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7-11 아브라함의 장례식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를 생각하며 삽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신분으로 사는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사는 자 인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 자 인가?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후대 인들에게 무엇을 전수해 주어야 하는가? 를 생각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 값없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 흠도 티도 없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는 자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히 여겨주심 때문에 숫한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또한 숫하게 드러나는 연약함과 부족함을 교정 받고 새롭게 함을 받아서 살아가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아브라함은 우리와 성정이 꼭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멸망의 도성이라 할 수 있는 갈대아 우르로부터 끌어내십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의 전기를 기록할 때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부름을 받자 마자 그의 신앙이 아무런 동요도 받지 않고 일취 월장하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생활이 승리하는 생활의 연속이였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심한 기근과 생명의 위협 앞에서는 그는 여전히 연약한 나그네 인생이었다고 합니다(12:10-13). 그밖에도 그의 생애는 부정적인 생애의 연속이었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를 총괄할 때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따라 말씀을 따라가는 생활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순종하는 생활이었다고 말씀합니다.
1. 본문 7절은
“아브라함의 향년이(이것이 날들이라-칼빈 사역) 일백 칠십 오세 라” 입니다.
1) 모세는 이제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의 나이에 관해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그것이 그가 나그네의 길을 걸었던 연수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여정을 생각할 때에 그의 경이적인 인내심은 찬양을 받을 만합니다. 그는 100년이란 긴 기간을 하나님의 약속만 믿고 생사간, 어디로 인도하시든 방황해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불과 일 이년간의 불안을 참지 못하여 애쓰는 자들은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겠습니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도 100년 동안 나그네로 지냈을 뿐 아니라 때로는 유랑 생활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또 한편 모세는 하나님께서 자기 약속을 지켰다는 점을 명백히 밝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약속이란 바로 ‘네가 장수하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그의 일생이 고생스럽고 어려운 시련을 겪어야 했지만 그 속에 있는 위로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고난이 많았지만 그는 자기 생애가 하나님의 염려하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몹시 사나운 풍랑이 일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괴로움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런 번민이 많았습니다. 때로는 엄청난 재앙 속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써 생을 지탱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사는 날 동안 결코 피곤하여 지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위안으로 힘을 얻어야겠습니다. 즉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생의 행복한 결단을 약속해 주셨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해야 되겠습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약속보다 훨씬 더 영광스런 것이란 점을 믿고 의지해야겠습니다.
2. 본문 8절 상반절은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입니다.
이 말씀은 그가 오랜 질병으로 쇠약해 온 것이 아니라 고통 없이 갑자기 죽은 것을 뜻한다고 보는 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못입니다. 오히려 모세는 신앙의 조상도 인간 공통 운명에서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겉 사람이 후패하더라도 마음에 망설임을 갖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희망의 목표로 주어져 있는 삶의 온전한 갱신, 곧 부활을 생각할진대, 이 부서지기 쉬운 육신의 장막이 무너진다고 하여 마음에 요동할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약하고 쇠진하여진 몸, 어두워진 눈, 떨리는 손, 그리고 쓸모 없어진 지체들 때문에 마음이 너무 상한 나머지, 우리의 조상의 본을 따라 즐거움과 또 민활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지 못할 이유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에 따라서 늙어 죽었지만, 모세는 그 직후에 그의 죽음과 무수한 사람들의 죽음의 방식 사이에 있는 차이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좋게 혹은 거룩한 방식으로 나이가 많아져서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복하여 주신 삶에 만족했다’ 고 했습니다. 물론 사실상 때로는 불신자도 똑같은 복을 누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로 다윗은 불신자가 장수하는 면에 있어서는 신자보다 우세하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리고 욥기에도 비슷한 불평이 나옵니다. 즉 불신자들은 무덤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행복하게 살다가 육안으로 볼 때에 평안히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하는 시73:4절과 ‘그 날을 형통하게 지내다가 경각간에 음부에 내려가며’ 라고 하는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욥21:3절 참고). 그러나 좋게 혹은 거룩한 방식으로 된 장수의 주요 부분은 좋은 양심과 평온한 마음에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은 의를 진실로 수양한 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플라톤도 똑같은 진리와 지혜로써 말하기를, 좋은 희망이 장수의 음식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죄책감을 지고 있는 연로한 자들은 사실상 괴로운 고문을 받고 있는 것이요, 내면적으로 영원한 고문으로 시달리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덤에 가기까지 행복하게 장수하도록 하는 것은 경건생활의 복이요, 신앙생활의 복입니다. 신앙이란 바로 평온한 마음의 보존자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이유로 ‘그가 수가 높고’ 라고 한 말씀은 그가 오래 살았으므로 더 이상 생의 연장을 바라지 아니했다는 사실을 뜻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거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현재 삶의 권태감과 삶의 계속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욕망 사이에서 번민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렇게 지상 삶에 대하여 싫증을 느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총이요 그러한 은총을 받으면 삶을 기꺼이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여기서 말할 수 있는 지상 삶에 대한 싫증이란 성경이 아브라함에 대하여 설정하는 바 “하나님의 도성” 곧 영원을 사모하는 그의 신앙의 단면입니다.
3. 본문 8절 하반절은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입니다.
이 말씀 속에 우리 미래 삶의 상태가 지시되어 있었다고 믿는 자들의 견해를 우리도 수락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주석가들의 견해대로 그러한 사실을 신앙인들에게만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 말을 통해서 인간이란 삶 속에서는 물론이요 ‘죽음’ 에 있어서도 서로 모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짐승들이 죽을 때는 이런 표현이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형식의 말에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점은 인간이란 죽음에 의해서 무로 전락하거나 전인이 죽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는 가운데 또 다른 상태를 지적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전인의 파멸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은 사람들은 양떼처럼 무덤으로 모여 들어간다고 말씀한 것이 불신자들에게는 이상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표현을 보다 자세히 검토해 본다면 사람의 영혼이 멸절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이같이 죽은 사람들이 다시 모이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시49편). 그렇다면 즉시 아브라함의 장례식에 대한 다른 말씀이 나왔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조상들에게로 모여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인간 생명이 끊어졌을 때 사람이 무(無)로 돌아간다는 생각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성경은 생명의 다른 상태가 사후에 존재한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떠남이 전(全) 인간의 파멸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바르게 알아야겠습니다.
4. 본문 9-11절은
“⑨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⑩ 이것은 아브라함의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
⑪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하나님이 그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은 브엘 라해로이 근처에 거하였더라” 입니다.
1) 아브라함이 죽자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 장례를 주관하였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이 비록 이미 오래 전에 아브라함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와 완전히 결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은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르는 아들의 직책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다른 아들들보다는 그가 더 가까웠으므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의 무덤은 그가 살았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창18:1 참고).
그곳은 “마므레 앞 헷 족속 소알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곳은 그가 생전에 값을 지불하고 산 것인데, 이것도 그의 신앙 족적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가 그곳에 장사되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소망하였던 가나안 땅, 곧 하나님의 영원한 도성을 바라고 살았던 표적이었을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아브라함의 장례는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심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계통을 따른 신앙의 계승자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살도록 은혜와 신령한 복을 주셨습니다. 고 김창수 장로님의 유족들에게 이 같은 은혜와 신령한 복 주시기를 소원합니다.