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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출 4: 24-26
사람은 심한 고생을 한 번 겪고 나면 참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자라나는 아이들도 심하게 병치레를 하고 나면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 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아기들이 병치레를 하면 듣기 좋은 말로 또 하나 배우려 하는 것이라고 말씀들을 합니다.
또 때로는 [죽을 뻔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식구들 중에 죽을 뻔한 경험을 해 보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을 살다가 죽을 뻔한 경험을 하면 참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된다고 합니다.
[모세]는 평생에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첫 번째 죽을 고비는 태어나자마자 겪었던 애굽의 사내아이 말살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크게 번성하자 위기를 느낀 애굽의 왕실이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중 사내아이는 무조건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서슬 퍼렇던 죽음의 고비를 모세는 부모의 사랑으로 석 달을 숨겨진 채 키워지다가는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애굽 공주의 양자로 입적되어 생명을 부지하게 됩니다.
두 번째 죽을 고비 는 모세가 장성한 후에 자기 형제들이 고역하는 것을 보러 나가서는 동족인 히브리 사람을 치는 애굽 사람을 보고 분이 나서 쳐죽여 버리고 말았을 때입니다. 그 사실이 발각되면서 바로가 모세를 잡아 죽이려하고 하는 통에 모세는 바로의 손아귀를 피해 미디안으로 피신했었습니다.
세 번째 죽을 고비를 넘긴 것이 오늘의 본문의 내용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해방의 사명을 받아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가던 길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까지의 죽을 고비는 애굽 사람들이 죽이려 한 것이기에 이해가 가지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장면은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당시의 광야 길에는 군데군데 상인이나 여행자들이 임시 머무는 휴식처가 있었습니다. 식사와 이불 등은 제공되지 않았지만, 하룻밤 기거할 수 있게 자유롭게 개방되어 있는 공용 숙소였습니다. 하루 종일을 여행한 후 이 숙소에 들어 곤한 몸을 누이려할 때, 바로 그 숙소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죽이려 하셨는지는 자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무튼 [십보라]의 다급한 다음 행동들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두려웠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본문 24절에 쓰여진 '만나다'라는 단어 하나로도 그 때의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 이스라엘 말에는 '만나다'라는 단어가 두 개가 있는데, 그 중 [카라]라는 용어는 '친밀하고 따뜻한 만남'을 의미할 때 쓰여졌고, 다른 하나인 [파가쉬]라는 단어는 '거칠게 적대관계로 만날 때' 쓰여지는 말인데, 감정이 격해져서 씩씩대며 만나러 오는 그런 의미로 쓰여지는 단어입니다.
본문에 쓰여진 것이 '카라'가 아닌 [파가쉬]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만나러 오신 목적이 친밀하고 따뜻한 만남이 아니라, 거친 적대관계로 만나러 오셨다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것입니까? 사명을 앞에 두고 떠나는 소심해진 모세를 격려하셔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겨우 마음을 추슬러 사명의 길로 힘겹게 나서는 모세를 오히려 죽이려하시다니, 왜 이러시는 겁니까?
⊙ 모세를 죽이려 하실 때에 아내 십보라가 취한 행동과 그 이후에 변화된 일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이유를 알 수가있습니다.
첫째, 택한 모세라도 성결치 못하면 징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실 때 십보라가 돌칼을 집어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져 놓습니다. 그제서야 여호와께서는 모세를 놓아주시고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신 이유중의 하나가 '아들의 할례'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애굽을 향하여 출발하기 얼마 전, 모세는 둘째 아이 [엘리에셀]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길을 떠날 채비로 마음이 분주했었는지, 아니면 이방인이었던 아내 [십보라]의 반대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기한인 8일이 지나도록 아이의 할례예식을 치르지 못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집에서도 하지 못한 할례를 노중에서 치르기란 불가능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저 할례의식을 행하지 않은 것을 편한 마음으로 별스럽지 않게 생각하고 여행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릅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의 하나님과의 변개할 수 없는 약속입니다. 할례는 낳은 지 8일이 된 사내아이의 생식기의 끝 부분을 덮고있는 표피를 잘라내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이방인들에게는 그저 살덩어리 조금을 떼어내는 것에 불과한지 모르지만, 당시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할례는 생명보다 귀한 진리가 배어져 있었습니다.
즉, 이 할례를 통하여 비로소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기업이 되었던 것입니다. 양피를 베어내는 것은 필요 없는 부분을 베어내면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를 확인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창세기 17장을 보십시오. 아브라함과 이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단호하십니다.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라." (창13-14절)
할례는 하면 유익이 되고 하지 않으면 약간의 손해가 오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하늘로부터 생명이 오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보호받는 표징이었습니다. 할례가 없으면 하나님과 끊겨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생명보다 성결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시는 이 큰 역사는, 영적으로 보면 애굽과 섞여 살던 하나님의 백성을 거룩히 구별해 내서, 예비하신 축복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시려는 [성결 예식]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나서는 모세가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결하게 구별하는 할례조차도 생각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민족을 성결하게 구별하는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아들의 할례를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죽을 뻔한 경험을 통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깨우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사명의 길에 나서면서 세상과 구별되어야 하는 우리의 신분을 망각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중심을 스스로 돌아보고 살펴보면서 성결하게 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성결한 그릇 속에 담겨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사명자의 길은 주님만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는 장인 '이드로'의 집을 떠나면서 사람에 대한 배려를 자상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떠나게 되는 경위를 장인 이드로에게 말하는 내용을 보면 이 사실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형제들에게로 돌아가서 그들 이 생존하였는지 보려 하오니 나로 가게 하소서." (18절)
지금 모세는 자신의 형제들에게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가게되면 형제들도 만나게 되겠지만, 여하튼 모세는 애굽 왕 바로를 향해 가는 것이요, 이스라엘 백성 전부를 향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는 목적도 자신의 형제들의 안부가 궁금해서 가는 것이 아니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는 엄청난 사명을 안고 애굽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인에게 이렇듯 떠나는 이유를 축소하여 말하는 것은, '장인의 마음을 편케 하려는 모세의 어진 마음의 배려'였던 것입니다. 그런 성격이기에 아마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애굽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족이 함께 애굽으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확인되지 않지만, 모세는 이 징계 후에 아내와 자식들을 다시 미디안으로 돌려보냅니다.
출애굽기 18장 2-3절 상반절까지가 그 증거입니다.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가 돌려보내었던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 두 아들을 데렸으니"
이 장면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공적으로 애굽에서 인도해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에 장인과 자신의 가족들과 다시 상면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모세와 가족들은 떨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6절에서 [바울]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명의 길에 세우셨을 때에 그는 가까운 사람들과 의논조차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명의 길에는 때로 혈육과 의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가족 단위가 핵가족화 되면서 사람들은 가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혈육과 의논해야 할 때가 있고, 하지 않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명의 길을 떠나면서 장인 이드로에게 애굽으로 가는 것에 대한 허락을 받습니다. 이것은 명백하게 잘못된 모세의 모습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결재가 떨어진 서류를 가지고 이드로에게 가서 다시 결재를 받는다는 것이 말이 되는 것입니까? 이드로는 하나님보다 높지를 않습니다. 고로 하나님이 '가라!' 하셨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대로 장인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시니 가겠습니다"하고 통보하면 되는 것이지, "나로 가게 하소서"하는 허락을 구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니, 이드로가 만약 가지 말라하면 아니 갈 것입니까? 성경은 이런 모순을 그대로 기록합니다.
" 이드로가 그에게 평안히 가라 하니라." (18절) 그리고 나서 모세는 가족들에게 마음을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가족과 함께 가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는데 모세는 가족과 함께 갈 준비를 합니다.
그러니까 걸리는 것이 많은 것입니다.
모세가 아들의 할례를 치르지 못한 것도 아내 십보라의 고집스런 반대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방인이었던 십보라는 모세가 할례의 중요성을 누차 강조하며 설명했을텐데도, 분명히 여행중의 불편함을 들어 반대했을 것입니다. 택한자가 이방인과 결혼하는 것도 사명의 길에 막힘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하실 때 보면, [십보라]는 하나님의 불같은 진노에 '왜 이러시느냐?'고 묻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원인인지를 살피는 절차도 필요치를 않았습니다. 문제가 생기니 바로 행동이 나옵니다. 곧바로 아들의 양피를 베어 내지를 않았습니까?
그만큼 문제의 원인을 십보라는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전에 얼마나 모세와 실랑이를 했으면, 바로 해답이 나왔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가족과 동행하려던 것이 사명의 길에 죽을 뻔한 경험을 하는 이유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런 가족을 끌고 다니면서 어떻게 큰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건 바로와의 대결이 수없이 계속되는 사명의 자리에서 시마다 때마다 가족을 챙기며 보호해야하고, 그러면서 어떻게 사명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가족과의 작별 후에 따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눅9:62절)
물론 가족들을 사랑하고 책임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없이 사랑하고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가족관계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가 있고, 그러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명의 길에는 성결케 해야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때론 혈육과 의논하지 말아야 할 것도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사명이니 주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사명을 감당하면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해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귀한 사명 잘 감당하여 감당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당신은 내게 피남편이로다
출 4: 24-26
하나님은 모세를 간절히 부르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더 이상 거절할 명분이 없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기로 결심을 하고 길을 떠났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가 그 길을 가던 도중에 생긴 한 사건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가 한 숙소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거기에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여기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어떻게 모세를 죽이려 하셨을까요?
그리고 또한 하나님께서는 왜 모세를 죽이려 하셨을까요?
아마도 모세는 이 숙소에서 갑작스럽게 병을 앓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외적으로 보여지는 모세의 모습은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시는 분이 아니셨고 모세만이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시려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병을 앓는 형태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추축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로 모세를 죽이시려 하셨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즉 어떤 이들은 이 본문에서 하나님이 죽이시려 한다는 것을 실제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가 칼로 그를 죽이려 했다는 식의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정확히 어떻게 죽이려 하셨는지에 대하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모세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시려 하신다는 사실에 대하여 확실하게 인식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모세는 자기가 죽게 된 이유에 대하여도 곧바로 깨달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아내 십보라도 그렇게 되어진 이유에 대하여 금방 이해하였다는 것입니다.모세가 십보라에게 별다른 말을 전달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보라는 당장에 자기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즉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아니한 까닭에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을 죽이려 하신다는 생각을 십보라는 즉시 알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아들의 양피를 베어 자기 남편 모세 앞에 던지며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십보라의 행위를 보시고 모세를 죽이시려던 일을 그만 두셨다고 본문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된 사건입니까?
아마도 모세와 십보라 사이에는 이 할례 문제로 인한 의견대립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세는 할례를 시행하던 이스라엘의 전통을 따르던 사람이었고 십보라는 이런 행위에 대하여 별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 미디안의 전통을 따르던 사람으로 보입니다.
모세의 요청이 있었지만 십보라는 자기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뜻을 밀고 나갔습니다. 아이에게 할례를 시행하여 피를 보는 것이 십보라에게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런 아내를 열심히 설득하지도 않았고 할례 시행에 대하여 더 이상 강요하지도 않은 체 시간은 흘러 갔습니다. 결국 모세는 자기 아들들에게 할례도 시행하지 못한 채로 이스라엘을 이끌기 위하여 애굽으로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모세의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모세는 한 나라의 지도자로 부르심을 입어 소명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지도자가 될 사람이 그 나라 사람이면 당연히 지키는 일을 자신은 지키지 않은 채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남을 지도해야 할 지도자는 모름지기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애굽에 도달하기 전에 모세는 이 문제부터 풀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하여 오늘과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죽을 지경으로 몰아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경을 십보라가 보게하셨습니다. 결국 십보라는 이 상황에서 자신의 고집을 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남편의 모습을 본 십보라는 더 이상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지 않고 남편의 뜻을 따르기로 작정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교훈은 무엇입니까?
1.신앙생활에서 부부간의 일치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결정적인 순간 십보라의 모세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게 됩니다.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더 이상 십보라는 자신의 고집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십보라는 자기 아들에게 즉시로 할례를 시행합니다.
십보라가 갑자기 할례를 행한 까닭은 모세가 죽을 위기에서 황급하게 소리질러서 자신의 처지를 말해 주었는지 아니면 동시적으로 이 문제 때문에 모세가 죽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두 사람에게 동시에 깨닫게 하셨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모세가 지금 죽게 된 이유는 그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십보라는 즉시로 할례를 시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피 남편"이라 부릅니다.
어떤 분들은 모세를 피남편이라 한 십보라의 말을 일종의 원망이요, 불평이라고 해석을 합니다. 즉 자신이 어찌할 수 없이 아들의 몸에서 피를 보게 된 것을 원망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다릅니다. 이것은 오히려 감사의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한 번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저 정상적인 부부라고 한다면 어느 부부가 남편이 죽어가는 마당에 까지 불평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니 자기 남편이 산다는 데 아들의 몸에서 양피를 베는 일을 불평한다는 것입니까?
저는 이 본문은 십보라의 모세에 대한 사랑을 증거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즉 피남편이라는 것은 생명과도 같이 귀한 남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의 양피를 베자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당신이 죽을 위험 가운데 있게 되었다니 너무나도 가슴이 아프다는 표현이요 후회의 표현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비록 늦었지만 십보라는 깨달았습니다. 남편이 죽을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되자 그 남편의 소중성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주 안에서 우리 성도들의 가정 마다 이러한 사랑의 회복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생명과 같이 귀하게 여기는 가정을 이루게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가정이야 말로 가장 행복한 가정입니다.
2.남편의 머리됨을 알고 행하라는 것입니다.
잘못은 분명히 십보라에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 하셨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그 가정의 머리였기 때문에 그 가정의 모든 일을 책임질 사람이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질서 있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가정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질서를 잘 지키며 살아갈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우리 삶에 은혜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큰 일을 맡기기 위하여 더 큰 성결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아들의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상태로 그동안 별 문제 없이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할 지도자로 출발하는 마당에는 상황에 이전과는 전혀 달라진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개인이 아닙니다. 그는 지도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에 앞서 모세에게 더 큰 성결을 요구하셨습니다.
오늘날 더 크게 주의 일을 감당하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서는 더 큰 성결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적당하게 살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이제는 과거와 같은 생각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이전에는 잘 되더니 왜 지금 안 되느냐고요? 더 큰 일을 맡기시기 위하여 준비케 하심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지금 깨닫고 수술해야 할 부분을 수술해야 합니다. 잘라내야 할 부분을 잘라내야 합니다. 그후에 비로소 더 큰 일을 주께서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4.의식을 소홀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가 없어도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나면 이스라엘 민족일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로 모세를 죽이려고 까지 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의식도 중요하게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할례가 이스라엘 백성됨의 표를 몸에 지니는 것이라고 한다면 세례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됨의 표시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의식을 귀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례받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찬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은 떡과 포도주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의식에서 사용되는 떡과 포도주에 주님의 살과 피라는 의미를 부여하셨습니다. 그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일은 곧 주님의 살과 피를 마시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이 일을 잘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성경은 그들 중에 병든 자가 많고 일찍 죽는 자들 까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고전11:30"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 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5.깨닫기만 하면 즉시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와 십보라는 죽음의 위기에서 즉시 깨달음으로 위기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때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많은 문제들이 이와같이 깨달을 때 해결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의 가정은 평소에 말씀이 있던 가정으로 보여집니다. 즉시 자신의 가정의 문제가 할례에 있다는 것을 서로가 알아 차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말씀 안에서 늘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당장에 해결해 주실 문제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보다 중한 것
본문: 출 4:24~26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십니다. >
오늘 본문은 난해합니다. 성경에 해석하기 어려운 본문들이 몇 있는데, 오늘 본문만큼 어려운 본문도 흔하지 않습니다. 요즘 새벽기도회 때 출애굽기를 읽어 내려가는데, 흐름이 끊기는 부분이 바로 이 본문입니다. 마치 불필요한 내용이 삽입돼 본문의 흐름을 방해하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오늘 본문의 전후 맥락은 이렇습니다. 미디안 광야에서 40여 년 동안 양떼를 치던 모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고, 당신이 누구신가를 모세에게 알리셨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을 내가 들었고 애굽인의 학대를 내가 보았으니,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겠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명료하고 구체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차근차근 모세에게 자신의 계획을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좀처럼 애굽으로 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갑니까?”라고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라고 약속하시며, 애굽 왕 바로 왕 앞에 설 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나 모세는 “누가 나를 보냈냐고,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까?”라며 연달아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나는 여호와, 나는 야훼,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시며, 당신의 이름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자 모세는 다시, “나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는 것을 그들이 믿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이는 모세의 핑계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세 가지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첫 번째는 모세의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모세의 손이 나병에 걸렸다가 낫게 되는 기적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나일강 물을 떠서 땅에 뿌리니 피가 되는 기적을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세는 또다시 자신은 혀가 둔하다며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보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진노하시며 이미 아론이 모세를 만나기 위해 오고 있으니, 그와 함께 가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승복했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인 이드로에게 자신이 애굽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드리고, 아내인 십보라와 자녀들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장면이 전개됩니다. 하나님이 돌연 모세를 죽이려 하시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4장 24절입니다.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출애굽기 4:24)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이 본문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그토록 공들여 모세를 부르시고, 설득해 내셨으며, 이제 드디어 모세가 길을 떠나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데, 왜 이 시점에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독자로서 우리는 이 본문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모세는 절대 안 죽지. 왜냐하면 주인공이니까.’ 물론 우리는 그다음 이야기를 잘 알고 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야기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말 모세를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 우리 삶의 주인공은 ‘하나님’입니다. >
소망교회에 부임한 후로는 거의 방송 매체를 보지 못했는데, 이전에 시간이 날 때 종종 TV를 보곤 했습니다. 제가 주로 즐기는 장르는 스포츠였습니다. 드라마보다는 스포츠 보기를 좋아하는 편입니다. 드라마는 언제나 주인공이 있고, 그 주인공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래서 때로는 ‘너무 편파적이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주인공 중심으로만 전개되어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스포츠는 매우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지곤 합니다. 누구든 주인공이 될 수 있고, 언제든 주인공이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공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손흥민이 주인공이 될 때가 있는가 하면, 전혀 다른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포츠는 늘 흥미롭고 짜릿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을 드라마나 소설의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는 분명 죽지 않을 것이고 승승장구해야 합니다. 모세가 주인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포츠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 모세가 갑자기 부상을 당해 실려 나가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레드카드를 받고 퇴장당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이야기는 종잡을 수 없는 신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인간의 영역에서 본다면, 마치 스포츠를 보는 것처럼 주인공 같은 사람도 한 번의 실수로 역사에서 퇴장당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충분히 설득하셨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습니다. 모세를 보내게 된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제부터 모세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부터 모든 일은 모세를 중심으로 전개될 것 같은 암시가 진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바로 그 순간에 긴장이 조성됩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으로 이제 막 캐스팅된 모세를 죽이려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이 내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신학대학교에 입학할 때쯤 저에게는 죽음의 공포가 상당했습니다. 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저를 신학교에까지 이끌어 주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간 뒤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찾아왔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이곳까지 왔으니, 적어도 하나님이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까지는 나를 죽이지 않으실 거야.’라는 안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인공적인 사고는 그해 여름,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여름방학에 어느 선배님이 교회학교 수련회를 갔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는 대신 죽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두 슬퍼했고, 정말 많이 힘들었습니다. 저는 그 사건을 접하면서 다시 두려움이 일었습니다. ‘이곳도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아니구나.’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웠습니다. 저 나름대로는 죽음을 피해 왔는데, 신학교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런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 사람을 구하고 대신 죽는 건 하나님 앞에서 귀한 일이니, 그런 죽음까지는 하나님이 신학생에게도, 목회자에게도 허락하시나 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처럼 헌신하는 사람들에게는 형편없는 죽음을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이렇게 또 다른 주인공의 관점에서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하지만 그와 같은 생각도 그해 겨울방학이 끝날 무렵,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어느 신학생이 하숙집에서 그만 연탄가스 노출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이었고, 정말 가치 없어 보이는 죽음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러한 죽음이 거룩하고 성스러운 헌신을 하는 신학생에게까지 허용된다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습니다.
그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죽이실 수 있는가? 하나님에게 유용하고 가치 있는 사람들조차 하나님은 버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독실하게 따르는 이들도 버리거나 죽음으로 몰아내실 수가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YES”였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목회 현장에서 교우들을 돌보면서도, 주연과 같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는 모습을 여러 번 지켜봐야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그들의 죄의 결과라거나, 문제가 있어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종종 그렇게 그들을 데려가곤 하십니다. 아마 여러분에게도 그런 경험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면에서 매우 결정적인 자리에 위치합니다. 없어야 할 자리가 아니라, 불연속의 자리가 아니라, 사실은 매우 중요한 ‘연속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모세를 주인공으로 본다면, 오늘 본문은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어떻게 주인공 모세가 죽을 수 있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주연으로 보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르게 전개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곳에서 모세가 죽었다면, 하나님은 또 다른 사람을 선택해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셨을 것입니다.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의 주연은 모세가 아닙니다. 주연은 하나님입니다. 여호와, 야훼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열심히 설득하고 달래셔서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모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고 달려드십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모세는 나에게 유용한 일꾼이지만, 내가 모세에게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스스로 원인을 만들고, 스스로 결과를 만드는 자다. 나는 야훼다. 나는 여호와, 내가 주인공이다.”
< 하나님의 사역자는 하나님 앞에서 ‘정체성’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
오늘 본문은 특별히 주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들에게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일을 하면서, 내가 주인공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우리는 질그릇이고, 때로는 토기장이가 얼마든지 부숴 버릴 수 있는 토기일 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러하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읽어가며, ‘이곳에서 실제로 모세가 죽을 수도 있었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주인공은 모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모세를 어떠한 이유로 죽이려 하셨던 것일까요? 이후 이야기의 흐름을 살펴보면, 그 내용이 ‘할례’와 관련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할례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하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그렇게 명령해 두셨습니다. 창세기 17장 10~12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창세기 17:10~12)
그렇다면 모세는 할례를 받았을까요? 태어나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어머니의 품에서 자랐으니, 당연히 할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바로의 공주가 아이 모세를 보고 ‘히브리인’으로 바로 알아볼 만큼,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상한 점은,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세의 아내 십보라가 아들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서 몇 가지 정리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십보라가 그 순간, ‘할례’를 시행해야 함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십보라가 할례 베풀 생각을 했을까?’라는 질문을 갖게 됩니다. 오늘 본문 25절입니다.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남편이로다 하니 (출애굽기 4:25)
본문의 흐름에서 우리는 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의 두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그때까지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이스라엘 자손은 태어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세의 아들 중 적어도 한 아들은 할례를 받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보라는 어떻게 할례를 알았으며, 또 어떻게 할례를 시행하는 법을 알았고, 할례 베풀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게르솜’이며, 둘째는 ‘엘리에셀’입니다. 아마 모세는 첫째 아들 게르솜을 낳은 후 할례를 행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장 21절 이후를 보면, 모세가 미디안 사람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아내로 맞이한 후에 게르솜을 낳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태어난 아들에 대한 기록이 그곳에는 없습니다. 둘째 엘리에셀의 이름은 출애굽기 18장에 가서야 등장합니다. 아마 게르솜을 낳고 오랜 후에 둘째 엘리에셀을 낳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모세는 미디안에 왔을 때, 처음엔 자신이 히브리인이며,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임을 잊지 않았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첫째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40여 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의 믿음,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은 점차 희미해져 갔습니다. 또한 그의 아내인 미디안 여인 십보라는 오랜 기간 모세를 통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해 들은 바는 있었지만, 선뜻 하나님을 따르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할례의 경우 첫 아들 게르솜에게는 할례를 행하도록 놓아두었지만, 그 아들이 피 흘리는 모습을 본 후 십보라의 마음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십보라가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아들의 포피를 잘라내는 할례를 거부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황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십보라가 아들의 포피를 잘라 할례를 시행했습니다.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떠나려는 바로 그때, 정작 그의 가정은 온전한 이스라엘의 자격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정황 가운데 하나님이 모세를 죽이려 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다른 이의 포도원을 돌봐야 하는 바로 그때, 정작 자신의 포도원은 지키지 못한 꼴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와 모세의 가정의 문제였습니다.
< 사역에 앞서 자신의 ‘신앙’과 ‘가정’을 돌보아야 합니다. >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이후 대대로 할례를 받아 내려오던 주님의 백성, 곧 주님께 선택된 백성입니다. 바로 그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고 애굽을 향하던 모세였지만, 정작 그 자신이 가정을 돌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백성의 표지인 할례를 아들에게 시행하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점을 짚고 넘어가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자신의 가정을 주님의 신앙 안에서 잘 돌보며, 양육하기를 원하십니다. 때때로 우리는 밖을 돌보는 일은 감당하면서도 내 가정, 내 자녀들은 신앙 안에서 바르게 세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합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디모데전서 3:5)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디모데전서 3:12)
모세는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못했기에, 하나님께 버려질 수 있는 위기에 처합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모세가 아들에게 할례를 시행하지 않은 건 이미 오랫동안 지속된 일인데, 하나님은 왜 그동안 그 문제를 덮어두시다가 이제야 들추시는가?’ 다시 말해, ‘인간이 저지른 죄악, 허물의 행위와 행위에 대한 심판, 혹은 계수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적 차이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세가 아들에게 8일 만에 할례 베풀지 않은 것을 즉각 9일째에는 문제 삼지 않으시더니, 시간이 한참 경과한 후 곧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려는 그 순간에 문제 삼으신 것입니다. 왜 이런 간격이 생기는 것입니까? 왜 그토록 오랫동안 벌하지 않으시다가 이제야 진노하시는 것입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자유이며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하나님이 심판과 계산을 미루시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영역이며, 인간에게는 도리어 은혜로 작용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부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심판하거나 인간의 허물에 죄를 물으실 수도 있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즉 오늘 본문에서도 하나님은 더는 기다릴 수 없을 만큼, 한계점에 이르기까지, 모세의 가정의 불신앙을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십보라의 불신앙도 기다리고 계셨고, 아들을 할례 하지 않은 모세의 미온적인 태도도 인내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이자 자비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화살은 이미 장전되어 있습니다. 그 화살은 이미 우리의 심장을 겨누고 있습니다. 화살이 여러분의 심장에서 분출하는 피 맛을 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께서 기쁘신 뜻을 따라서 아무런 약속이나 의무감 없이 발사를 억제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이러한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죽이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죽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얼마든지 순간적으로 죽이실 수 있었지만, 그 시간 사이에 중간의 시간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 사이에 ‘중재의 시간’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십보라에게 시간을 주시며 기다리셨습니다. 아니, 십보라로 하여금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도록 초청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시간은 모세의 가정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선하신 일을 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주님의 대사요 일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먼저 주님의 자녀로 바르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가정이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가정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리, 우리의 ‘가정’입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그 어떤 사역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믿음, 우리 가정의 ‘믿음’입니다.
가정의 달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우리 가정을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인내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 가정이 주님을 온전히 섬기는 가정이 되길, 우리의 모든 자녀가 영적인 할례를 받고, 주님의 진정한 자녀들이 되기를 하나님은 지금도 기다리십니다. 하나님께 믿음으로 응답하는, 십보라와 같은 결단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