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술꾼’ 윈스턴 처칠과 ‘샴페인 금발미녀’ 오데트의 로맨스 |
폴-로저 샴페인과 처칠 마티니 |
김원곤| 서울대 의대 교수·흉부외과 wongon@plaza.snu.ac.kr |
오늘날 베르무트 병을 한번 쓱~ 보면서 마시는 것으로 유명한‘처칠 칵테일’과 유명 샴페인 회사 폴 로저(Pol-Roger)의 마담 오데트와의 만남으로 탄생한‘처칠 샴페인’은 그가 얼마나 위대한 술꾼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의 20, 30대는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그 윗세대는 ‘굵은 시가를 입속 깊숙이 물고 마치 불도그같이 찡그린 얼굴에 손으로는 승리의 ‘V’ 사인을 그리는 사람’하면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히틀러에 대항해 연합군의 승리를 이끈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이 바로 그 사람이다. 처칠의 대표적인 사진에서 보이는 시가 흡연 장면과 불도그를 연상시키는 얼굴, 그리고 승리의 V 사인은 오랫동안 대영제국의 강인함과 여유로움을 과시하는 상징이었다. 실제 처칠은 세계 각종 매체가 선정하는 역사상 위인 목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단골 인물로, 2002년 영국 BBC가 100만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면 술 얘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처칠의 인생을 조망해보자.
윈스턴 처칠은 1874년 영국의 명문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독립성이 강하고 반항적인 성격이었던 그의 학교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탓인지 1893년 삼수 끝에 샌드 허스트의 왕립사관학교에 힘들게 입학했다. 처칠은 당시 보병 대신 기병 병과를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기병이 보병에 비해 의무 취득 학점기준이 낮았고, 기병 병과에서는 그가 싫어하는 수학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94년 12월 졸업할 때는 150명 중 8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전쟁 특파원으로 높아진 명성…결국 총리까지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한 그는 일반적인 진급 과정을 거치기보다는 실제 전쟁 현장을 체험하고 이를 글로 기록하기를 원했다. 이를 위해 부모의 사회적 지위를 최대한 활용해 전쟁터에서의 직책을 구했다. 당시 그의 역할은 오늘날의 ‘전쟁 특파원’과 같은 것이었는데, 전쟁터에서 경험한 내용을 신문에 기고함으로써 처칠은 대중적인 관심과 함께 상당한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처칠의 첫 해외 근무지는 1895년에 파견된 쿠바였다. 당시 스페인군과 쿠바 게릴라 간 전투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는데, 처칠은 영국 신문에 전선 상황을 기고했다. 이때 처칠은 그의 평생 기호품 중의 하나인 시가에 빠져들었다. 1896년 10월 처칠은 당시 영국의 지배 아래에 있던 인도 봄베이로 전출된다. 그곳에서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 파슈툰 부족과 영국군이 벌인 격렬한 전투에 직접 참가해 그 경험을 기사로 섰다. 그리고 훗날 이를 책으로 출판했다. 1898년에는 이집트로 파견된다. 처칠은 그곳에서 다시 수단으로 가 실제 전투(옴두르만 전투)에 참전하는데, 이때도 전쟁 특파원으로서 전황을 신문에 기고했다. 그리고 1898년 10월 런던에 돌아가서는 이때의 경험을 책으로 정리해 이듬해 출간했다. 1899년 5월 처칠은 실질적으로 군 생활을 그만두고 정계 진출을 꿈꾸면서 보수당 후보로 보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만다.
처칠 생애의 가장 큰 전기는 그해 남아프리카에서 발발한 제2차 보어전쟁(1899~1902)에서 마련된다. 1899년 10월 모닝포스트 특파원 자격으로 보어전쟁에 참가한 그는 어느 날 적에게 포로로 잡힌다. 그러나 처칠은 수용소에서 기회를 엿보다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일약 ‘영국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이듬해 총선에서 한 번 낙선했던 올덤 지역구에서 보수당 후보로 나서 당선된다. 이후 처칠은 낙선과 당선 등 여느 정치인들과 같은 정치적 부침을 거듭하게 되고, 1904년에는 반대당인 자유당으로 당적을 바꾸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발발할 당시 처칠은 해군장관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한 작전의 실패에 대한 일종의 문책성 인사로 장관직을 그만둔다. 얼마 후 그는 대령 신분으로 전쟁에 참전했고, 전쟁 이후에는 정치 활동을 계속하면서 1925년 다시 보수당에 합류한다. 1930년대 초 정당 내 알력 때문에 수년간 정치 활동을 쉬게 되었는데 그 기간에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 당시 가장 원고료가 높은 작가 중 한 명으로 인정받았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1939~45)이 발발하면서 처칠은 1차 세계대전 때처럼 다시 해군장관에 임명된다. 그리고 1940년 5월 체임벌린 수상이 전시내각의 임무 수행이 제대로 되지 않은 데 대해 책임을 지고 사임하면서 처칠은 마침내 총리직을 맡게 된다. 이후 영국 본토에 대한 독일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이 승리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에 대한 영국 국민의 지지도 그만큼 높아졌다.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필력
그러나 전후 실시된 영국 총선에서 처칠의 보수당은 패배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처칠이 전쟁 영웅이었지만 국민은 전후 평화적인 국가 재건에는 처칠의 보수당이 맞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후 6년 동안 야당 지도자로 일한 처칠은 1951년 보수당이 다시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총리로 재집권한다. 처칠의 두 번째 총리직은 1955년 4월까지 계속됐다. 이 기간 식민지의 독립 등 영국의 국제 위상이 예전과 달라지면서 고전하게 되고, 개인적으로도 뇌졸중 증상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지면서 말년에는 휠체어를 타고 국회에 등원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1965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세계 각국에서 조의를 표했다.
이처럼 처칠은 세계적인 정치가이자 군사전략가, 뛰어난 웅변가라는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지만 이와는 사뭇 다른 면모들도 있다.
첫째는 그림과 문학에 대한 재능이다. 그는 뛰어난 화가였다. 실제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 상당한 작품이 남아 있다. 그의 그림은 유화 작품으로 주로 경치를 그린 것이었다. 처칠은 그림 그리기를 통해 일생 동안 그를 괴롭혀온 우울증 증세를 극복하려고 애썼다는 얘기도 있다.
처칠을 더욱 유명하게 만든 글쓰기 재능도 빼놓을 수 없다. 처칠은 일생 동안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여주었는데 앞서 말한 수많은 신문 기고문 이외에도 한 권의 소설, 두 권의 전기(傳記), 회고록, 그리고 여러 편의 역사물을 집필했다. 그런데 사실 그의 이러한 열정적인 집필 활동 배경에는 경제적인 동기도 있었다. 그는 상류층인 집안 배경과 높은 사회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생활이 사치스러운 편이어서 늘 돈이 아쉬웠다. 게다가 처칠의 활동 당시 영국에서는 하원의원이라 하더라도 1946년까지는 아주 적은 명목상 보수만 받았기 때문에(1911년 이전까지는 명목상 보수도 없었다), 처칠뿐만 아니라 많은 의원이 다른 직업을 통해 수입을 충당했다. 아무튼 처칠은 이런 글쓰기를 통해 더욱 명성을 얻어, 마침내 1953년에는 그의 대표작인 총 6권의 ‘제2차 세계대전(The Second World War)’ 등을 포함한 저작 활동을 높이 평가받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이런 문학과 예술적 측면보다 대중적으로 훨씬 덜 알려진 것이 그의 술에 대한 사랑과 에피소드다. 처칠은 사적이나 공적인 자리를 가리지 않고 거의 매일 술을 마시다시피 했는데, 점심에는 주로 맥주를 마시고 저녁에는 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거나 샴페인 등 다양한 술을 즐겨 마셨다. 당연히 술도 센 편이어서 취한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는 술에 관한 관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말을 남겼다. 바로 “나는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로부터 얻었다”(I have taken more from alcohol than it has taken from me)였다. 이는 세계대전이라는 척박한 현실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그의 개인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가히 ‘위대한 술꾼’의 반열에 오르기에 손색이 없는 표현이라 하겠다.
최고 경지의 드라이 마티니 ‘처칠 칵테일’
이런 ‘위대한 술꾼’에게 술에 대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없을 수 없을 터. 그중 하나가 이른바 ‘처칠 마티니’(Churchill Martini)라고 하는 칵테일 레시피다. 그는 대단한 ‘드라이 마티니’ 애호가로, 마티니를 주문할 때는 혹시 바텐더가 몰래 베르무트(Vermouth)를 타지 않을까 염려해 자기가 볼 수 있도록 베르무트 병을 바에 세워놓고 진(Gin)만을 가지고 만들게 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처칠 마티니로, 오늘날은 이 칵테일(사실은 진을 그냥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을 마시면서 베르무트 병을 한번 쓱 보는 것으로 베르무트를 탄 것으로 대신하는, 최고 경지의 드라이 마티니 레시피로 소개된다. 그러나 처칠의 술에 얽힌 수많은 일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낭만적인 것은 역시 유명한 샴페인 회사 폴 로저(Pol-Roger)의 마담 오데트와의 만남일 것이다.
오데트 폴 로저(Odette Pol-Roger·1911~2000) 프랑스 파리에서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랑스의 이름난 장군이었다. 1933년 오데트는 부친이 파리 동쪽에 있는 작은 도시 에페르네에 근무하고 있을 때, 그곳에 본사를 둔 유명 샴페인 회사 폴-로저(Pol Roger)의 창업주 손자인 자크 폴-로저(Jacques Pol-Roger)를 만나 결혼한다. 이후 폴-로저사의 샴페인 마케팅에 적극 참여한 그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남편 가문과 함께 독일군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후원했다. 비단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오데트 자신이 자전거를 타고 12시간 걸리는 파리까지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번은 독일 게슈타포에 붙잡혀 취조를 당하기도 했다.
1964년 남편 자크 폴-로저가 사망한 이후에도 오데트는 폴-로저사의 경영에 계속 참여했으나 점점 원예 등의 취미 생활에 심취하면서 안온한 노년을 보냈다. 그녀는 이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젊은 시절부터 대단한 미모를 자랑했는데, 그녀의 별칭인 ‘샴페인 금발미녀’(Champagne Blonde)가 이런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다.
오데트가 처칠을 처음 만난 것은 1944년 연합군의 파리 수복 후 영국대사관에서 열린 한 파티에서였다. 당시 주(駐)프랑스 영국대사 쿠퍼(Alfred Duff Cooper·1890~1954)로부터 처칠을 소개받은 오데트는 그의 정중한 매너와 사려 깊은 태도에 큰 감명을 받았다. 처칠 역시 젊고 매력이 넘치는 미모의 프랑스 여인에게 호감이 갔다. 사실 처칠은 이전부터 폴-로저 샴페인을 즐겨 마셨는데, 이날 제공된 1928년산 폴-로저 샴페인은 모임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이날부터 당시 70세의 처칠과 33세의 오데트는 도버해협을 사이에 둔 우정을 이어갔다. 처칠로서는 건강 등의 이유로 우울했을 만년에 일약 생기를 불어넣어준 소중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처칠과 오데트의 역사적 향기가 담긴 샴페인 ‘윈스턴 처칠’
파티 이후 파리를 떠날 때 다음에 파리에 올 기회가 있으면 반드시 오데트를 저녁 만찬에 초대하라고 주위에 지시할 정도로 오데트에 대한 처칠의 호감은 대단했다. 오데트 역시 처칠의 생일 때마다 샴페인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빈티지는 그가 좋아했던 1928년산이었는데, 1953년에는 재고가 떨어지자 다른 빈티지(1934년)를 보내는 등 처칠이 사망할 때까지 최상급 샴페인을 보냈다. 처칠은 이에 대한 답례로 그의 사인이 들어 있는 회고록을 보내기도 하고, 한번은 ‘나를 에페르네로 초대하면 직접 발로 포도를 밟아 으깨어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처칠은 아쉽게도 에페르네로 갈 기회는 없었지만 자신이 아끼는 경주마의 이름을 오데트 폴-로저로 붙일 정도로 오데트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1965년 처칠 사망 후 성 바울 성당에서 거행된 성대한 국장에 처칠의 개인 친구 자격으로 초청받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가 오데트였다. 처칠의 사후 폴-로저사는 영국으로 수출하는 샴페인 상표에 검은 선을 둘러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리고 1984년에는 회사의 최고급 제품에 ‘윈스턴 처칠’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했다. 1975년 빈티지로 시작된 이 제품은 피노 누아를 주품종으로 만들었는데, 처음에는 처칠가(家)와 영국 황실에만 공급됐다. 감칠맛이 돌면서 숙성된 이 샴페인의 맛은 처칠이 살아생전 좋아하던 바로 그 맛이었다.
오늘날 윈스턴 처칠 샴페인은 국내에서도 구할 수 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맛을 보면서 처칠과 오데트에 얽힌 역사적 향기에 취해보는 것도 또 하나의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위스키稅 부과로 ‘위스키반란’…대통령으로서 직접 군 지휘해 제압
“그가 여섯 살 무렵의 일이었다. 또래의 여느 소년들처럼 개구쟁이였던 그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던 정원의 어린 벚나무를 작은 손도끼로 쳐서 껍질을 벗겨내고 말았다. 결국 이 때문에 그 벚나무는 죽고 만다. 얼마 후 이를 발견한 아버지는 노발대발했고, 누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를 알려고 했다.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워싱턴은 울면서 말했다. ‘아버지, 저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제가 손도끼로 그렇게 했어요.’ 그러자 아버지는 어린 소년을 팔로 안으면서, ‘너의 지금 행동은 황금 잎을 가진 천 그루의 나무보다 더 가치가 있는 일이다’라고 오히려 크게 칭찬했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에 관한 이 유명한 일화는 이솝우화만큼이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워싱턴의 도덕성을 한마디로 상징하는 이 일화가, 사실은 책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한 전기 작가가 꾸민 이야기라는 게 공공연한 사실이다. 사건의 주범(?)은 윔스(Mason Locke Weems, 1759~1825)라는 목사이자 서적 판매원이었다. 그는 미국 메릴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다시 고향에 돌아와 목회 일을 했다. 그러나 생활고에 시달린 나머지 서적 외판원 일을 하면서 설교를 병행했다. 그러던 중 워싱턴이 사망한 이듬해인 1800년, 상업적인 가능성에 착안하고 워싱턴에 관한 전기(The life · Memorable Actions of George Washington)를 집필해 처음 책을 냈다. 앞서 말한 벚나무 일화는 바로 이 책의 5판(1806년)에 이르러 다른 몇몇 일화와 함께 윔스에 의해 임의로 첨가된 것이었다. 한 설(說)에 따르면, 모범적인 삶으로 별다른 일탈의 에피소드가 없는 워싱턴의 전기를 보다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벚나무 일화에 관련된 논쟁과 관계없이 워싱턴이 미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인물 중 한 사람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워싱턴의 ‘벚나무 사건’은 작가의 상상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 1732~1799)은 버지니아 주의 한 마을에서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워싱턴이 11세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자 이복형 로렌스가 가장 구실을 하며 워싱턴의 기둥이 되어준다. 이런 로렌스마저 1752년 오랜 투병 끝에 결핵으로 사망하자 그 이듬해 워싱턴은 로렌스의 뒤를 이어 소령 계급으로 버지니아 민병대의 부대장으로 임명된다.
그러다가 1754년 프랑스와의 영토 분쟁으로 야기된 프렌치인디언전쟁(1754~1763, 영국과 프랑스가 북아메리카에서 벌인 싸움으로, 프랑스가 인디언부족과 동맹해 영국 식민지를 공격했다)에 참전하게 된다. 참전 중 전투지휘 능력을 인정받은 워싱턴은 대령으로 진급하며 영국군과 민병대를 제외하고는 미국 땅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정식 군부대의 지휘관을 맡는다. 워싱턴은 참전 4년 만인 1758년 12월 군에서 퇴임했다. 이때 영국군과 한편이 되어 싸우면서 얻은 귀중한 경험은 훗날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중요한 자산이 된다. 또 전투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은 190㎝에 가까운 그의 장대한 골격과 함께 카리스마 있는 군사 지도자로 인정받는 계기가 된다.
프렌치인디언전쟁 참전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1759년 부유한 미망인 마사와 결혼한다. 이 결혼으로 그는 막대한 자산가가 돼 버지니아 주 최고 갑부 중 한 명으로 떠오른다. 이후 워싱턴은 고향에서 확고한 기반을 가진 사회적 명망가로서 안온한 삶을 즐긴다.
그러던 중 미국 독립전쟁(1775~1787)이 시작된다. 워싱턴은 식민지군 사령관으로 취임했고, 영국과의 오랜 전쟁 끝에 결국 승리를 거둬 미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2년 후인 1789년, 새롭게 제정된 미연방 헌법에 의해 워싱턴은 투표로 미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그리고 1797년 두 번에 걸친 임기가 끝났을 때 3선(選) 대통령 추대 움직임이 있었지만 민주주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이후 그는 사저가 있는 고향 땅 마운트 버넌으로 돌아갔고, 2년 뒤인 1799년 세상을 떠난다.
이상이 조지 워싱턴의 간단한 이력이다. 생전에 미국 건국에 대한 그의 영향이 컸던 만큼 오랜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도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부터 핵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에 이르기까지 그를 기리는 흔적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유명한 군사, 정치적 인물 조지 워싱턴이 위스키라는 술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개척지 주민을 자극한 위스키稅
조지 워싱턴과 위스키와의 첫 번째 인연은 역사적으로 ‘위스키반란(Whiskey Rebellion)’이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여진 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1789년 미 연방헌법에 의해 조지 워싱턴을 수반으로 한 첫 연방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초대 재무장관에 취임한다. 그는 건국 초기에 연방정부가 떠안은 막대한 빚을 해결하기 위한 세원(稅源) 확보에 고심했다. 수입관세는 이미 충분히 높다고 생각한 그는 내수 상품에 세금을 부과하기로 하고, 그 첫 대상으로 미국 국내에서 증류되고 있는 위스키를 선택했다. 해밀턴은 위스키에 대한 세금이 일종의 사치세로 조세 저항이 가장 작을 것으로 판단했고, 실제 위스키 세금을 ‘악행세(sin tax)’의 하나로 생각하는 일부 계층의 적극적인 지지도 있었다.
그러나 1791년 정식으로 법제화된 위스키세는 곧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신생 미국의 서쪽 개척지를 이루고 있던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거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의 농부들은 소규모 위스키 증류소를 운용하면서 부수입을 올렸다. 위스키 증류는 무거운 곡물을 산맥을 넘어 동부로 운반하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수익성도 높았다. 게다가 현금이 귀했던 개척지의 사정상 위스키는 거의 현금과도 같은 구실을 했기 때문에 현지 농부들은 위스키세를 사치세라기보다는 일종의 소득세로 간주했다. 동시에 새롭게 제정된 위스키세가 동부의 대규모 위스키제조업자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위스키세는 생산량에 따르거나 고정세율 중 한 가지를 선택할 수 있게 돼 있었는데, 동부의 대규모 증류업자들은 고정세율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애팔래치아 산맥 서부 개척지의 업자들에 비해 훨씬 적은 세금을 내게 됐다. 동부의 증류업자 대부분은 신설 위스키세에 찬성 입장을 보였다.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당시 서쪽 개척자들은 연방정부에 불만이 많았다는 점이다. 개척지에서 인디언과 벌이는 전투 상황도 여의치 않아 안전에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스페인의 지배하에 있던 미시시피 강 운항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대처가 미흡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위스키세 부과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끼얹듯이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위스키세 발표 이후 서부 펜실베이니아 주를 중심으로 한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개척지 거주민들은 여러 차례 집회를 열어 위스키세에 저항했다. 이런 와중에 1791년 9월 주민들이 위스키세 세금징수원을 타르와 새털로 덮어씌운 사건이 발생했고, 범인을 체포하기 위해 영장을 들고 간 관리마저 같은 수모에 채찍질마저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물론 개척지 거주민들은 한편으로는 위스키세의 철폐를 위해 행정적으로도 노력했다. 그 결과 1772년 5월에는 세금 감액을 주 내용으로 한 수정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서부 거주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세금징수원 저택 공격한 위스키반란
사태가 갈수록 꼬여가면서 서부 거주민들 집회는 점점 과격파가 주도하게 됐고, 사태를 걱정한 정부에서는 해밀턴 재무장관 등 강경파의 건의에 따라 1792년 9월15일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이름으로 세금 저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그러나 정부 성명에 관계없이 위스키세에 대한 저항은 계속됐다. 저항은 특히 서부 펜실베이니아 지역에서 격렬하게 나타났는데 존 네빌이라는 지역 세금징수관의 허수아비를 불태우는가 하면 또 다른 곳에서는 한 세금징수관을 총으로 위협해 직책을 그만두게 만들기도 했다.
위스키반란은 1794년 정점에 다다랐다. 그해 5월 연방보안관 데이비드 레녹스는 위스키세를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영장을 전달하기 위해 서부 펜실베이니아로 향했다. 지역 세금징수관 존 네빌의 안내로 영장 전달은 7월까지 큰 사고 없이 진행됐다. 그러던 중 7월16일 피츠버그에서 남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는 네빌의 농장을 총으로 무장한 과격파 용병들이 포위하는 일이 벌어졌다. 다음날 이들의 수는 600명 가까이 늘어났다. 그러나 지역 유지이자 재력가인 네빌의 집은 사전에 요새화돼 있어 쉽게 진입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인근에서 온 10명의 미국 연방군까지 합세해 대비하고 있었다. 마침내 쌍방 간 총격전이 벌어지고 소수의 희생자도 발생했다. 이 중 반군 지도자인 맥팔레인(Major James McFarlane)의 죽음은 위스키반란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1794년 8월1일 열린 집회에서는 무려 7000명가량의 인원이 모여 위스키반란 시작 이후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대부분은 소유 토지도 없고 위스키 증류소도 운영하지 않는 빈곤층으로 실제 위스키세와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들은 위스키반란으로 혼란한 상황을 사회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기회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이번 사태와는 무관한 부자들이 애꿎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속출했다.
조지 워싱턴은 위스키반란 사태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본격적인 대책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기본 방침은 정부의 권위를 지키되 되도록 민중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협상 사절을 현지에 보내 유화책을 쓰는 한편, 무력 사용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진압군을 모집했다. 당시 모집된 병력은 모두 1만2950명.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였다.
1794년 10월 이윽고 워싱턴의 총지휘 아래 진압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현직 대통령이 직접 군사를 이끈, 처음이자 유일한 일로 기록된다. 위스키반란군은 군대의 진격 중단을 요청하면서 협상안을 내놓았지만, 워싱턴과 재무장관 해밀턴은 그럴 경우 반란이 재발할 것이라며 요청을 거부했다. 그러나 워싱턴은 진군 도중 위스키반란군의 실제 저항이 미미할 것으로 보고 중간에서 장군(General Henry Lee, 1756~1818)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재무장관 해밀턴은 민간인 고문 자격으로 계속 진압군에 머물렀다.
마침내 진압군이 서부 펜실베이니아에 진입하자 반란군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20여 명의 주동자가 체포됐다. 그러나 폭행, 방화 등 죄질이 나쁜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얼마 후 석방됐다. 이들 2명도 반역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워싱턴은 이들을 사면했다.
위스키반란은 신생 정부가 단호한 의지로 법에 대한 저항을 성공적으로 해결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에도 사태 해결 후 워싱턴의 정책 방향은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위스키세 자체는 시행 과정에서 문제점이 노출되면서 1800년 해밀턴의 연방당에 반대하는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공화당이 집권하면서 철폐됐다. 위스키반란으로 어쩌면 위스키와는 좋지 않은 추억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워싱턴과 위스키의 인연은, 그가 만년에 위스키 증류소를 건립하면서 좋은 추억으로 전환된다.
위스키 증류소 세운 사업가 워싱턴
워싱턴은 사실 사업가로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상속지인 마운트 버논(버지니아 주 포토맥 강가에 있는 지역)에 1771년 석재로 큰 제분소를 지어 여기서 만든 제품을 유럽에 수출했다. 그러던 중 그의 만년에 농장 관리인인 앤더슨(James Anderson)의 건의로 제분소 옆에 위스키 증류소를 세우기로 결정한다.
위스키 증류소는 1797년 워싱턴이 대통령직에서 떠나던 해에 완공된다. 이 증류소는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규모로, 1년에 위스키 1만1000갤런(약 4만1640L)을 생산했다고 한다. 워싱턴의 증류소에서 만들어진 위스키 중 대표적인 제품은 호밀 60%, 옥수수 35%, 몰트 보리 5%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증류소에서는 위스키 이외에도 다양한 과일을 사용해 브랜디를 만들기도 했다.
1799년 워싱턴이 사망하자 제분소와 증류소는 그의 조카 루이스(Lawrence Lewis)에게 넘어가고, 다시 1808년에는 한 상인에게 임대됐다. 증류소 영업에 대한 마지막 기록도 1808년까지다. 이후 1814년 증류소 건물은 큰 화재를 당했고, 제분소 건물마저 1850년 완전히 파괴됐다.
이후 역사적인 이 건물들을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철저한 고증 끝에 최근 제분소와 증류소 건물이 재건됐다. 2층에 모두 5개의 증류기가 설치된 증류소 건물 공사는 2007년 끝났다. 현재 이들 건물은 기념품점과 함께 일반인에게 공개돼 18세기 미국 위스키 증류소의 흔적에 대한 감상과 더불어 워싱턴과 위스키의 뗄 수 없는 인연을 되새기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닉슨과 마오쩌둥의 역사적 만남으로 죽(竹)의 장막에 갇혀 있던 중국이 처음 세계에 얼굴을 내밀 때, 그 현장에는 마오타이주(茅台酒)가 있었다. 닉슨의 중국 방문 작업을 준비했던 보좌관은 “마오타이주를 직접 마시면 곤란하다.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입에 갖다 대는 시늉만 하라”고 건의했지만, 닉슨은 얼굴을 잠깐 찡그린 뒤 술을 다 마셨다. 마오쩌둥이 홍군을 이끌고 대장정을 할 때, 마오타이주의 고장인 마오타이진 주민들은 홍군에게 이 술을 건네며 장정의 고단함을 달래주었다.
최근 한 일간지에 ‘부끄러운 역사도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제목으로 미국 닉슨 대통령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뉴욕타임스’의 기사를 인용한 이 글은 1974년 그의 사임을 몰고 왔던 워터게이트 사건 관련 상설 전시장이 그의 고향인 캘리포니아 남부 요르바 린다에 있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도서관 안에 설치됐다는 내용이었다. 닉슨 도서관장이자 워터게이트 갤러리 큐레이터인 티머시 나프탈리는 “닉슨 대통령이 미 역사상 전무후무하게 임기 중 사임했다는 걸 고려하면 워터게이트 스캔들이라는 복합적인 사안들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게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미국의 제37대(재임 1969~74) 대통령 리처드 닉슨(Richard Nixon·1913~94)은 많은 미국 대통령 중에서 업적에 비해 부정적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일례로 2008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이 그때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을 대상으로 한 평가 순위에서 닉슨은 조지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과 함께 공동 37위를 기록해 여느 여론조사에서와 다름없이 ‘워스트 텐’(Worst 10) 명단에 그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닉슨은 부통령으로 재선에 성공(1953~61)한 뒤 대통령 재선에도 성공한 유일한 기록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또 첫 재임기간에는 베트남전쟁을 종결시키고 중국과 구(舊)소련과의 외교 관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업적으로 1973년 재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특히 1969년 발표한 그의 대아시아 외교 정책은 닉슨독트린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를 포함한 세계에 널리 알려지며 그의 명성을 드높이는 데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의 전도를 결정적으로 망친 것이 앞서 말한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974년 8월9일 대통령직에서 떠난 닉슨은 그 후 내내 미국 역사상 초유의 임기 중 사퇴라는 불명예의 멍에를 지게 된다.
닉슨은 1913년 캘리포니아 주 요르바 린다에서 출생했다. 휘티어대에서 학부 과정을 마친 뒤 듀크대에서 법률을 전공하고, 1937년 캘리포니아에 돌아와 법률사무소를 개설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에 지원해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군에서 그는 활약을 인정받아 소령까지 진급했다.
부통령과 대통령 각각 재선에 성공한 닉슨
종전 후인 1946년 캘리포니아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하원의원 시절 반미활동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대표적인 우파 반공주의자로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당시 국무부의 고위 관리였던 앨저 히스의 구소련 간첩 활동 진상 파악도 그가 주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정치적 명성에 힘입어 1950년 상원의원이 됐고, 1952년 선거에서는 미국의 제34대 대통령인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1890~1969)의 러닝메이트로 40세의 나이로 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미국 역사상 가장 젊은 부통령 중 한 사람이 됐다. 그는 이어 1956년 선거에서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재선에 성공함으로써 그야말로 실패를 모르는 승승장구의 정치 과정을 밟는다.
1960년 닉슨은 마침내 그의 화려한 경력을 바탕으로 제35대 미국 대통령선거에 도전한다. 공화당 예비선거에서 무난히 승리를 거둔 닉슨은 그러나 본선 무대에서 민주당 후보로 존 에프 케네디(John F Kennedy·1917~63)라는 걸출한 인물을 상대한다. 풍부한 경륜을 앞세운 닉슨과 젊은 피를 앞세운 케네디 간의 대결은 시종일관 접전이었다. 그러나 그때 처음으로 신매체로 선거전에 등장한 후보자 TV토론은 승리의 추를 케네디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결 젊고 매력적인 케네디의 이미지는 토론 내용에 관계없이 닉슨을 압도했다. 더구나 네 번의 토론 중 첫 번째에서는 닉슨의 몸 상태까지 좋지 않았던 탓에 그런 분위기가 더욱 강조됐다. 결국 선거 결과 닉슨은 전체 유권자 투표에서 불과 0.2%(12만표) 뒤지는 차이로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선거에 패배한 닉슨은 고향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변호사 일과 함께 저작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다 1962년 주위의 권유로 캘리포니아 주지사선거에 도전한다. 그러나 그는 현역 민주당 후보에게 또다시 아픈 패배를 당한다. 많은 정치 평론가는 이번 패배야말로 닉슨의 정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닉슨 자신도 선거 패배 직후 기자회견에서 “이것이 나의 마지막 기자회견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절치부심하던 닉슨은 오랜 기다림 끝에 1968년 대통령선거에 재도전한다. 그리고 마침내 당시 부통령이던 민주당 허버트 험프리(Hubert Humphrey·1911~78)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오랜 정치적 꿈을 이루게 된다. 그의 첫 4년간의 재임 기간(1969~73)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의 점진적인 개입 중단과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해 공식적으로 외교 관계를 수립하는 등 국제 방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 경제 정책에서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중 사의
이런 성과에 힘입어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조지 맥거번(George McGovern· 1922~) 후보를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표 차이로 이겼다.
그러나 닉슨의 화려한 정치 이력도 여기까지였다. 1973년 초부터 1974년 8월 그가 사임할 때까지 미국뿐 아니라 세계 언론의 관심과 이목을 집중시켰던 그 유명한 워터게이트 사건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고 만 것이다. ‘워터게이트 사건(Watergate Scandal)’은 1972년 6월 닉슨 재선을 위한 공작의 일환으로 비밀요원들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위치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몰래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돼 체포된 사건이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의 폭로 기사로 일시에 전국적인 관심사가 된 이 사건은 처음 백악관 측의 강력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관련 정황이 속속 드러남으로써 미국 국민의 불신 여론이 높아져갔다. 마침내 1973년 초까지는 이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닉슨의 말까지 거짓말로 드러나고 그 자신도 무마공작에 나섰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여론은 걷잡을 수없이 악화됐다.
결국 닉슨은 모든 정치적 지지를 상실한 데다 대통령직에 대한 탄핵안이 하원 사법위원회에서 가결되는 등 탄핵이 거의 확실시되자 1974년 8월9일자로 자진 사퇴한다. 대통령직 사임 직후 캘리포니아 상 클레멘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간 닉슨은 정신적 충격과 비통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다만 9월8일 후임 대통령인 포드(Gerald R Ford·1913~2006)가 내린 사면령으로 후속 조사는 받되 형사 기소는 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포드의 지지율은 71%에서 49%로 대폭 떨어졌다.
닉슨은 설상가상으로 사면이 발표된 그날 밤 정맥혈전증과 이로 인한 폐색전증이 발병하면서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한 후에도 병이 재발해 수술까지 받으면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1975년 몸과 마음이 어느 정도 회복된 닉슨은 조금씩 대외활동을 재개하면서 이듬해인 1976년 2월 마오쩌둥(毛澤東·1893~1976)의 초청으로 중국을 다시 찾았고 이후 중국을 네 번 더 방문한다. 1980년대 들어서 닉슨은 저작활동을 포함해 특유의 탁월한 통찰력으로 왕성한 대외활동을 하면서 최악의 상태에서 차츰 벗어났다. 그러던 중 1994년 4월22일 갑자기 닥친 뇌졸중으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한다.
中蘇 국경분쟁 틈 파고든 닉슨
이처럼 굴곡진 닉슨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에 꽃을 피운 대표적 업적 중 하나가 중국과의 첫 외교 관계 수립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닉슨은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1960년에 이미 구소련과의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중국은 닉슨 취임 초기인 1969~70년 중-소 국경분쟁을 겪으면서 공산 블록의 축이었던 구소련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닉슨은 이 틈을 이용해 냉전시대 주도권을 서방세계로 가져오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를 위해 닉슨은 한편으로는 중국과의 개인 채널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니콜라 차우세스쿠(Nicolae Ceausescu) 루마니아 대통령과 야히야 칸(Yahya Khan) 파키스탄 대통령을 통해 중국에 화해 메시지를 보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에 대한 무역 제재 완화와 국내 반대여론 무마 작업 등 치밀히 사전 준비를 해나갔다.
그런 미국의 노력에 중국은 1971년 4월 미국 탁구팀을 초청해 양국 간 시범경기를 가지는 형식으로 화답했다. 15명으로 구성된 미국 탁구팀의 공식 방중은 중국 공산화 이후 무려 20년 이상 입국 비자가 거절됐던 미국으로서는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둥의 직접 지시로 시작된 이 이벤트는 이 후 핑퐁외교(Ping Pong di-plomacy)라는 유명한 외교 용어를 탄생시켰다.
양국 간의 우호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자 닉슨은 1971년 7월에 당시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1923~)를 중국에 비밀사절로 보낸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2년 2월 닉슨의 공식 방중 계획이 양국 간에 합의됐다는 발표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다.
마침내 1972년 2월21일 닉슨이 베이징 서우두공항에 도착하면서 그의 역사적인 중국 방문이 시작됐다. 일주일간 계속된 이 여정은 냉전시대의 재편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을 뿐 아니라, 닉슨 개인으로서도 그의 정치 행로에서 가장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또 지구촌의 많은 사람에게는 그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던 죽의 장막 안의 여러 모습을 TV 화면을 통해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닉슨은 중국에 도착한 뒤 곧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을 만난다. 일주일의 체류 기간 중 유일한 마오쩌둥과의 이 만남은, 닉슨 도착 9일 전부터 아팠던 마오쩌둥의 건강 상태가 좋아진 시점을 이용해 급히 이루어진 것으로 훗날 파악됐다. 노쇠한 마오쩌둥을 대신해 내내 닉슨의 상대역을 맡았던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1898~1976)였다. 뛰어난 공산혁명가이자 탁월한 정치·외교적 수완으로 지금까지 중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손꼽히는 저우언라이는 1949년 중국 공산정권 수립 이후 마오쩌둥 아래서 무려 27년간 총리로 일하며 중국 국내외의 중요한 문제를 해결했다. 그는 오랜 2인자 생활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오쩌둥을 마지막까지 성실히 보좌했다.
“마오타이는 ‘순수 가솔린’(pure gasolin)”
그런 저우언라이와 닉슨의 여러 차례 만남 중 매스컴의 가장 큰 이목을 끈 행사는 단연 닉슨 일행의 공식 환영 만찬회(state banquet)였다. 닉슨 방중의 역사적 의미에다가, 중국에 대한 호기심이 겹치면서 만찬장 메뉴도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베이징의 톈안먼 인민대회장에서 성대히 열린 당시 만찬의 메뉴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찬 요리(cold dishes) | 소스로 맛을 낸 오이와 토마토(cold cucumber and tomato with dressing), 짭짤한 닭요리(salty chicken), 채식주의자 햄(vegetarian ham), 푹 삶은 붕어요리(braised crisp crucian carp), 파인애플을 곁들인 오리구이(sliced roast duck with pineapple), 광동식 저장육(Cantonese preserved meat), 오리 저장육 요리(preserved duck), 중국식 햄(Chinese ham), 삼색 달걀 요리(three-color eggs)
▶ 뜨거운 요리(hot dishes) | 사천식 죽순과 달걀 흰자 수프(Sichuan bamboo shoot and egg-white soup), 샥스핀 수프(shark′s fin soup with three shredded ingredients), 새우 요리(king prawns in western style), 버섯요리(dish covered with straw mushrooms), 코코넛 소스 닭요리(braised chicken with coconut), 치즈(almond cheese)
▶ 다과(refreshments) | 달콤한 완두콩 푸딩(sweet pea pudding), 스프링 롤(fried spring roll), 양지꽃 경단(dumplings of cinquefoil), 튀긴 쌀 케이크(fried rice cake), 빵(bread), 버터(butter), 볶음밥(mixed fried rice)
▶ 과일(Fruits) | 칸탈로푸 멜론(cantaloupe), 오렌지(orange)
▶ 음료(Beverages) | 마오타이(Maotai), 적포도주(red wine), 칭다오 맥주(Qingdao beer), 오렌지주스(orange juice), 광천수(mineral water), 얼음(ice block), 소다수(soda water), 끓인 물(plain boiled water)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측에서는 미국 사람들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햄과 같이 보통 국가 만찬장에서는 보기 힘든 메뉴가 들어가는가 하면, 새우요리는 전통 베이징식에는 없는 음식이었지만 미국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정보 때문에 추가된 것이었다. 닉슨은 사전에 어느 정도 연습을 했는지 젓가락도 그리 어색하지 않게 사용했다.
그런데 이 만찬 메뉴 중에서 단연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던 것은 중국의 명주 마오타이주(Maotaijiu·茅台酒)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웬만한 서양 국가에서도 그 지명도를 떨치고 있는 이 유명한 술은 당시만 하더라도 중국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술이었다. 이 때문에 닉슨 방중의 사전 작업을 하고 있던 키신저 일행의 한 보좌관은 중국 방문 중 마오타이를 미리 맛본 뒤 그 독한 맛 때문에 닉슨 대통령이 직접 마셔서는 곤란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만찬 시에 마오타이주로 건배 제의가 있더라도 술을 마시지 말고 입을 갖다 대는 시늉만 할 것을 건의하는 전보를 본국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건의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실제 만찬장에서 저우언라이가 마오타이주로 건배 제의를 했을 때 얼굴을 잠깐 찡그렸을 뿐 술을 마셨다.
사실 마오타이주는 모든 애주가가 보편적으로 좋아하는 맛과 향을 지닌 술은 아니다. 장맛이 나는 독특한 향에 독한 알코올 도수의 독주로 닉슨의 방중 당시 이를 맛본 ‘타임’지 기자 막스 프랑켈(Max Frankel)은 마오타이를 ‘순수 가솔린(pure gasoline)’과 같은 술로 표현할 정도였다. 그러나 마오타이주는 그 매력에 한번 반한 사람은 쉽게 헤어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풍미를 가진 술이다.
그러면 중국이 자랑하는 전설의 명주 마오타이주는 과연 어떤 술일까? 마오타이주를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우선 마오타이주의 근본이 되는 중국 백주(白酒·바이지우)에 대한 기초 상식이 필요하다.
백주는 수수(고량)를 주 원료로 증류한 백색의 투명한 술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고량주로도 불리고 있으나 이는 백주의 주재료를 강조한 것으로 사실 정확한 용어는 아니다. 물론 고량만을 재료로 만든 백주도 있지만 많은 경우 고량 이외에 여러 가지 곡물을 섞어서 만든다.
백주를 이해하려면 향형(香型)의 종류에 관해 아는 것이 중요하다. 향형이란 글자 그대로 ‘향의 종류’란 뜻인데, 백주에는 모두 5가지의 주요 향형이 있다. ① 농향형(濃香型) ② 장향형(醬香型) ③ 청향형(淸香型) ④미향형(米香型) ⑤ 기타, 겸향형(其他, 兼香型)이 그것이다. 이 향형은 일부 저급 백주 이외의 대부분 백주 제품의 상표에 표시돼 있기 때문에 잘 모르는 술이라도 미리 기본적인 맛을 알 수가 있다.
오량액(五粮液), 수정방(水井坊), 공부가주(孔府家酒) 등 우리에게 비교적 잘 알려진 중국 술은 대부분 농향형 백주이지만, 마오타이주는 장향형에 속한다. 장향형 백주는 글자 그대로 장맛과도 같은 깊은 맛이 느껴지는 술이다.
장맛처럼 깊은 맛 내는 장향형
마오타이주는 중국 구이저우(貴州)성 런화이(仁懷)현의 마오타이(茅台)진에서 생산되는 술을 일컫는다. 적수하(赤水河) 강가에 위치하는 마오타이진은 청나라 시대부터 이미 양조 마을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중국의 고시(古詩) 중 ‘비온 뒤 독을 열면 그, 향기 10리에 퍼지네(雨過開甁十里芳)’라는 구절은 마오타이주의 명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마오타이주는 고량을 주원료로 자연 당화 발효제인 대곡(大曲·밀로 만든 누룩)을 사용해 만든 술이다. 누룩은 원료인 고량보다 더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며 여러 차례 발효 과정을 거친 뒤 술을 거를 때도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용한다. 증류해 거른 술은 일정 기간 저장한 뒤 배합 과정을 거친다. 이 배합 과정은 코냑의 마히아쥐(mariage)와 비슷한 개념으로, 적당한 향과 맛을 위해 많게는 수십 종의 원료를 혼합한다. 배합이 끝난 술은 항아리에 밀봉한 채 장기간 숙성 과정을 거친다. 일반적으로 모든 마오타이주는 3년 이상의 숙성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고급품일수록 더 오랜 숙성 과정을 거친다. 아무리 장기 숙성을 시키더라도 항아리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오크 나무통 숙성을 거치는 코냑이나 위스키와 같이 술 색깔이 변하지는 않는다.
마오타이주가 본격적으로 외부 세계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1915년 파나마 만국박람회(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림)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외부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마오타이주는 이 박람회에서 최우수 품질을 의미하는 금상을 획득함으로써 일약 국제적인 명주로 자리매김한다.
마오타이주는 홍군(紅軍)의 장정(長征·1934~36)과도 인연이 깊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홍군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남부 장시성에서 산시성까지 9600㎞의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 이 역사적인 여정은 오늘날 중국 정부를 출범시킨 가장 중요한 사건이다. 바로 이 장정 중 홍군이 마오타이진이 있는 적수하를 건널 때 주민들이 마오타이주를 들고 나와 지친 병사들을 위로한 것으로 전한다. 병사들이 이런 주민들의 정성과 술기운에 크게 고무됐으며, 이런 일화 때문에 훗날 중국 공산당 정권이 출범했을 때 마오타이주는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고 한다.
연간 생산량 2만5000t
이렇듯 마오타이주는 현 중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부터 어느 정도 명성을 얻고 있었지만 생산, 판매의 측면에서는 연간 생산량이 수십t을 넘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건국 후 1952년 열린 제 1회 중국 전국주류품평회를 시작으로 각종 대회에서 금장을 수여받으면서 이른바 ‘중국 8대 명주’ 중 으뜸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시에 생산량도 점차 늘어나 2003년 처음으로 연간 생산량 1만t을 넘긴 마오타이주는 현재 연간 약 2만5000t가량이 생산되고 있다. 최근 들어 프랑스의 유명 코냑 회사인 카뮈사와 손잡고 해외 판매망을 구축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홍보에 나서고 있다.
마오타이주는 그 명성에 걸맞게 많은 이야기를 낳고 있다. 2010년에는 인구 밀집과 환경오염으로부터 마오타이주를 지키기 위해 구이저우성 지방 행정 당국이 ‘주민 1만6000명을 2015년까지 인근에 새로 조성한 주거지역으로 이주시키기로 했다’는 계획이 한 언론매체에 보도됐다. 또 희귀 마오타이주의 경우 최근 중국 경제성장과 맞물려 천문학적인 가격에 경매되는 일이 종종 보도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명성과 인기에 비례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짜 상품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심지어 중국 면세점에서도 가짜 마오타이주를 팔고 있다는 소문이 있고, 일반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마오타이주의 대부분은 가짜라는 이야기는 이 국제적인 술의 명성에 큰 누가 되고 있다.
어쨌든 그 명성만큼이나 많은 구설에 오르내리는 이 전통의 명주를 볼 때마다 역사적 미중 수교의 무대를 장식했던 그때의 화려했던 모습을 잊기 어려울 것이다.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는 전설적인 명언과 함께 한때 전 유럽을 뒤흔들었던 불세출의 영웅 나폴레옹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코르시카 섬 출신 ‘비주류’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능력만으로 프랑스 지도층에 진입해 마침내 황제로서 일세를 풍미한 뒤, 결국은 머나먼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이런 그를 상징적으로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바로 앞의 명언과 함께 그의 영웅적 기상을 생생히 보여주는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이라는 회화 작품일 것이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이 유명한 그림이 비록 사실에 근거를 두고는 있으나 상당한 허구가 가미돼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림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은 정치적 의도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Crossing the Alps)’을 그린 사람은 신고전주의 작가로 나폴레옹 당시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던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1748∼1825)다. 그는 프랑스혁명의 지지자였을 뿐만 아니라 나폴레옹의 본격적인 대두 이후에는 곧 그의 열렬한 숭배자가 된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제1통령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 이탈리아로 기습 진격해 당시 그곳을 점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과의 일전을 계획한다. 1800년 5월 마침내 알프스의 생베르나르 협곡(the Saint-Bernard Pass)을 넘은 나폴레옹군은 마렝고 전투에서 결정적인 대승을 거둔다. 이후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이 위업을 기념하는 초상화를 의뢰받는다.
그런데 이 그림은 시작부터 철저히 나폴레옹의 정치적 계획하에 진행됐다. 다비드는 말을 탄 모습을 제대로 그리기 위해 나폴레옹에게 앉은 자세에서 장시간 모델이 돼 줄 것을 요청했으나, 나폴레옹은 ‘이런 영웅적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실제의 모습이 아니라 개성의 표현’이라며 요청을 일축한다. 실제 알프스를 넘을 당시 나폴레옹은 그림처럼 악천후를 배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생베르나르 협곡을 넘은 것이 아니라 먼저 군대가 험준한 지역을 돌파한 뒤 맑은 날씨에 안전하게 안내인이 이끄는 노새를 타고 넘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나폴레옹은 노새가 아니라 준마를 타고 있는 모습을 원했기 때문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애마 두 마리를 모델로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그림 전면의 바위 돌에 그의 이름과 함께 새겨놓은 한니발(Hannibal·BC 247~183), 그리고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742~814)의 이름은 과거 알프스를 넘었던 역사적인 영웅들과 그를 동격화하려는 시도였다. 이 그림은 당시 나폴레옹의 요청으로 추가로 만든 세 작품을 포함해 모두 5개의 작품이 존재한다. 그림들은 1801년에서 1805년에 걸쳐 완성됐는데, 1804년에 다비드는 나폴레옹에 의해 공식적인 궁중화가로 임명됐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There is no such word as impossible in my dictionary)’라는 나폴레옹의 명언도 후세에 약간 변형된 것이다. 이 말은 나폴레옹이 1813년 7월9일자로 그의 부하 장군인 르마루아(Lemarrois·1777~1836)에게 쓴 편지에 나오는 ‘Ce n′est pas possible, m′ecrivez-vous; cela n′est pas francais’ 구절을 근거로 한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장군이 나에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는데 그런 말은 프랑스어가 아닐세’로 직역할 수 있다. 이 표현이 후세에 와서 앞서 말한, 보다 간결한 대중적인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불가능이란 말은 바보들의 사전에서나 발견되는 말이다(Impossible is a word found only in the dictionary of fools)’도 같은 맥락의 표현이다.
어쨌든 이렇게 우리 주위에서 여전히 그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 있는 영웅 나폴레옹의 일생에 대해 먼저 간단히 알아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1769~1821)는 프랑스령인 지중해 코르시카 섬의 아작시오 마을에서 변호사로서 지역 명망가였던 부친과 절제를 강조한 모친 사이에서 8명의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나폴레옹의 옛 조상은 이탈리아 귀족 출신이었다. 이런 배경과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안 형편은 그에게 당시 일반적인 코르시카 소년들에 비해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나폴레옹은 1779년 1월 만 10세가 채 되지 않았을 때 프랑스어를 배우기 위해 프랑스의 한 종교학교에 등록했고, 곧이어 5월에는 브리엔 유년 군사학교에 입학해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학업 기간 내내 진한 코르시카 억양 때문에 친구들의 놀림감이 됐지만 수학을 비롯한 지리, 역사 과목 등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1784년 브리엔을 졸업한 나폴레옹은 당시 권위를 자랑하는 육군사관학교(Ecole Militaire)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사망에 따른 재정 문제 때문에 2년 과정을 1년으로 단축해 1785년 9월 이 학교를 졸업한다. 코르시카 출신으로는 첫 졸업생이었다.
졸업한 뒤 나폴레옹은 포병소위로 임관, 지방연대에 부임했다. 그리고 1789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코르시카로 귀향한다. 코르시카에 머무는 동안 나폴레옹은 왕당파, 혁명파, 코르시카 국민군 사이의 복잡한 싸움에서 코르시카 국민군의 지도자 파올리(Pasquale Paoli·1725~1807)를 도왔다. 이때 프랑스 육군은 나폴레옹에 대해 무단이탈과 2중 군적에 대해 제재를 가하려 했으나, 나폴레옹은 파리로 가서 상부를 설득해 오히려 대위로 진급한다.
왕당파 봉기 진압 수훈…군사령관 임명
1792년 나폴레옹은 코르시카로 다시 돌아가게 되나 프랑스와의 결별을 결정한 파올리와 균열이 생기면서 1793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도피한다. 나폴레옹은 1793년 툴롱 공략 작전에서 부상해가며 왕당파의 반란을 토벌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이 때문에 그는 불과 24세의 나이에 일약 장군이 되고 곧 이탈리아 주둔 프랑스군의 포병 책임자가 된다.
1794년 당시의 실권자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Maxmilien Robespierre·1758~1794)가 ‘테르미도르의 반동’(1794년 7월27일 국민공회 내 온건파가 일으킨 쿠데타로 공포정치를 시행한 혁명정부를 무너뜨림으로써 프랑스혁명 과정이 보수화됐다) 쿠데타로 실각하자 그의 동생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2주 만에 풀려난 그는 우여곡절 끝에 1795년 반동 쿠테타 군의 지도자 중 하나인 파울 바라스(Paul Barras·1755~1829)에 의해 발탁돼 10월 파리에서 일어난 국민공회(國民公會)에 대한 왕당파의 봉기를 포병을 이용해 진압하는 수훈을 세운다. 이 전공으로 부와 명성과 권력을 한꺼번에 쥔 나폴레옹은 이탈리아 파견군사령관으로 임명된다. 그리고 1796년 3월9일 바라스의 옛 정부이자 당시 사교계의 꽃이었던 조제핀(Josephine de Beauharnais)과 결혼한다.
결혼한 지 불과 이틀 후 이탈리아로 떠난 나폴레옹은 1797년 오스트리아군을 대파하면서 프랑스의 힘을 과시했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 그의 명성과 영향력은 한층 더 높아져 일부에서는 독재자의 출현 가능성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1798년 5월 대군을 이끌고 이집트로 출병했다. 그의 목적은 이집트를 장악함으로써 당시 프랑스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영국의 인도 루트를 차단하는 것. 또 이를 통해 인도 무슬림군과 연합해 영국을 협공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영국 해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전투는 여의치 않았고, 프랑스 본국의 정세도 급박하게 변하고 있다는 소식에 나폴레옹은 1799년 10월 프랑스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곧이어 쿠데타를 일으켜 3명의 통령(consul)을 두는 새 헌법을 만들어 자신은 원로원으로부터 임기 10년의 제1통령으로 임명된다. 3명의 통령이 있다고 하나 실제 권력은 제1통령인 나폴레옹에게 집중돼 그는 불과 30세의 나이에 사실상 프랑스 정권을 장악한다.
권력의 정상에 선 나폴레옹은 내정을 개혁하는 한편 1800년에는 대규모 이탈리아 원정에 나섰다. 당시 이탈리아는 그가 이집트 원정에 나가 있는 동안 다시 오스트리아군의 지배를 받았다. 일부에서는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작전 계획에 우려를 표명했으나 앞서 말한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라는 명언대로, 결국 오스트리아를 굴복시켰다.
나폴레옹은 자신의 화려한 업적과 나날이 치솟는 인기를 바탕으로 1802년 종신 통령을 거쳐 1804년 12월2일에는 마침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해 나폴레옹 1세가 됐다. 조제핀은 자연히 황비가 되었다. 이때 평소 나폴레옹 예찬자였던 베토벤이 그의 즉위 소식을 듣고 ‘영웅 교향곡’을 나폴레옹에게 바치려던 계획을 취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804년 황제 즉위 후 ‘나폴레옹 세상’
이듬해인 1805년 나폴레옹은 영국이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결성한 제3차 대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치른다. 비록 10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넬슨이 이끈 영국 해군에 패배해 제해권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그로부터 6주 후인 12월에는 유명한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의 두 황제군을 성공적으로 격파해 프랑스 육군의 위상을 유럽에 떨쳤다. 나폴레옹은 곧 샤를마뉴 대제에서부터 거의 1000년간 이어져온 신성로마제국을 사실상 해체시키고, 이에 위협을 느낀 프로이센이 영국, 러시아, 스페인 등과 결성한 제4차 대프랑스 동맹도 격파했다. 1807년에는 폴란드에 진격하고, 이어 스페인 국왕 페르디난드 7세를 내쫓고 스페인 통치권도 확보했다.
1809년 제5차 대프랑스 동맹 역시 성공적으로 방어한 나폴레옹은 1810년 오랜 연인이었던 조제핀과 이혼하고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혼인했다. 이 일로 그렇지 않아도 좋지 않은 관계였던 교회와 거리가 더욱 멀어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때까지 유럽은 그야말로 나폴레옹 세상이었다. 그가 존재 자체가 프랑스의 승리와 영광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1812년 6월23일 주위의 거듭된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감행한 러시아 원정이 그가 몰락하게 되는 단서를 제공한다.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군은 모스크바까지 점령했지만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도주한 러시아군의 전술과 동토의 혹한에 시달리면서 원정 실패를 인정하고 비참하게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전승을 구가하던 프랑스군의 이런 쇠퇴를 목격한 주변국들은 제6차 대프랑스동맹을 결성해 1813년에는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을 크게 격파했다. 1814년에 들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3월31일에는 마침내 동맹군에 의해 파리가 함락된다. 전쟁 패배와 부하 장군의 배신까지 겹치면서 나폴레옹은 4월16일 퐁텐블로 조약 체결과 함께 지중해의 작은 섬 엘바로 유배된다.
나폴레옹은 이듬해인 1815년 2월26일 엘바 섬을 탈출하고 3월에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했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면서 재기에 실패하고 만다. 그 뒤 남대서양의 한가운데에 있는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고, 결국 1821년 5월5일 그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사인으로 지금까지 독살설 등이 끈질기게 제기되고 있으나 공식 사인은 위암이다.
그가 죽으면서 마지막 남긴 말은 “프랑스, 군대, 군통수자, 조제핀”(France, Arm′ee, Te^te d’arm′ee, Jos′ephine)이었다고 한다.
그의 마지막 유언과 같이 누구보다도 프랑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은 그만큼 시대의 영웅으로서 또 매력적인 풍운아로서 지금까지 프랑스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그가 프랑스의 자랑이자 또 다른 상징물인 와인과 코냑에 그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50여 차례 전투에서도 꼭 챙긴 샹베르탱 와인
나폴레옹의 술 중에서 먼저 부르고뉴 지방의 유명한 명품 와인 샹베르탱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샹베르탱(Chambertin)은 지역-마을-포도밭 순으로 등급 체계가 나누어져 있는 부르고뉴 AOC(고급와인산지)에서 코드드뉘(Co^te de Nuits) 지역, 주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마을에 속해 있는 특등급(그랑크뤼) 포도밭의 이름이다. 주브레 샹베르탱 마을에는 무려 9개의 그랑크뤼 포도밭이 있는데 이 중에서도 샹베르탱이 가장 유명하다. 나머지 8개의 그랑크뤼 포도밭도 샤르므-샹베르탱(Charmes-Chambertin), 샤펠-샹베르탱(Chapelle-Chambertin) 등에서와 같이 이름에 모두 샹베르탱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그 명성이 샹베르탱에는 미치지 못하고 유일하게 샹베르탱 클로드베즈(Chambertin-Clos de Be^ze) 와인만이 샹베르탱에 필적할 만한 품질을 가진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샹베르탱 포도밭이 조성된 것은 12세기에 들어서서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7세기부터 베즈(Be^ze) 수도원의 수도승들이 수도원 소유로 클로드베즈 포도밭을 운영하는 것을 보고 베르탱(Bertin)이라는 사람이 자기도 바로 옆에 포도밭을 만들면 똑같이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해 시작한 것이라고 한다. 그 후 이 포도밭을 베르탱의 밭(Champs de Bertin)이라고 부르게 되고 이 말이 축약돼 오늘날 샹베르탱(Chambertin)이 됐다.
샹베르탱은 피노누아 포도를 주품종으로 만든 적포도주로, 강하고 풍부한 맛을 자랑한다. 샹베르탱은 특히 예로부터 ‘와인 중의 왕(King of Wines)’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같은 부르고뉴 AOC에서 샹베르탱에 견줄 만한 와인은 로마네 콩티(Romane^e-Conti)와 몽하세(Montrachet) 정도다. 그러나 아쉽게도 샹베르탱 역시 부르고뉴 지방의 다른 와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소유자에 의해 밭이 분할돼 현재 샹베르탱의 이름하에 무려 23명의 소유자가 존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똑같은 샹베르탱 상표의 와인이라도 생산자에 따라 그 품질에서 많은 차이를 보여 샹베르탱의 명성에 못 미치는 와인이 유통되고 있는 실정이다.
나폴레옹이 이 샹베르탱 와인을 당시 어떤 경로로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이 와인을 무척이나 즐겨 마신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50여 차례 각종 전쟁에 나서면서도 절대 잊지 않고 이 와인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러시아 원정 때는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나서 그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크렘린 궁에서 샹베르탱을 마셨다. 그러나 그 후 러시아에서 패주할 때는 코사크(15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에 있었던 군사 집단으로 구성원의 출신 국가는 다양했다) 기병들에게 샹베르탱의 저장고가 노획당하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나폴레옹의 샹베르탱 와인 사랑을 화제로 삼아 일부 호사가들은 그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해 결국 재기에 실패한 이유도 전투 전날 샹베르탱 와인을 미처 준비하지 못해 이를 마시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폴레옹은 술을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대주가이거나 술이 아주 센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은 샹베르탱 와인을 즐기면서 종종 물에 타서 마셨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기준으로 볼 때 상당히 독특한 취향의 음주법이라 하겠다.
샹베르탱 이외에 나폴레옹과 인연을 맺은 와인에는 유명한 샴페인 모에 샹동(Mo‥et ·Chandon)이 있다. 1743년 에페르네 마을에서 클로드 모에(Claude Mo‥et)가 창립한 이 회사는 19세기 들어 나폴레옹과의 인연으로 일약 국제적 명성을 얻는다. 1792년 창업자 클로드 모에가 사망한 이후 회사의 경영을 책임지게 된 손자 장-레미 모에(Jean-Remy Mo‥et)는 1802년 에페르네의 시장이 된다. 그리고 1804년 새롭게 지은 회사 게스트하우스에서 나폴레옹과 그 일행들을 샴페인과 함께 성대히 대접할 기회를 갖는다. 나폴레옹은 그의 호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당시 제정되어 지금까지 큰 명예로 간주되는 레종 도뇌르(Lesion d’Honneur) 훈장을 수여한다. 이후 이 회사의 샴페인은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 사교계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알
모에 샹동사 역시 나폴레옹과의 이런 추억을 기리기 위해 1860년대에 출시돼 지금까지 판매량이 가장 높은 베스트셀러 샴페인 중 하나인 브뤼(Brut) 제품에 임페리알(Imperial)이라는 상표를 붙인다. 오늘날 국내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유명한 ‘모에 샹동 브뤼 임페리알’이 바로 그것이다.
나폴레옹의 흔적이 강력하게 남아 있는 또 하나의 술은 코냑이다. 코냑은 귀족적인 고급 술의 대명사로 오늘날 전 세계 애주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명주 중의 명주다. 그런데 코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브랜디와 코냑의 상관관계와 그 차이점을 정확히 아는 것이 중요하다.
브랜디(Brandy)는 한마디로 포도로 만든 증류주를 말한다. 세상의 모든 술은 기본적으로 발효주와 증류주로 나눌 수 있다. 따라서 곡물로 만든 발효주가 맥주이고 이를 증류한 것이 위스키라면, 포도로 만든 발효주는 와인이며 이를 증류한 것이 바로 브랜디인 것이다. 물론 브랜디란 명칭은 포도로 만든 증류주뿐만 아니라 다른 과일로 만든 증류주에도 사용될 수 있다. 칼바도스(Calvados)로 대표되는 애플브랜디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포도로 만든 브랜디가 가장 유명하면서도 보편적이기 때문에 그냥 브랜디라고 할 때는 보통 포도 브랜디를 자동적으로 의미한다.
브랜디는 이론적으로 와인이 생산되는 곳이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등지에서 광범위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브랜디의 대명사로서 또는 흔히 브랜디와 동의어로까지 혼용되고 있는 코냑은 실은 유명한 프랑스의 브랜디 산지를 일컫는 말로, 그 지방에서 나는 브랜디만을 코냑으로 지칭하게 되어 있다. 여기서 ‘모든 코냑은 브랜디이지만 모든 브랜디가 다 코냑은 아니다’라는 말이 나왔다. 코냑 지방은 지리적으로는 와인 산지로 유명한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보르도 지방 바로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코냑이란 술을 이야기할 때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술의 등급 체제다. 궁극적으로는 위스키에 12년산, 21년산, 30년산 등과 같이 숙성 연도를 표시하는 것이지만 일견 용어가 생소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나폴레옹 등급의 코냑’이라고 하면 마치 100년 이상을 숙성시킨 가장 오래된 코냑 등급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아마도 나폴레옹이 무의식중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최고 권위’라는 이미지가 크게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코냑에서 ‘나폴레옹급’은 중간 수준
그러나 실제 코냑에서 나폴레옹급은 전체 등급 중 중간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코냑 등급은 VS, VSOP, Napoleon, XO, Extra 등의 순으로 체계화돼 있다.
① VS는 ‘very special’의 약자로 예전의 별 3개에 해당하는 등급인데 최소 3년 숙성의 오드비(코냑의 개별 원액들)들을 함유하고 있다.
② VSOP는 ‘very special(또는 superior) old pale’ 의 약자로 최소 5, 6년 숙성된 오드비를 함유하고 있다. 이 용어는 1817년 뒷날 영국 국왕 조지 4세가 되는 당시 섭정왕자(prince regent)가 최대 코냑 회사인 헤네시(Hennessy)사에 코냑을 주문하면서 특별히 ‘very special old pale’ 한 것을 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③나폴레옹(Napole′on)은 흔히 100년 숙성 제품이니 또는 적어도 코냑의 최상위 등급을 가리키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나폴레옹 등급은 최소 6년 숙성된 오드비를 사용하는 VSOP보다 조금 상위 등급의 코냑을 일컫는 용어다.
④XO는 1870년에 처음 사용됐다. XO는 ‘extra old’의 약자로 알려져 있지만 ‘extraordinary’의 약자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는 단순히 옛날 헤네시 사의 직원들이 코냑통을 배에 선적하기 전에 표시한 기호였다는 설도 있다. XO는 보통 최소 15년 이상 된 오드비를 원료로 사용하고 있다.
⑤최근에는 웬만한 회사에서는 XO보다 상위 등급으로 Extra 라는 등급을 소개하고 있다.
⑥그리고 각 코냑 회사의 제품 중 최상위 제품으로는 각 회사가 자랑하는 최장기 숙성 오드비들만을 배합한 등급이 있다. 이들 제품들을 따로 전체적으로 부르는 명칭은 없지만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레미 마르탱사의 루이 13세, 헤네시사의 리처드 헤네시 등이 대표적인 예다.
그런데 이런 코냑 등급에서 사용되는 나폴레옹이라는 용어 이외에도 개별 코냑 회사 차원에서 나폴레옹과의 인연을 강조하며 자사의 코냑을 ‘나폴레옹의 코냑(The Cognac of Napoleon)’이라면서 대외 홍보에 적극 활용하는 회사가 있다. 헤네시(Hennessy), 레미 마르탱(Re′my Martin), 마르텔(Martell), 카뮈(Camus) 사와 더불어 세계 5대 코냑 회사를 형성하고 있는 쿠보와지에(Courvoisier) 사가 바로 그곳이다.
쿠보와지에 사는 코냑 마을과 함께 코냑 지역의 양대 축을 형성하는 쟈흐냑(Jarnac) 마을의 샤항트 강변에 자리 잡고 있다. 회사 역사에 의하면 19세기 초 에마뉘엘 쿠보와지에(Emmanuel Courvoisier)가 동업자 갈로아(Louis Gallois)와 함께 파리 근교 베시(Bersy)에 와인 회사를 창업했다. 그런데 1811년 나폴레옹이 이곳을 방문해 이 회사의 코냑을 맛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 이를 인연으로 나폴레옹이 1815년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될 때 특별히 이 회사의 코냑을 몇 통 배에 싣고 가게 된다. 그리고 항해 중에 나폴레옹이 동행하던 영국군 장교들에게 이 술을 대접하자, 술맛에 반한 그들이 이 코냑을 ‘나폴레옹의 코냑’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후 쿠보와지에 사는 회사의 모든 제품에서 나폴레옹과의 이런 인연을 적극 선전하고 있다.
나폴레옹은 생전에 샴페인에 관해 언급하면서 “샴페인은 승리의 순간 마실 가치가 있으며 패배했을 때도 필요로 한다(In victory you deserve champagne, in defeat you need it)”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분도 개인적 성취의 순간이나 아니면 좌절의 순간에 나폴레옹의 추억이 스며 있는 술을 한 잔 하면서 그의 영웅적 기백을 되새겨보는 것도 또 다른 현대적 낭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괴물 그렌델을 처치하고, 유명한 미드도 마실 겸 왔노라”
이 때문에 포도가 잘 자라 저렴한 가격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지중해 지역에서는 점차 인기가 떨어졌지만,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영국이나 북유럽에서는 인기가 여전했다.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작품 ‘베오울프’에서 축제의 술로 미드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같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인 노르웨이 등지에서는 신혼부부가 결혼하고 한 달 동안 이 술을 마시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꿀(honey)과 한 달(month-moon)이라는 말이 합쳐져 그 유명한 ‘허니문(honeymoon)’이란 단어가 탄생했다.
로버트 저메키스(Robert Zemeckis) 감독의 2007년 작품인 ‘베오울프(Beowulf)’는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유명한 서사시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로, 국내에서도 개봉돼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작품은 배우의 몸에 센서를 부착한 뒤 사람의 움직임을 그대로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탄생시킨, 이른바 ‘모션캡처’ 기법으로 만든 3D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의 사실적 표현이 매우 뛰어나 등장하는 인물들의 묘사는 거의 실사와 흡사할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지만, 말을 타고 달리는 부분 등 일부 장면에서는 아직까지 기술적 한계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를 만든 저메키스 감독은 1980년대 세계적 흥행 돌풍을 일으켰던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시리즈를 비롯해 ‘누가 로저 래빗을 모함했나’(Who framed Roger Rabbit, 1988),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 1994), ‘폴라 익스프레스’(Polar Express, 2004), ‘크리스마스 캐럴’(A Christmas Carrol, 2009) 등으로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거장이다. ‘포레스트 검프’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
한편 흐로드가르 왕은 그렌델을 무찌른 베오울프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며 그가 아끼던 황금 뿔잔을 베오울프에게 하사한다. 그런데 그날 저녁 또다시 많은 사람이 살육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렌델의 어머니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영문을 알 리 없는 베오울프에게는 참으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그에게 흐로드가르 왕은 자신과 그렌델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비밀로 한 채 이번 살육을 일으킨 그렌델의 어머니까지 처치해줄 것을 부탁한다.
왕위에 오르는 베오울프
흐로드가르 왕의 부탁을 한 번 더 들어주기로 한 베오울프는 최측근 부하 위글라프(브렌든 글리슨 분)만을 대동하고 그렌델 어머니가 살고 있는 동굴로 향한다. 베오울프는 동굴 앞에 위글라프를 남겨두고 황금 뿔잔과 운페르드가 선물한 보검을 들고 홀로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괴물이기에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형상을 한 그렌델의 어머니(안젤리나 졸리 분)를 만난다. 그런데 그렌델의 어머니는 베오울프에게 적대감을 보이기는커녕 그녀에게 죽은 그렌델을 대신할 아들을 하나 만들어달라고 유혹한다. 그러면서 그녀의 소원만 들어주면 베오울프를 왕으로 만들어주는 동시에 엄청난 부와 함께 영원히 남을 위대한 전설의 주인공이 되게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베오울프는 매력적인 그녀의 유혹을 차마 뿌리치지 못한다.
동굴에서 나온 베오울프는 그렌델의 어머니 대신 죽은 그렌델의 머리만을 들고 흐로드가르 왕국으로 돌아와 그렌델의 어머니 역시 자기 손으로 처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녀에게 주고 온 황금 뿔잔도 그녀와 싸우는 도중 동굴 물속에 빠뜨려 잃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그렌델 어머니의 매력에 대해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웰소우 왕비는 베오울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 다만 젊고 용맹한 베오울프에 대한 호감 자체는 숨길 수 없었다. 흐로드가르 왕 역시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다가 결국 사실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곧 세상의 허망함을 느끼고는, 베오울프에게 왕위와 함께 모든 재산, 심지어 젊은 왕비 웰소우까지 맡기고 자신은 자살을 선택한다.
장면은 바뀌어 어느덧 베오울프가 왕이 된 지도 50년 세월이 흘렀다. 충성스러운 부하 위글라프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간 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늙어가는 몸은 어쩔 수가 없다. 쇠약해져 가는 몸과 함께 지나간 인생에 대한 허무감이 점점 짙게 엄습하는 것도 막을 수 없다. 웰소우 왕비도 이미 늙어 베오울프의 옆자리를 애첩 우르술라(알리슨 로만 역)에게 넘겨준 상태였다. 그리고 그녀와 운페르드는 당시 신흥 종교로 북구에 전파된 기독교 신자가 돼 있었다(북구에 기독교가 전파된 역사적 시점을 고려할 때 사실 관계에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베오울프는 운페르드의 몸종이 우연히 황무지에서 황금 뿔잔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과거 그렌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아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런데 그 아들은 불을 내뿜는 무시무시한 용으로 과거 흐로드가르 왕의 일까지 포함해 아버지들의 죄를 처단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베오울프 왕국을 불바다로 만든다.
이제 베오울프는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는 괴물이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아들이기도 한 용과 최후의 일전의 준비한다. 그는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용의 급소를 공격해 그 심장을 제거함으로써 용을 처치한다. 그러나 그 역시 싸움 때문에 큰 상처를 입고 지쳐 죽어간다. 그런 그를 보며 오랫동안 그를 보좌했던 충신 위글라프는 ‘우리는 이제 영웅이 되기에는 너무 늙은 모양이다’고 한탄한다.
위글라프는 자식이 없던 베오울프의 평소 유언대로 왕위를 이어받는다. 그리고 고인이 된 전설적 영웅 베오울프의 마지막을 위해 배에 그의 시신을 싣고 성대한 수장(水葬)을 치러준다. 그의 죽음은 웰소우와 우르술라, 운페르드뿐만 아니라 몰래 그의 시신을 찾아온 그렌델의 어머니에 의해서도 애도된다.
영화 베오울프의 원작인 고대 영웅 서사시 베오울프는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작자 미상의 작품이다. 모두 3182줄의 이 작품은 10세기 말경에 만들어진 필사본이 유일하게 전해지는데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이 작품은 게르만 민족의 영웅서사시로서 완전히 보존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며 고대 영어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영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영미 국가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고문을 가르치듯 이 작품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실제 영화에서 운페르드로 출연한 유명한 배우 존 말코비치는 고교 시절 이 시를 배웠다고 말한다. 그리고 당시 수업 시간에 시 내용 중 일부를 암송하지 못하면 선생님에게 쥐어박힐 때도 있었다고 회상한다.
이 작품은 베오울프의 나이와 영웅적 모험담의 성격에 따라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의 두 부분으로 나뉜다. 덴마크 흐로드가르 왕국에서 그렌델 모자(母子)와의 대결 장면을 그린 전반부가 젊은 베오울프의 패기에 찬 무용담에 치중돼 있다면, 2200행부터 시작되는 후반부는 왕위에 올라 50년간 왕으로 통치하다 불 뿜는 용과의 싸움에서 장렬한 최후를 마치는 베오울프의 고뇌에 찬 만년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작과 다른 줄거리의 영화
그런데 영화 베오울프의 내용 중 일부는 시나리오 작가(닐 게이먼, 로저 아바리)가 영화를 위해 원작과는 달리 재미있게 해석한 부분들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베오울프가 그렌델 어머니를 죽인 것으로 돼 있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에서는 그가 그렌델 어머니의 유혹에 넘어가, 그 결과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을 두었다는 설정이다. 작가는 이런 해석이야말로 그렌델 어머니와의 대적과 용과의 결투 사이에 있는 50년이라는 긴 이야기 간격을 보다 의미 있고 자연스럽게 연결해줄 수 있는 발상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기본 설정을 위해 원작에서는 베오울프가 그의 고향인 기트랜드(스웨덴)로 돌아가 왕이 됐다고 되어 있지만, 영화에서는 덴마크 흐로드가르 왕국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왕위를 이어받는 것으로 만들어졌다. 그렌델 어머니가 아름답고 매력적인 미녀로 등장해 남자들을 유혹한다든지, 이런 그녀와 관계를 맺어 그렌델을 낳게 된 흐로드가르 왕의 이야기도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 줄거리다. 그런 면에서 그렌델 어머니 역으로 관능미 넘치는 안젤리나 졸리를 선택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줄거리의 변형은 고대 영문학을 전공하는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화를 감상하는 일반 관객으로서는 훨씬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이야기 전개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고대 스칸디나비아의 영웅과 왕들을 다룬 전설적 서사시에 근거를 둔 이 영화에서는 매우 흥미로운 술 하나가 시종일관 상당한 의미를 지니면서 등장한다.
먼저 영화가 시작하면서 웰소우 왕비가 술을 가득 따른 아름다운 황금 뿔잔을 손에 들고 흐로드가르 왕국의 대연회장 안을 걸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 술의 정체는 바로 이어서 흐로드가르 왕이 가마를 타고 연회장으로 들어오면서 술을 가져오라고 크게 소리치는 장면에서 금방 알 수 있는데 바로 ‘미드(Mead)’라는 이름의 술이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선 술인 미드는 연회장 안의 대형 나무통에 가득 담긴 상태로 연회장 내의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게 제공된다.
미드라는 술 이름은 이후에도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는데 왕의 최측근 신하인 운페르드가 그의 하인에게 술을 재촉할 때도 언급되고, 심지어 주연이 베풀어지는 대연회장의 이름조차 미드홀(Mead Hall)이다. 미드라는 술 이름은 마침내 바다를 건너온 기트족의 용사 베오울프가 흐로드가르 왕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그렌델이라는 괴물도 처치하고 한편으로는 그 유명한 흐로드가르 왕국의 ‘미드’도 마실 겸 해서 왔노라”고 말하는 데서 그 상징성이 더욱 부각된다. 그 후 미드는 베오울프가 그렌델 어머니를 만나고 와서 그녀를 처치했다고 거짓말을 해 노고를 치하 받을 때도, 웰소우 왕비가 따라주는 술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야말로 당시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술이라면 곧 미드를 뜻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면 원작과 영화에서 이토록 비중 있게 등장하는 미드라는 술은 과연 어떤 술일까? 미드는 한마디로 말하면 벌꿀로 만든 와인 즉 ‘벌꿀 와인(Honey Wine)’이다. 미드가 만들어지는 기본 원리는 매우 간단하다. 즉 벌꿀에 원래부터 존재하는 당 성분에 효모가 작용하기만 하면 화학반응에 의해 알코올이 생성돼 미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연히 벌꿀에 물을 타서 적당히 희석된 상태에서 그냥 두는 일이 생기면 주위 환경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효모에 의해 알코올 발효가 저절로 일어날 확률이 생긴다. 그만큼 자연 상태에서 쉽게 술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벌꿀 와인 미드는 포도가 어느 정도 으깨져 즙이 나와야 발효가 일어나는 포도주나, 싹이 튼 곡물이 반드시 필요한 맥주보다 오히려 더 오랜 역사를 가진 인류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술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신혼부부가 한 달간 마신 술
미드는 오래전 한때 유럽 전역에서 널리 음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인구가 증가하면서 상대적으로 벌꿀의 공급이 부족하게 됐고, 이를 재료로 만드는 미드의 가격 상승도 불가피했다. 이 때문에 포도가 잘 자라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보다 맛있는 포도주를 만들 수 있는 지중해 지역에서는 점차 그 인기가 퇴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포도 재배가 되지 않는 영국이나 북유럽에서는 미드가 여전히 인기를 유지했다. 덴마크를 배경으로 한 작품 베오울프에서 축제의 술로 미드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특히 같은 스칸디나비아 지역인 노르웨이 등지에서는 신혼부부가 결혼하고 한 달 동안 이 술을 마시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에, 꿀(honey)과 한 달(month-moon)이라는 말이 합쳐져 그 유명한 ‘허니문(honeymoon)’이란 단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북유럽을 중심으로 꾸준히 음용되던 미드는 종교개혁이라는 예기치 않은 사회변화 때문에 역사적으로 또 한 번 힘든 상황을 맞는다. 16~17세기 유럽 전역을 휩쓴 종교개혁의 열풍으로 이전에는 수많은 양초를 사용해가며 화려한 의식을 수시로 거행했던 교회에서 더 이상 과거처럼 화려한 의식을 치르지 않아 양초 수요가 크게 줄어들게 됐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당시 양초를 만드는 주 재료였던 벌꿀 왁스에 대한 수요가 줄었고, 이 때문에 수입이 반 이상 준 양봉업자들이 자구책으로 벌꿀 가격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벌꿀 가격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미드 가격에도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는 미드의 대중적 인기가 떨어지는 원인이 됐다. 다만 와인을 생산 못하면서 종교개혁의 영향도 크게 받지 않았던 폴란드나 정교회(orthodox church)에 속해 있던 러시아 등에서는 미드가 그 명맥을 유지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유럽 전체적으로는 침체를 면할 수가 없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미드는 한동안 대중적으로는 잊힌 술이 됐다.
그러나 이렇게 역사적인 굴곡을 경험했던 벌꿀 와인 미드는 최근 그 오랜 침체기에서 벗어나 세계 각지에서 다양한 제품이 소개되면서 특히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색다른 트렌드의 술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벌꿀에 효모, 산, 영양소 첨가
그러면 미드를 만드는 과정에 대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미드는 앞서 언급한 대로 포도주에 비해 그 제조 과정이 간단하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는 희석된 벌꿀(보통 꿀의 당분 농도는 70~80% 정도인데 이를 22% 정도로 조절)에 어떤 효모든 접촉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이렇게만 해서는 좋은 맛의 미드를 만들 수 없다. 보통은 양질의 벌꿀에 와인에 사용되는 상업적 효모를 사용하고 여기에다 벌꿀에는 없는 신맛을 보충하기 위해 산(구연산이나 주석산)이나 기타 영양소 등 약간의 첨가물을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드라이’한 맛의 미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3주 정도, 그리고 ‘스위트’한 종류의 미드는 상대적으로 많은 양의 벌꿀을 사용해 4개월 정도 발효시킨다. 발효 후에는 소정의 정제 과정을 거친 후 포도주와 같이 숙성 과정을 거치게 된다. 보통 1년 정도 숙성시키는데, 숙성 과정을 생략하면 효모 냄새가 나면서 향이 부족하고 종종 혼탁한 미드가 만들어진다.
미드는 만드는 방법과 첨가 성분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류된다. 즉 당도에 따라 스위트, 드라이, 그리고 중간 형태로 나누어지며, 탄산가스의 존재 여부에 따라 비발포성(still) 타입과 발포성 타입으로 나누기도 한다. 또 아무런 첨가물을 사용하지 않은 전통 미드와 더불어 최근에는 다양한 첨가물을 사용하는 제품이 많이 소개되는데 이 경우 첨가물의 종류에 따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벌꿀 술’이라는 이름의 술이 있기는 하나, 이는 소주에 벌꿀을 주로 벌집째로 넣어서 가정에서 담그는 술 형태로 만든 것이다. 이 때문에 벌꿀 자체를 발효시켜 만든 전통 벌꿀 와인 미드와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벌꿀이 건강 이미지를 갖기 때문에 만일 미드와 같은 본격적인 벌꿀 술을 만들어 팔면 상업적으로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실제 인터넷상에서 보면 책에서나 외국 여행 중에 미드라는 술을 맛본 뒤 국내에서도 이 술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는 사람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어쨌든 여러분도 혹시 미드라는 술을 만날 기회가 생긴다면, 반드시 신혼부부가 아니더라도 그리고 한 달이 아니라 단 일분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미드의 새롭고도 달콤한 유혹에 그야말로 허니문처럼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