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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87년, 그들의 대학생 시절은 어땠을까? 한번도 자세히는 들어본 적 없는 부모님들의 대학 시절, 빛바랜 일기 한 권을 통해 살펴보자.
2017년에 빅뱅이 있다면, 87년에는 조용필이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 음악계는 대형 기획사들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대부분 아이돌이 이끌어가고 있다.
반면, 80년대는 대학가요제가 스타등용문으로 인식되었고 솔로가수나 밴드 음악이 주를 이뤘다. 1980년대는 이런 대중음악을 비롯한 대중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유행한 ‘죠다쉬 청바지’와 ‘LP판’
(출처 : 한국광고협회 광고정보센터)
한편, 1980대에는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의상이나 화장품 등 다양한 생활 분야에서 국민들의 색채 감각이 세련되어졌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나 잡지에도 영향을 주었고, 각종 광고와 프로그램은 대중들의 소비를 부추겼다. 트렌디한 대학생들은 TV속에 나오는 여배우들의 화려하고 원색적인 색을 이용한 코디를 즐겼다. 자신만의 개성을 강조하는 시대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대학생 공부방의 풍경도 달라졌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자료를 찾고 과제나 논문을 써낼 수 있다. 그러나 30년 전에는 불가능했다.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얻을 수 있는 자료를 구하기 위해 수십 권의 두꺼운 책과 수십 편의 긴 논문을 읽어야 했다. 자료원을 구하는 과정 역시 험난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 도서관에 없는 책이나 논문의 경우, 다른 도서관이나 서점을 돌아다니며 찾아 헤매곤 했다.
필요한 자료가 해외에 있는 경우에는 더 많은 시간과 정성이 필요했다.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부족했던 80년대에 외국과의 빠른 소통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방법은 직접 편지로 자료를 요청하여 해당 자료의 사본을 받는 방법. 자료를 얻는 데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인내’의 연속이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은 자료를 찾기 위해 직접 두 발로 뛰어다녀야 했다.
과제나 논문의 작성 과정 역시 험난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컴퓨터가 귀했던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든 것을 ‘수기’로 작성해야 했다. 다른 종이나 공책에 먼저 쓴 글을 수정하여 완료된 최종본을 800자 원고지에 옮겨 적는 식이었다. 지금의 대학생들에게는 어렸을 적 추억으로 남아있는 ‘깜지’의 악몽이 그들에게는 매일매일의 일상이었다.
이러한 과정이 비효율적이고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름의 장점도 있다. 당시의 대학생들은 학문을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었다. 논문 한 편, 레포트 하나를 쓰기 위해 그들은 관련된 수많은 자료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탐독’해야 했다. ‘Ctrl+C,V’로 레포트 하나를 뚝딱 만들어내는 오늘날의 대학생들과는 상반되는 모습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함께 ‘지식 습득’을 위한 최적의 환경이 조성된 오늘날의 대학생들이지만 진정한 ‘지성인으로서의 대학생’에는 오히려 30년 전 그들이 더욱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1987년의 대학생들에게도 ‘사랑’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연애 방식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휴대폰을 통해 수시로 문자와 전화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당시 대학생들에게는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큐피드 역할을 했던 것은 ‘연애편지’였다. 그리고 연애편지의 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다름아닌 오늘날의 대학 신문 ‘학보’, 일명 ‘학보편지’였다.
학보로 연애편지 보내기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학보를 흰띠로 곱게 접어 두른다. 흰띠의 안쪽에는 상대방을 향한 편지를 빼곡히 적었다. 겉면에는 ‘삼성대학교 경영학과 영삼성 앞’을 적었다. 정성이 담긴 학보 편지는 상대방의 학과 사무실로 갔다. 1~2주 후면 상대방은 과 사무실에서 본인에게 온 학보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학보 편지가 몇 개 인지를 두고 은근한 경쟁이 붙기도 했다. 이러한 학보 편지를 주고 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들에게 ‘기다림’은 또 다른 ‘설렘’이었다.
▲1980년대 대학생들의 주요 데이트 코스였던 극장
휴대용 연락 수단이 없었던 과거 대학생들은 약속을 잡기 위해 구두로 약속을 해야만 했다. ‘몇 월 며칠 몇 시에 어디서 보자’와 같이 구두로 약속을 정하고 무작정 기다리는 경우가 많았다. 연인과의 약속에서 한 두 시간 정도 기다리는 것은 일상이었다.
반면에 2017년 대학생의 연애는 ‘카카오톡’으로 통한다. 전에 비해 연락이 수월해진 것은 물론이고 연인들이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장소도 훨씬 많아졌다.
1987년 대학생 연인들이 할 수 있는 데이트는 극장 데이트가 거의 전부였다. 그마저도 한 극장에서 하나의 영화만을 상영했기 때문에 지금의 멀티플렉스 개념과는 차이가 있었다. 조금은 다른 연애 방식과 정서.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사랑 때문에 설레고 아픈 것은 비슷하지 않을까?
1987년의 취업은 지금의 ‘취업난’과는 거리가 꽤 멀었다. 80년대 중반 이후 3저 호황(저유가, 저금리, 저달러)과 함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기업의 수와 규모가 커지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몸집이 커져가는 기업들은 자연스레 더 많은 신입사원들을 필요로 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인력의 수요’가 ‘공급’을 앞섰던 시기였던 것이다. 졸업을 앞둔 대학생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회사에 입사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입사 서류를 제출하는 오늘날과 달리 방문 접수 혹은 우편 접수를 했다.
입사 지원도 인터넷을 통해 간편히 서류를 접수하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회사들은 주로 신문에 채용 공고를 냈다. 채용 공고를 접한 구직자들은 자필로 입사 지원 서류를 작성했다. 증명사진 뒷면에 풀을 발라 지원서에 붙이고 지원 서류의 빈칸에 또박또박 손글씨를 채워 나갔다. 완성된 서류는 우편 접수 혹은 방문 접수를 통해 회사로 전달됐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 마감 날짜와 시간을 지키는 것도 취업 성공을 좌우하는 하나의 변수로 작용했다.
30년, 달라진 대학생활….
취재를 위해 1980년대 대학생들의 모습을 찾아보면서 그들의 일상이 마냥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손수 레포트를 작성해야 하다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휴대폰과 같은 연락 수단도 없는데 어떻게 연애를 했지..? 매일 서로를 기다려야 하잖아' 불편한 게 한 두 가지가 아녔다. 하지만 당시 대학생이었던 부모님들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김성준 기자의 아버지인 김영환(55) 씨는 "그래도 당시에는 하나의 자료를 찾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책들과 논문을 읽고 끈질기게 공부했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자료를 찾기 위해 지금보다 더 많은 책들과 논문을 읽고 끈질기게 공부했다.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김단비 기자의 어머니 임정순(47) 씨 역시 연락 수단이 없던 당시에만 느낄 수 있었던 애틋함에 대해 얘기했다. 그녀는 "서로 연락이 안 닿아 많이 어긋나기도 하고 하염없이 기다리기도 했지만 연인을 기다리는 그 순간의 설렘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가끔씩 그립다"고 말했다.
30년 동안 많은 것이 변했다. 오늘날의 대학생들에게는 과거 대학생들의 모든 일상이 불편했고, 귀찮았고, 무의미했다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0년 전 그들에게는 지금의 대학생들이 느낄 수 없는 '그들만의 순수함과 로망'이 있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온고지신(溫故知新·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앎)’의 마음가짐으로 좋은 것은 기억하고 받아들여 더 나은 미래를 그려 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