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산 장편소설 나당대전(2021.5.6.)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삼국통일 영웅들의 이야기
동아일보사(신동아 1998년 신년호 별책부록)
나관중의 삼국지에 도전장을 낸 신예작가 김정산. 이제 우리 삼국지로 역사를 다시 읽는다.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신라의 기쁨도 잠깐,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는 당의 야심이 시시각각 통일신라를 위협한다. 우리 민족의 생존을 건 나당 8년전쟁의 시작, 외세에 맞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인들이 지략과 무예의 한판 승부를 펼친다.
작가의 글
나는 7백여 년에 걸쳐 이 땅에 존재했던 우리의 찬란한 삼국시대가 딱딱한 사서속에 단순히 학문으로만 갇혀 있음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다. 그 안타까움은, 통틀어 고작 80년에 불과했던 중국의 삼국시대(위,촉,오)가 국경을 넘어 대를 이어 읽히는 것을 볼 때마다 더욱 깊어졌고, 수적으로나 그릇의 크기로나 중국 인물들에 결코 뒤지지 않는 우리 삼국시대의 출중한 영걸들을 만나면서 거의 통탄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 작품은 내가 예전부터 틈틈이 써오던 삼국시대 이야기의 제일 끝부분이다. 끝부분을 세상에 먼저 발표하느라 앞에서부터 등장하는 몇몇 인물에 대해 충분히 다루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주요 등장인물
연개소문/보장왕(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치(당나라 황제 고종)/측전무후(이치의 두 번째 처)/설인귀(당나라의 장수)/검모잠(고구려의 명장)/안승(멸망한 고구려 보장왕의 아들)/온사문(온달의 후손)/부여융(백제 마지막 왕 의자왕의 둘째 아들)/흑치상지(사마녜군과 부여융을 받들던 백제의 명장)/법민왕(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왕)/김인문(태종 무열왕의 차자)/정명태자(문무왕의 아들)/김유신(태대각간으로 문무왕 재임시 사망)/구진천(활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명공)/강수(신라 계림의 문장가)/흠돌(신라 태자 정명의 장인)/법안(측천무후가 총애하는 당나라 승려)
1 고구려의 멸망
달대를 희롱하며 요동을 주름잡던 영웅 연개소문이 죽자 고구려 조정은 사공을 잃은 나룻배처럼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2 검모잠과 왕자 안승
평양성에 안동도호부가 들어서고 당장 설인귀가 만승의 위엄을 갖춘 채 집무를 시작하자 이를 바라보는 고구려 백성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슴이 터지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했다. 사직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한낱 소장에 불과하던 설인귀 따위가 지존이 되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도대체 울화가 치밀고 억장이 무너져 견딜 재간이 없었다.
3 무너지는 나당관계
고구려를 멸한 당이 드디어 그 여세를 몰아 우리까지 속국으로 삼으려는 본색을 만천하에 드러냈구나. 아아, 소적을 치기 위해 대적을 끌어들인 줄은 진작부터 알았지만 그 수작이 어찌 이리도 치졸하고 적나라하며 시기 또한 이처럼 급하더란 말인가!
4 강수선생
당에서는 이들을 반란군이라 칭하였으나 고구려 사람들은 다물군이라 불렀으니 다물이란 곧 국토회복을 뜻하는 고구려의 말이었다. 패수 남변의 궁모성을 근거로 일어난 다물군의 숫자는 처음에는 고작 3천명에 불과했으나 소문이 퍼지자 산지사방에서 유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여 금세 5,6천을 헤아리더니 급기야 달포만에 1만이 넘는 대군으로 불어났다. 다물군은 순식간에 패수 일대를 장악하고 매일 2,30리씩 북으로 진격하여 설인귀의 1만 군대와 도성 남단에서 대치했다.
5 안승의 신라 망명
고구려 기병들에게는 북방의 다른 기마족들이 가지지 못한 뛰어난 무기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과하마였다. 과하마는 압록수 이남, 특히 고구려 지방의 토종 말로 몸집은 작으나 힘이 세고 평지뿐 아니라 산지에서도 비호처럼 달리는 명마 중의 명마였다.
둘째로 철기병이 사용하는 무기에는 길이가 18자에 달하는 장창과 맥궁이라는 작은 활이 있었다. 그 가운데 맥궁은 역시 고구려의 소수맥에서만 나는 것으로 말을 타고 달리며 움직이는 물체를 쏘아 맞히는 데는 더할 나위가 없이 효과적이었다. 창창과 맥궁을 든 쇳덩이 기병부대가 전광석화처럼 적진을 헤집고 지나간 뒤에 남은 사상자는 부지기수였다.
6 신라, 백제 구토를 치다
지금 고구려는 엊그제 이곳을 떠난 당제의 칙사 법안이 비명횡사를 할 만치 사정이 어지럽고 급박하오, 이럴 때 백제의 구토를 토벌하고 그 유민을 거두지 않는다면 다시 언제 선왕께서 말씀하신 삼한일통의 유업을 도모할 수 있으리오?
안승의 망명을 통해 북방의 전세가 생각보다 훨씬 치열한 것을 실감한 법민왕은 서둘러 백제 구토를 장악한 당나라의 도독부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심했다. 법민의 제안에 재생 진순이 입을 열었다.
7 친당파와 치른 석성전투
백제 구토를 아우른 뒤에 계림의 신하들과 백성들 사이에선 곧 당이 대군을 이끌어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횡행하여 민심이 되우 흉흉했다. 실제로 당은 금성에 사신을 보내 당장 백제 땅을 도독부에 반환하지 않으면 대란을 겪을 거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법민은 부여 융이 먼저 희맹을 어겼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군사를 낸 거라고 버텼지만 그 역시 장차의 일이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기로 이미 빼앗은 백제 땅을 되돌려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8 선전포고
안승과 검모잠이 4천여 호 주민을 인솔하고 신라에 몸을 의탁했더니 법민왕이 기름진 땅과 성을 내어주고 따로 사직을 잇도록 선처했으므로 누구든 신라에만 가면 다시 고구려 백성으로 살 수 있는 희망이 망국민들의 황폐한 가슴을 설레게 만들고 있었다. 소문이 퍼지면서 실제로 해안의 배를 탈취하여 서해나 동해로 빠져나가는 유민들의 숫자도 갈수록 늘어났다. 아직도 요하 일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계속하며 다물군의 저항에 골머리를 썩고 있던 당나라로선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9 웅진을 멸하다
답서를 받아본 설인귀는 자신을 추켜세우는 글귀에 우쭐한 마음도 생긴 데다 또 일변 수긍하는 대목도 없지는 않는 터라 북방의 일에만 전념하려 했는데 그로부터 두어 달 뒤인 신미년(671년) 9월에 당제의 명을 받은 고간이 설방, 조헌 등의 장수와 더불어 탁군(북경)부근의 번병 4만과 함께 등주만을 출발해 평양에 이르렀다.
이때 고구려의 사정은 잠시 숙지근하던 압록수 이남의 다물군들이 묘향산 일대에서 다시 창성하여 평양을 위협했고, 요동에서는 우상 유인궤를 비롯해 고간, 이근행, 백안류, 학처준, 방동선, 설필하력 등 당나라의 거의 모든 장수들이 동원돼 끝까지 저항하는 장성(천리장성)변의 제성들과 사력을 다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여러 사정을 감안하면 당은 아직 신라에 한눈을 팔 때가 아니었다. 국경과 접한 요동의 저항은 반드시 평정해야 하는 절박한 것이었지만 신라와는 적어도 그런 관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병법과 외교의 기본인 원교근공의 법칙이었다.
10 김유신의 죽음
먼저 당군이 아직 무이령 서쪽에 둔거하고 있을 9월 어름에 하루는 금성 북천에 혜성이 무려 일곱 번이나 출몰한 일이 있었다. 그 바람에 첨성대에 올라 천문을 살피던 일관들이 외길에서 산범을 만난 듯이 난리를 치고 수선을 떨었으나 법민은 그 말을 듣고 일관들을 크게 꾸짖으며 본시 변화무쌍한 것이 밤하늘의 별자리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그 따위 일로 민심을 어지럽게 하느냐? 만밀 이 일을 파설하는 자가 있다면 다른 저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엄벌과 중형으로 다스릴 것이니 그리 알라! 하고 엄포를 놓았다.
11 마침내 평양으로
대각간께서 보내신 서신에 따르면 유인궤는 우리의 칠중하(임진강)하류에 배를 정박하고 매성현으로 쳐들어 올 계획이라고 합니다. 칠중하 강변에는 칠중성이 있고, 칠중성은 예로부터 아녀자의 속곳과 같다는 겹겹의 웅성이라 조금씩 땅을 물려가며 시일을 끌기에는 더할 나위가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대각간께서 귀국하는 시기는 유인궤의 군사가 조착하는 것과 한 달 차이가 있습니다. 칠중성에 그동안 훈련시킨 우리 군사를 모두 결집시켜 일부러 패책을 쓰며 시일을 끌고 일변으론 대왕께서 낙양에 사죄사를 파견해 다시 한번 당제의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런 다음 유인궤의 군사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가 칠중성에 결집한 군사들을 이끌고 벼락같이 평양을 급습함다면 대각간의 목숨도 구하고 평양성도 얻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옛날부터 신이 아뢴 화전 양면책의 진수입니다.
12 신라의 대반격
신라가 감히 평양성의 도호부까지 공격해 오리라곤 꿈에도 예상하지 못했던 당제 이치는 쫓겨온 설인귀로부터 전황을 전해 듣자 눈알이 튀어나오고 머리털이 관을 뚫고 나오도록 크게 분개했다. 이는 웅진성이 함락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애당초 선제 이세민이 신라왕 김춘추와 동맹을 논의할 때 백제와 평양 이남의 토지는 신라에게 주기로 약정한 터였고, 이를 알고 있던 이치로선 비록 허락없이 웅진을 아우른 신라가 쾌심할지언정 그 자체를 나무랄 형편은 아니었다. 백제의 일은 대국의 위신에 관련된 것이었을 뿐, 어차피 신라가 달라고 하면 줄 수밖에 없는 게 당의 사정이었다.
13 원술과 시득
김유신의 상사가 났을 때다, 그때 금성 유신의 집에는 경향 각지의 이름난 사람들은 물론이요, 평소 고인을 흠모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도성 전체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는데, 그만한 인파가 모인 것이 금성이 생기고는 처음 있는 일로, 태종 무열대왕 춘추의 국상 때보다도 오히려 조문객과 구경꾼이 많았다는 게 세간의 통설이었다. 천관사는 전날 유신과 애틋한 정분을 나누었던 천경림의 기생 천관을 기려 세운 절이다. 천관 부인과 유신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시득이다. 유신은 천관에게 자식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일생을 살았다. 그가 젊어서 상수(볼모)살이를 할 때 천관과 둘이 지내던 천경림 옛터에 천관사를 짓고는 천관의 아우이자 자신의 오랜 벗인 각간 천존을 찾아가 내가 그때 자네 누이에게 몹쓸 짓을 하였는데 이제라도 절을 지어 원혼을 달래고자 하네. 하니 수십 년간 그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던 천존이 한참동안 유신을 물끄러미 보다가 망령 나기 전에 철이 들어 다행이오. 칭찬인지 책망인지 모를 소리로 답했다.
14 최후의 결전
매초성을 장악한 뒤 이근행은 스스로 말갈병 1천여명을 추려 아달성 약탈에 나섰다. 이때 아달성 성주는 급찬 한선이란 자였다. 한선은 마침 장정들을 이끌고 성 밖의 삼밭에 나와 삼을 심고 있다가 말갈병의 침략 소식을 들었다.
15 8년전쟁 그 이후
장장 700여 년에 걸친 삼국 시대는 막을 내리고 한반도에서는 새로운 통일신라시대가 개막됐다. 신라에 패한 뒤 당나라는 평양성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의 신성으로 옮기고, 요동의 불복하는 무리에 대해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에 보장왕을 요동주도독 조선왕으로 삼고 부여융을 웅진도도 대방군왕에 봉하여 양국의 유민들을 진무하게 했는데, 보장왕은 요동에 이르러 가만히 말갈과 내통하므로 이를 알아차린 이치가 그를 앙주로 불러들였다. 보장왕은 서력 682년에 죽었는데, 당에서는 그에게 위위경이란 벼슬을 추증했다. 그 뒤로도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하남, 농우 등의 여러 주와 요동의 옛 성터에 나누어 살게 했지만 대개는 신라에 도망하고, 남은 무리들은 말갈과 돌궐 등지로 흩어져 드디어 고씨의 군장은 끊어지고 말았다.
부여융 또한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전날 외백제가 있던 요동 금주만의 대방 땅에서 죽었다. 당의 무후는 부여융의 손자 부여경에게 관작을 이어받아 대방을 통치하게 했으나 ,발해가 건국한 뒤 그 지역을 차지하므로 드디어 부여씨의 국계도 처음 일어났던 곳에서 끊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