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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開拓者)★
[노숙 126~130]
126
피터 일류신은 붉은색 머리칼에 체격이 커서 별명이 붉은 곰이었다. 60대의 나이였지만 아직도 식사 때마다 보드카 한 병씩을 마시는 호주가이며 겨울에는 꼭 북부의 동토로 여우 사냥을 떠난다.
열흘쯤 툰드라 지역을 헤매고 다녀도 끄떡없는 체력이었다. 눈을 반쯤 감은 일류신이 입을 다물었으므로 방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덮여졌다. 주 정부의 건설국장 로스토프가 피살당한 것은 일류신에게 대단한 충격이었던 것이다.
“고려인 마피아의 소행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포포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놈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일류신은 그 표정 그대로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급부상한 고려인 마피아에 대해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중이다.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에 덮여졌다.
회의가 지루하게 계속 되고 있는 것이다. 로스토프의 저격 용의자는 김명천이 이끄는 고려인 마피아 조직이 유력했지만 아직 증거는 없다. 그때 방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부하 하나가 들어섰다.
“보스.”
일류신 옆으로 다가선 부하가 낮게 말했지만 방안의 간부들은 다 들었다.
“고려인의 보스 김명천이 총격을 받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때서야 일류신의 졸린 듯한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일류신의 시선을 받은 부하가 말을 이었다.
“몇 명만 부상당한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떤 병신 같은 놈들이야?”
씹어뱉듯 말한 일류신이 좌우의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야마구치조 놈들인가?”
“그럴 가능성도 있습니다만.”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포포부가 말을 이었다.
“말렌코프의 잔존조직일수도 있습니다.”
“암살이 빗나갈수록 놈의 가치는 높아진다.”
머리를 든 일류신이 다시 부하들을 보았다.
“놈은 우리가 습격한 것으로 알고 있겠군.”
혼잣소리처럼 말한 일류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루한 회의가 끝났다는 표시였다.
“고려인 놈들한테 연락을 해라. 내가 만나잔다고 말이야.”
방에 둘만 남았을 때 일류신이 포포부에게 말했다.
“그렇지. 그 젊은 애송이놈과 나와의 단독회담을 하자고 해라. 장소도 그쪽에서 정하라고 해.”
“보스. 하지만.”
당황한 포포부가 입을 열었을 때 일류신이 가로막듯 말했다.
“내일 밤이 적당하다.”
“알겠습니다. 보스.”
마지못한 표정으로 포포부가 말하고는 일류신을 보았다.
“어떻게 준비를 할까요?”
“내가 놈의 뒷통수를 치려는게 아니야 멍청아.”
이맛살을 찌푸린 일류신이 마른체구에 신경질적인 용모를 지난 포포부를 흘겨보았다. 포포부의 별명이 그가 겨울마다 사냥을 즐기는 여우인 것이 우연이라면 우연이다.
“적은 가깝게 둘수록 유리하다.”
방을 먼저 나가면서 일류신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10여년전 일류신은 동업자 파블로를 제거하고 조직을 장악했다. 파블로는 그가 어릴 적부터 40여년동안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였던 것이다. 일류신은 그를 가깝게 두고 있었던 것이다.
127
다음날 오후에 일성전자 하바로프스크 사무실은 갑자기 환해졌다. 예정대로 본사의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회장의 특사일행인 것이다.
특사일행의 선임자는 회장의 딸 안세영이다. 일성그룹 계열사인 일성통신의 광고기획실에 근무하는 안세영은 이번에 러시아 시장의 광고 기획차 하바로프스크를 방문한 것이다. 지사에서 안세영 일행을 특사 취급 하는 것은 방문일정을 극비로 하라는 회장의 특별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폐를 끼쳐드려서.”
회의실에 자리잡고 앉았을 때 안세영이 지사장 고영호에게 말했다. 의례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안세영의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본 고영호가 당황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아닙니다. 천만에요.”
스물일곱살인 안세영의 직급은 대리였고 입사 3년차가 된다. 계열사의 3년차 대리에게 본사 부장급 지사장이 쩔쩔매는 상황이었지만 고영호는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 것이다.
작년에 안세영이 유럽본부가 있는 일성전자 파리지사를 방문했을 때 전무급 본부장이 안내를 맡은 전례가 있는 것이다. 안세영의 위로 오빠가 둘 있었지만 모두 회장 안재성의 눈밖에 나있는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회사의 핵심요지에 있는 간부 대부분은 차기대권이 안세영에게 넘어갈 것이라는 추측을 한다.
“촬영일정은 5일정도인데 안내원만 붙여주시면 저희들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안세영이 겸손한 표정으로 고영호를 보았다. 갸름한 얼굴에 맑은 두 눈이 생기 있게 빛났고 입술은 야무지게 닫혀져있다. 전체적으로 강한 인상을 풍기는 미인이다. 안세영의 시선을 받은 고영호가 눈이 부신 듯이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연락만 주시면 적극 협조해드리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기획실장 이성호가 들어섰다. 이미 인사를 나눈터라 이성호는 잠자코 안세영의 옆에 앉았다. 기획실장은 회장의 분신과 같은 신분인 것이다. 따라서 안세영이 이성호를 아저씨처럼 대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안대리.”
이성호가 정색하고 안세영을 보았다.
“요즘 이곳 상황이 좋지 않아.”
이성호가 말을 이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까 말않겠는데 앞으로는 이곳 사무실에 나오지 않는게 낫겠어.”
그러자 안세영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이유를 묻지는 않았다. 그때 고영호가 거들었다.
“그래서 안내원도 회사 직원이 아닌 일반인을 선정했습니다. 경호에도 만전을 기할테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요.”
“무슨 일이 있어요?”
마침내 안세영이 물었으나 이성호와 고영호는 거의 동시에 머리를 저었다.
“없습니다.”
먼저 고영호가 대답했고 이성호가 덧붙였다.
“다른 일 없어. 걱정하지 말고 이대리는 일이나 해.”
개운치 않은 얼굴로 안세영이 방을 나갔을 때 이성호가 입맛을 다셨다.
“이런 때 하바로프스크로 오다니. 정말 짜증나는군.”
“본래 광고출장 계획은 반년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고영호가 안세영 대신 변명하듯이 말했다.
“요즘 상황이 바빠서 출장 보류하라는 연락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비서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잊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128
김명천이 전화기를 넘겨받았을 때 방안은 조용해졌다. 일류신의 심복부하 포포부가 전화를 해온 것이다.
“여보세요. 김명천입니다.”
영어로 응답한 김명천의 표정도 굳어져 있었다. 예상 밖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예. 저는 일류신씨를 모시고 있는 포포부라고 합니다.”
수화구에서 포포부의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류신씨의 전갈을 말씀 드립니다. 김선생.”
“뭡니까?”
“내일 밤에 일류신씨께서 뵙자고 합니다. 말하자면 단독회담이지요.
장소와 시간도 김선생께서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포포부가 정확한 영어를 구사하며 말을 이었다.
“이번 사태에 대해 진지한 논의를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김선생님.”
“좋습니다’
머리를 끄덕인 김명천이 방안에 둘러선 부하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내가 시간과 장소를 전하지요.”
김명천이 전화기를 내려놓았을 때 먼저 옆쪽에 서있던 신해봉이 나섰다.
“보스. 만나자는 연락입니까?”
“그렇다.”
“안됩니다.”
대뜸 머리부터 저은 신해봉의 목소리가 굵어졌다.
“피터 일류신은 말렌코프와 전혀 다른 유형의 인물입니다. KGB 출신답게 치밀하고 음모에 뛰어납니다. 틀림없이 함정을 파놓을 것입니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신해봉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영화 찍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긴 그렇다.”
쓴웃음을 지었던 김명천이 곧 정색하고 신해봉을 보았다.
“아마 나만 없어지면 이 사업은 백지화가 된다는 것을 그쪽도 알고 있겠지. 그래서 날 죽이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나?”
“그렇습니다.”
“일류신이 이번 사건을 조종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그랬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만나겠다.”
김명천이 결심한 듯 굳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나를 확실하게 제거하려는 음모인지 모르지만 그것이 아닐 수도 있어. 준비를 단단히 하고 만나겠다.”
그 시간에 코스모스 호텔의 객실 안에서는 안세영과 민경아가 마주 앉아 있었다.
민경아는 회사 측의 연락원인 셈이었는데 물론 안세영과는 초면이다.
“안내원은 고려인으로 회사와 오래 거래를 해온 사람이어서 믿을 만 합니다.”
민경아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저는 안대리님과 회사와의 연락을 맡게 되었습니다. 필요하실 때 언제든지 저를 찾아 주십시오.”
“그런데요.”
눈을 반쯤 기울여서 웃음 띈 표정을 만든 안세영이 민경아를 보았다.
“왜 이렇게 절차가 복잡하죠? 제가 직접 사무실에 연락하면 안되나요? 그리고 안내도 회사 직원이 맡으면 안됩니까? 예를 들어서 민경아씨가 맡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건.”
“인력과 경비 낭비가 아닌가요?”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은 민경아는 시선을 내렸다. 물정 모르는 2세에 대한 반발심이 불쑥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129
“실은 문제가 있습니다.”
정색한 민경아가 말했을 때 안세영이 커피잔을 든 채 눈을 가늘게 떴다. 갸름한 얼굴형에 이목구비가 섬세한 스타일의 미인이었지만 민경아에게는 눈빛과 입술 끝에 교만함이 뭉쳐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안세영의 시선을 받은 민경아가 말을 이었다.
“지금 하바로프스크는 전쟁 중이나 같은 상황이예요. 그 중심에 우리 회사가 있거든요.”
“전쟁중이라뇨?”
눈을 동그랗게 떴으면서도 안세영은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커피를 삼켰다. 회사 생활을 하다보면 전쟁이란 말을 수도 없이 듣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포탄이 작열하는 전쟁터보다 더 자주 듣게 된다.
기업 간의 경쟁은 전쟁이나 같다는 표현을 사용한지도 오래되었다. 안세영의 태도에 다시 반발심이 일어난 민경아는 심호흡을 했다. 자제력이 남못지 않은 민경아였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안세영을 대할 때부터 잠재되어 있던 열등의식이 기회를 타고 터져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러시아 정부의 시베리아 동북지역 임차지 응찰에 참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죠.”
가라앉은 목소리로 민경아가 말을 이어나갔다.
“경쟁상대가 각각 러시아 마피아와 일본 야쿠자 세력을 배후에 두고 있어 우리를 견제하고 있거든요.”
민경아가 안세영을 똑바로 보았다. 지사장 고영호는 안세영에게 현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 해주는 것이 낫다고 했다. 그러나 겁을 주지는 말라면서 회장 따님을 배려하도록 주의 시켰지만 이제 민경아는 다 잊었다.
“며칠 전에는 우리의 경쟁 상대를 후원하고 있는 주 정부의 고관이 암살을 당했지요. 그리고 어제는 우리 후원 세력의 보스가 대로상에서 총격을 받았습니다.”
그때서야 커피잔을 내려놓은 안세영이 자리도 고쳐 앉았다. 눈동자의 촛점도 민경아에게 맞춰져 있다.
“그래서요?“
“그래서 안대리님이 회사에 나오시지 않도록 배려한 것입니다. 안내원을 회사 밖에서 고용한 것도 눈에 띄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였지요.”
“우리는 누가 후원하고 있는데요?”
불쑥 안세영이 묻자 민경아의 표정이 조심스러워졌다.
“김명천씨라고 회사에 근무했던 사람이 후원하고 있어요.”
“우리 회사에 근무 했었다구요?”
“그래요.”
“직급은 뭐였는데요?”
“사원이었죠.”
“사원급이.”
이맛살을 조금 찌푸린 안세영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민경아를 보았다.
“유능한 사람인 모양이죠?”
“해결사죠.”
민경아가 그렇게 말한 것은 다시 반발심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사원급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안세영의 표정이 또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그러나 내친김이었다.
민경아의 말이 이어졌다.
“마피아 경쟁 조직의 보스를 둘이나 죽여 없앤 사람이죠. 그리고는 고려인들을 규합해서 하바로프스크의 마피아 세력으로 급부상한 인물입니다.”
긴장한 안세영의 표정을 보자 민경아의 목소리에 활기가 띄워졌다.
“이번 임차지 응찰도 그 사람이 고려인 연합회의 지지를 얻어 우리에게 제의한 것입니다. 모두 그 사람의 덕분이죠.”
130
이노우에 겐지는 용의주도한 성격이었다. 야마구치조의 서열 4위는 회장과 동석하는 신분인 것이다. 이번 임차지 경쟁에서 승리 하게 되면 회장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검정색 벤츠의 뒷좌석에 앉은 이노우에의 표정은 싸늘했다. 몸을 굳히고는 앞쪽만 응시하고 있어서 보좌역 사사끼는 제대로 목도 돌리지 못했다.
“좋다.”
마침네 이노우에가 입을 열었다. 그는 하바로프스크 교외로 달리는 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로스토프는 분명히 고려인 조직에서 제거했어. 우리가 손을 대지 않았으니까.”
이노우에가 입술만 달삭이며 말하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병신 같은 일류신 놈들은 아직 증거를 잡지 못한 상황이고.”
그리고 이틀 전의 김명천에 대한 기습작전은 이쪽 야마구치조 작품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씁쓸했다. 김명천은 멀쩡하게 살아남았고 가치만 상승시켰다.
“그렇다면 작전을 바꾸도록 하지.”
잇사이로 이노우에가 말했을 때 사사끼는 몸을 돌렸다.
“고문님.”
“뭐냐?”
“김명천이 일류신과 만나게 되면 습격 사건이 우리들 소행인 것으로 드러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순진한놈 같으니.”
혀를 찬 이노우에가 사사끼를 노려보았다.
“놈들은 서로 믿지 못하는 상황이다. 증거를 보여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이노우에의 목소리가 갑자기 낮아졌다.
“두 놈이 만나게 될지는 신도 모른다.”
그러나 이쪽 입장이 다급해진 것은 사실이다. 만일 일류신 마피아와 고려인 마피아가 연합이라도 하게 된다면 이쪽은 고립된다. 정보원이 일류신과 김명천의 회동 정보를 전해 주었을 때 천하의 이노우에 겐지도 처음에는 당황했다.
그래서 도쿄에 응원을 요청해야 될지를 심각하게 고려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차는 오후의 교외 도로를 속력을 내며 달려가는 중이다. 그때 사사끼가 다시 머리를 돌려 이노우에를 보았다.
“고문님. 서울에서 일성전자의 손님들이 여러명 입국 했습니다.”
이노우에는 창밖만 보았고 사사끼의 말이 이어졌다.
“손님들은 일성전자의 직원들입니다만 조금 흥미롭습니다.”
그래도 이노우에의 시선은 돌려지지 않았으므로 사사끼가 헛기침을 했다.
“광고 사진을 찍으려고 장비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리더가 여자인데다 아직 젊습니다.”
“……....”
“정보원을 보내 조사를 시켰더니 그 여자의 여권 이름이 안세영이었고 27세로 입국 목적은 광고 사진 촬영이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창에서 시선을 뗀 이노우에가 이맛살을 찌푸리고 사사끼를 보았다.
“본론을 말해라. 사사끼.”
“예. 고문님.”
정색한 사사끼가 이노우에를 보았다.
“안세영은 한국 일성그룹 안재성 회장 딸입니다. 소속은 일성그룹 계열사인 일성통신 광고기획실 대리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이노우에의 두 눈이 가늘어졌고 차 안에는 무겁지만 열기띈 정적에 덮여졌다.
“흐흥.”
이윽고 차안의 정적에 이노우에의 코웃음 소리로 깨뜨려졌다.
“여기 또 하나의 변수가 만들어졌군.”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