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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의 명시감상
열무밭에서
박정원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 것들에게 몸을 낮춘다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 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박정원, [열무밭에서]({고드름}, 시평사, 2007년) 전문
모든 식물들은 탄소동화작용을 통해서 살아가게 된다. 탄소동화작용이란 식물세포 중의 엽록체가 빛의 에너지에 의하여 공기 중에서 섭취한 탄산가스와 뿌리에서 흡수한 수분으로써 탄수화물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요컨대 모든 식물들은 빛의 에너지를 날것 그대로 이용할 수가 없기 때문에, 탄소동화작용에 의해서 탄수화물을 생산해내고, 그리고, 그 탄수화물을 일상생활에 필요한 에너지로써 저장해두고 있는 것이다. 탄소동화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광합성 작용이고, 이 광합성 작용에 의해서 대부분의 탄수화물을 얻게 된다. 모든 초식동물들과 우리 인간들은 ‘종속영양생물’이고, 따라서 이 식물들의 탄수화물을 이용하여 살아가게 된다. 광합성 작용은 빛의 세기에 의해서 그 영향을 크게 받게 되고, 보통 섭씨 35도에서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다고 한다.
서리란 무엇인가? 서리란 수증기가 증발하여 지표나 물체의 표면에 얼어붙은 것으로, 늦가을 이슬점이 0도 이하일 때 생겨나는 어떤 것을 말한다. 서리의 형태는 눈의 결정형태와도 같으며, 해가 지고 난 뒤, 한 시간에 0.8도 이상씩 기온이 떨어지면 서리가 내린다고 할 수가 있다. 서리가 내리는 시기는 보통 상강무렵(10월 23일 경)이며, 이 상강무렵에는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찬 서리가 내릴 수 있는 최적기가 된다. 서리가 내리면 모든 식물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 서리에 의하여 엽록체의 막이 파괴되거나 모든 세포들이 말라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식물들과 서리는 상극이며, 그 서리가 내리면 어떠한 식물들도 탄소동화작용을 통하여 그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가 없게 된다.
박정원 시인은 충남 금산 출신이며, 1998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꽃은 피다}와 {내 마음 속에 한 사람이}, 그리고 {고드름} 등을 출간한 바가 있다. 박정원 시인의 [열무밭에서]는 그의 비극적 세계관에 의한 ‘측은지심’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제일급의 시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비극적 세계관이란 낙천적 세계관의 반대방향에서, 슬픔과 고통과 그리고 파멸적인 운명을 벗어날 수 없는 세계관을 뜻하고, 측은지심이란 그 비극적인 운명을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는 어떤 것을 말한다. 동정과 연민이 모든 면에서 우월한 자가 그 값싼 은혜를 베푸는 어떤 것을 말한다면, 이때의 측은지심은 진정으로 타인과 하나가 될 수 있는 인간 감정을 말한다. 요컨대 측은지심이란 동병상련과도 같은 마음을 말하지만, 박정원 시인의 그 측은지심은 진정으로 자기 자신의 잘못을 탓하는 자기학대에 더 가깝다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그의 측은지심은 동정과 연민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마음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열무는 십자화과 무속의 근채류이며 ‘어린 무우’를 말한다. 열무는 1년에 여러 번 재배할 수가 있으며, 주로 김치를 담가 먹는데 사용된다. 예전에는 여름철의 ‘사이짓기’로 재배되었지만, 이제는 도시근교를 중심으로 일년내내 재배되고 있는 실정이다. 재배하기도 비교적 쉽고 생육기간도 짧아서 겨울에는 60일 전후, 봄에는 40일 전후, 그리고 제철인 여름에는 25일 전후면 수확이 가능하다.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품종으로는 흑엽열무, 참존열무, 새색시열무, 귀한열무, 여름춘향이열무, 진한열무, 청송열무 등이 있다. 지역별로 열무에 대한 기호도가 달라서 강원도 지역에서는 일본 품종인 궁중무 계통이 많이 재배되고, 경상도 지역에서는 잎 가장자리가 후미지게 깊이 패어 들어가고 다소 억센 것을 주로 재배하는 반면에 전라도 지역에서는 잎이 판엽이고 부드러운 품종이 재배된다.
잎이 연하고 맛이 있어서 뿌리인 무 부분보다는 잎을 주로 이용한다. 잎은 열량이 적고 섬유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비타민A와 비타민C가 풍부하다. 고를 때에는 키가 작고 무 부분이 날씬한 어린 열무를 택하는 것이 좋은데, 잎이 너무 가늘면 빨리 무르므로 도톰한 것을 고르도록 한다. 늙은 열무는 무 부분이 통통한데다 잔털이 많아 억세다. 쓰임새는 열무김치를 담그는 데 가장 많이 이용되며, 열무냉면이나 열무국수를 만들어 먹는 데도 이용된다. 잎은 날것으로 먹어도 좋고, 데쳐서 물에 담갔다가 참기름을 둘러 볶아 먹으면 비타민A를 충분히 섭취할 수 있다. 잎이 금방 시들기 때문에 가능한 한 빨리 먹도록 하고, 남은 것은 신문지나 주방타월로 감싸서 냉장 보관하는 것이 좋다({백과사전} 참조).
우리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열무김치를 담그는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가 있다.
1, 열무를 다듬어 풋내가 나지 않도록 맑은 물에 살살 깨끗하게 씻는다.
2, 열무를 소금물에 절였다가 숨이 죽으면 물에 헹구고 그 물기를 빼낸다.
3, 파는 채로 썰고, 마늘과 생강은 각각 찧는다. 붉은 고추는 칼로 대강 다지거나 드문드문 큰 조각이 섞이도록 간다. 너무 곱게 갈면 시원한 맛이 없으므로 주의한다.
4, 열무에 파, 마늘 ·생강 ·고추 간 것을 섞어서 소금으로 간을 하여 버무리다가 밀가루나 녹말가루를 조금(1 큰술 정도) 넣고 살살 섞어 항아리에 담는다. 이렇게 하면 풋내가 나지 않고 맛이 부드러워진다.
5, 열무김치를 버무려서 그릇에 물을 붓고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잘박잘박할 정도로 항아리에 부어 시원하게 익힌다. 열무김치를 버무릴 때 너무 손놀림을 심하게 하면 으깨어져서 풋내가 나니까, 그렇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백과사전} 참조).
박정원 시인은 충남 금산 출신이지만, 열무 김치맛이나 아는 얼치기 농부에 지나지 않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는 10월초쯤에 열무씨앗을 파종했기 때문이다. 그는 시인이며 주업主業은 세무공무원이고, 따라서 그의 농사짓기는 주말농장의 그것에 지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가 있듯이 한로寒露와 입동立冬 사이에 낀 상강무렵, 즉, 10월 23일경이면 첫 서리가 내리게 되고, 그때에는 비닐하우스가 아니면 더 이상 그 어떤 채소의 재배도 가능하지가 않게 된다. 따라서 그는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자기 자신을 탓하며, 그 참담한 심정을 다음과 같이 피력해 놓는다.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라는 시구가 그렇고,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 것들에게 몸을 낮춘다”라는 시구가 그렇다. “떡잎 갓 벗어난 아기열무들 사이로/ 서릿발 들어선다”라는 것은 때를 잘못 맞추어 태어난 열무의 비극적인운명을 뜻하고,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그 어린 것들”은 더 이상 빛의 에너지를 통해서 탄수화물을 만들어낼 수 없는 어린 열무를 뜻한다. 주지하다시피 농사일은 매우 어렵고 힘든 일이다. 땀을 뻘뻘뻘 흘리며 비료와 퇴비를 뿌리고,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어서 씨앗을 뿌려야만 열무의 싹이 트게 되고, 또, 그리고, 온갖 잡초들을 뽑아주지 않으면 더 이상 열무의 새싹들은 자라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렵고 힘들었던 일들도 도로아미타불의 수고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된서리를 맞은 열무들은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시인은 그 어렵고 힘들었던 노동 따위는 잊어버리고, 오직 그 ‘측은지심’으로 어린 열무들을 바라보고만 있는 것이다.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으면 어린 열무들을 어미 잃은 아기처럼 의인화시키고, “퉁퉁 불은 엄마 젖을 맘껏 먹어야 할” “어린 것들”이라고 흐느끼고 있는 것이며, 또한, 얼마나 그 마음이 아팠으면 “여린 이파리를 들추자/ 흐느끼느라 말을 잇지 못하는 열무”와 자기 자신을 동일화시키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측은지심이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고, 그 비극적 세계관은 더욱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왜냐하면 슬픔이나 고통은 그 참는 힘이 약하게 되면 더욱 더 사나운 맹수들처럼 달려 들게 되기 때문이다.
제때에 씨앗을 뿌리지 못하고 그 시기를 놓쳐버린 죄는 시인의 눈시울을 적시고, 어느 덧 그 속울음은 통곡이 되어서 어린 열무마저도 통곡의 눈물을 쏟아내게 만든다. 어린 열무가 우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 울고 있는 것이지만, 그 통곡 속에는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어!”라는 탄식과 함께, 자기 학대가 담겨 있다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어린 열무 앞에는 만물이 우거지는 봄날도 있을 수가 없고, 더 이상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한, 한 여름날의 햇빛도 있을 수가 없다. 오직 있는 것이라고는 추풍의 낙엽이 떨어지듯이 더욱 더 매서운 추위와 함께, 그토록 두렵고 무서운 비명횡사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따라서 그 마음 속의 슬픔은 더욱 더 크나 큰 슬픔들을 불러오게 되고, 그 슬픔들은 끝끝내 더욱 더 비극적인 사건들을 불러 들이게 된다. 상상력의 힘은 그것이 기쁠 때는 더욱 더 기쁜 마음을 가중시키고, 또한, 상상력의 힘은 그것이 슬플 때는 더욱 더 슬픈 마음을 가중시킨다. “누가 놓고 갔는지 천국영아원 골목엔/ 아기 혼자 포대기에 안긴 채 울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또한,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 연락처도 없이 사라진 아기 엄마는/ 철도 모르고 열무씨를 묻었던/ 내 속 같았을까”라는 시구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어린 아기는 먹고 입혀주고 따뜻하게 보살펴 주어야 할 부모가 필요하고, 또, 그리고, 그 어린 아기가 성장하여 오로지 자기자신의 힘으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는 그 어린 아기를 인도하고 보살펴 주어야 할 부모가 필요하다. 남녀가 사랑을 하고 아버지가 되고 어머니가 되는 것은 그 어린 아기를 잘 키우겠다는 약속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아니, 그 것은 약속이 아니라, 절대적인 의무이며, 종족의 명령이기도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어머니는 어린 아기를 ‘천국영아원의 골목’에 버렸고, 그 연락처도 남기지 않은 채,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그 어디론가로 사라져가 버렸던 것이다. 그 어린 아기의 어머니는 십대의 미혼모였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혼한 어머니였을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유복자를 낳은 어머니였을까? 또한, 그 어린 아기의 어머니는 실연을 당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이혼을 당한 것일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그 남편이 어린 아기를 낳기도 전에 비명횡사를 한 것일까? “아이를 잘 키워주세요 제발 부탁합니다”라고 “열무씨앗처럼 또박또박 눌러쓴 편지”로는 그것을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그 어머니는 한 맺힌 어머니이며, 자기 자신의 죄를 뼛 속까지 뉘우치고 있는 어머니라고 할 수가 있다. 어린 아기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그러나 그 어머니는 그 어린 아기를 키울 능력이 없다. 그 어머니의 사랑이 불륜이었는지, 아름다운 사랑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 어린 아기를 버린 죄는 결코 용서를 받을 수가 없다. 어린 아기의 탄생은 축복 속의 탄생이어야만 하고, 그 어린 아기의 앞날은 늘, 건강과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철 모르고 열무씨앗을 파종했던 시인도 죄인이고, 철 모르고 어린 아기를 낳았던 어머니도 죄인이다. 열무김치는 맛이 있지만, 10월초에 열무씨앗을 파종하는 바보가 어디 있겠으며, 사랑은 꿀맛처럼 달콤하지만, 키울 수도 없는 어린 아기를 낳는 바보가 어디 있겠는가? 죄인은 바보이고 바보는 죄인이다. 그 죄인과 바보들은 모두가 다같이 그 어린 아기들이 천국의 영아원을 통해서 더욱 더 건강하고 복된 삶을 기원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허황된 생각일 뿐, 차갑디 차가운 서릿발만이 그 어린 아기들의 앞날을 맞이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돌아가는 모퉁이엔 온통 대못만 박혔으리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할 저녁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을 떨어뜨릴까
너무 늦게 심은 열무밭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어린 열무도 그의 저주받은 운명 앞에서 울고, 어린 아기도 그의 저주받은 운명 앞에서 운다. 시인도 그의 죄 많은 운명 때문에 울고, 아기 엄마도 그의 죄 많은 운명 때문에 운다. 어린 열무와 어린 아기가 엄마와 아빠를 찾으면 아기 엄마와 시인이 울면서 대답하고, 아기 엄마와 시인이 울면서 어린 열무와 어린 아기를 부르면 어린 열무와 어린 아기가 울음으로 대답한다. 이때에 시인과 아기 엄마는 비정한 아버지와 어머니로 결합하게 되고, 그리고 그 어린 열무와 어린 아기는 비정한 부모의 자식들로 결합하게 된다. 그들은 모두가 다같이 울면서 헤어지고 울면서 결합한다. 그들의 울음은 사중창이 되고, 그 사중창은 오늘날 이산가족들----노숙자들, 또는 신용불량자들----의 통곡이 된다.
박정원 시인은 천성이 맑고 깨끗한 시인이며, 더없이 따뜻하고 여린 시인이다. 그의 [열무밭에서]는 천국의 영아원에 버려진 어린 아기와 그 어머니의 편지를 읽고 그 아픈 마음을 상강무렵의 열무밭에서 쓴 시일 수도 있고, 그 반대방향에서, 상강무렵의 열무밭에서 그 어린 열무들을 보고 그 아픈 마음을 천국의 영아원 앞에서 쓴 시일 수도 있다. ‘퉁퉁 불은 엄마의 젖을 마음껏 먹어야 할 어린 아기들’, ‘만인들의 축복 속에서 탄생하고 늘 건강하고 행복해야 할 어린 아기들----. 요컨대 너무나도 못낫고 무기력한 아버지의 마음이 그 이산가족의 사중창을 연출해내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온통 대못이 박혀 있으면서도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마음으로 다시 그 젖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어머니), 숨어도 숨어도 가난의 옷자락만이 보이는 몸으로도 “꽁보리밥에 여린 열무를 썩썩 비벼먹으며/ 고추장 같은 한숨만을 떨어”뜨리는 아버지(어머니)----. 그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든 서민들의 초상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의 삶은 고통의 바다이다. 일을 하는 것도 고통스럽고, 먹고 사는 것도 고통스럽다. 연애도 고통스럽고 사랑도 고통스럽다. 어머니가 되고 아버지가 되는 것도 고통스럽고, 우정도, 죽음도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슬픔을 낳고, 그 슬픔이 비극적인 세계관을 낳는다. 측은지심이 동병상련이고 동병상련이 측은지심이다. 모든 서정시는 비극적인 것이며, 모든 서정시인들이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정시의 토대는 현실이고, 현실은 서정시의 비옥한 텃밭이다. 박정원 시인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어린 열무와 어린 아기를 동일시하고, 또한, 그 어린 아기를 버린 어머니와 자기 자신을 동일시하며, 그리고, 이처럼 자기 자신을 자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학대의 대가이지만, 그러나 그의 자기 학대는 ‘모든 것이 내탓이다’라는 그의 도덕적인 책임의식의 산물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모든 이산가족들은 또다시 가정을 꾸미고, 더욱 더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야 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퉁퉁 불은 젖과 일조량이 더욱 더 많은 그 여름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