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당이나 교구에서 볼때에 성서형제회는 여러 단체중의 하나일뿐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본당에서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지요 지금은...
저는 오히려 이들의 출발은 지난 1980년대라고 여겨집니다
한국은 지난 1980년에 특히 선교200주년이 되는 1984년도와 세계성체대회가
있는 1989년도는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방한하셔서 천주교회의 인기는 최고를
이룰떄입니다
1984년도는 재가 활동을 하지 않았을때여서 잘 모르겠고
1989년은 기억이 납니다
여의도에서 세계성체대회가 열렸지요 여의도내에서는 차가 주차할수가
없어서 그근처 영등포에 버스를 주차하고 시흥성당사람들이 다리를 건너
여의도로 들어갔지요 여의도내에서는 마치 입국하듯이 문을 여러곳에 설치해서
그곳을 통과해서 대회장소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시기를 거치면서 본당에는 수많은 예비자들이 몰려들었지요
이들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떄문에
공소들이 몰락하는 시기였습니다
제가 아는 서울 모성당은 주택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신자수에 비해서
엄첨난 예비자들이 몰려서 그들을 관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그때에는 지금과 같은 소공동체운동을통한 구역모임도 없었고요
예비자교리는 종전처럼 해오던 대로 하였던 것입니다
신학론 같은 어려운것을 가르쳤지요 저는 세례를 받은후에 1990년대에 레지오하면서
교리반을 봉사하면서 들어봐도 잘 이해가 어려웠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비자들이 몰려오는데 이를 관리할 봉사자들이 절대 부족하는 것이었지요
이를 교회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 같았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는 말에게 물을 물가로 데리고 갈수는 있어도
물을 먹게는 할수가 없얶던 것입니다
본당이나 교구의 사제와 봉사자들의 인식은 전달만 하면 평신도들이 스스로 헤쳐나갈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예비자교리를 통해서 교육을 시켰더니만 세례를 받고 일년이 채 가시기전에
대부분의 새신자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다들 느끼지만 세례를 받고 그이후 몇년을 지나더라도 신앙생활에 대해서 잘 알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당교우들이 새신자들에 대한 관심이 세례를 받은후에는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신자는 교회생활을 방황하다가 결국은 떠난다는 것입니다
제가 서울시흥성당에 다닐적에 어떤 신부님은 이를 예방한다고 하면서
예비자교리시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늘인다는 것입니다
그당시 지금도 거의 변화가 없지만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신부님이나 수녀님이셨던 것입니다
완주해서 세례를 받은사람은 성당을 잘 다닌다고 하더라도 세례받기전에
중도 탈락자들이 많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리반 봉사할때에 신부님이 교리를 가르치기전에 먼저와서
간식도 준비하고 예비자들의 출석을 체크하고 기도드리면 신부님이 오셔서
교리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출석율이 그다지 높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은 그전 예비자반에서도 교육을 받았지만 시간이 모자라서 그때에도 세례를 받지 못했지요
지금도 출석일수가 짧아서 세례대상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그런사정을 잘 아는 당사자도 세례를 받기를 포기한 상태였지요
저는 신부님과 상의 했습니다
이런식으로는 그분을 세계받기란 어렵습니다 일단은 요번에 세례를 받게 해줍니다라고
건의해서 세례하는 당일에 연락해서 세례를 받게 했습니다
세례를 받은후 냉담하는 과정을 보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세례후에 한달이 지나먄 첫교해성사에 대해서 교리를 받고 실제적으로 고해성사를 드립니다
그대부터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사회생활이 더 익숙해져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주일미사를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고해성사를 보셔야 하는데요
고민이 됩니다 이때에 대부라도 나서서 이들 문제를 해결해주면 좋을터인데요
대부조차도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것이고 이를 신부님과 상담하기도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고심하는 새신자는 두번째 주일미사를 빠지게되고
그이후는 감당이 안되게 그 횟수가 늘어가면서 결국은 교회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서울교구는 이들의 상황을 인지해서인지 세례를 받은후에 가끔적 빨리
견진을 받게 한것입니다 통계적으로 견진을 받은 자들중에서는 냉담자발생율이 낮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한창 많이 견진을 받을대에는 본당성당이 견지자들과 그들의대부모만으로
가득찰 정도였지요 어떤 신부님은 견진교육을 확실히 시키기 위해서 기간을 일년으로 늘였고요
그안에는 성령세미나과정도 포함시켰습니다
성령세마나준비가 그다지 쉽지 않습니다 많은 봉사자들이 필요하고요
7주간 강론하실 분이 필요하기 떄문이지요
성령세미나를 거친사람들은 대부분 견진을 받고 나서는 성령기도회근처에도 오지않고요
이들 기도모임으로 인도하는 이들도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렵게 준비해서 배운것들이 6개월이 채안되어서 그전상태로 되돌아갑니다
신앙생활은 늘 후속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당에서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가 유아세례자들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정해서 세례를 받은것이 아닙니다
주일하교를 다니면서 첫영성체교리를 받고 열심히 다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성서형제회의 모습으로 되돌아봅시다
저는 2010년에 성령기도회에 오시는 모니카 마리아의 두분 자매를 통해서 성서형제회를 소개받았습니다
본당에서 여성팀들만 있을떄에 저는 여성팀에 참여하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때 만난 사람이 연희마리아였지요 그는 같은 아파트단지에서 살았기에
성서형제회에 들어오기전부터 잘 아는 사이였지요
성서형제회는 다른지역의 교도소봉사와 다른본당의 견지교리반에서 봉사했습니다
그때에 당산동에 같이가서 한 월례회의는 인상적이었지요
회장이랄까 특이했지요 갑짜기관심을 많이 가지고 결국은 연수회에 참가하게되었지요
그리고 월례회의에도 참여하였고
안산의 원곡동도 남자팀 1팀을 포함해서 4팀으로 늘어갔지요
매잘한번씩 전체모임을 하고 떄로는 근처 남양성모성지에도 가곤 하였지요
그러나 제가 들어오고 나서 외부의 활동은 거의 사라졌지만
수원에서의 팀들과 는 교류는 있었던 것 같았지요
그러나 수원교구에서 성서사도직 프로그램이 거룩한 독서로 정해지고
본당에서 이곳으로 옮겨지기를 강력히 원했기에 수원에서의 성서형제회는 이탈자들이
많이 생겨났지요 그이후에 성서를 가르치는 여정이 생겨났고 해서
급격히 붕괴되었는데요 원곡도 이의 영향을 받은지 팀의 활동이 감소하였고
이들의 이탈을 막지 못했지요
이런일은 성서형제회공동체만의 일은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본당에서 신부님은 서을의 5천명이상의 등록신자를 가진 본당에서는 보좌신부가 있었고요
보좌는 2년마다 본당신부는 5년마다 이동이 됩니다
수원교구내에서는 큰 본당을 제외하고 보좌가 없습니다
그런데요 신부님이 새로 오시면 그이전의 사목은 무시되고 그분만의 영성으로 사목을
해 나갑니다. 그래서 봉사자들은 신부님이 새로 오시면 한동안 갈팡질팡합니다
그것은 신부님의 사목방향을 이해하는데와 납득해서 받아들이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고
새로 오신 신부님도 본당에 적응하기 위해서 시간도 걸리고 말입니다
이런 영향을 많이 받는 것은 여러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동안 평신도들의 활동이 거의 본당신부에 대한 의존도가 아주 높기 떄문입니다
성서형제회가 전국단위로 활동하지만 여전히 그들이 속한 본당과 교구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떄로는 본당신부가 성서형제회에 관심을 많이 가질수가 있고
그 반대로 전혀 관심도 없고 오히려 다른곳에 집중할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수원교구에서 여정프로그램에 늦게 들어간 이유는 그 이전에는 대부분의 성당이
평일 낮반만 유지했기 떄문에 직장에 다니는 저로서는 참여하기가 어려웠지요
성서를 전부다 외워서 말씀하시는 신부님이 오셔서 저녁반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이런것 같이 전통이 이어져오는 것도 있지만 영향을 받고 사라지는 것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일이 잦아지면 평소 열성적으로 하는 단체활동도 줄이거나 그만두게 됩니다
그래서 본당에에서 소수의 봉사자들이 여러 단체에 관여합니다
본당에서 성가대도 하고 성령기도회나 전례부에도 참여하고 부설 노인대학에도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한분야에서만 집중해도 모자라는 판인데요
이런데에는 분명히 그 원인이 있습니다. 매번 새로오시는 본당신부의 사목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평시도단체를 어느날 갑짜기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몇몇사람들이 다른교구나 본당의 영향을 받거나 아니면 다른곳에서의 봉사자들의 영향으로
생겨납니다. 그리고 차츰 모임이 활성화되면 본당신부님의 허락을 받아서 임의단체로 등록이 됩니다
전주교구를 제외하고서는 나머지는 임의 단체입니다
지금 본당에서 단체활동이 늘 교구에서의 관심대상이 됩니다
그런일은 본당에서의 봉사자육성이나 그 내용에 있어 보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는 교구에서 단체승인을 받으면 계속지속되었지만
요즈음은 거의 해마다 교구에 보고하고 재신임을 받는다고 합니다
왜그런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는 시노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는 한국에서도 교구마다 시노드를 정해놓고 그 사목방향으로 달려가는데요
이는 교구내에 전체적으로 다 적용되기 떄문에 본당마다 사정과는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해마다 시노드 사목지침이 내려와도 교구내에서도 어느본당은 열심히 하지만 또 다른본당은
거의 내용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1990년대 서울교구에서 청년성서모임을 할때에 느꼈지만
서울교구에서의 헌신적으로 활동하시는 한 사제와 이를 지원하는 수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것입니다. 서울교구에서 대부분 본당에서 방관할떄에 그 신부님은 잘 아는 신부님이나
후배신부님을 통해서 해결하신것입니다
그래서 일년에 한두번하는 성서잔치에 보좌주교님이 참석하시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청년성서모임은 서울교구에서 단체가 아니라 사목부의 한 조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 전주교구에서 겪고 있는 승인된단체로서의 어려움은 잘 알고 있습니다
대다수 임의단체이든 승인단체이든 본당에 속한 사람들이고 정관이러고 하는 회칙도 있고
지도신부님도 계십니다. 교구에서 염려할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본당에서나 교구에서 방관하고 있고 열성적으로 할려는 단체에게 큰 조건을 걸기에
이들의 활동이 주춤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박해시절을 떠올려봅시다
주문모신부님등 초대지도자급교우들이 다 잡혀서 순교한후에 조선에서는 30여년동안
사제없이 각지역에 뿔뿔히 흩어진 교우촌에서 여성회장에 의해서 운영되었지만
그들의 수는 해마다 늘어갔다고 합니다
그이후 조선교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선교사들이 들어오고 해서 그들이 제일먼저
조직을 정비할려고 해서 지역마다 모임을 만들고 그리고 기록을 남길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기록을 근거로 해서 초기봉사자들보다 먼저 알려지고 이들이 근간이 되어서 103위성인품이
된것입니다 그런데 선교사는 조선에 여회장을 중심으로 소공동체가 이미 이루어진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것은
교구의 정체이나 시노드나 사목정책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서형제회도 이런 방침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한때에는 교구등록만능주의자라서 모든 단체를 교구등록에 먼저 애쓰라고 했지만
지금은 달라지고 있지요 평신도내부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으면 새로운 회원을 영입해서
봉사자로 키워내지않으면 정체되거나 주춤하게 된다는것입니다
세상 모든것에는 악순환이 있고 처음에 생각하는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50주년을 돌파하는 성서형제회가 해야 하는 가장 급선무는 성서형제회의 초기의 정신을 되살려야
합니다. 왜 그때에 어린학생이 열정적으로 모임을 가졌느냐 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왜 우리공동체에 젊은이들을 찾기가 어려울까입니다
이는 젊은이들의 역할이 분명하지 않기 떄문이라는 것입니다
지난 50주년을 준비하면서 만든 자료들이 있습니다
창설자신부님이 쓴 글도 있습니다 봉사들의 헌신된 모습도 있습니다
과거 순교자의정신과 더불어서 초기 성서형제회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