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
역사적인 인물은 공과 과가 있다.
과(過)는 덮어두고 공(功)만 칭송하면 우상화다.
만고의 역적 김일성도
북한 인민들에겐 무오류의 신이다.
김일성이 거둥할 때 꽃수술을 들고 발광하는 북한 주민들을 볼 때
우리는 우상화에 매몰된 우매한 사람들이라 가엽게 생각한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내로남불이라는 말이 있다.
4.19혁명으로 쫓겨난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추앙하고
18년 독재를 하다 부하에게 총 맞아 죽은 박정희를 칭송하는 것은
북한이 김일성을 신격화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북한에는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많다.
가끔 TV화면에 그들 동상 앞에서 결혼 기념사진을 찍고
헌화하며 경건해 하는 북한 주민을 볼때면
시대를 역행하는 야만스러운 국민들이라 혀를 차며 불쌍히 여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독일의 히틀러, 소련의 스탈린, 리비아의 카다피.
이라크의 후세인, 루마니아의 차우세스쿠의 동상은
자국민에 의해 끌려 내려왔다.
공통점은 국부, 건국대통령 등등 갖은 수사가 붙어있지만
국민의 뜻에 반한 독재자라는 것이다.
이승만을 국부로 떠받든다면
4.19때 죽어간 학생들의 피는 무엇으로 정의(定義)할 것인가?
경무대 앞에서 총맞아 죽어가던 어린 초등학생의 피는 무엇으로 답할 것인가?
그들의 희생을 공산당 사주라고 강변하던
치안국장 최인규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 당했다.
그에게 훈장이라도 주어야 한단 말인가?
역사의 단추를 다시 꿰려면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힘든가?
역사를 거스르는 야만의 길이요 퇴보의 길이다.
일본은 지리적으로 매우 불리한 조건이다.
땅이 흔들리는 지진이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산이 지금도 열기를 내뿜고 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태풍은 년례 행사가 되었고
쓰나미가 밀려오면 떠밀려가는 것 외에 답이 없다.
조선시대.
한반도를 다녀간 일본 사신은 자신의 쇼군에게
“조선이 물 좋고 공기 좋은 금수강산”이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산적 같은 놈이
옆집 여자가 예쁘면 빼앗아 데리고 살고 싶듯이
다이묘 (大名)는 한반도에 침을 흘리며 빼앗고 싶어졌다.
그 결과물이 임진왜란과 한일합방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부르는 명칭이고 식민사관의 잔재다.
우리는 조일전쟁과 한일병탄이라 불러야 한다.
1910년. 나라가 망하여 강제병합 되자
황현과 민영환처럼 뜻있는 지사는 자결했고
의식 있는 사람들은 북간도와 연해주에 나아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삭풍 몰아치는 만주 땅에서 발싸게로 추위를 이겨내며
열악한 무기로 일본군과 대적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하지만 악조건 속에서도 청산리대첩을 이루었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했다.
봉오동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공산당 가입경력이 있다고 내쳤다.
그럼, 남로당 가입 경력이 있는 박정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역사를 잊지 않은 우리에게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유관순을 비롯한 수많은 애국 열사와 의사들이
왜경에게 붙잡혀 혹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처형되었다.
학병으로 끌려간 장준하는
자신의 부대가 주둔하고 있던 장수성에서 탈영하여
중경에 있는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독립군이 되어 나라 찾는데 이 한몸 바치기 위해서 였다.
4천리가 넘는 머나먼 길.
낮에 이동하면 붙잡힐까봐
별자리를 방향삼아 밤에만 걸어갔다.
목숨을 건 탈주였다.
이 땅의 젊은이들이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하여
목숨을 건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제 발로 걸어가 일본 천왕에게 충성하겠다고 나선 청년이 있었다.
박정희와 백선엽이다.
문경에서 초등학교 선생으로 재직하던 박정희는
교사를 사직하고 일본의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다.
이 때 그는 박정희라는 이름을 버리고 <다까끼 마사오>로 창씨개명했다.
나이가 많다고 퇴짜를 맞자 이듬해 다시 도전하여
일본천왕에게 충성하겠다는 혈서를 쓰고 입학 허가를 받았다.
만주군관학교와 일본 육사를 나온 박정희는
만주에 배속 받아 장교로 복무했다.
덴노 헤이까 반자이(天てん皇のう陛へい下か萬ばん歳ざい)천황 폐하 만세
일본이 원폭 2방에 무조건 항복하자
조선경비대를 거쳐 대한민국 육군에 들어간 박정희는
육군소령 계급장을 달고 남로당에 가입하여 육군 세포가 되었다.
원조 빨갱이다.
아버지처럼 따르던 맏형 박상희가 대구 10.1사건에서
경찰의 총에 사망한 것이 영향을 끼쳤다.
박상희는 김종필의 장인이다.
김창룡 특무대장에게 체포된 박정희는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북한의 이상 징후를 감지한 정부는
보도연맹 예비검속에 들어갔다.
감방에서 불러내어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박정희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
육군 내 남로당 명단을 넘겨주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의 회유에 명단을 넘겨주고 목숨을 건졌다.
이로부터 총살된 장교가 2,000여명이다.
이이제이(以夷制夷)라는 말이 있다.
‘오랑캐를 오랑캐로 제압 한다’는 중국인들의 전략전술이다.
간도특설대는 독립군을 때려잡기 위하여 창설된 특수부대다.
“조선 독립군은 조선인이 잡아야 한다.”며
조선인을 주축으로 설립한 독립군 토벌부대다.
백선엽은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백선엽 뿐만 아니라 김백일, 송석하,
신현준, 김석범, 김홍준도 간도특설대 출신이다.
괜히 한 말이 아니다.
백선엽이 쓴 자서전에 나와 있다.
천보산 광산이 독립군에게 습격을 받았다는
급보를 받고 출동한 간도특설대는
전사한 동료를 위로하는 제를 올리겠다며
사살한 독립군의 간을 잘라가는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렀다.
뿐만 아니라 교전 중 생포한 여성 독립군을
떼 지어 겁탈하려다 극렬히 저항하자
하복부에 총을 난사하여 벌집을 만들어 놓고
여자의 가장 은밀한 곳에 대검을 꽂아놓은 만행을 저질렀다.
하늘아래 첫 동네 이도백하(二道白河)를 비롯하여
백두산 아래 화전민들과 연길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간도특설대의 악명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첫댓글 (불쌍한 힌반도지형인..).북한보다도 더 배고픈 시절이 있었지요~제가 서울시청에 근무할때~북한이 우리 남한에게 배급을 주었던 (1970년)사건이~~~~
불쌍한 남한이였지요~우리대한민국은....고 박정희대통령 덕분에 보릿고개를 넘길을수가 있었지요~
김창용 특무대장 사건도 기억하지요~4.19일때 ~최인규 내무장관을 저의 집안어른이 (검사)사형판결힌일도..있지요~
저는 서울시청에서~ 근무하면서~새마을 사업에 참여도하고 ~그후 우리대한민국은 ...부국강병국이되였지요~
광주포병학교 장교 식당에서~큰거울을 보니~ 별두개인 박정희 장군이라는것을 ...알게되였지요~~
빅정희장군은 광주 포병출신이였고...저도 광주 포병학교 출신이였지요~
저는~1965년~광주 전투병과사령부 포병학교 초등군사반에 입교해서 훈련받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