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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잃어버린 왕국
회하(淮河).
금릉, 응천부를 가로지르는 강이다. 진(秦) 때에 외곽의 장강과 연결시켰으므로
진회하라고 부른다. 물빛이 벽옥 같아 강의 양쪽으로 가루화방(歌樓畵舫)이 늘어서
환락향(歡樂鄕)으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가인의 웃음소리,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여조약포(麗朝藥鋪)는 그 회하를 바라보는 약전에 위치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약전이 문을 닫는 밤에도 여조약포의 일대는 조용하지 못하다. 저
멀리서 웃고 떠드는 소리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벌써 이경이 지나 삼경을 바라본다.
사환 둘이서 내일 항주(杭州)로 보낼 약의 포장을 겨우 끝마치는 것을 본
방노이(龐老二)는 허리를 두드리며 밖으로 나섰다.
젊은 놈들이 저렇게 굼떠서야…
못마땅한 표정으로 집을 돌면서 마지막으로 뒤뜰의 문단속까지 확인하고 몸을
돌리던 여조약포의 집사 방노이의 전신이 문득 굳어졌다.
문옆에는 대추나무가 좌우로 한그루씩 심어져 있고 그 옆으로는 약초들이 꽃처럼
재배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대추나무의 뒤에서 괴이한 빛이 그를 노려보고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뭐, 뭐냐?』
기겁을 한 방노이가 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어둠 속에서 저렇게 빛을
내는 건 하나밖에 없다. 고양이와 같은 야수의 눈빛이다.
『채노인을… 만나려고 왔소…』
그런데 그 괴이한 빛이 움직이는 듯하더니 나직한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채노야를?』
그제서야 방노이는 대추나무의 뒤쪽 담벽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등을 기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가슴을 움켜쥔 검은 그림자의 눈에서는 믿을 수 없게도
자광(紫光)이 어둠속에서 번뜩이고 있었다.
약포의 주인인 채노인은 이곳에서 장사를 한 지 이제 이십년에 접어들고 있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던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저 소문에 의하면
그가 요동(遼東)에서 왔다는 것이지만 확인한 사람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는 이미 이곳에 뿌리를 박았고, 인심을 얻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막 자리에 들려던 채노야는 방노이의 소란에 놀라 다시 일어나야 했다. 그리고 막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자네…?』
그의 앞에는 곽승고의 뒤를 따르던 청의인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뭐라고? 정말 지금 나타났다는 사람이 우리가 찾던 그 괴인이란 말이오?』
그의 말에 채노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그가 이곳으로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청의인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떡였다.
그는 장호법, 장군충이 중독되는 바람에 흑의몽면인의 명령으로 곽승고의 뒤를
쫓던 추적대의 책임자였다.
* * *
북경 연왕부.
지난날 대도(大都)라 불리었던 원의 황궁이었던 이곳은 이미 찬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있었다.
날씨도 차고 바람도 차다. 그리고 남녘에서 전해오는 공기도 찼다.
드넓게 펼쳐진 대전의 뜨락.
지난 날이라면 이곳에 만조백관이 모여 허리를 굽히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숙위(宿衛)하는 왕부의 위사들이 저멀리 한 두명 보일 뿐, 그 영화로움은 간데
없다.
태조 주원장과 함께 대군을 휘몰아 원을 무너뜨렸다. 호호탕탕히 이 원의
도읍이었던 대도(北平)에 진군해 위엄을 떨치며 원의 잔당들을 추살함에 태조는
그를 일러 짐으로 하여금 북고(北顧)의 염려를 덜게 했다고 기꺼워했다.
하지만 그가 가고 없는 지금 연왕 주태는 남고(南顧)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남녘에서 전해오는 소식은 불리한 것들뿐이었다.
굳은 표정으로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거닐고 있던 그의 뒤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들려왔다.
『하루라도 빨리 왕자전하들을 모셔와야 합니다』
그의 뒤에는 승, 도연이 시립해 있다. 날카로운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쓴 웃음이 연왕의 얼굴을 스쳐갔다.
『어떻게? 강제로 데려올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야밤에 도주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그랬다가는 옳다구나 하고 트집을 잡을 텐데…』
『방법을 찾아봐야 합니다. 이대로라면 저들의 뜻대로 말려들게 될지도 모릅니다』
『너무 걱정 말게. 내가 사람을 보내서 함부로 움직이지 말도록 눌러두었으니』
『그러셨습니까?』
도연은 고개를 끄떡였다.
하긴 지금으로서는 더이상의 방법이 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경사에서 들려오는
둘째 조고후의 행적이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고 있음은 또한 사실이었다.
『나를 만나겠다고?』
연왕이 뜻밖이라는 듯이 도연을 돌아 보았다.
『그렇습니다. 전하를 뵙고 난 다음이라야 자금을 대겠다고 합니다』
『……』
연왕이 입을 다물고 있자 도연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는 황하 일대의 상권을 지배하는 실력자중의 한 사람입니다. 현재 그의 부는
당년의 석숭이라 할지라도 우습게 볼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운영하는
만금전장(萬金錢莊)만 하더라도 중원에서 가장 큰 삼대전장의 하나인만큼 그의
조건은 과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소요될 막대한 자금을 왕부의
금력(金力)만으로는 충당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다. 만에 하나 잘못된다면 구족구멸(九族具滅)의 대죄를 짓게 될
터이니 그로서는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 될 테지. 만나겠다』
연왕 주태는 말을 잘랐다.
그는 결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단 결정한 것은 누구도 이의를 제기치 못할 힘과 과단성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도연은 그에게 길게 허리를 굽혔다.
북방의 바람은 여전히 찼다.
* * *
다음날, 한 대의 마차가 경수사에 찾아들었다.
따갑던 햇살이 구름에 가릴 때였다.
마차는 호화로웠다.
서민들은 흑유(黑油)를 바르고 무늬조차 새기지 못한 수레나 교자를 타게 되어
있는 당시의 관습으로 볼 때, 용봉장식이 금벽(金碧)으로 휘황한 이 마차에 간단한
신분을 가진 사람이 타고 있지 않음은 쉽사리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었다.
준마를 탄 경장의 호위무사 다섯이 대동한 사두마차는 일주문을 거침없이 가로질러
경수사에 이르렀다. 그도 일반인들은 생각지 못할 일이었다.
마차가 도착하자 호위무사들이 말에서 내려 주위를 경계했고, 승려들이 마중을
나왔다.
문이 열리고 나온 것은 뜻밖에도 아름다운 소녀였다. 화의홍상(華衣紅裳)을
차려입은 채 스물도 되지 않는 나이. 하지만 소녀는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그녀들은 마차에서 내린 다음에 양쪽으로 갈라섰고, 그 부축을 받으며 다시 한
사람이 내렸다.
여자였다.
구름같이 틀어올린 머리, 운의예상(雲衣霓裳)에 봉잠(鳳簪)을 꽂아
내명부(內命婦)의 관복은 아니되, 기품을 겸비했다. 서른은 넘은 듯하지만 여전히
눈에 띌만큼 아름답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가운데에는 묘한 위엄이 서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주지스님께서 법당에서 제를 올릴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녀를 맞이하는 승려가 합장을 하고는 길을 인도하기 시작했다.
마차에서 대웅전까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법당에서는 이미 독경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중년미부는 승려가 열어주는 문으로 혼자서 대웅전의 안으로 들어갔다.
여인이 안으로 들어가자 승려는 문을 조용히 닫고는 문 옆에 섰다. 아무도
들어가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인 듯. 그것과는 별도로 여인을 부축해 따라온
두 시비도 문 옆에 섰고, 호위무사 다섯은 대웅전의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아마도 귀한 집의 부인이 불공을 드리러 온 것이 분명한 듯하였다.
대웅전의 문옆에 선 승려는 무심한 눈길로 그것을 보고 있었다. 그는 이 절의
주지인 도연을 시봉하고 있는 광조화상이었다.
문득, 안에서 들려오던 독경소리가 그쳤다.
중년미부는 닫힌 문을 등지고서 자신의 앞에 선 도연을 보았다.
『연왕 전하이십니다』
도연이 그녀를 향해 가볍게 합장을 해보이며 반걸음 옆으로 물러났다.
거기에는 연왕이 우뚝 서 있었다.
『만금전장의 구대랑(仇大娘)이 왕야를 뵙습니다』
중년미부가 연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시오』
하례하고 일어나는 구대랑을 향해 연왕은 말했다.
『천하에 이름높은 만금전장의 주인이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일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이로군. 뜻밖이오』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구대랑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움직임에 따라 가벼운 향풍(香風)이 일고
패옥(佩玉)소리가 청랑하게 일었다.
연왕은 묘한 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아무 데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여인이 아님을, 묘한 귀태(貴態)가 흐르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단순히 돈의 힘으로는 이런 기품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도
침착한 가운데 깊게 가라앉아 있어서 결코 평범하지 않음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하긴, 천하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만금전장의 주인인 여인이 어찌 평범하겠는가.
도연은 이미 자리에 앉아서 독경을 시작하고 있었다. 독경소리가 낭랑한 가운데
연왕과 구대랑은 그의 뒤에 앉아 불공대신 대담에 들어갔다. 그러한 그들의 모습을
연화대위의 석가모니불은 그윽한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들의 만남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으되, 지닌바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중국은 고래로부터 명에 이르기까지 금(金)을 선호하여 그것은 지폐가 발행된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금과 은을 지니고 다니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발달하게 된 것이 전장이다.
전장(錢莊)이란 지금의 은행과 같아 돈을 취급하는 것이 주업이다. 전장에서
발행한 전표(錢票)라 불리는 어음은 천하 어디를 가더라도 같은 전장이라면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설사 다른 전장의 전표라 할지라도 신용이 있는 곳의 전표라면 언제든 돈으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한 곳 중에서도 강북 만금전장은 강북의 부 중 삼분의 이를 소유하고 있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만금전장은 각종 무역에까지 손을
대고 있어서 기실 그 힘이라는 것은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연경에도 만금전장의 지점은 있었다.
이곳의 지점은 제남의 총호(總號:본점)를 제외한 삼대지점 중 하나인지라 규모가
컸다.
오늘 이곳은 예전에 없이 삼엄한 경계망이 깔려 요소요소에서
호원무사(護院武士)들이 경계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었다.
석양이 꾸물거리고 허물어질 때에 전장으로 사두마차 한 대가 들어온 다음부터의
일이었다.
「만금원(萬金園)」
만금전장에는 그렇게 이름붙은 곳이 작든 크든 반드시 있다. 그곳은 혹시라도
들릴지 모를 만금전장의 주인인 구대부인(仇大夫人)을 위해서다.
이름으로 여자인 것은 알지만 과연 어떻게 생겼는지, 나이는 얼마나 되었는지는
만금전장에서도 별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그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운 구석이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지금의 부를 쌓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녀의 부상은 가히
신화와도 같았다.
알려진 것이라고는 그녀가 고려(高麗)의 영약인 인삼무역으로 터를 잡고 서역과
차무역을 하여 돈방석에 앉았다고 하지만 그도 확실치 않았다.
신비는 경외(敬畏)를 낳는다.
구대부인은 그렇게 만금전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만금원에는 주인이 들었고, 그것으로 일대에 펼쳐진 삼엄한 경계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는 명백했다.
경수사를 두 개시진(네시간)만에 떠나온 구대랑(대부인)은 만금원의 대청에서 연경
만금전장의 장주인 유충(柳忠)의 앞에 마련된 태사의에 앉아 있었다.
『은 오십만냥입니까?』
『이곳에서 준비할 분량이다』
『그럼 더 필요하다는…』
『일차분이라는 것만 알면 된다. 언제든지 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어주도록
조치하라』
『알겠습니다』
환갑을 바라보는 유충은 허리를 굽히고는 물러났다.
은 오십만냥이라면 결코 간단한 금액이 아니다. 제아무리 만금전장이라고 할지라도
준비가 필요할 터였다.
더구나 그녀가 연왕에게 약속한 것은 오십만냥이 전부가 아닌, 일차분으로
절은(折銀) 일백만냥이었다. 은 한냥에 백미 네섬을 살 수 있었던 때다.
전표를 끊는다면 간단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돈의 출처가 쉽게
드러나게 된다.
어느 때라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일에는 최대한의 보안이 필요한 법이고 둘러가더라도 비밀이 유지되어야만
했다.
연왕에게 필요한 것은 비밀리에 동원할 수 있는 금력이었다.
유충이 물러난 후, 구대부인은 꼿꼿이 앉아 있던 자세를 허물고 태사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피로가 엄습해왔다.
숨가쁘게 달려온 지난 세월이다.
이제 성패(成敗)를 건 도박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의 첫단추는 이미
틀어진 상태다.
결국,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자신을 보던 연왕의 묘한 눈길을 떠올린 구대부인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런 조건을 내세울 줄은 몰랐을 테니 당연한 일이겠지…』
대청을 떠나 뜨거운 김이 오르는 욕조에 몸을 담근 그녀는 희뿌연 김이 서린
가운데 드러난 자신의 몸을 보았다.
아직도 아름다운 몸이었다.
어깨의 선도 그린 듯하고 물기를 머금어 빛나고 있는 젖가슴도 그러했다. 처녀의
것인 듯 탱탱한 유방은 아직도 처지지 않았다.
천천히 쓰다듬어 내려간 물속에 잠긴 아랫배의 탄력도 그대로다. 그렇게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도 군살이 생기기는커녕 늘씬한 허벅지와 종아리도 마찬가지였다.
구대부인은 눈을 감았다.
몸은 그대로이지만 이 몸을 사랑해줄 사람은 이미 죽고 없다. 그날 이후, 한번도
단 한순간이라도 그 처절한 원한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구대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오죽하면 성을 구(仇)로 삼았을까.
밖에서 시비 경옥의 말이 들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대부인…장선생이 찾아오셨습니다』
「장호법이?」
구대부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요양을 하고 있을 그다. 그런 그가 이곳까지 자신을 찾아왔다면 뭔가 일이
생겼음이 분명했다.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된다.
아니다. 셋은 하나이고 하나 또한 하나였다. 아니, 그도 아니었다. 하나라는 것은
형상일 뿐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것을 그저 그렇게 부를 뿐, 하나는
하나가 아니고 모든 것이었다.
그리하여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이라 하고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이라 하였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라 하였으니 그를 일러 삼재(三才)라 하며, 하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천지만물의 근본이 나와 일체(一體)라. 사람 가운데 천지가
있었다.
그러하므로 하나에서 마치되, 하나에서 마침이 없다 하다.
노자가 이르기를 『하나를 얻으면 만사가 끝(得其一萬事畢)』이라 하였고
불가에서는 『만 가지 법이 하나로 돌아간다(萬法歸一)』라고 했다. 공자가 『나의
도는 하나로서 뚫는다(吾道一以貫之)』라고 한 것이 모두 이를 의미한다.
생사전륜대법이란 서역(西域)에서 전해진 마공(魔功)의 일종이다. 상대의 힘을
앗아 자신의 힘으로 만드니 역천의 악독한 무공이었다.
미륵존자가 곽승고에게 그 마공대법을 전개한 이상 백면서생인 곽승고가 저항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를 기다리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하지만 그 괴노인이 알려준 천부경의 요결이 그러한 힘을 발휘할 것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고, 그것은 운명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괴노인은 실제로 미쳐 있었고, 그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은 연중 한두번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였듯이 그가 정신을 차린다 할지라도 그 시간은 아주
잠시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가 거꾸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닥쳐 그 충격으로 잠시
제정신을 찾고 그에게 천부경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천부경의 오의(奧義)를
알려준 것은 또한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에 가서 제정신을 또 잃어버린 것이 어떻게 작용하게 될
것인지는 아직은 누구도 짐작할 수 없는 운명의 장난이기도 했다. 그것은 그가
알려준 구결이 완전하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전신의 모든 기력이 다 빨려나가고 텅텅 비게 되자 곽승고는 그 가운데에서
천부경을 떠올렸고 극한의 상황에서 그는 천부경에서 연유한 천부신공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되어 곽승고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올 수 있었다. 그렇게 복잡한 상황을
미륵존자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는 돌변한 상황에 전력을 다해 곽승고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려고 하였지만
곽승고가 하나가 하나이기만 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을 알지 못했다.
그것은 곽승고가 미륵존자까지 자신과 하나로 받아들였음을 의미했고, 미륵존자가
발악을 하면 할수록 전신의 기력이 곽승고에게 흘러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미륵존자는 죽기 직전까지 곽승고의 기력을 빨아들이고자 하였지만 기실, 그로
인해 빨아들인 기력은 모두 그가 아닌 곽승고에게로 흘러들어갔다.
가만히 있어도 미륵존자가 자신의 모든 기력을 곽승고에게 쏟아붓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곽승고가 천부신공을 깨달았기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생사전륜대법은 마공이긴 하였지만, 그 또한 상대방과 나를 하나로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그러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미륵존자는 마지막 순간에서야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난 다음이었다.
달빛이 그윽하게 스며든다.
벽에 기대앉은 곽승고는 열린 창으로 떠오른 달을 보고 있었다. 여기에 온 지
하루가 지났다.
그런데도 모든 것이 까마득한 옛일만 같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실제가 아닌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집으로
돌아가면 부용이가 그렇듯 정겹게 웃으며 자신을 맞아줄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며 웃어줄 방약란…
하지만 그것이 바람일 뿐인 것은 자신의 손을 보는 순간에 알 수 있었다.
겉보기로는 별 다름이 없다. 하지만 오른손은 제대로 쓸 수가 없고 그나마 그
손에는 은은한 자색빛이 떠올라 있었다.
미륵존자에게서 흡수한 자하독공이 그의 몸에 깃든 까닭이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나타난 것은 약포의 주인인 채노야였다. 곽대장군은 채노인을 찾으라 했지만 그는
이곳에서 노야라고 존칭되었다.
『좀 어떠십니까?』
채노야가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으며 물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한번 볼까요?』
채노야가 사슴가죽을 낀 장갑을 내밀었다. 그로서는 감히 맨손으로 곽승고를 만질
수가 없었다.
곽승고의 가슴은 부드러운 흰 천으로 칭칭 동여맨 상태였다. 천을 풀자 깊은
상처가 드러났다. 하지만 상처는 급속하게 아물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괴이하군요… 약을 쓸 때는 그렇게 악화되더니 그냥 두니까 이렇게 빨리
회복되다니…』
채노야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상처를 들여다 보았다.
약포의 장정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곽승고의 앞에 나타난 채노야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청의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곽승고가 내민 철패를 본 채노야의 대접이 그렇게 달라질 것은 곽승고는
미처 상상할 수 없었다.
극진(極盡).
오로지 그 말 한마디로 그가 받는 대접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상태를 본 채노야는 격동해 무릎을 꿇고서 피를 토하듯이 흐느꼈었다.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를 알아볼 눈이 곽승고에게는 있었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능력으로 곽승고를 치료하겠다 하였다. 그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의도에 깊은 조예를 지닌 사람이었다. 하지만 곽승고의 상태는 그가 아직껏 들어본
적조차 없는 것이었다.
일단, 곽승고가 입은 검상은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그것부터 치료해야 했다.
치료에 들어간 것은 좋았다.
하지만 일단 약을 쓰자 뜻밖에도 지독한 부작용이 나타났다. 분명히 그처럼 좋은
약을 썼음에도 상처가 무섭게 덧나면서 곽승고는 사경을 헤매일 정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혼비백산한 채노야는 자신이 썼던 모든 약을 포기했다.
그러자 상황은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처는 이렇듯 저절로 아물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급속히.
『치료가 별로 필요 없겠습니다. 일주일 정도면 아마 아무런 문제없이 움직이실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이해하기 곤란한 일이로군요…』
채노야는 꼈던 사슴가죽 장갑을 벗어 옆으로 놓으면서 말했다.
『정말 그분이 내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의 손에 몸을 맡기고 있던 곽승고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의 말에 일순 흠칫했던 채노야는 안색을 굳혔다.
『그렇습니다. 곽천수는 명을 받고 때가 될 때까지 당신을 키운 사람일 뿐입니다』
『명을 받고?』
『그렇습니다』
『누구의 명을 받았다는 겁니까?』
『지금 이곳으로 당신을 만나기 위해 오고 계시는 분의 명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명으로 노부 또한 이곳에서 만약을 대비하고 있는 겁니다』
『오고 있다는 분이 누굽니까?」
곽승고의 물음에 채노야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분은 당신의 어머님이십니다』
『어머니?』
『그렇습니다. 당신의 생모이십니다』
벼락이 떨어진다 한들 이처럼 놀라운 말이 또 있을까? 나를 낳아준 어머니라니…
곽승고는 일순 전신이 굳어져 말없이 채노야를 보기만 하였다.
『사흘 정도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그럼 모든 것을 아실 수 있습니다』
채노야는 그에게 깊게 흰머리를 숙여보였다.
문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곽승고는 말없이 보기만 했다.
어머니라니?
이 세상에 한분뿐이었던 아버지가 타인이 되어버렸는데, 이제 갑자기 생모가
나타난단 말인가.
정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얼마 되지 않는 시간에 십년은 지났다고 해도 좋을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곤혹에 휩싸인 곽승고의 전신을 달빛은 중독의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저
조용히 어루만지고 있었다. 달빛만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약속했던 사흘이 지났다.
그래도 도착한다던 사람은 오지 않았다.
채노야의 얼굴에 초조가 깃든 것을 보고 곽승고는 왜 온다던 사람이 오지 않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지독한 시련은 그를 피폐하게 만들기보다는 일개
백면서생에서 오히려 깊이를 가진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나흘째 되던 날 석양 무렵이다.
후원에 있는 곽승고의 앞에 채노야가 나타났다. 그의 얼굴에 어린 격동을 그는 볼
수 있었다.
『오셨습니다』
한마디.
곽승고의 전신으로 긴장이 치달렸다.
려조약포는 약포치고는 규모가 큰 편이다. 전면은 약포이고 후면은 내원으로
약포의 사람들이 생활하는 곳이다. 그 내원에 다시 후원이 꾸며져 있는데 이곳에는
오직 채노야 혼자만 산다.
곽승고가 머물고 있는 곳도 이곳이다.
그가 인도된 곳은 후원대청이다.
대청이라야 먼 데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화원 하나를 건너면 바로였다. 전과는
달리 주위를 경계하는 무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 사람이 거기 있었다.
흑의를 걸쳤다. 크지 않은 체구다.
곽승고가 들어서자 그가 몸을 돌렸다.
『!」
그를 보자 곽승고의 전신이 놀람으로 굳어졌다.
뜻밖에도 그 흑의인은 그날밤 장군부에서 만났던 흑의몽면인이었던 것이다.
침묵.
수유(須臾)인 듯, 억겁(億劫)인 듯한 침묵이었다.
두 사람은 우뚝 선 채로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흑의몽면인이었다.
『네가 정말…승고란 말이냐?』
그의 음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대답대신 곽승고가 물었다.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당신입니까?』
그 물음에는 대답이 포함되어 있었다.
흑의몽면인도 그것을 느낀 듯 암암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대체 네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흑의몽면인은 길게 탄식하면서도 곽승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더니 참지
못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비틀, 한걸음을 물러나 자신의 뒤에 있던 의자에 무너지듯이 주저앉았다.
마치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는 것 같은 모습.
그러한 그를 곽승고는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모습은 확실히 전과는 다르다.
달라진 피부빛에 두꺼워진 입술, 독기를 이기지 못해 눈썹조차 절반은 빠졌다.
한손이 어둔한 것도 여전하다. 오죽했으면 방약란마저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까.
하지만 흩어졌던 머리도 단정히 묶었고, 옷도 갈아입었다.
그러니 보기 흉하다 할지라도 생면부지의 남이 저러한 태도를 보일 까닭은 없다.
그때였다.
넋을 잃은 듯이 의자에 앉은 채 곽승고를 바라보고 있던 흑의몽면인은 갑자기
의자의 손잡이를 거세게 치면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어쩌면 하늘은 이렇게 가혹하단 말인가!』
말과 함께 흑의몽면인은 자신이 쓰고 있던 몽면을 벗었다. 몽면(蒙面)이란
복면과는 다르다. 망사와 같은 것으로 얼굴 전체를 눈도 드러내지 않고 가리는
것을 몽면이라 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자신을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
복면과는 다르게 사용되는 것이다.
몽면을 벗자, 거기서 드러난 것은 정말 뜻밖에도 남자가 아닌 여인의 얼굴이었다.
그것도 기품으로 아름다운 삼십대 중반 중년여인의 얼굴.
설마 했더니, 그는 정말 여인이었다.
아름다운 그 얼굴은 먼 길을 쉬지 않고 달려왔음을 의미하듯이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거기 깃든 것은 피곤보다 더한 격동(激動)이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느냐?』
『채노인은 내가 기다리는 사람이 내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곽승고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
아직도 아름다운 흑의미부는 곽승고의 대답이 이토록 침착함이 뜻밖인 듯 잠시
그를 보고 있더니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곽장군이 너를 잘못 키우지는 않았구나…그래, 내가 바로 네 어미다』
말은 쉽다.
하지만 이 말을 듣는 곽승고의 가슴이 뛰는 것을 무엇이라 형용할까. 얼굴도 보지
못한 어머니가 여기에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동봉한 철패(鐵牌)는 네 신분을 증명할 것이니, 너는 이것을 가지고 바로
응천부의 약전에 있는 여조약포에 가서 채노인을 찾도록 해라.
그럼 네 신분을 알게 될 것이다」
곽장군의 유서가 생생하게 뇌리에 떠올랐다.
곽승고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이 제 어머님이라면, 왜 저를 그분께 보내서 키우게 했습니까? 세상에
떳떳지 못한 숨겨야만 할 일이라도 있습니까?』
쓴 웃음이 흑의미부의 얼굴에 스쳐갔다.
『그래, 지아비를 원수에게 잃고 나라를 잃었으면서도 이렇게 이국에 와서 숨어
살고 있으니 어찌 떳떳하다 하겠느냐…』
길게 탄식한 그녀는 탁자 위에 있던 철패를 집어들었다. 승고란 글자가 적힌 그
철패는 곽장군이 남긴 유물이고 곽승고가 채노야에게 제시했던 신분의 증명서였다.
『넌 이 승국패(承國牌)의 유래를 아느냐?』
곽승고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는 다시 말했다.
『알 리가 없겠지. 이 승국패는 네 아버님이 생전에 너에게 남기신 것이다. 네게
고려를 맡기겠다는 뜻으로…』
『고려를?』
곽승고의 얼굴에 의혹이 떠올랐다.
고려는 이미 망한 나라이다. 그 자리에는 이미 조선이 들어서 있음을 잘알고 있는
그였다.
『그래, 고려. 너야말로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고려왕실의 적통(嫡統)이다.
네 아버님은 고려의 제32대 왕이신 우왕(禑王)이시다!』
곽승고는 잠시 멍청해졌다.
고려에 대한 것이라면, 그곳에 관한 것이라면 곽대장군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장부는 결코 뿌리를 잊지 않아야 하는 법이라면서…
하지만 이건 너무 엉뚱했다.
『우왕이라면… 말이 안되는군요. 그분의 후손은 뒤를 이은 창왕(昌王)뿐이고, 그
왕통(王統)은 거기서 단절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공민왕의 아들, 비운의 왕 우왕은 그 아들 창왕과 함께 이성계의 손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리고 그 왕통은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에게 전해지면서 고려는 무너졌다.
그런데 자신이 우왕의 아들이라니?
그는 후손으로 창왕 하나만을 남겼고 창왕은 즉위 일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지 않았던가.
휙휙-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낙엽이 바람을 타고 날고 흙먼지가 시야를 가리며 일어났다. 갑자기 돌풍이
불었다. 그리고 하늘이 어두어지면서 저 멀리서 은은히 천둥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청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 가운데 흑의미부는 곽승고를 보면서 마치 석상과 같이 서 있었다.
『그랬었지…』
쾅!
밖에서 벼락이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요란하게 흔들거리면서 전신을 떨었다.
『역도들은 알지 못했다. 그때… 네 아버님께서 역도들에 의해 강릉에서
돌아가시던 때에 내 몸속에 네가 자라고 있음을…』
흑의미부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공민왕은 일세의 영주(英主)였다.
그는 부패해가는 고려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지만 그처럼 사랑했던 아내 노국공주를 잃어버리고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요승(妖僧) 신돈을 등용하여 겨우 잡아놓은 나라의 기틀을 다시 무너뜨리고 말았다.
노국공주 외에는 어떤 여자도 사랑할 수 없었던 그는 미소년들을 모아
자제위(子弟衛)를 만들어 남색에까지 빠졌다. 그렇게 술과 색에 스스로를 무너뜨린
그는 자제위 중의 하나인 홍륜(洪倫)이 익비와 간통하여 임신을 시키자 그를
죽이려 하다가 시해(弑害)당하여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후사가 없는 공민왕이었다.
적통을 얻기 위해서 혜비와 익비 등을 차례로 얻었지만 실패했던 그였던지라, 그의
뒤를 잇게 된 것은 그가 신돈의 집에 출입하면서 알게 된 여인 반야(般若)와의
사이에 생긴 모니노(牟尼奴)였다.
서자인 이 아이를 무척이나 사랑했던 공민왕은 나중에 그 이름을 우(禑)로 고치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했다.
후일 그는 궁인 한씨의 소생으로 발표되어 공민왕의 사후, 이인임의 주선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니 그가 바로 고려의 제32대 왕인 우왕(禑王)이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십세였다.
그렇게 왕위에 오른 우왕은 원말, 명초의 혼란기에 친원파(親元派)와
친명파(親明派)의 갈등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수구세력인 친원파와 개혁세력이라 할 수 있는 친명파 사이의 갈등은 필연적이었다.
명은 북원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고려를 눈엣가시로 보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세공의 요구는 과다하여 우왕11년까지 금 5백근, 은 5만냥, 베 5만필, 말
5천필을 사정사정하면서 바쳐야 했다. 사신이라고 오는 자들의 횡포는 말로 다 할
수 없어서 원한은 하늘에 사무친 판이었다.
오죽했으면 사신 채빈을 죽이기까지 했겠는가.
그 와중에 명나라는 철령 이북을 접수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철령이란 강원'함경도
경계상에 있는 안변의 철관(鐵關) 일대를 의미하므로 고려의 허리를 잘라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수작에 다름이 아니다.
조야가 벌떼같이 일어났다.
결국 요동을 쳐 철령은 물론, 고려의 숙원이었던 요동(遼東)을 편입하기로
결의하고 주장(主將)에 최영을, 좌군 도통사에 조민수, 우군 도통사에 이성계를
삼아 7만여의 군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성계는 『소국으로 대국을 정벌할 수 없다』는 등의 4불가론(不可論)을
내세워 결국 저 유명한 위화도회군을 단행, 결국 최영등 친원파를 몰아내면서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우왕을 내몰고 결국은 강릉에 귀양가 있는 그를 역적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목을 쳐 죽였다. 어린 그의 아들 창왕도 같은 일을 당했다.
죽기 전에 우왕은 몰려든 백성들에게 웃통을 벗어 보이며 소리쳤다 한다.
『자고로 우리 왕씨는 용의 아들이라 하여 겨드랑이에는 용 비늘이 있다. 자,
보라! 내 겨드랑이에 과연 용 비늘이 있는지 없는지!』
백성들은 그의 겨드랑이에서 용비늘의 흔적을 보았지만 그의 목은 망나니의 칼에
의해 피를 뿜었다.
형장에서 죽어간 그를 부둥켜안고 절규하는 것은 최영의 딸로서 그의 아내가 된
영비(寧妃)뿐이었다.
영비는 죽은 우왕의 시체를 안고 쉬지 않고 울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후환이 두려웠던 백성들도 차마 더이상을 보지 못하고 우왕의 시신을 수습해주고
여막을 지어주었다.
그렇게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았던 영비는 어디론가로 홀연히 사라졌다고
하였다. 세상을 떠났다기도 하고 혹은 그곳에서 지쳐 죽었다고도 했다.
쏴쏴-!
밖에서는 어느새 빗줄기가 굵어져 창문까지 세차게 두들기고 있었다. 바람이 문을
잡아 흔들었다.
흑의미부는 곽승고를 바라보면서 말하고 있었다.
『영비는 죽지 않았다. 그녀의 몸속에는 아무도 모르게 그분의 핏줄이 자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콰쾅!
뇌성이 번갯불 가운데 울었다.
우르르… 콰콰쾅!
뇌성대작(雷聲大作).
바깥의 날씨는 악천후로 화해가고 있었다.
대청은 점점 더 어두워졌다. 불을 밝히지 않은 그 속에서 곽승고와 흑의미부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그…』
『그래. 뱃속에 있던 유복자. 고려의 마지막 왕통을 이은 적자가 바로 너다』
참을 수 없어 입을 연 곽승고를 향해 흑의미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죽었다고 소문났던 영비 최씨가 바로 나다』
흑의미부는 입술을 깨물었다.
최영을 유배하고 권력을 잡았던 이성계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발을 뻗고 잘 수
없었다.
결국 다음해에 『공로가 크나 사대(事大)의 예에 어두워 독단으로 요동 정벌의
군사를 일으켜 천자에게 득죄하고 하마터면 나라를 망칠 뻔했으니 전공(前功)이
명나라에 대한 반역죄를 덮을 수 없다』라는 이유로 최영은 참형을 당하게 된다.
이씨조선은 출발에서부터 이렇게 사대를 국시(國是)로 작정했으니, 후일
소중화(小中華)라는 얼빠진 자존자대(自尊自大)에 빠져 중국의 개 되기를 즐겨
하는 넋빠진 선비들을 길러내게 된 것은 필연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헤쳐모인 자들이 일삼은 것은 그저 권모술수와 당쟁(黨爭)뿐이라, 그
폐해가 이조 오백년을 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음을 어찌 간과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사대주의자 김부식에 의해 말살된 단군실사(檀君實史)를 밝히기 위해서
조선조 숙종 때에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쓴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스스로의 신분을
밝히지 못하고 호를 썼을 것이며, 그의 서문에 일러,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라고 하면서 탄식하였으랴.
장인 최영이 죽임을 당한 것을 알면서도 우왕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그도
강화도로 쫓겨가고 겨우 아홉살 짜리인 그의 아들 창왕이 뒤를 이었다.
다시 여주로 쫓겨가 앙앙불락하고 있던 우왕은 자신을 찾아온 최영의 생질
김저(金佇) 등을 만나게 된다.
우왕은 그들에게 밀명을 내려 이성계를 암살토록 하지만 배신자로 말미암아 그
일은 실패로 돌아가고 그나마 남아 있던 왕실의 충신들을 모조리 쓸어내는
악수(惡手)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다.
신가의 손(孫)을 임금으로 모신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창왕도
폐위시키고 왕씨의 손으로 임금을 모셔 고려왕실의 정통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 신종의 7세손 정창군(定昌君)이 즉위하니 그가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이다.
이렇게 된 이상, 우왕을 살려둘 리 만무다.
강릉에 있던 우왕은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는 영비에게 아무도 몰래 철패 하나를
건넸다.
『그 무도한 자들이 나를 그냥 둘 것 같지가 않구려. 이 철패는 우리 고려왕실에서
전해지는 전국지보(傳國之寶) 중의 하나요. 사내 아이를 낳거든 이 철패를 전하고
이름을 승고(承高)라 지어주시오』
그날 밤, 영비는 우왕의 품에 안겨 밤새 서럽게 울었다. 그녀가 임신을 한 것은
시비조차 모르는 일이었다.
개경에서 사신(死神)이 들이닥친 것은 그 다음날이었다.
우왕은 그렇게 죽었다.
임신 삼개월의 유복자를 남겨두고서…
쏴아아-
밖에는 비바람소리가 요란하다.
『네가 없었다면 나는 욕된 삶을 이렇게 이어오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오로지,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나는 지난 세월을 살아왔다』
흑의미부, 나라를 잃어버린 비운의 왕비. 영비 최씨는 떨리는 음성으로 말을 잇고
있었다.
『그런데, 네가 이런 모습이 되다니… 하늘이 어찌 우리에게 이처럼 가혹할 수
있단 말이냐』
영비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난 세월 그처럼 힘들었어도 한번도 울지 않았다. 자식을 떼어놓고서도 그리움에
몸부림치면서도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한(恨)을 불태웠었다.
그러나 그 자식이 저토록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 사람을 가까이 할 수 없다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고쳐주겠다! 지하에 계신 선왕께서도 널 지켜주실
것이다』
영비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말했다.
『…』
곽승고는 물끄러미 그녀를 보고 있었다.
어머니.
죽었다던 어머니가 자신의 앞에 있었다. 그리고 드러난 뜻밖의 신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가슴만 답답했다. 답답한 것이 아니라, 수만가지의
감회(感懷)가 뒤섞여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불이 밝혀졌다.
채노야는 대청의 불을 밝혀놓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의 옷이
젖어 있음을 보아 그는 아마도 대청의 밖에서 비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사람의
접근을 감시하고 있었던 듯했다.
『충직한 사람이다. 지난 이십년을 하루같이 이 어미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곁에서 너를 지켜보며 오늘까지 살아온 사람이니 너는 결코 저 사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의 뒷모습이 닫힌 문으로 사라지자 영비 최씨가 말했다.
곽승고는 자신의 손에 낀 사슴가죽 장갑을 내려다 보았다. 채노인이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것으로 인해 그는 일단 사물을 만질 수 있었다. 독이 묻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네 신분에 대해서 의심이 가느냐?』
곽승고가 고개를 숙이고 있음을 보고 영비가 물었다.
『아닙니다』
곽승고는 머리를 들었다.
가만히 있으면 심산의 거암(巨巖)을 보는 듯하고 움직이면 대해(大海)가 굼실대는
듯한 느낌. 하지만 그의 눈은 고요한 창천(蒼天)과 같다.
천부신공을 깨달은 다음 그에게 일어난 변화였다.
그것은 어떠한 상황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대처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체내의 독기마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였다. 괴노인의 말은 결코 허언(虛言)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 첫걸음에 불과했다. 그가 깨달은
천부신공은 이제 입문단계이기 때문이다.
영비도 곽승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알 수 없는 무게가 담긴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격변(激變)을 겪어 정신적으로 컸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지만 무슨
까닭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받아라. 네 신분을 증명하는, 네가 고려의 적통임을 증명하는
승국패이다』
영비는 탁자에 놓여져 있던 철패를 곽승고에게 건네주었다.
그가 그 승국패를 받아듦을 보자,
『이제 너는 본래의 네 성인 왕씨를 되찾았다. 그것은 네가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울 책임을 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비명에 가신 부왕의 원한을 잊지 말라.
역도들은 그후에도 쉬지않고 왕씨 일족을 도살하여 고려 전역에 왕씨성을 가진
사람은 씨가 말랐더니라』
영비는 피가 터지게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 세월을 오직 원한의 힘으로 살아온 그녀였다. 그녀의 이 말은 너무도
당연하다 할 수 있었다.
실제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여 왕씨를 핍박하였고,
서로 연락하는 것이 두려워서 귀양보냈던 왕씨들을 모두 한군데 모았다. 그렇게
해서 섬으로 왕씨일족을 모은 이성계는 그들을 모두 굶겨죽였다.
굶어죽지 않은 자들은 섬을 탈출하다 물에 빠져죽고 아예 처음부터 섬에 보내지도
않고 도중에서 배를 가라앉혀서 죽이기도 했다.
이긴 자의 만행이라기보다 진 자의 비애(悲哀)였다.
곽승고, 아니 이제 왕승고가 된 그는 가슴이 답답해져옴을 느꼈다. 무너진 나라의
왕손. 거기에 담긴 뜻은 하나뿐이다. 권리는 없고 복국(復國)이라는 의무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것도
아니고 잃어버린 나라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는 왕승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영비가
입을 열었다.
『내 얼굴, 기억나지 않느냐?』
『…?』
그녀의 말에 왕승고는 묘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
『참을 수 없이 너를 보고 싶을 때에는 가끔 장군부에 가서 너를 본 적이 있었다.
네가 잘 때에도… 그중 몇번은 네가 깼을 때에도 봤었고』
그러고 보니 눈에 익은 듯한 모습이었다.
『제남의 이모님?』
영비의 얼굴에 훈훈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기억하고 있구나. 제법 오래된 일일 텐데도…』
밤에만 오는 여인.
왕승고가 그녀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러했다. 어릴 때 가끔 잠에서 깨면
자신을 안고 흐느끼고 있던 여인. 이모라는 그 여인의 아늑한 품에 안겨서
왕승고는 말했었다. 이모가 엄마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하면서 어린 왕승고는
다시 잠에 빠져들곤 했었다.
자고나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곽대장군은 그의 물음에 늘 웃어보이면서 그 얼굴을 잊지 말라고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도 했었다. 그 기억마저 너무 오래되어 어디서 본 듯하긴 했지만
얼핏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궁금하지 않느냐? 왜 너를 곽장군에게 맡겼는지, 내가 어떻게 중국에 와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아도 궁금하던 차였다.
어머니, 느닷없이 그의 앞에 나타난 그의 어머니는 겨우 목숨이나 건지기 위해서
여기에 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개 여인이, 그것도 타국에 와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직 밤은 아니었다.
하지만 돌변한 악천후는 밤보다 더했다.
뇌성이 울고, 비바람은 더욱 거셌다. 닫아놓은 문마저 그 서슬에 놀라 덜덜 떨었다.
『그날도 이랬다…』
영비의 눈은 그 옛날의 일을 아스라히 더듬고 있었다.
죽고자 하나 죽을 수 없었다.
자신의 뱃속에 유일한 한점의 핏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슬픔을
억제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었다. 모든 것을 잃었다.
아무것도 넘길 수가 없었다.
물 한 모금조차도.
그렇게 열흘이 지나자 이젠 뱃속의 태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슬픔이 조금
가라앉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아이마저 잃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지만 이젠 움직일 기운마저 없었다.
그때, 그녀의 앞에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지쳐 쓰러진 그녀를 부축하여 그 자리를 떠났다. 누구도 그가 그녀를 구하여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영비를 살려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죽었다고 소문을 내고는 그녀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서 명나라로 들어와 오늘날 그녀가 이룬 터전의 기초를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기실 그녀가 오늘날 이룬 모든 것은 그가 마련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녀는 그를 은공(恩公)이라 불렀다.
그렇게 해서 만금전장을 비롯한 수많은 기업을 일으키는 신화를 그녀는 이룩했다.
북경에서 연왕을 만났던 신비에 싸인 여인. 만금전장의 구대부인은 바로 그녀,
영비였던 것이다.
그안에 얽힌 사정은 결코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현재의 그녀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승고를 곽천수에게 맡긴 것도 그의 뜻이었다.
거기에는 두가지의 깊은 뜻이 있었다.
그 하나는 이제부터 영비가 해야 할 일은 막중하여 아이를 제대로 키우기 힘들
것이므로 그 부담을 덜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그녀는 이후, 개경을 연결하면서
인삼무역을 시작하여 돈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단 하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을
정도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승고는 쉽게 키워서는 아니되었다.
왕재(王才)로서 키워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시간이나 돈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더해 두 번째 이유로 인해 그는 더더욱 곽천수의 집에서 자라야만 하였다.
그는 명나라에서 벼슬을 해야 했다.
그것도 아주 높은…
어느 곳이나 같다. 가문의 후광이 있는 곳이라면 맨손에서 시작한 사람보다 모든
것이 쉬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곽천수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고려인으로서 순전히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대장군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었다.
거기에 더해 그는 고려의 충신이었다.
『네가 대과에 급제하면서부터 모든 일은 시작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어찌 짐작이라도 했겠느냐?』
영비, 오늘날의 구대부인은 길게 탄식했다.
『무슨 일입니까?』
『네가 대과에 급제하면 손을 써서 너를 가장 빠른 시간에 주목받는 존재가 되도록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나면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반란?』
구대부인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렇다. 삭번을 항의하는 왕들의 반란이다. 그 주체는 연왕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협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녀의 눈은 불타고 있었다.
복수의 불길이다.
『이길 수 있는 자에게 힘을 보태어주면서 이씨조선을 멸해달라는 조건을 붙이는
것이지』
『그런…』
그녀의 말에 왕승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외세의 힘을 빌려 이씨조선을 멸한다 한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성은 바뀌었다 하나 그나마 지키고 있는 민족의 나라를 아예 말살해버리게
될는지도 모르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그러한 얼빠진 일은 신라의 통일을 부르짖던 사대주의자 김춘추가 고구려의 그
거대한 만주강역을 당나라에 다 떼어주고는 통일을 했다고 설쳐댄 것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만에 하나 발해가 일어나 만주를 지키지 않았다면 이 나라의 백성은 그 옛날
고조선(古朝鮮)이 중국대륙을 잃어버리듯이 그곳에서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렸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왕승고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보고는 구대부인은 희미하게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느냐?』
왕승고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저는 아버… 곽장군님으로부터 그렇게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럴테지. 하지만 이것 또한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우리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다…』
구대부인의 말소리가 의미심장히 울렸다.
주원장은 천하를 얻었다.
그는 빈손에서 일어나 천하를 얻은 일대영웅이다. 하지만 그 천하를 다시 남이
가져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충신양장(忠臣良將)들을 모두 죄주어 죽였다. 그리하여
대두한 것이 천하가 바로 주씨일가의 것이라는 가천하(家天下) 사상.
그렇게 해서 천하에는 주씨로 이름된 스물다섯 명의 왕이 생겼다. 일컬어
봉건(封建). 그렇게 해놓고 주원장은 안심을 했을는지 모르겠지만 그 뒤를 이은
손자 혜제는 안심을 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천하를 종횡하던 삼촌들의 힘에 그가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실제로 그의 삼촌들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빈 역전의 용사(勇士)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무법(無法)한 점이 많았고, 주원장은 그것을 알고도 그들의 공을
생각해서 대개는 눈을 감아주었었다.
하지만, 이제는 천하를 다스리는 상황.
시대가 변한 이상, 언제까지 그렇게 지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분란은 그렇게 해서
이미 처음부터 잉태되어 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혼란을 의미했고, 또한 천하의 풍운(風雲)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면 힘의 공백이 생기게 된다. 외곽을 돌아볼 여가가 없게
되는 것이지. 그 외곽을 노리고 북원(北元)이 일어난다』
『북원?』
『그렇다. 북원이다』
왕승고의 중얼거림에 구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은 빛을 뿜고 있었다.
초원의 영웅 징기스칸이 세운 원나라는 세조 쿠빌라이 대에 이르러 사상최강의
제국이 된다. 서기 1271년에 나라의 이름을 대원(大元)이라 이름한
쿠빌라이(忽必烈)는 1279년 남송(南宋)을 멸하면서 세계사에 일찍이 유래 없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초원을 떠돌던 원의 수도를 대도(北京)로 정한 것도 그였다. 원제국은
징기스칸에게서 시작되고 손자인 쿠빌라이에게서 정립되었다 할 수 있었다.
칸(汗)이라고 하는 칭호는 몽고의 원수(元首)를 의미한다. 테무진(鐵木眞)을
징기스칸(成吉思汗)이라 칭하게 된 것도 바로 그러한 의미다.
하지만 몽고의 칸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었다.
쿠릴타이(忽里勒臺)에서 인준을 받아야 비로서 대(大) 「칸」의 칭호를 받을 수
있었다. 쿠릴타이란 몽고의 부족연합체로서 부족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종친대의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쿠빌라이는 그 공동추천의 예를 깨뜨리고 자립하여 칸이 되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상황이 경쟁자인 아우 아리크부가(阿里不哥)에게 유리할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아우인 아리크부가가 즉각 반발하여 스스로 칸이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세조는 그를 평정하였지만 그로부터 원제국의 내부에는 갈등이 일어나게 되었고,
두고두고 후환이 되어 원제국의 멸망은 끝내 후계자 싸움에서 자초되었다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가 명에 쫓기다가 결국 응창부에서 죽었고,
황태자인 아이유시리타라(愛猶識理達臘)는 겨우 수십기의 호위만을 거느리고
도주했다.
그는 막북(漠北)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그후 이백년을 지속한 북원(北元)이다. 하지만 그 세력은 끝없는
분열로 인해 결코 지난날의 원제국과 같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칸의 정통은 이미
태조 주원장의 말년에 단절이 되었다.
『북원은 막북으로 쫓겨간 이래, 절치부심 칼을 갈고 있다. 명조에 내부혼란이
일어나면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게다』
『관련이 있으십니까?』
왕승고의 물음에 구대부인은 희미하게 웃어보였다.
『물론이다』
왕승고는 조용히 그녀를 보았다.
그의 어머니.
며칠전까지만 해도 존재조차 몰랐던 그의 어머니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었다.
일개 망국(亡國)의 왕비.
세월을 한탄하면서 눈물로 지새웠을 여인의 몸으로서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과감히
박차고 일어났다. 자식을 향한 모정(母情)마저 뒤로 하고 그녀는 나라를 되찾고자
그렇게 숨가쁜 세월을 헤쳐왔던 것이다.
그녀는 결코 큰 체구의 소유자가 아니다.
하지만 왕승고는 자신의 어머니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거대한 느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바람이 모질다.
하지만 대청안은 숨소리도 들릴만큼 조용했다.
『중원에 혼란이 일어나고 북원이 내려오게 되면 세상은 그야말로 혼돈에 빠지게
될게다. 그때, 만주벌에… 지난날 네 외할아버지가 되찾고자 그렇게 염원하셨던
우리의 옛땅 요동에 새로운 나라가 들어서게 된다』
구대부인의 말소리는 점점 열을 띠고 있었다.
『그 나라의 이름은 고려가 될 것이다! 나는 그 일을 위해서 지난 세월을 바쳤다』
번쩍! 콰콰콰-쾅!
밖에서 뇌성벽력이 요란하게 울었다.
『나는 이 일을 위해서 지난 세월 많은 준비를 해왔고 그때를 대비하여 만주에는
기반을 조성해두고 있다. 중원이 혼란에 빠지고 북원이 내려오면 명으로서는 결코
만주에까지 신경을 쓸 여가가 없다. 그렇게 되면 복국의 대계(大計)는 이루어질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구대부인은 코웃음쳤다.
『그때면 놈들은 자리 싸움에 만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신경 쓸 여가가 없을
것이다. 설혹, 그럴 여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들에게는 압록강을 넘어올 만한
배짱이 없다』
그녀의 말은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설사 그러고 싶다 할지라도 당시 조선조에는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그들이 말하는
대국(大國)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할 겨를이 없었다.
물론, 그것은 일년 뒤의 일(서기1389년)이지만 정난(靖難)의 변 또한 그해에
일어난 것이니 상황의 맞물려 돌아감은 심히 절묘한바 있었다.
『만주벌에서의 건국은 명과 북원 어디에도 피해가 별로 없는 일이다.
무주공산(無主空山)과 같은 곳이 지금의 요동벌이니까…. 하지만 곽장군이 갑자기
변을 당하는 바람에 상당한 차질이 발생했다』
문득, 구대부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가 계획하고 있는 일은 실로 대단한 심모원려(深謀遠慮)라고 할 수 있었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생각하지도, 생각하더라도 실천에 옮길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
정말 일개 여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있어야 명의 군사력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 대국을
우리가 주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은공의 실종에 이어 그까지 변을 당할
줄은…』
구대부인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고뇌가 깃들어 있었다.
『그 은공이란 분이 실종이 되셨습니까?』
『그렇다. 그렇지만 않았더라면…』
구대부인은 왕승고의 질문에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세워놓은 이 모든 계획의 기초는 그가 잡아준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승고를
명조에 종사시켜 그를 곽천수와 함께 명조의 문무 중심세력으로 키우자는 것과
제왕(諸王)들과 신 황제간의 갈등을 증폭시켜서 싸움을 붙이고, 거기에 더해
북원과의 교섭을 입안한 것도 그였다.
따지고 본다면 오늘날 구대부인의 모든 것은 그로 인해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전혀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그가 입안한 계획의 첫단계인 자금을 모으기 위해 구대부인이
인삼무역을 시작할때에 홀연히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백방으로 사람을 놓아 찾았지만 그분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이라도
그분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녀는 다시 말끝을 흐렸다.
그는 한 사람을 찾겠다고 했다. 그를 찾을 수만 있다면 막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것이 그녀가 그를 본 마지막이었다.
잠시.
아주 잠시 두 사람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대강 궁금한 점은 풀렸느냐?』
구대부인은 왕승고의 대답을 듣자 고개를 끄떡이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이 일은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그간 네게 일어난 일을 듣자. 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에 네가 이렇게 된 것인지…. 하마터면 너를 내손으로 죽일
뻔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나』
구대부인은 그날밤이 생각나는지 가볍게 전신을 떨었다.
왕승고는 지난 일을 하나하나 간추려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난 구대부인은 장탄식하였다.
『세상에 어쩌면 그런 일이 한꺼번에…』
그녀는 못내 안타까운 듯이 왕승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너를 만지기만 해도 중독된다는 것이 사실이냐?』
『그렇습니다』
왕승고의 손에 낀 사슴가죽 장갑을 내려다보던 구대부인은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구나. 이 모두가 이 어미가 너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 탓이다. 너를
내가…』
구대부인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 목이 메이는 듯했다. 가벼이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입매가 가늘게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복자를 낳아서 돌보지 못하고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모자의 정마저
끊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다. 그런데 이제 그의 앞에 선 아들의 모습을 보라. 사람
앞에 나설 수도 없는….
곽승고, 이제 왕승고가 된 그는 울음을 참기 위해서 입술을 깨물고 있는
구대부인을 향해 말했다.
『어머님의 잘못은 없습니다. 하루 아침에 장군부가 그러한 참변을 당할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제 운명이 이것뿐이라면 그도 운명일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회복할 길이 있을 겁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구대부인은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눈빛이 크게 일렁이고 있었다.
『곽장군이 너를 정말 잘키워주었구나…』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복수를 해서 영령을 위로해드리는 길뿐…』
왕승고가 이를 악물었다. 그 눈은 무섭게 빛나고 있었다.
『복수라니? 귀왕혈을 상대로 말이냐?』
구대부인이 놀란 얼굴로 왕승고를 보았다.
『그렇습니다. 장군부를 참혹히 유린한만큼, 그들에게 돌려주겠습니다』
『안된다. 그들은 쉽게 건드릴 수 없는 청부살인집단이다. 더구나, 그들은 청탁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자들이니 원한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다』
『누가 청부를 한 것인지는 그들을 쫓으면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제가
숨을 쉬는 한은, 귀왕혈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두고 보지 않겠습니다』
왕승고의 입매가 한일자를 그었다.
『……』
구대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그처럼 조용하던 아들이다. 가끔 먼발치서 보기도 했지만 늘 유약해보이던
아들이었다. 곽천수가 너무 약하게 키우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던 그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침착하고 부드러운 듯하던 그 태도는 일단 결정을 한 일에는 바위와 같았다.
그녀는 지난 세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했기에,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가능성이 있다 없다를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그녀의 아들 왕승고의 태도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요지부동의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집단이 아니었다.
『내가 알아보마. 과연 어떻게 손을 쓰는 것이 좋을는지… 그들은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자들이다. 이 시기에 정면으로 나서서 적으로 삼는 것은… 더구나 지금은
그보다…』
문득, 문쪽에서 기척이 들렸다.
『누구냐?』
구대부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장군충입니다』
『장호법? 들어오시오』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들어섰다.
왕승고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산에서 주고후의 일검을 피했던, 그날 밤에
장군부에서 만났던 장호법이라는 흑의중년인이었다.
그는 왕승고를 보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신 장군충이 몰라 뵙고 감히 옥체를 손상시킨 죄, 만사무석(萬死無惜)입니다!』
익숙한 태도일 리 없다.
『일어나시오. 당신 또한 나 때문에 죽을 뻔했으니 서로 비긴 것으로 합시다. 서로
상대를 모르고 한 일이니 무슨 잘잘못이 있겠소?』
거북해진 왕승고는 손을 저어 그를 일어나도록 했다. 이미 채노인에게 장군충이
구대부인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이고, 그가 실종된 자신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 밤을
세우면서 응천부를 헤매고 돌아다닌 것을 익히 안 다음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오?』
그가 몸을 일으킴을 보고 구대부인이 물었다.
『수상한 자들이 약포의 부근에 출몰하고 있습니다』
『수상한 자들?』
『어느 방면의 자들인지 알 수 없지만 이곳을 감시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아직 행동을 할 것같지는 않고 뭔가를 기다리는 느낌입니다』
『감시라고?』
아연 긴장이 감돌았다.
저녁때부터 돌변한 날씨는 밤이 깊어가도 여전했다. 저멀리 천둥이 울고
눈앞에서는 번갯불이 번쩍였다.
거기에 귀를 때리는 세찬 비바람 소리.
여조약포는 그 속에서 조용히 자리했다.
어느 순간인가, 검은 그림자들이 여조약포의 후원 담을 유령과 같이 넘기
시작했다. 움직임은 신속하고도 조용했다. 하긴 이런 날씨라면 활개를 치고
움직인다고 해도 종적이 드러날 염려는 별로 없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야행의를 날렵히 걸치고 우장(雨裝)까지 차린 상태였다. 그것은
그들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음을 의미했다.
『아무도 남겨두지 마라』
낮은 음성이 뒤를 따랐다.
검은 그림자들은 이미 묵계가 되어 있었던 듯 담을 넘으면서 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아, 아무도 없다!』
잠시후에 터져나온 실성.
『전원으로 가봐!』
몸을 날려 사라졌던 검은그림자들이 다시 돌아오면서 소리쳤다.
『전원에도 아무도 없습니다』
『이럴 수가…』
한 사람이 신음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회색빛단삼. 허리춤에 꽂힌 판관필 한쌍에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인. 그는
모산에 나타났던 백련교의 순찰당주 궁무혁이었다.
『감시를 어떻게 한거냐?』
『부, 분명히 아무도 나간 사람은 없습니다!』
그의 질타에 부하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궁무혁은 냉정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부하가 결코 바보가 아니고, 또한 볼 것을
못 볼 사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비밀통로가 있단 말인가?』
그가 신음할 때, 천지가 새파랗게 변하면서 번갯불이 하늘을 가르며 일어났다.
돌변한 날씨는 밤이 깊어가면서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아직도 위세를 잃지 않고
불어대는 바람에 밀려 휙휙 멀어져가는 구름 저멀리 달빛이 조금씩 어둠의 틈을
보고 있다.
응천부 외곽에 위치한 저택 하나.
당당했을 건축이지만 대문도 낡고 담장도 낡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세월이 깃들고
있었다.
그 대청에서 구대부인은 왕승고, 장군충과 함께 굳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이 정말 백련교의 사람들이란 말인가?』
『그런 것으로 보입니다』
장군충의 대답에 구대부인은 미간을 찡그렸다.
『알 수 없군. 무엇 때문에 백련교에서 약포를 공격해온 것이지?』
『아마 저를 찾아서일 겁니다』
『무슨 까닭에? 저들과의 관계는 미륵존자라는 자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느냐?』
『하지만 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미륵존자를 매우 꺼리고
있었고, 그가 죽을 때 옆에 있었던 것이 저이기 때문에 그가 죽기전에 제게 무엇을
남겼는지 매우 궁금할 수 있습니다』
『음…』
구대부인은 낮게 신음했다.
백련교가 어떠한 집단인지는 그녀도 익히 알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그들과
마주치는 것이 옳지 않음을 잘 알기에 여조약포를 버리고 미련없이 그곳을 떠나온
것이기도 하였다.
『그가 네게 남겨준 것이 있느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왕승고의 대답에 구대부인은 잠시 그를 보았지만 그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자
시선을 돌려 장군충을 보았다.
『그들이 다시 우리를 찾을 수 있겠나?』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겁니다. 약포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주공(主公)께서 부상한
몸으로 흔적을 남기고 왔기 때문에 가능했겠지만, 그들이 약포의 비밀통로를
발견한다 해도 그것으로 끝입니다. 다만 약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어차피 약포는 승고와의 연계를 위해 존재했던 것이니 미련을 갖지 않아도 될
것이오』
등잔의 불이 건들거리고 있다.
구대부인은 자신의 방에서 채노야와 마주앉아 있었다.
『정말 그렇게 힘들겠소?』
묻는 그녀의 얼굴은 납덩이와 같았다.
『제 식견으로서는 그렇습니다. 주공 체내의 독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 의선의
의술이 아니었다면 결코 지금의 상태로 살아 있는 것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다만…』
『다만 뭐요?』
『지금 주공 체내에 있는 독기가 묘한 힘에 의해 통제가 되고 있음이 한가닥
희망인데, 그로 인해 체내의 기혈과 경맥유주(經脈流走)가 온통 뒤바뀌어져 있어서
아직은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고쳐야 하오. 사람과 접촉할 수 없다면 우리의 염원인 고려의 복국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후사를 이어갈 수가 없을 텐데…』
『한가지 방법은…』
『방법이 있소?』
『독을 다루는 것에는 용독(用毒)과 해독(解毒)의 두 분야가 있습니다. 의선이
추천한 독왕은 바로 용독의 제일대가(第一大家)입니다. 그의 독공을 배운다는 것은
독인이 된다는 뜻이니, 바람직한 방법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 해독의 대가를?』
『그렇습니다. 일반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황산에 한 사람의 초부(樵夫)가
사는데, 그는 평생을 해독에 몸을 바친 사람입니다. 소신과는 일면식이 있기도
하거니와, 그는 또한 옛날 대륙에 진출했던 백제의 후손이기도 합니다』
『대륙백제의 후손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그가 승고의 독을 해소할 수 있겠소?』
『그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없습니다. 그때는 독왕을 찾는 수밖에
없겠지요』
『……』
왕승고는 자리에 누워 있었다.
근래에 들어 그는 시간만 있으면 천부경의 해의(解義)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잡념이 가득하여 천부경을 연구할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철이 들면서부터 곽천수에게 고려인임을 잊지 말도록 가르침 받았었다. 어릴 때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평생을 두고 잊을래도 잊을 수 없는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권문(權門)에 미움받아 고려를 쫓겨나다시피 하여 압록강을 넘어 때마침 불기
시작한 민중봉기에 휩쓸렸다가 백의종군하여 주원장의 일개 군졸로 시작했던
곽천수는 지닌바 능력으로서 승승장구하여 대장군의 지위에까지 이르렀지만 결코
고려를 잊지 아니하였다. 그가 조국을 잊었거나, 원망하고 있었다면 영비 최씨,
승고의 어머니 구대부인은 결코 승고를 그에게 맡기지 아니하였을 터였다.
그의 슬하에서 자라난 왕승고다. 만주벌에서 말을 달리던 고구려인의
웅혼(雄渾)함은 옛날 이야기를 듣던 어린 그의 가슴을 뛰놀게 하기에 충분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의 앞에 이야기로 들었던 그 일들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고려가 본받고자 했던 대고구려는 실로 위대했었다.
남북만주 전역에 걸친 강토는 몽골 일부를 포함하면서 한반도 예성강 이북을
판도로 한 동북아 최강의 대국이었다.
한(漢)을 압박하고 수양제(隋煬帝)의 2백만대군을 격파하여 수제국을 자멸케
하였으며, 당의 대군을 안시성에서 대파, 당태종이 외눈박이가 되어 구사일생
도주케 하였고 북위(北魏)를 복속국으로 하는등, 가히 용과 같고 범과 같은
나라였다.
삼국사기는 그 고구려가 서기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적고 있다. 고구려가 내부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나'당연합군에 망한 것이 보장왕 27년(서기 668년)이니, 대략
705년간을 누린 셈이 된다.
하지만 그 700년은 사대주의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그 연대를 신라와
맞추기 위하여(신라건국 서기전 57년) 190년을 끌어내린 것이라고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말하였다.
과연 그러한가?
만약 그렇다면 고구려의 역사는 700년이 아니라 무려 900년일 것이다.
증거는 많다.
당서(唐書) 「동이전」에 보면 『고씨(高氏)가 나라를 세운지 이제
구백년(高麗秘記曰 不及九百年 高氏自漢有國 今九百年)』이라 했다.
당서라는 것은 당나라의 역사서다. 그리고 당나라야말로 신라와 더불어 백제,
고구려를 멸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들이 고구려의 역사를 900년이라 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것은, 중국의 역사는 3대원칙을 철저히 지킨다는
점이다.
첫째가 위중국휘치(爲中國諱恥), 곧 중국에 관하여 수치스러운 기사는 숨긴다.
둘째가 존화양이적(尊華攘夷狄) 긍초이누이적(矜초而陋夷狄)이니, 중국은 높이고
외국은 깎아내린다. 셋째가 상내약외(詳內略外), 국내사는 상술하고 외국은
깎아내린다. 이것이 수천년을 두고 지켜온 3대원칙이다.
그러한 역사서가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 하고 있지만 김부식은 어떻게든
자국을 비하하기 위해서 고구려의 역사를 그렇게 깎아내렸다. 하지만 그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은 후일, 광개토대왕의 비가 발견되리라는 것이었다.
광개토대왕비는 그 아들 장수왕(長壽王)이 부친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서 만든
공적비다.
거기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왕(東明王.주몽)의 제17세손으로 되어 있는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12세손으로 5대를 깎아놓고 있다. 한 세대를 20년으로 보면
100년이고 30년이라면 150년이다.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오죽하면 단재 신채호가 일러,
『김부식은 성공하였으나, 조선이 쇠약에 빠지는 터전이 마련되었다』라고
탄식하였으랴.
그렇게 찬란한 겨레의 역사를 오욕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기 위해 눈물겹게
동분서주한 김부식이다. 하지만 그가 지은 삼국사기는 지금도 살아남아 일본의
입김에 조종을 받는 쓸개빠진 사학의 태두라는 자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주(註):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원제는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사(三國史)다. 그의 삼국사가 삼국사기로 개명을 하게 된 것은 일본의
장난이다. 그들은 일제치하에서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 20여만권의 사서를 모아
없앴다. 그리고 가장 그들의 마음에 드는 삼국사를 남겨두면서 그 제호를
삼국사기로 바꾸었다. 이유는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본기帝紀로 하고 삼국사를
제후적인 신속(臣屬)으로 격하시키기 위해서였다.
제왕의 일을 서술한 것이 서기(書紀)이며 신하의 일을 서술한 것이 소위
서기(書記)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사대(事大)를 걸고 출발한 김부식의 삼국사는 이렇게 이중의
오욕(汚辱)을 민족의 정신에 걸러붓고도 아직도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왕승고는 눈을 감았다.
그 찬란한 대고구려의 업적을 멸하고 당나라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간신히 반도 남단에서 삼국을 통일했다고 웅크린 신라. 그 신라를 무너뜨리고
대고구려를 본받고자 일어난 고려는 태조 왕건의 사후, 숱한 외란(外亂)에
시달리느라고 제대로 기를 펼 수가 없었다.
『묘청이 성공했었더라면…』
왕승고가 눈을 감은 채 중얼거렸다.
만약 그러했었더라면 그는 지금 이런 모습이 아니라, 당당한 고려의 왕자로 남아
있을 수 있었을는지도 몰랐다.
멸망한 전조(前朝)의 후예가 아니라 만주벌로 진출한 새로운 고려의 자랑스러운
후예로서. 아니, 어쩌면 중원을 넘보는 강대한 제국 고려의 왕자로서 말을 달리고
있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태조 왕건이 계획했던 서경(西京.평양)으로의 천도는 그가 죽으면서
무산되고, 북진정책 또한 그와 함께 구름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4대 광종때 중국인 쌍기를 등용하여 과거제를 실시하고 6대 성종때에는 최승로등의
유학자가 득세하면서 정치제도에 유교이념이 깃들기 시작하면서 존화(尊華)사상이
생기고 사대주의가 민족의 정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은 문물(文物)을 받아들이는 것이 단순한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 것인가를 웅변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되어 고려 제17대왕인 인종때에 이르러 요(遼)를 멸하고 송을 쳐 북송을
멸하는등 승승장구한 금(金)은 고려에 대해 칭신(稱臣)하고 복종의 징표로서
서표(誓表)를 제출할 것을 요구했다.
고려는 숙의 끝에,
『엎드려 생각건대 황제폐하. 지덕(至德)이 옛적 제왕들보다 높으시고 크신 믿음이
천하에 두터우시어… 속국이 감히 다른 마음이 있으오리까. 엄명이 이에 이르르매
감히 공손히 받들어 삼가 이 군신(君臣)의 의를 맺음에 당하여…』
라는 치욕적인 서표를 제출하였다.
그때에 주전파로 나선 것이 바로 묘청을 필두로 한 정지상'조광등의
국풍파(國風派)이다. 그들은 좁은 개경으로부터 천도하여 광활한 서경으로 옮겨가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자주성을 확립하고, 금나라를 쳐北伐 태조의 뜻을
받들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거의 굳어졌던 서경으로의 천도는 김부식등 유학파(儒學派)의 반대로
물거품이 된다.
그들로서는 감히 강대한 금국과 싸울 수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것은
사대주의 사상이 주는 폐해라 할 수 있었다. 부딪쳐 보기도 전에 겁을 먹는 것이다.
과연, 당시의 금나라는 막강했다.
『하지만, 그것은 요를 멸하고 송을 부순 금의 내면을 보지 못한
단견(短見)이었다』
왕승고는 몸을 일으켜 앉으며 중얼거렸다.
잠을 청하고자 하나, 잠이 오지 않는다.
창밖의 달이 유난히 밝다.
지난 세월이 마치 아득한 옛일만 같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진 것일까?
과연 지금 내가 듣고 안 일들이 다 사실인가? 아니면 장자(莊子)의 말대로 꿈에서
나비가 되었던 내가 깨어나서 과연 꿈에서의 나비가 나였던가, 지금의 내가 나비의
꿈속의 존재였던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인가…
달빛이 뜨락에 나선 그의 그림자를 길게 땅바닥으로 끌었다.
현실이다.
나는 나이고, 그는 분명히 이곳에 서 있는 것이다. 부인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운명이 그의 앞에 와 있었다.
스스로가 고려의 유일한 혈손(血孫)이라 하니, 이제 고려의 안타까웠던 일들은
끝없이 그의 뇌리에서 명멸했다.
그 당시(서기 1130년), 승승장구하던 금은 송의 명장 악비(岳飛)에게
정안(靜安)에서 대파당한다. 한번 미끄러진 군세는 계속해서 몰리기 시작하니,
다음해에도 또 그 다음해에도 악비와 오개(吳개), 오인(吳璘)등에게 연파당하여
금의 군세는 곤궁하기 이를데 없었다.
만약 그때 고려가 군세를 일으켜 금의 후방을 쳤었더라면 상황은 쉽게 장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해에 김부식은 묘청을 제거했다.
겸해서 그보다 문재(文才)가 뛰어났다고 공인받던 정지상까지 묘청일파와의 연계를
우려한다는 핑계로 참수하였다. 그가 그의 문명(文名)을 시기해서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북진파를 쓸어낸 김부식은 그때까지 그나마 황(皇)과 제(帝)에 걸맞게
지어져 있던 궁문과 전각들의 이름을 제후의 것으로 개명하는등 갖가지 문물을
금의 비위에 맞추는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 그의 삼국사이다.
*주(註):규원사화를 지은 북애노인은 서문에서 그의 삼국사를 이렇게 평하였다.
-괴이하다. 김부식은 2천년간의 성적(聖跡)을 전혀 쓰지 아니하고 해동 삼국의
것만을 기록하였다. 그는 『고기(古記)들이 거칠고, 무디며, 사적(事迹)을 많이
잃고 없어져 옛일이 아득하고 어지럽다』함으로서 그 책임을 모면코자 하였다.
그러나 세조(조선조)가 사적(史籍)을 널리 구함에 조대기, 고조선비기, 지공기,
삼성밀기등이 함께 나타났거늘, 김씨의 연대에 없었을리 만무하였을 것이다.
…묘청(妙淸)이 난을 일으켰을때에 그를 토멸한 자 또한 김부식이다. 그러한
김씨는 묘청의 난을 미워하여 그들이 주장하는바, 설(說)을 깊이 가리지 아니하고
붓대 끝에서 빼어버렸다. 발해사를 문유(問遺)하지 아니한 것은 이 또한 김씨의
허물이다. …김씨가 이미 한적(漢籍)에서 취하고, 또한 주체성이 없고… 그 처음과
끝을 모르는등, 무능할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의 화(禍)가 그 유래한바 이와같이 오래다. 이제 길이 탄식한들
아무 이익이 없으니, 이것을 장차 어떻게 할 것이냐…*
왕승고는 길게 한숨쉬었다.
고려인의 자긍심을 높이는 갖가지 교육을 곽천수에게서 받아온 그였다.
그는 자신이 고려인이라는 점에 대해서 단 한번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했다고 해야 옳았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거대한 짐이 그의 어깨에 올려져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왜 자지 않고 나와 있느냐?』
가라앉은 음성이 그의 뒤에서 들려왔다.
그의 어머니, 비운의 왕비 구대부인이 달빛을 받으며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왕승고의 말에 구대부인이 고개를 끄떡였다.
『무리도 아니겠지. 그런 사실들을 알고 어찌 편하게 잠이 오겠느냐?』
왕승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구대부인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기 때문이다.
『괜찮다. 네몸의 독이 지독하다 하나, 옷을 통해서까지 중독이 되지는 않는다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너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왕승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길을 볼 수 있었다. 물기를 머금은 눈길.
자애함이 그득한 그 눈길에는 참을 수 없는 안타까움이 사랑으로 찰랑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만은
반드시 고쳐주마. 이 어미의 모든 것을 걸고라도…』
구대부인은 입술을 물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십시오. 죽을 운수가 아니라면 살아날 수 있겠지요.
지금까지처럼…』
왕승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구대부인은 왕승고의 얼굴을 보았다.
갑작스러운 변을 많이 당해서일까?
문득문득 느끼는 것이지만 그의 말은 약관인 그의 나이답지 않았다. 나이답지 않은
무엇이 왕승고에게는 있는 듯했다.
암암리에 길게 한숨쉰 구대부인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일 아침, 채노인과 함께 이곳을 떠나도록 해라. 장호법이 너를 호위할 것이다』
왕승고가 자신을 바라보자 그녀는 계속 말했다.
『네 몸속의 독을 해독하기 위해서다. 황산에 해독의 명인이 있다고 하는구나.
그러니, 너는 내일을 위해 조금이라도 자두도록 하려므나』
『어머님께서는?』
『나는 같이 갈 수가 없구나. 곽장군의 돌연한 죽음으로 일이 틀어져서…』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제가 폐가 되는 것만 같습니다』
『무슨 소리냐? 이 일이 다 누구를 위한 것인데! 고려를 다시 세운다면 그 주인은
네가 될 것이다. 그런 너를 위해서라면 무슨…』
『주인은 제가 아니라 백성들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구대부인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들이 없다면 군주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의 성원을 얻지
못한 나라는 존재할 수가 없을 겁니다. 고려를 다시 세운다는 것 또한 그렇습니다』
『…』
뜻밖인지 구대부인은 잠시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을 그렇게 왕승고를 쳐다보던 구대부인은 안색을 굳힌채 물었다.
『네 말은 백성들이 원하지 않는다면 고려를 다시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냐?』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그런 말도 안되는…」
『어떠한 나라도 백성의 뜻을 저버리고 존재한 적은 없습니다.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은 그렇게해서 생긴 것입니다. 태조께서 건국하신 것도 그러했었습니다.
후삼국의 그 혼란한 정국을 바로잡아줄 사람이 나타날 것을 백성들이 원할 때였기
때문입니다』
말인즉은 다 옳다.
『하지만 너는 잊고 있는 것이 있구나.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다수가 아니라
힘있는 소수라는 점을… 네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곽장군은 너를 잘못 가르쳤다』
갑자기 구대부인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설마, 너는 이 어미의 고심(苦心)을, 아니 선왕의 그 참혹한 최후를 벌써
잊어버린 것은 아니겠지? 나라를 빼앗긴 그 불구대천의 원수를 설마 잊어버렸단
말이냐?』
『…』
왕승고는 입을 다물었다.
구대부인의 눈에서 얼음과 같은 빛이 쏟아졌다.
『나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맹세했었다!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이성계의 간을
꺼내고 쓸개를 씹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고… 그런데, 네가
그런 말을 한다는 말이냐?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제 말은…』
『듣기 싫다! 네가 그따위 생각을 하고 있다면 나는 정말 네게 실망을 금할 수가
없구나!』
구대부인은 말과 함께 소매를 떨치고 그 자리를 떠나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그렇게 화를 낼 것은 상상밖이었다.
왕승고는 잠시 멍청하게 서 있었다.
『이해하셔야 합니다』
문득 뒤에서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다.
채노야였다.
『그 분의 삶은 오로지 복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라를 되찾기 위한 일념으로
살아오셨지요. 거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함은 그분의 지난 삶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주군』
『알고 있습니다』
왕승고는 고개를 끄떡였다.
자신도 생각해두었던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득 그래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왜일까?
날이 밝았다.
대청.
구대부인의 앞에 왕승고는 서 있었다.
어젯밤의 일 때문인지, 의자에 앉아있는 구대부인의 얼굴은 조금 핼쑥해진 듯했다.
하지만 그를 보는 그녀의 눈길은 부드러웠다.
『공연히 저로 인해…』
구대부인은 왕승고의 말을 가볍게 저지했다.
『됐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구나.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겠다. 하지만 너를 믿고, 일생을 바쳐 따르고 있는 사람들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지하에서 너를 지켜보고 계실 선왕의 그 원한도…』
『예』
『더 늦기 전에 가보도록 해라. 곧 성문이 열릴게다. 네가 떠나는 것을 본 다음,
나도 가겠다』
『어디로 가십니까?』
『일단 만금전장의 제남총호로 간다. 연왕의 군자금을 준비해야 하니까』
『연왕? 그럼 정말 그가 반란을…』
『네가 돌아오면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도록 하자꾸나』
왕승고와 함께 그녀가 대청을 나서자, 뜰에는 채노야와 장군충이 그들을 기다리고
서 있었다.
『승고를 잘 부탁하겠소』
『심려마십시오』
채노야와 장군충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지난 밤 쏟아진 비로 인해 모든 것이 싱그러웠다. 풀잎도 꽃잎도 물기를 머금고
활짝 웃고 있었다. 자욱이 깔린 안개로 인해 아직 해가 뜨지 않은 것 처럼 하늘은
뿌연 빛이었다.
이른 아침이지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헤치고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두 마리의 준마가 끄는 그 마차의 어자석(馭者席)에는 삿갓을 쓴 장한이 앉아 말을
몰고 있는데, 그는 바로 장군충이었다.
왕승고는 마차 안에서 창문 휘장틈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조금만 더 가면 성문이다.
그럼 응천부를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채노야는 아마도 그가 감회에 젖어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다보다 하고는 눈을 감은
채 모른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이 지나고 있는 이 길 건너편 저쪽으로 바로 방가대원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만감이 교차하지 않겠는가.
그가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방가대원의 높다란 대문이 시야에 나타났다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방가대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왕승고는 휘장을 내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련하게 가슴이 아파왔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일는지도 몰랐다.
금방이라도 말을 멈추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것인가?
따가닥따가닥…
말발굽 소리는 무심했다.
* * *
똑!
창가에 내놓았던 난에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졌다. 난간에 부딪친 물방울은
산산이 부서져 흩어졌다. 난은 물기를 머금고 싱싱해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방약란은 그렇지 않았다.
장군부에서 입었던 상처는 이제 거의 아물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의혹이
그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그였을까?
방약란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젯밤에도 장군부에 다녀왔지만 발견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다.
『아가씨, 노마님께서 오셨습니다』
문이 열리고 비단옷을 입은 호호백발의 할머니 한 사람이 시녀 둘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거침없는 몸짓. 나이가 칠십이 넘었어도 허리조차 굽지 않은 정정함.
바로 이 방가대원의 제일 어른인 노마님인 것이다.
괴장을 짚은 것은 권위를 세우기 위함이지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적어도
방가대원과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할머니』
방약란이 일어서자 노마님은 시녀의 부축을 뿌리치고는 손을 저어 그녀들을
물리더니 성큼성큼 걸어와 고개를 내밀고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어딜 다녀온 것이냐?』
『무슨…?』
『이 할미를 속일 생각은 마라. 어젯밤! 자정이 넘어서 어딜 다녀온 것인지
말이다』
『그건…』
『바른대로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겠다! 지난번에는 온몸에 피칠을 하고
나타나서 사람을 혼비백산시키더니, 이젠 다 큰 계집아이가 야밤에 혼자
돌아다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쾅!
노마님이 사납게 괴장을 구르며 눈을 부릅떴다.
방약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실은…』
『뭐라고?』
방약란의 이야기를 들은 노마님은 어이가 없는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니까, 네 말은 그날밤 장군부에서 만난 그 봉두난발의 괴인이 승고였단
말이냐?』
『틀림없어요』
『그건 말도 안되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변할 수가 있단 말이냐? 더구나,
하루이틀 사귄 처지도 아닌 네가 몰라 보도록 변한다는 것을 지금 이 할미에게
믿으라고?』
『그만 두세요. 그러시면서 뭘 말하라고 다그치세요?』
방약란이 고개를 젓자, 노마님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래서 네 말은 어젯밤에도 그 괴인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장군부에 다녀왔다는
것이냐?』
『그래요』
『말도 안되는…』
노마님은 말끝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공연히 방약란에게 트집을 잡힐까
저어한 것이다.
그때.
『대야께서 드셨습니다』
말과 함께 방효유가 나타났다.
『아니, 자네가 이 아침에 어떻게 여기까지 온건가?』
그를 본 노마님의 얼굴이 환해졌다. 방효유야말로 그녀의 자랑인지라 그가 등과한
이래 그녀는 한번도 그에게 말을 놓은 적이 없었다.
『일찍 입궐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문후드리러 갔더니, 이곳으로 오셨다고 해서
들렀습니다. 네 몸은 어떠하냐?』
방효유가 방약란을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이젠 다 나았습니다』
『다행이로구나. 아직도 어디서 그처럼 심한 상처를 입었는지 내게 알려줄 수
없겠느냐?』
『그건 장군부라네』
『장군부…』
노마님의 말에 방효유의 입이 벌어졌다.
『무슨 소리냐? 장군부라니…』
그가 방약란을 바라보았다.
* * *
황궁(皇宮).
방효유는 굳은 얼굴로 자신의 앞에 있는 금의위의 교위 용대해를 보고 있었다.
그는 막 그날 밤의 전모를 그에게서 들은 참이다.
그의 말은 방약란에게서 들은 것과 조금도 틀림이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방약란이
말한 것이 더 자세했다. 용대해가 본 것은 처음부터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약란의 말은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었다.
『한가지만 묻겠소. 용교위. 사람의 모습이 친인이 몰라볼만큼 갑자기 변할 수
있겠소?』
『무슨 뜻입니까?』
『그날 나타났던 괴인이 장군부의 곽공자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오』
『그런… 어디서 그런 말을 들으셨습니까?』
용대해의 눈이 커졌다.
『가능성만 알려주시오』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무림중의 사람이라면 화신역용(化身易容)하여
삽시간에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괴인은 그런 것 같지는
않았고 뭔가 지독한 시련을 겪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습니다. 만약 그가 정말
장군부의 곽공자라면 그는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어떤 시련을 겪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으음…』
방효유는 신음했다.
사태는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방약란의 말은 모두 사실임에 분명한 것같았다.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장군부의 유일한 생존자인 곽승고는 살아있으면서도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이 사실인 듯 하였다.
결국 그는 용대해에게 곽승고일 가능성이 있는 그 괴인을 찾으라는 부탁을 하고
일어섰다.
황제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제태와 황자징은 이미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을터였다. 삭번의 움직임은 그들의
생각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고, 오늘은 연왕에 관한 의논을 하기 위해서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 * *
행로는 순탄했다.
마차는 쉬지 않고서 달려 강소성을 벗어나 안휘성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틀 정도만 더 달리면 황산(黃山)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 채노야의
말이었다.
그렇게 말을 달리는 동안, 왕승고는 채노야와 장군충등이 모두 구대부인을 따라
고려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고려를 떠난 구대부인은 가히 혈혈단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삼무역을
시작하면서 은밀히 탐문하여 고려에 대한 충신들을 포섭하였고 그들도 그때,
고려의 복국을 위해 기꺼이 고향을 떠나왔던 것이다.
구대부인의 측근에는 그러한 사람들이 상당한 듯했다. 하지만 일의 사정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조금씩 상황을 알게 되자 왕승고는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일이 정녕 사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산은 이름높은 명산이다.
안휘성에 자리한 이 산은 주위가 삼백여리에 이르는 대산맥이다. 그러한
산이니만큼, 산으로 오르는 길도 한가닥은 아니다.
경사 응천부를 떠난 지 닷새가 되는 날, 왕승고가 탄 마차는 황산 어귀에 이르고
있었다.
그간 마차를 몬 것은 장군충이었지만 마차는 경사를 떠날 때의 그 마차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변고를 대비해서 중간에서 두 번이나 마차를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탄 마차가 황산어귀에 접어든 것은 미시(未時)초였다.
하오의 태양이 따갑게 대지를 달구고 있는 관도를 달려온 마차를 몰고 있던
장군충은 길가에 서있는 주막을 보게 되었다. 어차피 황산으로 들어서면 어두워질
때까지 어떻게 될지 몰랐다.
주막은 볼품 없었다.
차양 하나가 나뭇가지 사이에 걸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서너개의 탁자가 놓여져
있다. 나무그늘 아래에도 두어개의 탁자가 더 있었다. 그리고 주방인 듯한 초가
한채.
그래도 산바람에 술 주(酒)자를 아로새긴 다 떨어진 누런 깃발은 기세좋게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나무그늘에서 졸고 있던 주인은 오십대 후반의 중늙은이였다. 그는 마차가
들어오자 신바람이 나서 달려왔다.
술을 시키지 않자 자못 실망한 눈치이던 주인이 국수와 만두를 그들의 탁자에다
가져다놓고는 입이 한발이나 나와서 물러갔다.
그의 기색을 보고 왕승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주인이 실망한 모양이오』
『돈이 안되니까요. 술에 안주를 시켜야 장사가 되죠』
『은제곡(隱濟谷)은 얼마나 가야 됩니까?』
장군충이 채노야에게 물었다.
『이제 황산 경계에 들어왔으니까, 잘하면 오늘 밤중으로 들어갈 수 있을거요.
하지만…』
『하지만 뭡니까?』
장군충의 되물음에 채노야가 미간을 찡그렸다.
『워낙 가본 지가 오래 되어서 쉽게 찾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소 그려』
그때였다.
빠른 말발굽 소리가 관도에서 들려왔다.
이내, 흙먼지가 일면서 눈처럼 흰 백마 한필이 나타났다. 백마의 속도는 놀랍도록
빨라서 흙먼지가 저쪽에서 인다 싶은 순간에 이미 주막에 당도해 있었다.
가뿐하게 백마에서 뛰어내린 기수(騎手)는 뜻밖에도 일신을 푸른빛 경장으로 두른
여자였다. 그녀는 말을 매놓고는 왕승고의 일행과 조금 떨어진 나무그늘 아래 있는
자리에 앉는 것을 본 주인이 황급히 달려갔다. 그녀의 어깨 위로 솟아오른
검자루에서 나부끼는 검수(劒綬)를 보았기 때문이다.
『어서오십쇼, 뭘 드릴까요?』
『제일 좋은 술과 안주를 준비해. 당장 되나?』
『그럼요!』
주인은 보라는듯 왕승고쪽을 힐끗 보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사라졌다. 이내 닭잡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왕승고는 쓴 웃음을 지으며 무심결에 그녀를 보았다.
차양이 달린 모자를 썼다. 그리고 그 차양에는 면사가 드리워져 있어서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왕승고는 그녀가 빼어난 미모를 지닌 미녀임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안력이 비상해진 것은 미륵존자의 자하독공을 자신의 것으로 한
다음에 생긴 일신상의 변화중 하나였다.
푸른빛 경장을 하고 등에 한자루 보검을 멘 그녀의 얼굴은 모란과 같이
아름다웠다. 그린 듯한 아미와 호수 같은 눈, 앵두 같은 입술 등, 미인을 지칭하는
형용사에 하나도 어긋나지 않는… 나이는 불과 스물도 되지 않은 듯했다.
그의 시선을 느꼈기 때문일까?
음식을 시키고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왕승고에게 시선을 돌리다 그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찡그리더니 싸늘히 코웃음쳤다.
그 주제에…
그런 의미가 명백했다.
이유야 어쨌든 여자의 얼굴을 바라본 것은 그인지라 왕승고는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돌렸다. 이런 때에 문득 방약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주인은 손이 빨랐다.
언제 요리를 한 것인지 금세 닭으로 만든 안주와 술등이 푸짐하게 탁자에
차려졌다. 하지만 경장의 여인은 술 한잔에 안주 한점씩을 집어먹고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은 그대로 남았다.
『왜? 맛이 없으십니까?』
주인이 무색한 얼굴로 달려왔다.
『아니, 바쁜 일이 있어서… 혹시 내가 떠난 다음에 나를 찾는 사람이
나타나거든…』
경장의 여인은 뒷말을 주인에게만 낮게 말하더니 은자를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의 입이 더할나위 없이 째졌다.
그는 왕승고를 힐끗 보곤 냉소를 치면서 말에 올라 그곳을 떠나는 그녀를 향해
허리가 부러져라고 연신 절을 해댔다.
『재신(財神)이로군! 재신이야!』
그는 함박웃음을 머금고는 손에 쥔 은자가 진짜 은인지를 깨물어 확인하면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왕승고와 일행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그때였다.
경장의 여인이 그곳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아 급박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이어, 관도에 흙먼지가 크게 일면서 다섯필의 건장한 말들이 나타났다. 건마
다섯필은 쉬지 않고 달려 금세 주점을 스쳐지나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가시지요』
장군충의 말에 왕승고가 고개를 끄떡이고 몸을 일으킬 때, 다시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흙먼지가 일면서 아까의 말 다섯필이 다시 주점의 앞에 나타났다.
말들은 먼길을 쉬지 않고 달린 것을 말하듯이 전신이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주인장! 주인장!!』
마상의 기수중 하나가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소리쳤다.
그들은 모두 삼사십대의 건장한 대한이었다. 날렵한 무복에 먼지를 뒤집어쓴
그들의 허리에는 창과 활, 검등이 걸려 있어 무사들임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예, 예! 어서 오십쇼!』
주인이 황망히 집안에서 달려나왔다.
『혹시 말을 탄 여자 한 사람을 보지 못했소?』
입을 열었던 마상의 기수가 다시 물었다. 그의 나이는 서른이 조금 넘어보였는데
눈빛이 날카로웠다.
『여자? 혹시… 푸른빛의 경장을 하고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협(女俠)
말씀이십니까?』
주인이 눈을 껌벅이며 되물었다.
『봤단 말이오?』
『그럼요! 이곳을 떠난 지 얼마되지 않았는걸요』
『어디로? 어디로 갔소?』
『그, 그게…』
주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의도는 명백하다. 알고 싶으면 돈을 내라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헉?!』
주인이 눈을 부릅뜨면서 목을 치켜들었다.
어느새 그의 목에 시퍼런 빛을 뿌리는 단도(單刀)가 바짝 붙어 있었던 것이다.
단도라는 것은 일반적인 칼(刀)에 비해서 폭이 좁고 얇다. 다시 말해서 예리하다는
의미다.
그 단도가 사정없이 그의 목을 치켜올리고 있어 이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목을
바짝 들지 않으면 금세라도 목이 잘라질 판이었다.
처음 입을 연 장한의 옆에 있던 구렛나루에 고리눈을 가진 장한이 언제 뽑았는지
단도를 그의 목에다 바짝 붙이고 음산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셋째형님은 성미가 좀 급하다. 서툰 짓을 한다면 당장 네 목을 쳐서 탁자 위에다
올려 놓을지도 몰라. 나도 말릴 수가 없지…』
예의 장한이 주인을 보고 차갑게 웃었다.
주인은 그의 눈이 뱀눈과 같다고 생각했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저쪽으로…』
그는 황급히 더듬거리며 손가락질 했다.
그가 가리킨 방향은 좀전 경장의 여인이 떠난 바로 그 방향이었다.
그 모양을 보고 왕승고와 장군충등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상황을 보아하니 아마도 그 여인이 주인에게 돈을 주고 거짓말을 시킨 모양인데,
상대가 워낙 사납자 혼비백산하여 그대로 모든 걸 토해내는 듯했기 때문이다.
『좋아. 하지만 그 말이 거짓이라면…』
예의 장한이 손에 쥐고 있던 말채찍을 사납게 휘둘렀다.
찰나, 귀청을 찢는 파공음이 들림과 함께 채찍에 맞은 주막의 깃대가 수수깡처럼
부러져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져버렸다.
그 광경을 보자 주인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곳이 아니라 저, 저쪽! 저쪽입니다. 소, 소인놈이 도, 도,
돈을 받고…』
그는 반대쪽을 가리키면서 하얗게 질려서 머리를 싸쥐고는 바닥에 꿇어 엎드렸다.
학질에 걸린 듯이 덜덜 떠는 그를 내려다본 장한들은 회심의 미소를 짓고서
마주보더니, 이내 말고삐를 당겨 주인이 마지막에 가리킨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말발굽 소리가 사라지자 엎어져 있던 주인이 고개를 쳐들었다. 놀란 빛은 있으되,
방금 전까지의 그 공포에 떨던 모습은 아니었다.
『정말 귀신 같은 계집이네. 그 놈들이 이렇게 나올 거까지 알다니…』
머리를 설레설레 젓던 그는 왕승고의 일행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보자 입을
다물었다.
왕승고와 채노야등은 묘한 기색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주인의 기색으로 보아 경장여인은 아마도 이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그에게
지시했었던 것이 분명했다.
주막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서자 더 이상 마차를 모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어차피 산을 타야 할테니 말은 놓아주기로 합시다』
마차를 버리고 말만 몰고 가던 왕승고 일행은 말까지 산에다 놓아주었다. 운이
좋으면 돌아올 때 다시 탈 수 있다.
시원한 바람이 선들선들 땀을 식히기 좋게 불어왔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들도 붉게 물들어 있어 가을이 깊어감을 느낄 수있었다.
황산은 서른여섯 봉우리로 유명하다.
그중 제일봉인 천도봉(天都峰)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 명산이었고,
천암만학(千巖萬壑)한 산세 가운데 운해(雲海), 석해(石海), 송해(松海)의
황산삼해(黃山三海)는 천하에 이름높은 절경이다.
운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구름의 바다이고, 석해라고 하는 것은 황산의 돌들이
기경을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송해라는 것은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솔의 바다로
출렁임을 의미한다.
『황산의 송해가 유명하다더니… 대단하군요』
왕승고가 주위를 돌아보며 감탄했다.
보이는 모든 것들이 다 푸른 솔의 합창이었다. 푸른 바다가 눈아래에서부터 펼쳐져
있었다.
『이곳의 솔은 상품(上品)은 아니지요. 황산 송해의 진면목은 사자림(獅子林)에
가야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버릇은 어쩔 수 없다.
채노야의 말에 왕승고의 입에서는 줄줄 대구가 흘러나온다.
『석해는 산화오(散花塢)에 가야하고 운해는 문수원(文殊院)에 가야 제격이라,
불상문수원 황산미견면(不上文殊院 黃山未見面)이고 부등사자림
황산미견종(不登獅子林 黃山迷見종)이란 말은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겠지요?』
채노야가 손을 들었다.
『노신이 잠시 주공께서 머리속에 천하를 담고 계신 걸 잊었었군요』
쓴웃음이 왕승고의 입에 떠올랐다.
『버릇이란 건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오』
『안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을 올려다본 장군충이 입을 열었다.
『은제곡까지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글쎄… 반나절은 족히 걸리겠지. 시신봉(始信峯)을 지나가야 하니까 우리
걸음이라면…』
『소생이 노야를 부축하지요』
장군충이 채노야의 팔을 잡았다.
『괜찮소. 약초를 캐러 산속을 내집 드나들 듯하던 나인데, 무슨 부축을…』
채노야가 고개를 젓자 왕승고가 입을 열었다.
『반나절이라면 해가 질겁니다. 되도록 빨리 가는 것이 좋겠지요. 산속의 어둠은
빨리 다가올테니』
『그럼 주공께서는…』
『내 걱정은 말아요. 오면서 계속해서 장호법에게 무공을 배웠잖습니까? 내 한몸
따라가는 건 문제없을 겁니다』
『음…』
채노야가 낮게 신음했다.
그의 의도(醫道)는 고심했지만 무공은 하지 못했다.
결국 그는 장군충의 부축으로 산을 타기 시작했고, 왕승고는 부지런히 몸을 날려
장군충의 뒤를 따랐다.
그는 황산에 당도하기까지 마차 안에 틀어박혀서 놀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틈만
나면 장군충에게 무공에 관한 것을 물어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객잔에 들어 잘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무공이라 함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내공(內功)과 외공(外功)이다.
외공이라 함은 수련함으로 얻어지는 힘을 말한다. 검을 휘둘러 법을 익히고 나무를
치면서 주먹을 단련하는 것들이 바로 거기에 속한다.
얼핏 구분이 모호한 듯하지만 각목따위로 몸을 쳐서 신체를 단련하는 것도
외공이다.
그러나 내공은 다르다.
그것은 정신력의 결정이다.
호흡을 통해서 천지간의 기(氣)를 받아들여서 체내의 정기신(精氣神)을 길러
공(功)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수련한 방법이나 환경에 따라 그 성취는 무한히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왕승고는 나약하게만 자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가의 수련이라는 것은 검을 연습하고 권을 단련하는 것인지라 그가 배운
것은 기본적인 권각과 십팔반병기의 사용법에 불과했다.
전장(戰場)에서는 그것이 통할는지 모르지만 무림중의 내가고수에게 있어 그것은
어린아이의 장난과 같음을 왕승고는 절감한 터였다.
그는 시간이 나는 대로 장군충에게 내가(內家)의 도리(道理)를 들었고 내공을
어떻게 수련하고 사용해야 하는가를 들었다.
총명한 그였다.
더구나 그는 전과는 달리 배워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공을 절실히 필요로 하기
때문에 전심전력을 다했다. 진경(進境)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채노야의 손을 잡고서 몸을 날리고 있는 장군충의 뒤를 거의 뒤지지 않고서
따르고 있었다.
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의 체내에는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미륵존자에게서 얻은 자하독공이 잠재해 있는 터였다. 그는 무림중의
고수인만큼 그의 평생공부는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괴노인에게서 배운 천부신공의 묘용은 지금의 왕승고로서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세는 점점 더 깊어졌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산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암암리에 왕승고를 눈여겨본 장군충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이 전해준 능풍신법(凌風身法)을 그렇게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따라올
것은 상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암중에 고개를 끄떡였다.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그들의 앞에서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산길은 숲을 지나고 있었다.
거기에는 백마 한필이 투레질을 하고 있었다.
눈에 익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백마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을 가로막듯이 선 다섯명의 중년인들. 대감도에
대부(大斧;큰도끼)까지 들었으니 자못 기색들이 흉흉하다.
게다가 시뻘겋게 핏발이 곤두선 눈. 제대로 빗지 않아서 제멋대로 뻗친 머리카락등
산도둑놈의 형상이 역력했다.
『감히 내 앞을 막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을 한 모양이로구나?』
경장여인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앞서의 웃음소리 또한 그녀의 것인 듯했다.
왕승고는 그녀와 십여장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묘한 인연이었다.
죽어라고 달려온 것이 하필이면 그녀의 뒤라니.
『크카카카… 고것 앙탈을 부리는 것도 제법이로군! 하긴 계집이란 튀기는 맛이
있어야지. 가랑이만 벌리고 있으면 뭔 맛이겠나?』
『맞아! 요년은 가랑이에 살이 올라 그맛이 그만이겠는거…왁!』
맞장구를 치던 자가 피를 뿌리며 나뒹굴었다.
방금까지 입맛을 다시던 그의 머리통이 피를 쏟아내면서 바닥에서 공처럼 구르고
있었다.
산도적 넷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싸늘한 기색으로 경장여인이 검을 거두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가 언제 등에 메고 있던 검을 빼는지 보지 못했다.
더구나 언제 동료의 목을 쳐날린 것인지.
『이, 이년이…!』
그중 두목인 자가 대감도를 움켜쥐면서 콧김을 내뿜었으나 그뿐이었다.
그는 감히 더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의 목젖에 이미 경장여인의 검이 파고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다. 피가 목줄기를
타고 진땀처럼 흘러내렸다.
『한번 더 말해봐라. 이년이 어떻다고?』
경장여인이 검을 거의 목젖에다 겨눈채 싸늘히 웃었다.
『여, 여협…』
두목이 눈을 희번덕거리다가 수중의 대감도를 버리고는 두손을 들었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자신의 상대가 아님을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눈을 쑤시고 싶었다.
어쩌자고 이런 여마(女魔)의 말을 걸어 쓰러뜨려서 이런 화를 자초했단 말인가.
『네 눈을 쑤시고 싶겠지?』
그의 심중을 짐작한 듯이 경장여인이 싸늘히 웃으며 물었다. 검은 여전히 그의
목젖에 대고 있는 채였다. 그녀의 뒤에서 세명의 대한들은 주춤거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예, 예! 여협을 몰라 뵙고 이 놈이… 으악!』
황급히 고개를 끄떡이던 두목이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경장여인이 정말로 그의 눈을 검으로 쑤셔버린 것이다.
『소원대로 되었으니 만족하겠지? 하긴 사람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눈을
남겨두어 무슨 소용이 있겠어? 흥!』
눈을 감싸쥐고 바닥에 나뒹구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경장여인. 그녀의 눈길이
자신들에게 향하자 세명의 대한은 주춤 한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싸늘한 눈을 느낀 그들은 다음 순간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돌려 도주했다.
차가운 웃음소리.
그리고 꼬리를 잇는 비명.
푸른 빛이 번뜩이는 사이에 세명의 대한은 마치 휴지조각처럼 날아올라 눈을
감싸쥐고 있는 두목에게로 떨어졌다.
검으로 그들을 쳐 날리는 것을 본 장군충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단한 검기(劍技)로군』
검으로 사람을 베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저렇듯 검으로 사람을 베지
않고 쳐서 날려보낸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왕승고 또한 잇달아 경변(驚變)을 겪으면서 안목이 틔어 경장여인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아이고오… 여협 살려주십시오!』
이미 혼백이 다 날아간 산도적 네명은 일제히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두목도
마찬가지였다. 눈 하나가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을 냉정히 쏘아보면서 경장여인은 싸늘히 웃었다.
『왜? 이젠 내가 맛있어 보이지 않느냐?』
『제, 제발… 저희들이 죽을 때가 되어 고인을 몰라뵈었습니다. 제발…』
산도적들이 머리를 땅에다 박았다.
『정말 살고 싶으냐?』
『무, 물론입니다. 살려만 주신다면…』
『좋아. 살려주지. 하지만 너희들끼리 싸워서 이긴 자 하나만 살려주겠다. 강자만
살아남는 거지. 단, 상대를 살려두면 안된다』
산도적들이 섬뜩한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왜? 싫은가?』
경장여인이 싸늘히 웃음을 터뜨리자 갑자기 산도적중의 하나가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주먹으로 옆에 있던 자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싸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난 널 살려두겠다고 한 적이 없다! 다만 강자가 살아남을 거라고 했을뿐"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격전.
방금까지도 동료였던 상대를 죽이기 위해 그들은 미친 듯이 싸우고 있었다.
왕승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의 눈길을 받은 장군충이 고개를 저었다.
『방법이 잔인하긴 하지만 도움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입니다. 한 짓에 걸맞은
최후지요. 굳이 시비에 말려들 필요없으니 그만 가시지요』
『…』
왕승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그 순간에 싸움은 끝이 났다.
피투성이가 되어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자는 외눈박이가 된 두목이었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의 밑에서 깔려서 살려달라고 외치는 부하의 가슴에다 전혀
망설임없이 대감도를 찔러넣고는 의기양양하여 경장여인을 바라보았다.
『여협…!』
그의 말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 순간에 경장여인의 검이 그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크윽! 왜…?』
그가 두눈을 휘번득이며 의혹에 찬 눈길로 경장여인을 쏘아볼 때, 그녀가 싸늘히
웃으며 말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 동료조차 돌보지 않는 자가 살아남을 가치가 있을까?』
『이, 더러운 년…약속을 해놓고…으악!』
처절한 비명이 그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그의 심장 깊숙이 검이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난 널 살려두겠다고 한 적이 없다! 강자가 살아남을 거라고 했을 뿐. 혹,
모르지… 너희들이 서로 싸우지 않았다면 목숨만은 살려두었을는지』
짚단처럼 무너지는 두목을 뒤로 하고 경장여인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찰나, 싸늘한 검광이 번뜩이면서 그녀의 신형이 왕승고 일행이 몸을 숨기고 있는
곳으로 덮쳐왔다.
쨍그렁, 쨍!
날카로운 음향이 잇달아 터져나오면서 왕승고등의 앞을 장군충이 막아섰다. 그의
손에도 어느새 예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자신의 공격을 장군충이 막아낸 것이 의외인 듯 경장여인은 싸늘한 눈길로 그를
보더니 이내 코웃음쳤다.
『제법 실력이 있군! 그러니까 감히 내 뒤를 따라왔겠지?』
말과 함께 그녀는 다시 검을 들었다.
『우린 당신의 뒤를 따른 것이 아니오』
왕승고가 앞으로 나섰다.
『주공! 위험합니다』
장군충과 채노야가 실색하여 그를 가로막았다.
『됐소. 우리가 이 소저의 뒤를 따르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가
있단 말이오?』
그의 태도에는 은연중에 책벌레의 말투가 남아 있어서 경장여인은 묘한 눈길로
그를 다시 보았다.
어딘지 부자연스러운 생김이다. 하지만 다시 보니, 그의 눈은 깊고 조용해서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그녀는 검을 거두었다.
『믿어주도록 하지』
한마디.
그것과 동시에 경장여인은 바람과 같이 몸을 날려 이장여 떨어진 백마위에
올라섰다.
『이랴!』
백마가 산길을 마치 평지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잔인한 솜씨에 과단성까지. 무림중에 저런 여고수가 있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장군충이 미간을 찡그리면서 팔뚝을 거머쥐었다. 그의 손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부상을 입었소?』
왕승고가 놀라 묻자 장군충이 고개를 저었다.
『대단치 않습니다. 그녀가 우리를 죽이고자 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었을는지
모르겠군요. 우선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 좋겠습니다』
왕승고 일행이 그곳을 벗어나자 남은 것은 주검 다섯 구뿐이었다.
사방에서 야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산속의 어둠은 생각보다 더 빨리 찾아왔다.
이미 사물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날은 어두워진 상태였다. 게다가 날씨도 좋지
않았다. 금세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달도 보이지 않았다.
워낙 구름이 많은 곳이라 비가 쏟아지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한 곳이었다.
결국 왕승고 일행이 찾아든 것은 버려진 절간.
모닥불을 지펴놓고서 채노야는 입맛을 다셨다.
『아침이면 바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전에는 정신이 이렇지 않았었는데…』
『잘 아는 길이라도 밤이 되면 찾기가 힘들지요. 더더구나 산속인데』
왕승고가 웃으며 그의 계면쩍음을 달랬다.
『그보다 장호법의 상처는 괜찮소?』
『염려마십시오. 뼈는 상하지 않았으니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장군충 팔의 부상은 의외에도 심각했다. 그것은 경장여인의 검이 그만큼
무서웠다는 의미.
탁탁…
모닥불이 조용히 불꽃을 튕기고 있었다.
그런데, 요기를 하고 벽에 기대 있던 왕승고가 갑자기 눈을 떴다. 장군충이 긴장된
표정으로 검을 잡은 것도 그때였다.
절은 크지 않았다.
겨우 형체를 유지한 대웅전.
그리고 그 좌우에 반쯤 무너진 몇몇 전각과 허물어져 간신히 흔적만 유지하고 있는
담장등이 밤안개에 잠겨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안개는 상당히 짙었다.
운해(雲海)가 아니라, 가히 무해(霧海)에 잠겨있는 느낌. 하도 짐승들의 소리가
요란한지라, 대웅전 한쪽에 버려져 있던 향로에다 나뭇가지들을 집어넣고 모닥불을
지폈었는데… 그러고보니 언제부터인가 풀벌레들의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다.
왕승고와 장군충의 움직임에 의아한 표정으로 채노야가 뭐라고 입을 열기
직전이었다.
끼걱…
낮은 울림이 뒤쪽에서 들려왔다.
채노야의 입이 벌린 채 굳어졌다. 누군가가 낡은 마룻바닥을 딛는 소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가 긴장된 빛으로 고개를 트는 순간, 뒤쪽이 아니라 대웅전의 앞쪽 부서진
문으로 한 사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희뿌연 안개가 흐르는 가운데 나타난 사람은 손에 은은한 빛이 흐르는 검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얼굴을 가린 복면속의 눈이 얼음처럼 차갑다.
장군충이 일어나 왕승고 등의 앞을 막아섬을 보자 그는 눈을 휘둘러 대웅전의 안을
쓸어보았다.
그가 한걸음 안으로 들어서자 장군충이 낮게 소리쳤다.
『멈춰라!』
순간, 복면인이 앞으로 덮쳐오면서 대뜸 손에 있던 검을 휘둘러 장군충을
공격해왔다.
빨랐다.
쨍!
날카로운 음향.
그리고 나직한 신음과 함께 복면인이 훌쩍 뛰더니 대웅전 밖으로 뛰쳐나갔다. 뒤를
이어 들리는 예리한 호각소리.
『그대로 계십시오!』
한마디를 남겨놓고서 장군충이 몸을 날렸다.
『무슨 미친 짓이야? 저자가 누구길래 다짜고짜 우릴 공격하는건가?』
채노야가 어안이 벙벙해서 눈을 꿈벅였다.
하지만 그는 왕승고가 그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이면서 뒤쪽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다시 입을 다물어야했다.
이번에는 그도 들었다.
잔뜩 억눌린 듯한 나직한 신음.
밤이 아니고 긴장된 상황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뒤이어 뭔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말리는 채노야를 안심시키고 대웅전의 뒤쪽, 거미줄과 먼지로 범벅이 된
불감(佛龕)의 뒤로 간 왕승고는 거기에 쓰러져 있는 사람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불감 뒷벽 한쪽이 허물어져 있었다. 아마 좀 전의 소리는 그가 그 쪽으로
숨어들면서 난 것인 듯 했다.
그는 주저앉은 채 가슴을 움켜잡은 채로 벽에 몸을 붙이고 있었는데 왕승고를 보자
검을 쥐면서 눈을 빛냈다. 공격할 태세였다.
『나는 당신을 해칠 사람이 아니…!』
손을 들어보이던 왕승고의 말끝이 흐려졌다.
몸을 일으키던 그가 신음과 함께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았던 것이다. 그리고
토해내는 가쁜 숨.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그는 사십대의 대한이었는데, 첫눈에 강인함을 느낄 수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슴을 움켜쥔 손가락사이로 흘러내리는 피만으로도 그가 심상치 않은
상태임을 삼척동자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살아있는 것이 용하군…』
왕승고의 뒤에 와서 고개를 내민 채노야가 중얼거렸다.
그 말에 대한이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는 어둠속임에도 불구하고 정광이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맞소. 난 이미 대소 십오개소의 검상을 입었고 특히 이 가슴의 상처로 인해
삼대주맥이 모두 끊긴… 쿨룩! 상태요…. 당신들이나 어서 이곳을 벗어나시오.
놈들은 누구든 살려두지 않을테니까』
바로 그때였다.
『저…!』
왕승고가 돌연 소리쳤다.
중년대한의 뒤쪽 허물어진 벽으로 복면인 하나가 불쑥 고개를 내미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과 동시에 복면인은 냉소를 터뜨리면서 검을 휘둘러 중년대한을 찔러가고
있었고, 대한은 어디에 그런 힘이 남아있었던 것인지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면서
검을 휘둘러 그를 공격했다.
쨍! 째앵…
날카로운 부딪힘의 소리와 함께 신음이 뒤를 이었다. 중년대한의 손에서 검이
벗어나 날아갔다.
피할 곳도 없는 좁은 공간이다.
일단 검을 떨어뜨리자 상대의 검을 피할 방도가 없었다.
사정없이 복면인의 검이 대한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찰나,
『노옴!』
대한이 노호를 터뜨리면서 손을 들어 일장을 쳐냈다. 그 일장은 그의 일생공력이
깃든 것으로 복면인은 미처 피할 생각도 못하고 거기에 격중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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