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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에 대한 하나님의 법도
법규는 인간의 법과 하나님의 법 두가지가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법은 당연히 인간의 법이 아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지혜의 법도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인간이 세상을 더럽혔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세상을 회복시킬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법도를 알아보며 바로잡아 보자. 먼저는 종에 대한 법도가 있다. 종은 노예를 의미하며 주인에게 속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사실 종이라는 신분도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만드신 것이 아니다 함의 죄로 인해 생긴 것이다. 세상에서 종을 악하게 대하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악한 제도를 만드셨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는 종에대한 법도를 살펴보기 전에 세상에서는 어떠한 법도대로 움직이는지 살펴보자.
우선 노예의 사전적 의미는 물건처럼 사고팔리는 자들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나 자유가 없고 인간의 존엄성도 없는 자들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대우를 받을 수도 받을 필요도 없는 자들이다. 잠시 역사를 살펴보면 로마 공화정 제국 1세기 초까지 노예의 삶은 비참했다. 인간이라기 보다 가축에 가까웠다. 한가지 일화가 있는데 로마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이야기다. 그의 친구 폴리오라는 사람은 노예가 자신을 실망시키면 칠성장어 연못에 먹이로 던지기로 유명한 자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폴리오를 초대했는데 노예가 폴리오가 아끼던 유리잔을 깨뜨렸다는 이유로 칠성장어 연못에 먹이로 던지려고 했다. 이를 본 아우구스투스는 집의 모든 유리제품을 폴리오가 보는 앞에서 깨뜨리고 장어 연못을 메워버렸다고 한다. 이것을 뒤집어 생각하면 절대권력자인 아우구스투스도 큰 손해를 입으며 경고는 할 수는 있었지만 노예를 죽이는 것 자체를 처벌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노예가 자기 주인이 암살당하는 것을 막지 못하면 그 집안의 노예가 수십명이든 수백명이든 모두 처형당했다. 주인이 노예를 죽일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 정당한 이유라는 것은 사실상 주인에게 명분이 있다면 죽일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노예를 해방시켜 아내나 첩으로 삼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했다. 왜냐하면 종을 임신시키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만 해방시켜 첩이나 후처로 삼는다면 그의 자식은 로마시민이 되므로 노예의 수가 줄기 때문이다. 반면 강제로라도 소유하고 있는 노예끼리 자식을 만들게 하는 것은 권장되는 일이었다. 제국 후기에 기독교의 평등사상의 영향으로 노예의 삶이 개선되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까지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노예를 죽이거나 신체 일부를 절단하지 못하게 하는 진전은 있었다. 후에 노예제가 폐지된 것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변화되었다기 보다 농업 중심에서 공업중심의 사회가 되면서 변화하기 시작했다.
노예를 사고 파는 문제도 심각했다. 배로 노예를 이동시킬 때 최대한 많이 실어야 했으므로 음식은 거의 없이 한달가량 이동시켰다. 실제 노예선은 이렇게 누워서 용변도 봐야했기 때문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감염에 노출되었고 존엄성이 짓밟혀 아예 음식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런 경우 호스를 입에 끼워 강제로 음식을 집어넣어 간신히 연명하게 하기도 했는데 죽거나 병드는 일이 많았지만 이중 반이라도 살면 그래도 이득이 되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렇게 사고 팔았다고 한다.
심지어 지금도 노예는 존재한다. 이슬람은 자기들 법에 근거해 성노예를 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또한 인도에서도 불가촉 천민이 존재한다. 인간으로 취급을 받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 2억명이 넘는다. -나무위키 '노예' 참조-
이처럼 세상에서의 노예는 인간도 아닌 유리컵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종에 대해 어떤 법규를 말씀하고 계실까?
우선 같은 히브리인인 경우에는 6년을 섬기게 하고 7년째에는 몸값이 없이 자유인이 되게 한다. 물론 히브리인이 아닌 경우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아들과 결혼하게 될 경우 종이 아닌 딸같이 대우한다. 그러나 헤어진다고 해도 종으로 팔지 않고 몸값이 없이 자유인이 되게 한다. 만일 종의 한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유인이 되게 한다. 혹은 이를 쳐서 빠지게 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유인이 되게 한다. 이러한 율법으로 인해 많은 종들이 유대인이 되고 싶어 했다. 심지어 1세기 로마인들이 유대교 개종을 법으로 금지해야 할 정도로 많은 종들이 유대인이 되고 싶어했다. 이처럼 하나님의 법은 세상 법과 다르며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도로 보호받고 싶어하는 것이 그분의 공의이고 사랑이다.
2. 반드시 생명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생명의 피를 찾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인생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 가치를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러므로 생명을 빼앗은 자가 있다면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다. 그래서 그에게서 피를 찾으시는 것이다.(창9:5)
다만 하나님께서 그의 손에 넘겨 의도치 않은 살인을 한 경우만 도피성으로 도망하여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고의적인 살인은 하나님의 제단에 있더라도 죽임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야 한다.(출21:12-14) 고의적 살인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일부러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을 말하며 우발적 살인은 예기치 않게 우연히 죽이게 되는 것을 말한다.
3 성경에서 말하는 고의적 살인은 무엇인가?
철연장으로 사람을 죽이는 경우,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죽이는 경우,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들고 죽이는 경우, 악의로 손으로 쳐죽이는 경우 등 모두가 고의적 살인에 해당된다. 이 경우는 속죄금을 받고도 살려주어서는 안된다. 여기서 보면 계획을 했느냐의 여부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도구이며 도구가 없는 경우 손으로 쳐 죽여도 모두 고의적 살인에 해당된다. 이처럼 살인과 살인자를 죽이지 않는 것 모두 땅이 더러워지는 이유이다. 땅이 정결해지는 방법은 사람을 죽인 자가 자신의 생명으로 갚을 때만 가능하다.(민35:16-34)
4. 부지중에 살인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살인자이지만 살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사람은 원한이 없는데 부지중에 이웃을 죽이게 되는 경우이다. 즉, 알지 못하고 일어난 일이다. 성경에서는 '고의적'의 반대로 '부지중'이라고 번역하고있다. 세상에서는 고의적의 반대는 우발적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우발적의 사전적 의미가 예기치 않게 우연히 일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즉, 그 의미는 부지중과 같다. 그렇다면 우발적 살인, 부지중에 저지른 살인은 어떤 것인가? 계획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인 경우 우발적인가? 망치로 치거나 그 집에 부엌 칼로 죽여도 자신이 범죄 도구를 가져온 것이 아니므로 우발적인가? 세상은 그렇게 주장한다. 그리고 그게 안타깝게도 받아들여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예를 들어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이웃을 맞춰 죽게되는 경우이다. 100프로 그저 사고인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가까운 도피성으로 도망하게 하여 억울한 자가 없게 하고 의로운 피를 흘리지 않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심지어 의로운 자라고, 아무 잘못이 없는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신19:3-7)
이에 반에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초등학교 여학생을 버스 정류장에서 납치했고 그 아이가 반항하자 우발적으로 죽였다. 이게 우발적인가? 납치해서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였다면 고의적인 살인인 것이다. 이런 자를 부지중에 죄를 지은 의인이라 말할 수 있는가?
또한, 성추행범이 50대 여성을 납치했다. 자신이 소변을 보는데 피해자가 자신을 성추행하려고 한다고 오해하고 신고하려는 것을 막기위해 우발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한다. 이런 말도 안돼는 상황에 대해 신고를 막으려고 살해한 것은 고의적인 살인이다. 이처럼 세상은 우발적이라는 말을 그냥 욱해서 죽인 거지 죽일 계획은 아니었다는 것으로 해석해 억울한 피를 땅에 쏟아 땅을 더럽히고 있다. 세상은 사실 사형제도 폐지를 마치 사랑인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오히려 수많은 살인자를 만들어낼 뿐이고 그들의 담력만 키울 뿐이다. 오히려 억울하게 사형받는 자들이 없도록 공의롭게 재판하는 것이 필요하지 억울한 자가 있을까봐 사형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은 억울한 자들을 더욱 억울하게 만드는 불의함이다. 사랑이 아니다. 법은 피해자를 보호해주어야지 가해자를 편들어서는 안된다.
5. 사람을 납치한 자가 받을 형벌
사람을 납치하여 그 사람을 팔거나 종으로 삼으면 그를 반드시 죽이라고 말한다. 납치하는 것은 사람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써 마땅히 누릴 인생을 빼앗았다면 그는 모든 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가 누구이길래 하나님이 주신 인생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인생을 빼앗고 짓밟는 자는 살인 자와 같다. 이런 자들은 죽여 악을 제하라고 명하신다. 이처럼 사람을 납치하는 것은 성경에서 아주 중한 범죄로 가르치고 있다.(출21:16 신24:7) 그렇다면 세상의 법은 어떠한지 살펴보자. 염전에 9살 어린 아이를 납치하여 44년간 노예로 부려먹고 폭행하던 자가 잡혔다. 그 아이가 자유를 얻은 때는 53살이다. 그곳에 있던 홍씨, 한씨, 김씨는 2심에서 집행유예 3 또는 4년을 받았다. 심지어 감옥에 가지도 않았다. 44년을 납치해서 인생을 짓밟은 자가 겨우 집행 유예를 받았다. 집행유예는 그 기간동안 사고 없이 넘기면 형의 선고 효력이 없어진다. 즉, 아무런 형벌도 받지 않은 것이다. 이를 통해 얼마나 세상이 공의가 없는지 불의한지 알수 있고 과연 법이 피해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건지, 아니면 가해자들을 위해 존재하는지 의심스럽다. 이를 통해 한국의 땅이 더럽혀 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자들이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이다.
6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의 뜻은 무엇인가? (인과응보)
사람이 서로 싸웠다 상대방이 죽지는 않았지만 크게 다쳤다. 그럴 경우 어떻게 보상해야 하는가? 성경은 그간의 손해 즉, 시간에 따른 피해 보상을 해주어야 하며 그가 완치될 때까지 치료비를 지불하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사람이 서로 싸우다가 임신한 여자를 쳐서 낙태하였을 경우 그에따른 벌금을 반드시 내야한다. 이때는 생명으로 갚지는 않아도 되지만 남편이 부과하는 대로 내야하며 재판장의 판결에 따라 내야한다 이처럼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덴 것은 덴것으로 갚아야 한다. 이 말은 사실 피해 보상제도의 기본을 말해주는 것이다. 행동에 따른 결과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법도이다. (출21:18-25)
7. 듣고 두려워하도록 긍휼히 여기지 말라
만약 증인으로 나와 거짓말로 증언하여 형제를 모함한 것이 드러나면 그가 형제에게 하고 싶었던 대로 그대로 행하여 악을 제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래야 다른 이들이 듣고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불쌍히 여기지 말고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판결하라는 것이다.(신19:18-21) 이것은 사랑이 없는 거 같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죄를 두려워하게 하여 죄를 짓지 않게 함으로 진정한 사랑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죄의 댓가를 지불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더욱 뉘우치게 만든다. 죽이려다 자신이 죽은 경우가 성경에있다. 바로 하만이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마당에 50규빗(25m) 장대를 세웠는데 오히려 자신이 거기 달려 죽었다. 우린 그것을 승리로 기념한다. 이것이 공의이다.
8 예슈아께서 율법을 폐하려 하신 걸까?
예슈아께서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들었으나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오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시며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우린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마5:38,39) 예슈아께서는 율법에 대해 다시 가르치기 위해 이 땅에 랍비로 오셨다. 자신의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것이 그분의 부르심이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계명이지 심판하라고 주신 계명이 아니다. 아니, 심판하라고 주셨지만 이는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도록 주신 계명이지 심판을 위한 계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에 포커스를 두느냐에 따라 율법은 사랑을 위한 것일 수도 있고 심판을 위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세상을 축복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우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말을 들으면 사랑보다는 냉정함을 느낀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는지... 사랑의 하나님이 맞으신지... 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예슈아께서 오른 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고 말씀하심으로 마치 여호와 하나님은 무서운 하나님인데 예슈아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다르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두분이 다른 것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예슈아께서는 율법이 만들어진 진정한 목적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이웃을 사랑하라고 주신 의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의를 위해 억울해도 대적하지 않고 그대로 자신을 내어준다. 그리고 재판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다 원수를 갚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원수는 재판정에서 판단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원수를 갚으려는 자가 아니라 사랑하려는 자로 살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갚는 이유는 심판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웃의 눈이 자신의 눈이라고 여기라는 가장 큰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9. 율법은 범법자를 위해 세우셨다.
율법의 선생이 되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율법의 선생이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다. 선생이 되려고 하면서 자격이 없는 사람이 문제이다. 선생이 되려는 자중에 신화와 족보에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변론만 만들어 낸다. 즉, 허구적인 이야기, 검증되지 않고 검증할 수 도 없는 이야기를 가져와 추측에 따른 논쟁만 일삼는 자들이다. 헛된 논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러나 교훈(명령,율법)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런 헛된 논쟁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기를 갈망 하지만 자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사도시대에 많은 사람이 율법 교사가 되고 싶어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눈에 율법 교사가 영향력있는 뛰어난 자들이었고 존경받는 자들이었던 게 분명하다. 이들이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가르침으로 헛된 말로 변론을 하고 있지만 디모데는 말하고 있다. 율법은 선하다. 합법적인 자들에게 율법은 언제나 선하다. 오히려 율법은 불순종하는 자, 불경건한 자들을 치리하기 세워진 것이다. 선한 자에게 율법은 선하다. 그러나 악한 자에게 율법은 악하게 대한다.(딤전1:4-9)
10 도둑질하면 몇배를 갚아야 하는가?
만약 소나 양을 도둑질해서 잡거나 팔면 어떻게 보상해야 할까? 성경은 소 한마리에 소 다섯 마리로, 양 한마리에 양 네마리로 갚으라고 하신다. 만약 집에 도둑이 들어 도둑을 죽이게 되었다면 어떨까? 성경은 밤에 도둑이 들었고 죽이게 되면 피흘린 죄가 없다고 말한다. 다만 해가 있을 때 도둑을 죽이는 경우는 죄가 된다. 이는 상황에 따라 정당 방위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단지 밤이냐 낮이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도둑질한 것은 반드시 배상해야 하며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신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배상하라고 명하고 있다. 도둑질한 소나 양이 자기 손에 있으면 두배로 배상해야 한다.(출22:1-4)
11 삭개오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이유
삭개오가 예슈아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고 선언한다. 이때 예슈아께서 삭개오에게 구원이 이르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음을 말씀하셨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기 때문이다. 예슈아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에는 분명히 율법 준행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율법을 살지 않고 세상의 법을 산다면 우린 세상 사람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율법을 산다면 우린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삭개오를 통해 볼 수 있다.(눅19:8-10)
12 다윗이 분노하여 내린 처분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가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한 사람은 가난합니다. 부자는 양과 소가 아주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은 작은 암양 새끼 한마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 양은 가난한 자와 그 자녀와 함께 자라면서 그가 먹는 것을 먹고 그 컵으로 마시며 마치 그 집에 딸처럼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한 나그네가 부자에게 갔습니다. 그 사람을 위해 부자는 자신의 양이나 소를 잡는게 아까워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았아 나그네를 위해 잡아 주었습니다. 여기까지 들은 다윗은 분노하여 그 사람은 마땅히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느냐고 말하며 그 양 새끼를 네배로 갚아야 한다고 흥분했다. 이처럼 다윗도 여호와의 율법에 따라 갚아주는 것이 공의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처럼 율법은 공의이고 사랑이다. 범법한 자들을 바로 잡기위해 있는 것이 율법이다.(삼하12:1-6) 그러므로 우리의 죄성을 십자가에서 죽이면 율법에서 해방된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불순종에 따른 저주에서 해방된다는 말이다.
13. 자신이 키우는 동물이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해야 할까?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소는 어떻게 해야할까? 소 주인은? 소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그 고기도 먹지 말아야 하지만 소 주인은 형벌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소가 사람을 받는 버릇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안에 가두어두지 않아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경우에 당연히 소를 죽이고 또한 주인도 죽이라고 명하고 있다. 이는 주인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인의 경우에는 상대방이 속죄금을 부과하면 생명의 대가를 내고 살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유가족의 결정에 달려있다. 이 법규는 아들이나 딸이나 동일하게 적용한다. 그렇다면 종의 경우에는 어떠할까? 만약 소가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는 마땅히 죽여야 하며 소주인은 상전에게 은 삼십 세겔을 주어야 한다.(출21:28-32) 은 삼십 세겔이면 1세겔이 4일치 임금이다. 그렇다면 30세겔은 대략 1500만원정도 지불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30세겔로 가롯 유다가 밭을 샀다고 말하기 때문에 1500만원이 아니라 가치로 따지면 훨씬 더 큰 돈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는 어떠한가? 정말 짐승이 사람을 물면 보상을 해주고 그 동물을 죽이는가? 견주는 어떻게 되는가?
남양주에 개물림 사망 사고가 있었다. 50대 여성을 큰개가 목을 물어 죽게 했다. 그러나 그 개는 10개월 넘게 남양주시의 세금으로 40만원씩 내며 보호소에 있다. 이 비용은 검찰과 경찰의 요청이었다. 심지어 기소조차 되지 않았고 유가족이 안락사를 요청하였지만 동물행동전문가와 동물보호단체의 반대가 예상되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견주는 구속되어 과실치사죄가 적용되었지만 개는 아무 처벌없이 보호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과실치사죄 징역 1년이다. 개는 훌륭하다의 강형욱도 안락사를 추진해야 함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동물보호단체가 자신들에게 살인견을 맡기면 교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사람이 죽어도 사고견은 죽일 규정이 없다고 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우린 공의대로 규정을 세워야 함을 알 수 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갚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개는 죽어야 하는 게 맞다. 그것이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도이다. 하나님의 법도가 공의로 세워지면 더 많은 사람이 책임감을 가지고 개를 훈련시킬 것이며 더욱 평안한 세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경시하는 이러한 처사는 더욱 난폭한 개들이 사육될 가능성을 키울 뿐이다. 이런 황당한 처사에 사람들은 개를 안락사 시키는 것이 아니라 때려 죽여야한다고 민원이 들어온다고 한다. 사실 성경도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말도 안돼는 너무나도 중범죄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동물일지라도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창조주께서 정하신 것이다.
14 하나님께서는 죄를 합리화하지 않으신다
거짓 소문을 퍼뜨리지 말고 거짓말로 증언하지 말고 억울하게 증언하지 말며 거짓된 것을 멀리하여 무죄한 자, 의로운 자를 죽이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첫째, 악인이 기득권을 잡고 있거나 다수가 악인일 때 또는, 가난한 자를 편들어서이다. 정의는 편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억울한 자가 없게 하는 것이 공의이다. 여호와께서는 악인을 의롭다고하지 않으신다. 영어의 justify는 합리화하다의 뜻도 있다. 우리가 아무리 상황이 어쩔 수 없었다고 죄를 합리화해도 하나님앞에 악은 악일 뿐합리화될 수 없다.(출23:1-7)
15.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난다
우린 거짓말하는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빛이시고 공의시기 때문이다. 억울한 자가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시다. 그러므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들의 거짓은 모두 드러나고 들통날 것이며 우리의 억울함은 변호될 것이다. 공의대로 그들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며 그분의 일이시다. 악한 날에는 이들이 거짓으로 우리의 몸을 죽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정직한 영혼은 결코 죽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정말 두려워할 분은 우리의 영혼도 지옥에 보내실 수 있는 여호와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거짓을 따를 수 없고 위증할 수 없고 억울하게 할 수 없다.(마10:26-28)
16 여호와 자신을 가리켜 우리의 복을 맹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우리에게 복주고 복주며 번성하게 하시겠다고 맹세하셨다. 맹세하실 때 자신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셨는데 이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다는 사실 즉, 진리로 인하여 우리가 그분 안에서 소망을 얻게 하기 위함이셨다. 이처럼 여호와께서는 자기 자신을 걸고 우리의 복을 맹세하셨다. 그러므로 오직 공의의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이 땅에 공의를 위해 법규를 이 땅에 세우자. (히6:13-18)
샤밧 예배: 토요일 10시 30분
대전시 동구 가양동 39-11 2층 레올람 토라 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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