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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케냐의 환율제도와 환율 현황
지금의 자유변동환율제가 자리잡기 전까지 케냐는 시기에 따라 서로 다른 유형의 환율제도를 운영했다. 먼저 1963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당시부터 1972년까지 케냐는 자국 화폐 가치를 미국 달러에 페그(peg)한 고정환율제를 선택했지만, 이후 일련의 화폐 가치 평가절하를 경험한 이후 1982년 말에 이르러서는 실질 가치에 따라 점진적 환율 변동을 허용하는 크롤링 페그(crawling peg)제가 등장했다. 다음으로 1990년에는 이중환율제가 새로 도입되었고, 이로부터 3년 후인 1993년에 환율 완전 자유화가 이루어진 이래 케냐의 환율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자유롭게 결정된다. 다만, 국가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충격으로 정부 부채 상환에 차질이 예상되거나 시장 유동성의 인위적 증감이 요구될 경우에는 케냐 중앙은행(CBK, Central Bank of Kenya)이 그간 쌓아온 외환보유고를 바탕으로 환율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
한편 변동환율제 아래 달러 등 기축통화 대비 케냐 실링(KES)(이하 ‘케냐’ 생략) 가치의 저평가(고환율)와 고평가(저환율)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은지에 관한 일반적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먼저 고환율은 수입 물가 상승을 일으키지만, 이와 동시에 세계 시장에서 케냐 상품의 가격을 낮춰 수출 경쟁력을 늘릴 수도 있고, 여기에 케냐 국내에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투자를 촉진하고 호화 소비재 수입을 줄이는 부가효과가 더해지면 경상수지 개선이나 경제성장이라는 성과도 기대할 수 있다. CBK가 지난 2011년 보고서를 통해 당시 국내총생산(GDP)의 11%에 달했던 자국 경상수지 적자 문제 해소를 위해서는 환율을 더욱 끌어올려야 한다고 지적한 것도 고환율 기조가 가져오는 긍정적 효과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규모 개방형 경제를 지니고 해마다 석유 수입에 엄청난 돈을 쏟는 개도국인 케냐의 입장에서는 고환율이 야기하는 에너지 비용 상승이 생산 및 소비 과정 전반에 연쇄작용을 일으키면서 물가상승 압력을 촉발할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다.
반대로 저환율은 세계 시장에서 케냐 상품의 경쟁력을 낮춰 수출 실적을 악화시킬 수 있고, 이와 동시에 수입 물가 하락에 힘입은 외국산 상품이 케냐 시장에서 점유율을 올리게 되면 이들과 경쟁하던 국내 산업이 고사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리고 고금리 상황으로 외화가 유입되면서 저환율이 발생한 경우에는 국내 투자 위축, 경제성장 둔화, 일자리 창출 감소 등의 결과를 동반한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게다가 만약 단기 외화 유입이 저환율의 주원인일 경우, 들어온 자금이 언제든 다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변동성이 환율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종합적으로 살펴보면, 실링(KES)의 고평가는 이전보다 저렴해진 수입품과 경쟁하는 국내 제조업에 추가 부담을 지워 잉여 인력의 해고와 불경기를 유발할 수 있고, 이는 다시 실질 수요와 세수가 감소하는 현상으로 이어져 정부의 활동도 제약하는 결과를 불러올 위험성을 지닌다.
CBK가 내놓은 2021년 통계에 따르면 케냐에서 이루어지는 외화 거래 액수 총합은 하루에 3억 5,000만~5억 달러(한화 약 5,000억~7,100억 원), 그리고 한 달에 120억~150억 달러(한화 약 17조 1,000억~21조 4,000억 원) 수준이다. 또한 현재 케냐가 보유한 외화 규모는 월간 수입대금의 약 4.4배인 77억 달러(한화 약 11조 원)로, 이 수치는 일단 법령이 규정하는 최소 수준인 4배를 넘어서고, 케냐가 가맹국으로 있는 동아프리카공동체(East African Community)에서 설정한 목표인 4.5배와도 근접해 있다. 하지만 만약 CBK가 보유 외화를 투입해 환율을 특정 지점에 고정하거나 낮추려 할 경우, 현시점의 외환보유고가 버틸 수 있는 기간은 고작 1주일 정도에 불과할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달러 대비 실링(KES)의 가치는 2022년 1월부터 지금까지 5.5% 폭락해 2021년도 한 해 동안의 하락폭인 3.6%를 넘어섰고, 10월에는 환율이 달러당 120.9실링(KES)을 기록하는 등 기록적인 자국 화폐 약세가 더욱 심화되는 중이다.
실링(KES) 가치 하락의 주요 원인 분석
케냐에서 외화 품귀와 고환율 현상을 일으키는 핵심 원인으로는 (1) 세계 유가 상승, (2) 각국 경제 재개방 이후 달러 수요 증대, (3) 국제수지 적자, (4) 공공부채 확대 등이 지적되며, 이들 각각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석유 및 에너지 부문에서 달러 수요가 크게 늘어난 점이 실링(KES)의 가치 하락을 유발하고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배럴당 123달러(한화 약 17만 5,000원)까지 치솟았던 원유 가격은 이후로도 배럴당 100달러(한화 약 14만 3,000원) 이상을 대체로 유지하고 있는데, 총수입액 중에서 석유가 담당하는 비중이 20%에 달하는 케냐에서 에너지 수입에 더욱 많은 외화가 필요하게 되자 시장에 발생한 달러 품귀 현상이 환율 상승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국제 유가 상승의 원인으로는 공급망 병목 현상도 있지만, 이외에 각국 경제가 코로나19로부터 점차 회복하면서 에너지 수요가 증대된 점, 그리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석유 및 천연가스 공급에 차질이 빚어진 점도 중요한 요소로 지적해 볼 수 있다.
둘째, 2021년부터 각국이 봉쇄 시국에서 서서히 벗어나며 달러를 비롯한 기축통화 수요가 늘어난 점도 실링(KES)의 가치 하락에 일조했다. 2020년 코로나19 확산이 정점에 달하면서 등장한 고강도 이동 제한이나 봉쇄 조치는 각국의 경제성장을 둔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백신이 개발 및 보급되고 본격적인 대규모 접종이 실시되면서 많은 국가들이 봉쇄에서 벗어나 경제 재건에 힘쓰기 시작했다. 그 결과 국제 무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달러 수요가 증가하고, 개도국 시장에서 거래되는 여타 화폐의 상대적 가치는 반대로 떨어지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앞으로 경기가 더욱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는 무역 부문에서 향후 수요 증가에 대비해 기축통화를 비축해 놓고자 하는 심리가 강화되면서 실링(KES)은 여전히 가치 하락 압력에 노출되어 있으며, 수출 증대로 달러 공급이 상당히 늘어나지 않는 이상 고환율 문제는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2022년도 1~5월 케냐의 국제수지 적자가 6억 6,620만 실링(KES)(한화 약 7조 8,000억 원)에 달한다는 점도 고환율 기조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CBK 자료에 의하면 해당 기간 케냐의 수입액은 전년 동기 대비 410억 실링(KES)(한화 약 4,800억 원) 증가한 3,540억 실링(KES)(한화 약 4조 2,000억 원)을 기록해 수출액 증가분을 가뿐히 뛰어넘었다. 특히 여기서 석유 수입에 들어간 액수가 기계류, 수송 장비, 제조품 등 여타 품목에 비해 압도적인 2,587억 실링(KES)(한화 약 3조 원)을 기록해 90%의 증가율을 보인 점이 눈길을 끈다. 이외에 화학제품 및 비료 수입액은 전년 동기보다 225억 실링(KES)(한화 약 2,600억 원) 늘어난 1,620억 실링(KES)(한화 약 1조 9,000억 원, 상승률 약 16%)이며, 식용유 수입액은 200억 실링(KES)(한화 약 2,400억 원) 늘어난 620억 실링(KES)(한화 약 7,300억 원, 상승률 약 48%)이었다. 이처럼 수출·입 액수 간 불균형이 발생하면서 2021년 6월~2022년 5월 집계된 케냐의 GDP 대비 경상수지 적자는 직전 12개월의 5.0%에서 5.3%로 확대되었다. 게다가 앞으로도 수입 물가가 고공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경상수지의 악화나 이로 인한 고환율 현상은 이제 장기적 해법을 요하는 문제로 비화했다.
넷째, 케냐 정부가 진 대규모 외채도 실링(KES)의 가치 하락을 일으키는 핵심 요소 중 하나이다. 케냐가 지난 10여 년간 대규모 인프라 사업을 중심으로 한 재정 확장 정책을 전개하면서 2010년 말 기준으로 GDP의 44.4%였던 공공부채는 2021년 말에 이르러 GDP의 69%까지 치솟았다. 지난 2012년 5월 1조 6,000억 실링(KES)(한화 약 18조 8,000억 원) 수준이던 케냐의 정부 부채가 2022년 5월에는 8조 6,000억 실링(KES)(한화 약 101조 2,000억 원)까지 대폭 늘어났다는 점은 케냐의 부채 폭증 문제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자국 통화 가치가 하락하게 되면 상당수가 국제 통용 화폐로 표기되는 외채 부담이 더욱 커지는 결과가 나타나는데, 현재 케냐가 진 외채 중 달러 표기 부채의 비중은 66.6%에 달한다. 따라서 CBK는 늘어나는 외채 부담을 감당하기 위해 비축된 외화를 소진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달러가 더욱 귀해지면서 환율 상승 기조가 심화되는 결과가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지난 2017~2018 회계연도에는 케냐의 부채 상환액 중 외채 비중이 절반에 한참 못 미치는 31%에 불과했지만, 그 직후인 2018~2019 회계연도에는 이 수치가 48%로 껑충 뛰어올랐다는 점에도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외채 상환 비중이 폭등한 것은 2019년에 일부 상업형 부채의 상환 기일이 도래했기 때문으로, 개중에는 중국수출입은행(Exim Bank of China)에서 빌린 표준궤 철도선 사업 비용도 포함된다.
본래 케냐의 부채 상환액 중 내국채 비중이 약 70% 정도였던 데에 비하면 상술한 변화는 상당한 의미를 지니며, 비록 아직 내국채 비중이 50%를 넘기기는 하지만 부채 구성에서 외채 비중이 점차 확대되는 경향이 관찰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외채에 비해 내국채가 지니는 장점으로는 부채가 현지 통화로 표기되기에 환율 변동성 문제로부터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디폴트를 초래할 정도의 대형 외부 충격에 대응한 부채 구조조정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외채 대비 내국채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케냐가 상기한 두 가지 장점을 활용할 수 있는 여지도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케냐는 현재 방만한 재정 관리, 성장 촉진에 불리한 거시경제적 기반, 고금리 부채 비중 확대, 과다한 정부 지출이라는 문제가 초래하는 부채 위기 위험성에 직면한 아프리카 23개국 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상태이다.
이처럼 부채 부담이 늘어나면서 케냐가 보유한 외화의 상당 부분이 상환 용도로 묶이게 되면 앞으로도 환율 변동성에 노출된 실링(KES)의 가치는 꾸준한 하락 압력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오늘날 주요국에서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봉쇄 조치가 점차 철폐되는 상황을 감안할 때, 향후 재외 케냐인의 국내 송금액, 해외 투자 유치액, 수출액 실적이 개선되어 보유 외환 규모가 확대되면 실링(KES) 가치 유지에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2022년도 1~6월 재외 케냐인의 국내 송금액 규모는 전년 동기의 3억 590만 달러(한화 약 4,400억 원)에서 6.6% 늘어난 3억 2,610만 달러(한화 약 4,600억 원)로, 이렇게 들어온 추가 자금은 환율이 더욱 급격하게 상승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2022년 6월에 집계된 통계를 살펴보면 해외에서 케냐로 향하는 송금액의 59.1%가 북미 지역에서 나오고, 그 뒤를 18.2%의 유럽이 뒤따르며, 나머지 국가 및 지역의 비중은 22.7%이다.
결론
실링(KES) 가치의 하락은 거시적 차원에서 케냐가 지는 외채 부담을 5,000억 실링(KES)(한화 약 5조 9,000억 원) 이상 늘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공공부채 과다로 재정적 운신의 폭이 좁아진 케냐의 현재 상황을 감안하면 이는 결코 적은 금액이 라고 할 수 없다. 게다가 고환율 기조가 오래 이어지면서 나타나는 석유, 식품, 원자재 등 수입 비용 상승분이 수입업계로부터 소비자에게로 전가되면 결과적으로 가계 생활비 상승이라는 악영향이 발생하게 된다.
상술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케냐 정부가 자국 화폐의 추가 가치 하락을 막기 위한 장기적 조치를 강구해야만 한다. 여기서 앞으로 고려할 만한 방안에는 수출 실적 증대, 무역적자 규모 제한, 외채 비중 축소 등이 있고, 특히 부채 부문에서는 기존의 고금리 상업형 대출을 양허성 차관 등 저금리 선택지로 대체해 나가야 할 것이다. 실링(KES) 가치 하락 현상이 지나치게 오래 지속된다면 충분한 수준의 국가 예산을 편성해 집행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외채를 기한 내 상환할 수 있는 능력 등 건전한 국가 경제 운영에 필수적인 요소마저 제약되는 사태가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번 환율 위기의 극복이 지니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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