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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의 금석문, 2006년》에서 옮김
◇개관
1727년(영조 3)에 세워진 김재현(金載顯)의 묘비이다. 찬자는 권상하(權尙夏, 1641~1721)이고, 서자는 김재현의 손자인 김려(金礪, 1675~1728)이다. 김재현(1627년(인조 5) ~1700(숙종 26))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회백(晦伯), 할아버지는 김원립(金元立)이며, 아버지는 정랑 민교(敏敎)이다.
1662년(현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20세 전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이 되고 1662년(현종 3) 예빈시(禮賓寺)에 전임되었다. 이해 증광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정자(正字)·지평·집의 등을 거쳐 1689년(숙종 15) 승지로서 숙종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을 원자로 책봉한 것을 반대하다가 파직당하고, 같은 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폐출사건에 대하여 반대의 소를 올리고 두문불출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서인이 등용되자 호조참의로 기용된 뒤 좌승지·한성부우윤·호조참판·도승지·공조참판·형조참지·동지중추부사·경기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두루 지냈다.
묘비의 전반부는 김재현의 벼슬길 본말을 기술하면서 특히 인현왕후 폐출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후반부는 그의 가계에 대한 내용을 주로 담고 있다. 또한 김재현이 죽은 지 27년 만에 묘석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은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겸 영경연춘추관(領經筵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 권상하(權尙夏)가 찬(撰)하였고, 손(孫) 통정대부(通政大夫) 수충청도관찰사(守忠淸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 여(礪)가 글씨를 쓰고(書), 증손(曾孫) 봉정대부(奉正大夫) 행의릉참봉(行懿陵參奉) 악조(樂祖)가 전(篆)을 하였다.
묘역의 크기는 100여 평이며 묘의 형태는 유돌분(乳突墳)으로 묘 앞에 혼유석, 상석, 망주석, 문관석, 향로석 등을 세웠다. 묘에서 100m 우측에 신도비가 있는데 화강암의 석재에 아무런 조식 없이 세웠다. 1727년에 세워진 이 비석의 높이는 359cm이며 대리석재의 비석에 비해 대석이 커서 안정감이 있으나 정제미는 없다.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에서 옮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에서 옮김.
『금석문 탁본 조사보고서(2019)』김용태
전액
都承旨金公神道碑銘
전면
有明朝鮮國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 経筵叅䝺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金公神道碑銘并序
大匡輔國崇緣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経筵春秋館觀象監事 世子師權尙夏 撰
孫男通政大夫守忠淸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廵察使 礪 書
曽孫男奉正大夫行 懿陵叅奉 樂祖 篆
徃在己巳奸兇當國盡逐一隊善類禍仍及 坤宮時金公載顯先得罪罷官家居奮然起曰爲人臣子遇此變故不 死不義也遂與吳公斗寅諸人上書力争䟽入居前者三人被鞫 殿庭公日待 命于金吾門外三人既出獄遂退 居于龍仁田舍杜門養痾越六年甲戌 上大悔前事殛黜奸黨復正 坤位以戶曺叅議召公還旋移左承㫖進秩 嘉善連拜漢城右尹同知義禁府事戶兵曺叅判都承㫖陞嘉義階厯工刑曺叅判同知中樞府事間出爲京畿觀察 使開城留守以庚辰十二月十二日庚午卒于正寢疾病神氣不亂家人進藥公笑却之曰吾年七十四死無所憾何 事於藥訃聞吊祭致賻如儀翌年二月權窆于忠州鳳凰川先塋側丁亥十月卄五日改𦵏以丑㘴之原公字晦伯其 先慶州人生於 崇禎丁卯九月十八日天資眞醇器度沈厚長身豊貌人望之知其爲厚德長者自㓜勤慤不待課 督自能力學未冠而逰塲屋聲稱藹蔚辛丑 除 濬源殿叅奉壬寅換授禮賓寺是年中司馬連擢大科癸卯由槐 院出爲栗峯察訪至官執三尺不撓使星之行不許濫騎冬丁內艱服闋 除黃山察訪守法如栗峯時雖方伯亦憚 之陞典籍遷刑曺佐郞己酉以兵曺佐郞陪 駕温泉夏 除順天縣監縣地大難治公整頓網維嚴束奸強宿瘼如 洗風采立變庚戌得奇疾呈状請遆監司吳始壽搆以怨望時相許積請廷尉問編配淳昌壬子宥還癸丑丁外艱乙
좌측면
卯爲兵曺佐郞俄陞正郞試士關西還拜司憲府掌令時黨人充朝専事修㕁而與公同年科者居政曺以公不顯用 於曩時意㦯從已而引之公義不茍合即辭遆俄復還 除監武試于慕華舘時有同春宋先生追削之論翰林趙公 持謙上䟽極論其非黨人大譁論以削黜承㫖李公世華救趙公又被劾公罷試即詣 闕啓曰趙持謙李世華身居 近密有懷必陳自附無隠之義有何可罪之事掇拾深刻之論苟容取媚臣窃恥之以此大忤時軰諫院直請削職時 議猶咎諫院失䑓體只罷公職丙辰叙拜綾州牧使戊午爲覆審官權歆所中傷罷歸綾民三百餘人守 闕上書請 以三百石米納官還公任政院却不以聞己未叙復右通禮出爲豊德府使㘴微事罷庚申 除奉常寺正尋移延安 후면 府使時朝著復淸以公不可出外未赴而 除掌令秋拜安東府使期年政已成邑民大和前後治績皆此類也壬戌 以司諫召還自是常在臺閣三爲司諫一爲掌令執義持論每主平恕非關大體不屑也間爲太常太僕正成均司成 癸亥春以宣諭御史徃嶺南同時受 命者多不稱 朝廷意或至被譴公獨以能稱還拜司諫擢授義州府尹陞通 政階居半年被逮免非其罪也未幾拜承政院同副承旨叙厯左承㫖三歲之間多在政院間爲兵曺叅知者再刑戶 曺叅議者一丙寅乞外得安邉府使繡衣廵閱軍器以旗色不精 啓罷戊辰叙拜承㫖病遆己巳正月復爲承㫖時 有 元子㝎號事 上入宵人之言疑廷臣尤庵宋先生上䟽解之 上震怒以爲動搖國本 命削黜宋先生尹公 彬獨在直覆逆 上益怒 命囚尹公而竄之公與諸承宣入院方議執奏奏未上 上遽 命盡罷公自闕罷歸朝 著仍大變旋有 坤宮廢黜之舉而公上䟽争之遂去國此公立朝本末也公之考曰敏斆官正郞 贈叅判祖元立 以章甫抗論昏朝明 母子義後以文科進卒官通政府使 贈禮曺判書曾祖聲振進士官察訪 贈戶曺叅判妃 贈貞夫人全州李氏忠義衛克匡之女公先娵朔寕崔氏執義攸之之女無子後娵靑松沈氏同知中樞府事榗之 女在室善遇羣族之官助公㢘操人稱婦德舉二男三女男長胤豪縣監次性豪叅奉女長適趙正誼縣令次李思良 次夭孫男礪正言女奉事李顯相長房出也男碇女叅奉李顯允季房出也外孫男明迪進士明遇女正郞李秉淵靑 陵君模進士洪遇箕生貟金聖澤趙出也女申宅夏所後子命協李出也嗚呼公居家有孝友之行莅官有氷蘖之稱 立朝四十年退譲自守不汲汲於進取皆可書也然乙卯𣗳立人已服其雅操己巳一節又能表正大義扶植彝倫斯 可以不朽千載矣公歿之十九嵗將𣗳墓石叅奉君以状来乞銘謹摭状文略叙其㮣系之以銘銘曰
우측면
士於安平慷慨髙談 逮遇至難口若枚衘 允矣金公貞松嵗暮 徃者窮奇憑陵觸柱 不周既摧坤維随傾 公奮忠烈尺鱗敢攖 同事三賢首被𢡖刑 公時席藁如不欲生 不死天也卓乎𣗳立 天常永賴奸䛕褫魄 義炳日月名髙竹帛 孝友恬静與夫淸白 人所難及於公踈節 天眷忠貞祚胤其昌 鳳凰之阡睾如玄堂 孝子翼翼載𣗳穹石 我筆不愧昭眎千億 崇禎紀元後丁未七月 日立
해석문 김동석
도승지김공신도비명 유명조선국 가의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김공의 신도비명 : 서문을 곁들임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춘추관·상감사 세자사 권상하가 글을 지음.
손자 통정대부 수충청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김려가 글씨를 씀.
증손자 봉정대부 행의릉참봉 김낙조가 전서를 씀.
지난 기사년(1689년, 숙종 15)에 간사하고 음흉한 자들이 국권을 쥐었을 때 일군(一群)의 선류(善類)들을 모두 축출하였는데, 그 화(禍)가 곧장 곤전(坤殿)에게까지 미치었다. 그 당시 김재현(金載顯) 공이 맨 먼저 죄를 입고 관직을 그만둔 채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공은 분연히 일어나며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로서 이러한 변고(變故)를 당하고도 죽지 아니 한다면 의롭지 못하다.” 하고, 마침내 오두인(吳斗寅) 공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소장(疏章)을 올려 힘껏 논쟁하였다. 소장이 들어가자 소두(疏頭) 3인이 전정(殿庭)에서 국문(鞠問)을 당했는데, 공은 날마다 금오문(金吾門) 밖에서 임금(숙종)의 명령을 기다렸다. 3인이 출옥하게 된 뒤에 공은 드디어 용인(龍仁)의 전사(田舍)에 물러나 지냈는데, 두문 불출하면서 병을 요양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 갑술년(1694, 숙종 20)에 임금께서 지난 일을 크게 뉘우쳐서 간사한 무리들을 축출하고 다시 곤전의 지위를 바로잡으셨는데, 공은 호조참의(戶曹參議)의 벼슬로 소환되었다가 곧 좌승지로 옮겼고, 가선대부의 품계로 오르고 잇따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호조(戶曹)·병조(兵曹) 참판, 도승지(都承旨) 등으로 임명되었다. 또 가의대부(嘉義大夫)의 품계로 올라 공조(工曹) 및 형조(刑曹) 참판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거쳤고, 간간이 외직(外職)으로 나가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개성유수(開城留守)를 역임하였다. 경진년(1700, 숙종 26) 12월 12일 경오일에 정침(正寢)에서 졸(卒)하였는데, 병세가 위독하게 되었을 때에도 정신이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가인(家人)이 약을 바치자 공은 웃으면서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 나이 일흔 넷이니, 죽어도 유감(遺憾)됨이 없다. 무엇 때문에 약을 먹겠는가?” 하였다. 공의 부음(訃音)이 보고되자 나라에서 조문(弔問)·제전(祭奠)·부의(賻儀)를 규례대로 내려주었다. 이듬해 2월에 임시로 충주의 봉황천(鳳凰川)에 있는 선영(先塋) 옆에 장례를 지냈다가 정해년(1707, 숙종 33) 10월 25일에 축좌(丑坐)의 자리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은 자(字)가 회백(晦伯)이며, 그 윗대 조상은 경주(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은 분이다. 숭정(崇禎) 정묘년(1627, 인조 5) 9월 18일에 태어났는데, 천자(天資)가 진순(眞醇)하고 기도(器度)가 중후(重厚)하였으며, 장신의 풍만한 체구를 지녔으므로, 사람들이 바라보기만 하여도 그가 후덕(厚德)한 장자(長者)임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근면하고 착실하였으므로 학업 과정을 독려하지 않아도 스스로 힘써 공부하였으며, 20세가 채 못 되어서 과장(科場)에 출입하였는데 명성과 칭송이 자자하였다. 신축년(1661, 현종 2)에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임명되었고, 임인년(1662, 현종 3)에 예빈시(禮賓寺)로 옮겼으며, 이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잇따라 문과에 급제하였다. 계묘년(1663, 현종 4)에 승문원(承文院)을 경유하여 율봉찰방(栗峯察訪)으로 나갔는데, 관아에 이르러서는 법률 조문을 철저히 지켜 흔들림이 없었으니 사신(使臣)의 행차라도 역마(驛馬)를 지나치게 많이 갈아타는 일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 해 겨울에 모친상을 당했으며, 복상(服喪)하기를 마친 뒤 황산찰방(黃山察訪)에 제수(除授)되었는데, 역시 법을 철저히 지키기를 율봉에 있던 때와 같이 하였으니, 비록 방백(方伯)이라 할지라도 공을 기탄(忌憚)하였다.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여 형조좌랑(刑曹佐郞)으로 옮겼다. 기유년(1669, 현종 10)에 병조좌랑으로서 온천(溫泉)으로 거둥하는 어가(御駕)를 배종(陪從)하였으며, 여름에 순천현감(順天縣監)에 제수되었다. 그 현은 땅이 넓고 다스리기가 어려운 고장이었는데, 공은 법규를 정돈하고 간리(奸吏)와 강포(强暴)한 자들을 엄중히 단속한 결과 해묵은 폐단이 말끔히 씻겨져서 고을의 모습이 곧바로 일신(一新)되었다. 경술년(1670, 현종 11)에 이상한 병을 얻어서 사장(辭狀)을 제출하고 체직(遞職)되기를 청했는데, 감사(監司) 오시수(吳始壽)는 ‘원망한다’고 공을 무고하였다. 이에 당시의 정승 허적(許積)이 정위(廷尉)가 심문할 것을 청하였으므로, 순창(淳昌)으로 편배(編配)되었으며, 임자년(1672, 현종 13)에 사면(赦免)받아 돌아왔다. 계축년(1673, 현종 14)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을묘년(1675, 숙종 1)에 병조좌랑이 되었다가 얼마 뒤 병조정랑으로 승진하였으며, 관서(關西)에서 시사(試士)한 뒤 돌아와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임명되었다. 그 당시 당인(黨人)들이 조정을 가득 채운 채 오로지 지난날의 원한에 대해 복수하기만을 일삼았는데, 공과 함께 동방급제(同榜及第)한 사람이 정조(政曹)에 있으면서, 공이 그때까지 현귀(顯貴)한 관직에 임용되지 못했음을 빌미로, 자기의 뜻에 따라준다면 관로(官路)를 이끌어주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공은 의(義)에 입각하여 구차하게 영합(迎合)하지 않고 즉각 사직하였는데, 얼마 뒤 다시 복직되어 모화관(慕華館)에서 무시(武試)를 감독하였다. 그때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俊吉) 선생에 대해 관작을 추삭(追削)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왔으므로, 한림(翰林) 조지겸(趙持謙) 공이 소(疏)를 올려 그 불가함을 극론(極論)하니, 당인(黨人)들이 크게 떠들면서 그를 삭출(削黜)하는 것으로 논죄하였다. 그러자 승지(承旨) 이세화(李世華) 공이 그를 구원하다가 또 탄핵을 당하였다. 이에 공은 무시를 끝내고 즉각 예궐(詣闕)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조지겸과 이세화는 몸이 근밀(近密)의 지위에 있으니, 마음속에 소회(所懷)가 있을 경우 반드시 진달함으로써 ‘임금에게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스스로 따랐을 뿐이며, 그 사이에 무슨 죄 줄만 한 일이 있다고 가혹하게 처벌하자는 의론을 주워 모은단 말씀입니까. 구차스럽게 윗사람에게 잘 보이는 일을 신은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하였는데, 이로써 크게 당시 실권자들의 뜻을 거슬렀으며, 간원(諫院)에서는 곧바로 공에 대해 삭직(削職)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여론은 오히려 간원이 간원으로서의 체모를 잃은 점을 허물로 여겼으므로 단지 공의 관직만 그만두게 하였다. 병진년(1676, 숙종 2)에 능주목사(綾州牧使)로 임명되었는데, 무오년(1678, 숙종 4)에 복심관(覆審官) 권흠(權歆)으로부터 중상(中傷)을 당하여 관직을 그만두고 귀향하였다. 그때 능주의 백성 300여 인이 대궐문을 지켜 선 채 글을 올려 ‘쌀 300석을 관에 바치는 대신 공을 관직에 되돌려 놓을 것’을 청하였으나, 승정원에서 각하하고 임금에게 아뢰지 않았다. 기미년(1679, 숙종 5)에 우통례(右通禮)로 다시 서임(敍任)되었으며, 외직으로 나아가 풍덕부사(豐德府使)가 되었다가 사소한 일에 연루되어 관직을 그만두었다. 경신년(1680, 숙종 6)에 봉상시정(奉常寺正)에 제배(除拜)되었다가 곧 연안부사(延安府使)로 옮기게 되었으나, 그때 조정이 다시 맑아져서 공을 외직에 두어서는 아니 된다 하였으므로, 미처 부임하기도 전에 장령(掌令)을 제수받았다. 가을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임명되었는데, 그 고을을 다스린 지 1년만에 정치가 완전하게 베풀어져서 고을 사람들이 크게 화평해졌으니, 공의 전후(前後)의 치적(治績)은 대개 이와 같은 유(類)였다. 임술년(1682, 숙종 8)에 사간(司諫)으로 소환되었는데, 그 때부터 늘 대각(臺閣)에 있었으니, 사간을 세 번 지냈고 장령과 집의(執義)를 한 번씩 지냈으되, 매양 평이(平易)와 유서(宥恕)를 주장하는 것으로 지론을 삼았으며 대체(大體)에 관계되지 않는 일이라면 개의(介意)하지 않았다. 사이사이에 태상정(太常正)·태복정(太僕正)·성균사성(成均司成) 등을 역임하였다. 계해년(1683, 숙종 9) 봄에 선유어사(宣諭御史)로서 영남으로 나갔는데, 동시에 명을 받든 사람들은 대부분 조정의 의도에 부합하지 못하여 혹 견책(譴責)을 당하기까지 하였으나, 공만은 유독 유능한 사람으로 칭송되었다. 돌아와서 사간으로 임명되었다가, 의주부윤(義州府尹)으로 발탁되어 제수받았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올려져서 반년 동안 지낸 뒤 체면(遞免)되었으나 공의 잘못은 아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승정원의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고 좌승지(左承旨)를 역임하였는데, 3년 동안 대부분 승정원에서 지냈으니, 그 중간에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낸 것이 두 번이고 호조참의(戶曹參議)를 지낸 것이 한 번이었다. 병인년(1686, 숙종 12)에 외직을 요청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는데, 암행어사가 군기(軍器)를 검열하고는 깃발의 색깔이 깨끗하지 못하다 하여 임금에게 아뢰어 파면시켰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서용(敍用)되어 승지에 임명되었다가 병으로 체면(遞免)되었고 기사년(1689 ,숙종 13) 1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다. 그때 원자(元子)의 봉호(封號)를 정하는 일이 있었는데, 임금께서는 소인의 말을 듣고 정신(廷臣)을 의심하였으므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상소하여 그 의혹에 대해 해명하였다. 그러자 임금께서는 진노(震怒)하여 국본(國本)을 동요시킨다고 여기고 우암 송선생을 관직에서 삭출(削黜)할 것을 명하였다. 윤빈(尹彬) 공이 홀로 직소(直所)에 있으면서 복역(覆逆)하니, 임금께서 더욱 노하시어 윤공을 수금(囚禁)할 것을 명하였다가 귀양을 보내었다. 공이 여러 승지들과 함께 승정원에 들어가서 바야흐로 집주(執奏)할 것을 의논하고 상주문(上奏文)을 아직 올리지 못했는데, 임금께서 갑자기 모두 파직(罷職)할 것을 명하였다. 공이 대궐에서 파직 당해 귀향한 때로부터 조정이 이어서 크게 변하였으며, 곧바로 곤전(坤殿)을 폐출(廢黜)하는 일이 있게 되어 공이 상소하여 쟁변(爭辨)한 뒤 마침내 도성(都城)을 떠났다. 이상은 공이 조정에서 일한 본말(本末)이다. 공의 선고(先考)는 민효(敏斅)이니, 정랑(正郞) 벼슬을 지냈고 참판(參判)을 추증받았다. 조부는 원립(元立)인데, 유생(儒生)으로서 혼조(昏朝)를 극론(極論)하며 모자(母子)의 의리(義理)를 밝혔으며, 뒤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관로에 나가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로 부사(府使)에 이르러 졸(卒)하였고 예조판서를 추증받았다. 증조부는 성진(聲振)인데, 진사시에 합격하고 찰방 벼슬을 지냈으며 호조참판을 추증받았다. 공의 선비(先妣)는 증 정부인(贈貞夫人) 전주이씨(全州李氏)이니, 충의위(忠義衛) 이극광(李克匡)의 따님이다. 공의 초취(初娶)는 삭녕(朔寧) 최씨(崔氏)이니, 집의(執義) 최유지(崔攸之)의 따님으로, 자식을 두지 못하였다. 재취(再娶)는 청송(靑松) 심씨(沈氏)이니, 동지중추부사 심진(沈搢)의 따님으로, 집에서 지낼 때에는 여러 족속들을 잘 대우하였고 공의 관소(官所)에 가서는 공이 청렴한 절조를 지키는 데 힘을 보태었으므로, 사람들이 그 부덕(婦德)을 칭송하였는데, 2남 3녀를 두었다. 두 아들 중 장남은 윤호(胤豪)로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성호(性豪)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세 딸 중 장녀는 현령(縣令)인 조정의(趙正誼)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이사량(李思良)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요사(夭死)하였다. 손자는 여(礪)이니 정언(正言)이고, 손녀는 봉사(奉事) 이현상(李顯相)에게 출가하였으니, 이들은 장남의 소생이다. 손자는 정(碇)이고, 손녀는 참봉 이현윤(李顯允)에게 출가하였으니, 이들은 차남의 소생이다. 외손들 중 손자는 진사인 명적(明迪), 명우(明遇)이고, 손녀는 손서(孫壻)가 정랑(正郞) 이병연(李秉淵), 청릉군(靑陵君) 이모(李模), 진사 홍우기(洪遇箕), 생원 김성택(金聖澤)이니, 이들은 조정의의 아들딸들이다. 손서 신택하(申宅夏)와 입후(立後)한 아들 명협(命協)은 이사량의 아들딸이다. 아, 공은 집안에서 지낼 때는 효도 및 우애하는 행실이 있었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다는 칭송이 있었으며, 조정에 선 지 40년 동안에 겸퇴(謙退)로써 자신을 지키면서 현달(顯達)하는 데 급급(汲汲)해하지 않았으니, 이러한 사실들은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을묘년(1675,숙종1)에 의(義)를 수립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공의 고상한 지조에 탄복하였는데, 기사년(1689년,숙종15)에 한번 세운 절의(節義)는 또한 능히 대의(大義)를 표정(表正)함과 동시에 이륜(彛倫)을 부식(扶植)할 수 있었다. 이에 공의 사업은 가히 천년토록 불후(不朽)할 수 있게 되었다 하겠다. 공께서 졸(卒)하신 지 19년만에 장차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하면서 참봉(參奉) 군이 공의 행장(行狀)을 갖고 와서 묘명(墓銘)을 청하므로, 삼가 행장의 글을 따다가 그 대략을 기술하고 명(銘)을 붙였으니, 그 명(銘)은 다음과 같다. 선비란 태평시대를 만나서는 정의에 입각하여 고담준론을 펼치지만, 고난의 시대를 만나게 되면 입을 봉한 듯이 말을 하지 아니한다. 진실하도다, 김공은 세모(歲暮)의 꼿꼿한 소나무와 같았는데, 지난날 간흉(奸兇)들은 세력을 믿고 국권(國權)을 뒤흔들었도다. 임금께서도 마음이 꺾이시니 곤전(坤殿)께서도 잇따라 폐위(廢位)를 당하셨도다. 이에 공은 충성심에 분기(奮起)되어 용감하게도 임금의 노여움을 건드렸다네. 함께 상소한 세 사람의 현신(賢臣)이 맨 먼저 참독(慘毒)한 형벌을 받았는데, 공은 그 때 석고대죄(席藁待罪)를 하였으되 마치 살고 싶은 뜻이 없는 듯하였다네. 공께서 죽지 않은 것은 하늘의 뜻이었고 수립한 공적은 탁월하였도다. 천도(天道)는 영원히 의지하게 되었고 간사한 자와 아첨하는 자들은 혼백이 달아났으니, 공의 의로움은 일월과 같이 빛나고 공의 명성은 죽백(竹帛)에 기록되어 높다랗구나. 효도 및 우애하는 행실과 조용한 성품, 그리고 관직에서의 청백한 태도를 지님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기 어려운 바이지만 공의 경우 그것은 간단한 일이었다네. 하늘이 공의 충정(忠貞)을 보살펴주심에 공의 자손들이 장차 번창할 터인데, 봉황천(鳳凰川)의 무덤 자리는 그 봉분이 높다랗기도 하도다. 공의 효자효손들이 공경스럽게 신도비를 세웠음에 내가 적은 이 글 부끄럽지 않으니 천억년토록 분명히 공의 행적 알려주리라. 숭정기원(崇禎紀元) 후 정미년(1727, 영조 3) 7월 일에 이 비(碑)를 세움.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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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재집(寒水齋集)
한수재선생문집 제25권
신도비(神道碑)
번역문
<참판(參判) 김공(金公) 재현(載顯) 의 신도비명 병서>
지난 기사년에 간흉이 권력을 잡고서 한 떼의 선인들을 모조리 내쫓음으로써 그 화가 인하여 왕후에게까지 미쳤는데, 이때 김공 재현(金公載顯)은 먼저 죄를 얻고 파직되어 집에 있다가 분연히 일어나 말하기를 “신하로서 이런 변고를 만나서 죽지 않는 것은 의리가 아니다.” 하고, 마침내 오공 두인(吳公斗寅) 등 여러 사람과 함께 상소하여 극력 논쟁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뒤 공보다 이름이 앞에 적힌 세 사람이 전정(殿庭)에서 국문을 받자, 공은 날마다 의금부 문밖에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 세 사람이 모두 출옥하자, 마침내 용인(龍仁)의 시골집으로 물러가 있으면서 두문불출하고 신병을 요양하였다.
그로부터 6년째인 갑술년에 상이 지난 일을 크게 뉘우쳐 간당들을 죽이거나 내쫓고 다시 왕후를 복위시킨 다음 호조 참의로 공을 불렀다. 공은 조정에 돌아와서 곧 좌승지에 옮겨졌다가 가선(嘉善) 품계로 승진되어 한성부 우윤ㆍ동지의금부사ㆍ호조 참판ㆍ병조 참판ㆍ도승지에 이어서 제배되었다. 다시 가의(嘉義) 품계로 승진되어 공조 참판ㆍ형조 참판ㆍ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고, 그 사이사이에 경기 관찰사ㆍ개성 유수로 나가기도 하였다.
경진년 12월 12일 경오에 공이 정침에서 작고하였다. 공은 병환중에도 신기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가인(家人)이 약을 올리자 공이 웃으면서 물리치며 말하기를 “내 나이 74세이니 죽어도 한될 것이 없는데, 무엇하러 약을 쓴단 말인가.” 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조정에서 조제(弔祭)와 치부(致賻)를 의식대로 하였다. 다음해 2월에 충주(忠州)의 봉황천(鳳凰川) 선영 곁에 임시로 장사 지냈다가 정해년 10월 25일에 축좌(丑坐)의 언덕에 개장(改葬)하였다.
공의 자는 회백(晦伯)이요, 그 선대는 경주인(慶州人)인데, 숭정(崇禎) 정묘년 모월 모일에 출생하였다. 공은 천품이 순진하고 기량이 침중하며 큰 키에 얼굴이 두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바라만 보고도 후덕한 장자임을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근면하고 성실하여 일과 공부의 독책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힘써 배워, 약관 이전부터 장옥(場屋)에 노닐면서 명성이 성대하였다.
신축년에는 선원전 참봉에 제수되었고, 임인년에 예빈시 참봉으로 바꾸어 제수되었다. 이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대과에 급제하였다. 계묘년에는 승문원으로부터 율봉 찰방(栗峯察訪)이 되어 나갔는데, 관소에 이르러서는 법을 굳게 지켜 굽히지 않아서, 사신의 행차에 대해서도 기마(騎馬)를 규정에 넘치게 제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는 모친상을 당하였다. 복을 마치고 나서 황산 찰방(黃山察訪)에 제수되었는데, 여기서도 법 지키기를 마치 율봉 찰방으로 있을 때와 같이 하니, 관찰사도 공을 두려워하였다. 이어 전적에 올랐다가 형조 좌랑에 옮겨졌다.
기유년에는 병조 좌랑으로 어가를 모시고 온천에 갔다. 이해 여름에는 순천 현감에 제수되었다. 순천현은 지역이 커서 다스리기가 어려웠는데, 공이 기강을 정돈하여 간악하고 호강한 자들을 엄격히 단속하니, 묵은 병폐들이 씻은 듯이 없어져서 풍속이 당장에 일변되었다. 경술년에는 이상한 질병을 얻어 정장(呈狀)하여 체직을 청했는데,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공을 불만에 의해 체직을 청한 것으로 무함함으로써, 당시 정승인 허적이 국문하기를 청하여 국문을 받고 순창(淳昌)에 유배시켰다. 임자년에 풀려 돌아왔다. 계축년에는 부친상을 당하였다.
을묘년에는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이윽고 정랑에 승진되어 관서(關西)에 가서 무사를 시험보이고 돌아와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 이때에 당인(黨人)이 조정에 그득하여 오로지 불화(不和)만을 일삼았는데, 공과 동방으로 급제한 자가 정조(政曹)에 있으면서, 공이 지난날 좋은 자리에 쓰이지 못했던 것을 의식하고 혹 자기를 따라줄 것인가 하여 공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공은 의리상 구차하게 영합할 수 없어 곧 사체했다가, 이윽고 다시 그 직에 제수되어 모화관(慕華館)에서 무과 시험을 감독하였다. 그런데 이때 동춘 송 선생을 추삭(追削)하자는 논의가 있자, 한림 조지겸(趙持謙)이 상소하여 그 잘못된 것을 극력 논변하니, 당인들이 크게 떠들고 일어나 조지겸을 삭출할 것으로 논의하였다. 그러자 승지 이세화(李世華)가 조지겸을 변호하다가 또 탄핵을 받았다. 그러자 공이 무과 시험을 끝낸 즉시 대궐에 나아가 아뢰기를 “조지겸ㆍ이세화는 자신들이 상의 측근에 있으므로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 스스로 숨기지 않는 의리에 부친 것인데, 무슨 죄줄 일이 있다고 그토록 심각한 논의를 주워 모은단 말입니까. 구차하게 남의 비위를 맞추어 고마움을 사는 행위를 신은 삼가 부끄럽게 여깁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이 때문에 시배들에게 크게 미움을 받아 간원이 곧바로 공을 삭직할 것을 청하였는데, 시의(時議)가 오히려 간원이 대간의 체통을 잃은 것을 책망하여 공을 파직만 시켰다.
병진년에 서용되어 능주 목사(綾州牧使)에 제배되었는데, 무오년에 복심관(覆審官) 권흠(權歆)으로부터 중상을 받아 파직되어 돌아가니, 능주 백성 3백여 인이 궐문을 지키고 글을 올려, 쌀 3백 석을 관에 납부하는 조건으로 공을 다시 유임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정원이 이를 물리치고 상께 보고하지 않았다. 기미년에는 우통례에 서용되고 풍덕 부사(豊德府使)로 나갔다가 사소한 일로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 경신년에는 봉상시 정에 제수되었다가 곧 연안 부사(延安府使)에 옮겨졌는데, 이때 조정이 다시 맑아져서, 공을 지방으로 내보내서는 안 된다 하여, 공이 미처 부임하기 전에 장령을 제수하였다. 이해 가을에는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었는데, 부임한 지 1년도 못 되어 정사가 이미 이루어져서 고을 백성들이 크게 화합하였다. 전후의 치적(治續)이 모두 이런 정도였다.
임술년에는 사간으로 소명을 받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항상 대각에 있었는데, 사간을 세 번, 장령ㆍ집의를 각각 한 번씩 지냈는데 논의는 매양 공평하고 관대함을 주장했고, 대체에 관계된 것이 아니면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 중간중간에 태상시 정ㆍ태복시 정ㆍ성균관 사성을 역임하였다.
계해년 봄에는 선유어사(宣諭御史)로 영남에 나갔는데, 공과 동시에 명을 받은 자들이 다들 조정의 뜻에 맞지 않아 혹은 견책을 받기까지 했으나, 공만은 유능하다고 일컬어졌다. 돌아와서 사간이 되었다가 의주 부윤에 발탁 제수되고 통정 품계에 올랐는데, 그곳에 있은 지 반년 만에 체포당하여 면직되었으나, 이는 공의 죄가 아니었다. 그후 얼마 안 되어 승정원 동부승지에 제배되고 순서대로 좌승지를 역임하였다. 그후 3년 동안 승정원에 가장 많이 있었고 중간중간에 병조 참지를 두 번, 형조 참의ㆍ호조 참의를 각각 한 번씩 역임하였다. 병인년에는 외직을 요구하여 안변 부사(安邊府使)가 되었는데, 암행어사가 군기(軍器)를 검열하고 나서 기(旗)의 빛깔이 정하지 않다는 것으로 아뢰어 파직시켰다. 무진년에 서용되어 승지에 제배되었다가 병으로 체직하였다.
기사년에 다시 승지가 되었다. 이때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하는 일로 인해 상이 소인의 말을 듣고 조신(朝臣)을 의심하므로, 우암 송 선생이 상소하여 그를 해명하니, 상이 진노해서 ‘국본(國本)을 동요시킨다.’ 하여 송 선생을 삭출할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윤공 빈(尹公彬)이 홀로 정원에 숙직하면서 이 명을 반환하니, 상이 더욱 노하여 윤공을 가두라고 명했다가 곧 유찬시켰다. 그러자 공이 여러 승지들과 함께 정원에 들어가 한창 상주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그 주문이 올라가기도 전에 상이 갑자기 전부 파직할 것을 명하였다. 그리하여 공은 대궐로부터 파직되어 돌아왔고, 조정은 그 일로 인하여 큰 변이 일어나 곧 왕후를 폐출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공이 상소하여 이를 쟁론하고는 마침내 서울을 떠나 버렸다. 이상이 공이 조정에서 벼슬한 시말이다.
공의 고 민효(敏斅)는 정랑을 지내고 참판에 추증되었다. 조 원립(元立)은 유생의 신분으로 광해조(光海朝)에 항론하여 모자(母子)의 의리를 밝혔고, 뒤에 문과 급제로 벼슬에 진출하여 통정 품계에 부사로 재직중 작고했으며, 예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 성진(聲振)은 진사로 찰방을 지내고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정부인에 추증된 비(妣)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충의위 극광(克匡)의 딸이다. 공의 초취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집의 유(攸)의 딸로 자식이 없다. 후취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동지중추부사 진(搢)의 딸인데, 집에 있을 때는 여러 종족들을 잘 대우하였고, 공을 따라 관소에 가서는 공의 청렴한 조행을 내조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부덕(婦德)이 있음을 칭찬하였다.
2남 3녀를 길렀는데, 장남 윤호(胤豪)는 현감이고, 다음 성호(性豪)는 참봉이며, 장녀는 현감 조정의(趙正誼)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이사량(李思良)에게 시집갔으며, 그 다음은 일찍 죽었다. 정언인 손자 여(礪)와 봉사 이현상(李顯相)에게 시집간 손녀는 장방(長房)의 소생이고, 손자 정(碇)과 참봉 이현윤(李顯允)에게 시집간 손녀는 계방(季房)의 소생이다. 외손자로 진사인 명적(明迪)과 명우(明遇)와 정랑 이병연(李秉淵), 청릉군 모(靑陵君模), 진사 홍우기(洪遇箕), 생원 김성택(金聖澤)에게 각각 시집간 외손녀들은 조정의의 소생이고, 신택하(申宅夏)에게 시집간 외손녀와 양자로 세운 외손자 명협(命協)은 이사량의 소생이다.
아, 공은 집에 있을 때는 효우한 행실이 있었고, 벼슬할 적에는 매우 청렴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벼슬한 지 40년 동안에 항상 겸손함으로 자신을 지키어 공명을 취하는 데에 급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모두 기록할 만한 일이다. 공이 을묘년에 수립한 일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이미 그 바른 지조에 복종했거니와, 기사년에 있었던 한 절의는 또 대의를 표준 삼아 바로잡고 인륜을 붙들어 세웠으니, 이것은 천 년 뒤에까지 전해질 것이다. 공이 작고한 지 19년 만에 묘석(墓石)을 세우기 위해 참봉군(參奉君)이 행장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을 지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래서 삼가 행장의 글을 간추려 그 개요를 대략 서술하고 명으로 잇노라. 명은 다음과 같다.
대개 선비가 편안한 시대에는 / 士於安平
강개히 고담준론을 하다가 / 慷慨高談
지극히 어려운 때를 만나서는 / 逮遇至難
입에 막대를 문 듯 말이 없거늘 / 口若枚銜
진실한 우리 김공은 / 允矣金公
그 지조 엄동설한의 소나무 같았네 / 貞松歲暮
지난번에 궁기가 / 往者窮奇
용맹을 믿고 천주를 들이받아 / 憑陵觸柱
부주산이 꺾이고 나니 / 不周旣摧
곤유도 따라서 기울어졌네 / 坤維隨傾
그러자 공이 충렬을 분발하여 / 公奮忠烈
직간으로 임금을 감히 범했는데 / 尺鱗敢攖
함께 상소한 세 어진 이가 / 同事三賢
남 먼저 참혹한 형벌을 받자 / 首被慘刑
공은 이때에 석고대죄하면서 / 公時席藁
마치 살고 싶지 않은 듯했으나 / 如不欲生
죽지 않은 것은 운명이거니와 / 不死天也
수립한 절의는 우뚝했기에 / 卓乎樹立
천륜이 길이 보존되고 / 天常永賴
간당들은 혼비백산하였네 / 姦諛褫魄
그래서 의리는 일월보다 빛나고 / 義炳日月
이름이 사책에 드높아졌네 / 名高竹帛
공의 효우하고 평온함과 / 孝友恬靜
또한 그 청백함을 / 與夫淸白
다른 사람은 미치기 어려우나 / 人所難及
공에게는 소략한 절행이었네 / 於公疎節
하늘이 공의 충정함을 사랑하여 / 天眷忠貞
자손을 창성하게 해 주었네 / 祚胤其昌
봉황산의 언덕에 / 鳳凰之阡
봉곳한 공의 무덤 있어 / 睾如玄堂
효자가 공경하고 삼가서 / 孝子翼翼
큰 비석을 세우는데 / 載樹穹石
내 글이 거짓말이 아니니 / 我筆不媿
무궁한 후세에 밝게 보이리라 / 昭眎千億
[주-D001] 숨기지 …… 의리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임금을 섬기는 데는, 범안(犯顔)을 하여 직간하면서 임금의 허물을 숨기지 않는다.[事君有犯而無隱]”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2] 궁기가 …… 기울어졌네 : 궁기는 상고 시대 공공씨(共工氏)의 별칭. 이는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공공씨가 전욱씨(顓頊氏)와 서로 임금이 되려고 싸우다가 노하여 곤륜산(崑崙山) 서북쪽에 있는 부주산(不周山)을 들이받으니, 천주(天柱 하늘을 괴고 있다는 기둥)가 꺾이고 지유(地維 땅을 유지시킨다는 동아줄)가 끊어져서 이 때문에 하늘이 서북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고사에서 온 말인데, 여기서는 즉 조선 숙종 15년인 1689년, 득세한 강신(强臣)들에 의해 희빈(禧嬪) 장씨(張氏)의 소생을 세자로 세우고,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민씨(閔氏)를 폐위(廢位)시킨 일을 비유한 것이다. 여기서 말한 곤유(坤維)는 곧 인현왕후를 가리킨 것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91
원문
신도비(神道碑)
<참판(參判) 김공(金公) 재현(載顯) 의 신도비명 병서>
參判金公 載顯 神道碑銘 幷序
往在己巳。姦兇當國。盡逐一隊善類。禍仍及 坤宮。時金公載顯先得罪罷官家居。奮然起曰。爲人臣子。遇此變故。不死不義也。遂與吳公斗寅諸人。上書力爭。疏入居前者三人被鞫 殿庭。公日待命于金吾門外。三人旣出獄。遂退居于龍仁田舍。杜門養痾。越六年甲戌。 上大悔前事。殛黜姦黨。復正 坤位。以戶曹參議召公還。旋移左承旨。進秩嘉善。連拜漢城右尹,同知義禁府事,戶兵曹參判,都承旨。陞嘉義階。歷工刑曹參判,同知中樞府事。間出爲京畿觀察使開城留守。以庚辰十二月十二日庚午。卒于正寢。疾病神氣不亂。家人進藥。公笑却之曰。吾年七十四。死無所憾。何事於藥。訃聞弔祭致賻如儀。翌年二月。權窆于忠州鳳凰川先塋側。丁亥十月廿五日。改葬以丑坐之原。公字晦伯。其先慶州人。生於 崇禎丁卯某月某日。天資眞醇。器度沈厚。長身豐貌。人望之知其爲厚德長者。自幼勤慤。不待課督。自能力學。未冠而遊場屋。聲稱藹蔚。辛丑除 濬源殿參奉。壬寅換授禮賓寺。是年中司馬。連擢大科。癸卯由槐院出爲栗峯察訪。至官執三尺不撓。使星之行。不許濫騎。冬丁內艱。服闋除黃山察訪。守法如栗峯時。雖方伯亦憚之。陞典籍遷刑曹佐郞。己酉以兵曹佐郞陪 駕溫泉。夏除順天縣監。縣地大難治。公整頓綱維。嚴束姦強。宿瘼如洗。風采立變。庚戌得奇疾。呈狀請遞。監司吳始壽構以怨望。時相許積請廷尉問。編配淳昌。壬子宥還。癸丑丁外艱。乙卯爲兵曹佐郞。俄陞正郞。試士關西。還拜司憲府掌令。時黨人充朝。專事修㕁。而與公同年科者居政曹。以公不顯用於曩時。意或從己而引之。公義不苟合。卽辭遞。俄復還除。監武試于慕華館。時有同春宋先生追削之論。翰林趙持謙上疏極論其非。黨人大譁。論以削黜。承旨李世華救持謙。又被劾。公罷試卽詣 闕。啓趙持謙,李世華身居近密。有懷必陳。自附無隱之義。有何可罪之事。掇拾深刻之論。苟容取媚。臣竊恥之。以此大忤時輩。諫院直請削職。時議猶咎諫院失臺體。只罷公職。丙辰敍拜綾州牧使。戊午爲覆審官權歆所中傷罷歸。綾民三百餘人守 闕上書。請以三百石米納官還公任。政院却不以聞。己未敍復右通禮。出爲豐德府使。坐微事罷。庚申除奉常寺正。尋移延安府使。時朝著復淸。以公不可出外。未赴而除掌令。秋拜安東府使。未期年政已成。邑民大和。前後治續皆此類也。壬戌以司諫召還。自是常在臺閣。三爲司諫。一爲掌令,執義。持論每主平恕。非關大體不屑也。間爲太常太僕正,成均司成。癸亥春以宣諭御史往嶺南。同時受命者多不稱朝廷意。或至被譴。公獨以能稱。還拜司諫。擢授義州府尹。陞通政階。居半年被逮免。非其罪也。未幾拜承政院同副承旨。敍歷左承旨。三歲之間。多在政院。間爲兵曹參知者再。刑戶曹參議者一。丙寅乞外得安邊府使。繡衣巡閱軍器。以旗色不精啓罷。戊辰敍拜承旨病遞。己巳正月復爲承旨。時有 元子定號事。 上入宵人之言疑廷臣。尤菴宋先生上疏解之。 上震怒。以爲動撓國本。命削黜宋先生。尹公彬獨在直覆逆。○上益怒命囚尹公而竄之。公與諸承宣入院。方議執奏。奏未上。 上遽命盡罷。公自闕罷歸。朝著仍大變。旋有 坤宮廢黜之擧。而公上疏爭之。遂去國。此公立朝本末也。公之考曰敏斅。官正郞 贈參判。祖元立。以章甫抗論昏朝。明母子義。後以文科進。卒官通政府使。 贈禮曹判書。曾祖聲振。進士官察訪 贈戶曹參判。妣 贈貞夫人全州李氏。忠義衛克匡之女。公先娶朔寧崔氏。執義攸之女無子。後娶靑松沈氏。同知中樞府事搢之女。在室善遇群族。之官助公廉操。人稱婦德。擧二男三女。男長胤豪縣監。次性豪參奉。女長趙正誼縣監。次李思良。次殀。孫男礪正言。女奉事李顯相。長房出也。男碇。女參奉李顯允。季房出也。外孫男明迪進士,明遇。女正郞李秉淵,靑陵君模,進士洪遇箕,生員金聖澤。趙出也。女申宅夏。所後子命協。李出也。嗚呼。公居家有孝友之行。莅官有氷蘗之稱。立朝四十年。退讓自守。不汲汲於進取。皆可書也。然乙卯樹立。人已服其雅操。己巳一節。又能表正大義。扶植彝倫。斯可以不朽千載矣。公歿之十九歲。將樹墓石。參奉君以狀來乞銘。謹摭狀文。略敍其㮣。係之以銘。銘曰。
士於安平。慷慨高談。逮遇至難。口若枚銜。允矣金公。貞松歲暮。往者窮奇。憑陵觸柱。不周旣摧。 坤維隨傾。公奮忠烈。尺鱗敢攖。同事三賢。首被慘刑。公時席藁。如不欲生。不死天也。卓乎樹立。天常永頼。姦諛褫魄。義炳日月。名高竹帛。孝友恬靜。與夫淸白。人所難及。於公疏節。天眷忠貞。祚胤其昌。鳳凰之阡。睪如玄堂。孝子翼翼。載樹穹石。我筆不媿。昭眎千億。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한수재집》 원문 이미지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옮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