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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8주일설교 시편84:1-12
본문: 시편84:1-12
제목: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오늘은 시편84:1-12의 말씀을 가지고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 제목이 무엇입니까?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지난주 친구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이런 상황에 모일 수 있느냐고
카톡 방에서 물었습니다.
비상 계엄이 실시가 되면
모든 모임은 모일 수 없게 됩니다.
모임 뿐 아니라 예배도 드릴 수 없게 됩니다.
몇 시간 만에 그 상황이 해제가 되어서 다행이지
생각하기도 싫은 끔직한 일이 벌어질 뻔 하였습니다.
저는 두 번의 비상계엄을 만나보았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이 광주 의거를 진압하려고 했을 때와
이번 윤석열 대통령이
뭔지 모를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전두환 대통령 당시에는 길거리와 대학과 공공장소에
무장한 군인들이 총에 대검을 꽂고 서 있었고
독재자의 맘에 안드는 사람들은
다 잡아가 죽도록 때리고 강제 노역을 시켰으며
제가 잘 아는 후배의 아버지도 잡혀가
맞아 죽고 돌아와 장례를 치렀고 관을 들었습니다.
그런 것을 겪었기에 비상계엄이
얼마나 끔찍한 일이고 무서운지 압니다.
그런데 44년만에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독재자들인 이승만과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이 했던 일을
윤석열 대통령이 행하여 온 백성들을
충격과 두려움과 불안에 빠지게 했습니다.
다행히 살아 있는 민주 시민들이 있어서
그 일이 멈추어졌고 평온하게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없도록 기도해야 하고
우리나라가 그런 혼란한 나라가 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는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바른 정신으로 내 개인의 이익이 아닌
내 기분이 아닌 나라와 역사 앞에 바르고 정의로운 자를
투표하여 선출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제가 할까요?
오늘 시인의 상황을 생각해서 그렇습니다.
이 시인은 지금 성전에 나갈 수 없습니다.
무슨 형편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절기 때나 무슨 일이 있을 때 찾았던 성전에 갈 수 없어
그저 멀리서 가고 싶은 간절함으로 가지고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1.성전에 대한 사모(1-4절)
1-4절은 성전을 그리워하며 사모하는 내용입니다.
“그는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라고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주의 장막은 아주 사랑스러운 곳이었습니다.
그는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며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는 언약궤와 관련된 하나님의 칭호입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고자
만들어 지성소에 두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게서 성전을 만들고
그곳에 언약궤를 두게 하신 것은
만군의 하나님, 천지와 천지를 넘어서 계시는 분이지만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언약궤를 두라고 하시고
함께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 곧
하나님의 장막의 아름다움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내 영혼이 여호와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사람의 전 존재를 말합니다.
그는 모든 존재가 성전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무쳐서 괴로워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과 육체는 인간의 전체를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하여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나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고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에 대한 열정이
마음과 몸을 포함한 인간의 전 존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전 존재를 다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형식적일 수 없고 무엇이 아까울 수도 없고
온전히 헌신적으로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시인은 3절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라고 부릅니다.
‘나의’ 라는 1인치 소유격 표현은 시인과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하나님과 매우 가깝기에 그에게 나가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나 좋고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자유롭게 나가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너무 안타깝고 힘들기에
나가고 싶은 사모함으로 쇠약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전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참새와 제비를 언급합니다.
우리 교회도 많은 새들이 주변에 있고
제비가 집을 짓고 살기도 합니다.
참새나 제비는 연약한 짐승입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있다고 부러워하겠습니까?
별로 부러운 것이 없는 짐승입니다.
하지만 단지 그가 성전에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부러워합니다.
그곳에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본 기억이 있는 시인은
그것이 부러움이 되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가까이 나가
자유와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이
부러워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짐승들이 부러울 정도니
성전에 사는 사람들, 성전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사람이 얼마나 부럽겠습니까?
하나님의 집에서 보호를 받으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부러운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지금 이렇게 예배 드리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기쁘고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코로나 때 어떠했습니까?
지척에 두고도 우리는 만나지 못했고
우리는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정부가 감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쟁이 있거나 비상 계엄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2) 성전 순례자의 기쁨(5-7절)
5-7절은 성전을 순례하는 자들의 기쁨을 묘사합니다.
5절에서 시인은 “성전에 사는 자들의 기쁨”(4절)과
“성전 순례자들의 기쁨”을 서로 연결시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사는 자들 레위인이나 제사장들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예배를 통해서 용서함과 위로와 기쁨을 얻게 합니다.
그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기 때문에 기쁨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은혜를 바라고 성전을 찾아오는 순례자
예배를 통해서 죄 사함과 위로와 기쁨과
평화를 얻으러 오는 순례자는 기쁨이 있습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대로는 시온의 성전에 이르는
큰길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 대로가 있습니다.
참으로 귀한 일이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로 나가길 사모하는데
그 길이 대로로 열려 있으니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성전 순례자들은 하나님께로
향하는 순례의 길을 사모합니다.
그 길을 걸어서 하나님께로 나간다면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일들 곧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함과 복을 하나님이 부어주시기 때문에
그 길을 대로로 하나님께 간다는 것은
참 기쁨이 벅차는 일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런 자들, 이런 길을
갈 수 있는 자들이야말로 “행복자”라고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그런 행복자입니까?
이렇게 주일마다 나와서 하나님께 나와
예배 드릴 수 있음이 행복임을 선언하고 있습니까?
6-7절에서 시인은 순례의 길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순례자들은 “눈물 골짜기”를 지나 간다고 말합니다(6절).
눈물의 골짜기는 말 그대로 고통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예배하러 오는 길은 목마름과 고통을 주는
골짜기를 지납니다.
하나님께 나오는 신자들의 삶이 그러합니다.
주님 앞에 예배 드리러 나오는 성도님 들의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목마름과 고통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런 일을 겪으며 살았고
그러한 상태에서 예배하러 나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 속에서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 고통의 여정에서도 많은 샘과
이른 비의 복을 받았습니다.
골짜기를 지날 때 샘은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
그리고 이른 비는 여름 동안 가뭄으로 고통을 당했는 데
이른 비가 와서 해갈을 합니다.
이 얼마나 큰 위로며 힘이 되겠습니까?
우리는 삶 속에서 그런 은혜를 받고 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와 감사하며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례자들은 거룩한 시온에
다가갈수록 더 힘을 얻습니다.
일반적 여행자와 달리 하나님을 찾아가는 순례자들은
여정 중에 지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기에 그렇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며 가는 달음박질도 걸음도
곤비하지 않고 피곤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앙망하며 가는 길이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그리워하며 가는 길은
힘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지치거나 곤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하나님 앞에 나가길 원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여러분은 그런 은혜 안에
하나님 앞에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길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길에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왕을 위한 간구(8-9절)
찬양하던 시인은 간구를 시작합니다.
오늘 시편의 유일한 간구입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기도에
귀 기울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간구에 등장하는 야곱은 이스라엘의 조상으로서
수많은 흠결을 갖고 곤경을 겪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은혜로 돌봐주셨습니다.
시인은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통해
이와 동일한 돌봄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많은 야곱을 돌보아 살게 하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자신들도 문제가 있지만
돌보아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나와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할 수 있습니다.
무슨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고
간구를 동시에 바치는 자리입니다.
9절의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이여”는
“우리 방패를 보십시오. 하나님”으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방패는 왕을 가리킵니다.
또한 방패는 기름 부으신 자
곧 기름 부음을 받은 자와 동일시 됩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시인의 간구가
결국 왕을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우리가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대통령을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대통령이 잘해야 백성들이 평안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보고 있습니다.
대통령 하나 때문에 세계적으로 조롱을 받고 있으며
경제나 여러 가지 상황들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백성을 공의와 정의로 통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소리를 내야 합니다.
왕이나 대통령은 백성을 공의로 재판하며
가난한 자를 정의로 재판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왕이나 대통령을 위한 기도는
결국 백성들을 위한 곧 우리를 위한 기도가 됩니다.
4)성전에서 누리는 기쁨(10-12절)
10-12절은 성전의 기쁨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궁전에서 한 날과
다른 곳에서 천날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순례자로서 예배하는 하루가
성전이 아닌 곳에서 지내는 천일보다
더 낫다고 고백합니다.
성전이 아닌 이 세상에서 기쁨이 있고 영광을 누리고
권력을 누리는 것일지라도 성전에서 지내는 날이
천배나 더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경제적 풍요나 권력의 누림이나
세상 사람들의 칭송보다 더 함을 알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합니까?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 시간이
여러분이 드리는 기도 시간이
여러분이 드리는 말씀을 읽는 시간이
여러분이 믿음의 형제들과 나누는 교제의 시간이
그렇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서 누리는 것보다 1000배 이상으로 좋아하십니까?
그런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시인은 더 말하고 있습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합니다.
악인의 장막은 궁궐일 수도 있고
멋진 집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전 문지기로 하찮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성전에 문지기이기에
그것이 더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미쳤다고 할 일입니다.
그런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를 누려본 사람은 맞아 맞아 하면
이구동성으로 말할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에 사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성전에 갈 수만 있다면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만 있다면
비록 성전 문지기라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 문지기는 성소 앞에 오래 동안 서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는 서서 안내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예배 다 드리고 나서 드리게 될지라도
그래도 예배 드릴 수 있으니
악인의 장막에서 편안하게 사는 것보다
성전 문지기로서 불편할지라도
그것이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그런 은혜가 있습니까?
비록 내 몸이 약하여 힘들고
여러 가지 불편하지만
하나님께 예배 드린다는 사실이 좋다고 말하십니까?
11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해와 방패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태양으로
표현된 유일한 본문입니다.
해와 방패는 보호를 의미합니다.
시인은 성전에서 하나님이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베푸신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은혜가 있기에 성전의 하루가
세상의 천날보다 좋고
그런 영화를 누릴 수 있기에 성전 문지기가
악인의 좋은 집에서 있는 것보다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행복한 자라고 찬양하며 이 시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시간과 공간을 통하시지 않고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상에 존재하시면서 이 땅에 임재하고 계신
하나님을 뵙기 위해 정기적으로
그분이 머무시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아갑니다.
우리가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나가는 것은
심오한 의미에서 모두 순례에 해당합니다.
오늘 나누는 시편 84편은 순례의 시입니다.
순례는 밖에서 안으로, 지방에서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평범한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일상적인 관심사에서 거룩한 관심사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쳇바퀴 같은 일상사에서 벗어나 정기적으로
거룩한 성소로 입장하는 순례의 삶을 통해
삶을 반성하고 정화함으로써
새롭고 거룩한 에너지를 얻습니다.
11절의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서
‘행하다’는 단어는 본디 ‘걷다’라는 뜻을 지닌 표현입니다.
여기에는 이중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성도를 향한 순례자의 발걸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삶을 가리킵니다.
성소에 계신 하나님은 정직하게 살아가는 자에게
복을 아낌없이 부어 주십니다.
순례자의 삶은 정직으로 채워집니다.
따라서 순례자의 동반자는 정직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는 정직하게 행하는 자입니다.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입니다.
노아는 당대에 완전한 자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입니까?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그 어떤 것보다 앞서
정직하게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삶입니다.
그것이 예배를 통해서 이루어야 할 일이며
예배드리러 나오는 순례자의 모습입니다.
그런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