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39
12월14일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 학자 기념일/대림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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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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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X-jrxRlRUg (신희섭 암브로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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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요한 사제의 눈은 언제나 개혁과 쇄신을 향한 불꽃으로 이글거렸습니다!>
하느님과 교회, 세상 앞에 장엄하게 청빈 서약을 한 수도자로서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과연 나는 오늘 진정으로 청빈한가? 라고 자문해보니, 너무나 부끄러운 나머지 할 말을 잃습니다.
더 이상 가난하게 살지 않은 동료 수도자들의 한심한 모습이 안타까웠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한탄 조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청빈은 우리 축성생활자들의 삶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벽입니다. 고급 승용차에, 최첨단 기기를 장착하고 살아가는 사제, 수도자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픕니다. 자전거를 쌩쌩 타고 다니시는 비서 신부님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1542~1591)가 살아가던 중세 시대나 지금이나 물질과 안락한 삶에 대한 애착은 수도자들에게 있어 큰 유혹꺼리로 작용했던가 봅니다.
당시는 수도 생활의 부흥기를 지나 일종의 쇠락기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더 이상 수도자들에게 있어 완덕에 대한 열망이나 하느님 중심의 삶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타성에 빠진 수도자들의 얼굴은 냉랭했고, 게을러빠진 수도자들은 자꾸만 회칙을 완화시켰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충실하고 올곧은 가르멜 수도자 요한은 원칙대로! 를 강조하며 고난과 형극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안토니오 수사를 비롯한 마음이 맞는 수도자 몇 명과 더불어 엄격한 금욕과 극기, 기도와 고행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안락하고 쾌적한 대 수도원 건물을 뒤로하고 다리를 뻗기도 힘들고 서 있기도 힘든 작은 방에서 함께 생활했는데, 여기저기 비가 새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다는 얼굴로 기쁨과 감사의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외출을 할때는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녔습니다. 이러한 쇄신된 삶을 살아가면서 끝끝내 회개하지 않는 동료 수도자들을 회개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습니다.
자연스레 얼굴과 뱃속에 기름이 가득한 게을러빠진 동료 수도자들에게 미운털이 깊이 박혔습니다. 자신들의 비행이나 과오는 덮어둔 채, 갖은 방법으로 요한 사제를 괴롭혔습니다.
총회가 개최되자 요한 사제를 오해한 총장은 그를 톨레도 수도원의 깊은 지하 감방에 가두었습니다. 그가 총회에 나타나서 어떤 행패를 부릴지 몰라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 사제는 갖은 학대와 모욕을 묵묵히 견뎌냈습니다. 사악하고 매정한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 일언반구도 항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바꾸었습니다. 부족한 내게 겸손의 덕을 쌓게 하는 은인!
이토록 탁월한 성덕은 오래가지 않아 만천하에 드러났습니다. 머지않아 요한 사제의 결백과 인품이 알려졌고, 비오 5세 교황과 그레고리오 13세 교황은 그의 이상을 추구하는 수도자들을 위한 특수한 가르멜회를 정식으로 인준했습니다.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을 수도회 개혁에 몸 바친 요한 사제의 눈은 언제나 개혁과 쇄신을 향한 불꽃으로 이글거렸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의 삶도 조금 바뀌었습니다. 좀 더 너그럽고, 좀 더 풍요로워졌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는 데는 엄격했지만, 타인을 대하는 데는 한없이 관대해졌습니다. 그렇지만 수도회 개혁과 쇄신을 향한 그의 노선을 단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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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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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어떤 분들은 사제로, 또 수녀님으로 수십 년 사셨어도 아직도 당신의 성소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부르심대로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고 계속 자신의 성소가 혹 결혼 성소가 아닐까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받은 소명(성소, 거룩한 부르심)과 선택이 굳건해지도록 애쓰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2베드 1,10)
성소는 결코 죽기까지 찾아가야 할 무엇이 아닙니다. 지금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성소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만약 작은 어려움만 닥쳐도 결혼한 신자가, ‘내 성소는 이게 아니었나보다.’ 혹은 성소자가, ‘내 성소는 결혼 성소인가보다.’라고 한다면 결코 온전히 자신의 길을 확고하게 갈 수 없을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성소가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을 팔아넘겼으니 성소가 없는 것일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유다를 사도로 직접 부르셨고 뽑으셨습니다.
그 성소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는 바로 부르심에 대한 자신의 확고한 응답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계속 성소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죽기까지 흔들리기만 하다가 끝나버릴 것입니다.
다행히 저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저를 사제로 불러주셨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첫 기억이 조부모님의 죽음으로 시작하게 하여 제가 평생 행복이란 것을 찾도록 섭리해주셨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행복하기 위해 결혼을 원하다가 나중엔 사제의 길이 참 행복임을 깨닫고 이 길로 들어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소에 확신이 있으니 얼마나 편한지 모르고 아직은 단 한 번도 후회나 흔들려본 적이 없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확신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의심 없이 믿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만약 커서도 계속 ‘부모님이 정말 나를 다리 밑에서 주워 오신 걸까?’라고 의심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을까요?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우면 그 농담이 진담처럼 들려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부모님이 참 부모님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것을 기억도 못 하는데 어떻게 그 확신이 가능할까요? 바로 살아오면서 나에게 해 주었던 사랑과 주위 사람들의 증언 등을 생각해보면 꼭 눈으로 보지 못했더라도 어떤 확신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제야 부모님과 올바른 관계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었던 요한이나 안드레아과 같은 이들은 이미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요한은 메시아를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고한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요한은 직접 가서 그분이 참 메시아인지를 여쭈어보게 합니다. 예수님은 여러 기적을 보여주시고 이렇게 대답해 주십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이 말씀은 요한이 의심을 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로 그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보자마자 하느님의 어린양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즉, 제자들을 보내어 직접 예수님을 만나보고 기적을 보고 말씀을 들어보게 하여 그들에게 확신을 주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여러 가지를 묵상해보고 저절로 부모님에 대해 확신을 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그 믿음이 올 수 없고 그렇다면 세상살이는 매우 힘들어지게 됩니다. 신앙이 있는 사람에게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삶의 힘이지만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조금만 어려움을 겪어도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제 생각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성소는 본인이 원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불러주시는 것 같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배반하게 될 유다를 왜 뽑으셨겠습니까?
단 한 가지 이유는 유다가 사도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이고 다른 사도들도 예수님이 부르셨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날 만큼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미 그리스도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들은 흔들릴 필요 없이 자신의 성소에 대해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어떤 제자가 될 것인지만 신경 쓰고 노력하면 될 것입니다.
결혼하거나 독신으로 사시는 분들 또한 그 삶에 대해 확신을 하고 뒤를 돌아볼 필요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성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면 됩니다.
하느님은 누가 어떤 길을 가든지 그 사람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예수님은 “의심을 하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당신께 대한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또한 동시에 구체적인 성소에 대한 말씀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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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신학생 때입니다.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청소는 알아서, 스스로 했습니다. 학년별로 맡아 청소하는 구역도 있었습니다. 낙산 오솔길, 테니스장, 운동장, 학교 정문, 식당, 체육관, 빨래방, 교수관 등이 있었습니다. 대부분은 아침 식사 후 동료들과 함께하였습니다. 가끔 생활지도 신부님들께서 청소상태 점검을 하였습니다. 학년별로 맡은 구역도 하지만, 개인 방을 점검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은 청소상태만 보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규정에 어긋나는 물건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학생의 품위에 어긋나는 것들은 없는지도 보았습니다. 신부님들의 점검이 있을 때면 알아서 버릴 것들은 버리고, 감출 것들은 감추기도 하였습니다. 4학년을 마치고 군대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군대에서도 내무반별로 청소하는 구역이 있었습니다. 내무반은 물론 각자의 관물대도 청소해야 했습니다. 신학교보다 점검하는 방식이 엄격했지만 방식은 비슷했습니다. 군대의 규정에 어긋나는 것들은 알아서 감추거나 치웠습니다. 이런 점검이 부담이 되었지만, 이런 점검을 통해서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동료 신부님 중에 한 분은 별명이 ‘보물선 선장’이었습니다. 신부님 방에는 물건이 많았습니다. 신부님이 쇼핑하기도 하고, 선물을 받기도 하고,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것들도 있습니다. 바쁘기도 하지만, 정리하는 습관이 익숙하지 않아서 가끔 신부님의 방을 가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밭에 보물들이 묻혀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번은 동료 신부님들이 보물을 찾아도 되는지 물었습니다. 신부님은 기꺼이 신부님들의 방문을 환영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각자 필요한 물건을 찾아냈고, 보물선 선장 신부님은 대부분은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신부님은 방 정리를 하였고, 다른 신부님들은 각자가 원하는 보물을 찾았습니다. 저는 신부님처럼 보물선의 선장은 아니지만 가끔씩 서랍과 사무실의 수납장을 정리하곤 합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것들을 버리기도 하고, 필요가 없어진 서류들을 정리하기도 하였습니다. 가끔 보면 동네에서도 창고 정리하는 광고를 봅니다. 예전에는 필요했지만 지금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싼값에 이웃들에게 파는 행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들의 마음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걱정, 불안, 시기, 질투, 분노, 원망은 가끔 정리해서 버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어오면 온유, 인내, 친절, 나눔, 희생과 같은 것들은 자리를 빼앗기기 마련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면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치 신학생들이 생활지도 신부님께 ‘저희가 청소를 잘했는지요?’라고 묻는 것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 주님의 길을 닦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요한은 군중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세리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군인들에게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몸에서 태어난 이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이는 없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크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은 복음을 사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 마음의 밭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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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7,19-23: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요한 세례자는 감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을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19절) 묻는다. 요한은 “오실 분”을 예고한 바 있다. 예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요한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르다고 생각한 것 같다. 요한이 생각했던 그 오실 분은 마지막 심판자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당신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당신의 권능과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셨다. 그리고는 깨달아 알도록 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22절) 바로 예언자들이 한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 즉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걷고,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죽은 이들이 일어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고 들은 것을, 여러 시대에 예언자들이 예고한 일들이 당신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졌다고 전하라는 말씀이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23절) 유다인들이 그분을 의심한 것은, 신비의 깊이를 몰랐거나 그것을 알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을 낮추시어 이 땅에 그 모습을 나타내실 것이라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분에게 걸려 넘어지고 바위에 부딪혀 쓰러지고, 부서져 가루가 되었다. 그들은 그분이 이루신 놀라운 일들을 통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영광과 위엄을 가지신 그분을 보고도 그분께 돌을 던지며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요한 10,33) 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 곧 그를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의 자세를 변화시켜야 한다. 우리도 역시 이 요한의 질문과 같은 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렇게 기도를 하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는 걸 보면, 정말 하느님이 계신가? 계시지 않는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지 하느님이 우리를 따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을 기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내가 변하는 기적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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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내일 복음(루카 7 ,24-30 참조)과 함께 하느님의 구원 역사에서 드러나는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신원, 그리고 이 두 인물의 상호 관계를 보여줍니다. 짝을 이루는 이 두 개의 일화는, 예수님께서 병자(백인대장의 종, 과부의 외아들)를 치유하시는 두 가지 사건(7, 1-10.11-17 참조)과 죄지은 여인을 용서하시는 사건(7 ,36-50 참조) 사이에 자리합니다. 이로써 병을 고치시고 죄인을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역할이 부각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아직 예수님의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행적을 전해 듣고도,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그분이 정말로 ‘오실 분’이신지 여쭙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일대에서 행하신 가르침과 기적 행위는 세례자 요한의 기대와 달랐습니다. 앞서 세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오실 길을 준비하며 그분을 ‘심판자’로 소개하였습니다.(3, 9.17 참조) 그런데 그가 자기 제자에게 전해들은 예수님의 활동 모습은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아의 정체를 입증하기에 부족하였습니다. 의심에 찬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답하십니다. 먼저 병자를 고쳐 주시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십니다. 이어서 이사야 예언자의 언어로 당신께서 보여주신 치유 활동을 묘사하시면서(이사 26,19; 29,18; 35,5-6; 61,1 참조), 보고 들은 것을 세례자 요한에게 전하라고 지시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구약의 예언이 완성되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는 우리의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당신을 보여주실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치유하시는 분으로 소개합니다. 약한 이, 작은 이, 가난한 이와 함께 계시며 그들의 아픔을 낫게 하시는 예수님, 우리는 그분을 ‘메시아’, 곧 ‘구원자’로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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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도회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방향설정>
우리는 누구를 향하여 가야하는지가 빨리 가는 것보다 더 근본적 문제입니다. 오늘 주님은 바로 내가 인류가 찾아가야할 목표이고 나를 찾는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진다고 하시었습니다.
어제 대구 원로들의 모임에서 나온 말 중 “교회는 20년 안에 망한다.” 그 말의 의미는 금년 대구 신학교에 5명밖에 입학신학생이 없어 점점 숫자가 줄면 신학교 문 닫고 교회의 일꾼이 없으니 교회는 망한다고 합니다. 영보다 육에 마음을 쓰는 사람들의 방향설정이 잘못되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도 그전 우리 옛 부모처럼 아이를 낳아 힘들게 가르치려 하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저출산과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사라져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잘못 가고 있으며 목표를 점점 이탈하고 있습니다. 그는 찾아야 할 것을 찿지 않고 주님을 향하여 가는 사람은 천천히 가도 되지만 방향을 주님 반대편으로 가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구원의 길에서 멀어집니다.
오늘 교회는 자본주의나 안일 무사주의나 권력이나 재력가에게 향하여 있으면 교회의 미래는 어둡게 됩니다. 돈이 있어야 전교를 할 수 있다고 돈을 쫓아가거나 힘 있는 사람이 있어 세상의 힘을 향하여 가거나 높은 자리를 탐하는 사람으로 가득 차면 교회의 희망은 작아집니다.
오늘 주님은 눈먼 이, 병자, 죽은 자, 가난한 자에게 방향을 틀어 가는 길이 주님을 찾아가는 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말 어떤 이가 길을 가다가 마차를 얻어 타고 어디로 가는지도 묻지도 않고 편하게 잠을 자다가 가야할 곳에서 더 멀리 가게 된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현실 같이 느껴집니다.
묻지도 않고 잠을 잔 사람은 바로 목표설정을 잘못하고 깨어 있지 않고 편하게 가는 것만 생각하는 것은 바로 교회가 올바른 방향을 알려주지 않고 편하게 살려는 자세와 신자들을 깨워 주지도 않고 자기 자신도 깨어 있지도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자나 깨나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 나부터 가난한 편에 서서 구원받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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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박동진 베르나르도 신부님]
<의심의 끝에서 만나는 진리>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표현은 신앙생활 안에서 한 번쯤 생각해 볼 만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자체가 더 의심스럽습니다.
누구나가 의심을 하고, 고백하기를 주저하며, 표현만 하지 않았지 긴가민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있든 없든 믿는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는 식으로 위안을 삼기도 하지만, 만일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세월을 헛되고 우스꽝스럽게 살아갈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명쾌하게 주어지지 않는 답변 안에서 여전히 망설이며 살아가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신학교에서 막 신학을 배우던 때, ‘수없이 회의에 빠져서 차라리 부모님이 가지셨던 소박한 신앙으로 돌아가고 싶다.’라고 교수님께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웃으시며, ‘그러면 얼마나 좋겠냐만, 일단 의심이 들었으면 그것 자체를 파헤치려고 정진하는 것이 지금 할 일이지, 다시금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겠냐.’라고 하셨습니다.
갈수록 더없는 미궁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진리가 알고자 하는 이의 몫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둠 속을 헤매다가 결국 하느님의 더 큰 빛을 찾을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애초부터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복된 일이지만, 요한의 제자처럼 의문과 의심을 품는 것이 또한 인간적이라면, 의문과 의심의 끝에 진리를 만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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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믿음>
루카 7,18ㄴ-23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답변하시다)
그때에 요한은 자기 제자들 가운데에서 두 사람을 불러 주님께 보내며,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쭙게 하였다. 그 사람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세례자 요한이 저희를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여쭈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믿음>
벗을 돌보러
보라 하시니
보는 것입니다
벗을 일으키러
제대로 걸으라 하시니
제대로 걷는 것입니다
벗을 품으러
깨끗해지라 하시니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벗을 살리러
되살아나라 하시니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벗을 깨우러
복음을 들으라 하시니
복음을 듣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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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본연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예수님>
우산 장수인 큰아들과 짚신 장수인 작은아들을 둔 어머니는 늘 걱정 속에 살았습니다. 비가 올 때는 작은 아들을 걱정하고, 맑은 날에는 큰아들을 걱정하니 하루도 걱정이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맑은 날에는 작은아들이 짚신을 많이 팔 것이니 좋고, 비가 오는 날에는 큰아들이 우산을 많이 팔 것이라, 생각하니 늘 기뻤습니다. 생각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져 보입니다.
여러분은 새소리를 들으면 ‘노래한다’고 하십니까? 아니면 ‘운다’고 하십니까? 같은 소리를 들어도 듣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셔도 어떤 이는 감사할 줄도 모르고 불평 불만합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아주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기뻐합니다. 마음이 열려있는 까닭입니다. 그는 항시 은총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있으니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잠에서 깨면서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시면 어떨지요?
사실 하느님께서 당신 모상을 닮은 사람을 만드시고 당신의 영을 불어넣어 주셨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이 하느님의 걸작품이라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기뻐해야 합니까? 그 감사와 기쁨을 잊어간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잃어버린 은총을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만물을 근본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질병과 비참함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악령을 물리치시고 사람들을 하느님과의 화해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하여금 저마다 본연의 모습을 되찾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가르치고 또 이끌어 주셨습니다. 마침내 구원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자가 선언한 그대로입니다. “그날에는 귀먹은 이들도 책에 적힌 말을 듣고 눈먼 이들의 눈도 어둠과 암흑을 벗어나 보게 되리라.”(이사 29,18)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라.”(이사 35,5-6)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11,6. 루카7,23) 스승을 의심하지 않는데 제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내 비록 스승에게 속아서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의 가르침대로 산 것을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그리는 모습이 꼭 일치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본연의 모습에로 인도하십니다. 당신의 걸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근심걱정이 있다면 생각을 바꾸어 보십시오. 골치덩이를 통하여 더 큰 것을 예비하시니 미리 감사하고 기뻐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분명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한 귀한 것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서도 흔들림 없기를 바랍니다.
‘자살’을 거꾸로 읽어보면 ‘살자’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본연의 모습을 지키고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께 나 자신을 의탁해야 하겠습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히브11,1)해 주기 때문입니다. 더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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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느 책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읽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고,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다.”
첫째를 낳았을 때는 자신도 부모가 처음인지라 아이가 예쁘다는 것을 느낄 여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둘째는 여유와 인내심을 가지고 대하다 보니 너무 예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둘째는 부모의 사랑이랍니다.
첫째는 부모의 자랑이 되어 많은 기대를 받게 됩니다. 그래서 첫째에게는 많은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고, 물질적인 풍요도 동생과 비교하면 많이 받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자랑이라는 기대감이 너무 부담된다는 첫째의 하소연을 많이 듣습니다. 또 동생에게 양보하고, 동생을 돌보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둘째는 고충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둘째 역시 힘듭니다. 첫째가 쓰던 것을 물려받고, 교육의 혜택도 첫째만큼 못 누립니다.
첫째든, 둘째든, 막내든, 외동이든지... 자기 자리에서 힘들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요? 어떤 처지에서도 자신이 짊어질 무거운 짐 한두 가지는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힘들게 하는 짐만이 보입니다. 남이 가지고 있는 짐은 자기 짐보다 너무 가볍다고만 생각합니다.
이런 상태에서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가 있을까요?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칭호에 대해 의심하면서, 믿음에 대해 불필요한 감정의 소비라고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삶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자기 제자를 주님께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 7,19)라고 묻게 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가 에인카렘에서 만나셨을 때, 즉 뱃속에서 이미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기뻐하셨습니다. 그런 그가 의심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
자기 제자들이 직접 예수님을 뵙고 알아볼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우리의 나약함 때문입니다. 나약함과 부족함으로 늘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그 완벽해 보이는 세례자 요한까지도 말이지요.
자기 짐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짐이 무겁다면서 불평불만 속에 있으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내 곁에서 볼 수 없기에 행복할 수 없게 됩니다.
모든 의심을 품지 말고 주님과 함께하는 오늘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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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
“이제 알아라. 나 외에는 신이 없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신명 32,39)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이사 40.6-7)
우리는 하느님을 얘기할 때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하고 구원자 하느님을 얘기할 때 치유, 해방, 구원의 하느님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병 주는 하느님은 얘기치 않고 약 주는 하느님만 얘기하는데 사실은 하느님이 <병 주고 약 주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빛이시고 빛을 창조하셨지만 창세기를 보면 빛이 있는 낮과 빛이 없는 어둠이 있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생명의 샘이 진정 하느님께 있지만 생명이 끝나는 죽음도 있게끔 우리의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어둠이니, 죽음이니, 불행이니 하는 것들은
빛이 있으면 그늘이 있듯이 창조의 그늘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죽음이 없도 록 우리 생명을 만들지 않고 죽음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신 것이고, 애초에 어둠이나 그늘이 없도록 빛을 만드셨으면 될 것을 어둠이나 그늘이 있도록 만드심으로 우리에게 병을 주셨으며 애초에 영원한 행복을 주셨으면 될 것을 이 세상에서는 끝이 있는 행복을 주심으로 불행이라는 병을 주신 것입니다.
이 세상과 피조물을 이렇게 창조하시고 우리 인간도 그렇게 창조하신 것이 병 주시는 하느님이라면 이 세상에 오시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고 영육의 모든 질병에서 우리를 구하시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하시는 예수님은 약 주시는 하느님입니다.
여기서 저는 질문을 합니다. 왜 병을 주고 약을 주셨을까? 병을 안 주셨으면 약을 안 줘도 될 텐데 왜 병을 주셨을까? 다시 말해서 구원이 필요 없게 완전한 창조를 하셨으면 구원이 필요 없을 텐데 왜 구원이 필요하게 창조를 하셨을까? 예수 그리스도로 이루실 구원을 왜 창조 때 진작 이루시지 않으셨을까?
구원자를 보내시고 약을 주신 것은 참으로 고맙지만 병을 주신 것은 못내 아쉽고 원망스럽기까지 합니다. 창조의 그늘이 아니라 창조의 실패가 아닐까요? 창조의 실패를 구원으로 보완 보상하는 것 아닐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현재의 아둔한 제 머리로는 이런 창조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좋게 이해하자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이렇게 하신 것도 사랑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하신 사랑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당신의 미완성을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완성하라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인간이 완성하라는 것일까요?
사실 천국이 아니라 유한한 이 세상에 창조하시는 한 그 창조에 생명도 끝이 있고 행복도 한계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겸손하다면 이 찬류세상竄流世上을 원망하지 않고 교만하지만 않다면 여기서 시작된 창조를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케 하신 하느님 사랑에 감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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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 일주일 쯤 전에 다독을 하시는 한 형제님이 책을 권하셨습니다. 제가 알기로도 아주 좋은 책이고 훌륭한 사상가이자 영성가, 종교가의 영성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분이 권하시기도 하고 읽어두면 좋을 책이기에 읽기는 읽을 텐데 끝까지 다 읽을지는 미지수입니다.
왜냐면 솔직히 20대 이후 어떤 책도 읽히지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책에서, 또는 다른 누구에게서 무슨 모르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다든지 내가 꼭 필요로 하는 무엇을 얻게 된다든지 그런 것이 없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현대 신학자 누구누구에 심취하여 이 얘기, 저 얘기 하는 것을 들어도 저는 심드렁합니다. 옛날의 저를 보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저도 한 때는 굶주린 듯이 이 책, 저 책을 많이 읽었고 사상가, 영성가, 예술가를 편력하다가 마지막에 인도 사상, 그중에서도 오쇼 라즈니쉬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그것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복음을 재발견하고 프란치스코를 통해 하느님을 다시 만나고는 깨달았습니다.
이제 성서와 프란치스코의 글들 외에 내게 필요한 것은 더 이상 없습니다. 다른 것들이 이런 발견을 위해 길라잡이 하였지만 찾을 것을 찾은 다음에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지요.
불교의 우화도 있지요. 어떤 사람이 강을 건너야 하는데 물이 불어서 건널 방도가 없었습니다. 방도를 찾던 중 마침 배를 발견하여 그 배로 건넜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그 사람은 자기를 건너다 준 배를 강을 건넌 다음에도 계속 지고 다녔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오로지 원하고, 찾고, 기다려야 할 분이 누구인지 얘기합니다. 빛도 만드시고 어둠도 만드시는 분, 행복도 주시고 불행도 주시는 분, 주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길라잡이들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자기 제자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인지 알아보게 합니다. 그 제자들에게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의 길라잡이였습니다.
저에게는 프란치스코가 길라잡이입니다. 다른 것을 더 찾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때는 그렇기 때문에 구도 열망이 식은 것처럼 느껴지고, 너무 단조로운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혀 당기지 않으니 어쩔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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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 하느님!>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이다-
“주께서 집을 아니 지어 주시면, 그 짓는 자들 수고가 헛되리이다.
주께서 도성을 아니 지켜 주시면, 그 지키는 자들 파수가 헛되리로다.
이른 새벽 일어나 늦게 자리에 드는 것도,
수고의 빵을 먹는 것도 너희에게 헛되리니,
주님은 사랑하시는 자에게, 그 잘 때에 은혜를 베푸심이로다.”(시편127,1-2)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내 영혼이 주님을 더 기다리나이다.”(시편130.6)
한밤중 일어났을 때 저절로 떠오른 시편들입니다. 그대로 제 영혼의 고백같은 시편성구입니다. 저에게 하느님은 평생화두이자 저의 전부입니다. “오, 하느님!”, 23년전 수녀원 피정지도때 강의 주제였고, 아주 오래전 청담성당 대림 특강때 강의 주제였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오늘 축일을 지내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물론 모든 성인들에게 하느님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성인 빼기 하느님하면 남는 것은 허무요 무지의 어둠일 것입니다. 교회의 밤하늘에 별들같은 존재가 성인들이요, 성인들은 물론 내가 오늘 지금 여기 살아있다는 자체가 생생한 하느님 체험입니다. 우리의 하느님 체험은 늘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서 임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대신비가이자 대영성가인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학자 기념일입니다. 참으로 극심한 빈곤과 궁핍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성인의 삶은 참 파란만장했으며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49년 짧은 생애였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와 함께 가르멜 수도원 개혁에 헌신하다 감옥생활등 죽음의 고비도 수없이 겪었고 1591년에는 병고와 정신적 고통을 겪다가 12월13일밤 선종합니다.
성인은 교회의 가장 위대한 신비가중 한분이며, 영성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카르멜의 산길”, “영혼의 노래”, “사랑의 산 불꽃”이 유명합니다. 요한은 1675년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위해 시성되었고, 1926년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학자로, 1993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에스파냐 언어권의 모든 시인詩人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됩니다. 살아서보다도 죽어서 영원히 살아있는 성인들입니다. 교회가 잊지 않고 적절한 하느님의 때에 맞춰 시성하고 교회학자로 선포하여 신자들이 보고 배우게 하는 자상한 배려가 참 고맙고 놀랍습니다.
성인을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또한 분투의 노력을 다해 성인답게 살라고 촉구하는 성인 기념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을 닮은 참 나의 성인이 되라고 불림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전 읽은 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와 한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사자성어는 1.과이불개(50,9%);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 2.욕개마장;덮으려고 하면 더욱 드러난다(14,7%), 3.누란지위(13,8%);여러 알을 쌓아 놓은 듯한 위태로움, 문과수비(13,3%);과오를 그럴듯하게 꾸며대고 잘못된 행위에 순응, 군맹무상(7.4%);눈먼 사람들이 코끼리를 더듬으며 말함의 순서였습니다. 참으로 하느님 없는 무지의 인간들임을 깨닫게 됩니다. 한마디로 지혜의 결핍입니다. 오랜만에 읽은 “녹(綠)의 미학(김상미 1957-)”이란 시도 생각납니다.
-“녹은 쓸쓸함의 색깔
염분 섞인 바람처럼 모든 것을 갉아먹는다
세상을 또박또박 걷던 내 발자국 소리가
어느날 삐거덕 기우뚱해진 것도
녹 때문이다
내 몸과 마음에 슨 쓸쓸함이
자꾸만 커지는 그 쓸쓸함이
나를 조금씩 갉아먹었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된 건물에 스며드는 비처럼
아무리 굳센 내면으로도 감출수 없는
나이처럼
녹은 쓸쓸함의 색깔
흐르는 시간의 사랑 제때 받지 못해
창백하게 굳어버란 공기”-
세월흘러 나이들어가면서 누구나 겪는 실존적 체험이 영육의 녹슴, 사랑의 결핍, 쓸쓸함, 외로움일 것입니다. “쓸쓸해서 사람이다”, “외로워서 사람이다” 라는 정의도 어울립니다. 그러나 하루하루 깨어 하느님을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고 만나 체험하며 사는 우리 수도승들에게는 녹틀 틈이 없이 늘 반짝이는 영혼입니다. 사실 저는 쓸쓸함이나 외로움을 느낀 적이 거의 없습니다.
여기 불암산 기슭에서 34년 동안 정주하면서 원망, 절망, 실망한 적도 거의 없습니다. 다만 답답하고 막막할 때는 하느님의 뵙듯 하루에도 수없이 바라다본 불암산과 그 배경의 하늘입니다. 아마 저만큼 불암산과 하늘, 하늘의 별들을 많이 본 분들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향한 그리움도 없습니다. 주님과 늘 함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쓸쓸함, 외로움, 그리움은 생명의 하느님을 찾으라는 초대같습니다. 장익주교님의 김수환추기경님에 대한 언급도 생각납니다.
“저는 추기경님이 고독해 하시는 것을 뵌적이 있지만 외로워하거나 쓸쓸해하는 모습은 한번도 뵌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이사야에게 하느님은 너무나 자명한 존재였고 그 고백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체험할 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배는 밥으로 채울 수 있지만 허기 가득한 끝없는 빈 가슴은 살아 계신 하느님만이 채울수 있습니다. 텅빈 허무를 텅빈 충만이 되게 하는 분은 하느님뿐입니다.
“내가 주님이고 다른 이가 없다, 나는 빛을 만드는 이요 어둠을 창조하는 이다. 나는 행복을 주는 이요, 불행을 일으키는 이다. 나 주님이 이 모든 것을 이룬다.
하늘아, 위에서 이슬을 내려라. 구름아, 의로움을 뿌려라. 땅은 열려, 구원이 피어나게, 의로움도 함께 싹트게 하여라. 나 주님이 이것을 창조하셨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하늘을 창조하신 분, 그분께서는 하느님이시다. 땅을 빚으시고 땅을 만드신 분, 그분께서 굳게 세우셨다. 그분께서는 혼돈으로 창조하지 않으시고, 살아 있는 곳으로 빚어 만드셨다. 내가 주님이다. 다른 이가 없다. 나 주님이 아니냐? 나밖에는 다른 신이 아무도 없다. 의롭고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 땅끝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 구원을 받아라. 나는 하느님, 다른 이가 없다.”(이사 45,6ㄴ-8.18.21-22)
얼마나 고무적인 하느님 고백인지요! 너무 단순명료합니다. 이런 하느님을 온힘을 다해 믿고 사랑하고 희망하며 체험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깨어 있는 삶, 끊임없는 하느님 공부, 성경 말씀 공부, 끊임없는 회개의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체험됩니다. 예수님은 요한의 제자들이 당신이 우리가 오시길 기다리는 메시아 그분인가 물었을 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질병과 병고와 악령에 시달리는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고, 또 많은 눈먼 이를 볼 수 있게 해 주던 때입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죄도 병도 많은 시절입니다. 아니 날로 늘어나는 온갖 병들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육신은 물론 영혼과 정신, 마음의 질병과 병고로, 또 갖가지 무지와 탐욕, 분노, 질투, 광신에 눈멀어 악순환의 반복을 살아가는 지요! 참으로 진정한 회개를 통해 주님을 만나는 일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실현되는 이사야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곤 누가 이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겠는지요!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을 통해 만나는 생명과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온전한 전인적 총체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하느님대신 예수님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예수님은 답입니다. 인간이 병病이라면 예수님은 치유 약藥입니다. 인간이 병자病者라면 예수님은 명의名醫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됨으로 영육이 온전히 치유되어 참나의 온전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영적 권고중 하나입니다.
“그대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기에,
다른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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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22)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
오늘 복음(루카7,18-23)은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최고의 관심은 '메시아의 도래'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역시 그랬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루카7,18)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질문에 대해 답변하십니다. 그런데 "그렇다". 또는 "아니다." 라고 대답하시질 않고,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라고 대답하십니다. 곧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 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 그 모습을 그대로 전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당신 자신이 바로 메시아'이시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 메시아가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오신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이, "너희가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여라." 라는 말씀으로도 다가왔습니다.
'나는 어떤 메시아가 도래하기를 바라는가?
심판의 메시아인가? 아니면 구원의 메시아인가?'
지금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예수님은 '구원의 메시아'로서,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살리러 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과 성체와 기도를 통해 구원자이신 메시아를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다시 살아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체험'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지금 여기에서 내가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여라.'는 의미로도 다가왔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는 구원의 표징이요 부활의 상징인 십자가 체험을 통해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신 분이고, 그 체험을 우리에게 전해주신 분입니다.
'오늘도 구원의 표징인 십자가 사랑 안에 머물러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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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PuCUk20cu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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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루카 7, 22)
희망을
별빛처럼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아픔에
가까이 계시며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여 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시다.
보고 들은
것을 통해
비로소
알게되고
비로소
만나게 되는
우리 삶의
기쁜 소식
복음이다.
우리를 위하여
주님께서 오셨다.
사람답게
살게하기 위해
주님께서 오셨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길이
열린다.
당신 삶으로
바른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신다.
말씀과 진리는
예수님의
삶으로
드러난다.
이와같이
참된 진리는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보게 된다.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만나게 되는
주님이시다.
주님을 찾는
것이 아닌
이러한
주님처럼
스스로 살겠다는
마음과 실천이
중요하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이길을
걸어가신다.
예수님을 통하여
보고 들은 것이
한낱 지식이
아닌 우리의
삶이 되는
대림이길 기도한다.
대림은
뜨거운
우리의
삶이다.
우리 삶이
예수님을 닮은
희망의 별빛이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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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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