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환 문학관에서
최성희
한계령을 넘어온 바람 한 줄기
주막집 창문을 기웃거린다
버지니아 하늘을 돌아온 구름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인 듯
술잔 속을 아지랑이처럼 일렁인다
목마가 운다
가을비를 우울처럼 두르고
방울소리가 페시미즘으로 벌럭이며 운다
이 가을엔 모두 어디로 떠나려는 걸까
바람에 쓰러져간 술병들은 어느 행성에서
버지니아울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사랑도 허무도 전쟁도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소리처럼 지나가고
벽에 걸린 시인의 바바리 소매 사이로
생과 사의 애환이 옵티미즘으로 살아난다
페허속 한 시대를 병풍처럼 펼쳐 놓은 벼루와 먹
시처럼 살다간 세월을 술잔으로 돌리고 있다
문장 속 행간을 헤엄치는 우산들
구름도 바람도 빗물도 모두가
주인을 버리고 떠난 목마와 숙녀처럼
어디론가 출렁출렁 흐르고 있다
바람의 고리
최성희
소금산* 찬바람이
출렁다리를 건너는 밤
안개꽃 같은 서리가 내린다
유리알처럼 맑은 하늘에
아기별들이 떨고 있다
초승달은 찬바람에 떨어질까
서쪽 하늘을 꼭 붙잡고 있다
바람 고리에 걸려 우는 칡넝쿨들은
속 깊은 울음을 내려놓고
흔들리는 문장마다 지난날을 채집하고 있다
나는 지금 어느 행성에서 떠돌고 있는가
세상을 읽어내다 길을 잃은 나
아직 가슴속에 남아 있는 흔적들만
바람의 고리로 흔들린다
기억의 저 끄트머리에서 건져 올린 비파 한 소절
사그락 사그락 서리 맞은 억새가
손 흔들고 서 있는데
나는 내 가는 길 몰라 바람에게 묻고 있다
*소금산. 강원도 원주에 있는 산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