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 불려간 날
공무원의 복무에 관한 규정에 공가가 있다. 공가는 공무원이 예비군훈련이나 민방위교육 등 국가의 부름을 받아 근무지를 벗어나서 용무를 보는 경우다. 요즘은 선거 시 개표 업무가 자동집계기로 신속하게 처리된다만 예전엔 개표사무종사원으로 밤을 새운 적도 있다. 근래 공가를 써 본 기억이 없는데 어느 날 창원지법으로부터 내가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후보라는 통지를 받았다.
여태 살아오면서 경찰서는 한 차례 불려가도 법원엔 한 번 가 볼 일 없었다. 경찰서에 출두했던 일은 십여 년 전 어느 고교 학생부장으로 공무 출장인 회의 참석이었다. 이번에 창원지방법원으로 불려간 일은 최근 도입된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후보 선정 기일 참석이었다. 정한 시각 법원 대회의실에 나갔더니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 40여 명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환되어 있었다.
법원에서는 불러들인 사람들의 신분을 확인하고 성명을 대신하는 번호를 부여했다. 법정으로 이동하니 검사와 변호사가 착석하자 법정 경위의 알림에 따라 재판장과 좌우배석 판사가 입장하였다. 재판장 주재로 배심원을 추첨하였는데 나는 세 번째로 추첨되어 배심원석으로 옮겨 앉았다. 검사와 변호사는 배심원들에게 몇 가지 청문을 하고 두 사람이 교체되면서 배심원은 확정하였다.
배심원 선정에서 제외된 사람들은 소정의 여비를 받고 먼저 돌아갔다. 배심원 7명과 예비 배심원 1명은 당일 재판이 종료될 때까지 법정에서 재판진행을 지켜보고 배심원 평의를 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형사 합의부 재판정은 세 판사가 내려다보는 곳에 젊은 여 검사와 두 변호사가 마주 앉았다. 배심원석은 검사석 뒤고 피고인석은 변호사석 옆이었다. 일반 방청석도 있었다.
피의자는 삼십대 후반으로 군청소재지에 거주하는 운수회사 기사였다. 그는 지난 어느 봄날 밤늦은 시각 자기 집에서 가까운 동창회 사무실에 자동차로 이동하다 할인매장과 창고 사이를 지나다가 전방주시 부주의로 보행하던 한 노인과 자동차 앞부분에 부딪혔다. 운전자와 보행자는 둘 다 가벼운 음주를 한 상태였다. 접촉사고 후 둘은 현장에서 가벼운 실랑이를 벌인 모양이었다.
피해자는 경찰서로 가자하고 피의자는 음주 사실이 드러나면 어렵게 취직한 회사에서 쫓겨날까 봐 겁이 났던 모양이었다. 피의자는 가까운 데서 옷가게를 하는 형님의 도움으로 일을 수습해보고자 경찰서로 가자는 피해자를 태워 옷가게로 갔단다. 경찰서를 지나야 옷가게로 사고지점과는 1킬로미터 이내였다. 옷가게 앞에 도착한 피해자는 곧장 경찰서로 달려가 사건을 접수시켰다.
피의자는 한 순간의 실수와 판단착오로 도주차량, 특수폭행, 특수감금 등 꽤 무거운 범법행위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피의자의 성장기는 참 딱했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출이후 큰아버지 큰어머니를 친부모로 알고 사촌형님과 사촌누나를 친형제로 알고 자랐다. 시골 고교를 나와 군복무를 마치고 중소도시를 전전하며 일자리를 찾아도 여의치 않아 귀향했다.
귀향 후 한동안 택시를 몰다가 버스회사 정식 직원이 되어 한 달 150만원 박봉으로 보증금 몇 백만 원 영구 임대주택에서 살아가는 네 식구 가장이었다. 네 살과 일곱 살 두 딸은 국가로부터 받는 보육비로 근근이 키우고 있었다. 전치 3주 진단을 받은 피해자와 합의한 600만원은 새마을금고에서 사촌형님을 보증인으로 세워 대출받았다고 했다. 본인의 건강도 별로 좋지 않았다.
피의자는 변호사 도움을 받을 형편이 못 되어 국선변호인이 변론을 맡았다. 두 젊은 변호사는 얼마 되지 않을 수당에도 세상 물정 어두운 피의자를 적극 변론하는 모습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법률가를 보았다. 재판장을 비롯한 좌우배석 판사나 검사도 우월적 지위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엄숙한 권위는 있되 겉치레 권위주의는 찾아볼 수 없는 낮은 자리로 내려온 법정이었다. 13.8.26
창원지방법원 형사합의부 재판장님께
저는 2013년 8월 26일 창원지법 형사법정에서 도주차량, 특수폭행, 특수감금 혐의 피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국민참여재판 배심원 후보로 소환되어 배심원의 한 구성원 선정되어 당일 합의부 형사재판 공판 절차 평의에 참여한 주오돈입니다.
먼저 재판장님과 좌우배석 판사님을 비롯한 재판을 진행해 주신 관계자님께서 사법정의를 구현하려는 의지에 경의를 표합니다. 검사님께서도 온기가 느껴지는 따뜻한 논고에 배심원의 한 사람으로 고맙게 생각합니다. 두 분 변호사님께서도 약자 편에 서서 직분에 충실한 변론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피고인이 저지른 죄가 가볍지 않으나 여러 정상을 참작하셔서 검사님께서는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구형하셨고, 재판장님께서는 징역 8개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하셨습니다. 재판부의 선처로 피의자는 구금되지 아니하고 가정과 생업으로 돌아갈 수 있음은 배심원의 한 사람으로 마음이 놓였습니다.
피고인의 특수한 가정사와 현재의 처지도 그리 넉넉하지 않는 형편이 안타깝습니다. 어렵게 취업한 운수회사 기사를 그만 두면 가족의 생계가 막연하고 가장의 실직과 방황은 또 다른 사회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곳이 군청소재지이긴 하나 피고인이 할 만한 일거리가 많지 않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관계 법령을 잘 모릅니다만 이번 일로 피고인 실형을 선고 받았기에 운전면허가 취소되고 회사에서 쫓겨날까 걱정입니다. 재판부에서 형의 집행을 유예한 선고 취지를 살려 피고인이 취업해 있는 회사 사주에게 경비나 청소 등 허드렛일이라도 하도록 추천해 주시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재판장님을 비롯한 관계자님들은 다른 일도 많이 쌓여 바쁘실 줄 사료되오나 이번 일로 처벌 받은 피의자가 사회 낙오자가 되지 않도록 마음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피의자가 몸담고 있던 운수회사 사주에게 해고하지 말고 다른 일거리라도 맡겨 주십사고. 저보다 재판장님이 부탁한다면 가능할 법한 일인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청탁으로.
2013년 8월 27일 주오돈
첫댓글 의령인의 한 사람으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