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뚝배기에 음식을 하면서 커피물을 끊여 커피를 마시는데
가스렌지에서 경고음이 울렸습니다.
본능적으로 일어나 상황을 보니
음식을 끊이고 있는 뚝배기는 생각지 않고 가스의 중간벨브를 잠갔습니다.
가스렌지는 열여있고 중간벨브는 차단된 상태에서
인공지능 가스렌지는 경고음을 울렸습니다.
생활상의 부주의는
대형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전에 다산교회 지하 식당에서 가스폭발이 있었는데
수요 전도팀이 저녁을 먹기 위해 가스의 불을 붙이는 순간
"펑"하는 소리와 함께 모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갔습니다.
점심을 해먹고 중간벨브를 닫지 않고 가스 벨브를 잠그고 나갔는데
가스렌지의 불은 꺼졌지만 완전히 닫히지 않고 조금 열여 있었던 틈으로 가스가 새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몸에 밴 안전의식이 없어 대형 참사로 종종 이어집니다.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어느 권사님은 얼굴의 심한 화상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교회당에서 화재가 종종 일어나는 경우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시설의 안전의식 결여 때문입니다.
여름에는 아무도 없는 공간에 선풍기가 돌아가고
겨울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 난로가 켜져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형산불과 화재는
대부분 작은 실수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안전의식의 결여는
대형 산불과 화재는 물론 생명을 잃고 나라가 망하기도 합니다.
가스렌지의 경고음과 같은 깨어있는 의식은
믿음의 궤변에 대한 광야의 외치는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교적 기득권 층이 유대교를 지배하고 있을 때
광야의 외치는 소리는 메시야의 대관식을 예비하였습니다.
광야의 외치는 소리로 주의 길을 예비하였던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경종을 울렸습니다.
세례 요한으 증거를 받은 예수님도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다"며 믿음의 경종을 울렸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탄원하는 공의의 기도를 하였던 하박국 선지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말씀과 함께 종말론적인 심판의 묵시를 받고
판에 새겨 달려가면서도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가진 사도 바울은
주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선한 싸움 다싸우고 달려갈 길을 온전히 달렸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종은
타성에 젖어 자리보전하는 게으른 종을 책망합니다.
올 해도 연말연시 성탄의 경종은 울리지 않았고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크리스마스의 대중 문화는 타락의 늪이 되었습니다.
기쁜 성탄 기쁘다 구주 오셨네의 찬양은
하늘의 영광으로 울려펴졌고 땅의 평화를 안겨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성탄의 경종를 잃은 성탄의 메세지는
믿음의 궤변, 그 청라 언덕의 허상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청라언덕은
주께서 말씀하신 하늘의 빛이 비취는 산 위의 마을, 그 시온성입니다.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과 요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에도
그리스도의 탄생은 복음으로 상정되지 않았습니다.
마태 복음은 왕의 탄생을 알렸고
누가복음은 다윗의 동네에 태어난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마가는 그리스도의 탄생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시작으로 선포하였고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곧 말씀의 검이요,
보혜사 성령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로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의 통치를 시작하였습니다.
강단마다 성탄절의 감성적 타령은
선지자의 신탁과 복음서의 증거와 바울의 복음을 담지 못하고 무당의 푸닥거리 푸념이 되었습니다.
12월 26일 크리스마스 다음날과 12월 24일 성탄 이브와 천양지차인 것은
성탄의 경종, 그 경고음을 울리지 않고 듣지 못하였기 떄문입니다.
여전히 풀어지고 갈지자 행보를 하는 행태는
청라 언덕의 허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성탄의 경종으로 허리를 동이지 못하고
신년예배와 소위 말하는 특새로 영적 쇄신의 몸부림을 치지만
믿음의 궤변이요, 무속의 푸닥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말씀의 본질적인 그 복음의 부재는 삶의 예배를 잃어 버리고
형식의 궤변과 절기의 썩은 동아줄을 잡은 꼴입니다.
선지자의 입을 통한 메시야의 신탁과 그리스도의 탄생은
율법적 절기의 허망 위에 돋아난 그루터기의 메시야 시대의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을 율법적 절기로 이해하는 믿음의 궤변은
절기의 희생 똥을 너희 얼굴에 쳐바를 것이라는 말리기의 경고를 무시한 처사입니다.
한국 교회는 말라기의 십일조는 갈취하면서
말라기의 평화언약 파괴와 절기의 희생똥은 그 말씀의 교훈을 버렸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지키라는 절기를 지키지 않아 심판을 받았고
신약의 교회는 구약시대 절기의 희생똥을 교회력의 절기로 삼아 예전주의에 함몰되었습니다.
요시야 왕 때 발견된 모세의 율법책은
사사시대로부터 유월절을 지키기 않았다는 열왕기 기자의 탄식이 울렸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초막절은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 백성은 처음으로 경험하였습니다.
레위기의 율법과 신명기의 법이 실종된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언약을 배반한 심판의 몽둥이를 얻어맞았습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은 엘리사 시대
단 한번 수넴 여인의 남편 입에서 안식일이란 말이 언급되었을 뿐입니다.
레위기법과 신명기법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의 죽음, 그 이후 사사시대의 시초부터 시작된 불행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나라를 잃고 우물을 파기 시작하였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스라엘의 등불이 되었지만
말라기 시대 평화의 언약을 깨뜨린 제사장으로 이스라엘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가 천사의 합창이 되었습니다.
성서지대의 그 충만한 그리스도 탄생의 의미는 성탄의 메세지가 되지 못하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감성 타령은 성탄의 본질을 왜곡하고 날조하는 믿음의 궤변,
그 무속의 푸닥거리 푸념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궤변으로 만들어진 한국 교회 강단의 공동화 현상은
선지자와 사도의 증거를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실종되고
참된 하나님 나라의 백성, 그 인구 절벽을 만들었습니다.
보수가 불타고 궤멸되어도 그 씨앗마저 간수하지 못하였듯
하나님의 나라가 종말론적인 공동화 현상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보수가 불타고 궤멸된 그 자리에 불탄 흔적을 아무리 뒤져도
보수의 정치와 학자를 찾아 볼 수 없는 지경이어서
적색광풍의 쓰나미는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완전히 초토화시켰습니다.
씨앗의 전매권을 잃은 그 나라의 미래는
다른 나라에 목줄을 내어준 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보수의 씨앗은 미국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에 있고
말씀의 씨앗은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결실을 맺을 옥토의 마음 밭이 없어
새가 쪼아먹고 사단의 유희가 되었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는 이 땅의 보수나 강단의 복음을 잃은 사역자나 초록동색이어서
포스트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당한 한반도의 밝은 내일은 그 청라의 언덕을 잃었습니다.
참으로 환난의 덫을 만났지만 그 부르짖는 기도로
순풍의 돛을 달고 인자와 진리, 그 말씀의 인도를 받아 소망의 항구에 접안하는
영감적 통찰의 시편 107편 시인은 비전은 어디에 있습니끼?
참된 믿음의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의 그 청라 언덕을 세울 참된 선지자와 사도의 후예는
이 땅의 우리 시대에 없는 것인가?
믿음의 궤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농간하고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된 사역자는 광화문 촛불 불나방, 그 광란의 심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서 대한민국, 그 인자와 진리로 충만한 청라 언덕의 주역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의 영광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그리스도의 진실한 종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