행복을 주지 않는 생각은 전부 무소용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는 길은 단 한 길 뿐입니다. 다른 이( 내 이웃)들도 행복해 져야 내가 행복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남이 행복해지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갖는 이게 생각의 유연성입니다.
죽는 것 보다는 사는 게 행복합니다. 그걸 안다면 남을 죽이려 들면 아니 됩니다. 전쟁을 벌이는 자들은 악마(마성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자)입니다. 가난한 것 보다는 부자가 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 남들도 부자가 되도록 해 주면서 자기도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남에게 좋은 물건을 열심히 만들어서 파는 것입니다. 이게 기업가 정신입니다. 대접을 하는 것 보다 대접을 받는 것이 매우 기분이 좋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을 대접하고 그 다음에 내가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이게 예절입니다. 인정받는 게 무시당하는 것 보다 좋습니다. 그러면 먼저 남을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남을 먼저 사랑해야만 내가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give and take 입니다. 먼저 주고 나중에 받으라는 것입니다. 먼저 받은 다음에 나중에 주겠다는 이 순서만 바꾸면 모두가 행복의 길로 갑니다.
이런 이야기는 마태복음에 다 있는 이야기이고 이솝 이야기에도 다 있는 이야기 입니다. 물론 나는 먼저 열심히 배려했는데 상대방은 그걸 자기 유세(잘난 것)로 알고 나를 계속 더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문학행사가 끝나고 나면 기념촬영을 하는데 제일 앞줄에다 놓은 의자에 서로 앉으려고 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무언지는 모르지만, 앞줄 의자에 앉으면 더 잘난 사람으로 봐 줄 것이라는 유치한 심리 탓입니다. 이러한 모든 소아적행위는 우리의 무지몽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인간정신세계의 성숙과 성장을 위해서 설교를 하고, 학교는 윤리도덕을 가르치고, 문학을 하는 작가들은 열심히 인간의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아름다운 서정에 대해서 글을 쓰는 것입니다.
사랑은 이기적이라야 진짜 사랑이라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이타적인 사랑을 한다는 사람은 거짓말장이 이거나 성찰이 덜된 사람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남을 사랑해야 한다는 이걸 인정하면 진짜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전거는 잘 달리면 되는 것이지 좌로든 우로든 넘어지면 아니 됩니다. 저는 다른 분들의 생각을 읽은 재미로 카페에 들어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도 있구나 하고 사람의 마음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 분들이 제게 은인입니다. 그걸 마중물로 하여 이렇게 주절주절 글을 쓸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런 류의 글을 쓰는 이유는, 우리가 더 많은 부분을 공감하면서 같이 행복해 지기 위함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공감대(공통분모)가 없어서 남북한처럼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국민들이 참으로 불쌍합니다. 시진핑과 타이완이 한판 전쟁이 붙을 수도 있고, 김정은이가 남한으로 미사일을 쏠 수도 있습니다. 두개의 나라가 벌이는 전쟁이 서너 개의 나라가 벌이는 전쟁으로 확산되면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세계교류의 단절이 가져오는 고환율, 고금리, 고물가, 주식시장과 부동산 가격 폭락은 전쟁보다 더 비참한 환경을 불러 올 것입니다. 인간경제활동의 중심무대인 이들 시장의 붕괴 시작점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문입니다. 푸틴과 시진핑과 김정은은 세계에서 몇 안 남은 독재자 입니다. 민주는 국민들이 자기들의 정치의사를 결정하는 체제를 말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국민들이 투표로서 스스로의 정치 의사를 결정합니다. 결정했으면 다음 선거가 있을 때 까지는 내가 선택한 지도자를 믿고 기다려 줘야 합니다. 책임을 맡겨 놓고 흔들면 계추모임의 회장도 할 수 없는 게 인간 사회 입니다. 흔드는 것과 길을 안내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논문 표절”. 옛날에는 아예 돈 주면 완전 대필해 주는 곳도 수두룩했습니다. 오늘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되풀이 하는 불쌍한 국민이 되면 아니 됩니다. 역사바로세우기 한다는데 역사는 그대로가 역사이지 바로 세우는 대상이 아닙니다. 문장도 그렇습니다. 대신 써준 연애편지는 내 마음이 아닙니다. 합평으로 탄생된 작품 역시 내 글이 아닙니다. 내 마음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운 습작일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생각 속에 갇혀서 사는 동물인데, 이 생각을 더욱 유연하게 해야 행복해 진다는 소리를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를 통해서 널리 알린 바가 있습니다. 제 두 번째 수필 집 제목이 그래서 <생각 속에 갇힌 인간>입니다. 저는 오늘도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들과 힘겨운 정신적 싸움을 벌여 나가는 중입니다. 이건 선한 싸움입니다.
제 글을 읽는 분들이 가르치려 드는 투로 글을 쓰지 말라고 조언을 합니다. 은유와 상징 같은 비유법을 더 많이 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책은 도끼다!"고 말한 사람은 소설 <변신>을 쓴 카프카 입니다. 도끼로 뇌를 깨부수어도 깨우침을 얻게 하지는 못합니다. 깨우침은 간절히 구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큰 축복이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일어나지 않는 기적과 같은 것입니다. 은유와 상징을 이해하는 지혜가 없으니 아무리 문학적으로 표현해본들 모릅니다. 특히 수필은 너무 쉽게 쓰이어져서 글을 통해서 인간의 생각을 골똘하게 만드는 동기부여를 하는 기능이 부족합니다. (현대인들은 골똘하게 생각하는 그 자체를 싫어하기도 하지만). 그래서 직설적으로 쓰는 게 낫겠다 싶어서 그렇게 쓰는 것입니다.
깊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능력, 이건 골똘하게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야 터득이 되는지라, 이게 정말 중요한 문학적인 장치인데 "작가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를 한번만이라도 생각하면서 작품을 읽는 독서 태도를 갖추면 얻는 게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솔로몬이 부귀영화가 아니라 지혜를 구했다는 일화는 유명한 이야기이자 깊은 상징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서중자유천종록(書中自有千鍾祿)”이란 말과 같은 뜻입니다. 같은 사람이로되 바둑에 갓 입문한 18급은 입신의 경지(인간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경지)에 이른 9단을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지 못합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문장을 배우고 책 한권을 일백번 읽으려고 시도했던 적도 있습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이 깊어지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우물이 깊으면 물이 달고 시원하듯이, 생각도 깊으면 달고 맛이 있습니다. 더 깊은 생각, 더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는 생각들과 만나는 기쁨을 독서가 가져다줍니다.
"깊은 생각(지혜)을 담은 책은 읽는 그대로가 행복이다."
이 말은 정임표의 말입니다.
끝으로
삶은 더불어 함께 사는 것입니다. 부정부패는 자기 잇속만을 챙기려는 인간의 음습한 욕망이 만들어내는 공동체 파괴 행위 입니다. 나는 좌파든 우파든 그 사상을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공동체를 위한다는 지도자들이 부패한 것은 엄히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패를 척결하라고 강골인 검찰 출신 정치 신인의 후보를 우리는 대통령으로 선출했습니다. 권부의 부패를 척결하지 못하면 나라의 기강과 정신이 썩어버려 국가라는 공동체는 멸망하게 됩니다. 1백프로 완벽한 인간만이 부패 청산의 적임자가 아닙니다. 비록 흠이 있더라도 척결해 나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 필요 한 시대 입니다. 선생님!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요. 저는 어떤 사상이라도 인간에게 유익이 있고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을 좋아 합니다. 그러나 부정부패는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