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김씨(安東金氏)는 은열의 둘째 아들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는 세칭 ‘구(舊)안동’과 고려 태사(太師) 선평(宣平)을 시조로 하는 ‘신(新)안동’의 두 계통으로 나뉘며, 특히 신(新)안동김씨 중 세도정치의 주역을 서울 장동김씨라고 한다 세도정치의 주역들, 서울로 간 안동 김씨 장동파는 金璠-金生海-金克孝-金尙憲-金光燦-金壽恒-金昌集-金濟謙-金達行-金履中-金祖淳-金左根-金炳冀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이 두 ‘안동’은 조선시대에 정승 19명, 대제학 6명, 왕비 3명을 배출하였다.
〈구안동김씨〉 중시조는 고려 원종 때의 시중(侍中) ·삼중대광첨의중찬(三重大匡僉議中贊) 방경(方慶)이다. ‘구안동’은 방경의 아들과 손자대에 크게 중흥하여 아들 선은 밀직사부지사(密直司副知事), 흔은 찬성사, 순(恂)은 삼사판사(三司判事), 윤(倫)은 밀직사지사(密直司知事), 선의 아들 승용(承用)은 대제학, 승택(承澤)은 평장사, 영돈(永暾)은 유명한 무장(武將)이며, 영후(永煦)는 우정승을 지내 모두 명신·충신으로 이름났었는데, 특히 영후의 후손이 조선 전기에 세력을 크게 떨쳐 사실상 ‘구안동’의 주축이 되었다.
‘구안동’의 세계(世系)는 방경의 현손대에서 21파로 분파되어 그중 13파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13파 중에도 영후의 손자들인 익달(益達)의 제학공파(提學公派), 사렴(士廉)의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사형(士衡)의 익원공파(翼元公派) 등 3파가 ‘구안동’ 인구의 60∼70 %를 차지하여 통칭 ‘제안익(提按翼) 3파’로 불린다. 이밖에 군사공파(郡事公派:士陽)·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九容)·도평의공파(都評議公派:九鼎)가 그에 버금한다.
좌의정을 지낸 사형의 익원공파에서는 좌의정 질, 영의정 수동(壽童), 이조판서 찬(瓚) 등이 나왔다.
그러나 이렇듯 세를 떨치던 ‘구안동’은 인조 때 영의정 자점(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 꺾이게 되었다. ‘구안동’의 인물로는 이밖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원주목사 제갑(悌甲)과 그의 조카 시민(時敏)·시약(時若) 형제, 판서를 지낸 청백리 시양(時讓)과 그의 아들 이조판서 휘(徽), 숙종 때의 시인 득신(得臣:참판), 무장(武將)으로 영의정이 추증된 응하(應河)와 훈련대장 응해(應海) 형제, 훈련대장 중기(重器)가 있으며, 현대 인물로는 독립운동가·정치가 백범(白凡) 구(九)가 있다.
구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3만 2645가구에 42만 526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신안동김씨〉 흔히 ‘신안동’을 가리켜 ‘금관자(金貫子)가 서 말’이라고 하여 큰 벼슬을 많이 내었다는 비유로 삼는데, ‘신안동’은 특히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으로 더 알려졌다.
‘신안동’의 시조 선평(宣平)은 신라 말 고창군(古昌郡:현 안동)의 성주로, 왕건이 고려를 개창할 무렵 고려에 귀부, 개국공신·태광태사(太匡太師)가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선평의 후손들은 극효(克孝)의 아들대에서 상용(尙容)·상헌(尙憲) 등이 정승이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는데, 특히 좌의정 상헌의 후손이 세도가문으로서의 주류를 이루어 이들을 ‘장김(壯洞金氏)’이라고도 한다.
상헌의 후손에서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등 12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수십 명의 판서가 나왔고, 우의정 상헌의 형 상용의 후손에서도 정승·판서 등이 많이 나왔다. 형제 영의정 수흥(壽興)·수항(壽恒)과 수항의 아들 영의정 창집의 후손에서 왕비 3명을 내었는데, 이들이 ‘신안동’을 세도가의 반석 위에 오르게 한 인물들이다.
조순(祖淳)의 딸이 순조비가 되면서 달순(達淳)·문순(文淳)·희순(羲淳)·유근(儷根)·교근(敎根) 등 일족이 정승·판서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 일문에서는 영의정 좌근(左根)·흥근(興根)·병학(炳學)·병국(炳國)·병시(炳始), 호위대장(扈衛大將) 조근(祖根:헌종의 장인), 판서 수근(洙根)·보근(輔根)·병기(炳冀)·병주(炳州)·병덕(炳德)·병지(炳地)·병교(炳喬) 등을 배출하였다.
이들 권문(權門)과는 대조적으로 ‘김삿갓’으로 유명한 병연(炳淵)도 ‘신안동’이며, 근대 인물로는 한말의 정치가 옥균(玉均), 독립운동가·장군 좌진(佐鎭) 등이 있다. 신안동김씨는 2000년 인구조사에서 1만 5068가구에 4만 770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안동 김씨는 舊안동 김씨와 新안동 김씨로 구분된다. 本貫과 姓氏가 같은 하나의 성씨지만 사실상 두 개의 가문이다. 특히 풍산 소산에는 두 집안이 같은 동리에 살고 있지만 완전히 별개의 성으로 통혼해도 동성동본의 금기에 저촉되지 않으며 실제로 수많은 통혼관계가 있었다. 新안동 김씨는 병자호란이전까지는 이렇다 할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지만 舊안동 김씨는 경순왕의 손자 金叔承을 시조로 고려 때 여원연합군 총사령관인 金方慶(1212-1300) 장군을 중시조로 하여 그 후손에 많은 인물이 배출됐다. 조선 태종 때 좌정승을 지낸 翼元公 金士衡(1333-1407)을 비롯 진주성의 명장 金時敏(1544-1592), 후금군과 싸우다 전사한 金應河(1580-1619) 장군이 있고 인조 반정이후 막강한 세도를 부리다가 마침내 청나라에 조선의 사정을 밀고했던 金自點(? - 1651)이 가족들과 함께 멸족되면서 가세가 꺽이게 되었다. 김자점 [金自點]1588(선조 21)~ 1651(효종 2). 조선 중기의 문신.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서파(功西派)의 영수. 본관은 안동. 자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西). 할아버지는 억령(億齡)이며, 아버지는 함( )이다. 성혼(成渾)이 그의 스승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나가 병조좌랑에 이르렀다. 1622년(광해군 14)에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이괄(李适) 등과 함께 광해군과 대북파(大北派)를 몰아내고 인조를 추대했다. 곧 동부승지가 되었고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봉해졌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인조반정에 가담한 공서(功西)와 가담하지 않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집권 공서파의 영수로서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을 배경으로 한 청서파를 탄압했다. 1633년 도원수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때 토산(兎山)싸움에서 참패한 책임을 지고 외딴 섬에 유배되었다. 1640년에 풀려나 강화부유수가 되고,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인조의 庶女)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1642년 병조판서,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고, 1644년에는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다.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1645년에는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 강씨를 죽게 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몰아냈다. 인조 말년에 공서(功西)가 분열하자 낙당(洛黨)의 영수가 되어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과 대립했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고 김상헌(金尙憲)·송준길(宋浚吉) 등 청서파가 정권을 잡은 뒤, 탄핵을 받아 홍천에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조선이 북벌을 계획한다고 청나라에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실패했고, 1651년 역모죄로 처형되었다. 朝鮮朝 孝宗2年 西紀 1651年에 일어난 김자점(金自點)의 역모사건(逆謀事件)은 우리나라 역사상(歷史上) 가장 추악한 구김살이 되고 있다. 金自點은 仁祖때 文臣으로 本貫은 안동(安東)이며 朝鮮 初期 世祖때 文科에 及第하여 집현전 학사로 이름을 떨친 김질의 後孫이다. 世宗과 文宗의 총애(寵愛)를 받던 김질은 文宗으로부터 후사(後事)까지 부탁 받았다. 그래서 世祖가 찬위하자 이에 격분하여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단종복위 운동(端宗復位 運動)을 꾀하였으나 일이 성사(成事) 되기 前에 世祖에게 밀고(密告)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 찬탈(王位簒奪)에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된 저 유명(有名)한 변절자(變節者) 김질의 5代孫이다. 그런데 김자점(金自點)은 우계(牛溪)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仁祖 반정때 公을세워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다. 그러나 孫子 세룡(世龍)을 仁祖의 딸 효명공주와 結婚시킨後 교만방자(驕慢放恣)하여 忠民公 임경업장군(林慶業將軍)을 모함(謀陷)하여 살해(殺害)하는등 세도를 부리며 권력(權力)을 농단하다 파면(罷免)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金自點은 조국(祖國)을 배반(背反)하고 효종(孝宗)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淸나라에 밀고(密告) 하는등 역모(逆謀)를 꾀했다. 이에 孝宗은 金自點을 귀향(歸鄕) 보내고 自點의 아들과 그 일당(一黨)을 심문(審問)하니 아들 익은 공모(共謀)한 사실(事實)을 모두 실토 했다. 이에 조정(朝政)에서는 자점(自點)과 그의 아들 익 과 그리고 孫子 세룡(世龍)을 모두 사형(死刑)에 처하고 그들의 토지(土地)를 몰수(沒收)하였다.
백범 金九(1875-1949) 또한 舊안동 김씨이다. 백범일지에 보면 자신의 집안이 고려 때부터 명가였지만 자신의 傍祖 김자점의 역모 이후로 크게 몰락하여 11대조가 서울에서 해주 백운방으로 화를 피하기 위하여 숨어들어 양반의 행색을 감추고 상놈행세를 하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풍산읍 회곡리는 충렬공 김방경 장군의 옛터로 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고, 녹전면 능내리에는 그의 묘소가 있다. 이 묘도 오랫 동안 실전되어 오다가 1534년 광산김씨 예안파 입향조 성균생원 金孝盧(1455-1534)의 入葬시에 찾게 되었다고 한다. 안동 일대에는 김방경을 중시조로 하는 舊안동 김씨(일명 上洛 金氏라고도 함)가 여러 곳에 세거하고 있다. 상락 김씨는 충렬공 김방경의 현손 때에 내려와서 17개 파로 갈리는데 안동 일대에는 의성 沙村마을에 세거하는 都評議公파와 풍산 소산, 와룡 용두골, 남후면 개곡리 일원에 거주하는 翼元公파가 산거하고 있다.
의성 점곡면 사촌마을 상락 김씨 입향조는 金方慶의 5대손 金子膽이다. 서애 류성룡(1542-1607)의 외조부가 되는 松陰 金光粹는 입향조의 증손자가 되고, 퇴계문인 晩翠堂 金士元은 송음의 증손자가 된다. 이 밖에도 川沙 金宗德이 문명이 있었다.
한편 풍산 소산, 와룡 용두골, 남후 개곡에 세거하는 상락 김씨는 조선 개국공신 翼元公 金士衡의 고손자이자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고 성종 때 좌의정에까지 오른 金礩(1422-1478)의 후손들이다. 김질의 손자 성주판관 金湕의 세 아들 중 金彦濬의 후손은 풍산 소산에, 金彦沖의 후손은 와룡면 일대에, 金彦淳의 후손은 남후면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김방경(金方慶) 1212(강종 1, 임신) ~ 1300(충렬왕 26, 경자)
고려 시대의 명장. 본관 안동(安東). 자는 본연(本然). 시호는 충렬(忠烈). 병부상서(兵部尙書) 효인(孝印)의 자로 풍산(豊山) 회곡(檜谷)에서 태어났다. 1227년(고종 14) 음보(蔭補)로 산원(散員) 및 식목녹사(式目綠事)가 되어, 감찰어사(監察御史)를 거쳐 1248년 서북면병마판관(西北面兵馬判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상장군으로 승진되었다. 1270년(원종 11) 장군 배중손(裵仲孫) 등이 삼별초(三別抄)를 이끌고 난을 일으키자 진도(珍島)까지 쳐들어가 적도를 토벌하고, 김통정(金通精) 등이 남은 무리들을 이끌고 탐라(耽羅)에 들어가서 항전하자 1273년(원종 14) 행영중군병마원수(行營中軍兵馬元帥)로서 흔도․홍다구와 함께 또다시 삼별초를 쳐서 완전히 평정하였다. 1274년과 1281년 여․원연합군(麗元聯合軍)의 일본 정벌에 고려군 총사령관으로 참가해서 분전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다. 돌아와 1283년(충렬왕 9)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에 봉해졌다. 1300년 89세로 병사하자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렀으며, 사후 충선왕 때 다시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이 추증되었고, 예천(醴泉)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高麗史․永嘉誌 김사형(金士衡) 1333(충혜왕 복위 2, 신사) ~ 1407(태종 7, 정해) 고려 말․조선 초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시호는 익원(翼元). 김방경(金方慶)의 현손. 장(藏)의 자.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7년(우왕 3) 집의(執義)․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었으며, 이어 교주강릉도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 1390년(공양왕 2) 밀직지사(密直知使)로 대사헌(大司憲)을 겸하다가 문하부지사(門下府知事)로 특진하였고, 뒤에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2년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였다.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으며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1399년(정종 1) 등극사(登極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와서 문하부판사(門下府判事)가 되고, 1401년(태종 1) 좌정승(左政丞),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부원군(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참고문헌 : 太祖實錄․高麗史 김질(金礩) 1422( 세종 4) ~ 1478(성종 9) 이조 성종 때의 공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가안(可安). 호는 쌍곡(雙谷). 시호는 문정(文靖). 김방경(金方慶)의 후손. 동지중추부사 宗淑의 아들 1450년(세종32년)에 문과 급제, 집현전 학사로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후사를 부탁받았으나, 세조가 찬위하자 1456년 사육신의 모반을 고발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역임하고 성종 즉위후에는 좌리공신에 피봉되었다. ■참고문헌 : 成宗實錄
新安東 金氏는 시조 金宣平의 7세손 典農寺正 金得雨가 豊山 柳氏 書運正 柳開의 사위가 되어 豊山에 살았는데,그의 아들 金革은 감찰규정 權希正의 사위가 되고, 딸은 권희정의 며느리(사위 左政丞 權軫)가 됨으로써 김득우와 권희정은 겹사돈 관계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안동처처의 안동 권씨 이야기 (좌윤공파) 에서 언급한 바 있다. 김득우의 사위는 左政丞 權軫이고, 左政丞 權軫의 사위는 裵素(裵尙恭의 아들)이고, 배소의 사위는 平昌郡事 權雍이며, 권옹의 사위는 西崖의 고조부 柳沼가 된다. 류소의 아들 柳子溫은 보백당 金係行의 사위가 된다. 金革의 아들 비안현감 金三近(?-1465)이 소산으로 입향하여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金係權은 이조판서 權孟孫의 사위가 되어 한성판관을 지냈으며, 둘째아들 金係行(1431-1521)은 문과에 급제, 연산군 때 大司諫에 있으면서 戚臣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豊山에 은거하였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이라는 그의 시에서 ‘寶白堂’이라 스스로 호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寶白先生’이라 불렸다. 戊午․甲子士禍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고 만년에 吉安 黙溪에 晩休亭을 짓고 이거했다. 김계권과 김계행은 각각 아들 오형제를 두었다. 김계권의 맏아들 학조는 불교에 귀의하여 고승이 되었고, 둘째 金永銓은 사헌부 감찰, 셋째 金永鈞은 진사, 넷째 金永錘는 수원부사, 다섯째 金永銖는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소산 마을에 있는 三龜亭은 김계권의 아들 5형제가 어머니 예천 권씨를 위하여 효성으로 지어 바친 정자로 成俔(1439-1504)이 기문을 짓고 慵齋 李宗準(?-1499)이 현판을 썻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계권의 다섯째 아들 장령 金永銖(1446-1502)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맏이 金瑛(1475-1528)은 1506년 문과에 급제,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둘째 金璠(1479-1544)도 1513년 문과에 급제, 평양서윤이 되고, 셋째 金珣은 진사로 형조좌랑이 되는 등 과환이 이어졌다.
이들 형제들은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겨 김영은 淸風溪, 김번은 壯義洞에 기거했다. 장의동은 훗날 ‘壯洞’이라고 약칭되게 되었는데 이곳이 서울 안동 김씨의 터전이 되었다. 따라서 안동 김씨의 별칭인 장동 김씨는 김번의 후예들을 일컷는다. 김번의 아들 金生海가 성종의 아들 景明君 李枕의 사위가 됨으로써 장동 김씨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글씨에 뛰어나다고 이름난 손자 金克孝는 좌의정 鄭惟吉의 사위가 됨으로써 가문의 格이 더욱 높아지게 되었다. 김극효의 두 아들이 바로 仙源 金尙容(1561-1637)과 淸陰 金尙憲(1570-1652)형제이다. 풍산 김씨 유연당 金大賢의 조부 金義貞은 김번의 사위가 된다. 아직까지는 미미하던 가문이 크게 일어나게 된 것은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의 발신이 컷다. 그들 형제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치적이나 높은 벼슬자리 때문이 아니라 丙子胡亂 때문이었다. 壬辰倭亂으로 7년간의 전란을 겪은 조선은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것을 치유하기도 전에 또 한번의 전쟁을 겪게 되었으니 바로 병자호란이다. 병자호란 이후 청음 김상헌 형제와 그들의 후손이 펼쳐가는 안동 김씨 300년 영욕의 세월은 별도로 기술하기로 한다.
한편 청풍계에 터를 잡은 김영의 후손들은 과환에 나가 현달한 이도 있었지만 돌아와 고향 소산을 지켰다. 김영의 아들 金生洛은 별좌이고, 손자 창균 金箕報는 농암 李賢輔의 손서가 되어 퇴계문인으로, 金星報는 무과에 급제 원주 목사가 되었다. 金瑛의 증손 金克은 한강 鄭逑의 문인이며, 5대손 南涯 김학(金壆)은 우복 鄭經世의 문인으로, 남애 김학의 차자 鳩齋 金啓光(1621-1675)은 청음 김상헌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 풍기군수가 되었다. 11대손 김양근(1734-1799)과 김정근도 문과에 급제하는 등 金瑛의 후손에서도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南涯 김학의 동생 北涯 김후(金垕)는 소산에서 풍산 현애리로 이거하였는데 독립운동가 金始顯(1883-1965)은 北涯의 후손이다. 한편 金瑛의 동생 金珣의 후손에는 퇴계문인으로 처향을 따라 예안 서촌으로 이거한 訥齋 金生溟이 마곡서원에 배향되었으며, 김순의 증손 金麟祥은 임란때 柳宗介와 함께 의병을 모아 봉화 소천전투에서 전사하여 旌閭되었고, 金生溟의 손자 金鳴遠과 金震遠은 문과에 급제, 각각 하동현감과 經歷을 지냈다. 길안 묵계로 이거한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에게도 아들 5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金克仁은 영릉참봉이며, 둘째 金克義와 셋째 金克禮는 생원이고, 다섯째 金克信은 무과에 급제 문천군수가 되었다. 사위 朴訥은 찰방인데 외손자 5형제(朴巨麟, 朴亨麟, 朴洪麟, 朴鵬麟, 朴從麟)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둘째 사위 柳子溫(서애의 증조부)은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寶白堂의 셋째 아들 金克禮는 봉화 명호로 이거하였는데 그의 손자 金廷準이 1540년에 문과에 급제 학유가 되고, 현손 芶全 金中淸(1567-1629)이 1610년에 문과에 급제, 승지에 올랐으며, 구전의 아들 金柱宇(1598-1644)도 1624년에 문과에 급제, 지평이 되었다. 그렇지만 신안동 김씨는 南人이 주도하는 안동지방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집안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후기 안동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인이 지배했다. 퇴계 선생의 문하가 모두 남인이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노론이던 소산의 안동 김씨들은 안동 사람들과 따로 놀 수 밖에 없었다. 당색이 달랐기 때문이다. 서울의 권력은 壯金들이 잡고 있었지만, 고향인 안동에 와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물론 서울과 연계돼 있었기 때문에 소산의 김씨들이 중앙과 연줄이 닿는 실세이긴 했지만 안동 전체 분위기에서는 ‘왕따’ 를 당하는 상황이었다. 대표적인 예가 소산의 김씨들이 서원을 건립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이다. 영조 즉위 4년 만인 1728년에 이인좌의 난, 즉 무신란(戊申亂)이 발생했고 여기에 영남의 남인 집안이 상당수 개입했다.경상우도에서 발생한 무신란을 진압한 후 조정에서는 경상좌도인 안동 일대의 민심 동향을 예의 주시했다.
이 무렵 소산의 김씨들은 안동 시내에 청음 김상헌을 기념하는 학동서원을 세우기 위해 공사에 들어갔다. 거의 완공되어 기왓장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안동의 유림이 ‘이를 허락할 수 없다’고 완강하게 반대했다. 안동 일대의 거의 모든 유림이 반대의견을 표시했다. 마침내 영남 유림이 합세해 서원의 기둥에다 밧줄을 묶고 말을 동원해 끌어당겼다. 이는 안동 김씨와 영남 유림의 자존심을 건 한판 대결이었다. 결국 ‘壯金’쪽에서 서원을 세우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조 때 풍산 서미리에 재건하여 西磵祠라 사액까지 되었으나 고종때 철폐되었다. 김선평(金宣平) 901(신라 효공왕 5, 신유 ~ ? 고려 개국 공신(功臣).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시조. 926년(경애왕 3) 고창(=지금의 안동지역)성주(古昌城主)가 되었다.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공하여 왕을 죽이고 왕비를 능욕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데 분개하고 있던 중, 929년(태조 12) 고창을 침략한 견훤이 고려 태조와 와룡(臥龍) 병산(屛山)에서 싸우게 되자 권행(權幸)․장길(張吉) 등과 함께 태조를 도와 후백제의 견훤을 대파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삼한벽상아부공신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三重大匡太師)의 봉작을 받게 되고, 이에 고창군은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참고문헌 : 永嘉誌․安東金氏譜 김삼근(金三近) ? ~ 1465(세조 11. 을유)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호는 사은(謝隱). 안동김씨(安東金氏) 소산(素山) 입향조 혁(革)의 자. 1419(세종 1)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보로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역임했다.■참고문헌 : 安東市史․安東金氏譜 김계권(金係權)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풍산(豊山) 출생. 비안현감(比安縣監) 삼근(三近)의 장자. 이조판서(吏曹判書) 권맹손(權孟孫)의 사위. 계행(係行)의 형. 음보(蔭補)로 사환(仕宦)에 나가 직장(直長)․주부(主簿)를 거쳐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역임했다. 계권은 학조(學祖)․영전(永銓)․영균(永勻)․영추(永錘)․영수(永銖)의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현달했으며, 특히 영수의 후손에서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참고문헌 : 安東鄕校誌․安東金氏譜 김계행(金係行) 1431(세종 13, 신해) ~ 1517(중종 12, 정축)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 비안현감(比安縣監) 삼근(三近)의 자. 1447년(세종 29)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星州)․충주(忠州)에서 사학교수(四學敎授)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고령현감(高靈縣監)․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거쳐, 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 등 삼사(三司)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諫爭業務)에 힘썼다. 연산군 때 대사간(大司諫)에 있으면서 척신(戚臣)들의 비위를 논박하였으나, 시정될 가망이 없음을 알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안동 풍산(豊山)에 은거하였다. 거택 옆에 작은 정자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 이름하고 학생들을 모아 가르쳐서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렸다. 무오(戊午)․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큰 화는 면하고 풍산에 낙향하여 살다가, 67세에 길안(吉安) 묵계(黙溪)에 만휴정(晩休亭)을 짓고 이거했다. 청백리(淸白吏)로 뽑혔고,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 홍문관 예문관 양관대제학(吏曹判書弘文館禮文館兩館大提學)에 추증되었으며 길안(吉安) 묵계서원(黙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著) 학조대사(學祖大師)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승려. 본관 안동(安東). 호는 등곡(燈谷)․황악산인(黃岳山人).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장자. 세조 때 여러 고승들과 함께 불경을 한글로 번역․간행하고 1464년(세조 10)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왕을 모시고 신미(信眉)․학열(學悅) 등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1467년 왕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중창에 착수하고, 1487년(성종 18) 정희왕후(貞熹王后)의 뜻을 받들어 해인사 『대장경(大藏經)』 판당(板堂)을 중창하였으며, 1500년(연산군 6) 신비(愼妃)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인(刊印)하고 그 발문(跋文)을 지었다. 『남명집(南明集)』을 언해하고 1520년(중종 15)에는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1부를 간인하였다. 그가 국역한 불전(佛典)은 『지장경언해(地藏經諺解)』『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천수경언해(千手經諺解』『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등 여러 권이 있다. 만년에 속리산(俗離山) 복천암(福泉庵)에서 입적하였다. 부도(浮屠)도 복천암에 있다. 학가산(鶴駕山) 애련암(愛蓮庵)에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참고문헌 : 世祖實錄․朝鮮佛敎通史 김영전(金永銓) 1439(세종 21, 병인) ~ 1522(중종 17, 임오)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차자. 용궁(龍宮)․비안(比安)․지례(知禮)의 현감(縣監)을 역임하고, 성종조에 좌리원종훈(佐理原從勳)에 책록되어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 安東市史․安東金氏譜 김영추(金永錘) 1443(세종 25, 계해) ~ ?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자형(子衡). 계권(係權)의 제4자. 1464년(세조 10)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3년(성종 4) 문과에 급제했다. 관은 경주판관(慶州判官)․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합천부사(陜川府使)․밀양부사(密陽府使)․수원대도호부사(水原大都護府使)를 역임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安東金氏譜 김영수(金永銖) 1446(세종 28, 병인) ~ 1502(연산군 8, 임술)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적옹(積翁). 한성판관(漢城判官) 계권(係權)의 제5자로 한양에서 출생했으나, 13세에 부친을 잃고 어머니와 고향 소산(素山)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무예에 출중하여 음보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되어 옥사(獄事)를 잘 다스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고, 이어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나갔다. 그 뒤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중추원도사(中樞院都事)․선공감첨정(繕工監僉正)․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영천군수(永川郡守) 등을 역임하였으며, 금교도찰방(金郊道察訪)으로 나갔다가 임소(任所)에서 죽었다. 사어(射御)는 물론 위기(圍棋)․음률(音律)도 잘하였으며, 특히 글씨에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永嘉誌 김영(金瑛) 1475(성종 6, 을미) ~ 1528(중종 23, 무자)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영지(英之). 호는 삼당(三塘).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자. 풍산(豊山) 출생. 1495년(연산군 1) 사마양시를 합격하고, 1506년(중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대교(藝文館待敎)로 정충량(鄭忠樑)과 함께 무오사화(戊午史禍) 때에 화를 입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신원(伸寃)되게 하였다. 그 뒤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를 지내며 조광조(趙光祖) 등 사림(士林)들과 뜻을 같이하여 권신(權臣)들의 미움을 샀다. 1526년 좌승지(左承旨)․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1527년(중종 22)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풍산(豊山) 역양서원(嶧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삼당집(三塘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嶠南誌․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번(金璠) 1479(성종 10, 기해) ~ 1544(중종 39, 갑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문서(文瑞).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자. 1498년(연산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513년(중종 8)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관(史官)을 거쳐 151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대간(臺諫)으로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화를 면하였다. 1518년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내고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있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住居)를 편안하게 하였다. 1523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이 되었으며, 세칭 안동김씨 장동파(安東金氏壯洞派)의 파조로 그 후손에서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향리 소산(素山)에서 만년을 보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상용(金尙容) 1561(명종 16, 신유) ~ 1637(인조 15, 정축)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 시호는 문충(文忠).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현손. 극효(克孝)의 자. 1582년(선조 15) 진사(進士)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이 되었다. 병조좌랑(兵曹佐郞)․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고,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호남 지방을 왕래하였으며, 1598년(선조 31)에 승지(承旨)가 되고, 그해 겨울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명 나라에 다녀왔다. 대사성(大司成)․정주(定州)․상주(尙州)의 목사(牧使)를 역임하고, 광해군 때에 도승지(都承旨)에 올랐으며, 1623년 인조반정 후 집권당인 서인(西人)의 한 사람으로 돈령부판사(敦寧府判事)를 거쳐 예조(禮曹)․이조(吏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있었다.
1630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노령으로 관직을 사퇴하려고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고, 1632년(인조 10)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1636년 병자호란 때 왕족을 시종하고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江華城)이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자결하였다.
시조(時調) 『오륜가(五倫歌)』(5편) 『훈계자손가(訓戒子孫歌)』(9편) 등이 있다. 강화(江華)의 충렬사(忠烈祠), 상주(尙州)의 서산서원(西山書院) 등 많은 서원에 제향되었다. 글씨도 뛰어나 『숭인전비(崇仁殿碑)의 전액(篆額)』『군수장인정비(郡守張麟禎碑)의 전액(篆額)』등이 있고, 저서에『선원유고(仙源遺稿)』『독례수초(讀禮隨抄)』가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光海君日記․仁祖實錄․國朝人物考․海東名臣錄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 경오) ~ 1652(효종 3, 임진)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 자는 숙도(叔度). 호는 청음(淸陰)․석실산인(石室山人).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현손. 극효(克孝)의 자로 백부 대효(大孝)에게 출계. 윤근수(尹根壽)의 문인. 1590년(선조 23)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6년 문과에 급제하고, 1608년 다시 문과중시 급제했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예조좌랑(禮曹佐郞)․이조좌랑(吏曹佐郞)․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정인홍(鄭仁弘)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李滉)과 이언적(李彦迪)을 비난하자, 승지(承旨)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비난하였다. 폐모론(廢母論)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인데다, 광해군 말년에는 연이어 부모상을 맞아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인조반정 후 대사간(大司諫)․이조참의(吏曹參議)․도승지(都承旨)로 임명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진주사(陳奏使)로 명 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을 주장했고, 인조가 자신의 부친을 왕으로 추존하려는 이른바 추숭논의(追崇論議)가 일어나자 반대 낙향하였다.
1633년부터 2년 동안은 5차례나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출사와 사직을 반복하였다. 병자호란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서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여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주장하다가 대세가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으며,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안동(安東) 학가산(鶴駕山) 서록(西麓) 서미동(西薇洞)에 은거했다.
이후 1641년 심양(瀋陽)에 끌려가 이후 4년여 동안 잡혀있었으나 강직한 기개로써 청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여 좌의정(左議政)․영돈령부사(領敦領府事)를 역임하고, 1649년 효종 즉위 뒤 대현(大賢)으로 추대받아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대표적인 척화신(斥和臣)으로서 추앙받았으며, 풍산(豊山) 서간사(西磵祠) 등 전국의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청음집((淸陰集)』『야인담록(野人談錄)』『풍악문답(豊岳問答)』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光海君日記․仁祖實錄․海東名臣錄․國朝人物考 김중청(金中淸) 1567(선조 원년, 정묘) ~1629(인조 7, 기사)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이화(而和). 호는 만퇴헌(晩退軒)․구전(苟全). 봉화(奉化) 출생.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5대손.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 몽호(夢虎)의 자. 조목(趙穆)․박승임(朴承任)․정구(鄭逑)의 문인.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61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정랑(禮曹正郞) 등을 역임다. 이듬해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 나라에 다녀왔으며, 1615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는 이원익(李元翼)을 탄핵하라는 대북파 정인홍(鄭仁弘)의 부탁을 거절하여 파면되었다. 다시 복관되어 1616년 신안현감(新安縣監)으로 나갔으며, 1621년에는 승지(承旨)로서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호남지방을 순행하였다. 그 뒤 산직(散職)에 머물러 있다가 1623년의 인조반정 뒤에는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역학(易學)에 밝았다. 경상도 봉화(奉化)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구전집(苟全集)』이 있다. ■참고문헌 : 光海君日記․國朝人物考․國朝榜目․奉化郡誌 김주우(金柱宇) 1598(선조 31, 무술) ~ 1644(인조 22, 갑신) 조선 중기의 문신․서예가. 본관 안동(安東). 자는 만고(萬古). 호는 이민(易眠). 봉화(奉化) 출생. 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의 후손. 승지(承旨) 중청(中淸)의 자. 외조는 영양(永陽) 이영승(李永承).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4년(인조 2) 정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제수받았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형조정랑(刑曹正郞)․충청도사(忠淸都事) 등을 역임했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 강도파천(江都播遷)에 따라가지 않았다고 탄핵을 받았다. 1632년 경성판관(京城判官)을 역임했으며, 서예에 뛰어나 13세에 진주(晋州) 촉석루(矗石樓)의 누액(樓額)을 썼다. 인조가 즉위하기 전부터 그 재질의 뛰어남을 알고 발탁하여 쓰고자 했으나 아버지와 숙부의 정치적 성향 때문에 하급직에 머무르고 말았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仁祖實錄․奉化郡誌 김계광(金啓光) 1621(광해군 13, 신유) ~ 1675(숙종 1, 을묘)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경겸(景謙). 호는 구재(鳩齋).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영수(永銖)의 후손. 학(壆)의 자로 풍산(豊山) 소산(素山)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외조부 유우잠(柳友潛)에게 배웠고, 그 뒤 김상헌(金尙憲)․김응조(金應祖)에게 수학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1654년(효종 5) 사마양시에 합격하고, 1660년 증광문과 급제하여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를 시작으로 가주서(假注書)․봉상시직장(奉常寺直長)․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겸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거쳐 풍기군수(豊基郡守)가 되었다. 풍기군수 시절 백성을 애휼(愛恤)하고 유학을 진흥시킨 치적이 있어 고을민이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저서에 『구재문집(鳩齋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양근(金養根) 1734(영조 10, 갑인) ~ 1799(정조 23, 기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선오(善吾). 호는 동야(東埜). 장령(掌令) 영수(永銖)의 후손. 생부는 제순(濟淳)으로 백부인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우순(宇淳)에게 입양되었다. 김양행(金亮行)․김행원(金行元)의 문인. 1763년(영조 39)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동년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병조낭관(兵曹郎官) 등을 역임하고, 1773년 시폐(時弊)를 논하는 상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복직되었다. 1786년(정조 10) 선인(先人)의 선행을 그린 그림을 세자에게 바쳐 모범으로 살도록 하였으며, 뒤에 현풍(玄風)․음죽(陰竹)의 현감(縣監)을 거쳐 통정대부에 가자(加資)되어 형조참의(刑曹參議)가 되었으나 그 해 병으로 죽었다. 문집에 『동야집(東埜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金氏譜
............. <서울로 간 안동 김씨 즉 장동 김씨>는 金璠(1479-1544)의 아들 金生海가 성종의 아들 景明君 李枕의 사위가 됨으로써 장동 김씨의 위상을 높이는데 기여하였고, 김생해의 셋째 아들 김극효는 좌의정 鄭惟吉의 사위가 되었다.
金尙容과 金尙憲은 좌의정의 외손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자신들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김상용은 1590년에, 김상헌은 1596년에 각각 문과에 급제하면서 벼슬길에 올랐는데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는 등 평범한 벼슬아치였던 이들이 역사에 이름을 남긴 것은 병자호란 때문이었다.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인인 仙源 金尙容(1561-1637)은 인목대비 폐비론에 반대하여 원주로 내려가 우거하기도 하였으나,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중용되어 병조․예조․이조판서를 거쳐 정승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원로대신으로서 강화도로 왕족을 시종하던 留都宰臣의 자리에 있던 김상용은 강화도가 함락되자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하고 만다.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충렬사는 바로 김상용의 신발 한 짝이 이때 날아와 발견된 자리라고 한다. 김상용의 아우 淸陰 金尙憲(1570-1652)은 윤근수와 성혼의 문인으로 병자호란때 예조판서로서 굴욕적인 국서를 찢고마침내 청에 끌려가서 옥고를 치른 주전론자로 북벌을 외치던 사람들에게는 더없는 존경을 받았으며 대의명분의 상징으로까지 추앙을 받게 되었고 한미한 집안 안동 김씨를 일약 명문의 반열로 발신시키는 계기가 된 인물이다.
그는 백부 金大孝의 양자가 되었는데, 그 또한 무자하여 형 김상관의 아들 金光燦을 양자로 들였다. 김상헌의 양자가 된 金光燦은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손서가 되었는데, 계축옥사로 연안김씨 김제남 가문이 화를 당하자,김광찬은 김수항을 비롯한 3남 5녀를 생산한 부인 연안 김씨와 강제이혼을 당하고, 새로 부인을 얻어 김수징을 비롯한 4남 1녀를 더 두었다. ............. 연안김씨 김제남 [金悌男]1562(명종 17)~ 1613(광해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증조부는 영의정 전(詮)이며, 아버지는 증(贈)영의정 오( )이다.
1585년(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94년 의금부도사·공조좌랑을 거쳐, 1596년 연천현감을 지냈다. 1597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1601년 정언·헌납·지평을 거쳐 이조좌랑이 되었다. 1602년 둘째딸이 선조의 계비(繼妃:인목왕후)가 됨으로써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뒤 1613년 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해 인목왕후(仁穆王后)의 소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는 공격을 받고 처형되었다. 1616년에 폐모론이 일어나면서 그 죄가 재론되어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뒤에 복권되었으며 왕명으로 사당이 세워졌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 그 후 인조반정으로 김제남 가문이 복권되자, 첫 부인 연안 김씨 또한 김광찬의 본부인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고, 두 번째 부인 김수징의 생모는 본의 아니게 후실이 되어버리고 그 자녀들도 억울하게 서출로 전락하게 되었으니 기막힌 가족사라 하겠다. 김광찬의 장남 谷雲 金壽增(1624-1701)은 공조참판을 끝으로 춘천 화악산 기슭 곡운구곡에 은거하여 금강산을 유람하는 등 유유자적하며 두 동생보다 오래 살았다. 둘째 金壽興(1626-1690)은 큰아버지 김광혁의 양자로 들어가 1648년 사마시에 급제, 도승지와 호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이 되고 이어 영의정에 오른다. 셋째 金壽恒(1629-1689)은 18세때 진사시에 장원으로, 23세때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에 오르니 영의정에 오른 형과 함께 형제가 현직 정승을 지내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1689년 기사환국으로 탄핵을 받은 김수항은 진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약을 받게 되고, 장기로 유배되었던 형 김수흥 역시 이듬해 세상을 떠나니 안동 김씨로서는 두 번째로 만나는 시련이었다. 그들의 할아버지 김상용과 김상헌이 외적을 상대로 고초를 겪었지만 김수흥과 김수항은 당파싸움에 휘말려 죽게 된 것이다. 죽음을 앞둔 김수항은 자식들에게 “科宦은 자제하고 忠節과 文翰의 전통을 계승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김수항은 아들 6형제 이른바 ‘6昌’을 두었다. 특이한 것은 아들 6형제의 이름이다. 항렬이 ‘昌’자에다 다시 한글 ‘ㅂ’ 받침을 돌림자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2남 창협, 3남 창흡, 4남 창업, 5남 창즙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벼슬을 하지 않고 산수와 더불어 자적하면서 학문에 몰두하고, 요절한 6남 창립을 제외하고 저마다 문집 하나씩을 내었으니 가문의 이름에 손색이 없었다.
반면 장남 金昌集(1648-1722)은 아버지의 유훈에도 불구하고 벼슬길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활동을 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이전 남인들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송시열, 김수흥, 김수항 등이 복권되고 1717년 김창집은 영의정에 오르고 노론의 거두로 활동하였다. 경종이 즉위한 다음해인 1721년 연잉군을 왕세제로 삼자는 움직임이 김창집을 중심으로 한 노론에서 주창되고 결국 연잉군이 왕세제로 봉해진다. 노론은 여기에서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까지 주장하기에 이르고 결국 대리청정이 결정까지 되었으나,
대리청정을 극력 반대하던 소론 조태구가 궁궐에 들어가 경종을 만났고, 경종은 결국 소론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소론 김일경의 상소에 따라 대리청정을 주도한 김창집, 이이명, 조태채, 이건명 등 이른바 노론4대신을 비롯한 노론 일파가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창집은 거제도로, 그 아들 김제겸은 울산으로 귀양을 갔다. 1722년 목호룡이 노론 명가의 자식들이 숙종 말년에 세자(경종)를 시해하려 했다고 고변함에 따라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과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가 죽임을 당하고, 이어 소론의 조태구와 최석항의 주청에 따라 김창집과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 일파 173명이 화를 입게 되니 이것이 申壬士禍이다. 신임사화로 김창집은 아들 제겸을 비롯 손자인 성행과 탄행까지 유배되어 죽임을 당하는 등 3대가 사사되었고, 破家邸澤의 처분까지 받았으니, 철저하게 역적으로 처리됨으로써 안동 김씨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사건이 되었다. 이것이 안동 김씨로서는 세 번째 당하는 시련이 된다. 이후로 한동안 안동 김씨가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일은 드물어졌지만 그렇다고 가문이 완전히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미 2尙(김상용,김상헌) 3壽(김수증, 김수흥,김수항)를 거쳐 6昌(김창집外)으로 번성한 가계는 수많은 후손으로 이어졌고 다양한 인재를 배출했다. 세월이 흘러 정조가 즉위했다. 김창집의 아들 金濟謙에게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중 넷째인 金達行의 둘째 아들이 金履中이고, 김이중의 아들이 바로金祖淳(1764-1831)이었다. 증조부 김제겸과 고조부 김창집이 역모죄를 뒤집어 쓰고 죽임을 당했다고는 하지만 정권이 바뀌면서 모두 복권되었으며, 김조순은 그들이 죽은 뒤에 태어났기에 어엿한 노론 명문가의 자손으로 자라날 수 있었다. 1785년 김조순은 21세때 문과에 급제하고, 정조는 원래 이름 ‘洛淳’을 ‘祖淳’으로 바꾸어 내리고, ‘楓皐’라는 호까지 지어 주었다. 1778년 정조는 조정의 반대를 무릎 쓰고 金昌集을 영조의 묘정에 배향했다. 김창집은 연잉군의 세제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하다 처형까지 당했으니 연잉군의 손자인 정조로서는 안동 김씨 일문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남달랐던 것이다.
김조순이 정조에게 각별히 주목을 받은 이유는 그의 선조가 청음 김상헌과 김수항, 김창집으로 이어지는 명가인데다가 노론 중에서도 가장 중심축을 이루는 안동 김씨로서, 사도세자에게 동정적인 時派였기 때문이다. 김조순의 학문과 재주를 아꼈던 정조는 그를 측근에 두고 보좌하게 했으며 원자요속관이 되어 왕세자와 각별한 관계를 맺게 되고 결국에는 國舅로 선택되기에 이른다. 1800년 정조가 急逝하고 순조가 즉위했지만 권력의 중심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를 중심으로 한 僻派에게로 넘어가게 되고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디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위기에서 은인자중하던 김조순은 마침내 왕의 장인이 되어 권력을 차지했다.
이후 안동 김씨는 純祖, 憲宗, 哲宗을 사위로 맞아들이면서 고종이 즉위할 때까지 金左根과 金炳冀 등 대를 이어 60년간 권력을 잡았으니 이를 역사에서는 안동 김씨 勢道政治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도정치의 주역들, 서울로 간 안동 김씨 장동파는 金璠-金生海-金克孝-金尙憲-金光燦-金壽恒-金昌集-金濟謙-金達行-金履中-金祖淳-金左根-金炳冀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주로 金昌集의 후예들이 대부분이고, 金炳學과 金炳國 정도만 김창협의 후손이다. ‘금관자가 서말’ 이라는 안동 김씨 장동파, 그 뿌리는 분명 안동 소산인데 300년 영욕의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바뀌자 그 흔적조차 아득하다. 반면 안동 舊基를 지키며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안동 일대의 안동 김씨들은 南人도 아니고 老論도 못되는 어중간한 회색 양반으로 왕따를 당해야만 했다. 退溪(이황), 西崖(유성룡), 鶴峰(의성김씨 김성일)만을 최고로 치는 안동에서 이들은 푸대접을 받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김성일 (金誠一, 1538년~1593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의성, 호는 학봉(鶴峰), 자는 사순(士純)이다. 퇴계 이황의 제자. 시호는 문충공 서애 유성룡과 함께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은 수제자로 임진왜란 때 진주성에서 초유사로 순절하였다.
안동 서후에 자리한 학봉종택은 안동의 대표적인 양반가옥의 전형으로 유명하다. 내앞 청계공의 4남이었으나, 무남독녀인 아내를 위해 처가인 안동 서후 금계에 뿌리를 내리고 학봉종가를 열었다.
조선통신사 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황윤길은 반드시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하였고,
김성일은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다.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서애 유성룡이 김성일에게 "그대가 황윤길의 말과 고의로 다르게 말하는데, 후일 병화가 있다면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하고 물으니 "나도 어찌 왜적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겠습니까? 다만, 온 나라가 불안에 휩싸일까봐 그런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한다.
이 발언 때문에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왜란 초에 파직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나 이러한 발언이 일본이 틀림없이 침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 가능성을 장담한 황윤길의 발언으로 인하여 민심이 혼란해지는 것을 완화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명하였다. 그리고 공은 임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한 셈이 된다.
한편 김삿갓으로 유명한 金炳淵은 김상헌의 사촌 金尙寯의 후예이고, 개화파의 주역 金玉均(1851-1891)과 청산리 전투의 주역 金佐鎭(1889-1929) 장군은 안동 김씨 세도의 중심에서 비켜있던 金尙容의 후예들이다. 갑신정변의 주역들은 모두 상당한 명문의 집안이었지만 그들이 역적이 되자 집안에서는 이를 수치로 생각하여 항렬을 고쳐버렸다.
金玉均의 ‘均’자를 ‘圭’자로, 朴泳孝의 ‘泳’자를 ‘勝’자로, 徐光範의 ‘光’자를 ‘丙’자로, 徐載弼의 ‘載’자를 ‘廷’자로, 洪英植의 ‘植’자를 ‘杓’자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안동 김씨 항렬은 ‘炳-圭-鎭-漢-東-顯’ 순으로 내려가고 있고, 현 세대에는 ‘漢-東-顯’ 자 항렬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
안동김씨//안동장씨//안동권씨의 관계
안동김씨의 시조는 김선평, 안동장씨의 시조는 장정필인데,
안동에서 견훤과 왕건이 크게 맞붙을 때,
성주 김선평과 장정필 그리고 김행이 큰 공을 세워 왕건이 세 명에게 성을 하사하게 되지요.
그래서 경주김씨 김선평은 안동김씨를, 같은 경주김씨 김행은 안동권씨의 성을 하사 받게 되고 장정필도 안동장씨의 성을 하사 받게 되지요.
그렇기에, 부계혈통으로 보면 안동김씨와 안동권씨는 경주김씨라는 같은 본에서 시작하였으나, 안동장씨는 그렇지 않지요. 다만, 안동김씨와 안동장씨는 피를 나눈 한 형제처럼 지냈기에 형제간 혼인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지금까지 내려온 잘못된 관습에 의해 문제가 되기도 하지요. 그래서 부계혈통으로 본다면 안동김씨와 안동권씨는 피를 나눈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안동장씨는 이런 경우가 아닌 의형제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지요. 따라서 결혼에 전혀 상관이 없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계혈통 중심으로 본다면 뿌리의 시작이 같은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따진다면, 결혼이 가능한 사람들은 많지 않겠죠...
그러기에 법적으로도 같은 성과 본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8촌으로 정하여, 8촌 이상이면 결혼이 가능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