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레터 70]‘신동엽申東曄문학관’에서 엿본 그네들의 사랑
<껍데기는 가라>라는 시를 쓴 신동엽(1930-1969) 시인을 아시지요? 그의 고향 생가生家에 건축가 승효상씨가 지은 아담하고 깔끔한 문학관이 있다기에 진작부터 가고 싶었습니다. 농한기農閑期가 너무 좋습니다. 익산에 사시는 사돈을 꼬셨지요. 흔쾌히 수락하더군요. 우리는 지난해부터 경상도 병산-도산서원을 비롯해 전북의 무성-필암서원, 충남의 돈암서원 등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書院 순례를 잠정 중단하고, 문학관文學館 순례에 나섰습니다. 그동안 순천 태백산맥문학관, 부안 신석정문학관, 고창 서정주문학관, 김제 아리랑문학관, 여산 이병기문학관, 남원 혼불문학관 등을 다녀왔지요. 준프로 사진작가인 사돈은 사진을 찍고, 저는 관람평을 졸문이나마 써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문학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고 아름다운 일이 되겠지요.
신동엽 시인은 저의 성장기에 영향을 끼쳤다고나 할까요? 1960년대 ‘거대한 뿌리’의 시인 김수영과 ‘쌍벽’을 이룬 민족시인이라고 할까요? 두 분 다 요절한 셈이지요. 불과 38살에 간암으로 세상을 뜨다니요. 안타까운 일입니다. 아내 인병순 여사와 2남 1녀를 남기고 어떻게 그렇게 곱고 여린 마음씨의 시인은 눈을 감았을까요? 문학관에서 제가 처음으로 엿본 것이 시인과 시인의 아내 사랑이었습니다. 인여사는 역시 ‘시인의 아내’다웠습니다. 당신의 신혼 보금자리를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1985년 문학관을 건립하여 시인남편의 원고와 유품 등 ‘모든 것’을 군에 기증했다더군요. 절창絶唱의 시 <생가生家>를 처음 접하고 무척 놀랐습니다. 아예 ‘달관達觀’의 시였습니다. 그 전문. 먼저 감상해 봅시다.
우리의 만남을
헛되이
흘려버리고 싶지 않다
있었던 일을
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당신과 내가 처음 맺어진
이 자리를 새삼 꾸미는 뜻이다
우리가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
제 눈이 번쩍 띈 것은 <우리가 살고 가는 것이 아니라/언제까지나 살며 있는 것이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있었던 일들을/늘 있는 일로 하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골백 번 마음에 맴돌았겠지요. 왜 아니었겠어요? 이런 시 구절을 보면 ‘밑줄 짝’을 치고 싶지 않나요? 시인남편은 죽어도 죽지 않았으며, 지금도 살고 있다고 하지 않나요? 사랑을 하려면 딱 이런 마음으로 해야 할 것입니다. 시인 백석과 자야보살의 사랑이 연상되더군요. 요정으로 수십억 재산가가 된 자야는, 이까짓 재산은 연인 백석의 시 한 편보다 못하다며 법정스님에게 통째로 헌납하여 성북동 길상사로 거듭났지요.
아-, 시인부부는 그런 사랑을 하셨군요. 여사님은 이화여고 3년때 농업경제학자인 인정식 아버지를 존경하다는 그 말 한마디에 병약하고 가난한 문학청년에게 홀딱 반해 서울대 철학과도 때려치고, 바로 이곳 생가에서 신혼생활을 했다구요. 양장점을 꾸리는 등 어렵게 생활했다구요. 병상의 석림石林(시인의 호)과 주고받은 사랑편지 몇 통에 제가 다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미남, 요즘말로는 ‘상남자’라고 할까요? 등산도 좋아해 북한산에 <신동엽의 길>이 있다구요. 여사는 요절시인인 남편의 굴레를 벗어나고자 ‘정신적인 이혼’을 꿈꾸며 민속문화 가운데 짚풀공예를 발굴했지요. 현재 서울 혜화동 부근의 <짚풀생활사박물관>이 그것입니다. 너무나 훌륭한 일을 ‘민족의 유산’처럼 남기는 업적도 쌓았고, 자녀들도 잘 키웠다지요. 큰아들은 시인의 아들답게 의대를 다니며 운동권도 되고, 마침내 시집도 남긴 시인이 되었구요. 참, 장하십니다.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수 년 전 만나 뵙고 몇 마디 얘기를 나눴지요. 그때 드린 말씀이, 79년인가(대학 3, 4학년) 친구와 함께 백마강변에 외롭게 서있던 시인의 시비를 찾아 시비를 어루만지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왜 울었을까요? 그저 답답했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시인이 그렇게 <껍데기는 가라>고 절규했는데, 껍데기들이 여전히 판치는,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금강>이라는 판금된 시집을 인사동 통문관 점원분이 몰래 살며시 손에 쥐어줘 시인을 알게 되었어요. 그분이 현재 <TV진품명품> 감정위원으로 종종 나오는 김영복 선생입니다. 몇 년 전, 의뢰인으로 출연해 김선생과 악수하며 옛일을 얘기하는데, 전혀 기억을 못하더군요. 그때 김선생이 함석헌 선생님이 강의하는 민간집을 알려줘 <노자>를 몇 번 배운 적이 있었지요.
문단에서 1970년 세운 백마강변 시비에는 <山에 언덕에>라는 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山에 언덕에 피어 날 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 갈 지어이.
시인의 주옥같은 시들이 그의 생가에서 다시 ‘시의 깃발’(부여출신 임옥상 작품)이 되어 피어 오릅디다. 그의 고향산천, 산과 언덕에 꽃이 되어 향기를 내고 있습디다. 참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인근 중학생들이 견학을 와 남긴 쪽지글들에서 그분의 후예들을 보았습니다. 60년대 말, 김수영과 신동엽이 없었다면 세상은 얼마나 팍팍했을까요? 두 분의 시는 숨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시인의 장편 서사시 <금강錦江>를 꼭 읽어보셔요. 동학농민전쟁 한 가운데에서 꽃피고 지는 하늬와 진이의 애달픈 사랑에 가슴이 먹먹할 것입니다.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야기하는 쟁기꾼의 大地>는 또 어떻구요. 석학 양주동의 “조금 놀랍게 했다”는 심사평이 재밌더군요.
아, 문학관 관람은 아주 좋았습니다. 새로이 알게 된 사실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시인 아내의 순애보純愛譜가 좋았습니다. ‘잠깐 사랑’일지라도 사랑을 하려면 이렇게 하는 게 진정한 사랑이지 않겠습니까? 서른 살에 유복자를 남기고 요절한 남편의 머리맡에 머리카락으로 신발을 엮고, 애절한 편지를 쓴 <원이엄마의 편지>가 하나도 훼손되지 않고 470여년만에 무덤에서 나와 화제가 된 적이 있었지요. 안동에 가시거든, 안동대박물관에서 그 실물들과 원이엄마 동상을 꼭 보고 오시지요. 걸핏하면 이혼, 이혼... 이혼율조차 OECD 국가중 1위라는 이 부박浮薄한 세상에,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로미오와 줄리엣’서양의 러브스토리에만 흥미를 느끼지 마시고, 조선, 이 땅에도 불멸의 사랑이 차고 넘친다는 것을 기억하고 알면, 우리의 삶이 좀더 윤택潤澤해지지 않을까요? 오늘 오후엔 차분히 장편 서사시 <금강>을 재음미해 봐야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껍데기는 가라>는 큰소리로 두 주먹 불끈 쥐고 읊어봐야겠지요. 흐흐.
껍데기는 가라.
四月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 논
아사달 아사녀가
中立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漢拏에서 白頭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