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올린 줄 알았는데 임시보관함에 저장된 채로 게시되지 않았던 것을 지금 발견하여 급하게 올리는 점,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앎의 주체성에 대해>
제주대학교 철학과
2017101246 우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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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술이편에서는 주로 배움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사람을 가르치면 좋은지에 대한 이야기, 배움에 앞서 가져야 할 태도, 군자가 되기 위해 배워야 할 것들, 등등. 술이편 8장에는 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라고 하여 이 부분이 더더욱 강조되는데, 이는 “알려고 애쓰지 않으면 일깨워 주지 않고, 표현하려 애쓰지 않으면 틔워 주지 않으며, 한 모서리를 들어 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모서리를 깨우치지 않는다면 되풀이하여 가르치지 않는다.”라는 말로, 배우려는 사람에게는 배우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의미를 품고 있다.
지금은 지식 기반 사회라고 하여 학습을 중요시하고, 공교육 제도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초적인 학문적 소양을 갖고 있다. 지식 기반 사회라는 말이나 공교육 제도의 실질적인 목적이 지혜로운 인재를 배양하는 것은 아니고, 공교육의 시작은 공장 노동자에게 필요한 최소한도의 교육요건을 갖추기 위함이었으며, 현대의 교육은 능력주의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점을 차치하고서라도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은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으며, 기초교육을 받는 것이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로 정해져 있다. 교육 취약 계층이 아닌 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 다니는 것을 부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의무교육이 아닌 고등학교나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공자가 살아가던 춘추시대에 무언가를 학습하고자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배계층에서 정치를 좌우하는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였다. 즉, 공자가 배우고자 하는 사람을 알려고 애쓰는 사람, 안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사람, 하나를 가르치면 그와 연관된 셋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그런 사람이어야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사상은 공교육이라는 개념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 특기분야가 있으며 배우는 속도, 적응력, 응용력 등의 세부적인 부분이 전부 다르지만, 공교육의 체계 아래에서는 한 명 한 명에게 스승이 개인적인 멘토링을 해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렵고, 또한 일정 이상의 학업 성취를 요구하는 공교육의 목적상 피교육자에게는 일률적인 학습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애초에 공교육의 목적은 정치, 행정을 좌우하는 권력자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기에 더더욱 그렇다. 공교육이라는 틀 안에서는 배울 의지가 없는 사람도 현대사회에서 시민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학업 성취가 필요하고, 그것은 시민 개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한 사회적인 의무이며, 그 의무를 다할 수 있도록 교육자는 피교육자에게 교육받을 의지가 있든 없든 사회가 요구하는 학업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런 공교육의 수준을 넘어서, 고등교육이나 자기 계발의 영역에 있는 학문과 지혜를 살펴보자면 공자의 말은 여전히 가치를 갖는 듯하다. 배움은 배울 의지가 있는 사람, 그리고 그 배움을 소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 목적은 당연히 춘추시대처럼 지식 계층이 됨으로써 정치에 개입하는 사람이 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배움을 통해 자신을 바꾸는 것, 어제 몰랐던 것을 오늘 아는 것, 그를 통해 새로운 시야를 갖게 되는 것, 그런 이유로도 공자가 말한 배움의 자세를 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자세를 어릴 때부터 취할 수 있는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교육계가 이상으로 삼아야 할 목적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창의성이나 창발성을 가진 인재를 원한다면서 정작 의무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교육과정에 “더 배우고 싶은 이유”를 마련하지 않았으니, 결국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없고 의무적으로 공부하는 학생들만 남았으니 말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의무교육을 마친 지 10년이 되었다. 고등학교야 남들 다 가니까 나도 따라가서 입시 공부를 했다손 치더라도, 철학이 배우고 싶어서 철학과를 선택한 것은 분명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대학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내 대학 생활을 돌이켜보면, 사실 나의 배움이라는 것이 공자가 말하는 듯한 배움은 아니었던 기분이 든다. 철학과 관련된 지식을 쌓으면서 힘들었던 순간보다는 재밌는 순간이 더 많았다고는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재미만 있기 위해서 철학을 배우기로 한 건 아니었다는 생각도 들고, 수업을 흘러가는 대로 좇으면서 배웠던 것들은 휴학이나 방학, 그리고 군대에서 많이 잊어버렸고, 어떤 분야를 파고들면서 적극적으로 공부해 본 것 같지도 않다. 사조나 분야에 따라 호불호는 있지만 배움을 호불호로 가려도 되는 것이었나 고민도 되고, 내가 배운 것들을 내 삶에서 표현해 온 것 같지도 않다. 철학이라는 배움의 길을 걷고자 해서 들어왔지만, 공자가 내지 말라던 싫증을 제법 많이 부린 것이다.
내 배움은, 앎은 얼마나 주체적이었을까? 나는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그리고 어떤 사람이 되려고 하였기에 배우고 있는 걸까? 이번 학기에 특히 이런 의문을 갖게 된 것 같다. 주변에 대학원 진학을 권유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계속해서 생각은 해 보겠다는 식으로 흘러넘겼는데, 사실 성적 문제나 현실적인 것들은 둘째치고 내가 대학원에 가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가 명확하지 않은 게 문제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무언가를 더 배우려면, 일단은 이 고민이 현실적인 문제를 둘째칠 수 있는 동안 끝나야 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그 문제가 해결이 되어야만, 알려고 애쓰는(憤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첫댓글 엘리트 교육에서 일반 교육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은 고대 중국으로 한정할 때 공자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최초로 관학이 아닌 사학의 시대를 열어젖힌 사람으로서 엘리트인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지식인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실천해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공자는 교육의 목적을 달성하려면 오늘날 강조되는 자기 주도학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학문이라는 말에서도 이는 확인되는데, 배움과 물음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본문에서 분석한대로 묻지 않는 자에게는 가르침을 주지 않는다고까지 단언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의무교육"으로 제너럴 에듀케이션(일반 교육-교양)을 중등교육까지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등교육인 대학교육조차도 이제는 의무교육 수준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자기주도학습에 초점을 맞추어 시의적절한 질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