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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비극적 의미, 우나무노, 장선영 역
-Del sentimiento tragico de la Vida en los
hombress y en los pueblos-
삼성이데아, 1988. 8. 2 초판, 369쪽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비합리적이고,
합리적인 모든 것은
비생명적인 것이다는 명제로부터 출발한
우나무노는 실존적 회의주의의 바탕에서
인간과 종교, 신에 이르기까지
생의 실존적 문제를 광범위하게 탐구한다.
흄, 칸트, 데카르트, 키에르케고르와
스피노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철학자들을 논구하면서
생명은 우주적인 것이고,
신은 우리가 원하기에 존재하며
신과 우리는 합일할 수 있고
천국과 지옥은 사회적인 것이고
죄는 집단적이며
그러기에 생은 고통인 것이고
고통이 아닌 행복은 의미가 없다고 설파한다.
그 깊은 의미에서
기독교의 근본 정신과 신앙의 중심과제를
그 누구보다 설득력있게 이야기하는데,
근본에 가면 모든 종교는
궁극의 합일점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生의 悲劇的 意味, 우나무노
세계와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나 이해하지 못하는 방
법을 논하는 우리의 철학은 삶 그 자체에 관한 우리
의 감정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삶이라는 것은 그 전체가 정적인 것으로서의 잠재의식의 뿌리, 아니 어쩌면 무의식의 뿌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들을 낙관주의나 염세주의로 이끄는 작용은 우리의 사상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리적 또는 병리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낙관주의나 염세주의가 우리의 사상을 만들고 있다. 11
실천이성비판을 꼼꼼하게 읽은 사람이라면 칸트는 엄밀히 말해서 불멸의 영혼을 통해 신의 존재를 추정하는 것이지, 신의 존재를 통하여 불멸의 영혼을 추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12
각자는 자기의 개성을 방어한다. 그러니까 다만 어떤 변화가 자기 정신의 단일성에 편입될 수 있다거나 또는 자기 존속성에 용해될 수 있다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거나 느낄 때 그 변화를 수락할 뿐이다. 18
사람들은 내게 말하기를, 내가 이 세상에 온 목적은
나도 잘 모르는 그 무슨 사회적 목적을 실현코자 왔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내 형제들 그 누구나 마찬가지로 삶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밖에 더 의식하지 못한다. 20
만약에 개미도 이런 것을 의식하고 또 자신을 의식하는 人性을 가졌다면 아마 신은 개미를 위해서 세계를 만들었다고 아주 멋진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는 의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각개의 의식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21
여기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지각할 수 있는 세계다.
이 세계는 갈망의 아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른 세계가 있다. 관념의 세계다. 즉 사랑의 아들이다. 그런데 지각 세계를 인식하는 감각들이 있다면 또한 그런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감각들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의식은 관념 세계의 인식으로 인하여 겨우 눈을 뜰 정도이니 말이다. 35
테니슨은 '옛 시대의 현자'라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 아들아,
너는 말할 수 없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단다.
너는 네가 단지 육신뿐인지
또는 네가 정신뿐인지
또는 네가 하나로 된 육체와 정신인지
그것조차 증명할 수가 없단다.
너는 네가 불멸성을 가졌는지
또는 네가 죽는 몸인지
그것도 증명할 수가 없단다.
내 아들아, 더 기막힌 것은 너는
너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네 자신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내가 아니라는 것조차
증명할 수가 없단다. 왜 그런지 아니? 증명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증명할 수가 없고, 또 증명도 되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이애야, 신중하거라.
항상 의심의 밝은 부분만을 붙잡거라.
신앙의 형태를 넘어서서 신앙 그 자체로
기어 올라가도록 하거라. 42
평화 속에서 삶을 중지하는 것보다는 고통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 잔혹한 지옥, 즉 영원한 고통을 믿지 않았다. 아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해서 無와 그 전망 이외에는 진정한 의미로서의 지옥은 그 어떤 것도 볼 수가 없었다. 53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종교와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경찰화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지옥이라는 것이 생겨난 것이다. 동방 또는 그리스 종교는 압도적으로 來生論的이며 이 반면에 신교는 압도적으로 윤리적이다. 그러면 카톨릭은 어떤가? 카톨릭은 이 두 가지를 절충한 것이라 하겠다. 82
신앙은 신의 존재만을 믿는다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어도 그 존재가 증명할 만한 이론에 의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거나 또는 지금까지 아무도 그 증명할 만한 이론을 가지고 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증명하지 못하였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는 신자로서 파문을 당하고 만다. 88
우리의 문제로서 삶에 관한 우리의 유일한 문제인 개인적 영혼의 불멸과 영원한 구원에 대한 카톨릭적 해결책은 의지를 충족시킨다. 그러니까 삶을 만족시킨다는 말이다. 90
플라톤의 저 무시무시한 ‘파르메니데스’를 읽어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인간은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도 않는다. 그리고 그와 또 다른 전체는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도 않고, 그리고 자기들 자신에 관해서나 또 서로서로도 나타나지 않는다. 모든 생명적인 것은 불합리한 것이며 모든 합리적인 것은 反 生命的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성은 본질적으로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102
스피노자는 윤리학 제5부 명제21에서 '心은 육체
가 계속하는 동안에만 지나간 사물들을 상상할 수가
있고 또 기억할 수가 있을 뿐이다'라는 것을 세워놓았다. 이것은 영혼불멸을 부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 안에 살고 있던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기억을 못하니까 그것은 불멸성을 지니고 있지 못하고 따라서 영혼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는 명제22에서 이렇게 말한 후에 명제23에서 '인간의 심능은 육체만 가지고는 절대로 파괴가 안 된다.영원한 심능의 그 어떤 것이 남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심능의 영원성은 사고하는 그 어떤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독자여, 개인 심능에 있어서 그러한 영원성은 없나니, 여기서 그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지어다. 109
감정은 위로를 통하여 진리를 만들지 못하며, 이성은 진리를 통하여 위로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성은 진리 자체 위에서 행동하고, 현실의 개념 자체 위에서 행동함으로써 깊은 외의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데 성공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이 심연 속에는 감정적인 회의주의가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117
이성과 신앙은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지만 둘 중에 하나가 없으면 지탱해 나갈 수가 없다. 비합리적인 것은 자신이 합리적이 되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이성만이 비합리성에 대해 작용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이성과 비합리성은 서로 의지하고 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만 서로 싸움을 하면서 연합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싸움도 연합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123
철학과 종교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이 두 개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잇다. 어떤 종교이든간에 철학적인 기초가 없는 것은 없고, 어떤 철학이든간에 종교적인 바탕이 없는 것은 없다. 그러니까 철학이나 종교는 둘 다 상대편을 근거로 해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철학의 역사는 엄밀히 말해서 종교의 역사이다. 126
신앙을 논함에 있어서 믿는 것은 믿는 것을 원하는 것이고, 그리고 신을 믿는 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신이 존재하기를 원하는 것이니, 본질은 이성이 아니라 의지 바로 그것이라는 것을 조금 있으면 우리는 곧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에 대한 믿음은 영혼이 불멸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다. 127
연인 각자는 상대방에 대해서 직접적으로는 쾌락의
도구이고 간접적으로는 영속의 도구인 것이다. 연인
간의 관계는 폭군과 노예의 관계이다. 한쪽이 폭군이되면 다른 쪽은 노예가 되고 또 이쪽이 폭군이 되면 저쪽은 노예가 된다. 146
인간은 우주 전체에게 생명을 주고 인격화시키며, 그리고 생기는 불어넣어 줌으로써 자기 생명, 즉 자기 열정의 객관성을 구하려고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망이 잇는 까닭에 그리고 이러한 소망을 위해서 인간은 신과 실체를, 또는 실체와 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신과 실체는, 또는 실체와 신은 언제나 인
간의 사유 속에서 여러가지 복면을 하고 되돌아온다.
우리는 우리가 의식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과는 매우 다른 문제이다. 158
신에 대한 신앙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생겨났으니,
즉 우리는 신이 존재하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신은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에 대한 신앙은 우리들에 대한 신의 사랑에서부터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성은 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증명하지 못하고 있지만, 또한 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역시 증명하지 못하고 있다. 162
우리로 하여금 신의 존재를 믿게 하고 신이 있다는 것을 원하게 하고, 신을 창조하게 한 것은 우주에게 목적을 주려는, 즉 우주에게 의식과 인격을 주려는 윌(의지)의 격렬한 갈망이었다. 무조건하고 신을 믿자!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설명해야 할 것은 가장 신앙심이 강한 유신론자라는 칭호를 주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면에 있어서는 신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사 신이 우리를 먼저 창조했어도 말이다. 신이야 말로 우리들 속에서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분인 것이다. 167
비록 우리가 그 이유를 모르지마는 신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만약에 우리가 신이 그렇게 한 이유를 안다면 신은 도무지 우리에게 필요 없는 존재인 것이다. 즉 이성만 가지고도 우주의 신비는 설명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174
그러니까 합리적인 신은, 즉 이성의 신은 어느 경우
에 있어서나 직선만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제안된 목적, 즉 신에 도달되기 위해서는 유일무이한 직선적인 방향만이 필요하기 때문에 직선이야 말로 필요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달릴 수 있는 선인 것이다. 그리하여 신의 신성은 그 필요성으로 대치된다. 그러므로 신의 필요성 속에서 자유의지, 다시 말해서 의식 있는 인격은 죽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망하는 신, 그러니까 무에서 우리의 영혼을 구할 신, 다시 말해서 불멸의 신은 어디까지나 전횡적 신이라야만 한다. 176
이성은 오히려 우리를 신으로부터 떼어놓는다. 우리
는 나중에 가서 신을 사랑하기 위해 신을 인식할 수
는 없다. 그러니까 신을 인식하기 전에 우선 먼저 신
을 사랑하고 열망해야 한다. 신에 대한 인식은 신에
대한 사랑에서 유래되는 것이니, 그것은 합리성이라
고는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인식이다. 왜냐하면 신은 정의할 수 없는, 즉 설명할 수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신을 정의하려고 한다는 것은 신을 우리의 마음속에 가두어놓겠다는 것이니, 즉 신을 죽이겠다는 의도다. 그러므로 신을 정의하면 정의하기가 무섭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것은 오직 無뿐이다. 179
키에르케고르는 말하기를, “만약에 두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불성실한 인간성을 가지고 참 신에게 기도를 하고, 또 한사람은 무안하다 할 정도로 모든 열성을 지니고 우상에게 빈다면, 첫번째 사람은 사실상 우상한테 비는 것이고 두번째 사람은 참말로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189
만약 당신이 신을 믿는다면 신도 당신을 믿으리니, 신이 당신을 믿으심으로써 신은 계속해서 당신을 창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본질에 있어서 신이 당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고 자신에 대해 의식하고 있는 신의 관념으로서, 즉 의식을 지니고 있는 신의 관념으로서 살아 있는, 즉 생명을 지닌 관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191
과거는 회상하고 현재는 인식하고 미래는 단지 믿는
것뿐이다. 우리가 과거에 보지 못한 것을 믿는다는
것, 장차 우리가 그것을 볼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이
다. 그러니까 다시 되풀이해서 하는 말이지만 신앙은 희망에 대한 신앙인 것이다. 즉 우리가 희망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213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사랑과 행복 사이에서 그 하나를 고르는 운명을 갖는다. 그러나 인간 -오, 가련한 인간이여! - 은 그 두 개를 다 갖기를 원한다. 즉 사랑하는 행복과 행복에 대한 사랑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이 아니라 사랑을 주소서 하고 청해야 된다. 우리를 습관에 잠들게 하지 않는 그 행복말이다. 219
고통은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
해준다. 고통은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고통은 우리가 몸을 담아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니까 고통은 신이 존재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뇌의 고통이니, 즉 길이 살아 남으려는 영원히 존재하려는 고뇌의 고통이다. 고뇌는 우리로 하여금 신을 발견토록 하고 신을 사랑하도록 만든다. 221
죽음 후에 끝없이 영원한 삶을 사유할 수가 있을까?
육체가 달아나버린 정신의 삶이 과연 실재할 수가 있을까? 만약에 이런 것이 다 가능하다면, 만약에 사실이 그렇다면 도대체 그러한 정신은 그 어떤 것일까?
육체적 유기체가 없는 순수한 의식은 그 무엇일까?
데카르트는 세계를 사유와 외연으로 구분하였던 바,
이런 이원론은 영혼불멸에 대한 기독교리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외연은 사유가 되거나 또는 정신화도리 수 있는 물체가 아닐까? 그리고 사유도 외연과 마찬가지로 확장되거나 실체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238
성녀 테레사는 그녀의 저서 '일곱번째의 住居 제2장
에서 “영혼의 가장 내부적인 중심이야말로 바로 신 자신이 머무르고 계실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며, 바로 이곳에서 그 내밀적인 결합이 이루어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내가 말하는 영혼은 情이다. 그러니
까 이 영혼의 정은 신과 더불어 하나가 된다”라고 말
한다. “그것은 마치 두 개의 밀초가 서로 끝을 맞대고 합침으로써 심지나 촛불이나 초가 하나처럼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의 경우다. 그러나 나중에 서로 끝을 맞닿았던 초를 떼어놓으면 심지나 초는 다시 전처럼 두 개가 된다.” 243
엄밀히 말해서 죽음 후에 우리가 갈망하는 것은 계속해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이니, 다시 말해서 죽어야만되는 이 삶을 계속해서 연장시킨다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병이나 권태나 죽음을 겪지 않는 영원한 삶이라야 한다. 246
스피노자는 ‘윤리학' 마지막에 그 비극에 잠겨 있는
이 책을 무한의 영광으로 돌리면서 저 유명한 명제를 남겼다. “행복은 덕의 보상이 아니라 덕 그 자체이며, 그리고 욕구를 억제키 위하여 덕을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덕을 향유하기 위하여 욕구를 억제할 뿐이다” 250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사회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혼자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 따라서 아무도 혼자 떨어져 가지고는 영속할 수가 없다. 누구든지 자기의 형이나 동생이 지옥에서 고통에 못 이겨 몸부림을 치는 것을 빤히 보면서 자기 혼자만 천국에서 신을 향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덕이나 과오는 공통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사유와 더불어 감정을 느낀다. 전체들 속에서 전체가 되어 있는 신을 본다는 것은 신 속에서 전체를 보는 것이며, 또한 전체와 더불어 신 속에서 사는 것이라 하겠다. 272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은 영원한 행복이다. 바로 이 영원한 행복이야말로 수없이 많은 세기를 통하여 신에대한 직관과 신에 대한 기쁨에 근거를 두고 있는 바로 그 영원한 행복인 것이다. 지금 우리 인간이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은 그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여러가지 방법들을 굳이 모색하려고 하는데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284
지성세계는 두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학자인 체하
고 아는 체하는 '페당트’와 취미로서 예술이나 학문을 애호하는 ‘딜레탕트’로 말이다. 285
우리들 자신을 다른 것과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최대의 노력이다. 즉 우리들의 각자는 유일한 것이며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없다는 이론적 사실이 그 어떤 모순을 내포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죽을 때 남겨놓는 구멍을 다른 자가 메울 수 없다는 이론적 사실을 실제적 진리로 만들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는 말이다.
각 인간은 실제에 있어서 유일한 것이며, 그리고 어
떤 것으로도 대치될 수 없다. 다른 ‘나’가 어떻게 나의 ‘나’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들 개체 -우리들의 생명이 아니라 우리들의 정신- 는 우주 전체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정신이라고 말했지 생명이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287
탐욕스런 마음 때문에 밖으로 쏟아버리는 것을 아까
워해서 넘쳐 흐르는 정신을 자꾸 안으로만 밀어 넣는 인간은 자기야 말로 자신을 가장 잘 보전할 줄 아는 자라고 혼자 똑똑한 체하다 보면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러는 동안 천만다행으로 한가지 재주를 습득하게 된다. 정신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매장하고는 정신이 없는 몸으로 남게 하는 재주 말이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정신은 없어도 또 생길 것이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인데, 그러나 조금 정신을 가지고 있는 자도 그나마 그 정신을 전부 잃게 될정도니까 실상 그 믿음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300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
할 때 '당신의 천국을 우리한테 오게 해주소서’라는 의미로 가르쳐 주었지 '우리가 당신의 왕국에 가리다’라는 뜻으로 가르쳐주지 않았다. 초기 기독교 신앙에 의하면, 영원한 삶 즉 영생은 필히 이루어져야 된다고 강조했다. 삶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행복을 모색하도록 한 것은 천사들이 아니라 바로 인간들이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그리스도는 자신을 천사로 만들지 않고 실제적 육체를 취하면서 인간화하였던 것이다. 307
죄를 집단적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죄를 벗는 데 소용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다른사람들이 나의 위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는 데 소용이 된다. 즉 나의 죄를 사방으로 퍼뜨려서 전체적인 죄 속에 푹 잠기도록 하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죄를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죄를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소용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들의 죄를 나의 것으로, 내 자신의 것으로, 내 속에 집어넣기위해 소용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각자는 죄를 없애도록 하는 데 공헌을 해야 한다. 310
신앙 위에 이성을 놓는 자들은 희극적으로 죽고, 그리고 이성 위에 신앙을 놓는 자들은 비극적으로 죽는다는 본질적 관념에 대해서 말이다. 왜냐면 희극적으로 죽는 자들은 남을 비웃는 자들이니 그러므로 신은 나중에 가서 그들을 비웃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에 의해 비웃음을 받는 자들은 비극적이지만 실은 고귀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다. 337
총체적으로 볼 때, 빈델반트에게도 칸트주의자나 신
칸트주의자처럼 세 개의 표준적인 종류, 즉 세 개의
우주적인 표준밖에 없다. 진실과 허위의 종류, 미와
추의 종류, 그리고 도덕적인 선과 도덕적인 악의 종류다. 철학은 과학과 예술 또는 도덕을 연구함에 따라 논리학이나 미학이나 윤리학으로 축소된다. 이외에 다른 종류가 있다. 즉 유쾌한 것과 불유쾌한 것의 종류다. 이것은 즉 쾌락적이다. 쾌락적인 것은 위에 언급한 철학자들에 의할 것 같으면 우주적 효력을 기할수 없다고 한다. 즉 표준적이 될 수 없다고 한다. 338
해제
우나무노의 생애와 사상
미겔 데 우나무노는 1864년 9월 25일 스페인 북부지방의 공업도시 빌바오에서 중류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를 잃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11세 중학생시절부터 칸트, 헤겔, 데카르트에 심취하는 등 지적 조숙성을 드러내었다. … 열여섯 되는 해 마드리드 국립대학 찰문학부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했다.
1901년 우나무노는 살라망카 대학의 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살라망카 대학은 1227년 설립된 명문대학이었다. 리베라 정권의 조치로 추방되었던 그는, 1924년 탈출해 프랑스에 도착한 뒤 1930년 리베라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망명생활을 했다. 리베라 정권이 무너지자 귀국해 살라망카 대학 총장으로 재임명되고 살라망카 종신시장이 되었다. 1936년 세상을 떠났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모든 사람들이 永生에 대해 불안해 하면서 열망하는 것, 즉 ‘생명과 그 후’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에서의 타협, 무관심, 거짓이라고 생각되는 모든 것을 통박하였다.
'국수주의에 관하여' '돈키호테와 산초의 삶’, ‘나의 종교와 기타 논문집' 그리고 대표작인 '생의 비극적 의미’, ‘그리스도교국의 고뇌'등이 주요작품이다.
‘생의 비극적 의미’에 대하여
인간은 자기 앞에 죽음이 가로 놓여 있고, 아무리 발
버둥쳐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심각한 고뇌에 싸여서 인생 그 자체까지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한 삶'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인간의 감정을 합리적으로 판단케 해주는 이성의 덕분이다.
인간의 의지가 영혼의 불멸을 추구하는 이상 신앙의
모태인 종교는 선험적 쾌락을 인간에게 제공한다. 왜냐면 종교는 개인을 영원화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종교의 존재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종교의 화신인 신은 과학이나 예술 때문에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존재이유를 위해서다. 즉 영생의 구체성을 확인하려고 몸부림치는 인간의 지혜가 종교의 존재가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 신에게 필연성을 부여한 것이다.
우리는 모순 속에서 살고 또 모순에 의해 살고 있기
때문에 항시 생의 비극을 맛본다. 이 생의 비극은 아
무런 희망도 없이 영원히 계속된다. 이 굴레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바로 돈키호테주의다. 그러므로 돈키호테 주의는 승리 없는 싸움을 영원히 계속하는 절망의 표상이다. 여기에 바로 생의 비극적 의미는 도사리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