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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사월초파일 봉암사를 탐방하고 돌아오는 길에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에 있는 마을 제비소를 들려보고 있습니다.
지도에서 보면 도경계선이 백두대간을 따라가지 않고 대야산에서 갑자기 흘러내려 중대봉을 지나고 선유구곡의 끝 부근인
제비소앞을 지나 화양천을 따라가다 장성봉을 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청주-미원-청천-화양동-517번도로-선유동입구-제비소마을. 승용차 약 한시간 거리
517번 도로에서 우측으로 화양천 지류에 제비소가 있고 도로표시판에 선유동 입구라는 표시가 보입니다.
이곳 제비소에서 조금 더가면 관평리가 나오고 관평리는 하관평, 중관평, 상관평 세개의 자연부락으로 장성봉과
촛대봉 사이를 계곡을 따라가며 화양천 좌측편에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도경계선에 걸쳐있는 관평리 세개의 마을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보고 싶네요.
이길을 따라가면 보람원-하관평 마을-홍주막마을(경북)-중관평을 지나 상관평에서 517번도로는 좌측으로 제수리치를
넘어 칠성 쌍곡계곡으로 가고 경북방향으로 고갯길이 포장되어 백두대간을 넘어가고 있고 이고개를 사람들이 불한티라
부르나 실제의 불한티는 상관평마을 위에서 우측산길로 접어들어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나오는 대야산과
촛대봉 사이로 넘는 고개로 용추계곡 완장리 벌바위마을에 이르는 옛고갯길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불한티를 잘못 표기하였는지 어떤 지도에는 불란치라고 표기하기도 하고 비리기미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새로난 불한티(922번 도로)는 80년대 이후 새로 확장한 도로이며 불한티 옛길은 그 흔적이 남아있고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사람들은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주변의 명소인 선유동은 제비소 아래를 충북선유동, 경북 완장리 용추계곡을 문경 선유동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도로에서 우측으로 조금 내려가면 나오는 제비소의 풍경이 좋기만합니다.
제비소는 백두대간의 산인 대야산-중대봉-449봉을 거처 내려온 산기슭에 접하고 있습니다.
풍경이 이만하면 명소라고 하여도 좋을것 같습니다. 사실 예전에는 더 아름다운 풍경으로 보였는데 현재의 517번
확포장도로가 만들어지면서 제비소를 도로가 치고 나가며 좋았던 모양새 일부가 망가져 축소가 된 모습입니다.
제비소 건너편 산기슭에 기대어 물가에 내앉은 작은 시골집이 한채 보입니다. 대나무가 우거지고 진달래라도 아름답게
집을 감싸고 있다면 소설이나 영화속에 나올만한 그림같은 그런집입니다. 집앞의 연두색 느티나무잎이 수면에 반사되고
있는 풍경도 예쁜집으로 사실 지금 이대로도 좋지만요.
마침 비닐하우스에서 농사일을 하고 있던 주인 내외분을 만나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고 집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니
혼쾌히 응하여 주십니다. 내친김에 말만 잘하면 커피도 한잔 마실수 있겠다는 말을 슬며시 내려놓자 어려운거 아니니
그럽시다 하며 앞장을 서서 집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사실은 아침에 봉암사를 가다 이곳에서 잠시 멈춘후 아저씨를 만나 오후에 뵙고 가겠다고 청을 하고 다시 만나고 있으니
우리는 이미 구면인셈입니다.
파란집에 살고있는 안주인인 아주머니가 돌다리를 건너가고 있는 모습이 그냥 한폭의 동양화로 다가옵니다.
그 뒤를 다시 어린강아지처럼 송영옥, 선림원, 영준이가 따라가며 파란집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징검다리를 재미있다는 듯이 건너가고 있습니다.
화양천에 비친 세사람의 물그림자가 좋고 빠알간색 그림자가 함께 물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뒤를 다시 어린강아지처럼 송영옥, 선림원, 영준이가 따라가며 파란집에 가면 무엇이 있을까 궁금한 마음을
안고 징검다리를 재미있다는 듯이 건너가고 있습니다.
화양천에 비친 세사람의 물그림자가 좋고 빠알간 색이 함께 물속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건너가신 아저씨가 6.25때 심었다고 하는 엄나무앞에서 어서 오라며 다시 반겨줍니다. 웃마을에 살고있는
마을사람들을 맞이하듯이 반가운 표정이 얼굴에 그려져 있어 진정으로 반가워하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서로 나누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행정주소가 경상북도 문경이라 말투가 억센 경상도 사투리라도 나오려니 하였는데 그도 아닌 충청도 말씨만 들리고 있네요.
충북의 마을답사를 하며 경북과 접한 많은 마을에 들리니 경상도 말씨가 조금씩 묻어있던데 여기는 아닌것 같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자 집이라고는 두집밖에 없는 이곳에 커다란 표지석이 이웃집 앞에 서잇습니다.
참 이상한일입니다. 번듯하게 십여호 이상으로 구성된 마을에도 별로 없는 마을안내 표지석이 두집밖에 없는
이곳에 커다란 모습으로 서있으니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봅니다.
" 여기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제비소)입니다 "
집앞으로 장성봉과 대야산을 이어가는 백두대간에서 시작한 화양천의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건너편에 비닐하우스가
길게 보이며 두어집이 있습니다. 그 뒤로 갈모봉이 자리잡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제비소 마을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선에 있어 마을이 둘로 나누워져 있고 현재는 다섯가구가 살고 있으며 그중 세집은
충북땅에 두집은 경북땅에 위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벽돌로 지은 삼칸집 마루를 북서풍을 막으려고 비닐로 둘러친 모습입니다. 거부감 없이 정겨운
시골집으로 저의 시골집과 흡사한 분위기입니다.
이집 주인인 최씨 아저씨와 이곳에 살기시작한 내력부터 지금가지 살아온 산골 생활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때로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가끔은 마음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툭 던지듯이 꺼내며 진솔한 그만의 삶을 들려줍니다.
주어진 운명을 거스르지않고 받아들이며 슬기롭게 살아온 삶의 지혜도 엿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찌보면 우리 부모님들의 이야기나 다름없는 그런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으로 들어오며 문패에도 쓰여 있었지만 최동환 (76세) 정옥분(70) 두부부, 최씨 아저씨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날
이때껏 이집에서만 살았고 아주머니는 청천 뒷뜰로 부르는 후영리에서 태어나 중매로 결혼하여 이집에서 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4남 2녀를 두어 두번째 아들과 이웃하여 살고 나머지는 모두 나가산다고 하네요.
할아버지가 청천에 살다가 제비소로 이사를 왔고 아버지때 바로 위에 있는 마을 하관평에서 살다가 다시 제비소로
들어왔고 본인은 제비소를 떠나본 일이 없다고 합니다.
밭 3200평정도 하관평 가기전에 다랑이 논을 800여평정도 갖고 있고 고추와 야채농사를 한다 합니다.
경북 가은으로 가고 있는 옛길이 궁금하여 물어보니 60년대만 하여도 선유구곡 옛길은 제비소, 관평리를 지나 불한티를
넘어가는 산속의 오솔길 정도였고, 70년대에 신작로로 확장되어 이용하다 지금같이 포장된 것이 8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60년대엔 가은면에서 비료가 나오면 아침 4시에 지게를 지고 집을 나가 비료 한포대를 짊어지고 30리길 불한티를 넘어오면
한밤중일때도 있었지 하며 그때의 힘들었던 기억을 떨처버리듯이 머리를 흔드네요. 80년대까지만 하여도 주소가 경북
가은으로 되다보니 가은우체국 배달부가 편지 한장을 전달하려고 불한티를 넘어 전달하면 하루해가 다가고 없더라는 이야기는
깊이 생각하여 볼 일인것 같습니다. 1980년대 이후 요령이 생겨 청천면으로 우편주소를 적으면 충북 우편배달부가 경북땅인
것을 알면서도 어렵지 않게 가져다 준다고 하네요.
장보러가던 이야기를 끄집어내니 가끔 청천장을 보기도 하였지만 관평에서 제수리치를 넘어 쌍곡계곡을 지나 2.7장이였던
칠성장을 많이 이용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군자산을 두고 북쪽에 있는 칠성과 군자산 남쪽에 있는 집을 오고간 셈입니다.
가끔 군자치를 넘고 사기막을 지나 덕평을 거처가는 괴산장을 보기도 하였지만 이리저리 하여도 장보기가 하루였다고 전합니다.
지금은 차로 이십분 거리밖에 안되는 3.8장인 괴산장을 많이 이용하고 있답니다.
만일 지도자들이 도경계선 지역의 이러한 어려움을 알고 미리 행정구역 조정작업을 제대로 하였더라면 최씨 아저씨네처럼
주변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고생을 덜 할 수 있었는데, 누구를 원망할 줄도 모르는 순박한 산골사람들의 생활상이
깊고 깊은 골짜기에 파묻혀온 가슴아픈 사연이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도 작은 아들이 바로 앞에 살고 있지만 제비소 마을은 불과 스십미터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는 경북땅에 아들은 충북땅에
살고 있는 기이한 현상이 이곳에 있습니다.
제비소가 어떤 연유를 담고 있는지 알지는 못하지만 그저 주어진 숙명처럼 비탈밭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들이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고 한때 15호 정도 마을을 이루며 살았지만 지금은 다섯집만 남아 있는 최씨들만이 살고있는 집성촌입니다.
모든 생활권이 충북이니 마을사람들과 논의하여 행정구역을 개편을 하여 달라고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니 80년대에
윗마을 홍주막까지 포함하여 가은면 완장리 3통 5반 동네회의를 하여 보았는데 대부분 찬성을 하는데도 서너명이 반대를
하여 실패를 하였다고 합니다. 마당에 서면 빤히 바라다 보이는 멋지게 보이는 하얀색의 아들집을 물 건너 충북땅에 어렵게
건축허가를 얻어 지은 것도 손주들의 교육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를 이웃이 전하여줍니다.
보람원이 들어온 이후 좋았던 계곡물이 탁하여 물을 끓여 먹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쉼없이 털어놓는 최씨 아저씨를 사진으로
남겨봅니다.
선림원 회원이 아주머니도 사진한장 남겨유 하며 사진기를 들이대자 안되는데 하며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는 모습이
재미있고결국은 그 모습으로 사진에 잡혀 한번 더 웃어봅니다.
커피를 끌여내며 이따금 아저씨의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모습이 남편과 함께 살아온 날들이 그리 원망스럽지 않을 정도로
순응하는 미덕을 스스로 깨우친 아주머니 같습니다.
1980년 괴산댐이 넘치도록 물 난리가 났을때 마루까지 물이 차서 신발이 떠내려 가고 겁이 더럭나 소를 산위에 매놓고
길건너
저리로 피난을 갔다고 하며 지금도 물난리를 만날까봐 겁이 난다고 하네요.
부부는 이곳에서 살며 충북이니 경북이니 하는 차이를 별로 느끼지 않고 그저 내 이웃이고 제비소마을은 하나라는 생각을
한다는 뜻을 이야기합니다.
경치좋은 제비소가 있어 여름한철 손님들에게 자리를 빌려주고 자리세를 받으며 청소를 한다고 하여 벌이가 어떠냐고 하니
아저씨 대답이 담배값이나 나오면 되지 하며 웃어 보인다. 이제 돈벌이에 연연하지 않고 산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두분의 사는 모습이 깊은골 맑은 물가에 살고 있는 신선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일어서려고 하며 이젠 더이상 돈벌이를 하려고 애쓰지 말고 편안하게 사시라고 말을 하자 그럴 생각이라며 할만큼
하지 않았느냐는 뜻을 표정으로 보여 주는것 같습니다.
집앞의 담장을 허물고 꽃나무를 심어 마당에서 제비소의 풍경이 보이도록 하라는 둥, 키큰이가 드러 누우면 다리가 문지방에
닿을것 같이 작은 시골집 안방문을 열고 들어가보는둥, 송면리와 이평리, 삼송리, 사담리, 경북 입석리와 운흥리, 중벌리를 묶
어 하나의 면단위를 만들어도 될 곳이라는 둥,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까지 꺼내어도 좋다며 편안하게 대답을 하여 주시는
두분이 고맙기만합니다.
한때는 초근목피로 산나물을 데처먹고 나무속피를 벗겨 먹으며 이밥 구경하기 어려운시절을 거처온 이들이 바로 우리들의
부모님입니다.
근대화속에 훌륭한 지도자들도 있었지만 묵묵히 주어진 삶을 운명으로 알고 일하며 살아온 전국의 수많은 이런분들이
있었기에 이만큼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됩니다.
다음에 이곳을 지나면 꼭 다시들려 가겠다는 인사를 하며 신발끈을 조여 매면서 인사치레가 아닌 진심으로 다시 들려보고 싶은
이곳은 좋은 사람들이 살고있는 좋은 풍광을 지닌곳 제비소라는 느낌이 가슴에 남습니다.
첫댓글 백두대간 오지마을을 찾아서 사람사는 소중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송대장님의 글을 접하니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모아서 책으로 내시기를!
김대표님 반갑습니다. 뵙지 못한지가 꽤 되는것 같은데 언제 뵙지요. 대둘과 청삼이 년중 한두번은 함께하는 기회를 만들어도 좋을것 같은데,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