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이가 휴식하는 동안 성진과 다시 한번 상류 계곡 탐색을 했는데...
항복!!! 더 이상 전진 불가
해산터널에서 비수구미까지의 트래킹 길 모습인데, 길가에 다래가 지천이로구나..
얼마후 영이에게 다래술 맛을 볼수 있을 듯..
팬션도 들어섰는데..
1박에 15만원이라지?
여기와서 엄청난 크기의 토종닭(5만원)을 안 먹을 재간이 없는게다..
장씨 집안 가업을 승계받을 아드님이다
장윤일과 김영순
원주 사람 장윤일은 나이 스물에 화천 비수구미로 흘러들었다. 화전(火田)으로 먹고살리라 호수로 숨어들었다.
일찌감치 춘천에서 들어온 윗집 처녀 김영순을 만나 혼인을 했다. 김영순은 열일곱이었고 장윤일은 스물셋이었다.
1965년 4월 7일이었다.
일곱 남매 장녀 김영순이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하도 착하다고 해서 결혼했다. 밥 하나 안 시킨다더니 밥 안 시키긴,
다 시켰어, 다. 이 사람이 거짓말을 그렇게 잘해." 남자가 말했다. "… 그러지 않으면 여자들이 안 오거든. 누구나 다
그런 거야." 김영순이 말을 잇는다. "뭐? 밭 양쪽에 내 사진 걸어놓고 김 한 번 맬 때마다 내 사진 보면서 살겠다고?
얼마나 근사해? 그 말에 속아서 내 나이 열일곱에 이 남자랑 결혼했다. 어이구, 사진 한 장 찍지도 못하고 살았네."
그 삶은 이러했다.
혼례 열흘 만에 남편 장윤일이 입대했다. 제대를 한 달 남기고 맏아들 복동이 태어났다. 돌아온 남편은 단양 탄광촌
잡부로 떠났다. 온통 새까만 세상에 질려, 아들을 둘러업고 따라간 아내는 40일 만에 남편을 끌어내 비수구미로
돌아왔다. 낚시꾼들 수발 들며 돈을 벌었다. 남편은 나물 뜯으러 가고 아내는 밥을 했다. 조각배 저어가며 낚시꾼들
심부름을 했다. 비가 오면 물 퍼내며 노를 저었다. 살림집에는 손님 재우고 부부는 비닐하우스에 살았다. 눈을 뜨면
밤새 내뿜은 숨결이 이불이며 옷가지를 적셔 놓았다. 장작불에 옷가지를 말리며 밥을 짓고는 조각배로, 산으로 달려갔다.
산으로 간 남편은 비탈을 굴러 피투성이로 돌아오곤 했다. 뱀에게 물려 죽을 뻔도 했다. 그럴 때면 아내 김영순은
이리 말했다. "애들 안 가르치고 그냥 당신하고 나하고 그냥 우리 식구가 다 사는 게 행복하지 않을까." 다음 날이면
애들 가르치는 게 합당하다고 자동으로 마음이 변하곤 했다. 하여 뱀에게 물리고 비탈을 굴러 내려오는 삶이 반복됐다.
김영순이 말했다. "살아온 생각 하면 혼자 자면서도 웃는다. 내가 맹추라, 그게 사는 건 줄 알고 살았다."
평화의 댐과 비수구미
겨울 넉 달 호수가 얼면 건넛마을까지 걸어서 마실을 다녔다. 밤새워 화투 치며 놀았다. 날이 새면 함께 다음 집으로
가서 또 놀았다. 보름밤이면 계곡 위로 올라가 후라시 비추며 메기를 잡았다. 딱 먹을 만큼만 잡았다. 1987년 그 이름도
유명한 평화의 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꼭대기 해산령에 터널 공사가 시작됐다. 계곡 아래 마을까지 작업도로가
생겼다. 대단히 많이, 삶이 바뀌었다. 장윤일이 말했다.
"트럭 기사들이 차 밧데리로 메기를 잡은 거라. 그 많은 트럭이. 한 시간에 비료 포대로 2개를 잡았느니, 3개를
잡았느니 소문이 나서 터널 공사 2년 내내 밧데리로 계곡을 지져놓은 거라. 나중에는 개울에 약을 풀어서 집
앞에까지 고기들이 떠올랐어." 충직하던 누렁이도 두 번 차로 쳐서 둘러업고 가버렸다. '귀한 생명들이니 먹을
만큼만 잡으라'고 네 남매에게 들려주던 교훈은 무색해졌다. '에티켓이라곤 전혀 없는 도시 사람들' 손에 고추밭은
짓밟히고 익지도 않은 배나무는 가지째 꺾여나갔다.
이리로 가기도 하고 저리로 흐르기도 하는 게 인생이다. 평생 못 볼 줄 알았던 길이 마을 어귀까지 뚫렸다. 무례한
도시 사람들이 비수구미에 돈을 뿌리고 갔다. 부부가 던져대는 날것 그대로 인생 이야기에 그 사람들이 울고,
또 찾아온다. 김영순이 말했다. "내 살아온 역사가 너무 힘들었는데, 남에게는 재밌나 봐."
그 돈으로 부부는 네 남매 어엿하게 키워 시집 장가 보냈다. 전기밥솥에 밥 안쳐놓고 밭에서 일하다가 집에 가서
먹고 싶다던, 문명화의 꿈도 실현됐다. 김영순 표 산나물밥 식객들이 팔도에서 몰려든다. 밥값 깜박하고 갔다가
입금해주는 손님들을 보면 "그래도 우리나라는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영순이 말했다. "댐 공사 전에는
70리 뱃길뿐이었는데, 꿈같은 얘기였는데… 여기 길 날 줄 누가 알았냐고.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면허증을 딸걸.
어디 가고 싶어도 누가 데리고 가야 갈 수 있으니 이거 원, 더러워서." 목소리에 물기가 비쳤다.
8/25
이장집(해산 민박) 뒤로 수동 분교(4km) 가는 길이 나 있어 다시 새벽 산책 나서는데...
이곳 비수구미의 터줏대감같은 소나무 뒤편으로 호수 건너 외딴집이 보였다...
이 곳에서 보기엔 전혀 찻길은 없고 배로만 접근이 가능할 듯한데
아마도 극성 낚시꾼들이나 많이 찾아 갈듯하다
이 집은 호수에서 민물 양식도 하는 듯..
반 정도 가다 돌아 왔는데
산 속에서 이렇게 초크그물(세겹그물)을 걸어놓고 물고기를 떼어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진을 찍으려니 깜짝 놀라며 앞 뒤를 막고 절대 못 찍게 하는 것이 떳떳치 못한 기업식 싹쓸이 어획법..
다리 밑에서 수일간 야영하는 두 부부인데, 말리던 여자의 억양도 어딘가 연변투였더라만..
하긴 이 곳에 오는 목적이 트래킹이나 물고기 잡기.. 아니면 우리처럼 더위 피해 도망가기..
오늘로 그 살인적인 여름은 안녕이련가?
오전중엔 날씨가 흐리니 물장난하다간 감기에 걸릴 듯해
계곡가에 가서도 발목만 담근 후 낮잠이나 즐기다
"김 영순표" 산채 비빔밥(1만원)으로 점심을 해결하고...
장 염감님이 저 큰 가마솥에 옥수수 잔뜩 삶아놓고
식사한 손님에게 남기거나 가져가지만 말고 이자리에선 한 없이 먹으랍니다..
민박집에서만 느낄수 있는 잔정인데
영감님 내외와 아들 내외 모두가 투박하긴 하지만 잔잔한 산골 인심을
그 짧은 시간에도 충분히 느끼게 하여 주었다.
하기사 인간극장이란든지 매스컴에 많이 노출된 유명인들인데....
들어갈 때의 황당함과 긴장감이 모두 사라지고 여유 만만한 표정들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당연히 평화의 댐을 다녀와야지..
평화의 댐, 미륵바위와 꺼먹다리
화천읍에서 461번 도로를 거쳐 평화의 댐으로 북상해본다. 화천댐을 건설할 때 만든 다리가 나온다. 목재 상판과
난간을 콜타르로 칠해 꺼먹다리다. 발전소에서 그 옆에 콘크리트로 또 다른 다리 기초를 만들다가 해방이 되었다.
해방 후 소련이 그 위에 교각을 만들었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상판을 올려 다리를 완성했다. 세 나라가
합작한 다리 이름은 구만교다.
더 북상하면 비수구미를 격변시킨 해산터널이 나온다. '아흔아홉구비'라는 표현이 절대로 과장이 아닌 험한 길
(내비게이션을 보면 한숨이 나온다) 끝에 평화의 댐이 나온다. 옆에는 공원이 있다. 전 세계 분쟁 지역에서 수집하고
기부 받은 탄피 1만관(37.5톤)을 녹여 종을 만들어놓았다. 평화의 종이다. 9999관으로 종을 완성했다. 1관은 따로
비둘기 오른쪽 날개를 만들어놓았다. 통일이 되는 날, 종 위에 날개 없이 앉아 있는 비둘기 한 마리에 날개를 붙일 계획이다.
공원 아래쪽에는 비목공원이 있다. 가곡 '비목(碑木)'을 기념하는 공원이다. 1960년대 ROTC 장교 한명희(전 대한민국
예술원 부회장)는 화천 비무장지대에서 녹슨 철모와 돌무덤을 발견했다. 1967년 그가 쓴 시에 작곡가 장일남이 곡을
붙인 가곡이 비목이다. 10년이 지난 1977년 2월 17일자 경향신문은 "이 노래가 실린 음반 판매량은 이미자의 음반
'동백아가씨'(15만 장)를 크게 앞질렀다"고 보도했다. 공원에는 비목을 상징하는 조형물과 철조망이 설치돼 있다.
마음이 먹먹하다.
2009년 4월 25일 김영순이 환갑을 맞았다. 시동생 장윤옥이 비수구미 계곡 7㎞를 걸어내려와 형수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아궁이 앞에서 뜬눈으로 밤새우기 일쑤였던 나날들… 긴 세월 모진 세월 뒤로 하고…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모두 울었다. 거짓말쟁이 남편도 울었다. 김영순은 "가보(家寶)"라고 했다. 2013년 5월 10일, 결혼한 지 48년 한 달 3일
만에 김영순은 평생 소원이던 웨딩사진을 찍었다.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리 답한다.
"너는 왜 했냐. 나도 여자다."
461번 도로변은 단장됐다. 주민들은 미륵바위에 기대어 미래를 꿈꾼다. 소설가 김훈이 '숲으로다리'라 명명한 낭만적인
다리가 숲으로 사라진다. 비수구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작업도로는 산책로가 되었다. 화천 사람들은 그 길을
선로(仙路)라고 부른다.
그 길에서 화전민 아들 장복동(49)에게 물었다. "당신은 비수구미에 살 것인가." "죽을 때까지." 또 물었다. 20년 뒤
비수구미에 와도 반기겠냐고. "죽을 때까지." 부부가 떠나고 없을지도 모를 그 작은 계곡에서, 나는 칠십 노인 장복동과
재회하는 꿈을 꾸었다. 모진 삶 다 끝나고 훨훨 나는 꿈을 꾸었다.
Copyright ⓒ 조선일보 & Chosun.com(2016. 8. 25)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윗글 포함)
귀가하는 중간의 해산터널 지나기 직전에 있는 비수구미 트래킹 시작 지점...
2014년에 보호구역에서 해제된 곳이다.
6km의 잘 정돈된 계곡가의 하산길을 걸어 내려가면 비수구미 마을에 닿게 된다.
자가용을 가져가면 한명이 운전해 호수가에서 대기해야 하고,
관광버스 대절시는 산책 다리를 건너 4km정도 추가로 걸어가는 명품길이란다.
가을의 비수구미 계곡 단풍이 대단하단다.
설악 단풍의 절정시기와 같다는데.....
나도 10월달에 장 염감님과 재회하는 비수구미가 꿈속에 나타날 듯...
첫댓글 사진 잘 보았네. 여름 휴가 잘 다녀오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